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냉기의 폭풍 속에서 주유성이 타고 있는 것은 조 그마한 쪽배다. 암초와 함정, 소용돌이 등등이 산재한 이런 죽음의 바다에 서는 크기에 상관없이 배를 몬다는 자체가 자살 행위다. 더구 나 혼자서 조정할 수 있는 배의 크기는 어차피 한계가 있다. 배는 작지만 사용된 나무의 재질은 단단하고 탄력 좋은 최 고급품이다. 끝없이 압축하고 가공한 나무 위에 북해 특산의 튼튼한 쇠를 얇게 덮었다. 이것은 북해의 비밀을 통과하는 과 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빙궁이 그간의 경험을 토대 로 만든 배였다. 주유성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배의 크기에 만족했고 북 해빙궁주로부터 조종술을 직접 배웠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배가 절진으로 들어가자마자 만만해 보이던 북해의 비밀은 죽음의 손이 되 어 그의 목을 옥죄었다. 작은 배를 향해 차갑고 강력한 기운들이 몰아쳤다. 보통 사 람들이라면 그 기운만으로도 얼어 죽을 만큼 강한 위력의 기 운이었다. 주유성은 냉기와 같은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용량의 한계라는 것이 있다. 이 기운은 단숨에 해소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다. "으으, 장난 아니게 춥다. 이크!" 주유성이 다급한 소리를 내며 몸을 휙 기울였다. 작은 얼음 조각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파도가 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물방울들은 곧바 로 얼어붙었다. 당장 차가운 기운보다 더 위협이 되는 것이 공중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얼음 조각들이다. 과거에 하남에 설치되었던 아수라환상대진은 왜곡된 살기 를 이용해 사람들이 서로 검을 겨누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 것만으로도 아수라환상대진은 마교의 절진이 되었다. 그러 나 아수라환상대진도 기운에 예민하고 계산이 빠른 주유성에 게는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주유성은 아수라환상대진의 상 극인 존재였다. 북해에 설치된 진은 정상적인 기운을 왜곡시키는 능력은 없었다. 대신에 그 기운에는 물리적인 힘을 가진 날카로운 얼 음 조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유성은 옛날처럼 여유 부리 면서 계산할 여유가 없었다. "으악! 만천화우가 따로 없잖아!" 빠르게 날아다니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의 위력은 여느 암 기 못지않았다. 어설픈 무인이라면 한 조각만 맞아도 몸이 뚫 릴 수 있다. 설사 관통되지 않아도 상처가 얼어붙을 만큼 강 력한 공격이 끝없이 이어졌다. 배는 재질이 단단해서 작은 얼 음 조각의 공격을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주유성은 금강불괴 가 아니다. 주유성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내가 왜 허락했을까?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사람 살려!" 비명을 지르는 그의 코끝으로도 작은 얼음 조각이 스쳐 지 나갔다. 주유성의 등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차가워졌다. 주유성의 일천한 지식으로 이 진의 이름을 알 리가 없다. 그리고 파훼법이 알려진 진이라면 북해빙궁이 지금까지 뚫지 못했을 리도 없다. 어차피 이건 생문이 망가진 진이다. 그걸 알고 들어왔으니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주유성은 몸을 버들가지처럼 열심히 흔들다가 소리쳤다. "강행 돌파다!" 시간을 끌면 될 것도 안 된다. 그는 내공이 강하다. 내공이 강하면 몸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힘도 강해진다. 주유성은 반쯤 일어선 자세를 유지한 채 두 자루의 노를 힘 껏 저었다. 몸은 여전히 이리저리 움직이는 상태였다. 거센 노질에 배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은 파 도가 주유성의 배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으아악!" 주유성이 기겁을 하며 노 두 자루에 공력을 강하게 보냈다. 그리고 그 노를 움직여 바다를 힘껏 때렸다. 배가 뒤틀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한쪽으로 빠르게 방향 전환을 했다. "휴우. 살았... 으악! 저건 또 뭐야!"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그의 눈에 몇 개의 삼각파도가 연달 아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노를 미친 듯이 휘저었다. 마치 미친놈이 양팔을 정신없이 흔드는 듯했 다. 쪽배가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삼각파도 사이를 미꾸라지 처럼 빠져나갔다. 진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바다의 흐름은 더 강하고 거 칠어졌다. 얼음 조각은 더 많이 날아다녔고 삼각파도는 사방 에서 솟아났다. 하지만 주유성은 진법의 특성에 대해서 서서히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진법의 흐름의 변화를 재 빨리 계산했다. 계산한다고 해서 자세한 것을 알아낼 시간은 없다. 더구나 격렬한 대자연의 흐름에 섞여서 움직이는 진법 의 변화는 계산한다고 해도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산을 하면 어떤 방향으로 가면 위험이 그나마 적 은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계산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이나마 맞아 들어갔다. 