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과 본질을 동시에 본다 | 소리를 듣고, 소리가 일어나는 이 공간을 알아차린다 |
본질에 대한 관념을 버려라.(55:19)
0:17
<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 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말 굉장히 중요한 말이죠. 결국에는 우리가
형상을 동일시함으로써 자기가 의식이란 걸 까먹어 버린 거에요.
근데 형상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
'나는 누구지?' 하면서 저절로 의식은 자기를 자각을 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
형상의 물들지 않는 공간이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0:57
<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
이거는 해봐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정말로 수행에 뜻이 있으시다면
어떤 사건 사고가 왔을 때 그때 내가 내 내면에서 그것에 물들지 않는가를
살펴볼 줄 알아야 돼요.
만약에, 막 요동칠 것 아니에요?
톨레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는 안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 전화 받기 전까지.(웃음) 따르릉~ 하기 전까지.
근데 따르릉~ 했을 때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보고
잠시 그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면
결국에는 흔들리지 않는, 그것은 지나가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견성이에요.
근데 이렇게 한 번이라도 되도록 발견하면 힘이 생겨요.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면, 자기가 직접 확인한 거잖아요.
자기가 확인한 것은 굉장히 힘이 있는 거에요.
남한테 들은 거 말고.
그러니까 실제로 어떤 사건 사고가 왔는데 내가 옛날 같으면
난리칠 건데 난리를 치더라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있으면서
아, 왔구나 하고 보고 있으면 지나가잖아요.
약해지면서, 내가 물들지 않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거에요.
저는 얼마 전에 해봤어요. 그때 들어온 것을 가지고 내 마음을 본 거지.
2:53
약간 일어나죠. 당연히 일어나지요.
일어나지만 딸려 가지 않고 가만히 이렇게 보니까 싹 정리가 되면서
지혜가 떠올라요. 어떻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그래서 순서가 일을 처리하는데, 여러분 1번, 2번, 3번 해야 될 걸
3번, 2번, 1번 하면 꼬이는 거 아시겠습니까?
요때 제일 중요한 게 일을 최대한 순서대로 하는 거든요.
그러니까 딱 쥐고 가만히 있으면 이제 싹 좀 가라앉으면서 지혜가 딱 나와 가지고
뭐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게 알아차려져요.
4:02
사건 사고가 났을 때 그때 딱 정신 차리고 살피면, 안팎으로 살피면,
밖으로는 상황이 어떻게 벌어지는 가도 살피고,
안으로는 내 마음이 어떻게 요동치는 가도 살펴서 그 안팎으로
딱 살피고 있으면 정리가 되면서 지혜가 나온다.
그럼 그 지혜로 일이 풀려나갈 때는 금방 풀려 버리는 것,
일이 풀리려면 금방 풀리는 거에요.
대개 보면 별 일 아닌데 스스로 크게 만들어 가지고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는 것이 그래서 우리들의 지금 삶이라는 거죠.
4:54
<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
본래는 있는데 흔들려 가지고 못 본다 이거에요, 본래 있는 것을.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제대로, 흔들리더라도 정신줄 놓지 않고 딱
각찰(覺察), 안과 밖을 깨어서 관찰한다.
각찰을 제대로 딱 하면 밖에 아무리 뭐가 와도 살짝 요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가도 나의 깊은 곳에서는 흔들리지 않는구나 하는 걸 확인하게 되면
그곳이 이제 나의 존재의 집이 되어서 항상 그곳이 이제 확인되고 그곳에서
내가 거주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게 이제 견성이다. 그게.
6:02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
이때 공간이 생긴다 이 말은 여유가 생긴다 이 말이에요.
이때 공간은 그냥 공간이 아니고 저는 여기다 공간 앞에다가
뭐라고 했냐면 물들지 않는다, 물들지 않는 공간이 생기는 거에요.
그게 우리의, 여러분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이 세상은 홍수가 난 것과 같다. 이 세상은 홍수가 난 것과 같다.
홍수 속에서는 섬이 있다. 섬이 있다. 섬에 발을 디뎌라.
이게 부처님의 유훈이에요.
부처님이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 할 때 그 '자'라고 하는,
귀의하는데 어디로 귀의해야 되느냐.
자기 자신인데 그 자기 자신, 인도 말로는 그 뜻이 '섬'이라는 뜻입니다.
'섬'에 귀의하라. 그리고 '등불'로도 번역돼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고도 번역하고
또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라고도 번역하는데
원래 그 뜻이 델타에요, 델타.
델타는 강에 있는 삼각주잖아요. 델타.
그럼 그 섬이 어디 있느냐?
물들지 않는 내면 공간, 우리 내면의 물들지 않는 내면 공간,
거기가 '섬'이에요. 섬이고 또 다른 데에서는, 반야심경에서는
거기를 '피안'이라고도 불러.
7:40
섬이라고 하든 피안이라고 하든 이 홍수 난 이 세계에서
휩쓸려 가지 않는 육지가 있다. 땅이 있다. 그게 어디냐?
지금 이 현상계에서 아무리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내면의 물들지 않는 공간, 바로 거기가 에덴동산이다 이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쫓겨났다 이거예요. 이걸 집착함으로써,
분별함으로써,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쫓겨났는데
다시 발견해서 회복하는 것이 그게 부활이에요, 부활.
거기를 회복하는 것이 부활이에요.
8:23
<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
어떤 여유가 생긴다. 공간이 생긴다.
<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끝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
지금 여러분 이게 지금 책이, 노트가 형상이지요.
근데 형상이 공간에 지금 있지요.
이 형상에 물들지 않는 공간, 이해되세요?
형상에 물들지 않는 본질, 요것의 발견이다, 지금.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 이거는 현상이죠.
현상의 것이 아닌 본질로서의 평화, 본래 평정심.
본래 본래, 이런 말 쓰지요? 본래 부처,
이런 말이 다 여기를 말하는 거에요.
<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다. 신적인 평화다. 절대 평화다. >
여러분, 얼마나 좋아요, 절대 평화.
그 무엇도 물들일 수 없는 절대의 평화, 그게 지금 우리 안에 있다.
어떻게 발견하는가?
고통을 견뎌낼 때, 고통을 견뎌낼 때, 여러분,
똑같은 도전이 무슨 말이냐면 고통이 첫 번째 화살이에요.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첫 번째 화살은.
근데 첫 번째 화살을 맞았다고 막 허둥지둥대면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
계속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또 감정이 따라오고
그래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이거에요.
그러지말고 첫 번째 화살이 왔을 때 맞아라. 그것을 피할 수 없다.
부처님이 그러셨어요. 나도 피할 수 없다, 부처도.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걸 맞고 요동치지 않으면 견뎌내면, 수용하면,
지나간다는 것,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다.
지나가면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그곳에 있다는 거에요.
그걸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발견하면 그 다음부터는 힘이 붙는다. 힘이 붙는다.
무엇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오뚜기처럼 중심이 딱 잡힌다.
그 힘을 길러가는 게 수행이다. 이게 지금 이론도 그렇고 수행도 그렇고
실생활도 이게 하나가 되어야 해요. 하나가.
11:30
이 대목도 좋은 대목이에요.
자, 대상의식과 공간의식,
지금 톨레는,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은 우리의 생각, 감정이에요.
지금 대상 의식은 생각, 감정을 말하는 거에요.
