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도쟁패 제2권
지은이 : 사마달
-차례-
◈第九章 첩첩산중(疊疊山中)
◈第十章 苦行
◈第十一章 타인의 손에 올려진 運命
◈第十二章 原點으로
◈第十三章 進行
◈第十四章 회생(回生)은 희망의 늪으로
◈第十五章 끝없는 那落
◈第十六章 깊어가는 陰謀
◈第九章 첩첩산중(疊疊山中)
"구하는 자에게는 통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군."
백문원은 유청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유청연은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심장이 계속 뛰는 모양이다.
"이곳에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오."
유청연도 백문원의 손에 들린 서신의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객잔을 나섰다.
막 객잔을 벗어나 그들이 목표로 한 곳을 가려 할 때였다.
<不卜就死>
상당히 자극적인 광고문구(?)가 백문원의 눈을 자극했다.
'점을 보지 않으면 죽인다고?'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지어졌다.
옷에는 복생(卜生)이라고 쓰여져 있다.
이름이 복생인지, 점을 치니까 복생인지는 몰라도.
백문원은 복생(卜生)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삼십 중반의 외모, 짙고 가는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
두텁게 패인 인중과 우뚝 솟은 코, 얄팍한 입술.
강한 개성으로 상대방에게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남겨 주는 외형이었다.
"지금까지 형장의 손에 죽은 사람이 소생이 지금까지 먹은 끼니의 숫자보다 많겠구려."
"꼭 그렇지는 않소."
얄팍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저음이 깔리는 목소리.
"나는 원하는 사람에게만 점을 봐주오."
"형장이 원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요, 아니면 점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오?"
"내가 원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오."
"상당히 공격적인 광고문구에 강요적인 영업 방식이구려."
장난기 어린 미소가 백문원의 입가에 매달렸다.
"그런 방식으로 점을 친다면 상당히 부자이든지 아니면 한끼 걱정을 매일 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일 것이오."
백문원은 양자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후자였다.
대개의 점을 친다든지 복을 봐준다든지 하는 사람이 그러하듯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의 행색 또한 부유한 사람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지난 삼 일 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지금 배가 몹시 고프며 당신에게 점을 치기로 결정을 했소."
"거부한다면?"
"당신을 죽여 버리겠소."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닥쳤다.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의 공기를 경직시키고, 입구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객잔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기이하게 비쳐졌다.
서로의 긴장감이 극에 이를 찰나,
"그렇다면 우선 만두라도 한 접시 바쳐야 되겠군. 목숨 값으로 그 정도면 아주 싼 것이니까."
복생은 얼굴빛을 바꿨다.
"점을 치지 않겠다는 것이오?"
"오늘 이경(二更)까지 미뤄 달라는 거요."
복생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
"지금이 아니라?"
"소생은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을 나눌 수 없구려. 그럼 이만."
백문원은 곧장 면사 여인을 데리고 문제의 전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말없이 백문원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복생, 그도 서서히 등을 돌리며 나직한 독백을 흘려냈다.
"어쩌면 시신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최초의 점쟁이가 될지도 모르겠군."
의미심장한 말.
그는 의도적으로 백문원에게 접근을 한 것이며 현재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어떠한 것인가를 마치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지 않는가.
한편 백문원은 고루거각들이 늘어서 있는 중심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낮의 대로변인지라 경공술에 제약을 받게 되니 그로서는 그저 최대한으로 걸음을 빨리 옮길 뿐이었다.
약 이각의 시간이 지난 후, 백문원은 문제의 인영이 자취를 감췄던 전각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함이 전각 주위를 맴돌고 있는데.
잠시 안의 상황을 살피던 백문원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 면사 여인이 백문원의 옷깃을 잡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초청에 응하는 것이니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오."
말을 함과 동시에 백문원의 팔은 어느새 닫혀진 대문을 열고 있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는데도 소음 하나 일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정원.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선 백문원과 면사 여인은 대문 안에 감춰진 화려한 정원에 눈길이 갔다.
천혈마금에 관한 생각으로 인해 전각 밖에서 두 사람이 가졌던 분위기는 결코 밝은 것이 아니었다.
현재는 초겨울의 문턱에 서 있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오월에 볼 수 있는 꽃들이 정원에 만개해 있으니.
뿐인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듯, 정원에는 형형색색의 치장을 한 화접(花蝶)들의 군락도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백문원의 눈을 자극한 것은 아니다.
정원을 보고 백문원이 놀라고 있는 점은 단 하나.
일상적인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처럼 꽃과 나무를 다듬고 있는 정원사(庭園師)들 때문이었다.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보다도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이 곳곳에서 조그마한 단도로 가지를 자르고, 꽃잎을 따는 등 시각적으로는 상당히 분주한 모습을 주고 있지만, 청각적으로 백문원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날 험난한 파도 앞에 서 있는 귀머거리처럼.
"놀라운 일이구려. 이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나는 아무런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니."
그때 정원에서 일을 하던 여인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는 백문원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지극히 존경하는 사람에게 예를 표하듯한 공손한 자세.
"오늘 아침에서야 백 공자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바삐 준비를 하느라 먼저 나가 접대를 하지 못했음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공자님."
의외였다.
"소생이 이곳에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그 말에 웃음으로 대신 대답을 하는 여인들.
그 웃음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만발한 꽃과 함께 평생 잊지 않을 기억으로 남을 만큼 화사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마치 훈련을 받은 듯 한결같은 동작.
이미 오래 전부터 방문객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한 모습이었다.
