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야기-故 鵲泉을 추모하며,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
이뤄질지 몰라 여기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말로는 뭐라 할 수 없는 이 순간
참아온 나날 힘겹던 날
다 사라져 간다 연기처럼 멀리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 던진다
지금 내게 확신만 있을 뿐
남은 건 이제 승리뿐
그 많았던 비난과 고난을
떨치고 일어서 세상으로 부딪혀 맞설 뿐
지금 이 순간 내 모든 걸
내 육신마저 내 영혼마저 다 걸고
던지리라 바치리라
애타게 찾던 절실한 소원을 위해
지금 이 순간 나만의 길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꿈
간절한 기도 절실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우리나라 뮤지컬 공연에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다는 평을 듣는 ‘지킬 앤 하이드’(Jekyll & Hyde)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이라는 노래 그 노랫말 전문이다.
닥친 위기에 감히 나서서, 이겨내고자 하는 그 의지가 가득 담겨있음을 본다.
나는 그 뮤지컬을 본 적이 없다.
그저 노래로만 몇 번 들었을 뿐이다.
내가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서울 서초동에서 ‘작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법무사를 개업하고 있으면서, 개업 내내 참여했던 독서클럽 ‘Book Tour’에서였다.
클럽의 핵심 중 한 사람인 박남철 회원이,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오전 7시 30분, 자신이 근무하는 서초동 ‘투모로 법무사사무소’에서 가졌던 독서모임에서, 그 두 해 전인 2010년 제 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문 후보로 올라 6개 부문을 수상한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2008년 미국 영화 ‘허트 로크’(The Hurt Locker)를 소개하면서 붙인 제목이 ‘지금 이 순간’이었고, 박 회원이 그 영화에 대한 소개를 하기 전에 먼저 들려준 노래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 노래였다.
영화는 이라크에 파견된 미군 폭발물 제거반(EOD)에 소속된 장병들의 활약상을 담아내고 있었다.
다음은 Daum영화 사이트에 소개된 그 영화의 줄거리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폭발물 제거반 EOD. 예기치 못한 사고로 팀장을 잃은 EOD팀에 새로 부임한 팀장 ‘제임스’는 독단적 행동으로 팀원들을 위험천만한 상황에 빠뜨린다. 언제 터질지 모를 급조폭발물과 시민인지 자폭 테러리스트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은 EOD팀을 극도의 긴장과 불안감에 빠뜨리고, ‘제임스’의 무리한 임무 수행으로 팀원들 간의 갈등은 깊어져 간다.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본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킬 존’에서의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가는데… 제대까지 남은 시간 D-38. 과연 이들은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영화 포스트에는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에 맞서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걸려 있었다.
새로 부임한 제임스 팀장은, 그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그동안 872개의 폭발물 기폭장치를 안전하게 제거했으며, 이제 또 한 번의 위험한 지금 이 순간에 감히 나선 것이다.
기폭장치 제거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장갑과 방탄복을 벗어던지고, 수시로 전해오는 동료들의 상황 보고가 귀찮다고 헬멧과 헤드셋까지 벗어던져, 마치 맨 몸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폭탄 덩어리 앞에 서는 그 용감성은 찬탄을 받아 마땅했다.
내 지난날 살아온 삶의 길들에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없지 않았다.
경남 울산에서 군 생활을 할 때, M-16소총을 들고 난사하는 운전병에게 감히 다가가 설득시켜 총을 건네받은 사건의 현장 상황도 그와 엇비슷했고, 알 철모에, 한쪽 발에는 군화, 다른 쪽 발에는 농구화를 신게 하고, 탄띠와 M-1소총을 거꾸로 차고 매게 해서, 마치 패잔병 같은 꼬락서니로 울산 시내를 구보하게 명령한 육군장교에게 덤벼든 사건의 현장 상황도 그와 엇비슷했다.
그 모두가, 내 삶의 길을 갈라 칠 수 있는 위기의 순간들이었다.
그 위기의 순간들에 나는 감히 맞섰던 것이다.
법무사를 개업해서 십 여 명의 직원들을 챙겨가던 당시의 내 상황도 마찬가지의 위기였었다.
오랜 불경기와, 그로 인한 법무사끼리의 극심한 경쟁으로, 계속해서 적자가 쌓여가는 너무나 어려운 형편이었다.
만년에 살까 싶어서 장만했었던 동백지구의 집 한 채도 팔아넘겨야 했고, 집행관을 하면서 아내 몰래 꼬불쳐 뒀던 현금 1억 원도 그때 털어 내놔야 했다.
내 그런 희생에 대해 주위의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참으로 힘들고 섭섭한 세월이었다.
솔직한 내 마음으로, 사업의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법무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언뜻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다.
그 위기 뒤에 곧 기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경험칙으로 내 이미 터득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꿈과 희망 없이는, 지금 이 순간의 내 존재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인식 또한, 내가 그때 주저앉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내 소중한 친구 鵲泉이 오랜 세월을 버텨오던 병마를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 영전 앞으로 달려갈 수는 없었다.
아내가 평소에 하매나 하매나 하면서 그토록 찾아보고 싶어 했던 오대산 소금강을 오르는 산행과, 일흔일곱 나이에 이른 내가 현실적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확인해 보려고 작정했던 해발 1,708m의 백두대간 설악산을 오르는 산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중의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결국 나는 친구의 영전 앞에 서는 것을 포기했다.
서 본들, 그것은 형식적인 추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추모였다.
그 마음으로, 내 여정은 쭉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