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소설로도, 영화로도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불륜 이야기를 미화했다는 둥 종교계나 보수적인 집단의 엄청난 반발도 따랐다고 하지만.
그 소설이 발표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직접 감독과 주연까지 맡은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 자신 세계를 여행 중이었던 때였고, 이 소설 내지 영화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반향이 식을 무렵이었다.
원래 난 보기보다는 달달한 연애 소설류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로즈먼 다리가 있는 매디슨 카운티라는 미국 오하이오 주 자그마한 시골에
사십 대 평범한 주부가 그곳을 방문한 사진 작가와 우연히 나흘 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난 영화를 보았는데 중년의 나이지만 농염한 연기를 한 메릴 스트립과, 머리가 성성하고 근육이 메마른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나름대로 애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 신선함을 느꼈다.
길을 묻는 남자에게 필이 꽂혀 15년 간의 정절(?)을 깨뜨린 거침 없는 여자의 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이고 압권이었다.
그러고도 그 남자를 따라나서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자의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두 남매와, 자기만 바라보고 사는 순진한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하지만 실은 그녀의 몸이 따라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원래 짧지만 짜릿한 성애를 추구한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이 섹스를 그다지도 중요시하는 이유인 것이다.
짜릿하고 새로운 경험을 접할 때 인간의 뇌에서는 ㅡ뇌신경학에 의하면ㅡ엔돌핀이 분출한다고 한다.
반면에 장기적이고 안정된 관계에서는 느긋하고 보호받고 지지 받는 안온한 느낌을 주는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한다.
전자는 신혼 시절이라면 후자는 대략 사오 년이 경과한 후에 찾아오는 형태라고 하는 것이다.
대략 부부간의 권태기가 사오 년을 기점으로 시작된다고 하고, 이혼율이 급격히 올라가는 시기가 바로 그때라고 하는 점은 객관적으로 그 점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이 여자 프란체스카는 사진 작가 로버트 킨케이트를 마주친 순간 잠자고 있던 엔돌핀의 내습을 받았을 것이다.
십오 년 동안 별로 코드도 맞지 않는 남자와 인생을 보내다 우연히 마주친 자유분방한 싱글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저항할 수 없이 이끌렸을 것이다.
마침 남편이 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비운 때였으니.
이 여자에게는 엔돌핀의 영향인지 일점의 죄의식도ㅡ죄의식이 찾아온 것은 남편이 돌아오고 남자와 헤어져야 할 시점이 도래했을 때이다ㅡ 찾아볼 수 없다.
태연히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만난지 고작 이틀째 되는 저녁에는 남자와 거실에서 춤을 추고, 남편의 전화를 받으면서 남자를 만진다.
여자의 감춰진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원래 여성은 일부일처제 동물이 아닌 것이다.
여자는 최소한 짜릿하고 단기적인 상대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상대를 모두 요구하는 중층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동물인 것이다.
거기에 반해 남자는 다분히 가부장적인 동물로 여자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그 자신의 할렘을 거느리고 싶어하는 무늬만
일부일처주의자인 동물인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로버트 킨케이드라는 남자는 예외.
그는 자유분방한 싱글 성향으로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그런 유형의 남자야말로 진정한 일부일처주의자에 가깝다.
현실에서는 결코 자신의 짝을 찾을 수 없는 이상주의자인 것이다.
이런 남자가 수많은 여자를 전전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이 소설에서 로버트가 혼자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일생 프란체스카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 또한 그와 함께 떠날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짜릿한 일시적인 연애 외에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 또한 중요했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섹스를 억압하고 죄책감을 무기로 작동하는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메카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인간은 다양한 파트너와 짜릿하고 모험적인 섹스를 추구하는 생물학적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로 일생을 통하여 그 남자와의 경험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사랑' 하는 식으로 미화되었지만ㅡ물론 이는 진실이다ㅡ이 소설과 영화가 던지는 물음은 단 하나에 집약되어 있다.
이들의 사랑이 불륜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이 아니라 '일부일처제는 옳은가?' 하는 물음이다
그것도 일부일처제가 강요하는 섹스 스타일에 대한 강력한 반문이다.
과연 일부일처제의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자연스러운 섹스 본능을 억압하고 일생을 보내는 방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일부일처제의 정신적인 건강성을 위해서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부일처제의 내부에서 느슨한 섹스 관계의 불문율이 제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동물이고 단순히 생식과 번식을 위한 섹스가 아니라 자유분방한 섹스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종교적인 교부와 도덕군자들만 이 사실을 모르는 척 할뿐이다.
대체로 기상천외하고 굵직한 스캔들은 종교계에서 나오고, 유달리 도덕을 강조하는 보수집단에게서 나온다는 사실만 봐도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암암리에 다종다기한 섹스를 즐긴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그래서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일부일처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온갖 성적 담론은 유치한 농담이거나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작가는 여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두 남매에게 남기는 유언의 형식으로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너희들이 나의 행위가 옳았다고 생각한다면 내 유해를 로즈먼 다리 아래 강물에다 뿌려다오....
(자식들이 그녀의 유언을 따랐을 것 같지 않다.)
이 작품은 다분히 이상주의적이지만 그 내용은 섹스에 관한 담론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일부일처제적인 섹스 스타일이 인간에게 적합한가.
종교와 사회의 공식 도덕은 일부일처제의 룰을 깨트리는 모든 섹스는 부도덕하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자는 바람을 피울 때조차 일부일처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은 일부종사의 위선을 버리지 않는다.
이 여자 프란체스카는 임종 무렵에 와서이긴 하지만 자신의 행위를 당당히 고백했다는 점으로 해서
패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외도의 비밀을 무덤에까지 가져가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가.
이거야말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7c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라 로쉬푸꼬'가 한 다음과 같은 잠언은,
여자에 관한 불명예를 말한 것인지 명예를 말한 것인지 나로서는
아리송해진다.
"한번도 바람 피우지 않은 여자는 있을지 몰라도 딱 한 번 바람 피운 여자는 없다."
(* 이 글을 읽다 보니 2023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생각난다. 연전에 영화로도 나왔고, 유부남과의 관계를 적나라하고 당당하고 신물나게(후끈하게?) 묘사한 이 저명한 작가 의 자전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다음에~)
첫댓글
낼 아침 맑은 정신으로
다시바야 겠습니다
님의 글 Re /느낌들..글 댓글을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