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30도를 오르내린다.
게다가 습도까지 높으니 몸이 처지고, 입맛마저 없다.
뭐, 입맛 돋을 음식이 없을까?
친정엄마의 다슬기 아욱국이 생각났다.
나는 충북 충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우리 집 도보 십 분 거리에 초등학교가 있다.
학교 근처에 면사무소, 농협, 우체국, 파출소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 동네는 강이 없다. 강에 가려면 도보 한 시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친구와 가끔 강에 다슬기를 잡으러 갔다.
그 시절, 비닐봉지나 양파 자루가 흔치 않았다.
뚜껑 있는 노란색 양은 도시락이나 주전자 하나 들고.
뜀박질하면서 강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도 꽤 더웠다. 먹을 물도 없이, 땀 닦을 수건도 없이.
다슬기 담을 그릇 하나 달랑 들고 강으로 달려갔다.
강에 닿으면 앞다투어 강물에 뛰어들었다.
머리를 깊게 숙이고, 엉덩이를 하늘로 높이 들어 다슬기를 잡았다.
다슬기를 잡다가 지치면 한바탕 물장구를 치면서 놀았다.
그 시절 시계도 귀했다. 시계는 없었지만.
우리는 감으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알아차리고,
또 한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배가 매우 고팠다.
주변에 토마토나 오이가 있으면 따서 씻지도 않고 '와작와작' 베어 먹었다.
요즘은 절도죄가 되겠지만.
그때는 밭 주인이 내다보면서, 그냥 너그럽게 웃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산모퉁이 돌아 걷다 보면 오디가 까맣게 익었다.
오디를 한 움큼 따서 먹었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입이랑 손은 온통 오디 물이 검붉게 들었다.
집에 도착하면, 어느새 '뉘엿뉘엿'해서 저물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다. 큰 소리로.
"엄마~, 내가 올갱이(충청도 사투리) 많이 잡아 왔어."
하면서 엄마 앞에 불쑥 다슬기가 가득 담긴 노란 주전자를 내밀었다.
엄마는 "아이고, 많이 잡았구나." 하시며 반겨 주었다.
다슬기는 해감 시켜야 하니, 내일이나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마당의 펌프 물을 받아 넓은 고무 대야에 다슬기를 담가 놓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구수한 다슬기 아욱국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아침밥을 다 먹고 나면.
우리 칠 남매는 미리 건져 놓았던 다슬기 바구니 앞에 둘러앉았다.
바늘로 다슬기 살을 쿡 찔러 살살 돌리면.
오동통한 다슬기 살이 뱅그르르 쏙 빠져나온다.
재래시장에 다슬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생선 가게를 샅샅이 뒤졌다. 다행히 다슬기를 살 수 있었다.
엄마가 했던 것처럼 넓은 그릇에 다슬기를 담았다.
물을 채운 뒤 하룻밤 동안 해감 시켰다.
다음 날 아침, 다슬기가 기어 나와 싱크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고무장갑 끼고 '바락바락' 문질러 여러 번 씻었다.
그리고 냄비에 멸치 육수를 끓여 된장을 풀었다.
다슬기를 넣어 끓이다가 다슬기는 채반에 건져 놓고,
아욱을 넣어 푹 끓였다. 자신 있게 아침상을 차렸다.
엄마의 맛있는 다슬기 아욱국을 떠 올리며 한 숟가락 가득 입에 넣었다.
그런데 엄마의 구수하고 맛있는 다슬기 아욱국 맛이 아니다.
그렇다 엄마의 다슬기 아욱국은 엄마의 사랑, 그리고 정성을 가득 담은 맛이었다.
엄마의 정성의 맛을 어찌 흉내 낼 수 있겠는가.
어느새 팔십을 훌쩍 넘은 엄마는.
더 이상 맛있는 다슬기 아욱국을 끓일 수 없다.
어릴 때 다슬기 함께 잡던 친구가 보고 싶고, 엄마의 다슬기 아욱국이 그립다.
더위가 가고 시원한 바람 불어오면 고향의 엄마를 찾아뵙고,
다슬기 아욱국이 맛있는 맛집이라도 찾아가야겠다.
양파 망에 한가득
무척 많을 것 같아요.
아픈 다리 허리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