따라서 대상 의식은 생멸심(生滅心), 대상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생멸심,
마음은 마음인데 생겼다가 사라지는 마음,
이것은 대상 따라서 일어났다가 대상 따라서 사라지는 마음.
그런데 공간 의식은 진여심(眞如心), 진실되고 변하지 않는 우리 의식.
이것은 공간으로 항상 있는 것, 항상 있는 거.
지금 이 방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의 몸은 이 방의 입장에서는 현상이에요. 왔다 가요.
이 공간 자체 이 방의 이 공간 자체는 진여 의식이에요.
항상 이건 있는 거에요. 그와 같아요.
12:35
그러면 나한테서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칠 때는 나의 현상은
당연히 몸하고 몸과 연관되는 이런 것들인데 나의 본질은 이 모든 것이
지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요 공간 자체, 여기에 나의 의식으로 꽉 차 있다.
텅빈 의식, 공간 의식, 바탕 의식, 요렇게 꽉 차 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 합니다. 자 읽어보겠습니다.
톨레는 대상 의식과 공간 의식을, 현상과 본질을, 생각 감정과 의식 자체를
이렇게 분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3:19
<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물질적인 것과 해야 할 일들, 생각해야 할 것 등의
일들로 가득하다. 그러한 삶은 윈스턴 처칠이 한 가지 망할 놈의 것 다음에 오는
또 다른 망할 놈의 것들이라고 규정한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가 없다. >
참 재미있게 말했네요. 참 처칠이 대단했던 수상이거든요.
위기의 영국을 구했잖아요.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지휘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망할 놈의 것들,
근데 전쟁이 끝나면 다 괜찮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또 현상계는 그렇다는 거지요.
14:13
< 사람들의 마음은 어지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한 생각이 지나가면
다음 생각이 연이어 밀려온다. 이것이 대상 의식의 차원, 현상의 차원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현실이다.
인간의 삶이 그토록 불균형한 상태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의 행성,
이 지구를 제 정신으로 되돌리고 인류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대상 의식을 공간 의식으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
대상 의식을 저는 분별 의식이라고 말을 하고 싶어요.
분별하는 의식, 대상을 파악할 때 항상 분별하잖아요. 분별하는 의식.
그리고 공간 의식은 바탕 의식, 우리한테 바탕 의식은 항상 있고
그리고 대상을 만날 때 분별 의식이 일어나는 거죠.
분별 의식은 그러면 바탕 의식이 일어난 거죠.
모든 파도가 물이 일어난 것처럼 분별 의식은 바탕 의식이 인연따라 일어난 것이다.
요것을 균형을 잡자. 균형을 잡다.
15:34
< 이 공간 의식의 등장이, 본질의 등장이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다. >
그러니까 지금 우리랑 생각이 좀 달라요.
톨레는 인간은 진화하고 진화상에서 공간 의식의 등장이
진화의 다음 단계라고 하지만 우리는 본질인 의식이 본래 있지 않나요?
본래 있는데 지금 왜곡 당해 가지고 지금 이렇게 되어서 다시 본질을
회복하는 거다. 우리는 지금 그런 입장이고. 자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봅시다.
16:07
본각(本覺)이라고 불러요.
모든 인간은 본래 깨달아 있다. 본각이다. 본각이었다.
근데 지금 왜곡 당해 가지고 불각(不覺), 지금 불각 상태,
각을 놓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통해서 시각(始覺)
비로소 시, 비로소 시(始)자, 각을 회복한다. 본각, 불각,
시각, 그리고 각이 완전히 확립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
요 각을 네 가지로 보거든요. 본각, 불각, 시각, 구경각.
시각은 돈오했지만 점수에 있는 것, 그리고 돈오돈수가 완성된 상태를 구경각,
요 네 가지로 봤어요. 그것이 지금 톨레와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16:56
왜냐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자손이라서 그래요.ㅎㅎ
그게 그게 훨씬 유리해요, 우리는.
< 공간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 - 언제나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의 순서로
진행되는 사물을 의식하는 것 >
그러니까 이게 그냥 여러분 참고로 알아두세요.
서양철학은 기본이 서양철학은 존재론이 있고, 인식론이 있고, 도덕론이 있어요.
존재는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거고, 인식은 우리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
그리고 도덕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요 세 가지 철학의 분야가 있어요.
그중에 인식론, 인식론이 근대철학은 인식론이 핵심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세상을 파악하느냐, 하는 걸 따지는 거에요.
그래서 인식론에서는 감각을 지각한다.
임프레션(impression)이라고 해요, 이것을.
보세요, 여러분, 우리의 나의 집 정신에 지금 책을 봤다, 노트를 봤다,
그러면 노트가 와서 찍혀요. 제일 먼저 인쇄된다 그래요.
사물을 보면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이 인간 머리속에 인쇄가 된다.
사물을 보면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이 인간 머리 속에 인쇄가 된다,
임프레션(impression) 인쇄란 말이에요.
18:33
인쇄가 된다. 그러면 인쇄가 한 번 되면 대상이 사라져도
인쇄된 것을 이미지로써 떠올릴 수 있다. 이 말 이해되세요?
떠올리는 것을 아이디어라 그래요. 관념이라 그래요.
그러면 한 번 대상이 한 번 임프레션 됐다, 다음에 아이디어 관념이 떠올릴 수 있다,
오케이입니까? 자, 그 다음부터 왜곡이 일어나요.
뭐냐면 관념을 대상은 사라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방에 앉아서 눈 감고
대상들끼리 아이디어끼리 찍힌 그 이미지를 가지고 이미지를 가지고 조작을 해요.
관념 조작을 하면서부터 왜곡이 일어난다고 서양철학에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 쉽게 말하면, 여러분 뱀을 봤어요.
그리고 소를 보니까 다리가 있어. 뱀을 봤는데 아, 뱀이라는 것이 찍혔어.
소를 보니까 다리가 있어 가지고 다리가 있구나 하고 찍혔어.
그러면 앉아서 이제 대상은 다 사라졌는데 찍히고 난 다음에는 아이디어가
생기면 관념이 생기면 어떻게 되냐면 뱀에다가 소의 다리를 붙여.
뱀 다리가 사족이 생겨요.
그리고 강아지를 봤어요. 근데 소를 보니까 또 뿔이 있네.
그래서 딱 이제는 다 없어졌는데 혼자 앉아서 아, 강아지에 뿔이 있구나, 하고
강아지 뿔을 그리면 개뿔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개뿔이란 말 쓰잖아요. 실제로는 없는데 우리가 뭐라고 떠들면
그걸 '개뿔' 그러잖아요. 없다는 말이잖아요.
근데 여러분 우리가 쓰는 많은 용어들이 실제로는 없는데 쓰고 있는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냐면 그래서 관념을 붙였다고 해가지고 복합관념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특히 인식론이 발전한 곳이 영국의 경험주의에요.
영국 경험주의에 모토가 있어요. 영국 경험주의 모토, 이건 뭐냐면
복합 관념을 청소하자는 거에요. 청소하자. 왜냐면 없는 거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복합 관념으로 이상을 만들고 그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탄압합니다.
현실이 왜곡되는 것은 이상 때문인데 이상을 어떻게 만드는가.
한번 찍힌 이미지들을 레고 조합하듯이 하면 사람들이 속는 이념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데올로기가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이데올로기는 실제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의 머리속에서 관념을
조합을 해가지고, 여러분 개하고 뿔만 조합을 해도 개뿔이 이상하잖아요.
근데 거기다가 또 그것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날개도 붙여.
