2023년 2월 6일 오전 10시
남양주 천주교 창현성당 미사 강론
본문 마르코 복음 6:53ㅡ56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의 본문에는 이스라엘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눈앞에 보이듯 펼쳐지고 있습니다.
밑바닥 사회에서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도 이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병이 든 사람은 사회생활이 어렵게 된 사람입니다.
병들었다는 말은 얼마 안 있어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더 절박합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연민이 많은 힘 없는 민중들이 함께 살기 위해 온 지방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데려옵니다.
예수님을 찾아다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이미 공동운명체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병을 치료해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열기가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해 재현되고 있습니다.
저의 사목 초년생 시절의 얘기입니다.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시골성당에 발령 받고 몇 해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자들이 귀신들렸다는 중년여성을 데려왔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교인 집안의 며느리인데 무당이 되려고 100일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무속에서도 탁한 음식으로 간주하는 보신탕을 먹은 이웃이 집안에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무당이 못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흘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발악을 하며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갈 수도 없을 정도로 성정이 사나워서 군인들이 총을 겨눈 상태로 트럭에 태워서 왔습니다.
그녀의 아들이 인근 증평에 있는 11공수에 방위병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사령관이 그 집안의 딱한 사정을 듣고 병력지원의 편의를 봐 준 모양이었습니다.
신자들은 그녀를 교회로 데려오는 것에 대해 찬반으로 의견이 갈려서 마지막 순간까지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랫마을 장로교 목사님이 귀신을 쫒아 낸다고 호언장담하며 동네 청년을 예배당 한가운데 앉혀놓고 축마기도를 해준답시고 하다가 도리어 귀신의 기에 눌려버리는 통에 교회당 경내를 뱅뱅 돌며 엄청 얻어 맞았고, 결과적으로 귀신에게 영적으로 패배한 모양새가 되어 교회에서 떠나게 된 전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이 억센 여인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압도당하면 영적 권위가 떨어져서 사목을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사제생활을 접어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신자들 사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트럭에서 내린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몸집도 왜소했지만 매우 단단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신자들과 군인들에 둘러싸인 그녀의 머리에 안수기도를 하려고 내가 손을 얹으려다가 거부하는 그녀의 팔목이 내 팔목을 후려쳤는데 마치 쇠막대기로 맞은 듯 충격이 컸습니다.
화가 난 저는 억지로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며 반항하는 그녀와 힘겨루기 양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찬송가를 부르자며 해당 페이지를 찾고 있는데 그녀는 벌써 책도 보지 않고 찬송가를 선창하고 있었습니다.
겁에 질린 신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어 서둘러 정해 둔 복음을 읽으라고 신자회장에게 일렀습니다.
그녀는 성경을 다 외우고 있다는 듯 조롱하는 투로 빠르게 먼저 입술을 열고 있었습니다.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문맹으로 전해 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저는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저는 그녀와 결코 밀릴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을 다 불러 교육관에서 함께 생활하게 하며 그녀가 발작할 때마다 머리에 손을 얹고 귀신을 불러내 쫒아냈습니다.
신기하게도 귀신들은 어디에 살던 누구라고 자기소개를 하며 그녀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귀신이 떠날 때마다 그녀는 심한 악취를 내거나 거품을 물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한번은 무당으로 살았다는 그녀의 어머니가 귀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머니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왜 딸을 죽은 뒤에도 못 살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냐고 꾸짖으니 사위가 미워서 못 나간다, 시어미가 미워서 못 나간다며 핑계를 댔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서 나간 귀신의 총 숫자가 쉰 명이 넘어갔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두 달 가까이 교육관에서 기거하며 제 정신으로 돌아왔고 가정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그녀와 교육관에서 지내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밥을 양껏 실컷 먹었는데도 엄청난 양의 빵을 또 먹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 물으면 자기 혼자 먹는 게 아니라 제 속에 있는 다른 식구들까지 다 먹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신자들은 귀신을 잘 쫓는 영험 있는 사제가 부임해 왔다며 동네방네 소문을 냈습니다.
이번에는 애기동자 귀신이 붙었다는 여성을 교회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동네에서 제일 부짓집 안방마님인 그녀는 갓난 아이 색동저고리를 장날 시장에 나가서 사 가지고 와서는 그 작은 옷을 자기가 입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남편이 직접 아내를 모시고 왔습니다.
동네 창피해서 부부로 못 살겠으니 제발 귀신을 쫒아내 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녀를 다시 교육관에 머물게 하고 신자들과 함께 집중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귀신의 형체를 볼 수는 없지만 목소리는 다 다릅니다.