면사 여인이 백문원을 따라 내전으로 들어가려 할 때,
"유청연(柳淸姸) 소저께서는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백문원과 면사 여인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춰졌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표정은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
"제 이름까지 알고 계신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담담하게 말하긴 하지만 그녀 역시 무척 놀란 듯 가늘게 떨려 나오는 음성을 완전히 억제하지는 못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그들은 내전에 들어가는 백문원의 뒷등에 의미심장한 인사를 하고는 유청연을 데리고 다른 쪽으로 사라져 갔다.
백문원이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유심히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이 있었다.
바로 걸신과 문수연.
정말 그들은 찰거머리보다 더 진득하게 백문원을 따라다녔다.
"킬킬… 어떠냐, 독주화? 이래도 내 주장이 틀렸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문수연은 아무 말 못했다.
백문원은 마치 걸신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가 예측한 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문수연의 머리가 점점 혼란해졌다. 뭐가 뭔지 도대체 복잡하게 돌아가는 일들.
왜 잘 나가던 백문원이 돌연 한 사람에게 밀서를 받고 또 이곳으로 온단 말이냐?
"제기랄!"
머리를 막 흔드는 문수연.
"아―! 술이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겠군."
문수연은 혼자말을 늘어놓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술집으로.
내전에 발을 들여놓은 백문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내전 안의 공기.
도합 삼십육 명이 출검의 자세로 정면으로 들어오는 백문원을 향한 모습은 마치 먹이를 향해 막 달려드는 독사의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이곳은 발검(拔劍)의 방이오. 우리 삼십육 명이 동시에 발검하며 공격하는 일초를 받아낸다면 당신은 이 방을 통과할 수 있게 되오."
"마치 소생에겐 선택의 여지란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삼십육 인이 십년의 세월을 각자의 한 초식에 쏟았다면 대답이 될 것이오."
'십년이라.'
백문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한 가지 초식에 십년의 성상을 쏟아부은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절로 숙연해졌다.
"검을 향한 여러분들의 집념에 존경을 표하는 바이오."
백문원은 포검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최선을 다함으로써 답례를 대신하겠소."
말과 동시에 그들은 순식간에 각자의 위치를 잡았다.
"우리는 구궁팔괘진법에 따라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초식을 발검술과 함께 펼칠 것이오. 원래는 칠십이 명이 함께 펼쳐야만 하지만 위력만큼은 그에 못지않을 것이라 자부하오."
"인정하겠소."
백문원의 표정은 신중하게 변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평범하게 수련을 쌓아온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삼십육 인이 삼십육 방위에서 펼쳐내는 초식을 단 일초(一招)를 사용하여 막지 못하면 당신이 지는 것이오."
"만약 본인이 막아낸다면?"
수뇌격으로 백문원에게 말을 하던 중년 검수의 눈빛이 빛났다.
"곧 알게 될 것이오."
문답이 끝나자 서로 대치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삼십육 방위에서 쏟아지는 기세가 백문원을 앞뒤로 관통할 듯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발검과 동시에 삼십육 인이 펼치는 삼십육초식.
스스슥―!
구궁팔괘진의 변화 운용에 따라 각기의 방위를 옮겨가며 백문원을 포위한 채 바싹 조여오는 기세.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듯 그들은 서서히 백문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진의 운용에 결코 틈이 없었다.
'조여 오는 각도와 진의 변화를 단 일초에 읽어내야 한다!'
한 번의 기회.
삼십육 방위를 단 일검(一劍)으로 승부해야 한다.
서른여섯 송이의 매화를 땅에 떨어지기 전에 한 수에 찌르듯이.
백문원의 눈빛이 빛났고, 그의 손은 번개처럼 검을 잡아갔다.
"이곳이 아가씨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요."
백문원이 전각 안으로 들어간 뒤 정원에 있던 여인들은 유청연을 별원으로 데려갔다.
별원 뒤의 풍경은 전각 앞쪽에 위치한 화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모든 종류의 꽃이 만발하고 나무에 실록이 풍부한 아름다운 정원이긴 하지만 조그마한 돌담으로 떨어지는 폭포, 그 폭포의 굽이에 세워진 소탈한 정자, 그리고 물길을 따라 피어난 청포의 매력은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품위가 갖추어진 풍경이었다.
아름답지만 화사한 탕부와 현숙미가 풍기는 여인에 정원과 이곳의 미(美)를 비유할 수 있을까.
유청연은 주변을 천천히 되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어떤 감회와 놀라움이 반반씩 교차하는데.
"놀랍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에요."
유청연은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유청연의 물음에 여인들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했거든요."
"이곳에 유청연 아가씨께서 올 것이니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여인들은 유청연을 둘러싸고는 신이 난 듯 저마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는 한마디씩 했다.
유청연의 표정은 갈수록 묘해졌다.
"제가 이곳에 올 줄 어떻게 아셨죠?"
"그건 우린 몰라요."
"그냥 시키는 대로 꽃을 가꿨고 정원을 다듬었을 뿐이에요."
그들은 말을 하면서도 시종일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 것일까?
"그런데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죠?"
"이 정원이 아가씨 마음에 들었잖아요?"
유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와 같은 풍경이 있는 곳에서 성장을 했는지라 자신도 모르게 이런 광경을 마음속에서 그리워하게 되었다.
"누가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유청연은 의문에 싸여 자신도 모르게 독백을 흘려냈다.
그때,
"그 대답은 제가 해드리지요."
돌연 정자의 맞은편에서부터 청아한 음성이 들려 나왔다.
가을밤의 만월 아래서 듣는 비파 소리와도 같은, 맑으면서도 고졸한 분위기의 목소리.
"공자님!"
유청연을 둘러싸고 있던 소녀들은 그 목소리를 듣자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절을 했다.
이십대 후반의 문사풍의 청수한 사내.