그 조금의 이익을 기대 하며 주유성은 배의 방향을 틀었다. '쉬운 길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곳을 찾자.' 그나마 나은 길로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 다. 얼음 조각의 폭풍과 삼각파도의 습격은 그 수만 조금 줄 었다 뿐이지 계속됐다. 그리고 새로운 덫이 나타났다. 진법이 펼쳐진 바다의 곳곳에는 함정들이 존재했다. 진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수면 위에는 안개가 낮게 깔렸다. 안개인지 물보라인지 정확히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하얀 것이 시야를 좁혔다. 그래서 먼 곳의 장애물을 미리 보고 피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주변을 끝없이 살피다가 함정이 보이면 피하 는 방법뿐이었다. 작은 암초들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 들은 파도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주유성은 그 빠 른 눈썰미로 주변을 재빨리 훑으며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흔적들을 찾았다. 주유성이 정찰을 하느라 잠시 눈을 돌린 사이 그의 배 앞에 하얀 포말이 살짝 생겼다. 암초가 있다는 증거였다. 주유성이 기겁을 했다. "으아악! 늦었다!" 그는 급히 오른손에 잡은 노를 틀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노 를 단단히 만들고는 창을 뻗듯이 바로 앞을 콱 찍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 끝이 바닷물에 살짝 잠겨 있던 암초 를 찍었다. 거센 바다에서도 버티던 단단한 암초의 끄트머리 가 나무 노에 맞아 부서져 나갔다. 그 반동이 주유성에게 밀 려왔다. 주유성은 두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버텼다. 쪽배가 비명을 질렀다. 잔뜩 뒤틀린 배가 주유성의 힘에 의 해서 암초 옆으로 방향을 틀더니 그 반동으로 빠르게 튀어나 갔다. "크아! 죽을 뻔했네. 제기랄!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일단 진에 들어오면 나갈 방 법이 쉽지 않다. 이 진은 들어온 자를 죽이는 살진이지 들어 오지 못하게 막는 봉쇄진이 아니다. "좋아! 끝까지 간다고! 가서 다 박살을 내버리겠어!" 그가 소리치는 사이에 배가 갑자기 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켁! 소용돌이닷!" 이미 몇 개의 소용돌이는 피했다. 그러나 거대한 진 내부에 서 소용돌이는 생성되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천하의 주 유성이라고 해도 갑자기 나타나는 것까지 피하기는 어려웠다. 쪽배가 빠른 물결의 소용돌이에 잡혀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중심으로 끌려갔다. 주유성이 소리를 지르며 노를 죽어라고 저었다. "으아아아! 가자! 가자! 가자!" 그의 배가 소용돌이를 거스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공 이 몸을 돌고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노가 검을 대신해서 바 다를 때렸다. 정말 죽도록 용을 썼다. 강한 내공과 검술을 응용한 노질이 이겼다. 그의 배는 마침 내 작은 소용돌이를 빠져나왔다. 거기서 빠져나오자마자 배 는 빠르게 튀어나갔다. "살았다! 살았어!"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배보다 더 카다란 얼음 덩어리 하나 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헛!" 주유성이 경악하며 커다란 노 두 개를 들어 앞으로 찔렀다. 본래는 검으로 펼치는 화룡점정의 찌르기 수법이었다. 노가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반탁력이 밀려왔다. 주유성이 고함을 질렀다. "이야아압!" 단전의 내공이 회오리치듯 온몸을 타고 올라와 노에 전해 졌다. 그는 그 힘으로 노 두 개를 강하게 떨쳤다. 검으로 적 의 방패를 부수는 파(破)의 수법이었다. 강한 내공이 목표를 때렸다. 곧바로 폭음과 함께 얼음 덩어 리의 일부가 터졌다. 그리고 주유성은 그 반탄력을 받아 두 다리로 배의 방향을 비틀었다. 배가 급격히 선회했다. 얼음덩이의 물속에 잠긴 부분에 배 밑바닥이 거칠게 긁히 는 소리가 들렸다. 주유성은 화들짝 놀랐다. "설마 바닥이 뚫리는 건 아니겠지?" 떠드는 와중에도 주유성의 머리는 빠르게 계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여러 지형지물이나 함정들을 가 지고 진법의 원리에 의해서 흐름을 계산했다. 그리고 조금이 라도 쉬운 쪽을 찾아 열심히 노를 저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암초나 얼음 덩어리 같은 것에 제대로 부딪치면 이런 작은 배는 단숨에 박살이 난다. 진법의 흐름에 대한 계산이 잘못되면 그런 함정이 잔뜩 있는 곳으로 뛰어들 위험이 있었다. 주유성은 슬슬 진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진법 의 천재다. 그러나 이건 북해의 잠든 비밀이라고 불리던 절진 이다. 열심히 계산을 해서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전 진해도 돌발적인 장애물이 끝없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주유성의 앞에 큼지막한 얼음 덩어리 하나가 불쑥 솟아 있었다. 거친 바다를 따라 흘러가던 그 얼음은 운무가 짙게 감싸고 있었다. 진법의 수작이었다. 그리고 주유성은 그것을 알아보 지 못했다. "제기랄! 또냐!" 중성이 급히 내공을 써서 한족 노로 바다를 때렸다. 배가 빙글 돌았다. 그 즉시 양쪽 노를 힘차게 저었다. 