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1, 항일 투사의 죽음
영국인 배설(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은 1909년 5월 1일
서울 정동의 아스토 하우스 호텔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른 여섯 살. 이국 땅에서 젊은 나이에 극적인 일생을 마치면서
배설은 양기탁의 손을 잡고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방방곡곡은 애도의 눈물로 넘쳐흘렀다.
박은식(朴殷植)은 이렇게 탄식했다.
하늘이 공을 보내고는 다시 데려갔구나(天遣公來又奪公)
구주의 의혈남아 동쪽의 어둠을 씻어내고자(歐洲義血灑溟東)
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지를 뿌렸네(翩翩壹紙三千里)
꽃다운 이름 남아서 다함 없이 비추리(留得芳名照不窮)
양기탁(梁起鐸)은 하늘의 뜻이 어찌 이리도 무심한가 하고 통탄했다.
대영 남자가 대한에 와서(大英男子大韓衷)
한 신문으로 어두운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紙光明黑夜中)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 급히 빼앗아갔나(來不偶然何遽奪)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欲將此意問蒼窮)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배설의 장례식은
5월 2일 오후 3시 30분 서대문에 있던 자택에서 거행되었다.
구미 여러 나라의 총영사관원과 교회의 목사, 선교사, 신문사의 대표와
각계 인사들은 그의 집이 있는 평창동 등성이를 지나는 성곽의 아래위와
도로의 양쪽에 수천명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신은 네시에 발인하여 한강변의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를 향했다.
운구(運柩) 행렬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뒤를 따랐다.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양화도 장지로 가는데 한국인 둥에 재배하며 곡하는 자도 있고, 부인들도 배(裴) 공의 집 근처에서 통곡하는 이도 많더라.
하오 오시에 하관할 새 영국 목사 터너씨가 예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全德基) 씨가 기도한 후 성분(成墳)하였는데
분상(墳上) 앞에서 절하며 곡하는 자가 있고 장지까지 회장한 인원은 내외국인 병하야 천 여명이더라.
그의 죽음을 한국인들이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를 묘사한 광경이다.
일본 헌병대는 장례식을 따라 간 추모객이 한국인과 외국인을 합쳐
“무려 300여명의 성대한 광경”이었다고 기록했다.
신보의 보도에 비해서 헌병대는 인원을 많이 축소하면서도 성대한 광경이었음을 숨기지는 않았다.
당시에 자발적으로 천여 명에 이르는 군중, 또는 적게 잡아도 300여명이 모이는 광경은 거의 볼 수 없는 경우였다.
교통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쉽게 모이는 오늘날과는 달랐던 시절이었다.
5일에는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에서 추도회가 열렸다.
안창호와 양기탁을 비롯하여 구미 여러 나라의 영사관원들을 포함하여 400여명이 모여서 그를 추모했다.
영국 총영사관 직원과 영국인 선교사 3명, 경신학교 학생 90여명 기독교인 등이 모인 가운데 양기탁과 안창호가
그의 항일 투쟁을 소개하고 추모하는 연설을 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죽은 배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일본에서 무역업을 하다가 러일전쟁 후 서울에 와서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발행하였다.
국운이 다하여 나라가 위급하던 때에 신문을 통해서 민족진영의 항일운동을 지원했던 항일 언론인이었다.
영국인들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민족진영에서는 이 신문을 항일의 본거지로 활용하였다.
신문을 항일투쟁의 발판으로 삼아 일본의 침략을 통렬히 비판했고, 신문사를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로 활용하였으며
항일 비밀단체 신민회의 본부가 되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본 외무성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배설의 추방과 신문의 폐간을 획책하였다. 일본은 영국에 끈질긴 외교 공세를 펴서 배설은 두 차례나 재판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한국에서 짧은 일생을 마치고 한국 땅에 뼈를 묻었다.
그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불같은 생을 살았던 일생과 항일투쟁을 살펴본다.
2, 배설의 경력
1) 출생과 학력
배설은 1872년 11월 3일에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톨(Bristol)의 북부 지역인 애쉴리(Ashly)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헨콕(Thomas Hancock Bethell)은 일본을 비롯한 동양을 대상으로 무역업을 하던 사람이었고,
어머니 마아서 제인 홀름(Martha Jane Bethell, 원래 성은 Hollom)은 전도사(city missionary)의 딸이었다.
배설은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다섯 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다. 배설의 할아버지는 이름이 토마스 베셀이었고,
배설의 아버지가 결혼할 당시에는 고인이었지만 생전의 직업은 짐 싣는 거룻배의 소유주였다(barge owner).
토마스 핸콕은 1녀 3남을 두었는데, 첫 아이는 딸인 마니(Minnie)였고, 그 아래로 배설이 장남이었고, 차남 허버트(Herbert),
3남 아서 퍼시(Arther Percy)가 있었다. 토마스 핸콕과 세 아들은 장성한 후에 일본 상대의 무역업에 종사하게 된다.
배설은 브리스톨의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에서 공부했다.
1856년 3월 28일 브리스톨 무역․광산학교(Bristol Trade and Mining School)이라는 교명(校名)으로 개교한 학교였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 학교는 실업전문학교였다. 성인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주간반과 야간반, 그리고 중등반의 3개 과정이 있었는데,
1885년 브리스톨의 상인조합(Society of Merchant Venturers)이 학교를 인수하여 시설과 교육내용을 대폭적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학교 명칭을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로 고쳤다. 브리스톨의 상인조합은 브리스톨의 상인들을 대표하는 조합이었다.
