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3월 31일 지미 헨드릭스가 공연 중 처음으로 기타에 불을 붙였다. 그는 1942년 11월 27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탭 댄서,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였는데 그나마 헨드릭스가 7살 때 헤어지고 급기야 58년에는 어머니 루실이 알콜중독과 결핵으로 사망했다. 헨드릭스는 자기세계와 기타에만 몰입했다.
고등학생 지미는 학교에서 내놓고 약물을 복용해대는 문제아였는데 퇴학당한 후 군에 입대해서도 밴드를 만들어 연주를 계속했고 제대 후에는 65년까지 리틀 리처드의 보조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점차 명성이 높아지자 66년경 당시 명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마이크 브룸필드나 에릭 클랩튼 등에 비교되기도 했던 그에게 조니 홀리데이가 자신의 파리 공연에 오프닝으로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구한 멤버가 베이시스트 노엘 레딩(Noel Redding) 그리고 드러머 미치 미첼(Mitch Mitchell)이었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가 출범했다. 자니 할리데이의 유럽 공연 후 이들은 [폴리도어(Polydor)] 레이블과 계약하고 역사적인 데뷔 작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선보인 사이키델릭 하드록 기타와 출중한 작곡력으로 그는 화려한 데뷔를 장식했고 이후 [Axis: Bold As Love], [Electric Ladyland] 등 걸작들을 발표하면서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받게 된다. 무대에서 그는 뛰어난 쇼맨쉽을 발휘하는 엔터네이너이기도 했다.
68년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 그리고 69년 [우드스톡]에서의 연주는 그를 록계 최초의 흑인 수퍼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익스피리언스 해체 후 드러머 버디 마일즈(Buddy Miles),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Billy Cox) 등과 새로운 밴드를 출범시키고 70년에 [The Band Of Gypsys]라는 데뷔앨범을 발표했던 그는 70년 약물 중독으로 고작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관능적 야성미 폭발시킨 일렉트릭 기타의 지존
스물 일곱 살의 나이로 요절한 지미 헨드릭스. 비슷한 시기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과 함께 '성스러운 3J'라고 불리기도 하는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로 섹스를 하는 듯 관능적인 기타 테크닉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충격을 준 천재 아티스트다.
군대에서 낙하훈련 중 발목 부상으로 의가사 제대해 곧바로 가을부터 1965년 늦여름까지 리틀 리처드의 보조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던 그는 순회 공연을 통해 앨버트 킹, 머디 워터스, 보 디들리 등 전설적인 흑인 연주인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고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주법과 기교를 배웠다. 순회공연을 다니면서도 그는 예전 군대에 있을 때처럼 뉴욕의 지하철 소리, 버스에서 나는 급정거 소리 등을 그의 스트라토캐스터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 때부터 지미 헨드릭스는 격렬하면서도 빠른 불 같은 솔로 연주를 들려주면서 클럽가를 중심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자작곡 외에도 롤링 스톤즈, 비틀즈, 그리고 밥 딜런의 곡들을 연주했다. 얼마 후 그에게 매료된 애니멀스 출신의 채스 챈들러는 그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그를 영국 런던 팝 무대에 소개시켰다. 스는 계속해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라는 그룹을 만들도록 이끌었고, 지미와 그의 그룹은 첫 싱글 'Hey Joe'를 발표했다. 싱글이 차트에 오르기 시작하고 런던의 유명 클럽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 지미는 '런던의 뉴 기타'였고 에릭 클랩튼, 피트 타운셴드에 대한 위협이었다고 한다.
1967년 5월 중순 지미 헨드릭스는 첫 앨범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했다. 요란하게 울긋불긋한 셔츠를 입은 모습에서부터 관능적인 무대 매너, 한 명의 흑인과 두 명의 백인이 연주하는 전례가 없는 모습까지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그는 성을 노래할 뿐 아니라 기타로 직접 성의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난폭할 때는 한없이 난폭하고, 에로틱할 때는 한없이 에로틱했던 것이 지미의 연주였다.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오렌지색 셔츠와 꽉 끼는 붉은 바지를 입고 등장한 헨드릭스는 광란의 쇼를 보여준 뒤 기타에 기름을 붓고 그 유명한 '기타 화형식'을 치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스타덤으로 인한 압박과 무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는 더욱 술과 마약에 빠졌다. 두 번째 앨범 [Axis: Bold As Love]를 녹음할 때는 매일 마약을 털어넣어야만 했을 정도였다. 지미는 어느 인터뷰를 통해 무대에서 자신은 언제나 어려움을 느끼는데 그것은 우울 때문이 아니라 외로움과 절망, 그리고 무언가를 향한 갈망 때문이라고 밝혔다. 1970년 9월 지미 헨드릭스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그 짧은 시기에 많은 음악 유산을 남긴 천재 뮤지션이자 훌륭한 기타리스트 겸 싱어, 작곡자였다.