날개 달린 개가 뿔이 있다고 막~ (웃음)
꼬리는 또 돼지 꼬리처럼 막 이렇게~ 하면 이상한 괴물이 탄생하잖아요.
21:52
우리가 알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전부 그런 것들이에요.
현실에는 없는데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복합 관념에만 속지 않아도 인간의 삶은 굉장히 단촐해지고
지혜가 나온다는 거에요. 그게 영국 철학의 모토예요.
그래서 영국 철학은 지금까지도, 영국 철학의 후예가 미국 철학이거든요.
영미 철학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에요.
영미 철학은 철저하게 실용주의, 아주 구체적인, 실제로 있는 것만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청소를 하고 보니까 영미 철학의 라이벌은 프랑스 독일
대륙 철학이거든요. 여기는 관념주의에요.
그래서 관념주의가 영미 철학의 실용주의에 박살이 났습니다.
지금도 박살 나 있어요. 지금도 철학은 그쪽이 더 우수해요.
그러니까 지금 상황 이해되시죠? 그런데 그쪽이 이길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관념은 허상이고 실용이 더 현실적이지 않나요?
현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거에요.
23:09
생각은, 모든 생각은 복합 관념이에요.
그러니까 현실을 상대할 때는 생각이 필요 없다는 거에요.
관념이 필요 없다는 거에요
현실이 없이 혼자 앉아 하면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제 이게 장점이면서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그러니까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 복합 관념 만들어 내는 것이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감각, 지각이 생각으로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또 감정을 또 만들고
요렇게 해서 우리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그 진행이 된다.
< 그래서 공간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그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
참 중요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이 일어나는데
알아차린다는 거에요,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다. 각찰할 수 있다.
깨어서 관찰 할 수 있다, 무엇을?
생각 감정들을, 복합 관념들을, 각찰할 수 있다.
각찰하는 것이 본질이다. 우리는 지금 이 공부를 하게 되면
항상 입체적으로 봐야 돼요. 현상의 것과 본질의 것이 입체적으로,
입체적으로 본다.
이 말을 제가 은현동시(隱現同時)라고 하는 말로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달을 볼 때마다 반달의 경우에는 드러난 부분이 있고 숨어 있는 부분이 있다.
드러난 부분은 현상이고 숨어 있는 부분은 본질이다, 할 때
항상 같이 본다.
생각 감정도 깨어서 볼 수 있잖아요. 깨어서 보는 것이 의식이라 이거에요.
그러면 잠든 의식을 깨워서 일깨워서 강화시키려면 자꾸 현상을 보라 이거에요.
생각 감정을 보라. 볼 때마다 의식은 강해진다.
깨어나는 힘은 강해진다. 그 원리를 말하는 겁니다.
25:20
< 이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한다. 이 알아차림은 사물,
즉 대상을 의식할뿐 아니라 자신이 의식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힘이 강해지면 알아차림은 자기를 알아차리게 된다.
현상만 알아차릴뿐만 아니라 본질이 본질을 알아차린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전면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그 배경에 내면의 깨어있는 고요를 감지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본질이다.
이 차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결코 자각하지 못한다. >
왜냐? 한 눈 팔려서.
현상에 한 눈 팔려서 본질을 자각하지 못한다.
< 나는 때로 그것을 가리켜 이런 식으로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가. >
여러분, 현존은 제가 잠깐 약간 조금 고민해 봤어요.
'현존'을 자각한 사람은, 저같이 인문학 공부한 사람은 '현존'에 워낙 익어 있어서
'현존'이라는 단어는 금방 와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인문학의 제1주제는 현존이란 말이에요.
프레젠스(presence) 영어로 하면, 프레젠트(present) 하면 현재잖아요.
프레젠스(presence) 그러면 현재에 존재하는 거에요.
'현존'이라고 불러요. 인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에요.
그냥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좀 익숙한데 그리고 톨레도 익숙해요, 이 단어에.
서양인들이 익숙해요. 사실은. 그런데 동양인들한테는 현존이라 그러면
이게 안 익숙해.
그래서 제가 고민한 것은 여러분한테 뭐라고 이 말을 어떻게
다른 말로 바꾸면 여러분이 쉽게 알아차릴까 현존이라는 말을.
그래서 제가 찾아낸 게 뭐냐면 현존은 현재 의식이에요.
이 순간의 의식. 여러분, 여러분한테 의식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자기를 돌아보게 되지요.
돌아보면 이 순간에 의식이죠, 그게, 그게 현존이라는 겁니다.
이 순간에 자각되는 의식.
현재 의식. 현재 의식을 선불교에서는 현재심이라고 그래요.
현재심. 그래서 알고 보면 본질에 대한, 본성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적을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심이란 말이에요.
현재심은 지금 마음이잖아요.
이 마음을 지금 우리는 지금 의식이라고 하면 훨씬 더 잘 이해하기 쉬우니까
현재 의식이라고 지금 바꾼 거에요.
그러니까 선불교 용어로 하면 현재심이 서양에서는 현존이라고 하는 거에요.
현재의 마음은 뭐냐.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의식.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의식을 우리가 의식하려면
의식이 의식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이해되세요?
그렇게 되는 게 현존의 상태다. 현존의 상태다.
지금 의식을 의식하는 상태, 그거다.
그래도 어렵나요? 나머지 소화는 여러분의 몫이에요.
근데 제가 지금 일반적으로 현존이란 말은 전문 용어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아듣기에는 어려워서 제가 일반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바꾼다면 현재 의식, 제가 그런다 그러잖아요.
오늘도 그랬어요. 버스 타려고 여기 오려고 버스 정류장에 왔더니
제가 타는 버스가 지나갔어. 그리고 전광판에 보니까 3분 뒤에 온대.
그러면 의자 있죠, 그죠? 정류장에. 의자에 앉아서 3분 동안
지금도 의식이네, 지금도 현재네.
앉아 가지고 3분 동안 지금도 현재네. 지금 현재네.
지금 현재 하는 그것이 현재 의식이에요.
지금도 현재네, 이 말은 현존을 내가 불러 일으키는 거에요.
그 3분 동안은 아주 좋은 찬스, 안심하고 3분을 현존을 만끽한다.
내가 이 순간 깨어 있다고, 살아 있다고 하는 이 감각을
살아 있다고 하는 깨어 있다고 하는 실존한다는 존재한다는
오직 존재하는데 힘쓴다, 그러잖아요.
오직 존재하는데 힘 쓴다가 되려면 이 순간에 내가 깨어 있어야 해.
그러니까 현재에 깨어 있는 것이 현존이다.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 현존이다. 이것이 현재 의식이다.
그 짧은 시간에 현존을 불러 일으킨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짧은 시간에,
이 시간에 현재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각하는 그것이 현재 의식이에요.
다시, 이 순간이 현재라는 것을 자각한다. 이 말 이해되세요?
언제나 자각하면 현재밖에 없어요. 영원히 자각하는 순간은 현재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 순간을 자각하면 현재라고 하는 사실을
돌이킬 때마다 현존감은 강화된다.
이것이 진정한 명상이고 바로 현재 의식이 저같은 사람한테는 화두에요.
지금 현재네, 하는 순간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이 화두거든.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이 의식이 화두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현재네 하는 순간 요 감각이 화두에 대한 감각이
생겨 가지고 화두 두는 거에요.
제가 설명했어요. 여러분한테 현존이란 말을 좀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그게 이게 지금 돌이키면 이거다 이거예요. 돌이키면 자기 의식이다.