1551년 12월 에드워드 6세의 특허를 얻어 그 이듬해에 법인조직을 구성한 이래 영국이 무역과 상업이 세계를 무대로 뻗어나가는 동안,
이 조합은 브리스톨의 복지와 상업 및 무역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 조합은 학교를 인수한 후 시청 맞은편에 있는 유니티 스트리트(Unity Street)에 새 교사를 신축하여 1885년 9월 신학기부터
이 건물에서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학교 신축과 교육시설을 위해서는 영국과 유럽의 우수한 시설과 최신 건물을 지닌 학교의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참고로 하여 지었다 한다.
이때부터는 교육과정도 확장하여 초등부(primary), 중등부(secondary), 광업기술부(mining and technical),
화학 야금부(冶金部; chemical and metallurgical), 공예부(art), 야간부 등의 여섯 과정이 있었다. 산업 및 상업분야에 종사할
기술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한 전문대학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에는 브리스톨에 대학이 없었고,
후에 이 학교는 현재의 브리스톨대학이 되었는데 브리스톨에서는 가장 유명한 명문학교였던 것이다.
배설은 이 학교 고등부의 과학과정(science in the higher part)에서 공부했다.
고등부는 중등과정을 마친 학생이 진학하는 전문대학 수준이었다. 교육과목은 수학, 대수, 기하, 화학, 물리를 비롯하여
불어, 독어, 역사 등이 있었고, 고등부에는 수학 및 과학 과목이 스무 개 이상 개설되어 있었다. 이 학교는 당시 브리스톨 도시의
안내책자인『디렉토리』에도 ‘대학 수준의’(collegiate school) 학교로 분류되어 있고, 배설이 졸업한 지 6년 뒤인 1894년에는
머천트 벤처러스 테크니컬 칼리지(Merchant Venturers Technical College)로 명칭을 바꾼 것을 보더라도 교과 내용이
초급대학 또는 전문대학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시교육위원회(Science and Art Depart-ment of the Committee of Council on Education)가
실시하는 시험결과로 결정되었는데, 배설은 1885~1886년 학기의 시험결과 ①수학 ②소리, 빛, 열(Sound, Light and Heat)
③마그네슘과 전기(Magnetism and Electricity)의 세 과목에 합격했다.
2) 일본에서 베셀브라더스 설립 무역업
배설의 아버지 토마스 핸콕은 회사의 경리를 담당하는 서기였다.
결혼 신고서에는 직업이 회계원(accountant)으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2년 후 배설이 태어날 때에는 양조회사의
서기(brewers clerk)로, 차남 허버트가 태어날 때에는 상업서기(commercial clerk)로, 3남 퍼시가 태어날 때에는
다시 회계원(accountant)으로 적고 있어서 그의 구체적인 직업은 경리담당 사무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1881년 실시된 전국인구조사(Census Return)의 기록과 1885년 9월에 작성된 배설의 학적부에는 토마스 핸콕의
직업이 양조회사의 지방순회 외무원(brewer’s commercial traveller)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때는 토마스 핸콕이 사무실에 앉아 경리를 담당하던 사무원이 아니라, 브리스톨 이외의 지역에도
업무상 자주 여행을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마침내 1886년부터는 월급쟁이 직장을 그만두고 일본까지 건너가서
무역업에 손을 대게 되었고, 극동지방을 상대로 스스로 무역상을 경영하는 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배설은 아버지 토마스 핸콕이 고베에서 돌아와 런던에 무역상을 차렸던 18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이는 열 일곱 살이었다. 배설이 한국에 오기 전의 경력에 대해서 주한 영국총영사 레이(Arther Hyde Lay)는
본국에 보낸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했다.
1872년 11월에 태어난 배설은 소년 시절에 동양에 와서 고베에 있는 아저씨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entered the office of an uncle in Kobe).
그 후 골동품을 수출하는 베셀 브라더스 무역상을 공동운영하면서 1904년 전쟁이 일어난 직후까지 고베에
머물다가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되어 한국에 파견되었다.
배설은 아버지 토마스 핸콕이 런던에서 프리스트 마리안스 베델 엔드 컴퍼니라는 동업 유한회사를 설립한 뒤
고베의 외국인 거류지 69번지에서 이 회사의 일본지점을 운영하다가 토마스 핸콕이 동업회사에서 손을 떼자
1899년에 동생들과 함께 독자적인 무역상 ‘베셀 브라더스’를 설립했다.
아버지의 영업을 두 아들이 새로운 무역상을 설립해서 이어받은 것이다.
배설은 천성이 외향적이고 활발했다.
그는 고베 레가타 엔드 애슬레틱 클럽(KR & AC)의 운영위원과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스포츠를 즐겨서 레가타, 수영, 크리켓 등의 경기에 출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스포츠, 음악, 체스 등을
즐기는 다재 다능하고 활발한 성격으로 이야기하는 태도는 솔직하고 활달했으며,13) 술과 담배도 남달리 좋아했다.
