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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בָּלָק 발라크" : 토라포션 in 5782
민22:2-25:9(To), 미5:7-6:8(Haft), 롬11:25-32(Brit), 엡1:1-6:24(신약)
화요일(셋째 날) 정여호수아 형제
민22:21-38(To), 엡3:1-21(신약)
* 신약성경
엡3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오늘 신약성경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즉,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 옷 입는다는 것이죠.
빈인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일 수록 더 가난하게 되고, 재산이 많은 사람일 수록 더 부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코로나를 겪고, 돌아가는 세계정세에 따라서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가고 있는데요, 뉴스를 접해보면 부동산, 주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일 수록 더 많이 취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없는 사람들은 더 없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대비됩니다. 이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풍성함 가운데 있는 걸까요?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세상과는 반대되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관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풍성함을 히브리어로 רב 라브라고 합니다. 라브는 랍비라는 말도 되지만, 또한 뒤집으면 바르, 아들이 됩니다. 작은 자의 하나님, 지극히 작은 우리에게 오신 아들 그리스도, 우리에게 오신 것은 전적인 은혜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풍성함입니다. 왜냐하면 수단되신 그분이 우리에게 아들로, 선생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살아야 할 진정한 삶을 가르쳐주시는 분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의 삶만이 오직 지극한 풍성함입니다.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성경은 이미 다 우리의 삶을 앞서 예비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의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절체절명의 시즌에 어떻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물며 어떻게 이것이 영광이 되는 것일까요? 아브월 9일, 성전 파괴일이 있기 전, 탐무즈월에 도입한 우리에게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탐무즈월과 아브월은 일년 중 부정적인 힘이 가장 강한 달들이라고 하십니다. 환난은 말 자체가 부정적이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영광, כבד 카보드가 됩니다. 바드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개별의 삶에서 이웃과 실제로 연합/결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정, 환난, 낙심을 통해서 우린 개별을 적용할 수 있는, 실제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Reality의 세상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정의 힘이 가장 강한 달 탐무즈월에, 우린 그만큼 더 강한 주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의 머리이며, 그것이 나의 창조의 시스템이라는 사실과 아버지와 아들은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영원의 관계를 맛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 부정[不淨]한 자, 부정[父情]을 알다 >
: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정
민22:2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בלק 발락 = 소망이 없다 // 발.락[樂], 즐거움이 없다.
בל 발 : ~이 없다
כָּל־אֲשֶׁר־עָשָׂה יִשְׂרָאֵל לָאֱמֹרִי 콜 아쉘 아싸 이스라엘 레아모리; All that(행복) had done
아모리 : 나의 말
아쉘 : 행복, 관계 대명사 that
아모리인들은 나의 말로 가득찬 자들을 말한다. 사용하는 언어의 모든 방향성이 "나"를 향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는 이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발락이 무엇을 보는가?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이다. (설명) 즉, 발락이 이스라엘이 모든 행복, 그 관계 짓는 것을 아모리인에게 행한 것을 본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이 행하는 것은 바로 관계 맺는 것이다.
나의 말로 가득차 있는 자는 누군가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지체들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하는 MBTI, 너는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하면 E 좀 소극적이면 I 로 요즘은 많이들 나누는데, 사실 우린 다 I 다. 우린 누군과와 연결되고 관계 맺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피한다. 왜냐하면 관계 속에서는 내 말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아닌 상사와 부하, 이런 사이라면 일방통행이니 할 수 있겠지만, 관계란 서로가 상호작용하고, 교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고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이 결국 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관계는 아주 특별한 관계다. 바로 언약의 관계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세워진, 그 언약의 관계를 말한다. 이 관계 안에는 지극한 행복이 있다. 온 열방을 덮을 지극한 행복이다.
3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מואב 모아브 / 아버지를 만들어 냄, 육체를 전부라고 규정, 내가 아버지
모압이 심히 두려워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우리 육체에게는 심히 두려운 관계이다. 심히 라는 말이 מאד 메오드 라는 단어로 쓰였는데, 이것은 육체의 힘을 이야기 한다. 나의 육신의 어떠함, 내가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그 힘은 이스라엘이 두렵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두렵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성립이 되면 내 힘이 사라지고 난 죽을 것 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내가 아버지였는데, 이제 누군가를 아버지로 따라야 한다? 이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많아진다? 풍성해진다? 진퇴양난이다.
5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발락은 발람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나를 위해서 이 백성을 저주하게끔 하기 위함이다.
ארר 아라르 : 저주
이 저주란, 오르에다가 레쉬, 머리 하나를 더 붙여주는 것이다. 너의 머리가 있다는 것이다. 왜 너의 머리가 아버지여야 하냐? 너의 머리가 있다, 네 머리를 쓰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래 좋다, 그런데 왜 네 머리가 있으면 안되니? 너도 생각할 수 있고, 너도 이제 아버지가 될 것인데 머리가 있어야지? 바로 우리의 아주 근본, 예수님을 건드리게 됩니다. 오르, 빛일 때는 참 좋았습니다. 빛은 어둠에 드리우면 주변이 밝혀지고, 그냥 환하죠. 그 자체로 따스함이 드리우고,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데, 그 빛에 레쉬 하나가 더 붙게 되니 복이 아닌 저주가 되어 버린다.
아라르는 머리가 두개가 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있고, 저 생각이 있다. 하나의 생각에서 두 가지 생각이 나오는게 아니라 그 생각의 근원, 머리가 두개인 것이다. 육신의 머리, 영의 머리가 따로 나뉘어 우리가 요즘 이야기 하는 종교적인 삶을 살게 된다. 영적으로는 살다가, 또 세상과 타협하며 육신의 사고회로로 살아가고, 도대체 이 사람이 뭐에 목적인지, 목적이 두개이다. 이중적인 삶을 사는, 다중인격자가 되어 버린다. 사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다 다중인격으로 살아간다. 삶이 하나로 균일하지 않고, 이 삶, 저 삶, 다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마치 오늘은 이 삶을 살아야지 하고 들어가고, 내일은 저 삶을 살아야지 하고 들어가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 길이 없는 체 삶을 살아간다.