제임스 마샬 헨드릭스(James Marshall Hendrix)는 1942년 11월 27일, 미국의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던 지미는 비비 킹(B.B. King)이나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버디 홀리(Buddy Holly) 등 블루스와 로큰롤 뮤지션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아들의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알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지미가 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중고 어쿠스틱 기타 한 대를 사주었고, 그는 스스로 기타 연주법을 터득하며 점점 더 깊이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자신의 첫 밴드인 벨베톤스(Velvetones)를 결성한다.
군 입대를 위해 집을 떠난 지미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낙하산 부대에 배속되어 켄터키주의 포트 캠벨에서 주둔 생활을 했는데 그 곳에서 그는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Billy Cox)와 함께 킹 캐주얼스(King Casuals)라는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낙하산 훈련 도중 입은 부상으로 군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제대 후 그는 지미 제임스(Jimmy James)라는 이름으로 세션 기타리스트의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이 다 갈 무렵, 그는 이미 아이크 앤 티나 터너(Ike And Tina Turner), 샘 쿡(Sam Cooke), 아이슬리 브라더스(Isley Brothers),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등 슈퍼 아티스트들과 협연을 이룰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백 밴드의 역할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곧 자신의 밴드 지미 제임스 앤 더 블루 플레임스(Jimmy James And The Blue Flames)를 결성했다. 그는 '65년 말에서 '66년 초반 사이에 자신의 밴드와 함께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데, 이는 그의 새로운 음악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지미의 연주 모습은 애니멀스(Animals)의 베이시스트인 채스 챈들러(Chas Chandler)를 단숨에 사로잡아버렸다. 결국 1966년 9월, 채스는 지미와 계약을 이루었고 이들은 새로운 밴드의 결성을 위해 런던으로 향한다.
베이스 연주자에서 매니저로 전환한 채스에 의해 지미의 이름은 ‘Jimmy’에서 ‘Jimi’로 바뀌었으며 '66년 말, 드러머 미치 미첼(Mitch Mitchell)과 베이시스트 노엘 레딩(Noel Redding)의 라인업으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가 탄생되었다.
밴드의 첫 번째 싱글은 '67년 초에 발표된 Hey Joe이다. 영국 차트에 10주 동안이나 머무르는 히트를 기록한 이 곡의 성공은 역사적인 데뷔작 ARE YOU EXPERIENCED로 이어진다.
데뷔작으로 영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67년 6월 미국에서 개최된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에서 밴드가 Wild thing을 연주했을 때의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계 최고의 인기 라이브 밴드가 되어버린 이들은 데뷔작 발표 후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앨범인 AXIS: BOLD AS LOVE를 발표한다.
스튜디오에서 녹음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이들은 꾸준한 라이브 활동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두 번째 앨범의 발매 후 밴드는 '68년, 대규모 미국 투어를 실시하였고 이후 이들은 미국에 머무르게 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지미의 열정은 스튜디오를 세우려는 계획으로 이어졌고, 결국 록 뮤지션으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스튜디오를 건립하게 된다. 뉴욕에 위치한 이 스튜디오는 ‘일렉트릭 레이디랜드(Electric Ladyland)’로 이름 붙여졌다. 그리고 스튜디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밴드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자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세 번째 앨범이 발매된다.
'68년의긴 투어와 스튜디오 작업의 결과는 지나친 비용의 부담이었고 이는 멤버들, 특히 노엘 레딩과의 더욱 심화된 불화와 맞물려 결국 이듬해인 1969년에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어리언스는 해체된다. 하지만 '69년의 여름은 지미에게 음악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8월에 개최된 우드스톡 페스티벌(Woodstock Music & Art Fair)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익스피리언스의 동료인 미치 미첼과 군 복무 시절 함께 밴드를 했던 빌리 콕스, 그리고 주마 술탄(Juma Sultan), 제리 벨레즈(Jerry Velez)의 라인업으로 이루어진 앙상블 집시 선 앤 레인보우스(Gypsy Sun & Rainbows)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결국 지미는 우드스톡을 통해 탄생한 명곡으로 기록되는 Star spangled banner로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같은 해에 그는 빌리 콕스, 그리고 ELECTRIC LADYLAND에도 참여했던 일렉트릭 플랙(Electric Flag)의 드러머 버디 마일스와 새로운 그룹 밴드 오브 집시스(Band Of Gypsys)를 결성한다. 이들 트리오는 뉴욕의 필모어 이스트(Fillmore East)에서 '69년 12월 31일 밤부터 '70년 1월 1일에 걸쳐 새해를 축하하는 공연을 행했다. 그리고 1970년 4월, 이 실황을 담은 앨범 BAND OF GYPSYS가 지미 헨드릭스의 마지막 정규 앨범으로서 발표된다.
