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는 멋진 리무진이 서 있었다.
그가 파티석상에 벤외의 차를 몰고 오는건 처음이다.
리무진이라...
거기다 운전기사까지 있었다.
"어떻게 된거예요?"
"내가 당신 차를 운전해 오고, 저 사람이 이 차를 끌고 왔지."
"내 차는 운전하고, 리무진은 끌고 왔다구요?"
"랜트한거야."
"파티때문에요?"
"뭐, 이런저런 이유때문에...어차피 내 차도 없잖아."
차가 출발하고, 그는 차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승차감 좋은데? 이것봐 샴페인까지 있잖아. 하나 구입할까? 우리도 가끔 필요하잖아."
"우리요?"
그 말에 가슴이 떨리면서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파티에 나 데리고 다닐 사람 당신밖에 없잖아."
"리무진은 실용적이지 못해요. 현장에 갈때도 탈수 있어야죠. 역시 벤이 최고에요."
"하지만, 당신은 벤보다 리무진이 더 어울리는걸?"
"굳이 그래야겠다면 전 재규어를 구입하겠어요. 현장에도 무리없이 타고 다닐수 있고, 파티의 주차장에서도 어느 차 못지 않게 미끈한 모습일테니까요."
"그래? 한 번 알아볼까?"
그가 카폰을 들고 이 곳 저 곳에 전화를 하는동안 그녀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월요일날 만나기로 했어. 일주일 안에 빼 주겠다는군."
그가 수화기를 놓으며 말했다.
"재규어를 일주일 안에요?"
"당신이 가끔 가지고 장난치는 케일 사이먼은 그래도 꽤 영향력 있는 사람이야."
"장난친적 없어요."
"요즘은 자주 그래."
차가 멈추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운전사가 뒷좌석 문을 열었을때 두 사람 다 깜짝 놀랐다.
"리무진으로 결정하지 않길 잘했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당신 아버님은 어디 계시죠?"
"LA 형님댁에서 매일 해변에 나가 수영복의 날씬한 아가씨들을 구경하면서 지내고 있지."
"도망 안 가시구요?"
"아버지에게까지 청소 시키지는 않았어."
다시 그녀가 활짝 웃었다.
팔짱을 끼고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날씨 얘기를 하라고 했지?"
그는 긴장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다시 내쉬었다.
"아주 자연스럽게요."
"'좋은 날이죠?'하느데 혹시 소나기라도 쏟아지는거 아냐?"
"그럼 비를 좋아한다고 하세요."
"난 비오는거 싫어해. 거짓말 할 수는 없잖아."
"엘리트는 정직하죠."
대화를 길게 끌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나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있었다.
"사람들이 내 외모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줄 몰랐어. 전부 내가 근사해졌다고 하는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다 다시 손가락을 비볐다.
"정말 끈적이지 않네?"
"당신이 청소를 안할려고 도망다니는 동안 세상은 변했다구요."
"청소 얘기는 그만하자. 아, 지겨워지는데? 한시간이나 넘게 있었어."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정보도 좀 얻고 그래요. 내 옆에서는 아무것도 얻을수 없다구요."
"필요한 정보같은거 없어."
"환타지 그룹에서 비버리 힐즈에 호텔 짓는다는 말 못 들었어요?"
"그런 얘기 해주는 사람은 없던데?"
"난 들었어요. 공사권 따고 싶지 않아요? 환타지 그룹이면 작은 규모는 아닐텐데..."
"비버리 힐즈에 아직도 호텔 들어설 자리가 남아 있나?"
"직접 알아보세요, 사장님."
"그래, 내가 사장이지."
그가 어디로 갈지 두리번 거리고 있을때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환한 금발에 녹색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에게 다가오더니 매혹적인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케일 사이먼. 전 로레타 한슨이에요. 댁과 춤을 추자고 권해도 파트너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이죠, 한슨양. 얼마든지요."
"고마워요."
두 여자의 대화를 듣던 케일은 로레타 한슨이 손을 잡자 놀라 진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잠깐만요, 한슨양. 사장님이 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나봐요. 말씀하세요, 사장님."
그가 로레타 한슨에게서 등을 보이고 서서 진을 내려다 보았다.
"춤을 추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저 여자랑 춤을 춰?"
"한슨양이 누구인지 몰라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난 처음 보는것 같은데..."
"환타지 그룹."
그의 등뒤에 서 있는 로레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그를 쳐다 보았다.
"네째딸이에요."
"로버트 매크론?"
"네. 2년전에 결혼했었는데 얼마전에 이혼했어요. 한슨은 남편성인가봐요."
다시 한 번 로레타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녀도 같이 웃어 주었다.
"그런 얘기 어디서 들은거야?"
"신문. 사장님도 보잖아요."
"저 여자 이혼한 것도 신문에 실어주나?"
"가십란이 더 재미 있어요. 큰 딸과 세째딸 빼고는 모두 한번씩 이혼 경력이 있죠. 메크론에게 딸만 여섯인건 알고 있죠? 빨리 가 보세요. 표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가 '끙'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싫은 소리를 내긴 했지만 로레타의 표정으로봐서 그가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갔다.