제가 작년에 딱 이 머리가 두개가 되었던, 저주를 받았던 적이 있었죠? 미국으로 가야 하는데 한국에 남아있기도 싶고.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싶어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져 죽을 뻔 했었죠. 한국에 있는 동안에 제 삶이, 전 에프라임이니깐 관계를 우호적으로 맺으며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을, 그리고 결합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안락한 삶,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내려두고 정말 딱 "관계"만 남아있는 삶으로 들어와라 하니 이게 못 들어가겠는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되자, 이 관계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영적인 만족도, 세상적인 만족도 둘 다 와야 하는데, 어느 한쪽만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이 육신이 너무 실제 같다. 영의 삶은 소망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심히 두렵게 된다. 결국 저주 가운데 임하게 되면 사람은 "자아", "에고"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전적으로 드러난다.
טמא 타메 : 부정 Impure --> 사람이 죽음을 만짐 (후카트) // 너도 생각할 수 있다, 너도 한 사람이다.
- Receive 받으려는 의지, 육체
우린 지난 주 후카트에서 부정한 상태에 대해서 배웠다. 죽음을 만지면 그 사람을 부정하다고 한다. 사람이 부정하게 되면 이웃과 하나되지 못한다. 한 예로, 얼마 전에 집 안에 있던 된장찌개가 부정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쓰레기도 버렸고, 설거지도 다 했는데, 온 집안을 감싸는 이 부정한 냄새, 어디에서오나 했더니 냄비에 담겨있던 된장찌개가 상해서 온 집안을 덮었다. 부정해지니 악취가 풍기더라. 정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악취였다. 죽음이란, 모든 소망이 이 육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육신의 행복이 곧 행복이고, 이 육신이 낳은 자식, 육신의 부모가 나의 부모이지 영적 부모는 다 허울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에 다가가 만지는 자들을 부정하다고 한다. 이런 자들을 악취난다고 한다.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지금, 발락이 발람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요청하는 것이다. 저들이 죽음을 만지도록 해라. 저들에게 머리를 하나 더 알려줘라. 육신의 것을 보게 해라. 그것이 실제라고 알게 해줘라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을 부정함 가운데로 넣으라고, 받는 의지를 극대화 시키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우린 다 모압이 되고 만다. 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요청한다.
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처음 발락이 발람을 불렀을 때, 하나님은 가지 말라고 하신다.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그런데 두 번째에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다. 그리고 너는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 것이라고 하신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제가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 정말 확정된 첫 출근이다. 이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된 배경도 사실 너무 할 이야기가 많다. 이 직장에서 총 두번의 콜링이 왔었는데, 첫 번째 콜링은 군대 전역을 앞두고 3-4개월 전쯤이었다. 이력서를 내고 그 당시 회사의 흐름으로 바로 취직이 될 것 같아 보였었지만 한주 두주 계속 미뤄지다가 제대가 코 앞에 다가왔었을 땐 언제가 될지 모르는, 무기한 기다림 가운데로 들어갔다.
7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처음에 발락도 발람에게 고위급의 사람들을 보내지 않는다. 장로들을 먼저 보내게 되는데, 처음에는 발람이 가지 않는다. 저 역시도 첫 콜링 때 그 밑에서 저를 이 회사에 엮어 주시려고 한 아저씨 한분이 계신다. 저와 한번도 일해보지 않았지만, 제가 그분의 아내분과 함께 일을 했는데, 그 아내분이 저를 좋게 보시고 남편분께 전달해서 그 남편분도 아내를 믿고 계속해서 저를 그 회사에 알리고, 그 회사 매니저한테도 알려주고, 막 열심히 "노력" 했었다. 취직을 하려고 하는 나보다 그분이 더 노력하셨었는데, 그게 잘 되진 않았다.
15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렇게 연락이 언제 올지를 모른채 기다리고 있는 어느날,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저를 엮어 주시려고 한 분의 직속상사, 더 높은 고관이죠, 실제로 고용을 할 수 있는 분이 직접 전화가 와서 출근을 바로 할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사실 그 당시의 전 이 회사에 취직 당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 뒤 방송실에서 베드로 형과 함께 하는 교회 생활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바로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고, 아버지는 출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 직장에 돈을 벌기 위해서 가려하지 말고, 그 직장을 통해서 너의 삶에 일어날 티쿤을 보아라.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 여기에서의 준행이 עשה 아싸이다. 뭘 행하느냐? 저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안락함이다. 한 장소에 머물러 안락해지면, 전 거기에서 계속 머물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게 바로 내 티쿤이라고 하신다. 너는 계속해서 그 안락함의 절벽에서 뛰어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다시피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려다가 나귀가 움직이지 않고 3번 거절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결국 발람 안에 들어있는 받고자 하는 의지를 다루시는 것임을 우린 배웠다. 이번 주간, 발락과 발람의 사건을 묵상하면서, 날 저 멀리 다시 애굽 땅으로 보내시는 연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었다. 겨우 저 애굽 평택 땅을 출애굽 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아이러니하게 나에게 함께 가라고 하시니 말이다. 그런데 이 뒤에 붙는 것이,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아버지가 내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속해서 숨겨져 있는 받고자 하는 의지, 내가 누리려고 하는 의지를 주님은 표면에 드러내신다.
22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여러분은 이 대목이 이해가 되시는가? 전 정말 이해가 안 됐었다. 분명 하나님이 같이 가라고 하셨는데, 2절만에 갑자기 진노하시니 말이다.