항상 있는 이거. 이걸 지금 물들지 않기 때문에
톨레는 '고요'라고도 표현했잖아요.
스틸리스(stillness), 고요한 것, 사일런스(silence),
스틸, 고요한 이것, 여기 항상 있다.
근데 고요에는 뭐가 빠져 있느냐? 자각이 빠져 있잖아요.
그리고 자각하는 게 현존이다.
32:04
< 당신은 자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가.
공간 의식은 에고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
공간 의식은 본질이고요, 에고는 현상이죠. 그러니까
< 공간 의식을 자각하는 것은 현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일들 물질주의와 물질성에 대한 도전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
이 말도 들어오십니까?
물을 뿌리나, 불을 붙이나, 페인트를 칠하나 허공은 젖지 않는다.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일어나는 것들로부터 허공 자체는 자유다.
우리의 본질이 자유다 이거예요.
32:55
< 그것만이 이 세상에 초월적이고 진정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이다. >
그게 영적인 차원이다. 그게 영성이다 이거예요.
영성이고 그게 본성이고 그게 불성이고.
< 어떤 사건과 사람과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 진정한 원인은
그 사건과 사람과 상황 자체가 아니다.
오직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시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대상 의식에 갇혀 시간을 초월한 의식 그 자체인
내적 공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알아차리면 꿈에서 깨어 있는 거고
못 알아차림은 꿈속에 빨려 들어가 있는 거에요.
여기서 물들지 못한다,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말은
꿈에서 깨어서 꿈을 보고 있기 때문에 본질은 꿈에서 깬 상황이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서 꿈을 보면 꿈속의 일이 진짜예요, 가짜예요?
가짜잖아요. 본질 입장에서 그렇다 이거예요.
본질로서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일어나는 것들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놓아버려 줄 수 있다.
그래서 자유가 온다. 그리고 스스로 깨어 있게 된다.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하나의 방향 표지판으로 사용하면
다시금 그 차원을 알아차릴 수 있다. >
왜냐하면 여러분, 눈 앞에 뭐가 벌어졌을 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 지나가지요.
그러면 이것 또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이것은,
의식은 지나가지 않는다, 이거예요.
35:19
진여(眞如)다. 진여라는 말 참 좋지 않나요?
진짜고 여, 항상 같다. 같고 여여하다.
진짜이면서 여여한 것이 보고 있어서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는 것을 두고 이거는 안 지나가네.
그러니까 지나가는 것이 없으면 이거 발견하지 못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텅 빈 허공은 무엇이 있으니까 텅 빈 허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현상이 있으니까 이 공간을 우리가 인식을 할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참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의 방향 표지판으로 사용하면
다시금 그 차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차원은 달라요.
현상의 차원하고 본질의 차원은 차원이 달라요. 차원이 달라.
그래서 물들지 않는 거에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초월이라는 말도 쓰고.
36:20
< 차원이 다르다. 또 한 가지 당신 안에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
기적 수업이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학교에요.
그게 교재가 나와 있어요. 그게 기적 수업이에요. 그게 이런 대목이 있어요.
< 나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
나는 나의 생각 때문에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려면, 내면 공간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렇게 못 돼요.
이해되지요?
내면 공간을 발견해야만이 나는 나의 생각에 동요되지 않고
나의 감정에도 동요되지 않고 그 어떤 사건 사고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여러분 이것이 익숙해지면 그런 확실히
익숙해지면 어떤 느낌이 오느냐면 아, 그러니까 여러분 물건 잃어버리고
좀 약간 당황한 적 있습니까? 있지요.
몸도 잃어버리는구나, 물건 잃어버리듯이 몸도 잊어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해 봐요. 때가 되면 몸도 이별하는 구나.
물건이 물건 잃어버릴 때 여러분 어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나와 인연이 끝났구나. 이런 말 있잖아요. 그러면 미련이 없잖아요.
그렇죠? 물건 잃어버렸을 때 아 나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구나 하고 우리가 그런 느낌 있잖아요.
몸하고도 마찬가지예요.
결정을 하면 깨끗하잖아요. 그것처럼 몸도 아 나와의 인연이 몸이
여기까지구나. 죽음이란 것도 그런 거다 이거예요, 알고 보면, 알고 보면.
그러니까 죽음이 왔을 때도 담담하게 아, 이번 게임 레벨의 인연은
여기까지 구나, 하고 뭐 그 다음부턴 다음 레벨이 또 오든지 말든지
자유로워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다음 레벨이 와도 또 게임일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
요게 참 이게 분명한, 진짜 구원이다 이거죠.
다음 레벨은 어떻게 오느냐가 궁금하지 않다 이거지.
사실은 진짜 궁금한 것은 언제나 진짜로서 여여한 지금 본질인 이것.
사실은 또 재미있게 게임하면 되잖아요. 안 죽어요, 우리.
여러분, 주인공이 죽는 거 봤느냐 이거예요, 게임에서.
수없이 죽어도 안 죽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신나게 살자 이거죠.
이번 게임에서는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신나게 살자.
39:09
< 생각 아래로의 추락과 생각이 위로 올라감은~ >
톨레가, 이것도 중요해요, 여러분. 간단히 설명할게요.
생각이 구름 같은 거라고 보는 거에요
생각의 구름이 이렇게 있는데 사람의 생각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난다. 생각에서 벗어나는데 보세요.
우리가 우리의 본성은 공적 영지, 이런 말 쓰잖아요.
아까 얘기하면 공적과 지혜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생각에서 벗어난 상태가 공적, 생각이 텅 비고 고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생각 구름 입장에서는 생각의 밑으로 가도 공적이고 올라가도 공적이에요.
맞아요? 근데 생각의 밑에는 어둡다, 구름 밑에는 어둡잖아요,
태양이 없어서. 비오고 축축하지 않나요?
그 상태를 혼침(惛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공적한데 혼침일 수가 있어.
이것을 젊은 사람들은 뭐라 그러냐면 몽상(夢想)이라고 그래요.
멍 때리는 것. 멍 때릴 때는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깨어 있지 못하고 멍~.
멍청한 상태거든요. 그래서 몽상이라고 하는 것은 공적하지만
혼침의 상태, 혼침을 무기(誣欺)라고도 해요. 그러니까 의식이 없는 상태,
잠들어 있는 상태, 공적 혼침은 생각이 아래고 근데 공적한데 깨어 있는 것,
태양이 확, 구름 위로는 태양이 확 빛나고 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깨어 생각도 없고 정신은 깨어 있어.
공적이면서 영지. 생각의 위, 이렇게 표현한 거에요, 톨레가.
생각 아래와 생각 위를 구분해 가지고 생각은 없는데
멍청하냐, 아니면 깨어 있느냐.
그러니까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표현을 한 거에요.
됐습니까?
41:35
< 내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그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물건과 경험을 찾듯이 찾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발견할 수 없다. >
이런 말은 진짜 공부한 사람한테는 중요해요.
내적 공간을 현상에서 찾기 때문에, 그러니까 본질을 현상에서
찾기 때문에 못 찾는 겁니다.
차원이 다른데
<이것은 영적 자각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딜레마다. >
자 그래서 이 부분 한 번만 짚고 넘어갑시다. 중요하니까.
보세요, 본질하고 현상에 대한 정말로 카테고리가 다르다고 하는 사실에
정말로 미스테이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카테고리 미스테이크에 빠지면 본질을 현상에서 찾게 된다.