유달리 짙은 머리와 눈썹은 입고 있는 백의와 선명하게 대조를 이뤄 강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런 가운데 호수라도 담아낼 듯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한 번 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영상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유청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원을 직선으로 가로지르고, 조그마한 폭포가 하류를 이루는 개천도 횡단하며.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정원의 꽃잎 한 떨기도 떨어지지 않았고, 소류(小流)의 물방울 하나 튕겨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
유청연은 그의 거칠 것 없는 걸음 속에 감추어진 놀라운 경공술에 탄복했다.
언젠가 보았던 백문원의 경공술을 지금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청년의 모습에 비교해 보았다.
'백 공자의 경공술이 일품이긴 하지만 이 공자의 경공술도 그에 뒤지지 않는군.'
유청연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그는 유청연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모으며 먼저 인사를 했다.
"단온약(段穩躍)이라 합니다."
포권을 한 채 가볍게 허리를 숙이는 그 모습에는 절도가 있고 자연스러운 예의가 흘러 나왔다.
하루아침에 닦은 것과는 기질부터가 다른 그런 류의.
단온약.
바로 동정호에서 쇄혼금 엽우를 처절하게 깨뜨렸던 장본인.
그가 개봉에서 유청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미인이시군요, 보기 드문."
단온약의 깊숙한 눈동자가 유청연의 가려진 면사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가려진 면사 안을 투시라도 하는 듯.
"무례하시군요."
가벼운 질책.
그러나 단온약의 말이 싫은 것만은 아니다.
유청연의 뇌리에서는 또다시 단온약이라는 청년과 백문원의 상이 겹쳤다.
백문원이 절도가 있고 상대를 절로 은연중에 압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발산하는 인물이라면 단온약이라는 청년은 맑고 경쾌하다.
비록 백문원이 자신에게 최대한의 예우로 대해 왔고 한점의 사심도 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같이해 온 백문원보다 오히려 단온약에게 거리낌없이 하고 싶은 말과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계시는 듯하군요?"
약간은 질책성의 어조.
"실은 소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했습니다."
단온약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제가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나요?"
"예측한 것이 아니라 계획을 한 것입니다."
"계획? 한 달 전부터?"
유청연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백문원과 함께 옥문관을 넘은 지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이미 한 달 전에 자신을 이곳에 데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니.
"공자의 진정한 신분은 무엇이죠?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죠?"
순식간에 유청연의 눈매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며 면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다 불현듯 인식하게 되는 백문원의 존재.
그녀의 고개가 단온약을 향해 홱 돌려졌다.
"그렇다면 백 공자를 전각 안으로 들어가게 한 것도 이미 계획적이라는?"
* * *
촤촤촹―!
어두운 내전의 삼십육 방위에서 동시에 청광이 순간적으로 피어올랐다.
찰나지간에 암흑의 공간에서 명멸하며 그 청광이 만들어 낸 것은 구궁(九宮) 안에 포위된 북두(北斗)의 형상.
그리고,
촤라라락―!
청광이 명멸함과 동시에 마치 태양이 땅거죽을 뚫고 솟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게 하는 빛이 그 중앙에서 퍼져 나왔다.
그 빛은 사라져 가는 서른여섯 가닥의 청광을 환상처럼 쪼개며 사방으로 발산되었고,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허공에 삼십육 개의 서로 다른 얼굴이 짧은 순간의 붉은빛을 빌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퍼퍼퍽―! 쿵―! 쿠쿵―!
인육(人肉)과 혈흔이 벽에 낭자하는 듯, 듣기 거북한 소리가 연이어 터졌고, 내전 바닥 곳곳으로 둔중한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곳곳에서 기름 타는 냄새와 함께 횃불이 타오르며 내전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백문원의 의복 곳곳에는 검이 스치고 간 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져 있었다.
마치 바둑판의 줄을 그어 놓은 듯 그들 검흔(劍痕)은 한결같이 일정한 길이와 일정한 간격으로 파여져 있었다.
삼십육 인의 검이 일제히 그의 몸을 스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외형적으로 입은 자상은 없는 듯 보였다.
최대한의 거리까지 상대방이 접근하도록 몸을 노출시킨 후, 그는 압축된 폭약이 한꺼번에 터지듯 초식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삼십육 인의 생명을 동시에 절명시켜 버린 것이다.
비록 목숨을 내건 대결이긴 했지만 백문원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살인과 복수가 난무하는 강호라고는 하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취한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이들과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다.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남을 죽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백문원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내공(內功).
무림인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내공이 이들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오로지 단 한 가지의 초식을 익히고 그것을 펼쳤을 뿐, 그들의 초식에는 연이어지는 내공의 흐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
처음 백문원은 그들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인해 그러한 점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과 일초식을 교환하는 순간 그들에게 내공이 일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진기를 거두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단 일푼의 진기라도 가진 자의 공격이 그렇지 못한 자와의 차이가 어떠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러한 이유에서 내공이 없는 자와의 대결에서는 초식에 중시를 할 뿐, 검에 진기를 주입해서 비무하는 예가 없었다.
'진정한 학자는 오히려 말과 글을 아끼듯 검을 잡은 사람은 검을 아껴야 한다는 사부님의 말씀을 잠시 잊고 있었다.'
죽은 시신들을 바라보며 그런 자책과 상념을 할 때,
"안으로 들어오시오, 백 공자!"
내전의 안쪽에서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백문원을 부르는 음성은 나직했으나 선명하였고, 그 소리가 백문원의 귀에 들렸을 때는 묵직한 무게로 그의 귀를 자극했다.
중후한 내공이 목소리에 실려 있다는 뜻인데.
백문원은 지체없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내전.