הלך 할라크 : 걷다. 가다
너의 훈련의 목적, 네가 그 길을 가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발람 안에, 주님이 이르는 말만 준행하지 않을, 내가 받고자 하는 그 의지를 주님은 드러내신다. 너가 발락에게 가는 목적이 내가 이른 목적이 아니라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בלעם 발람 / 백성이 없다
בל 발 : ~이 없다
עם 암 : 백성. With
그렇게 출근이 확정되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출근을 지금까지 거의 한달이 넘도록 막았다. 발람을 보면 발은 없다, 임, 암은 백성, 함께함인데, 정말 내 안에 함께함이 있는가? 내가 가는 목적에 함께함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진노하신다는 말이 아프인데, 아프를 뒤집으면 פא 페가 된다. 페는 Opening 개방 이라는 뜻을 지닌다. 새로운 여정을 걷는 그 삶이, 새로 열리는 그 삶의 목적 가운데 함께함이 있느냐? 함께함, 백성.. 우리는 하나의 개별로, 단독자로 보내지는 것이 아닌 한 이스라엘이 보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놓이는 것은 나 개별로 그 상황 가운데 놓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연결된 한 이스라엘, 콜 이스라엘, 전체가 그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다. 절대 우린 이 여정을 홀로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는 여전히 이 새로운 여정을, 지금 내가 취직한 직장을 가는 것을 개인적으로,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내가 가서 고생하고, 내가 일하고, 돈 버는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내 가족 잘 먹고 잘 입히고, 잘 살게 하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또 내 삶에 내 육신의 열매를 맺으려 하는구나, 그것이 내 안에 뿌리 깊이 숨겨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에프라임의 티쿤, 전체 가운데의 티쿤, 하나님이 보내시는 그 목적이 사실 나의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목적이 나의 행복이 아닌, 난 나의 육신이 잘 살게 될 그 행복을 상상하는, 머리가 두개인 저주 가운데 있었다.
בלבל 빌벨 : Confusion, 혼돈 = without form תתו 토후
בל 벨 : 바벨론 신의 이름 <----> לב 레브 : 마음 (훈련된 시스템, 우리의 삶의 전체를 기반) : 이론
- 깊은 생각, 아이디어, 체계적, 논리적 --> 나를 위해서 = 혼돈
발락과 발람의 두 앞글자를 따면 빌벨이 된다. 혼돈이라는 뜻이다. 소망 없는 자, 함께 함이 없는 자의 결국은 혼돈이다. 이 혼돈은 어떤 형체가 없다. 무질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 내 존재는 뭐지? 나는 뭘 위해서 살아야 하지? 난 무슨 삶을 산 거지? 우리 안에 이것이 다뤄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가, 열심히 평택으로 왔다갔다 출근을 하다가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벨은 또한 바벨론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를 위한 신이다. 그 벨을 뒤집으면 레브, 마음이 되는데, 결국 내가 훈련하는 시스템은 바로 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우리의 삶의 전체를 기반으로 한다. 내가 하는 깊은 생각, 아이디어, 내가 알고 있는 논리는 다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의 끝은 혼돈뿐이다. 세상은 코로나 기간에 다 나를 위해서 이웃을 배척했고, 거리를 뒀고, 그렇게 공동체와 단절되서 스스로를 고립 시켰다. 그 실제가 혼돈으로 나타난다.
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עמלק 아말렉 : In order to receive / = על מנת לקבל 알 므나트 레카벨
- 발락과 발람의 마지막 두 글자
발락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발람을 부른다. 우리 안의 발람의 의지가 교정되지 않고 발락의 부름에 응답하게 된다면 그때 등장하는 것을 아말렉이라고 한다. 아말렉은 받는 의지를 최고의 권위로 올려 버린다. 그 케테르를 쓰고 그 왕좌에 앉아 다스린다. 그렇게 목적이 다 나를 위해서 받는 것으로 타락해버리고 만다. 삶의 목적이 받기 위한 것으로 타락해버리면 대책이 없다. 수많은 토라의 진리가 들어와도, 그 타락한 아주 작은 검은 잉크를 없앨 수 없다. 희석시킬 순 있겠지만, 말 그대로 희석이 되는 것이지, 검정색이 흐려지는 것이지 그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선 완전히 불살라야 한다. 파라 아두마 테미마. 죽음을 만지는다는 것, 받는 의지를 건드린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부정함 가운데로 적셔드는 것이다.
= 240 = ספק 싸페크 : 불확실, 의심
우리 안의 받는 의지는 끊임없이 불확실하고 의심한다. 이게 맞는거야? 이 길이 맞는거야? 아버지가 뭘 알고 하신 말일까? 아버지를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한다. 아버지뿐만이겠는가, 내 남편, 아내, 자식, 지체들, 모두를 다 의심한다. 왜냐하면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고정된다는 것이 뭔지 모른다.
지난 번 설교 때 아버지가 거론하신, 남편이 육신은 같이 있는데 영은 따로 있다고 말한 자매가 제 아내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결국 우리가 받고자 하면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들은 아버지로부터 그 엄청난 생명, 나는 받아야 하기에 힘써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아버지께 받은 것을 주기에도 남은 여생을 보내기 바쁘데 어떻게라도 이 육신의 삶 동안 하나라도 더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남편이 같이 아이들 데리고 베이비카페 가는 것을 이뤘으면 남편이 거기에 가서 녹취를 할 것이 아니라, 핸드폰을 볼 것이 아니라 같이 애들하고도 놀아줘야 하고, 또 같이 놀아주면 즐겁게 하이텐션으로 놀아줘야 하며 계속해서 하나가 추가되고 또 추가된다. 그러나 남편이 몸은 같이 있지만, 영혼이 따로 노는 것 같다? 그러면 그 의심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그 사람에게 뭔가를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내 생각, 내 개념, 내 논리가 있으면 거기에 반대되는 의견이 등장할 때 의심이 들고, 점진적인 의심은 확신이 된다. 그리스도의 풍요함이 아닌, 내가 그 풍만함을 내 힘으로 이루려고 하게 된다.
확신, 믿음 : אמונה 에무나 / אם 엠 : 엄마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알려주시기 원하신다. 발락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믿음을 알려면 먼저 의심을 알아야 한다. 우린 언제나 늘 그래왔듯 부정을 통해서 긍정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확신, 바타흐는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데 이 믿음을 에무나, 엄마라고 한다.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 우린 누구를 엄마라고 부르는가? 숱하게 많이 부르고 듣지만 어찌보면 가장 가벼이 넘어가는 그 이름, 엄마, 엄마는 생명을 있게 하시는 존재이다.