사업상으로는 고베에서 적지 않은 돈을 벌 수가 있었고, 자기 수중에 6~7만환의 자본까지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1901년 7월경14) 오사카 근처의 사카이(堺)에 차렸던 러그(rug) 공장이 실패하여 많은 손해를 보았다.
물건을 사서 영국으로 수출하거나 일본에 수입하는 중개상 성격의 소규모 무역업에서 탈피하여 직접 물건을 생산하여
이를 영국으로 보내려는 의욕적인 사업이었다. 젊은 배설이 자신의 전 자본을 투자하여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인들의 방해를 받아 실패로 돌아가 '신세가 가련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3) 대한매일신보와 Korea Daily News 창간
배설은 일본에서 한때는 돈도 벌었고, 러그 제조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해 보기도 했지만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러그 사업에 실패한 뒤, 때마침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 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왔다. 그러나 한국에 온 지 얼마 후에는 데일리 크로니클을 그만두고 대한매일신보와 Korea Daily News의 발행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국에 오던 때는 32살의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배설은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으로 서울에 왔으나 오래지 않아 본사에서 그를 해임하자 곧바로 서울에서 새로운 신문을
하나 만들기로 하였다.일본과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여러 종류의 영어신문이 발행되고 있었지만 서울에는 서재필이
발행하던 The Independent가 1896년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에 폐간된 뒤로는 영어신문이 없었다
.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가 발행하던 월간지 Korea Review가 유일한 영어 정기간행물이었다.
러일전쟁의 취재를 위해 많은 서양 기자들이 몰려왔지만 영어로 발행되는 신문이 없었으므로 서울에서 영어신문을 발행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신문 발간을 서두를 수 있었던 것은 주한 일본공사관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었다.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과의 접촉도 결정적인 작용을 했을 것이고, 고종으로부터 보조금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여러 종류의 영어신문들이 오래 전부터 발간되고 있었는데도 국제적으로 관심이 쏠려 있는
한국에는 영어신문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신문 밭간을 착안하게 만든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처음에 배설은 토마스 코웬과 함께 신문발간을 준비했다. 영문판 신문의 제호는 The Korea Times였다.
배설과 코웬은 1904년 6월 29일에 견본판 [樣子新聞]을 만들었으나, 그 후 두 사람의 의견 차이로 코웬은 손을 떼고
결국 배설 혼자서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 견본판이 나온지 20일 뒤인 7월 18일이 신문의 창간 날짜였다.
창간 당시에는 영문판 4면과 한글전용판 2면으로 전체 지면은 6 페이지로 된 2국어 신문이었다.
3, 배설과 양기탁
1) 대한매일신보 총무 한학 공부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한국어판 대한매일신보에는 민족진영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으며,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논객들이 항일논조의 글을 썼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倓), 옥관빈(玉觀彬)과
같은 항일투사들도 신보에 관계하고 있었다. 가장 오랜 기간 배설과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은 양기탁이었다.
미국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도 배설과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
여기서 모든 인물을 모두 거론할 수는 없으므로 양기탁의 역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양기탁(梁起鐸; 1871.4.2-1938.4.19)은 신보 발행에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언론인이면서 독립운동가로 항일 투쟁으로
일관한 일생을 살았다.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로 신문을 통한 항일 운동에 진력하는 한편으로 국채보상운동과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당시의 언론인들 가운데는 드물게도 영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었으며
일본에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쳤던 경험도 있고, 서양 사람들과도 긴밀히 접촉할 기회가 있었기에 폭넓은 견문과 식견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이 기울었던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그의 지사적인 생애가 결코 평탄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몇 차례나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야했고, 투옥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본 통감부가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양기탁을 투옥하고 재판에 회부하였을 때에는
영-일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국내 뿐 아니라 영국, 일본, 중국의 신문에도
자주 실리게 되어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외국 언론들은 그를 대한매일신보와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한국인 편집인(Korean Editor)으로 호칭했고, 국내에서는 ‘총무’라 불렀다. 영어로는 전무라는 뜻의 ‘제네널 매니저’
(General Manager)라고도 했다. 지금 개념으로는 경영을 총괄하는 역할이면서 동시에 편집면에서의 주필․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였던 것이다. 그는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때부터 간여하여 1910년 6월 14일까지 근무했으므로, 대한매일신보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배설이 대한매일신보를 지켜준 울타리였다면 양기탁은 신보를 떠받치고 있던 대들보이자 기둥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의 항일논조로 말미암아 배설은 2차례나 재판을 받은 끝에 투옥되었고, 같은 때에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횡령하였다 하여 재판을 받았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양기탁에게 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투옥했다가 다시 신민회(新民會)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했다.
이 모든 수난의 근본은 대한매일신보와 관련하여 일제가 양기탁과 그 종사자들을 탄압한 연장이었다.
양기탁은 1871 평안남도 평양 소천(小川, 또는 西村 院場)에서 양시영(梁時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쌍룡면(면雙龍面) 신경리(新慶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우강(雩崗)이고 어릴 때 이름은 의종(宜鍾)이었다. 아버지 시영은 이름난 한학자였다.
양기탁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그를 한번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슬기에 경탄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는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배우며 자랐는데 15살 때에는 그 지방에서 보기 드문 소년 문장가로 손꼽힐 정도가 되었다 한다.
그는 15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17) 평북 위원(渭原)의 명망 있는 유림(儒林)이며 우국지사였던 라현태(羅鉉泰)를 알게 되었다.