배가 누가 집어 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바다 위를 튀어나갔다. 배의 바 로 곁으로 얼음 덩어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쇠가 덧대어진 배의 측면이 얼음 덩어리를 긁었다. 거친 소리와 함께 얼음 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헉헉. 버텨라. 으악!" 주유성이 비명과 함께 고개를 틀었다. 그의 뺨 바로 곁으로 작은 얼음 조각 하나가 화살처럼 지나갔다. 공중을 날아다니 는 얼음 조각들은 그가 위기에 빠졌다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주유성이 악을 썼다. "이게 사람 지나가라고 만든 거냐! 도대체 어떤 놈이 이렇 게 지독한 짓을 한 거야!" 그의 눈에 작은 배의 몸통을 노리고 날아오던 사람 주먹만 한 얼음 조각이 보였다. 정통으로 맞으면 배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는 놈이었다. "제기랄!" 주유성이 욕설을 뱉으며 한 발을 들어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얼음 조각이 그 발에 걸렸다. 그는 발을 재빨리 회전시켰다. 발의 움직임에 따라 얼음 조각이 흐름을 틀었다. 얼음 조각의 궤도가 조금 비틀어지더니 배의 위쪽을 살짝 깎아먹으며 지 나갔다. "젠장!" 벌써 죽을 위험을 몇 번이나 거쳤는지 셀 수도 없었다. 목 표 지점에 다가갈수록 진의 영향은 커졌고, 그만큼 더 위험했 다. 주유성의 가까운 거리에 진법의 구성축이 되는 바위섬 중 하나가 보였다. 주유성이 이를 갈았다. "으드득! 저것만 부수면 쉬워질 텐데." 진을 구성하는 기점 하나를 부수면 진은 그만큼 약해진다. 아수라환상대진에서는 그 수법으로 꽤 재미를 봤다. 하지만 여기서는 감히 실행에 옮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바위섬 위에 기어올라 가는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 안 배를 잡아둘 방법이 없다. 기점 하나 부쉈다고 해서 진이 무력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배를 잃으면 꼼짝없이 죽어 야 한다. "가자, 가! 설마 죽기야 하겠냐?" 진의 바깥에서 관망하고 있던 북해빙궁주는 침을 꿀꺽 삼 켰다. 안개가 얕게 깔려 있어 수면의 상황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를 뚫고 지나가는 주유성의 상체는 확실 히 보였다. "정말 대단한 속도구나. 속도는 둘째 치고 지금까지 시도 했던 자들 중에 저만큼 들어간 자가 없었는데. 그전에 다 배 가 깨져서 죽었지." 진을 해석해서 피해가는 능력만이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저 강력한 힘이라니. 근육의 힘일 리는 없으니 내 공이 저만큼 대단하다는 소리. 이거 정말 인물이구나. 소천이 가 인물을 데려왔어." 북해빙궁주는 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주유성이 있는 곳 까지 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도 없다. 그래서 그는 주유성이 지금 상대하는 함정들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알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주유성의 실력이 장난이 아니라는 정도 는 알수 있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주유성의 무공 실력을 추측 하던 북해빙궁주는 문득 자기 혼자 이곳에 온 것이 실수가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나를 이길 정도는 아니야. 그래도 저 나이에 정말 대단해. 이거 탐나는데?" 주유성은 정말 생고생을 하며 진을 뚫어나갔다. 아수라환 상대진 이후로 이런 고생은 해본 적이 없다. 그나마 아수라환상대진은 진을 하나씩 부숴 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시간이 모자라 정기가 고갈될 정도로 죽도록 뛰어 다녔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은 거의 없었다. 이건 다르다. 이제 중심부 쪽으로 다가가니 조금만 엇나가 도 사방에서 압박하는 기운들이 온몸을 짓눌렀다. 인간에게 작용할 만한 살기나 그 외의 기운에 대해 무생물 인 배가 영향을 받아 끝없이 삐걱거렸다. 진을 꽤 해석해서 편한 길로 가고 있음에도 몸에 들어오는 부담은 엄청났다. "켁! 미치겠네. 이러다가 납작코가 되겠네." 그는 거인이 자신의 온몸을 큰 손으로 잡고 강하게 움켜쥐 는 꼴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압력이 점점 강해졌다. 무생물인 배보 다는 인간인 주유성에게 더 크게 작용하는 압력이었다. 대자 연의 힘 앞에 그의 다리가 조금씩 꺾였다. 배가 버티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내공의 힘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 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 쌓인 내공이 아 무리 많다고 해도 상대는 거대한 바다를 이용한 진법이다. 내 공의 힘만으로 버티다가는 몸은 둘째 치고 배가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주유성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싸구려 배 가지고는 안 되잖아!" 작은 쪽배를 만드느라 쓴 황금이 한 관, 즉 백이십 냥이다. 그만큼 귀한 재료가 들어가고 오랜 가공을 거쳤으며 최고의 장인이 만든 것이지만 북해의 비밀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이러다가 그의 균형이 무너지거나 배가 부서지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주유성은 그냥 죽을 놈이 아니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 다. '버티는 건 한계다. 