이곳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채 도합 열여덟 명이 서 있었다.
한결같이 검은 흑의를 입은 중년 문사.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에는 숱한 감정들이 갈무리된 채 무심하게 백문원을 향하고 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의 병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
십팔반 병기를 각각 하나씩 터득한 십팔 인의 고수들.
고요하게 정지된 상태로 굳어 있는 풍경과도 같은 모습에 백문원이 한발을 들여놓자 그 풍경은 이제 살아 숨쉬는 생물과도 같이 기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뭉쳐 있는 안개에 한발을 들여놓으면 안개가 사방으로 퍼지듯이.
"우리는 자네가 십팔반 병기를 상대함에 있어 각 병기에 맞는 적절한 대응과 임기응변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할 것이네."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말하게."
"왜 내가 굳이 이런 관문을 치러야 하는 겁니까?"
처음 전각에 들어서면서부터 백문원이 알고 싶은 것이었다.
다짜고짜 그는 이 전각으로 안내되었고 들어서자마자 그는 부득불 살인을 했다.
왜 살인을 해야 하는지, 그 이전에 왜 이런 일을 치러야 하는지 그는 궁금했다.
"지금은 알려 하지 말고 상황에 충실하게.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 있다네."
"소생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자네는 우리의 서신을 받지 않았나?"
"서신? 그……."
"함부로 그 말을 꺼내지 말게!"
막 무언가 말을 하려던 백문원의 말을 번개같이 막았다. 마치 천기라도 누설하는 것을 막는 것처럼.
백문원을 대하는 이들의 표정도 그만큼 엄숙했다.
"자네가 그 서신을 받고 이곳에 왔다면 자네는 이런 일을 거부해서는 안 되네."
"그것이 무고한 죽음을 숱하게 만들어 내도 말이오?"
"사사로운 것에 연연해 하는 자는 큰 것을 얻을 수 없네. 더 이상 거론하지 말게나. 더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 십팔숙(十八宿)을 꺾으면 되네."
순식간에 여러 병장기 뽑히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이들은 앞전에 있던 사람들과는 달리 중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연무를 한 사람인 듯, 병기를 뽑는 하나의 동작에서 나는 소리만으로도 백문원의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
더 이상 백문원으로서도 말로만 상황을 이끌고 갈 순 없는 처지.
"좋소. 이곳의 규칙은?"
"우리 십팔 인의 혈도를 점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이기는 것이네. 하나 우리는 그대의 목숨을 노릴 것이네."
"불공평하구려."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지 않은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들은 곧장 대치상태로 들어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공 수위도 이미 일류급에 해당하는 데다 이들은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을 테니 그들이 펼치는 연환공격이 얼마의 위력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맨 처음 긴장 상황을 깨뜨리고 펼쳐진 공격은 채찍이었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철편이 먼저 백문원의 전신을 핥아 내리려는 듯 전신 요혈 곳곳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직선으로 이어지는 힘이 가장 강하다는 창(槍)이 백문원의 하반신을, 허공에서 거대한 파괴력을 함축한 도끼가 백문원을 반으로 쪼갤 기세로 내리쳐졌다.
백문원은 섭선을 떨쳐내며 채찍의 공격을 막는 한편, 우측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창을 향해 좌수를 원으로 돌리며 휘둘렀다.
백문원이 허공에 그려 놓은 원의 공간에 창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어지는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그 창은 자신의 머리를 쪼갤 듯 내리치는 자의 손목을 향해 갔다.
이렇게 되자 그는 도끼를 미처 다 내리치지 못하고는 비스듬히 방향을 바꾸어 날의 옆면으로 자신의 손목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이화접목(李花接木)의 수법!"
한마디 칭찬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연이은 공격이 백문원을 덮쳐 왔다.
두 자루의 쌍극(雙戟)과 월(鉞), 철퇴가 백문원의 두 팔과 허리, 하반신을 쓸어오며 쉴새없이 백문원을 몰아쳤다.
이 무기들은 아까와는 달리 육중한 무기에 힘이 가해진 것이라 공격이 펼쳐지자마자 위맹한 기세가 백문원의 전신에 전해졌다.
백문원의 보법이 빠른 속도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쌍극의 강한 정면 공격은 월(鉞)이 측면을 막아 주면서 더 위력이 증대됐고, 이어 백문원의 퇴로를 아예 없애 버릴 듯 내리쳐지는 철퇴.
'빠르고 강하면서도 기(技)를 갖추었군.'
쌍극이나 철퇴 같은 류는 힘을 위주로 하는 무기인지라 위력에 비해 다소 초식적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초기에는 빠른 진전을 보이다가 숙련된 기간이 늘어날수록 검이나 창과 같은 무기의 위력에 비해 약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백문원의 전신을 향해 펼쳐지고 있는 쌍극과 철퇴는 그런 상식과는 달랐다.
그러나 백문원은 당황하지 않고 빠른 보법만으로 이들의 공격을 계속 피해 내고 있었다.
십팔 인 중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의 눈은 시종일관 백문원의 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독특한 보법이군.'
노도와 같이 퍼붓는 세 명의 연환공격도 백문원의 보법 앞에서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저 상태가 계속된다면 천초가 지나더라도 승부를 내지 못한다.'
"한꺼번에 공격을 한다고 원망은 하지 말게나!"
말과 함께, 십팔 방위에서 동시에 열여덟 개의 무기가 백문원을 향해 유성우처럼 쏟아부어졌다.
"유 소저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시는 것 같군요."
고향을 찾은 듯 평온해 보이던 유청연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해 자신을 주시하는데도 단온약은 부드럽게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유 소저께서 한 며칠 묶었다 가는 곳이라서 이렇게 꾸며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를 감금해 놓겠다는 뜻인가요?"
