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에세 생업과 투쟁하던 날에 제9회 대가야 체험축제 현장에서의 하모니카와 추억을 남기다.
이동근
잔인한 계절 4월의 첫날은 하루 종일 비와 고령 공공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해 건너뛰고 한 겨울이 아닌 봄에 왔다고 봄비가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했던 날이다. (경북 고령에 도착해 보니 금년 4월8일~13일까지 대가야 체험 축제가 열린다는 현수막이 여기 저기 눈에 들어왔다. : 용사의 부활 이라는 축제명으로 열린단다)
그 후 연이어 이틀을 딸기 농가를 오가며 그간 농부님들의 안부와 더불어 생업에 충실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오늘 아침은 7시에 일어나자 마자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갔다.
시가지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큼 승합차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곳으로 차를 몰아 대가야 박물관 광장에 주차를 하고 하모니카 세트와 삼각대를 설치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박물관 앞을 지나 대가야 유적지 중에서도 장관이라 할 수 있는 지산동 고분군을 둘러보기로 했다.
지산동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주산은 해발 300미터 전후에 산 정상까지 1.2km 정도로 아침 산책 겸 등산을 하기에는 최상의 코스였다.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정상까지 갔다 올수 있는 경사가 완만하고 고분군 유적지 등산로가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게 돌계단을 겸해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아니 이것은 무엇인가?
그러고 보니 2년 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대가야 박물관인 이곳에 다녀간 모양이다. 그분이 쓴 필적으로 기념석이 박물관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영.호남 상생으로 고대 가야문화가 영원이 빛나길 기원합니다. 2008.5. 24.-
사실상 영, 호남이 대립을 하게 된것은 8.15. 해방 이후... 그것도 유신정권 시절의 산물이다. 이미 대가야는 전남 광주, 나주까지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지라 상생이 필요없었고 그 자체가 하나였는데...현대사가 빚어낸 영. 호남이라는 반목의 벽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아마 이명박 대통령이 대가야 박물관 개관식에 다녀간 모양인듯 싶다. 수 년전에는 필자가 못 보았던 박물관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사진을 한장 남긴다.)
(대가야의 집과 창고 - 실물에 준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으로 통하는 길목에 서있는 문인석 부부?) (눈을 들어 산 중턱을 보니 어느새 진달래 피어 있었다.)
(대가야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도를 담아 보았다.)
(한국이 철강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가야가 철의 왕국이었다는 것이 그 역사적 배경이 아닐까 한다. 대가야 시대의 제철로 모형이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 앞에서 필부 이동근이가 잠시나마 왕이 되어 보았다. 좌측에 칼을 들고 있는 필부... 얼굴만 보이게 하고 찍는 포토존입니다. ㅎㅎㅎ)
(대가야 왕릉 전시관)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안내 현판) (산 능선을 따라 8부선 까지 산 전체가 능 군락지 입니다. 아마 이 산 전체가 명당이었든가 봅니다. 빈 자리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고분군을 오르는 길에 울창한 소나무 숲을 담아 보았다.) (고분군을 오르다가 산 중턱에서 내려 찍은 고령읍 시가지 전경- 대구는 저 먼 산 너머나 있을 것이다. ㅎㅎㅎ) (야생 대나무 군락지) (고분군을 오르다가 좌측에 보이는 가야대학교 캠퍼스 일부 전경입니다.) (고분군 정상 바로 아래에 소나무 두 그루가 대칭으로 서있다. 그러고 보면 소나무들도 부부로 태어나는지... 필자의 고향집 옆에 있는 소나무가 연상되어 담아 본 것이다.) (고분군 정상에 앞서 예까지 왔으니 우륵의 가야금 소리는 들었겠지만 필자 말고는 그 누가 2000년 전에 듣고 보지도 못한 하모니카 소리를 고귀한 가야 왕 분들께 들려 주었을까? 꿈길에서 라는 곡을 한곡 선사했다.- 뒤편에 보이는 곳이 고분군 정상인듯 하고 산정상은 조금 더 올라가야 하는데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소나무 아래에서 -인생이란 흔적으로 남을 뿐 그 존귀와 영화도 다 덧없는 것일지언데... ㅎㅎㅎ)
2편으로 이어집니다. - 사진이 한번에 다 안 올라 가서 나누어 편집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