그래도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나는 주유성이라고.' 어차피 내공으로 저항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있 었다. 주유성은 오기가 생겼다. '이까짓 것. 막지 못하면 흘려보내지 뭐.' 주유성은 마음을 바꿨다. 저항을 중지했다. 밀려오는 기운 들을 거스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에 그가 평소에 더위나 추 위를 상대하는 마음가짐으로 돌아갔다. 한겨울의 추위와 지금의 압력은 그 위력에서 썩어가는 수 수깡과 정련된 검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더구나 지금은 수시 로 날아드는 얼음 조각도 막아야 하고 머릿속으로는 진의 해 석을 끝없이 진행해야 한다. 눈은 수많은 함정을 놓치지 말아 야 하고 팔을 계속 저어 배를 전진시켜야 한다. 주유성은 평소처럼 기를 다루면서도 밀려드는 기운을 받아 들여 내공으로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다. 어차피 내공을 의식적으로 쌓은 적은 없다. 내공에 별로 욕 심도 없다. 그 강력한 내공은 게으름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가 저항을 포기하자 강력한 기운들이 신이 나서 몸속으 로 파고들어 왔다. 살을 에는 냉기와 사람의 수믈 멎게 하는 살기 등이 제 세상을 만나서 날뛰었다. 이제 살고 싶으면 그런 기운을 제어해야 한다. 조금만 시간 이 지나면 피가 얼어붙을 상황이다. 본래 이런 기운을 처리하 려면 내공을 쌓을 때처럼 몸속의 혈도를 따라 돌려야 한다. 애초에 이런 강력한 기운을 돌리는 것은 고사하고 조롱하 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인간도 별로 없다. 하지만 주유성은 어 차피 보통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내공을 쌓으려고 고생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는 들어온 기를 이끌었다. 기가 잠시 반항하는 듯하자 살 살 꼬드겼다. 기가 반응을 보이자 적당히 움직이다가 반대쪽 으로 나가는 길을 열었다. 신이 나서 몸속에 들어온 기운들은 멋모르고 활개치다가 곧바로 몸 밖으로 쫓겨났다. 주유성은 자신의 몸을 기가 거쳐 가는 통로로 만들었다. 오 는 기를 막지 않고 가는 기를 잡지 않았다. 간혹 몸속으로 깊 게 파고드는 것만 골라서 튕겨냈다. 그렇게 하니 몸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이 사라졌다. 그의 몸 이 기를 흘리자 그가 디디고 있는 배에 가해지는 압박도 줄어 들었다. 적어도 강력한 냉기는 더 이상 주유성에게 위협이 되 지 않았다. 냉기는 끝없이 그의 몸에 밀려들어 왔다. 그러나 이제 능숙 해진 주유성은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그 냉기를 바깥으로 흘 려보냈다. 그는 냉기를 이용한 공격을 상대하는 방법을 본의 아니게 익히고 있었다. 큰 제약 하나가 사라지자 주유성의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돌발적을 ㅗ날아오는 얼음 조각들,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암초, 얼음덩이, 소용돌이들은 그대 로였다. 어느 하나 위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자유로 워지자 진을 헤쳐 나가기 훨씬 쉬워졌다. 기의 압박만 없으면 중심에 가까운 쪽이 바깥쪽보다 위험이 적었다. 주유성이 냉기를 흘려보내며 투덜댔다. "섬에만 도착하면 비밀이고 자시고 넌 죽었어." 빙궁주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도착한다! 드디어 저곳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 자가 나왔 다!"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저곳을 뚫 고자 수없이 노력했고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 리고 이제 그 종착점이 보였다. 그가 보기에도 주유성은 꽤나 위태함을 헤치고 중심부까 지 전진했다. 하지만 실제로 받은 엄청난 위험과 압력은 먼 바깥에서 구경하는 빙궁주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거의 다 가서는 오히려 움직임이 자유로워 보이 는구나. 그럼 중심 쪽으로 갈수록 진이 약해져서 일이 쉬워진 다는 소리겠지. 이제 다 통과한 것이나 다름없군."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 주유성을 판단했다. "무공도 역시 대단해. 비록 내 상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 단해, 저 나이에. 꿀꺽." 빙궁주는 욕심이 나서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빙궁주가 생각한 이유와는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진의 한 가운데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섬에는 아무런 외부 압력이 없 었다. 압력은 고사하고 그렇게 심하게 몰아치던 광풍도 없었 다. 이곳은 진의 핵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 바깥까지가 진의 공격 영역이었다. 대신에 추위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강풍이 몰아치던 쪽이 덜 추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섬에는 한때는 선착장이라고도 불렸을 만한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하지만 주유성은 그것의 내구도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배가 그의 생명줄이다. 