단온약의 눈빛은 긍정의 대답을 담고 웃고 있었다.
"그런 과격한 단어는 아가씨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어느 곳에서도 받지 못할 환대로 아가씨를 보필해 드릴 테니까."
말을 하며 그는 처음 화단에서부터 유청연을 안내한 여인들을 지목했다.
사뿐히 고개를 숙이는 여인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일방적이면서도 무례하시군요."
눈가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머물고 있지만 그녀의 말투는 더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상대를 나무랐다.
"제가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말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단온약의 손이 부드럽게 뻗쳐지며 유청연을 제지했다.
동시에 유청연은 다리의 혈도를 점혈당해 움직이지를 못했다.
'단순히 손을 들었을 뿐인데 언제 봉혈까지?'
"계속 소저의 뜻을 고집하려 하시면 저는 무례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단온약은 진중한 표정으로 유청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실없는 사람처럼 웃음이 져 있을 때와는 달리, 상대방을 압도하며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담겨져 있었다.
손을 대기에는 너무도 뜨거운 불덩이처럼, 담아 두기에는 너무 무거운 중수(重水)처럼 깊이 침잠된 채 상대를 주시하는 눈빛.
상대방을 해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자신의 주장을 계속 관철시키려 충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러면 한 가지만 물어 보겠어요."
"소생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리리다."
유청연은 다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의 심리는 묘하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는 한번 저지당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놓고 만다.
처음 고향 같은 포근함을 느끼던 이곳도 이제 어쩔 수 없이 억류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답답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니.
"저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죠?"
그녀의 외모와 행동을 미루어 엄격한 가문의 교육과 소양을 쌓았다는 것을 느낀 단온약이었지만 지금의 말투는 여인의 본능적인 투정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일곱 달이 지나면 유 소저께서는 만 이십 세가 된다고 알고 있소만."
유청연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내린다.
"어떻게?"
말도 떨려서 잘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완벽하게 자신을 알고 있는 자가, 또 있을까?
그러나 단온약은 빙그레 웃었다.
"별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 소저의 이십 세 생일을 축하해 주는 영광을 독점하고 싶은 것이고… 또한 그때까지 유 소저의 옆에 있고 싶을 뿐이오."
유청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신… 그 말은?"
"쉿!"
단온약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한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한 눈을 찡긋해 보였다.
"천기는 함부로 누설하는 게 아니랍니다."
원래 수려한 얼굴에 그런 장난기는 단온약의 새로운 면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유청연에게 있어 그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럼 백 공자는 어떻게 되는 거죠?"
"백 공자를 위해서는 또 다른 안배가 마련되어 있지요."
단온약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음음(陰陰)과 양양(陽陽)은 상쟁(相爭)하지만 음양(陰陽)은 상보(相補)하는 이치라 할까?"
그 말의 의미를 유청연이 모르랴.
"물론 백 공자는 현재 관문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백 공자가 지금 들어가 있는 관문을 통과한 후 얻게 되는 특전에 비하면 그 정도는 사소취대(捨小取大)라 말할 정도도 안 된다는 사실, 물론 관문을 다 통과한다는 조건이지만."
유청연은 서서히 단온약이라는 청년에 대해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부드러운 얼굴 표정 속에 감추어진 그의 심계(心計)를 누가 추측할 수 있을까.
'백 공자가 무사해야 할 텐데.'
아직 사태의 추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할 백문원의 신변이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백문원은 또 하나의 내전을 향해 힘겹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섭선을 타고 팔 쪽에 생겨난 자상으로부터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왼쪽 옆구리도 살점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내전을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하얗던 의복은 곳곳이 찢어진 채 피범벅이 된 상태다.
방금 전의 마지막 격돌.
그는 최선을 다해 십팔 인의 연합공격을 막아냈지만 팔뚝을 스치는 검과 옆구리를 파고드는 창, 그리고 다리를 가격하는 철퇴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고 그 결과 깊은 상처를 얻게 되었다.
"이 내전에 있는 사람은 황제(皇帝)만큼의 신분이라도 지닌 것일까? 이렇게 만나기가 힘들어서야."
자조적인 웃음으로 씁쓸한 기분을 털어내려 했지만 육체의 고통이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백문원은 세 번째의 내전 입구에 멈춰 섰다.
"어서 오게!"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정이 담긴 음성.
유달리 넓은 내전의 정 중앙에 두 사람이 선 채 백문원을 반겼다.
좌대 위에 앉아 금을 타고 있는 중년 부인과 거대한 장궁을 들고 서 있는 중년인.
부인의 얼굴은 지극히 자상함과 정겨움이 담겨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어머니의 품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중년인은 남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체구와 그에 걸맞는 인상을 지녔다.
백문원은 그의 전통에 세 대의 화살만이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곳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네."
"사실, 여기까지 자네가 오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중년 부인은 백문원의 몸 군데군데 입은 상처를 주시했다.
"십팔숙을 상대하고도 그 정도 부상밖에 입지 않았다니… 놀랍군."
그들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의 부상은 너무 의외라는 듯.
"이분은 뇌전(雷箭) 독고후(獨孤侯)라는 분일세. 자네가 들어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염완교(琰琬嬌)라 한다네."
백문원에게는 두 사람의 이름이 다 생소했다.
"자네가 우리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야. 우리는 지금까지 강호에 발을 디뎌 본 적이 없거든."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두 분이 강호에서 활약을 하셨더라면 현재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고수들의 개념이 상당 부분 바뀌어야 할 겁니다."
"과분한 말이네. 진기를 한번 응용해 보게나. 무리가 가지는 않는지."