아무리 찾아도 못 찾는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보세요. '나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 취미된 질문이죠.
나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가 실제로 답이 나오려면 여러분,
그러니까 '나는 무엇이다' 할 때 무엇은, 나는 무엇이다 할 때 무엇은
역할이기 때문에 이것은 현상에 속한다.
맞습니까? 나는 남자다. 남자는 현상에 속하는 거에요.
뭐 여자다. 뭐 인간이다. 또 선생이다. 뭐 학생이다. 온갖 것들을,
나는 무엇이다 할 때 무엇은 현상에 속한 것이다. 라인이, 카테고리가.
근데 보세요. 나는, 나는 선생이다, 인간이다, 남자다. 해도
나는 나는~ 안 변하지요?
안 변하는 것은 본질이다 이거에요. 그러면 보세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에서 우리들은 나를 무엇으로 찾느냐 이거에요.
지금 톨레가 강조하는 것은 나를 무엇으로 찾느냐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이 잘못을, 이게 딜레마다, 공부한 사람이 딜레마다.
그래서 나아가 내가 나를 깨달으려고 하는데 나를 찾는데 나도 모르게
무엇으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의 중요한 전환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무엇으로 찾고 있어요.
그래서 이 점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 한 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나는' 해보세요. '나는.'(나는)
거기에서 끝나야 돼요.
'무엇이다'라고 넘어가면 영원히 헤매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하는 이것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라고 까지 가면 벌써 틀려버려요.
나는 무엇인가 하면 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무엇이라는 말을 안 하고 '나는.', 진짜로 만약에 말귀 알아들으시는
분이라면 '나는.' 하는 이거에요. 지금 '나는.' 하고 끝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참 기가 막히게도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로 끌려간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 힘을 얻기 위해서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그 자기들의 신을 찾아가지고
신에게 물어보거든요. 당신이 누구십니까? 당신이 신입니까?
"신이라면 당신이 누군지 밝히세요." 하고 모세가 질문을 해요.
그때 신이 "I am that I am." 나는 나다고 했지 나는 무엇이라고 안 했어요.
만약에 그때 "나는 무엇이다."고 했으면 그것은 신이 아닌 거지.
그러니까 이해되세요? 본질은 무엇이 아니에요.
본질은 무엇이 아니에요. 무엇은 전부 현상이에요.
무엇은 형상이고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나다." 이 말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에요.
나는 나다를 알아차리는 것, 말귀 알아듣는 게 중요하다.
나는 나다. 무엇이 아니다. 근데 만약에 나는 나다, 무엇이 아니다. 이것을
만약에 왕이 도인한테 "당신 누구요?" 하고 물으면 여러분,
왕이 도인한테, 깨달은 사람한테 "당신 누구요?" 하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요. 제 말 이해되세요?
나는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답을 무엇이라고 하면 틀리잖아요.
근데 "나는 나다." 그러면 왕이 화낼 거 아닙니까.
"나는 나다." 그러면 화를 낼 거잖아요. 무엄하게도 왕 앞에서,
왕은 무서워요. 여러분 도인이라도 왕이 죽이라고 하면 죽는 거에요.
옛날에 암두라고 하는 스님이, 암두가 철저했거든요.
흑산의 제자로서 설봉을 깨닫게 한 정말 그 출중한 암두가
황건적의 칼날에 죽었어요.
그 도적떼들이 쌀을 훔치러 와 가지고 멀쩡하게 목숨이 날아가 버린 거에요.
그때 암두가 하도 고함을 쳐서 고함이 몇 십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데
도인들도 도적의 칼날에 죽는 거에요.
그럴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왕 앞에서
아무리 도인이라도 나는 나다 이렇게 말하면 죽어요.
그러니까 달마가 직접 이 질문 당했잖아요.
양나라의 무제로부터 "당신 누구요?"란 질문을 당했잖아요.
그때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면 틀리잖아요.
그리고 "나는 나다." 해도 매를 벌잖아요.
그러니까 뭐라고 했냐면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한 거에요.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답은 뭐라고 해도 틀리고 나는 나라고 해도 틀리고
그러니까 불식,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상대방 입장이 현상계에 빠져 있으니까 그 입장에서는,
현상 입장에서는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라고 눈높이에 맞춰 가지고
말을 해준 거에요.
그러니까 알 수 없다는 말이 본질의 입장에서는 현상한테는 알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모른다는 걸 아는 게 아주 중요한 또 지혜라는 거죠.
현상의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는 거죠, 본질을.
그러니까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아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도 모른다. 이게 소크라테스의 지혜라는 거 아니에요?
요게 달마 불식,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보조국사가 단지불회(但知不會), 본질은 대상으로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시즉견성(是卽見性), 이것이 견성한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다 일맥상통하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깨달음의 중요한 단초는
내가 대상으로서 찾는다는 것을 빨리 포기해야 돼요.
나도 모르게 구하고 있다. 대상으로서 구하고 있다, 본질을.
그래서 특히 뭘 포기하셔야 되냐면 여러분,
대상으로서 여러분이 지고 있는 게 뭐냐면 관념이에요.
본질에 대한 관념. 그래서 본질이란 말을 버리셔야 되고,
의식이란 말을 버리셔야 되고, 버릴 정도가 아니고 죽여야 돼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되고 선사를 만나면 선사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임재는 그 말까지 했어.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부모도 죽이고, 이 말에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본질을 부처, 조사, 본질, 진리, 본성, 또 뭐
반야, 지혜, 자유, 이런 말들로 끌어 내려 가지고 쥐고 있다 이거예요.
이것을 쥐고 있는 한은 본질을 못 깨닫는다.
이게 주, 집착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일시가 얼마나 무서우냐면
에고가 안 떨어지기 위해서 부처를 동일시하고 있어요.
나는 부처야 부처야, 하면서 그게 에고가 그짓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많은 분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할 수 없이
관념을 쥘 수밖에 없어요,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근데 그걸 놓아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무엇도 쥐면 안 돼요, 깨달으려면.
이것도 중요한 대목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에서 끝나야 되기 때문에
나는 본질도 아니고 본성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하여튼 그 뒤에 오는 것은 다 죽인다,
이 말이 무서운 임재가품이다 이거예요. 그게 왜냐?
그걸 지고 있는 한은 현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무위도인(無爲道人), 도인은 의지하는 바가 없다.
의지하는 바가 없다. 이 말은 관념을 쥐고 있지 않다 이 말이에요.
요런 점도 우리가 공부하면서 눈여겨 봐야 합니다.
다음에 하여튼 뭐 이렇게 가서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가?
이 말도, 개울물 소리 있잖아요. 여러분 소리(책상을 치며)
소리, 보세요. 소리 연상이죠.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리가 멈출 때가 있죠.
그때 내적 공간을 본다 이거예요.
보세요. 지금 이 빈 공간하고 형상의 관계,
형상이 사라지면 빈 공간이다, 이 안이. 이게 견성이라는 거에요.
소리, 소리하고 침묵의 관계, 소리가 없어졌다고 해서 nothing이 아니고
소리가 없어져도 지금 의식은 있잖아요. 의식 속에서 소리가 일어나잖아요.
소리가 사라지면 의식만 남는다 이거죠. 의식 안에서 형상이 나타나잖아요.
형상은 사라지고 의식만 남는다.
결국에는 내면 공간을 발견할 때 많은 사람이 소리를 듣고
소리가 일어나는 이 공간을 알아챈다 이거예요.