스승 라현태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15살이라면 1886년 무렵인데 이때부터 그는 여러 우국지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하여 그들의 애국사상에 큰 감화를 받게 되었다 한다.
그는 또한 동학당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견문을 넓히고 사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후에 그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3) 대한매일신보와 Korea Daily News 창간
배설은 일본에서 한때는 돈도 벌었고, 러그 제조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해 보기도 했지만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러그 사업에 실패한 뒤, 때마침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 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왔다.
그러나 한국에 온 지 얼마 후에는 데일리 크로니클을 그만두고 대한매일신보와 Korea Daily News의 발행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국에 오던 때는 32살의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배설은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으로 서울에 왔으나 오래지 않아 본사에서 그를 해임하자 곧바로 서울에서 새로운 신문을 하나 만들기로 하였다.
일본과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여러 종류의 영어신문이 발행되고 있었지만 서울에는 서재필이 발행하던 The Independent가 1896년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에 폐간된 뒤로는 영어신문이 없었다.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가 발행하던 월간지 Korea Review가 유일한 영어 정기간행물이었다.
러일전쟁의 취재를 위해 많은 서양 기자들이 몰려왔지만 영어로 발행되는 신문이 없었으므로 서울에서 영어신문을 발행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신문 발간을 서두를 수 있었던 것은 주한 일본공사관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었다.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과의 접촉도 결정적인
작용을 했을 것이고, 고종으로부터 보조금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여러 종류의 영어신문들이 오래 전부터
발간되고 있었는데도 국제적으로 관심이 쏠려 있는 한국에는 영어신문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신문 밭간을 착안하게 만든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처음에 배설은 토마스 코웬과 함께 신문발간을 준비했다. 영문판 신문의 제호는 The Korea Times였다.
배설과 코웬은 1904년 6월 29일에 견본판 [樣子新聞]을 만들었으나, 그 후 두 사람의 의견 차이로 코웬은 손을 떼고
결국 배설 혼자서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 견본판이 나온지 20일 뒤인 7월 18일이 신문의 창간 날짜였다.
창간 당시에는 영문판 4면과 한글전용판 2면으로 전체 지면은 6 페이지로 된 2국어 신문이었다.
3, 배설과 양기탁
1) 대한매일신보 총무 한학 공부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한국어판 대한매일신보에는 민족진영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으며,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논객들이 항일논조의 글을 썼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倓), 옥관빈(玉觀彬)과
같은 항일투사들도 신보에 관계하고 있었다. 가장 오랜 기간 배설과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은 양기탁이었다.
미국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도 배설과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
여기서 모든 인물을 모두 거론할 수는 없으므로 양기탁의 역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양기탁(梁起鐸; 1871.4.2-1938.4.19)은 신보 발행에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언론인이면서 독립운동가로 항일 투쟁으로
일관한 일생을 살았다.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로 신문을 통한 항일 운동에 진력하는 한편으로 국채보상운동과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당시의 언론인들 가운데는 드물게도 영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었으며
일본에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쳤던 경험도 있고, 서양 사람들과도 긴밀히 접촉할 기회가 있었기에 폭넓은 견문과 식견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이 기울었던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그의 지사적인 생애가 결코 평탄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몇 차례나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야했고, 투옥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본 통감부가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양기탁을 투옥하고 재판에 회부하였을 때에는
영-일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국내 뿐 아니라 영국, 일본, 중국의 신문에도
자주 실리게 되어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외국 언론들은 그를 대한매일신보와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한국인 편집인(Korean Editor)으로 호칭했고, 국내에서는 ‘총무’라 불렀다. 영어로는 전무라는 뜻의
‘제네널 매니저’(General Manager)라고도 했다. 지금 개념으로는 경영을 총괄하는 역할이면서 동시에 편집면에서의
주필․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였던 것이다. 그는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때부터 간여하여 1910년 6월 14일까지 근무했으므로,
대한매일신보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배설이 대한매일신보를 지켜준 울타리였다면 양기탁은 신보를 떠
받치고 있던 대들보이자 기둥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의 항일논조로 말미암아 배설은 2차례나 재판을 받은 끝에 투옥되었고, 같은 때에 양기탁은 국
채보상운동 의연금을 횡령하였다 하여 재판을 받았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양기탁에게 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투옥했다가 다시 신민회(新民會)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했다.
이 모든 수난의 근본은 대한매일신보와 관련하여 일제가 양기탁과 그 종사자들을 탄압한 연장이었다.
양기탁은 1871 평안남도 평양 소천(小川, 또는 西村 院場)에서 양시영(梁時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쌍룡면(면雙龍面) 신경리(新慶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우강(雩崗)이고 어릴 때 이름은 의종(宜鍾)이었다. 아버지 시영은 이름난 한학자였다.
양기탁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그를 한번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슬기에 경탄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는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배우며 자랐는데 15살 때에는 그 지방에서 보기 드문 소년 문장가로 손꼽힐 정도가 되었다 한다.
그는 15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17) 평북 위원(渭原)의 명망 있는 유림(儒林)이며 우국지사였던 라현태(羅鉉泰)를 알게 되었다.
스승 라현태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15살이라면 1886년 무렵인데 이때부터 그는 여러 우국지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하여 그들의 애국사상에 큰 감화를 받게 되었다 한다.