염완교는 백문원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부드러운 음색으로 한마디를 하며 동시에 그녀의 손은 금의 현 위를 희롱하듯 미끄러졌다.
"밑천이 다 드러나도록 힘을 써야 될 게야, 여기서는."
"소생은 준비가 다됐으니 선배들께서 준비가 끝나면 언제든 시작하셔도 됩니다."
중년 부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군. 아까 받은 보고에서 자네는 상당히 심기가 불쾌하다고 했는데."
"한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중년 부인의 말대로였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깔리기는 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백문원의 얼굴에는 생기가 흘렀다.
"그 이유를 나도 좀 알게 해주지 않겠나?"
"두 선배님과 비무를 한 후에는 결과에 관계없이 더 즐거워질 것이라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아―!"
두 부부는 한 소리로 탄식을 했다.
"그렇군."
"틀림없이 자네는 더 즐거워질 것이네."
"고맙습니다."
"우리는 자네를 최대한 즐겁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부부는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얼굴에는 친근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지만 상대에게 경각심을 주고도 남을 만큼 그들의 내공은 극한으로 팽창했다.
"자네가 이 칠현금으로 탄주하는 곡을 들으면서 내 바깥주인이 쏘아내는 세 대의 화살을 막으면 관문을 통과할 수 있네."
"그럼 시작함세."
띵―!
이백(李白)의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라는 칠언율시.
이백 자신이 선주에 은거하는 것을 도연명과 비겨 벽에 기록한 시로, 강호에 은거하지 않고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두 부부의 마음이 담겨 있는 시이기도 했다.
부인이 금을 한 번 가볍게 뜯었고 동시에 백문원은 내장이 울려 나옴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심장도 금이 울리는 순간 더 크게 박동함이 느껴졌다.
'이건?'
백문원의 눈빛이 굳어졌다.
동시에 금 위에 손을 올린 채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 부인에게 시선이 고정되고.
"혹시 추혼마고(墜魂魔鼓)를 알고 계십니까?"
"견문이 넓은 젊은이군. 그러나 나의 금을 추혼마고와 같은 선상에 올려놓았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네."
백문원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삼키며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방어태세에 들어섰다.
동시에,
띵―! 띠이잉―!
사십대에 가까운 부인의 손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희고도 고운 손가락이 금을 튕겨가기 시작했다.
"杜陵賢人淸且廉(두릉현인청차렴)."
<두릉의 어진 사람 맑고 욕심 없어.>
"으음!"
백문원은 무의식중에 신음을 흘렸다.
힘을 기반으로 한 패도적인 음도 아니건만, 염완교가 금을 타자 그 소리에는 날카로우면서도 무한대의 힘이 담겨져 있었다.
"東溪卜築歲將淹(동계복축세장엄)."
<동계에 초막 짓고 오랫동안 살아왔네.>
'음공의 위력을 설명한다면, 이 부인이 금을 타는 것이 가장 적합한 예일 것이다.'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이 드는 찰나,
파앙―!
백문원의 눈동자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독고후.
그는 찰나적으로 집중이 흐트러진 백문원을 놓치지 않고 한 대의 화살을 날려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 화살을 꺼냈고, 그것을 시위에 매겨 날려 보냈는지를 백문원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발검보다도 빠른 궁술.
반장 길이의 철궁이 백문원의 미간을 향해 일점으로 쏘아갔다.
급히 정신을 다시 가다듬은 백문원에게도 날아오는 화살의 첨단이 보였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어도 그의 신법을 펼쳤겠지만 백문원으로서는 독고후의 궁술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급히 두 손으로 허공을 합장하듯 격하며 화살을 잡아 보지만, 정지한 좌우의 힘은 전진하는 물체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는 원리.
극한 내공을 끌어올렸으나 그는 화살의 힘을 채 소멸시키지 못해서 급히 고개를 옆으로 꺾어 방향을 틀며 화살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쿵쿵쿵―!
화살의 여력에 백문원은 크게 세 발자국을 내전 바닥에 깊숙이 찍으며 물러났다.
그리고 백문원의 눈앞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검은 머리카락들.
'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떨어진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숨이었을 것이다.'
간신히 화살은 막아냈지만 백문원의 내부가 진탕되었다.
그때,
띠이잉―! 띠이이―!
"宅近靑山同謝 (택근청산동사조)."
<집이 청산에 가까워 옛날의 사조(謝 ) 같고.>
다시 들려오는 염완교의 금 소리.
"크으윽―!"
백문원은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하며 혈류의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목을 타고 비릿한 것이 역류하는 것을 간신히 참는데.
그러는 순간 백문원의 눈에 독고후가 활시위를 자신을 향해 또다시 겨누는 모습이 잡혔다.
티잉―! 시위를 퉁기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백문원이 급히 보법을 펼쳐 방위 이동을 하는데,
'아차―!'
보법을 밟던 백문원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이번에 독고후는 화살을 시위에 매기지 않고 그냥 퉁겨낸 것이다.
백문원의 귓가로 바람 소리가 스치고, 진기의 운용을 멈출 새도 없이.
쉬이익―!
이번에는 진짜로 독고후는 시위에 화살을 매겨 튕겨냈다.
그러나 백문원을 더 긴장하게 하는 다음 광경.
시위를 떠난 화살이 무색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또 다른 화살이 시위에 매겨진 채 백문원을 향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염완교의 우수 식지에 걸린 현 하나도 마치 화살처럼 바짝 당겨졌다.
백문원은 섭선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리며 섭선에 극한의 내공을 집중시켰다.
팍―!
첫번째 화살이 섭선을 치는 충격은 의외로 가벼웠다.