소리가 일어나는 이 공간을 침묵이라고도 한다.
소리와 침묵, 현상과 본질을 이런 식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어떻게 도에 들어갑니까." 할 때 저 소리 들리냐?
소리 따라 들어가라. 소리 듣고 있으면 싹 사라질 때가 있는데 그 자리,
그게 내면 공간이다 이거예요.
소리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자리.
그런 식으로 지금 이야기 인용을 해놨습니다.
< 올바른 행동은~ >
올바른 행동은 본질에 맡기는 행동이에요.
다음 장에 올바른 행동은 무위(無爲), 무위라는 말은 본질에 맡기는 거에요.
본질에 맡겨서 하는 거, 이게 올바른 행동이에요.(53:38)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평정심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는 모든 일을 제 머리로 계획하고
그렇게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감사하게도
아버지의 뜻대로 이끌어주시어 제 뜻을 꺾어주셨습니다.
제 뜻대로 안될 때 자포자기하며
제가 스스로 위로한 말이 바로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말씀은 제게
오직 본질이신 아버지만을 더욱 더 바라보며
끊임없이 아버지기도를 하라고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일어나는 일에 매몰되어 허우적 거리지 않고
두 눈을 더욱 부릅뜨고 아버지만을 부릅니다.
아버지만을 부르니 몽키 마인드가 사라지고
오직 아버지께 집중하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바로 아버지께 제 마음을 온전히 드리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더 끊임없이 기도하며 부족한 제가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겠습니다!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참 중요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이 일어나는데
알아차린다는 거에요,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다. 각찰할 수 있다.
깨어서 관찰 할 수 있다, 무엇을?
생각 감정들을, 복합 관념들을, 각찰할 수 있다.
각찰하는 것이 본질이다. >
<전면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그 배경에 내면의 깨어있는 고요를 감지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본질이다.>
<현상의 차원하고 본질의 차원은 차원이 달라요. 차원이 달라.
그래서 물들지 않는 거에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초월이라는 말도 쓰고.>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9-2편을 보고 읽으며
아버지기도를 하는 내맡긴 영혼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한번 더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형상과 동일화되어 살며 걱정과 근심이 많던 저는
아버지께서 나의 아버지이시며 참 주인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고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과 같이 두려움 없이
아버지라는 바다에 그냥 풍덩 빠져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따르릉하며 전화가 울릴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화살기도라는 강력한 무기가 장착되어 있으니
생각이 올라 올 겨를을 주지 않고 끊임없는 화살기도에 집중하거나
화살기도 성가를 크게 틀고 무형의 성전에 들어가
성전의 글들을 읽는 것도 아버지께 집중하게 되는
탁월한 방법이 되어 줍니다.
사실 저는 생각을 끊어내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져서
안 좋은 생각이 드는 것을 빠르게 원천봉쇄,
사전 차단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도 마음을 가다듬고 아버지께 집중할 수 있는
끊임없는 화살기도가 내면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고
홍수난 세상에서 마른 땅이 되어 주었으며 거내영으로 사는 한,
제 안의 마른 땅은 나날이 넓어지고 단단해져 갈 것입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이 아버지기도로 아버지를 부르는 일상은
저의 모든 것을 아버지로 가득 채워주시는
기쁘고 감사한 눈물이 마를 날 없는 새롭고도 행복한 날들입니다.
아버지를 부르고 잠겨 있으면
본질의 아버지가 저를 이끌어 살아 주심을 느낍니다.
@작은길.보조
사랑하는 아버지,
베풀어 주시는 크신 은혜에 감사와 찬미와 흠숭을 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 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버지께 내맡긴 영혼들은 참으로 진정한 부자, 찐 복자 대자유인들입니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삶을 살면 살수록 엄청난 은총 속에 살아가게 되니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드리니
그 자리에 아버지께서 찾아와 주셨고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채워주셨기에 나의 부족함도 모자람도 결핍과 궁핍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가슴 벅차게 충만함을, 저의 온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일상의 대, 소사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아버지가 주시는 느낌대로 이끌려 드리니 마음이 안정되고
일도 잘 마무리되고 관계도 회복되며 참 평화가 찾아오니 말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내맡김의 신비이며 기적의 비밀이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휩쓸리지 않는 제 내면 깊은 곳에
이미 와 계신 아버지께서 제 안에서 저를 살아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매일 매 순간이 감사이며 기쁨이며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물론 낭떠러지에 떨어 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가 아버지의 세탁기 통속 정화의 시간이며 정화된 낭떠러지 깊이만큼
아버지께 더 가까워지고 깊어지며 아늑해지는 달달한 ‘사랑의 시간’입니다.
이런 영적 무기, 사랑의 요술 방망이를 선물로 주신
아버지께 무한감사와 찬미와 영광과 흠숭을 올려드립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모든 사제와 내맡긴 영혼들과 무형 성전의 모든 것을 통하여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시며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허상으로부터 깨어나게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감각, 지각이 생각으로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또 감정을 또 만들고
요렇게 해서 우리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그 진행이 된다.>
아멘, 아멘!!!
아버지, 이끌어주신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9-2 > 강의를 들으며
저는 한 번도 현존에 놓여보지를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지난 시간과
오지도 않았고,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또 그 생각이 만들어내는 감정에 빠져
괴로워하고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허공을 부여잡고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며
생각이 만들어낸 감정에 충실하느라
저뿐만 아니라 함께 가는 이웃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주고 살았습니다.
또한 관념으로 똘똘 뭉쳐 판단, 평가하고 구분지으며
많은 죄를 저지르고 살아왔습니다.
무형의 성전에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현상은 본질이 아님과 모든 현상은 찰나처럼 지나가고 없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니
현상으로 인한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화냄도
다 부질없는 헛짓, 허공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안에 머뭄>만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모든 것은 지나가는 현상이요
오직 아버지만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감정이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더이상 허상에 끌려다니지 않겠습니다.
알아차림으로서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음과
깨어있어야 알아차릴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아빠아버지, 이끌어주신 많은 것들을 제가 다 간직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흘러내리는 물에 자라는 콩나물 시루의 콩처럼
저도 자라고 있음을 믿습니다.
지난 일들에 대한 자책 또한 허상에 갇혀 사는 것일지니
아버지, 지난 제 모든 잘못들을 아버지께 내맡겨드립니다.
저는 다만 지금의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는 모든 축복의 순간에 감사로 화답하며
기쁘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참자유와 평화의 삶으로 이끌어주시고 그 깊이를 더해 주시는 아버지를 찬미합니다.
흠숭합니다.
무지하여 허상의 고통 속에 사는 저를 깨우쳐주신 아버지,
제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거내영의 다양한 교육을 통해
당신의 눈으로 제 삶의 관찰자가 되게 하시는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공간, 섬, 에덴, 피안, 부활, 제로포인트 >
'공간, 섬, 에덴, 피안, 부활, 제로포인트'가 지칭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우주만물인 것이지요
종교와 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언어와 의미를 통해
아버지의 세계를 깊이있게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런 앎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가시는
아빠 아버지를 찬미찬양합니다.
이런 앎과 깨달음의 광장을 열어 아버지께로 이끌어가시는
위무위 신부님과 거내영의 선배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김홍근 교수님 강의는
들으면 들을수록 거내영의 가치와 이끄심에 빠져들게 합니다.