그는 땅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용 을 써서 배를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내공을 쓰니 작은 배 를 끌기는 어렵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생명의 위기를 수없이 넘기며 너무 심한 고생을 한 그는 안전해질 때까지 게으름 피울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배를 물이 절대로 닿지 않을 만한 곳까지 옮겨놓은 주 유성은 그때서야 겨우 안심했다. 주유성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으하. 이제 겨우 끝났네. 여긴 안전한 것 같으니 일단 좀 쉬어야겠다. 아이고, 삭신이 따 쑤시네." 일단 안전해지자 게으름병이 슬슬 도졌다. 그는 어슬렁거 리며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섬은 추웠다. 이곳이 북해다. 춥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 다. 날이 추우면 추운 대로 냉기를 받아들여 운기를 해버리는 주유성이지만 이 추위는 편히 쉬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의지의 주유성이다. 얼음보다 차가운 돌이 평 평하게 놓인 자리를 찾아내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눕혔 다. 냉기가 밀려왔지만 그에 대한 내성은 한껏 키운 상태다. 오히려 냉기를 받아들여 열심히 운기했다. '단전이 텅 비었잖아. 내공을 회복해야지.' 좋은 핑곗거리까지 생각나자 그는 그렇게 세 시진을 꼼작 도 하지 않고 누워서 보냈다. 오늘 게으름뱅이치고는 너무 많이 움직였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북해빙궁주의 얼굴이 점점 초조해졌다. "안쪽으로 들어간 지 벌써 세 시진이 지났는데 아직도 보 이지 않다니. 설마 실패한 건가? 하지만 저 험난한 진법도 뚫 은 사람이 왜 마지막에 실패를 하지?" 하지만 자기는 섬 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걸까?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들 어가서 상자를 찾아 가지고 나오면 된다고 했는데. 그럼 당연 히 섬에서는 별 위험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갑자기 그는 새로운 생각이 났다. "그래. 그 내공심법은 저 섬에서 익혀야 진전이 빠르다고 했지. 그럼 섬 안에는 수련자의 안전을 위해서 외부의 침입을 방비할 수 있는 함정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걸 경고 하지 않았으니 큰일났네. 허, 난 왜 그게 이제 생각났단 말인 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빙궁주는 자기 머리를 툭툭 쳤다. "어떻게 구한 인재인데. 어디 가서 저런 자를 다시 구할 수 있을까? 하늘이 우리 북해빙궁을 미워하는 것인가?" 만에 하나 하늘이 누군가를 정말로 미워한다면 주유성이 그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 틀리없다. 누구나 자기의 큰 실수 는 없애고 싶은 법이다. 주유성은 세 시진을 꼼짝도 안 하면서 쉬었다. 냉기가 너무 강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몸을 침범하는 냉기 를 운기해 내공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냉기 공격을 상대하는 방법은 진을 통과하면서 확실히 익 혔다. 하지만 그것도 깨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잠을 자면서 이런 강한 냉기를 감당할 수는 없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일어나기 싫어서 버티고 있던 주유성 이 마침내 포기했다. "배고프다." 원래는 잠깐의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 들어올 때 먹을 것을 따로 챙겨오지 않았다. 바깥의 빙궁주는 북해의 좋 은 음식들을 잔뜩 가지고 있지만 섬에 있는 주유성은 맨몸이 다. 주유성은 일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밥 먹는 것은 좋아한다. 지금 밥을 얻어먹으려면 어서 목표물을 찾아서 바깥으로 나가 야 한다. 그래서 그는 어슬렁어슬렁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야기 들은 특징을 가진 동굴을 찾았다. 쉬웠 다. 동굴의 앞에는 냉기나 눈보라의 접근을 막는 진이 쳐져 있었다. 그는 그 진이 내뿜는 기운을 감지했다. 기운을 먼저 감지하고 입구를 찾아 비교했다. 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의 침입까지 막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약한 물리적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눈보라의 이동을 차단하 고 냉기의 움직임도 막는 용도의 것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육상 생물이 살 수 있는 섬이 아니다. 이 정 도 진이라면 내부를 보호하기에는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주 유성은 그 진을 보며 다른 의미에서 감탄했다. "이야아! 되게 오랫동안 설치되어 있었을 텐데 아직도 작 동을 하네? 이거 동력이 어디서 나와서 가능한 걸까?" 주유성은 진의 경계를 스윽 만져 보고는 그대로 통과했다.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졌다. "으아, 추워라! 이거 왜 안쪽이 더 추워?" 차가운 냉기가 그의 몸을 압박했다. 천하의 주유성도 강한 추위를 느낄 만한 냉기였다. 동굴 안은 간소했다.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았음이 분명한 몇 개의 침구류, 아주 기본적인 식기류, 얼어붙어 있는 곡식 단지, 그리고 얼음덩이로 변한 고기 조각 등이 한쪽에 잘 정 리되어 있었다. 