그러나 동시에 쩌어억―! 하는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독고후가 두 번째로 쏘아낸 화살이 첫번째 화살을 관통하며 섭선이 보호하고 있는 심장을 때리는 것이니.
혀를 내두를 신기(神技)에 백년거목을 쪼개는 뇌전(雷電)을 방불케 하는 뇌전(雷箭)의 위력.
부르르―! 섭선과 백문원의 신형이 동시에 떨렸다.
독고후의 궁술은 독특한 것이어서, 한번 화살이 중앙의 장애물에 차단이 되더라도 여력이 있어 그 장애물을 능히 뚫을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마치 벌이 침을 쏘면 그 침이 지능적으로 상대의 살갗을 파고들어가는 것처럼… 독고후의 화살은 맹렬한 회전을 하며 섭선을 뚫을 기세였다.
백문원의 가슴을 파고드는 극단의 고통.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띠이잉―!
"門垂碧柳似陶潛(문수벽류사도잠)!"
<문 앞엔 수양버들 있어 도잠(陶潛)과 흡사하네!>
마지막 시구 한 소절이 끝남과 동시에 염완교도 길게 늘어뜨린 현을 백문원의 가슴을 향해 정확히 튕겨냈다.
투웅―!
보이지 않는 음강(音 ) 한 가닥이 화살의 뒷부분을 향해 가고,
"크으윽―!"
백문원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새나오는 신음.
마치 못의 머리를 때리는 망치처럼 가슴을 뚫으려는 화살에 그녀가 튕겨낸 음강(音 )이 화살을 매개로 힘을 배가시키며 백문원의 가슴을 꿰뚫었다.
쿵쿵쿵쿵―!
백문원이 정신없이 뒷걸음질치고, 한걸음을 뒤로 내디딜 때마다 한치 이상 되는 족적(足跡)이 내전의 대리석에 화인처럼 깊이 새겨졌다.
퍼억―!
내전의 뒤로 밀려나던 백문원은 벽에 강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벽의 일부분이 깨지며 돌 무더기가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상황이 종료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내전에 정적이 흘렀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독고후 부부.
"우리의 예상대로 저 젊은이는 당신의 허초(虛招)를 예측하지 못했군요."
"만약 두 번의 허초를 더 사용했더라면 저 청년은 이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염완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당신의 화살은 일곱 개를 사용해서 칠전뇌(七電雷)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특명을 받았기에 세 대의 화살만 사용하게 된 거죠."
"부인 또한 칠언시(七言詩)의 전반부만 탄주하지 않았소?"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두 사람의 애정은 서로의 무공만큼 돈독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탄금을 할 때 부인의 손속이 조금만 더 사정을 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오."
"부인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삼 푼의 진기를 회수했다는 것을 독고 선배께서는 모르고 계십니까?"
돌 무더기 안에서 들려 나오는 소리.
두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이동했다.
백문원. 그는 내전의 담장에서 간신히 빠져 나왔다.
그의 가슴에 꽂혀진 화살은 한치 이상 가슴을 뚫고 들었으며, 두 손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산발한 머리와 얼굴에는 흙먼지가 가득했고, 입 아래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한마디로 처참한 패배.
두 사람은 말없이 백문원을 바라보았다.
백문원의 정신력 또한 그의 무공만큼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양반은 오 푼의 진기를 회수하지 않았음을 질책하는 것이라네, 젊은이."
중년 부인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축하하네. 자네는 관문을 통과한 것이네."
백문원은 씁쓸했다.
'이것도 통과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문원은 강호에 들어온 후 세 번 비무를 했다.
옥문관에서의 유형과의 십초 비무.
백운평에서 문수연과의 대결.
그리고 검절 범문우의 모옥에서 흑백쌍마와 가졌던 비무.
그들 개개인이 무시 못할 고수이긴 했지만 오늘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부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만약 이분들이 진정한 실력을 펼쳤다면 나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백문원은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목숨 하나를 거저로 얻은 사람처럼.
"오늘 두 분 선배님의 가르침은 앞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몹시 힘겨워하면서도 백문원은 포권으로 예를 갖췄다.
가슴에 화살이 꽂힌 채 포권을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거북했고, 통증이 다시 몰려왔다.
그러나 백문원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 뼈저리게 경험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절대적인 위력을.
* * *
그림 같은 정원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누각 위.
탁자가 놓여져 있고, 몇 개의 족자와 화병이 소탈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고 있는 풍경 안에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
백문원과 한 여인.
백문원은 처절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달리, 의관을 새롭게 하고 가슴에 꽂혀 있던 화살도 뽑고 치료를 한 상태였다.
그의 앞에 자리한 여인은 검은 궁장을 입고 있어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몸 전체가 검은색으로 치장을 했고, 그녀의 얼굴을 가린 면사도 검은색이었다.
마치 한 송이의 흑모란(黑牡丹)과도 같은 여인.
두 사람 앞에 놓여진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말없이 시간이 흐르기를 얼마.
"먼저 축하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백 공자."
백문원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결과를 놓고 본다면 소생은 패배자였소."
"공자께서는 너무 상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독고후 부부가 펼치는 합공을 받아낼 사람은 중원 전체를 통틀어 다섯 사람이 넘지 않을 테니까요."
백문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만?"
"자기 소개를 정식으로 먼저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면사 여인은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소생은 백문원이라 하오."
"취소교예요."
취소교. 이 또한 단온약과 함께 있던 여인이 아닌가.
단온약과 취소교.
두 사람이 백문원, 유청연과 만들려고 하는 인연의 고리는 어떤 모양의 것인가?