아이러니 하게 엄마는 받는 존재이다. 받는 자이다. 그런데 아말렉 하고 뭐가 다를까? 엄마는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받고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이다. 엄마가 아빠에게서 받은 씨로, 생명을 있게 하고, 그 생명을 해산하고 그 생명에게 엄마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 토라는 엄마를 정결한 자라고 한다. 정결하다, 타하르, 하르는 임신하다, 테트는 본질, 그 아버지의 본질을 임신할 수 있는 자를 엄마, 정결한 자라고 한다.
타메 --> טהר 타하르 : 정결하다 = 하르 : 임신하다
מי נדה 메이 니다 : 정결하게 하는 물, 월경의 물 = 부정을 씻는 물
이 정결한 자가 흘려 보내는 물을 메이 니다 라고 후카트에서 배웠다. 메이 니다는 부정을 씻는 물이다. 또한 메이 니다, 이것은 여성의 월경의 물이기도 하다. 어떻게 메이 니다가 부정을 씻을 수 있을까? 왜냐면 니다는 나는 열매를 맺고 싶다, 나는 주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여성이 니다를 하게 됨으로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게 되는 기간을 거친다. 니다는 생명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신랑으로부터 씨를 받아 당신의 생명을 낳고 싶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 생명을 주고 싶습니다. 나는 내 생명을 주기 위해서 받고 싶습니다 라는 것이다.
רחם 라함 : 긍훌, 태 Mercy / 토라에 나오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성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엄마의 태를 라함이라고 한다. 또한 긍휼이라고도 한다. 긍휼은 토라에 나오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성품이다. Have mercy on us! 우리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말 죽어 마땅한 존재이다. 아버지를 의심하는 이런 배은망덕한 자식이라니, 정말 살아있는게 용하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긍휼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라함을 뒤집으면 마하르가 된다. 마하르는 내일이란 뜻이다.
מחר 마하르 : 내일
주님의 가장 큰 긍휼은 우리에게 내일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오늘을 산다. 내일이 다가오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린 다시 오늘을 살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내일, 그 영원의 세계를 선물로 주신다. 주님 당신의 세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되어진 그 삶, 아버지와 아들로 분리가 된 삶이 아닌 아버지아들의 에하드의 삶을 선물로 주신다. 이것이 지극한 행복, 지극한 사랑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다바크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엄마가 되는 시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누군가를 더 이상 부정하게 살게 내버려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부정하게, 나처럼 똑같이 살게 놔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와 하나였던 자를 보내주신다. 우리 앞에 서서 믿음의 선배된 우리 아보트, 아보트들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우리를 연결시킨다. 당신들이 걸어간 그 길을 걷게 할 수 없는 그 사랑, 부정한 삶을 똑같이 살게 둘 수 없는 그 사랑으로, 당신들이 먼저 살았던 그 삶을 드려 우리와 연결 되어진다. 우리가 다 내 발걸음으로 이 길에 섰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린 우리와 연결되고 싶어 갈망하던 우리의 아보트들의 간절함으로, 그들의 사랑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있던 것이고, 오늘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אפס 에페쓰 : 0, But only
민22:35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
אֶפֶס אֶת־הַדָּבָר 에페쓰 에트 하다바르
하나님 -- 발람 --> 발락 /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말
이때 우린 비로소 한번도 해보지 못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한번도 해보지 못한 말, 다바르, 아들에 종속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에페쓰 하다바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말이다. 너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말, 너와 내가 하나다, 너와 내가 연결되어있다, 너와 내가 이스라엘이다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안에 받는의지가 조금이라도 작동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에게 지금 주님이 붙여주신 한 영혼이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영혼이다. 이 지체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안에 자신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이 드리운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점점 이 어둠에 침식되어가는 중이었다. 이 지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실 어떻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랐었다. 제가 또 에프라임이란, 워낙 좋은게 좋은거고 그냥 하하호호 뽀로로처럼 즐겁게 살기를 지향하는 사람인지라 누군가에게 어둠이 드리웠을 때,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었다. 바다 아버지께 도움을 간구했고, 아버지는 네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라고 하셨다. 사실 지난 몇년 동안 나름 LTG라는 것을 하면서 내가 너의 아버지다 라는 말을 숱하게 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 말을 꺼내기에 앞서 정말 긴장이 많이 되었다. 내가 직접 무하유하의 아버지가 되어보니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감과 그 실제가 따르는 걸 몸소 체험하면서 이 말의 무게를 알았을 때, 이 말이 얼마나 내뱉기 어려운 것인지 말이다. 그렇게 이 지체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어둠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이 지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딱 하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여도 괜찮아. 넌 내 아들이야.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지 않아" 이 지체의 외로움과 공허, 혼돈, 고뇌 여러가지 부정적인, 어둠의 생각이 보였고, 이 지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딱 그 한 마디였다. 넌 내 아들이야. 에페쓰 에트 하다바르,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혼자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자기가 해야하는 그 외로움이 너무 뼛속까지 사무치게 느껴졌고, 그 삶을 정말 살지 않기를 바랬다. 너는 그 삶을 살지 않아도 돼. 너가 나의 삶을 반복하지 않아도 돼.
저는 그때 비로소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나의 외로움을, 홀로됨을 도저히 볼 수 없던 아버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 찾아 나서시는 아버지, 집을 나가 다시 돌아와도 두 팔 벌려 주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느꼈다.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 뿐이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 생명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나를, 우리를 찾으셨다. 그렇게 우린 아들이면서 아버지가 되어간다.
너무나 뜨거운 이 탐무즈월,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북받쳐 오르는 더위, 누군가 붙어있기 정말 싫은 달, 우리의 부정함은 계속해서 자랄 것이다. 우리의 받으려고 하는 의지는 계속해서 자랄 것이고, 더 높은 차원의, 더 깊은 어둠이 우리를 덮칠 것이다. 그러나 마치 저주 같은 상황일 것 같은 이 상황이 우리에게 복이다. 우리에게 있는 이 부정한 삶의 흔적들로 인해서 우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 부정을 느끼고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린 아들이 되고 아버지가 될 것이다.