주유성이 아무리 먹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라고 해도 보관 기간이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을 고기를 주워 먹지는 않는다. 그는 음식에 관심을 끊고 안쪽을 살폈다. 동굴 제일 안쪽에 사람이 앉을 만한 좌대, 돌침대 등이 있 었다. 그리고 한쪽에 제단 비슷한 것에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상자가 하나 보였다. 상자는 자물쇠로 단단히 잠 겨 있었다. 주유성은 기관의 전문가다. 이런 열쇠 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호기심에라도 몰래 따서 내용을 살 필 법도 하다. 하지만 주유성은 게으르다. 호기심에 휘둘리는 녀석이었다 면 지금처럼 한심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다. 당연히 열쇠를 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상자를 냉큼 집었다. "엇! 차가워!" 수십 년 동안 식어 있던 상자의 엄청난 냉기가 주유성의 손 을 타고 퍼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이 상자에 달라붙을 차가 움이다. 주유성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덕분에 강력한 냉기의 침범 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주유성이다. 진을 통과하면서 강제로 한 수련이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즉시 냉기를 흘려버렸다. 오히려 주유성은 상자를 옆구리에 떡하니 끼웠다. 막상 상 자를 챙기고 나니 들어오면서 고생한 것이 억울했다. 그는 뭐 챙겨갈 것이 없나 더 살폈다. 상자보다 더 뒤쪽에 움푹 파인 공각이 있었다. 공간의 바닥 은 유리처럼 매끄러웠다. 그리고 그 바닥 위에 손가락 한 마 디만 한 작고 투명한 조각이 하나 얹어져 있었다. "어라? 얼음인가? 그런데 왜 이런 모양으로 얹어져 있어? 이상하네?" 주유성이 그 조각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조 각을 잡기 직전에 그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으, 차다!" 손이 닿기도 전이다. 하지만 강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대 로 잡았다간 아무리 주유성이라고 하더라도 손가락이 얼어붙 어 버릴지도 모를 가공할 냉기였다 "에구! 직접 잡으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되겠네. 도대체 이게 뭐려나?" 아무리 견문이 부족한 주유성이지만, 무림의 기괴한 보물 들에 대해서까지 못 들어본 건 아니다. "어? 이거 설마?" 주유성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취사도 구를 찾았다. 손잡이가 달린 작은 그릇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잡고 투명한 조각을 툭 쳤다. 조각이 살짝 떠 오르자 그릇을 뻗어 재빨리 받았다. 조각이 그릇 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릇을 타고 강력한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냉기가 그의 팔 을 얼릴 듯이 요동쳤다. "아이 차!" 아무리 냉기가 지독해도 직접 만진 것은 아니다. 그릇의 손 잡이를 타고 오는 냉기를 처리 못할 주유성이 아니다. 그는 내공을 운기하며 그것을 들고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한 손에 는 상자, 다른 손에는 손잡이가 달린 그릇이었다. 필요한 상자를 챙겼으니 이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 올 때처럼 생고생을 다시 하기 싫었다. 그는 양손에 물 건을 든 채 섬을 어슬렁거렸다. "여기 오면서 계산한 결과에 의하면 이쯤에 있어야 정상인 데. 야호! 바로 여기 있었구나! 이 건방진 놈아!" 주유성이 원하던 것을 찾았다. 반반하게 깎인 바위 위에 오 행의 진법도가 그려져 있었다. "네가 날 고생시킨 진의 핵이란 말이지. 요 발칙한 놈!" 주유성이 발을 들었다. 발끝에 기가 서렸다. 그는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바닥을 콱 밟았다. 천근추의 수법에 절정이 각 법이 얹어져서 바위를 찍었다. 진법도에서 강력한 반발력이 일어났다. 거대한 진의 중심 이 되는 진법이다. 아수라환상대진의 가벼운 돌멩이 하나 옮 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이것은 이 진 전체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 진의 힘 자체가 아니다. 진법도는 발악을 했지만 주유성의 발이 더 강 했다. "죽엇!" 주유성이 힘을 한 번 더 쓰자 반발력이 깨져 나가며 발이 바위를 찍었다. 발에 맺혀 있던 내공의 힘이 단단히 얼어 있 던 바위를 요란하게 부수며 파고들었다. 쩌적! 그의 발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방사형 금이 사방으로 빠 르게 퍼졌다. 그리고 정적이 감돌았다. 섬 주위를 감싸던 강력한 기의 흐름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 했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듯이 섬 주변이 거대한 규모 로 흔들렸다. 파도가 섬을 뒤엎기라도 할 것처럼 높이 솟아올 랐다. 주유성은 오만방자한 자세로 그 광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꺼져."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파도가 물러섰다. 요동 치던 기운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중심이 사라진 진은 마지 막 발악을 하고 나서 그 힘을 서서히 잃었다. 