이후 지미는 미치 미첼을 다시 불러들여 빌리 콕스와 함께 새로운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를 결성했다. 이들은 다음 앨범을 위한 녹음에 들어갔고, 또 하나의 더블 앨범이 될 이 작품의 타이틀을 FIRST RAYS OF THE NEW RISING SUN으로 정해놓고 스튜디오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70년 8월 영국에서 개최된 와이트섬 페스티벌(Isle Of Wight Festival)에 참여하는 등 여러 투어 일정 때문에 앨범 작업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지미는 자신의 다섯 번째 앨범의 완성을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1970년 9월 18일, 그는 여자친구의 아파트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어갔고 세계의 대중음악계는 가장 위대했던 뮤지션 한 사람을 허망하게 잃어야 했다. 시대가 낳은 이 뛰어난 천재는 그 시대와 조화하지 못하고 방황을 하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온 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멋진 음악들을 남겨놓은 채 말이다.
다행히도 그의 유작 앨범은 지난 '97년 지미의 모든 창조물들에 대한 저작권을 양도받은 그의 아버지 알 헨드릭스(Al Hendrix)와 누이 재니(Janie Hendrix)에 의해 설립된 <익스피리언스 헨드릭스(Experience Hendrix)>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다(앞서 소개된 정규 앨범들과 유작 앨범 외에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발매된 각종 편집 앨범과 라이브, 미발표곡 모음집 등은 정식으로 허가된 것만 300타이틀이 넘으며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그의 앨범은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여러 부틀렉 앨범들을 포함하면 지미 헨드릭스에 관련된 앨범들은 천문학적인 숫자에 이를 것이다. 이는 그가 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The Jimi Hendrix Experience)를 통해서 Purple haze, Foxy Lady 등 수많은 록을 걸작들을 발표한 그는 ‘42년 11월 27일 자니 앨런 헨드릭스(Johnny Allen Hendrix)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 ‘70년 9월 18일 위대한 록 기타리스트이자 플라워 무브먼트의 핵이었던 지미 헨드릭스는 바르비투르산염을 복용한 후 토사물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수학으로 치자면 모든 셈의 기초가 되는 사칙연산과도 같다 할 수 있겠다. 좀 과장되게 말해서 그 이전의 기타가 주먹구구라면 그 이후의 기타는 바로 정교한 룰을 가진 사칙연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공식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 이후에 등장한 기타리스트는 거의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동시대 기타리스트들은 그의 등장으로 인해 기타 주법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거나, 지미의 영향을 받은 기타리스트의 영향을 받은, 말하자면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권에 놓여있는 기타리스트이다. 이처럼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라는 분야에 있어서 혁명을 일으켰던 인물이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기타로 달래며 자랐던 지미는 그의 재능을 발견한 매니저에 의해 드러머 미치 미첼, 베이시스트 노웰 레딩 등의 백인 멤버와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라는 밴드를 만들어 록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그의 연주 역시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알콜과 마약의 연속이었다. 그는 27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술과 수면제에 취해 자다가 구토물에 의해 질식해 죽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생전에 고작 4장의 정규 앨범 밖에 발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편집 앨범들이 등장했으며, 지난 해부터 지미의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헨드릭스 재단이 모든 판권을 인수하여 그의 정규 앨범들인 ARE YOU EXPRIENCED?, AXIS : BOLD AS LOVE, ELECTRIC LADYLAND 등의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시절의 작품들과 새로운 그룹인 밴드 오브 집시스의 신곡들이 라이브 실황으로 발표된 BAND OF GYPSYS 등을 리마스터링하여 재발매했고, 죽기 직전에 녹음되었던 스튜디오 앨범인 FIRST RAYS OF THE NEW RISING SUN, 미발표곡들을 모은 SOUTH SATURN DELTA, 베스트 앨범인 THE BEST OF JIMI HENDRIX, 그리고 BBC 방송국 공연 실황들을 모은 BBC SESSIONS 등이 발매되었다. 지미 헨드릭스의 거의 모든 것이 발매되고 있는 것이다.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의 사후 27년만에 발표되는 감격적인 신보이자 5번째 정규 앨범. '만약 지미 헨드릭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록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은 그리 과언도 되지 못한다. 그의 등장으로 이전과 이후의 록을 완전히 구분지어놓은 그는 록 기타의 혁명가이자 선구자였다. '70년대 이후에 등장한 기타리스트의 인터뷰를 보면 거의 빠짐없이 영향을 받은 인물이 지미 헨드릭스라는 것을 주저없이 밝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위대함은 손쉽게 증명된다. 또한 죽기 전에 고작 4장의 정규 앨범만이 발매되었지만 사후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음반이 나온 것을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큰 거인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