* 기도
우리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에 있는 모든 일은 다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뜨거운 탐무즈월이 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둠, 부정이 우리에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린 이 부정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이 어둠을 통해서 빛이신 당신을 봅니다. 홀로됨을 통해서 전체를 봅니다. 우리 가운데 깊이 숨겨져 있는 내 안의 받는의지를 드러내시고 처리하시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뜨거운 여름,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당신을 사랑하는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예슈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수요일(넷째 날) 이베드로 목사
민22:39-23:12(To), 미5:7-6:8(Haft), 엡4:1-32(신약)
< 가봐[גוע]라서 그런가봐! >
가봐의 공포를 아시는가? 근본적인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 육체의 욕망, 내가 사라질 것, 멸절에 대한 그런 공포, 두려움인 이것이다. 다른 말로는 주검, 시체, 죽음을 만진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를 이야기 한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연일 계속되는 찜통더위이지만 저희 집은 에어컨 고장으로 아직 에어컨 한번 켜지 않은 채 선풍기 5대로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기세를 아끼고자 더 절약하고자 안트는 것이 아니라 에어컨 고장으로 아직 에어컨을 틀지 못한 체 지내고 있다. 가끔 쓰레기 버리러 나가면 바깥이 더 선선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덥고 습한 날의 연속이니 가족들과 붙는 것도, 결합하는 것도 참 싫어지게 됩니다. 육신의 상태뿐만이 아닌 어쩌면 저의 영의 상태도 이와 같아지네요. 아이들한테 짜증도 화도 늘어나고 부정이 점점 늘어납니다.
봄의 계절이 끝나고 여름이 되면서, 7월이 되면서 탐무즈월이 시작되었습니다. 탐무즈 라는 것은 바벨론 단어인데 이방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유대력에 이방신의 이름이 들어간 것도 이상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탐무즈월과 다음달인 아브월은 일 년 중 부정적인 힘이 가장 강한 달이라고 합니다. 가혹하고 비극적인 기운에 휩싸일 수 있는 달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부정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여름에는 많은 과일들이 익어갑니다. 뜨거운 태양을 잘 견디며 자란 과일과 곡식이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가져옵니다. 그렇듯 우리의 영도 뜨겁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잘 견디고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사탄은 우리 내면에 숨겨져있던 악을 교묘하게 건드리고 들추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탐무즈월 17일에 금송아지의 우상숭배 죄가 일어났고, 예루살렘의 성벽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3주 뒤인 아브월 9일에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탐무즈 17일에 보낸 정탐꾼들이 아브월 9일에 돌아와 약속의 땅을 악평, 디바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정, 어둠, 올바르지 않은 판단 가운데 우리에게 두려움, 의심, 불확실함이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우리의 관점, 시각의 보호인 것입니다. 아인, 여전히 내 시각, 내 관점을 가지고 판단과 정죄를 일삼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슐라흐 레카, 코라흐, 후카트를 거쳐서 발락까지 우리는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고 탐내고 그런 것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질투의 눈, 그것은 내게 없는 것, 내 것이 아닌 것을 욕망하고 갈망합니다. 그것이 더 좋아 보이고 짜릿해 보입니다. 인간의 죄는 나에게 주어진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것 말고 다른 것을 더 구하게 되는,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 내꺼, 내 것이 되면 만족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원함대로 되면 그제야 볼멘소리가 사그라집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보는 것 그대로 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일 예배 때 영혼이 육신을 입고 왔을 때 이 땅에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헤트는 바브와 자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쪽 기둥은 바브, 한쪽 기둥은 자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정체성과 그것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반사하는 것이 이어지면 삶이 됩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주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삶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하는 목걸이에 ‘하이’라고 써져있는 펜던트 보신 적 있으신가요?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나에게는 바브와 자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선은 바브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원천이 위로부터 내려온 한 줄기 빛, 그리스도여야만 합니다.
헤트는 밸런스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밸런스가 맞춰져 있어도 밑에 구멍이 나있는 것처럼 영적 추락을 하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있어서도 추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헤트가 성경에 가장 먼저 쓰인 단어가 호쉐크, 어둠이라고 배웠습니다. 어둠은 영적 추락의 의미를 가집니다. 주일날 추락이라는 단어를 듣는데 그게 제 마음을 쾅하고 쳤습니다. 내려간다는 것, 이 탐무즈월에 영적 추락이라는 말이 죽을 만큼 싫었습니다. 탐무즈월에 영적 추락, 어둠과 파괴에 대한 강력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호쉐크(328)와 같은 숫자값이 바알 스본입니다. 바알 스본은 ‘베샬라흐’ 포션, 출14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가깝고 빠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먼 길로 인도하십니다. 바알 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진을 치게 하십니다. 그때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러 출정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 부르짖고, 두려워하면서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나왔냐면서 모세에게 악평,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때 주님은 모세를 명하셔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출14:13)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라고 말입니다.
탐무즈월은 르우벤 지파의 달입니다. 르우벤이란, ‘아들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슈아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달이 탐무즈월입니다. 영적 추락, 어둠과 파괴,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오직 예슈아입니다. 애굽 땅으로부터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상승, 올라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38년의 끝자락에서 후카트, 그리고 발락 포션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획대로 우리는 상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내 관점, 내 시각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더더욱 추락을 맛보게 됩니다. 내 시각과 관점을 닫는 것을 훈련하고 아버지께, 리더에게 나오는 것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악한 내 관점과 시각의 교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내 마음대로 한다면 절대로 상승할 수 없습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물어보기 싫습니다. 그저 헤매고 방황하고 삶은 점점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영적 상승을 위해서는 반드시 내려감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상승입니다. 이 땅의 것을 버리고 육신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닌 진짜 영적 상승이란 영의 세계를 이곳에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의인이란 의롭지 않은 자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 자들 속에 의를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죄인들 가운데 스스로 들어가신 예수처럼 말입니다. 베샬라흐의 마지막 17장은 아말렉과의 전쟁이 있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의 뒤쳐진 자들을 공격하자 여호수아(예슈아)를 통해서 아말렉을 무찌릅니다. 아말렉, in order to receive와의 싸움입니다.