그는 또한 동학당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견문을 넓히고 사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후에 그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2)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 익혀
그런데 양기탁은 1886년에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미국인 선교사이며 의사로 주한 미국공사가 되는 알렌(安連, Horace N. Allen)이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에서 일할 보조원을
양성하는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알렌의 요청에 따라 조선 정부는 전국 8도에서 2명씩 16명의 수련생을 선발하였는데
양기탁은 평안도에서 선발된 2명 가운데 들어 있었다.19) 제중원은 1886년 3월 29일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시작하였고,
알렌 등 3명의 외국인 교사가 교육을 담당했다. 교과과목은 영문, 화학, 제약(製藥), 의술(醫術) 등이었다.
이들에게는 식사, 숙소, 학비 등이 제공되었으며, 과정을 이수하면 政府 관리로 등용하여 주사(主事)에 임명한다고 하였다.
양기탁은 제중원에서 근무하기 위한 교육을 6개월 동안 이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반 년 동안 영어를 배웠다는 것은 바로 이때의 교육을 말하는 것 같다.
양기탁은 1912년 12월 20일 법정에서 “15세까지는 한문을 배웠고, 그 후 반년 정도 영어학교에 다니다가 퇴학 후에는 독학을 하였다”고
진술하였고, 1913년 7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도 “15세까지 7년쯤 한문을 배웠고, 그 뒤 외부아문(外部衙門)의 명으로
반년쯤 영어를 배운 것 외에는 특별히 선생을 모시고 공부한 일은 없다.”고 말하였다.
“외부아문의 명으로” 반년쯤 영어를 배웠다는 말은 제중원의 교육이 외무아문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와같은 양기탁의 경력으로 보아 그의 지식과 사상은 열다섯 살 때까지 배운 한학의 토대 위에서 서양학문과 기독교 정신이
접목된 것이었고, 동학과도 관계를 맺음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이 자리 잡게 되었던 셈이다.
3) 게일의 한영자전 편찬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한 양기탁은 아버지 양시영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의
『한영자전; A Korean English Dictionary』을 편찬하는 일을 도왔다.『한영자전』은 1897년 6월에 출판되었는데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후쿠인(福音)인쇄합자회사(印刷合資會社)’에서 인쇄하여 ‘서울야소교서회(耶蘇敎書會)’에서 발행하였다.
그런데 자전의 판권에 나오는 발행 일자보다 앞서 4월 24일자 독립신문에는 한영자전이 출판되었음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독립신문은 게일이 몇 해를 두고 조선말을 영어로 찾는 옥편(한영자전)을 만들었는데 1천 300여장의 옥편을 일본서 박아 일전에
출판이 되어 서울로 보내왔다고 보도하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한영자전』의 판권에는 6월 출간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실은 4월에 이미 출간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영자전은 그보다 앞서 1880년 프랑스 신부 리텔 등이 편찬한 『한불자전: Dictionnaire Coréen-français』을 대본으로
하였으나 그보다 훨씬 방대한 것으로 3만 5천 단어가 수록되었다.
게일은 한영자전의 초판 서문에서 사전 편찬에 소요된 기간이 6년이었다고 말하고, 편찬을 도운 한국인 8명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그 가운데 양시영과 양기탁의 어릴 적 이름인 양의종(梁宜鍾)이 들어 있다. 함께 사전 편찬을 도운 한국인은 정동명(鄭東鳴),
양시영(梁時英), 이창직(李昌稙), 이겸래(李謙來), 양의종(梁宜鍾), 조종갑(趙鍾甲), 신면휴(申冤休)였다.
사전 편찬 작업에 6년이 소요되었다면 1891년 무렵부터 시작되었을 것이고, 양기탁도 그 때부터 게일의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했을 것이다.
사전편찬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까다로운 작업인데, 짧은 기간 밖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게일이 양기탁의 이름을 서문에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성외국어학교에서 겨우 반년 밖에 영어공부를 하지 않은 양기탁이 영어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몇 년 동안 게일의 사전 편찬에 참여하면서 영어를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양기탁의 동생 양인탁(梁寅鐸)도 영어를 잘했던지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하면서 외보를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양인탁은 양기탁보다 13살 아래로 1906년에 작성된 한성부의 호적에는 당시 양기탁이 36세, 양인탁은 23세로 되어 있다.
양기탁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양기탁과 그의 동생 3부자가 모두 영어를 할 수 있던 것으로 보아서 그들에게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어떤 환경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선교사 게일과의 인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양기탁과 게일(1863.2.19-1937.1.31)의 관계에 관해서는
리처드 러트(Richard Rutt)의 James Scarth Gale and his History of the Korean People(한국민족사)에도 언급되어 있다.
캐나다 출신이지만 미국 선교사로 한국에 온 게일은 1888년 12월 15일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892년 6월부터는 원산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한영자전』의 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다.
게일이 원산에 있는 동안 사전을 편찬하였다면 양기탁과 양시영이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 곳도 원산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교통 통신사정과 사전 편찬이라는 세밀한 작업의 성격으로 보아서 서울과 원산에 떨어진 상태로는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장도빈(張道斌)은 양기탁이 부모와 함께 원산으로
이거(移居)하여 기독교를 신앙하며 한문을 배우는 한편 서양 선교사의 도움으로 영어를 배워 통해(通解)했다고 썼다.