시야를 가르던 운무도 사라졌고 거센 바다의 흐름도 약해 졌다. 얼음덩이들은 해류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곳곳에 숨 어 있던 암초들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유성이 바다를 보더니 일갈했다. "조용하니까 좋잖아!" 북해의 비밀이 발길질 한 번에 날아갔다. 진 바깥에서 기다리던 북해빙궁주는 이제 심장이 미칠 듯 이 뛰었다. 주유성이 쪽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의 눈앞에 도착했다. 그는 배가 도착하는 곳까지 뛰어가서 자진해서 뱃 머리를 잡아당겼다. "주 공자, 어서 오게나." 흥분으로 얼굴이 빨개진 그는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서 상자를 달라는 뜻이다. 주유성이 상자를 내밀자 빙궁주는 그것을 탁 잡아챘다. 예의없는 행동이지만 그로서는 평생의 숙원이 달릴 일이 다. 머리는 주유성을 믿고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보 물을 보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상자를 잡자 차가운 냉기가 짜르르 흘렀다. 하지만 그는 북 해빙궁의 최고수인 궁주. 냉기를 무공으로 사용하는 그에게 그 정도가 위협이 될 순 없었다. 그는 재빨리 자물쇠를 살폈 다. 자물쇠는 최고의 쇠로 만들어졌지만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어 녹이 살짝 슬어 있었다. '열어봤다면 흔적이 남지 않을 수가 없지. 녹이 그대로인 것을 보니 주 공자는 역시 믿을 만한 사람이군.' 그는 크게 기꺼운 얼굴로 말했다. "고맙네, 주 공자. 자네는 우리 빙궁의 은인이야." 주유성이 인상을 썼다. "배고파요." "응? 배? 이 사람아, 지금 배가 문젠가? 드디어 숙원을 해결 했단 말일세!" 빙궁주는 지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대를 이어 소원하 던 물건을 손에 쥐었으니 안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공을 세운 주유성이 다시 배고픔을 말했다. "뱃가죽이 등가죽보고 사돈하자고 인사하네요." 빙궁주는 상자를 단단히 움켜쥐자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아차! 이자는 먹을 것을 좋아하지. 원, 이런 때에도 먹을 것을 찾다니.' 그는 재빨리 자신의 짐을 뒤적였다. "자, 이건 내가 즐기는 얼음과자라네. 일단 이거라도 먹게 나. 나머지는 좀 정리를 하고 먹자고." 주유성은 새로운 먹을거리에 관심을 보이며 받아 들었다. 얼음과자를 혀로 살짝 핥아보았다. "와, 얼음이 새콤달콤하다. 히이." 웃는 주유성을 보며 빙궁주는 심호흡을 했다. 가벼운 토납 법을 하며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슬슬 진정이 되자 그는 주변이 꽤나 추워진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주 공자, 어째 갑자기 많이 추워지는군. 이것도 진 법의 영향인가?" "진법요? 그럴 리가요. 그건 부숴 버렸는데요?" 빙궁주의 안색이 확 변했다. "부숴? 뭘?" "여기 설치돼 있던 진법 말예요. 박살을 내버렸어요." 빙궁주는 크게 놀랐다. "뭣, 우리 북해의 비밀을 부숴? 잠시 진정시킨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 진은 그동안 북해의 비밀이라고 불려왔다. 아주 오래전 부터 그렇게 알려져 온 이름이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는 지금 의 빙궁주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진 가운데의 섬으로 갈 수 있게 되면 자연히 알 수 있다고만 알려졌다. 빙궁주는 그래서 그동안 이 진법 자체가 북해의 비밀이라고 오해를 했다. 그리고 그 비밀을 망가뜨렸다는 것에 크게 실망 했다. '이 자식이. 일은 너무 과격하게 처리했잖아.' 빙궁주가 분노로 덜덜 떨었다. 그 기색을 주유성이 눈치 챘 다. 주유성이 투덜댔다. "어차피 들어갈 방법도 없는 진이잖아요. 아예 부숴 버리 는 것이 나아요." 빙궁주가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자기가 화낼 일이 아니 다. '확실히 이자가 없을 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진이었 지.' "그, 그래도 이건 우리 북해의 비밀인데." 빙궁주는 못내 아쉬워했다. 하지만 주유성의 말이 틀린 것 은 아니다. 이곳에 설치되어 있던 것은 주유성이 없으면 아무 도 들어갈 수 없는 진이다. 주유성이 빙궁주를 보고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안에서 한 더 챙겨온 것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여기 가 추울 거예요." "챙겨와? 가져올 가치가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을 텐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빙궁주를 놔두고 주유성은 배로 돌아 갔다. 거기에 얹어둔 그릇 손잡이를 잡았다. 그릇은 어느새 배 바닥에 꽁꽁 얼어서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그릇에 공력을 주입하고 힘으로 잡아뗐다. 주유성이 그릇을 가져와서 빙궁주에게 내밀었다. "단단히도 붙었네. 자요, 이거 받아요." 빙궁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주유성이 그릇을 들고 움직이자 주변의 냉기가 따라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분명히 그릇이었다. "받아요. 안에 이게 한 조각 있더라고요." 빙궁주의 눈에 그릇 안에 굴러다니는 작은 얼음 조각이 보 였다. 그는 감히 그냥 받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강력한 냉기가 그를 위협했다. 