오늘 읽었던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은 부르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어로 ‘카라’입니다. 부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탐하러 보낸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로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의 소망은 여호수아에게 있었습니다. 예슈아에게 있었습니다. 카라(부르심)가 있어야 다바크, 결합하게 되고 에하드,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쿠프(소망)를 이야기합니다. 코라흐, 후카트, 그리고 발락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 코 앞에서 계속해서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코라흐(308)에서 고라의 소망은 자기가 제사장이 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회개(308)해야 했습니다. 후카트에서 진짜 소망은 붉은 암소, 반석, 놋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발락의 뜻은 소망이 없다입니다. 내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아무 소망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그런거 없다입니다. 그럼에도 이 포션이 중요한 이유는 십볼의 아들 발락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과 예언이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포션으로 해놓은 것은 나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고 고백하는 순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발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은 회개에서부터 시작되듯이 회개하기 위해서 내려감, 추락, 어둠, 파괴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함께 살아야 할 우리의 부르심은 하나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가 되자라고 말하지만 분열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분열되어도 감추면 괜찮으니 그냥 하나되자라고 합니다. 싫어하는 사람, 관계가 어긋난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 관계가 괜찮은 사람하고만 함께하는 마음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만 하나되고 싫어하는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 모습으로는 절대 하나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좋아하던 싫어하던 상관없이 더욱 더 하나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내 이웃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발락은 소망이 없다, 발람은 백성이 없다, 혹은 진리의 관점, 시각이 없다입니다. 발락은 자기 소망, 헛된 소망을 가진 자였고, 발람은 자신의 관점, 시각을 가진 자,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습관과 패턴에 익숙한 자였습니다.
39절에서 “발람이 발락과 동행하여”, 41절에서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처럼 둘이 하나가 된 것이 문제입니다. 소망 없는 자가 자기 관점, 자기 시각으로 하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 없는 자와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가 하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올라갑니다. 상승하고자 합니다. 상승하고자 바알의 산당에 올라갑니다. 바모트 바알, 바알은 전쟁과 풍요의 이방신입니다. 바벨론의 탐무즈와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바마’라고 하면 산당, 높은 곳을 말합니다. 신과 교접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 올라갑니다. 산당에는 우상이 가득 차 있었고, 희생 제사 음식을 먹는 것도 있었습니다. 어린아이, 인신제사도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멸하셨던 장소입니다.
레26:30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아버지의 마음이 싫어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이런 마음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가기 전에 이방 산당들을 헐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방 신들을 예배합니다. 발락 마지막에 모압의 바알브올 사건이 끝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봅니다. 케쯔(끝)는 의로운 소망을 말합니다. 의로운 소망, 예슈아를 이스라엘 가운데 두셨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발람은 알았습니다. 발락의 소망과 이스라엘의 소망은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발람과 발락이 짝짜꿍되어서 함께 어울려다니는데, 소망이 없는 자가 자기 습관으로 하나 되고 있습니다. 발람은 고라 때 이미 등장했었습니다.
민16:30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모든 소유물을 삼켜(우바라 오탐)에서 히브리어로 ‘삼키다’라는 말이 ‘바라’입니다. 발람에서 멤(진리)이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람은 삼키는 것에 대한 진리를 가진 자인 것입니다. 발, 벨은 바알의 축약형입니다. 베트와 라메드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 아인, 관점, 시각, 습관, 패턴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만의 관점과 시각, 자신만의 습관과 패턴이 있지 않은지요.
내 눈으로 본 것이 맞다라고 판단과 정죄하며, 그 사람의 어떠함을 내 기준의 잣대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반복되는 내 패턴과 습관으로 곤란한 상황을 연출하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잘 교정되지 않습니다. 점점 더 내 관점으로 굳어져만 갑니다. 오순절 인카운터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질투의 눈, 시기의 눈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탐무즈월에 사람의 관점과 판단으로 편향적이고 어둡고 이기적이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들을 보는 것이 아닌 그저 나만 보려고 하다가 부정적인 말들이 나를 비롯하여 사랑하는 지체에게 그리고 공동체에게 선포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발락이 원하는 그저 ‘나를 위해서’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민22:2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사실 발락이 이렇게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아모리 왕 시혼, ‘내 말은 쓰레기다’ 이것을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receive to give)가 광야 38년을 통해서 이것을 얻게 될 단계까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내 말, 내 언어, 내 경험의 언어가 실재라고 믿었던 것, 내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이 얼마나 쓰레기이고 배설물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정복하고 멸하십니다. 아모리 왕을 처리해야 그 다음 모압 왕을 처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압은 모아브, 아버지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삶은 언어를 가집니다. 우리의 삶은 주어진 질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질서를 이용해서 내가 받고자 하는 목적으로 살아가는 생명이 된다면 그것을 ‘아말렉’이라고 합니다. in order to receive, 발락과 발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to give를 목적으로 두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언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통치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모든 정해진 질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언어, 아말렉의 통치를 제거하고 이스라엘로 살게 하는 언어 말입니다.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스스로가 얼마나 자기 정체성의 언어가 강한 사람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나온 환경과 상황, 삶 속에서 정해져버린 정체성의 언어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말입니다. 저에게는 구원의 언어가 없었습니다. 많은 말을 하고 누군가에게 가르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내가 하는 많은 말들이 to give가 아닌 to receive 였습니다. 나는 실로 내 말만을 하고 살았던 아모리 왕 시혼이 여기있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였습니다. 밤하늘의 별이 빛나기 전 캄캄할 때를 잘 모르듯이 아니 관심이 없듯이 내 형제, 내 자녀, 내 제자에게 무심했고, 말로 상처를 주고, 해주는 모든 언어가 to receive 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 내 욕망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삶이라 여기는 소망없는 발락과 같았음을, 그것이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단독자의 삶을 살아가는 발람과 같았음을 보게 됩니다. 내 안에 주님과 같은 소리가 없습니다. 내 속에 아버지와 같은 소리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소리가 가득합니다. 육신으로 살려고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 고집불통의 옛 자아가 고역과 노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내 속에 의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불확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말렉과 같은 숫자값을 가지는 것을 싸페크(의심, 불확실)라고 배웠습니다. 나와 케뎀에서 하나였던 자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나한테 좋은 것을 결합시켜서 목적을 받기 위한 것으로 만듭니다. 내가 무엇을 받았나, 받고 있는가를 체크하기 시작합니다.