< 관념, 복합관념, 관념왜곡=이상, 현실탄압 >
< 각찰과 견성 >
< 복합 관념에만 속지 않아도
인간의 삶은 굉장히 단촐해지고 지혜가 나온다는 거에요. >
사랑하는 아버지,
이 말씀들이 거룩한 내맡김과 연결되어
단순해 지라는, 순수해 지라는,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과 연계되어
현상들이 반응하는 복합 관념에 휘둘리며 탄압받았던 과거와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를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확연하게 분리됩니다.
참으로 많이 비교 분석하고, 상상하고 판단하며
있는 것보다 허상이 만들어가는 불행을 끌어들이고 살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심리 분석은 왜 그리 잘 되던지요.
말 마디를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을 분석하며
그게 맞다는 확고한 관념왜곡이 제 사고의 주된 행태였습니다.
그 허상으로 인해 얼마나 제 현실이 탄압받았는지를
그 허상으로 인해 제 삶이 얼마나 불행 속으로 추락했는지를
그 허상을 먹이삼아 제 에고가 얼마나 기세등등하게 저를 조종해왔는지를
거내영의 다양한 가르침을 통해 알았습니다.
이젠 그런 관념왜곡에서 벗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저를 관찰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훅~~하고 들어오는 사건 사고 앞에
잠시 정신이 휘둘리다가
그 사건 사고를 직시하면서 평정심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1차 화살로 끝내는 힘이 생겼습니다.
이젠 일어나는 현상을 현상으로만 받아들입니다.
며칠 전 사건을 통해서도 그런 저를 확인하며
조금씩 때론 왕창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를 찬미찬양했습니다.
단순한 사건을 접하면서
예전 같으면 그 말보다는
그 말이 나오게 된 내적 배경을 추출해내면서
꼬이고 꼬인 감정으로 제가 저를 괴롭혔을텐데,
2차 3차 화살을 끌어당기지 말자는 의식이 살아있으니
급방 평정심이 찾아지며 상대를 향한 마음이 따뜻해지더라구요.
사건 사고에 대한 반추는, 제가 잘하던 상대의 심리분석은
결국 제가 저를 향해 쏘는 제2, 제3의 활 시위였습니다.
그냥 일어나는 현상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아픈 현상도 감사하고 사랑하며 꼭 끌어 안으니
김교수님 말씀처럼 야수가 왕자가 되는 신비한 변모,
알 수 없는 따뜻함과 사랑이 흘러나오는 현상을 경험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이젠 진정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받아안습니다.
제가 먼저 하지 않고 여쭈어보는,
아버지께서 하시도록 저를 내어드리는 일상이,
저의 관찰자이신 아버지와 대화하며 이끌리는 일상이
이젠 많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단풍이 참 곱지?'' 네, 아빠 정말 고와요.'
'아빠 오늘 저녁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보리굴비 먹을까?' '네'
'나갈 준비할까요?' '그래 준비해라.'
'가슴이 뜻해지니?' '네. 아빠 가슴이 따뜻해지니 다 이뻐보여요.'
어젠 혈압약을 타러 병원에 갔더니
30년 지기 의사샘이 코로나와 독감 예방 접종을 함께 맞으라고 권하시는데,
잠시 그래도 되나 하다가 순간 아버지께 여쭤 보았어요.
아버지께서 '응~~' 하시는 듯 해 다 맞고 왔습니다.
이런 일상으로, 아님 말구로 이끌리는 장면들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는
제 몸을 하나의 사물로 보라는 관점이 새롭게 들어왔습니다.
< 몸도 잃어버리는구나.
물건 잃어버리듯이 몸도 잊어버리는구나
때가 되면 몸도 이별하는구나.
물건 잃어버릴 때 나와 인연이 끝났구나.
그러면 미련이 없어지잖아요. 몸하고도 마찬가지예요.
몸도 나와의 인연이 여기까지구나. 죽음이란 것도 그런 거다 이거예요. >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처럼 '죽은 시체'를 보듯이
조금 떨어져서 연민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 깨어남이란 말씀이
인연이 끝난 물체로 내 몸을 바라보라는 말씀과 연계되니
싹둑 잘라 봉헌한 모가지의 의미가
무소유 고백의 의미가 또 다른 각도에서 가슴을 파고듭니다.
인연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물건처럼
이 몸도 인연따라 생멸하는 물건의 일부로 치부하니
진정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네요.
거내영을 통해
현상의 생멸을 알아차리고
그 생멸하는 현상을 따라가지 않고 아버지 안에 중심을 꽉 잡고
진여심(眞如心), 진실로 항상 저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젠 생멸하는 아슬아슬한 파도타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파도를 놓치면 빠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젠 강요된 현상의 파도타기가 사족이며 개뿔임을 압니다.
파도줄기를 놓았을 때 빠져 도달하는 그 곳이
죽음이 아닌 천국, 아버지와 함께 영생을 살 내집임을 압니다.
< 나는 나는~ 안 변하지요?
안 변하는 것은 본질이다 이거에요. >
< 지금 우리가 깨달음의 중요한 단초는
내가 대상으로서 찾는다는 것을 빨리 포기해야 돼요.
나도 모르게 본질을 대상으로서 구하고 있다. >
< '나는' 거기에서 끝나야 돼요.
'무엇이다'라고 넘어가면 영원히 헤매게 되는 거에요. >
<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부모도 죽이고, 이 말에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본질을 부처, 조사, 본질, 진리, 본성, 또 뭐
반야, 지혜, 자유, 이런 말들로 끌어 내려 가지고 쥐고 있다 이거예요. >
'나는 나다'라는 성경의 말씀이
이렇게 연결되니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말씀이
조금이나마 이해됩니다.
이런 알아감으로 무지랭이의 속살이 채워짐이 참으로 기쁩니다.
< 내맡김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가 "겸손"이요, 셋째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단순"하며, 단순한 사람은 "순수"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복잡"하며, 복잡한 사람은 "불순"합니다.
"철부지(어린이)"는 곧 하느님 나라를 여는 "열쇠"입니다.
누구든 이 열쇠를 지니지 않으면 결코 천국 문을 열 수 없습니다. >
(moowee 10.10.20)
아멘!!!
단순하고 순수한 진정 겸손한 따라쟁이가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물들지 않은 저와 온전히 하나이신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결국에는 흔들리지 않는, 그것은 지나가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견성이에요.
근데 이렇게 한 번이라도 되도록 발견하면 힘이 생겨요.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면, 자기가 직접 확인한 거잖아요.
자기가 확인한 것은 굉장히 힘이 있는 거에요.
남한테 들은 거 말고.>
[ 내맡김은 체험이며 체험만이 답입니다.^-^ ] -위무위.지도사제-
< 일어나지만 딸려 가지 않고 가만히 이렇게 보니까 싹 정리가 되면서
지혜가 떠올라요. 어떻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
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갑자기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라는
옛속담을 떠올려 주시네요.
바짝 차리는 정신이 바로 '아버지'시죠.
시, 공간의 주인이신 아버지와 함께
어느 상황에서도 '아버지'께로 마음을 온전히 모으는 것!
현상인 호랑이에게 물려 죽어도, 살아도 오직 아버지!
그 딸랑 하나! 단순한 최고최선의 방법을
알려 주셔서 너무나 너무나 감사드려요.
사건사고가 났을때도 내맡긴 영혼들의 입에는 바로
"아버지, 감사합니다!"가 제일 먼저 나오지요.