나가라고 소리치고 위협을 하면 반항도 하지만 결국은 도망치듯이 그녀에게서 떠난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또 귀신을 쫓아내 주면 결과적으로 은헤를 갚는답시고 우리 교회 교인이 되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들과 떠들썩하게 힘을 모아 함께 하는 축마기도가 전도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귀신 때문에 시끄럽던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잠잠해진다 싶더니 또 다시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나오기 시작한 신자의 남편이란 자가 미사 중에 문을 발로 차며 뛰어 들어와서는 아내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끌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끌고 나가려는 남편과 성당에서 안 나가려고 버티는 신자를 몸으로 가로막고 야단을 쳐도 늘 만취 상태에 있는 위인인지라 말이 안 통했습니다.
그야말로 먹고 놀면서 하루종일 집에서 소리만 지르는 알코올중독자였습니다.
아내가 그런 남편에게 평생 시달리며 살다가 그나마 위안이 될까 해서 교회에 출석하는데 그걸 그리도 악착같이 방해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문을 열고 방에서 나가려다 문틀 위쪽 모서리에 눈썹뼈를 부딪쳐 피부가 찢어졌는데 그 부위가 아물지가 않아서 피가 계속 쏟아졌습니다.
레이저로 지져도 안 되고 수술로도 지혈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상에 누워있으면 이마의 상처에서 뻗는 피가 벽을 적실 지경이었습니다.
마침 적십자에 근무하던 친구 목사가 요긴하게 쓰라고 건네준 헌혈증이 100장 정도 저에게 있었습니다.
환자에게 10장의 헌혈증을 건넸습니다.
받은 헌혈증은 금방 다 써버렸습니다.
출혈이 워낙 심해 그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두세 장 더 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아까운 헌혈증을 그렇게 의미 없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쓸 수는 없었으므로 이제 그만 하늘나라에 갈 준비를 하라고 남편에게 통고했습니다.
그 집 살림살이도 몹시 어려운 형편이라 더 이상 병원비를 댈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혹시라도 지옥이 있을지 모르니 보험 든다고 생각하고 세례를 받아 두는 게 어떠냐고 선심 쓰듯 제안했습니다.
그는 두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세례를 주고 종부성사까지 베풀고는 돌아왔습니다.
부인에게는 남편을 곧바로 퇴원시키고 숨이 멎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일렀습니다.
남편이 금방 죽을 것으로 예상하고 교회에서도 장례준비를 다 마쳤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대기상태로 계속 기다리다 지쳐서 전화를 했더니 집에서 기적처럼 출혈도 멎고 상처도 아물어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도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금방 죽을 것 같던 그는 6개월이나 더 건강하게 잘 살다가 장날 국밥집에서 술꾼들과 시비가 붙어 서로 밀고 당기며 승강이를 벌이다 드잽이 끝에 땅바닥에 머리를 찧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와서 동네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의 이마에서 쏟아지던 피가 기적처럼 지혈이 된 이후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귀신만 잘 쫒는 게 아니라 기도만 하면 병이 낫는 은사를 받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치유기도를 받았는데도 병이 낫지 않으면 괜히 웃음거리만 되니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 겸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동네사람 중에 아픈 사람들을 이끌고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지역 사람들이 찾아오고 한 달이 못가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졌습니다.
교회에 난치병에 걸린 중증환자가 몰려왔습니다. 대략 20여 명 정도가 매일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사목이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일인 줄 몰랐다고 해야 할지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하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치유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부항도 떠주고 감자찜질도 해 주었습니다.
꽤 넓은 교육관은 몰려든 환자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덩달아 내 양복 안주머니에도 봉투가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받고 돈을 봉투에 넣어주지 않으면 병이 재발한다는 환자들끼리 통하는 속설이 있다고 했습니다.
봉투에는 적어도 만 원짜리 한 장 이상의 지폐가 늘 들어 있었습니다.
비어 있던 지갑에 갑자기 돈이 넘쳐나니 저는 저녁마다 인근에 친하게 지내던 목사들과 지인들을 불러 충북 깊은 산골에서 먹기 힘든 비싼 생선회를 비롯해 고급안주에 양주파티로 기분을 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꿈처럼 지나갔습니다.
아침에 술이 덜 깬 상태로 새벽미사를 집전하는 나날이 계속되자 신심 깊기로 마을에 정평이 나 있는 우리 교회 신자회장이 저를 따로 만나자고 찾아왔습니다.
