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여성이야기] <3> 청말의 철권통치자 서태후(西太后)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14.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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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3> 청말의 철권통치자 서태후(西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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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3> 청말의 철권통치자 서태후(西太后)
중국의 일세를 풍미한 여걸
부산여성뉴스 2012-08-22 10:51
서태후(1835∼1908)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조 말기 동치제(1861∼1874재위)와 광서제(1874∼1908) 시기의 50년간에 걸쳐 권력의 강자로서 일세를 풍미한 여걸이다.
그녀는 청을 철권 통치함으로써 중국역사상 강력한 여성지배자로 꼽히고 있다. 영명한 천자가 속출한 청조였지만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이후로는 어린 군주가 계속 나와 궁정내부는 걷잡을수 없이 문란해졌다.
제2차 아편전쟁인 애로우호사건이 일어날 무렵 황제였던 9대 문종 함풍제(1850∼1861)는 1860년 영·불군이 북경에 육박해 오자 열하로 몽진하였다가 다음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함풍제와 황후(자안황후 즉 동태후)사이에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 귀비로 승격한 의귀비(자황후 즉 서태후)의 소생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10대 목종 동치제다.
그런데 이 동치제는 당시 겨우 6세였으므로 동태후와 생모 서태후가 섭정이 되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 혁흔이 의정왕으로서 정치를 보좌하게 되었다. 물론 이 같은 체제로 되는 데에는 그 당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양이파 숙순을 제거하기 위한 서태후의 숨막히는 계략과 공친왕의 술수가 주효하였던 것이다.
서태후는 원래 만주기인(旗人) 혜징의 딸로 서열이 낮은 후궁이었으나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음으로써 권좌에 오르게 되었는데 대단한 재녀로서 중국 고전에 능통하고 서화와 음악도 곧 잘하였다. 그녀는 권력욕이 강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독재적 경향이 강하여 계속 정치의 실권을 잡으려고 획책하였다.
집권 후 그녀는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관료를 등용하고 그들을 통하여 서양의 군사기술을 채용한 양무운동을 진행시켰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해서 국사를 장악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젊은 황제에게 무절제한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여 황제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실제로 동치제는 생모 서태후보다는 정치적 야심이 없고 마음씨 곱고 온순한 동태후를 더 따르고 좋아하였는데 서태후는 이것이 고까왔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군대의 힘을 빌려 제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동치제의 황후가 잉태 중이었으므로 출산을 기다렸다가 아들일 경우 황제에 즉위시킬 수도 있었다.)
자신의 여동생과 시숙 혁현(함풍제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 광서제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 주었다. 이후로도 두 태후는 계속해서 섭정을 했지만 1881년 동태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권력은 거의 서태후 수중에 들어갔다.
그 당시 “동태후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서태후가 독살한 것이다”라는 소문도 떠돌았으나 그 진상은 알 수가 없다. 3년 후 서태후는 방해물 공친왕을 제거하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킴으로써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후의 청조 정치는 완전히 서태후의 뜻대로 되었으며 광서제 부친 순친왕 혁현이나 손육문 등은 모두 서태후의 괴뢰에 불과하였다. 1889년 광서제는 이미 성년에 달하였으므로 성혼을 하고 그로부터 친정을 하게 되었다. 광서제는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었지만 서태후가 이를 허락지않고 자기의 질녀를 황후로 세웠다.
서태후는 이때부터 명목상으로는 북경교외에 있는 호화로운 궁전 이화원에 은퇴하여 지냈으나 중요한 정치에 관해서는 일일이 황제를 불러서 지령을 내렸으며 한시도 경계의 눈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중국이 청일전쟁(1894∼1895)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지 3년이 지난 1898년 젊은 광서제는 서태후의 간섭을 싫어하여 입헌파 강유위와 접근, 연결되면서 신정을 실시하여(무술변법) 입헌군주제를 위한 급진적 전환을 추진하자 서태후는 원세개 등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군사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감행, 신정은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중국이 평화롭게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무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00년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서태후는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의화단의 힘을 배외운동에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서안으로 피신하였으며 결국은 치욕스러운 강화조건(북경의정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02년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입헌준비·실업·교육진흥·군사제도정비 등 신정을 실시함으로써 1898년 자신이 무산시켰던 개혁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것은 당장에 쓰임새가 있을 듯한 항목을 주워모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이미 때는 늦었다.
서태후의 대외정책은 일관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함을 면치 못하였으며 결국 배외정책에서 굴욕적인 외교로 전략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는 사치꾼이었고, 또한 아주 거짓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청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1908년 그녀는 광서제와 하루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사망하였다. 평상시에 맛이 깊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한 그녀는 위장기능이 저하되어 항상 복부 팽창과 설사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1908년 10월 13일 그녀는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5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였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으니 이 때 서태후의 나이 73세였다.
서태후가 죽기 전날 광서제의 죽음이 공표되었는데 그녀의 명에 따라 광서제는 독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광서제도 자식이 없었으므로 광서제 동생인 순친왕 재례(載澧)의 아들 부의(溥儀)가 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마지막 황제 선통제였다.선통제는 결국 재위 3년 만에 옥좌에서 물러나야했고 중국은 신해혁명에 의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탄생시키니 왕조체제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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