의심 투성이, 욕구 덩어리, 나를 위해 살라는 나를 완성하기 위해 살라는 자기 중심, 나도 나를 모르겠고, 나 자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제목 그대로 가봐(시체)라서 그런가봐. 늘 죽음을 경험하고 삽니다. 여전히 육신적인 것이 영적인 것보다 훨씬 앞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무즈월의 영적 추락이 무섭습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여전히 육신이 생명인 줄 착각하고 살기 위해 버둥거립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내 육신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는지 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이리저리 코를 킁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미친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맛나게 먹는 썩은 고기, 그거 크게 한 입 베어 먹으며 이것이 나를 살린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절대 볼 수 없는 가려진 시각과 관점으로 그렇게 아말렉이 되어갑니다.
in order to receive, 받기 위해 주는 삶, 여전히 나에게 뭐 준 것이 있으면 감사할 줄 알고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다른 지체와 비교하며 덜 받았네, 네 것이 더 크네, 내 것이 이게 뭐냐면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삽니다. 여전히 나의 눈동자, 눈깔은 돌아가고 점점 내 안에 발암물질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발락과 발람이 합체하여 Confusion, 혼돈스럽습니다. 여전히 내가 살고 이스라엘을 죽이려 하는 저주가 끊이지 않는 내가 사탄이고, 내가 살인자고, 내가 하만과 무엇이 다르며, 내가 히틀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민22:35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
내게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제자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말을 똑같이 하는 관계입니다. 내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이 과정 가운데 예슈아를 보기 원합니다. 내 두 눈이 보게되는 마지막이 아버지, 주님임을, 그런 제가 되길 원한다. 주님께 더욱 집중하기 원합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영적 추락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고 영적 추락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나를 내려가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오, 올라가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내 관점과 내 시각을 닫습니다. 나에게 교정이 필요합니다. 알량한 자존심 내어 버리고, 더 헤매고 방황하는 시간을 멈추겠습니다.
엡4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에하드)라는 말이 7번 반복됩니다. 에하드를 완성케 하는 예슈아, 예슈아는 한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민23:1에서 발람은 발락에게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수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다 7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하드를 완성케 하는 예슈아를 이 곳 가운데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진영을 보면서 의로운 소망이 예슈아임을 봤던 발람이 엡4장과 똑같이 이 7에 대한 메시지, 예슈아를 이 곳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가 아닌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고 있습니다. מראשׁ צרים 메로쉬 쭈림, 바위 머리로부터 라고 표현하는데, 쭈르, 반석이라는 것은 의로운 머리 예슈아를 말합니다. 예슈아의 머리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발람은 여호와께서 하라는 것만, 준행하라는 것만, 보이신 것만, 여호와의 시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의로운 머리이신 예슈아의 머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발람의 머리가 예슈아의 머리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홀로 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예슈아의 머리로 사는 자들은 이 세상의 시스템 자체가 혼자 두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져야지 라고들 하지만 철저히 그리스도의 머리를 붙들며 살겠다는 것, 여러 민족들처럼 세상의 소망을 품는 자들 가운데 하나로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시각과 관점, 습관과 패턴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레바다드, 바드가 무엇인지 알기에 바드와 바드가 결합하기 위함으로 살아 결국 에하드를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발락 토라포션은 40번째 포션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네 머리, 네 입, 네 눈으로 말하는 것이 진리가 아닌 머리가 완전히 바뀌고 교정되어야 삶으로 행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있으면 사랑하는 지체, 가족, 교회 누구든 사랑을 말하고 몸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 이렇게 상번제 설교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신기하게도 딱 1년 전 오늘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펑펑 울면서 설교를 했었습니다. 이제 저에게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습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은 저에게 주님은 봄을 주셨고, 사랑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랑에 올라갈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봄은 그렇게 나의 죽은 생명에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저와는 참 달랐습니다. 아버지를 만나 교정되어 가는 여인, 세상과 환경을 바꾸고 고치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고쳤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추락을 두려워해서 내 환경을 바꾸는 것에 급급한 삶을 살았던 저와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저 내 욕구가 원하는 것을 묶으려고 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쉽게 풀어낼 수 있을까에 잔머리를 굴리며 살았는데 말입니다. 자극으로 감각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단독자의 암세포덩어리가 나였고, 내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 내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잠잠히 누워서 그런 내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관점과 시각을 닫으라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에하드되려는 열정이 특심이었던, 아버지를 향한 열정이 죽음의 영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굳이 사망을 받아들임으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줍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생명을 싹 틔우듯이 말입니다.
당신처럼 내 힘을 다하여 수고할 것이고 아버지의 삶을 살 것이고, 누군가의 영을 책임질 수 있는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동일한 그런 아버지가 되겠다고, 단독자의 눈물이 아닌 하나됨의 눈물을 흘리겠다는 고백을 했던 그 약속을 다시금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저와 같은 단독자에게 너와 나는 한 몸이다, 너는 케뎀에서 나와 하나라고 말해준 당신처럼 나도 그렇게 이야기해 주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한 1년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 기도
하나님보다 내 생각이 먼저라고 하게 되어 세상에 삼킨 자가 되었던 우리가 이 시간 주님께 정직하게 나아옵니다. 세상이 우리를 삼키는 것이 아닌 우리가 세상을 삼키게 하소서. 내 안에 있는 진리가 오직 사랑만을 향하게 하소서. 내 안의 발락과 발람이 하나되는 것이 아닌 오직 예슈아와 하나되길 원합니다. 내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내 안의 아말렉을 진멸하고 허탄한 말을 토하지 않으며 더 이상 나를 살리려는 말을 멈추길 원합니다. 나의 익숙한 습관과 패턴이 있습니다. 이제 나의 관점, 시각, 습관, 패턴을 주님의 관점과 시각, 습관과 패턴으로 바꾸겠습니다. 나로 인해 고통 받고 아팠던 지체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발람과 같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없는 아들이 되지 않겠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내 생각, 내 관점이 완전히 갈려져 야곱의 티끌이 되도록 nothing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케뎀에서 정해진 이 땅에서의 미션이 끝나고 다시 하나 된 삶으로 돌아갈 때까지 말입니다.