근심이 가득 한 얼굴로 그는 말했습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오기 때문에 병을 힘들게 고쳐줘 보았자 결과적으로 우리 교회 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니 괜히 헛심만 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갖 난치병 환자들이 드나드니 교회가 앓는 소리로 인해 너무 시끄럽고 정신 사나워서 잘 되던 기도도 안 되고 교회 다니기도 점점 싫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신자들 전체의 의견이기도 하니 당장 치유기도를 그만 걷어치웠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품을 받으면서 신자들의 말에 순종하는 사제가 되겠다고 중인환시리에 굳게 약속했는데 환자치료라는 명분은 있지만 계속하겠다고 무작정 우기기도 어려웠습니다.
병을 고쳐주어서 고맙다는 분도 꽤 있으니 잠시 판단을 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냉철하게 영분별을 해서 결단을 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신자회장이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 월급 호봉이 26만 원 정도인데 환자들이 갖다 주는 봉투로 들어오는 돈이 매일 20만원이 넘어가니 한 달이면 도대체 얼마가 되는 겁니까?
대충 따져도 육백만원입니다.
어쨌든 기도만 하면 병이 낫는다는데 왜 이걸 그만두어야 하냐고 속에서 볼멘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치유기도를 받은 환자들이 병이 나았다며 춤추며 돌아가지만 한편 저에게도 무언가 찜찜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왜 병이 낫는지 어떤 무엇이 작동해서 병이 낫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저에게서 무슨 기운이나 에너지가 나가는 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기도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귀신을 쫒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귀신이 순순이 나가는지 무엇 때문에 나가는지 선명하게 이해가 되도록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나도 남도 얼렁뚱땅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마음 한구석에 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쏟아져 들어오는 봉투로 금준미주에 빠진 탓도 있고, 돈 욕심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복잡한 생각에 쉽게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심 끝에 스승인 이현주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현주형은 길어지는 제 이야기를 30분 넘게 끝까지 다 들어보시더니 딱 한 마디만 했습니다.
“언제까지 병만 고치고 있을 거냐? 공부는 안 할 거냐?”
어차피 제가 공부하는 체질도 아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종교의 본질로 다시 돌아가야 되는 것 아니냐는 간곡한 권면이엇습니다.
그 공부라는 게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목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하는 ‘성경 깊이 들여다 보기’ 외에 ‘노자 장자 불경 공자’등 타 종교 경전공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하던 대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간단히 답하고 나니 모든 게 분명해졌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를 받은 것도 같은데 이 ‘은사’가 저를 망치게 하고 무너지게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스승에게 본심을 들키고서야 그 일을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꼭 필요한 모양입니다.
저는 스승께서 제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도 부드러운 말로 저를 깨우치고 이끌어 주신 것에 대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다음날 아침.
“오늘 이후로 치유기도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환자들은 충격을 받은 듯 일제히 서러움에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지만 저는 신자회장의 충고에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귀신에게서 놓여났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병이 나았다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는 자신의 중심을 붙들고 가누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진다는 ‘은사’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귀신 쫓아주겠다 병 고쳐준다고 하면서 의욕을 부리다가 사람을 죽게 하거나 크게 다치게 해서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은사활용’이라는 명분으로 행했던 사목의 한바탕 시행착오가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날이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게 않게 되어서 너무 잘 되었다고 그동안 참아왔던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저도 다시 호봉 26만원에 맞추어 사는 처지로 돌아왔습니다.
잠깐이지만 두 달여 동안 흥청망청 부자로 살다가 궁핍한 삶으로 되돌아가려니 죽을 맛이었습니다.
이제 세월이 한참 흘러 하느님이 주신 축마와 치유 은사를 자랑하던 제가 저의 불편한 오른쪽 어깨와 팔을 치유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고마운 일은 제 어깨 통증으로 인해 아픈 사람들의 그 절박함을 같은 처지에서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의사가 아니신데도 가는 곳마다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신 그 마음도 이해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궁극적 지향과 목적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루가 9장 41절)라는 주님의 말씀도 납득이 가구요.
기도만 하면 병을 잘 낫게 해 준다고 한때 소문났던 저도 노인이 되니 환자이긴 매 한가지입니다.
39일간의 긴 단식을 해서 아프던 고관절이 다 나았다고 좋아 했는데, 이제는 또 어깨가 아픕니다.
전업으로 글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어깨와 팔목 관절이 아픈 고질병에 걸린다더니 저도 그 정도로 글을 많이 쓰는 형편도 아닌데 어깨가 고장이 났습니다.
어깨만 안 아프면 너무 좋겠다고 매일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른쪽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산음소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병을 고쳐주시긴 했지만 병만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약자들도 가난한 이도 많이 가진 자와 마찬가지로 사람 대접을 받으면서 평등하게 잘 사는 정의롭고 형제애에 넘치는 사회를 만들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저의 실패담을 통해 주님께서 마다하지 않고 병을 고쳐주신 뜻이 온전히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