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촌국민학교 8회 벗님들-봄 소풍, 슬픈 추억
“누가 그러는데, 너는 부모 산소 벌초도 안 한다고 그러더라고. 맞아여?”
엊그제 누군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그렇게 묻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이외에는 그 이전에 아무도 내게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물어온 친구가 없었다.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비겁한 뒷담화를 한 것이다.
실토해서 내 주위에 말은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한 집안 7남매의 장남이고 장손이고 종손인 나로서 부모 산소를 마구 내팽개쳐놓지는 않았다.
너무나 가난해서 울 엄마 무덤에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겨우 스무 살 밖에 안 된 아들인 내가 학업을 아예 때려치우고 점촌역전에서 노가다로 번 한 달치 월급으로 비석을 세웠었고, 선산 하나 없어 세상 뜬 아버지를 어디로 모셔야하나 하면서 상중에 고민이 깊은 때에도 집안 어느 누구도 나서서 돕지 않았고, 오로지 사회에서 만난 ‘모종인’이라고 하는 또래 친구의 도움으로 경기도 구리의 공동묘지에 모셨었다.
까마득한 지난날의 그런 사연에 대해서는 딱 입 닫고, 지금 당장에 벌초 하지 않는 사연만으로 나를 헐뜯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부모 산소에 벌초하지 않는다고 까발려 말도 했고 글도 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말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 사연은 차마 여기 글로써 옮길 수 없다.
부모 산소의 벌초 여부에 대하여 내게 물어온 그 친구에게, 내 그 저간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30여분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이렇게 나를 호되게 비난한 친구가 있었다.
“제사를 안 지낸다니! 호로자식이구만!”
그 비난에는 응대하지 않았다.
형제들로부터 홀대를 당한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 하며, 한 갑자 세월 전으로 거슬러 대구 시집에서 뛰쳐나와 울 엄마 친정이 있는 동네인 지금의 내 고향 문경으로 이사를 와서 빵집을 하다가, 집안 맏며느리가 되어서 시집에 돈 안 보태준다고 삼촌에게 뺨맞은 이야기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호로자식 취급 받아버리고 말았다.
내게 있어 너무나 슬픈 추억들이다.
내가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색소폰 달인인 송길이 친구만 만나면 ‘슬픈 로라’라는 곡을 연주해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하는 것도, 바로 그 슬픈 추억을 되새기고 싶은 생각에서다.
결국 이날 끝판에 나는 두 눈시울을 흥건히 적셔야 했다.
노래방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또 다시 포장마차에서 어울린 술판에서, 규우 친구가 빵집을 하던 울 엄마 사연을 추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너 엄마가 우리 초등학교 동기동창들 모임에 오셔서 빙수를 해주셨어.”
규우 친구가 그렇게 털어놓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연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울 엄마가 그 해에 돌아가셔서 아니라고 했다.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다.
갑작스레 병을 얻어 서울로 대구로 병원을 전전하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전에 그런 사연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누구보다도 엄마에 대한 슬픈 추억이 많은 나다.
긴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태 그 슬픈 추억들을 스스로도 삭여내기 쉽지 않은데, 내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도 하나 도움 준 적 없으면서도 이러쿵저러쿵 뒷담화를 만들어 내는 그들, 참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