그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백문원은 이 여인과 점차 인연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취 소저를 만나려 하는 모든 남자는 소생이 거쳤던 것과 같은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이오?"
"호호호!"
그녀의 웃음이 정자 주위로 청아하게 울렸다.
"백 공자께서는 고명한 무공만큼이나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백문원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백 공자는 애초에 우리가 보낸 서신을 받고 이곳에 온 게 아닌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백문원.
"우리는 현재 강호의 후기지수 중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백 공자에게 보낸 것과 같은 서신을 보냈죠."
"그들이 모두 이곳으로 왔었소?"
"그들이 이 정자에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면 지금 백 공자는 이 자리에 있지 않겠지요?"
"그럼 그들은."
"이차 관문을 넘기지 못했어요."
"모두 몇 명에게 서신을 보냈는지 알려 줄 수 있겠소?"
"열다섯 명이에요."
백문원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중원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젊은 고수 열다섯이 사라진 것이니.
"공자의 표정을 보니 열다섯 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군요."
"만약 조금만 더 사려깊게 행동을 했다면 그들의 죽음만은 막을 수 있지 않았겠소?"
"그들이 이 관문에서 살아나갔어도 천혈마금이란 단어가 그들을 죽였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나요? 오히려 그들이 살아 나가서 그 비밀을 강호에 알렸다면 지금쯤 무수한 영혼이 주인을 잃은 채 영계(靈界)를 방황하고 있겠죠."
"으음!"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기병이보(奇兵異寶)라면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한 채 달려드는 게 무림인들의 속성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들에 비하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구려."
"그건 공자의 운명이 그렇게 만드는 거죠."
"나는 아직 운명을 믿지 않소."
"하늘의 그물은 허술한 듯하지만 모든 걸 다 가둔다는 말이 있죠. 운명을 함부로 속단하지 마세요."
예전에 범문우에게서도 들었던 말.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말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설마 운명론을 강의하려고 이 자리에 부른 것은 아닐 텐데?"
"물론이죠. 당신의 운명과 관계된 말을 하려는 거니까."
"나의 운명?"
"그래요. 천혈마금을 소유하게 되는 당신의 운명."
"천혈마금!"
백문원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다시 거론되는 전설의 마병.
"천혈마금이 당신에게 있다는 말이오?"
"원한다면 지금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공자가 그 마기(魔氣)를 감당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을 하며 취소교는 품속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백문원의 앞에 놓았다.
"펴 보세요."
말없이 펴드는 백문원, 양피지를 향한 그의 눈빛이 빛났다.
"지금 즉시 그것을 외우고 태워 버리세요."
백문원은 잠시 양피지를 주시한 후, 두 손안에 말아쥐고는 비볐다.
푸스스! 양피지가 백문원의 손안에서 검은 재로 변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좋아요! 지금 밖에 나가면 정문 앞에 마차가 한 대 놓여 있을 거예요. 당신은 그 마차를 탄 후에 양피지에 적혀 있는 대로만 하면 돼요. 명심할 것은 단 한 가지, 절대 마차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보려 해서도 안 되고, 타인이 마차에 접근을 해서도 안 돼요."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일을 강요하는구려, 취 소저."
"백 공자는 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취소교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한없이 아름다운 여인의 웃음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심계가 있기에 섬뜩한 느낌이 드는 미소.
"백 공자는 유청연 소저의 존재를 잊고 계시는군요."
"……!"
"유 소저가 만 이십 세를 넘기기까지는 헌신적으로 유 소저를 지켜야 하는 게 공자의 할 일이 아니었던가요?"
백문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유청연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에게 협박을 해서가 아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소?"
"공자와 검절 단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
"천하에 우리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자부해도 좋아요. 공자가 옥문관을 넘어온 일, 유형과 비무를 한 일, 문수연과 만난 것, 흑백쌍마와의 결투 등… 당신이 우리의 대상에 한번 오른 후,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반 시진 간격으로 항상 저에게 보고가 되었으니까요."
백문원은 가슴 한쪽이 썰렁하게 비어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은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데, 상대방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공자는 염왕도 도패룡, 검절 범문우와 의형제를 맺었다죠?"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사부께서 중원에 관해 해주신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었군.'
온갖 귀계가 난무하는 중원.
백문원은 지금에 와서야 그런 것을 절실히 느꼈다.
"부럽군요. 검절이라면 현재 가장 배분이 높은 소림의 일현대사조차 한 수 접는데, 그런 분을 노형으로 두었으니. 앞으로는 백 공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장난기가 가득 담긴 말이지만 한마디 한마디는 가시처럼 백문원의 심장을 찔렀다.
"공자는 노형의 부탁을 결코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살을 찢고 불로 태우는 고문보다 더 무서운 위협.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취소교, 백문원으로서는 거절할 수 있는 아무런 대응책이 없었다.
한동안 백문원은 아무 말 없었고, 취소교는 그런 백문원의 모습을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던 차도 어느새 썰렁하게 식은 후.
"한 가지만 말해 준다면 소저의 말을 따르겠소."
취소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결정하셨군요, 좋아요."
한 사람의 목숨을 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 도박을 하던 때와는 너무 다른 천진한 웃음이 얼굴 전체에 피어올랐다.
"궁금한 점은 무엇이든 다 풀어 드릴게요."
"왜 소생을 택했소? 이 전각 안에만도 나를 능가하는 고수가 셋 이상은 있는 듯한데?"
"공자가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요."
말과 동시에 취소교는 백문원을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여인의 지분향이 물씬 풍기고, 또랑또랑한 그녀의 눈망울이 백문원의 눈에 잡힐 듯 가까워진 채 은밀하게 전하는 그녀의 낮은 목소리.
"때로는 가장 낯선 자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