부모와 함께 원산으로 이거하였다는 것은 아버지 양시영을 비롯한 가족들이 원산에 가서 게일의 한영자전 편찬에
참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기탁은 게일보다 여덟 살 아래였지만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게일은 원산에 있는 동안 사전을 편찬하는 한편 시조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했는데,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에
들어 있는 시조를 번역하였다.남훈태평가의 원본은 양기탁이 그의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얻은 것으로, 게일은 이 목판본을
대본으로 삼아 34수의 시조를 영역(英譯)하였다.게일은 1895년 12월 원산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로 가서 1897년 5월까지
그 곳에 머물면서 사전의 조판하고 인쇄, 제작 과정을 감독했다.
요코하마에 갈 때에 게일은 이창직(李昌稙)을 데리고 갔는데 이창직은 게일의 사전 편찬을 도운 사람일 뿐 아니라,
국내 최초의 번역 소설인『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1895년 출간)의 번역과 시조 영역 등을
도와주기도 했던 인물이다.
양기탁이 일본에 간 것도 바로 게일이 사전 인쇄를 위해 일본으로 갔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4) 나가사키상업학교 한국어 교사
양기탁은 나가사키(長崎)상업학교 한국어 교사로 초빙되어 일본에 갔다.
양기탁은 1912년 12월 20일 신민회 사건 공판 때에 “명치 38년 중 원산(元山) 영사관원의 소개로 나가사키상업학교에
한국어 교사로 가서 2년 정도 체류하였다”고 말했다. 그의 경력과 관련된 법정 진술은 다음과 같다.
문 위기, 훈장, 연금 등을 가지고 있는가.
답 구한국의 6품으로서 훈6등(勳六等) 서보장(瑞褒章)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난 번 처분을 받았을 때 치탈(褫奪)되어 지금은 무훈(無勳)이다.
문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는가.
답 예수교 장로회 신자이다.
문 관직에 있었던 일이 있는가.
답 구한국 예식원(禮式院)의 번역관보에 2년간 봉직했으나,
일․한 5조약이 체결된 다음 날 사직했고,
그밖에는 관도(官途)에 봉직한 일이 없다.
문 (번역관보) 봉직 중에는 어느 나라말을 번역하였는가.
답 영어 및 일본어를 번역하였다.
문 어떠한 교육을 받았는가.
답 15세까지는 한문을 배웠고, 그 후 반년 정도
영어학교에 다니다가 퇴학 후에는 독학을 하였다.
문 일본어는 어떻게 배웠는가.
답 일본에 간 일도 있고 어학은 독학하였다.
문 일본에 간 것은 언제이며, 무슨 용무였는가.
답 명치 38년 중 원산 영사관원의 소개로 장기(長崎)상업학교에
있는 한국어 교사로 가서 2년 정도 체류하였었다.
위의 진술 가운데 의문점은 명치 38년에 일본에 갔었다는 부분이다.
명치 38년이라면 1905년인데 이 때는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뒤였다.
양기탁은 이 때 신문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예식원의 번역관보로 근무 중이었다.
그러니 이 해를 전후해서 일본의 나가사키상업학교 한국어 교사로 2년간이나 재직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가 나가사키에 갔던 때는 명치 38년(1905)이 아니라 28년(1895)이었으나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양기탁은 1901년 무렵에 구속되어 투옥된 일이 있었다.
사전(私錢), 즉 가짜 돈을 만들려했다는 혐의였다. 양기탁은 옥중에 있는 동안 양기탁보다 먼저 수감되어 있었던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중학교를 운영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뎨국신문에 논설을
집필하는 한편으로 양기탁과 함께 1902년 9월부터는 감옥 안에 학교를 설립하여 죄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형무소의 한 칸을 치우고 한글과 '동국역사', '명심보감' 같은 책을 교재로 가르치다가 교육이 발전함에 따라서
영어와 일어, 지리, 문법 등으로 과목을 늘렸다.
이승만과 양기탁의 옥중교육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인 선교사 벙커(D.A.Bunker) 목사가 일요일에는 감옥에 찾아와서
가르친 것을 문답도 하고 성경도 가르쳤다.
교육이 진보하자 성인반은 같은 형무소에 있던 신흥우(申興雨)가 맡고 소년들은 양기탁(양의종)이 담당하였다.
형무소 안에는 한국어, 영어, 한자로 된 책 250여 권이 있었다.31) 양기탁과 이승만이 옥중에서 죄수들을 가르친 사실
은 1903년 1월 19일자 황성신문에도 보도되었고 이승만의 자서전에도 잠시 언급되었는데,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에 체포되어 1904년 8월 초순에 출옥했으므로, 양기탁은 이승만 보다 늦게 감옥에
들어갔다가 먼저 출옥한 것이다. 양기탁과 이승만이 수감되었던 감옥서는 종로구 서린동 42번지로 현재의 위치는
동아일보사 뒤쪽에 현재 한성감옥서의 표석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양기탁은 1908년에 국채보상의연금 사건으로 또다시 이곳 감옥서에 투옥되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양기탁은 1903년 3월 6일 고종의 명에 따라 감옥에 있던 미결수 145명과 함께 출옥하였다.