목요일
발락 토라포션은 민22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민25:9절까지 있는 토라포션으로 발락이 발람이라는 마법사를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함으로, 이스라엘의 전진을 막으려고 하는 긴 이야기이다. 오히려 주님은 이 부분에 있어서 축복, 발람이 저주하려던 것을 축복으로 바꾸신다. 이스라엘에 대한 놀라운 축복의 예언들이 펼쳐진다. 특별히 발락 토라포션에서는 당나귀가 예언을 하는, 말을 하는, 다바르를 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실 아주 특별한 것이다. 토라 가운데서 짐승이 말을 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 경우가 나온다. 하나는 창세기에서 뱀이, 하나는 발락 토라포션에서 당나귀가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인 짐승의 영역을 어떻게 교정하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핵심적인 토라포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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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락 토라포션에 와서 새로운 것을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티쿤의 길을 걸어간다.
בלק 발락 / 모압 왕의 이름
이방인의 이름이 토라포션에 나오는 것은 이드로, 그리고 발락이 나온다. 고라는 유대인이다. 발락 토라포션에서 우린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굉장히 깊은 영적인 비밀들을 발락 토라포션에서 우린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발락 토라포션에서 우리는 발락이 발람이라는 마법사를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함으로 이스라엘의 진격을 막으려고 하는 영역들을 보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우리가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다른 레벨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같은 레벨에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더 높은 레벨에 의해서 이긴다. 그래서 우리도 어렸을 때 싸우다가 질 것 같으면 형을 불러온다. 형을 불러왔는데도 안되면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아버지 오면 너희 다 죽었다고 말이다. 더 높은 레벨로 올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레벨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는 레벨이 있다.
민22
2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어떤 제자가 제 목소리를 듣더니 이병헌 같다고 한다. 제 인생에 최대의 전성기가 찾아 왔구나. 이것이 기적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들을 살아낸다. 사람은 외부에 있는 것을 자기가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정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외부에 있는 것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의 reflection이다. 누군가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특별히 그런 것이 잘 나타나는 것이 부부관계이다. 네게도 라고 한다. 거울이다. 사실 토라에서 온 세상은 거울이라고 한다. 자기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우린 쟤가 어떻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내 속에 있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제자는 이미 그 세계 속에서 이병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병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3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모압이 왜 심히 두려워하였을까? 모압이 심히 두려워 한 이유는 자기들보다 레벨이 높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귀신이 나타난다고 하면 심히 두려워한다. 차원이 다른 레벨이 나타나면 심히 두려워한다. 자기들이 절대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계에서도 자기 레벨보다 더 높은 레벨이 나타나면 심히 두려워하는 것이다. 싸워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이 레벨이 어떤 레벨이냐?
4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그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이 사람들은 어떤 레벨이냐면, 풀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풀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소의 단계이다. 그러니 이 풀들이 소 앞에서 두려워 떨겠는가? 풀이 소랑 싸워서 이길 재간이 있는가? 재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가 나타나면 큰일난 것이다. 다 뜯어 먹히게 생겼다. 그래서 이 모압 왕이 발람을 부르러 보낸다.
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참 희한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발락이 훨씬 더 힘이 쎌 것 같고, 군대도 있는데, 그런 군대를 가지고도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고 두려움에 떤다는데 한낱 마법사를 불러서 말하게 시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계는 네 파트로 구성되어있다.
1. 무생물의 세계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성격,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생물이라고 한다.
2. the growing (식물, 나무) 식물의 세계 : גדל = Increase
가달이다. 식물의 세계란 growing, 자란다고 한다. 이것은 식물, 나무를 가리킨다. 창세기에서 나무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생명을 줬을 때 처음으로 나타나는 단계가 growing의 단계이다. 이것은 나무, 식물이 대표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גדל 가달이다. growing은 자라고, 늘어나는 것이다. 자란다는 것은 사이즈가 커진다. 능력이 커지고, 가장 대표되는 말들이 Increase이다. 많아지는 것, 증대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생명을 얻었을 때의 첫 번째가 자라는 것이다. 지식도, 능력도, 파워도 증대되어야 한다. 한 점에서 커진 것처럼, 그것을 growing의 세계, 식물의 세계라고 한다. 지금 발락의 레벨은 the growing의 세계인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와 같다. 발락이 처해진 곳은 식물의 세계이다.
3. the living = animal kingdom
발락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the living이라고 한다. 메하야 라는 living creature, animal kingdom 동물의 세계, 동물의 왕국이라고 한다. 발락이 두려워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등장했는데 얘들이 들소와 같다, 그러면 우리의 것을 다 뜯어 먹으리라고 한다. 발락의 레벨이 the growing의 레벨인 것을 알 수 있다. 발락이 적군인 이스라엘을 파악하기로는 animal kingdom이다. 그러니 큰일난 것이다. 대항할 수가 없다. 식물 군대와 동물 군대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마치 석기시대와 철기시대와 같다. 여기에서 우린 חיה 하야, 살아있는 생명체를 알 수 있다.
(2)의 세계에서는 נהיה 느흐예라고 한다. 생명으로서 존재케 되는 첫 번째 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3) 하야가 나타나니 큰일나게 생겼다. 소가 다 뜯어 먹게 생겼다. 그러니 누구를 부른 것이냐?
4. the speaking
가장 높은 단계의 세계는 speaking kingdom이라고 한다. 스피킹을 가지고 이 세계는 구성되어진다. (3)는 살아있음이다. 내가 생존한다, 이것이 (3)의 세계에서는 중요한 것이다. 단독자는 (3)세계에서 짐승처럼 산다. 내가 살기 위해서 산다. 그런데 (4) 세계에서는 내가 말하기 위해서 산다. 다바르, speaking 하기 위해서 산다. 여러분들이 이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놀라운 구분인 것이다. 그래서 발람을 고용하는 자는 speaking level에 있는 자를 불러다가 (3)를 제압해달라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이시다 라고 한다. 가장 높은 레벨이다. 주님이 인간을 궁극적으로 데리고 가시고 싶으신 세계는 speaking level의 세계이다.
[출처] 발라크 목요일 녹취 중|작성자 Daniel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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