두 사람이 춤추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보았다.
춤을 마친 두 사람은 반대편 자리로 갔다.
와인잔을 그녀에게 살짝 들어보이고 그의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과 얘기를 시작했다.
곧 매크론이 합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시종일관 웃음띤 얼굴이었고, 로레타 역시 그의 팔에 매달려 수줍게 웃고 있었다.
진한 배신감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야할 이유가 없는데...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려 파티장을 나와 발코니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밤이 되어 있었다.
별들을 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케일 사이먼의 얼굴이 떠 오른다.
"한 참 찾았잖아. 여기서 뭐하는거야?"
"아무것두요."
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답답한 공기가 싫어서 나왔어요."
"이것도?"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들어 보였다.
"물론이에요."
담배를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얘기는 잘 됐어요?"
"무슨 얘기?"
"로버트 매크론과 같이 있었잖아요."
"아, 매크론?"
의자를 뒤로 넘겨 또 까닥거린다.
'저런 버릇도 있었나?'
"당신에게서 들은 얘기외에는 특별한거 없었어."
"그럼 이제껏 무슨 얘기를 하다 온거예요?"
"내 외모."
의자를 바로해서 앉았다.
"옷차림이 깔끔해졌다고 매크론이 말하더군. 로레타는 내
머리모양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는게 어떻겠냐고..."
"그것봐요."
"하지만, 아무도 말랐다느니 흐느적거린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어."
"고상한 분들만 모였는데 그런 서민적인 단어를 쓰겠어요?"
"계속 듣고 있다가는 내 속옷 색깔까지 거론될 것 같아서 그냥 나와버렸어."
"그래도 많이 나아졌네요. 춤까지 추고. 다른때는 30분만에 달아났는데... 봐요, 2시간이나 있었어요."
"그래 너무 오래 있었어. 갑시다."
"춤도 정말 잘 추시던데 더 있다가 가요."
"춤추고 싶어?"
"아뇨."
두 사람이 현관계단을 내려오자 리무진이 그들 앞에 섰다.
"공주가 된 기분이에요."
"여왕님이 된 기분이어야지."
"여왕이라고하면 괜히 나이 들어보이잖아요."
기사가 문을 열어주고 뒷좌석에 올랐다.
또다시 일 얘기에 정신이 없었다.
"매크론은 신중한 사람이야. 마음속에 어느 회사를 택할건지 아마 순위를 정해 놨을걸? 5년전에 환타지몰을 지을때도 그랬어. 빌리 아이언스가 최저가였는데도 그보다 6만달러나 많은 존 트리볼에게 맡겼지."
"그건 위반이에요."
"벌금을 내더라도 더 나은 건물을 짓고 싶었던거야. 트리블은 우쭐해져서 정말 최고의 건물을 내 놓았고."
"그 정도 손해야 몇 달만 있으면 표도 나지 않겠죠?"
"하지만, 같은 수법을 두번이야 쓰겠어? 이번에는 물밑 계약이 이루어질걸?"
"물밑 계약?"
"협회 파티에 나도는 소문이 거짓일리는 없고...모두 덤빌거야. 매크론은 여러 사람을 만나겠지. 그리고 자기 타산에 맞는 곳을 선택해서 뒷조사를 하고 계약을 할거야. 이번에는 공개입찰을 하지 않을거 같아."
"이 일에 욕심 있죠?"
"난 어떤 일이든 욕심 있어. 만약 이번 계약건을 따낸다면 설계는 당신에게 맡기도록하지."
"전 이제 설계는 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못하는건 아니잖아. 비버리 힐즈 동쪽에 있는 경사가 완만
한 언덕에 위치해 있는 땅이야. 주위 경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설계하라구. 언제 한 번 같이 둘러보자구."
"잠깐만요. 조금전에는 아무 얘기 못들었다고 했었잖아요."
"들은 얘기가 아니야. 원래 알고 있었던거야. 공사를 진행중이라는 소식만 몰랐었지."
샴페인을 한 잔 쭉 들이켰다.
"매크론이 비버리 힐즈에 호텔을 지을 만큼의 부지는 그 곳 뿐이야."
"자세히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척 했어요?"
"모른척 한 건 없어. 그의 딸들을 만난적도 없었고. 매크론과도 공식적인 회의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눈것 뿐이고. 그는 내가 무슨 벌레나 되는것처럼 생각하는지 악수하는것조차 어려워하더군."
"그동안은...아니에요."
"그래 지저분했었다구. 오늘이야 예외였지만. 내가 누군지 기억도 못하는것 같았어."
"로레타 한슨과는 어땠어요?"
참았던 질문을 결국 하고야 말았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운전기사의 손이 보였다.
두 사람 다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아가씨 아파트 앞입니다."
"벌써 다 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리무진을 선택하지 않은건 잘 한일인것 같아."
"월요일날 만나요, 케일."
"진. 아무래도 큰일이 난것 같소."
"도대체 무슨 큰일이 자꾸 일어나요?"
"글쎄..."
그녀의 방에 불이 켜지는걸 보고 차를 출발 시켰다.
"잠시 회사에 들렀다 갑시다. 보비를 만나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