5) 예식원 번역관보와 주사
양기탁은 감옥에서 출옥한 후 곧 한성전기회사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높은 직위는 아니었으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되었기 때문에
출옥과 동시에 복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양기탁은 한성전기회사에서 덴마크인 뮐렌스테트(彌綸斯, H.J. Mühlensteth)를 만났다.
뮐렌스테트는 통신 기술자로 서울에 와서 1885년 9월 27일 청국인을 위하여 서울과 제물포 사이에 전신을 가설하였던 인물이다.
양기탁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3월 9일자로 궁내부(宮內府) 예식원(禮式院)의 판임관 6등으로 9품 벼슬인 번역관보(繙譯官補)로 임명되었다.
예식원에서 양기탁이 맡은 업무는 영어와 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한국어를 영어 또는 일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1년 뒤인 1905년 3월 25일에는 주사로 승진되었다.35) 양기탁은 뮐렌스테트의 소개로 배설(裴說)을 만났다.
일본 고베(神戶)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배설은 러일전쟁이 터지자 런던에서 발행되는 일간지『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 통신원이 되어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1904년 3월 10일 서울에 처음 왔다. 한국말을 몰랐던 배설은 통역이 필요했는데
뮐렌스테트가 양기탁을 추천한 것이다.36) 배설은 곧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면서 양기탁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양기탁이 배설을 만나게 된 경위와 대한매일신보사 내에서의 양기탁의 위치에 대해서는 배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1908년 9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국채보상운동 재판에 양기탁의 증인으로 나와 진술한 것이다.
재판장(橫田定雄) 언제 양기탁과 알게 되었는가.
배 설 l904년 4월경 내가 막 서울에 왔을 때다.
재판장 어떤 상황 아래서 인가.
배 설 나는 통역이 필요했는데, 뮐렌스테트 씨가 梁을 그 직위에 추천했다.
재판장 증인은 언제 대한매일신보를 시작했는가.
배 설 l904년 7월 혹은 8월이다.
재판장 언제 신문사에 梁을 채용했는가.
배 설 처음부터였다.
재판장 양은 어떤 직무로 근무했나.
배 설 양은 총괄 업무를 맡았다. 번역을 하기도 했다. 업무 지배인으로 나를 돕기도 했다.
재판장 그렇다면 양기탁은 총 업무를 맡았단 말인가.
배 설 아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늘 신문사의 총 경영을 맡았지만 양에게도 상당한 경영을 맡겼다.
재판장 양은 자신을 신문사의 총무(general manager)라고 불렀다. 그게 옳은가.
배 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좀더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재판장이 피고인 양기탁을 심문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재판장 피고는 어떻게 해서 대한매일신보에 입사했는가.
양기탁 사주(社主)와 서로 아는 친구를 통해 사주를 소개받았다.
재판장 사주란 배설을 말하는가.
양기탁 그렇다.
재판장 그 전에도 배설을 알고 있었는가.
양기탁 그렇다, 알고 있었다.
재판장 어떤 관계로….
양기탁 그가 서울에 온 직후 나는 그에게 소개되어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로 가끔 그를 도왔다.
재판장 피고가 배설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신문사에 들어갈 때에 새삼스레 소개받을 필요가 있었는가.
양기탁 아니다, 그 당시 내가 그에게 소개받은 게 아니다. 그를 안 것은 그의 요청으로 신문사 직원이 되기 얼마 전의 일이다.
재판장 그 신문사에서 피고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양기탁 처음에는 주로 영어를 번역하고 편집국의 일반 업무를 돕는 일이었다. 나중에 업무부의 일도 맡게 되었다.
재판장 경찰에서 심문 받을 때 피고는 대한매일신보사의 총무라고 말했다면서.
양기탁 배설로부터 그런 직위를 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나를 그렇게 불렀는데,
이는 아마 내가 모든 종류의 업무를 다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재판장 피고의 권한은 무엇이었는가.
양기탁 이미 말했듯이 편집과 업무의 일을 다했다. 배설은 흔히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나와 상의했다.
양기탁은 배설이 서울에 오기 전날인 3월 9일 예식원의 번역관보가 되었고, 배설은 다음날인 3월 10일 서울에 왔다.
두 사람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양기탁은 처음에는 배설의 부탁을 받고 통역과 번역 일을 해주었다.
양기탁과 배설이 만난 때는 러일전쟁이 터진지 한달,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위급한 시기였다.
많은 외국의 특파원들도 서울에 몰려와서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배설은 한동안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자신이 신문을 발행할 계획으로 크로니클과는 결별하고
한영 양국어로 된 신문 발행을 추진했다. 신문 발행을 처음 계획할 때의 영문판 제호는 『코리아 타임스』(Korea Times)였으나
동업이었던 코웬(Thomas Cowen)이 의견충돌로 갈라서고 난 다음 배설이 단독으로 신문을 창간하면서 제호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로 정한 것이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의 발간에 참여하는 동시에 궁내부 예식원의 번역관보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이 창간된 다음 해인 1905년 3월 25일에는 주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은 기울고 있었으며 신문사 일에만
전념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양기탁은 예식원에 사표를 내던지고
언론투쟁에 전념하기로 단안을 내렸다. 1913년 7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다음과 같이 사표를 제출한 이유를 밝혔다.
문 피고는 벼슬한 일이 있는가.