추운 북해에서 평생을 살아온 빙궁주도 처음 보는 물건이 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생기고 이런 냉기를 뿜는 물건에 대 해서 잘 알고 있었다. 본 적이 없어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설마 빙정?" "이거 빙정 맞아요? 이게 저기에 굴러다니길래 혹시나 해 서 챙겨왔거든요." 빙궁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탔다. 그는 자기 평생에 빙정을 볼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삼백 년 전을 마지막으로 북 해에서 빙정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빙정을 가져왔다고? 이걸 그냥 가져왔다고? 이걸 나보고 받으라고? 나를 준다고?" "팔 떨어져요. 손 시려워요." 빙궁주가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빙정이다, 빙정! 내게 빙정이 오다니!" 그는 상자를 들지 않은 손을 내밀어 그릇을 받으려고 했다. 그의 눈에 빙정이 든 그릇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고 있는 주 유성이 보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일반적인 무공을 익힌 자는 빙정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있 을 수 없다. 그 말은 주 공자가 냉기를 이용한 내공을 익혔다 는 뜻. 그렇구나. 그래서 북해의 추위에서 그렇게 여유있게 지낼 수 있었구나.' 빙궁주는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런 내공을 익힌 사람에게 이 빙정은 무가지보. 말 그대 로 이건 전설의 영약이다. 그걸 자기가 챙기지 않고 내놓다 니. 내가 그릇이 작았구나. 이 큰 사람을 보지 못한 내가 그 릇이 작았어. 이 사람이 대접이라면 난 간장종지였어.' 주유성은 그릇이 큰 게 아니라 내공에 욕심이 없는 거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쑥쑥 쌓이는 것이 주유성의 내공이다. 더구나 빙정을 활용하기 위한 종류의 무공은 익힌 적도 없다. 팔아먹는다면 모를까 가져봐야 쓸모가 없다. 그리고 어차피 이걸 들고 북해를 빠져나갈 방법도 없다. 더구나 빙정은 빙궁의 심처에서 나온 물건이다. 대충 눈치 를 보니 자기 것이 아니다. 주유성은 원래 남의 물건에 관심 없다. 빙궁주는 그 사실을 눈곱만큼도 모른다. "고맙네, 주 공자! 우리 빙궁은 주 공자의 은혜를 절대로 잊 지 않겠네!" 진심이다. 그는 정말로 잊지 않을 생각이다. "은혜는 무슨. 얼른 받아요. 손 시려워요." 빙궁주는 조심스럽게 빙정이 든 그릇을 받았다. 그냥 보관 할 리 없다. 그는 타고 온 썰매에서 보온이 가능한 것을 닥치 는 대로 꺼내 빙정이 든 그릇을 감쌌다. 그 짐을 썰매에 단단히 묶은 후 빙궁주의 흥분했던 머리가 식으며 빠르게 돌아갔다. '빙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이 생성되 는 곳은 한기가 집중되는 곳.' "그런데 주 공자, 이걸 어디서 찾았나?" "그 상자 뒤에 있더라고요. 돌바닥이 맨들맨들해서 꼭 얼 음 같은 곳이 있는데, 그 위에 있었어요." 빙궁주가 놀라서 소리쳤다. "만년한옥, 극한지처!" "에이. 극한이라고 할 만큼 춥지는 않았는데요?" "극한지처가 틀림없네. 북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순도 높은 냉기가 만년한옥이 섞인 광물지대를 통과하면서 정제되 고, 다시 한 지점에 모이는 곳. 빙정이 생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 그것이 극한지처지. 아, 북해의 극한지처가 저곳에 있 었다니." 빙궁주는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군. 북해의 비밀이라고 전해지는 것은 저 진법이 아 니었어. 저 진법은 극한지처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었어. 진정한 북해의 비밀은 극한지처였어. 그래서 선조 분들 이 저곳에 들어가서 수련하신 거고." 그는 빙정이 나온 섬을 쳐다보았다. "삼백 년 동안 아무도 냉기를 흡수하지 않으니 마침내 빙 정이 만들어졌겠지. 그래, 그런 거야." 주유성은 빙정의 이름은 알아도 생성 원리까지는 모른다. "그럼 몇천 년 만에 찾아가는 극한지처에는 주먹만 한 빙 정이 있겠네요?" "아니지. 하긴, 주 공자는 잘 모를 수도 있지. 빙정은 극한 지처의 용량 이상의 크기로는 만들어지지 않아. 용량을 넘어 서는 냉기는 빙정으로 모이지 못하고 흩어지니까. 하지만 이 빙정의 크기를 보며 저 극한지처는 북해의 비밀이라고 해도 오히려 모자랄 만큼 대단하군. 이건 최소한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생성돼야 만들어질 수 있는 크기의 물건이니까. 으하하 하!" 기쁨에 겨워 웃던 빙궁주가 급히 얼굴을 굳혔다. '내가 이걸 얻었음은 기밀이어야 한다. 하지만 주 공자가 안다. 어쩌지?' 주유성을 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은혜갚음을 생각하 다가 갑자기 살인멸구를 할 수는 없다. 그런 건 마두나 하는 짓이다. 빙궁주는 마두가 아니다. "주 공자, 부탁이 있네. 저 빙정과 극한지처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해주겠나?" "뭐 떠들 일이라고요. 알았어요. 하지만 극한지처는 결국 알려질 텐데요?" "괜찮네. 내가 이 빙정을 흡수할 시간만 있으면 돼. 내가 모든 것을 익히면 이제 북해의 영광이 시작되는 거야. 과거 의 영광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거지. 그때는 누구나 알아 도 돼." 주유성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 할아버지 무슨 생각인 거야? 혹시 딴마음 먹는 거 아 냐?' "무림맹에 대한 지지 선언은요?" "으하하! 당연히 하지. 어디 그뿐인가? 자네가 원하기만 한 다면 우리 빙궁의 강력한 전사들까지 보내주겠네." |
첫댓글 즐독입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