답 지금부터 10년쯤 전 예식원의 번역관이 되었으나, 명치 38[1905]년 일한협약이 체결된 다음날 그 직(職)을 사임했다.
문 왜 사직했는가.
답 관리는 국가를 위하여 진력해야 하는 것인데, 협약의 결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도록 되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그 직에 있어도 국가에 아무런 이익 될 것이 없고, 또 본인도 부귀영달을 구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그 직을 사퇴하고 그 이후로 벼슬할 생각을 끊었다.
문 피고는 대한매일신보를 경영하고 있었는가.
답 그렇다.
문 그것은 언제인가
답 관(官)을 그만두고 얼마 후 그 신문을 발행하여 명치 43[1910]년 5월까지 계속했다.
‘일한협약’이란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조약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의 조약명은 ‘한일협상조약’이지만 ‘제2차 한일협약’으로도
부르기 때문에 재판정에서 말한 “명치 38[1905]년 일한협약”은 을사조약을 뜻한다.
양기탁은 이어서 “협약의 결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도록 되었기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기자 호소이 하지메(細井肇)의 인물지 『현대 한성의 풍운과 명사(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에도 “38년 11월 17일,
5조약의 체결과 함께 일본과 한국의 보호관계가 확립되자 이튿날 분연히 사직하여 그 후 대한매일신보사에 들어가
배일사상 고취에 전력을 경주하였다.”고 쓰여 있다.
양기탁은 예식원 주사직의 사표를 던지고 신문 발행에 전념하였으나 사표가 정식으로 수리된 날은 12월 25일이었다.
11월 18일 경에 사표를 제출했다면 수리된 날까지 약 1개월의 시차가 있는데 사표 수리에 행정적으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인지,
양기탁의 사임을 만류하느라고 수리를 미루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건 양기탁은 을사조약 후에는 관직을 떠나
신문을 통한 항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재판장 피고가 대한매일신보 직원으로 들어간 것은 언제인가?
양기탁 3년 전이다.
재판장 어느 달인가?
양기탁 12월로 생각된다.
위의 증언은 1908년 9월 3일 국채보상의연금 횡령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의 진술이다.
‘3년 전 12월’이라면 1905년 12월이다. 바로 궁내부 예식원의 사표가 수리된 때이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 될 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지만, 1905년 11월까지는 궁내부 주사신분을 유지하고 있다가 1905년 12월부터는 완전히
대한매일신보에만 전념했다는 뜻으로 위와 같이 진술했을 것이다.
양기탁이 대한매일신보 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한 1905년 11월 17일 이후부터 대한매일신보는 민족진영을 대변하는 신문의 성격을
더욱 확고히 하고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양기탁이 관직을 팽개치고 신문을 통한 항일투쟁에 몸을 던지면서 대한매일신보는
더욱 강경한 항일논조를 띄게 되었다. 을사조약 직후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11월 20일자 신문에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유명한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실었다가 신문이 정간 당하고 장지연은 구속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용기를 찬양하고 구속된 장지연의 옥중 투쟁을 연일 보도하였다.
4,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의 항일
1) 국문과 영문 신문의 영향력
배설은 1904년 7월 18일부터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 발간으로 인해 장차 한․영․일 세 나라의 외교관계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일어났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신문이 한일 양국에 다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고 일본의 한국침략을
반대하는 논조를 폈기 때문이다. 신보의 영향력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는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과 이에 맞선 한국민의 저항을 대외적으로 알려줌으로써 일본에 대한 국제여론을
불리하게 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두 번째로는 이 신문이 한국 안에서 항일 민족운동을 크게 고취했다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대개 영문판 Korea Daily News의 영향력이었고, 두 번째 문제는 주로 국한문판과 한글판 신보의
항일논조 때문이었다.
신보가 발간될 무렵에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영어신문들이 있었다. 일본에는 동경의 Japan Times가,
발행되고 있었고,요코하마(橫濱)에서 Japan Herald, Japan Mail, Japan Gazette, Japan Daily Advertiser와
같은 일간지가 있었으며 고베(神戶)에서 Japan Chronicle, Kobe Herald 등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이들 일간 또는 주간지들은 적은 인원으로 제작되는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므로43) 외국에 통신원을 둘 만한 형편이 되지를 못했다.
이들 신문은 발행지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독자적으로 취재할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기사를
인용하거나 전재해서 보도하는 것이 통례였다.44) 예를 들면,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중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기사를
인용 또는 전재하여 중국의 사태를 보도했고, 중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일본의 신문을 인용하여 일본의 정세를 보도했다.
중국과 일본의 신문들이 한국의 정세를 보도하는 데는 Korea Daily News가 빈번히 인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당시 한․중․일 세 나라의 영어신문들은 하나의 언론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세 나라의 영어신문들은 각기 독립된 편집방침을 가지고 발행되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반대로 상대방 신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극동에 상주하던 외교관들이 현지의 여론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본국에 보고하는 데에도 신문은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러일전쟁 직후 극동에는 많은 서양의 특파원들이 몰려오기는 했었지만 통신시설의 부족, 언어장애 등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취재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서양기자들도 현지에서 발행되는 영어신문들이 가장 손쉬운 취재소스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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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사단법인 베델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영국인 베설(베델) 선생의 한국 사랑과 항일 투쟁사>를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