바로 이것이 평소에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아버지와 주고 받은 척착! 때문이라는 것을
부족한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나의 선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일으켜 주시는 모~~든 것을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으로 감사히 받아 들이고,
펼쳐 주시는 상황에 물 흐르듯 흘러가면 그만입니다.
마음이 둘로 갈라지지 않게 해주시니
오직 하나! 아버지뜻대로 이끌려 드리겠다는 마음 뿐!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만을 외칠 뿐입니다.
< 지금 이 현상계에서 아무리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내면의 물들지 않는 공간, 바로 거기가 에덴동산이다 이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쫓겨났다 이거예요. 이걸 집착함으로써,
분별함으로써,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쫓겨났는데
다시 발견해서 회복하는 것이 그게 부활이에요, 부활.
거기를 회복하는 것이 부활이에요.>
[ 이해욱프란치스코13.06.10 08:11
<만물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다>
만물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은 '당근'입니다.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분의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만물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다는 차원>보다 더 위의 높은 차원은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거룩한 <영적순례>일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100%를 내맡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족해도 죄스러워도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100%를 내맡기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죄스런 사람이라도 굳은결심 100%만 내맡겨 드리면
그때부터 정말 <탄탄大路>입니다.
스스로를 100% 내맡긴 영혼이라고 생각되는 분은 정말
생활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영적순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영적순례>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이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이 따라가는 것,
<삶 자체가 성지순례>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아멘,아멘!
죽어서도 꿈도 꿔보지 못할 천상낙원입니다.
도인들이나 사는 삶인줄 알았습니다.
현상에 물들지 않는 지상천국이
바로 지금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살게 해주신 나의 아버지,
참으로 참으로 감사와 찬미와 흠숭을 드립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자녀들과
이 기쁨과 평화를 나누도록
온 세상 모든 인류를 내맡겨 드립니다.
부족한 제가 아버지만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하늘에서와 같이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거내영의 위대함을 매번 깨닫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결국에는 흔들리지 않는, 그것은 지나가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견성이에요.
근데 이렇게 한 번이라도 되도록 발견하면 힘이 생겨요.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면, 자기가 직접 확인한 거잖아요.
자기가 확인한 것은 굉장히 힘이 있는 거에요.
남한테 들은 거 말고. >
아멘,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처음 거내영에 입문하고 나서
아버지를 소유하는 것이 쉬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동요되며 흔들리는 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일어나는 현상은 고통이 동반되면서 너무도 쉽게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보여 주심으로
더욱 더 내맡김의 아버지기도를 통해 곰담묵과 거,머시기 순명으로
수련해 주시는 아버지 아니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일어나는 현상에 한 번, 두어 번, 여러번 흔들리면서
점점 안과 밖을 살피게 되며 자각하는 힘과
내면에 흔들리지 않은 본질의 자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뜻에 내맡겨 드리고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짐을 깨닫게 하신것이지요.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
아멘, 아멘!!
참으로 내맡김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반복된 체험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지나가는 현상임을 앎으로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의 지혜로 해결해 주실 것을 굳게 신뢰하면서
철부지가 되어 공간이 생겨난 자리에 참 자유로운 일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첫 번째 화살을 맞으면서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받아들여 맞설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아버지께서 저를 위한 성화의 과정으로 섭리 하심이며
깊은 고통을 맛보면서 더욱 아버지만 바라보게 되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죽기‘가 가능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거내영의 가르침대로 따라했을 뿐인데
세찬 풍랑과 지진이 일어나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아버지!
그 자리에 잔잔한 평화로 채워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오직 아버지만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빠아버지, 생각의 늪에서 건져주심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 어떤 사건과 사람과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 진정한 원인은
그 사건과 사람과 상황 자체가 아니다.
오직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시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대상 의식에 갇혀 시간을 초월한 의식 그 자체인
내적 공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아버지의 사랑은 은은하게 제 안으로 스며들어 아버지의
닮은 꼴이 뭔지 아는 척하고 억지로 꾸미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젠 물흐르듯이 아버지 뜻안으로 흘려들어 바람부는대로 낙엽처럼
내 뜻을 완전히 버리고 아빠아버지 뜻안에서 뒹굴뒹굴 물들어갑니다.
천국은 정소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아버지 안에서 느낄 때 고요한 평화 속에
머물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희망을 당신에게 둡니다.
내 꼴대로 살아왔는데 아버지 이끄심으로 예수오빠따라쟁이가
되어갑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만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삶의 맛을 알고 깨달음이 진정한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생각조차 아버지께 몽땅 내맡기며 이끌려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당신 홀로 무한찬미영광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해 주는 거룩한 내맡김으로 불러주셔서
아빠아버지,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심님, 녹취의 수고로 행복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이 공간 의식의 등장이, 본질의 등장이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다. >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를 살고 있다는 말씀이 본문에서와 같이
초월의 단계를 살고 있다는 말씀과 같이 들리고,
그 초월의 단계를 넘으면 무슨 말씀이 이어질까 궁금해집니다.
< 힘이 강해지면 알아차림은 자기를 알아차리게 된다.
현상만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본질이 본질을 알아차린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
[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루가2,40)
몸만 자라고 생각만 커지니 땅을 디뎌야 할 발과
하늘에 있어야 할 머리가 뒤집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기도로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서
아버지의 섭리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생각은 끊어지고
아버지만이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이 자라고 강해져
[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아버지의 지혜와 은총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를 더욱 가슴에 박아 넣으며
거룩한 내맡김의 중요성을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 결정을 하면 깨끗하잖아요. 그것처럼 몸도 아, 나와의 인연이 몸이
여기까지구나. 죽음이란 것도 그런 거다 이거예요, 알고 보면.
그러니까 죽음이 왔을 때도 담담하게 아, 이번 게임 레벨의 인연은
여기까지 구나, 하고 뭐 그 다음부턴 다음 레벨이 또 오든지 말든지
자유로워지는 거지요.
다음 레벨은 어떻게 오느냐가 궁금하지 않다 이거지.
사실은 진짜 궁금한 것은 언제나 진짜로서 여여한 지금 본질인 이것. >
[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얼마나 애타게 찾아다녔습니까!
제 모든 것 아버지 손에 맡겨 드리고 삶과 죽음이 더 이상 궁금하지도,
두렵거나 온갖 걱정 근심도 사라지고 예수님의 멍에만 메고
배우기만, 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온 존재로 알아지게 되었으니
진짜 궁금한 이것, 대자유의 본질인 아버지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깨어 생각도 없고 정신은 깨어 있어.
공적이면서 영지, 생각의 위,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톨레가.
본질은 무엇이 아니에요. 무엇은 전부 현상이에요.
무엇은 형상이고 현상이에요.
내적 공간을 현상에서 찾기 때문에, 그러니까 본질을 현상에서
찾기 때문에 못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다." 이 말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나는 나다를 알아차리는 것, 말귀 알아듣는 게 중요하다. >
[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8,23)
아멘아멘아멘!
아버지기도로 생각을 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잠깐 정신을 못 차리고 집중하지 못할 때라도
사랑하는 신부님의 칼날 같은 지도가 언제 어디서나 저를 깨우니,
그토록 저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자책하던 가시덤불에서 빠져나와
공적영지, 아버지기도로 금방 고요해지고 알아차리기만 하는 내적 공간,
그 피안 안에서 휴식하며 매 순간 아버지만이 남는 말귀가 되었으니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하는 거내영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 숙여
가만히 엎드리기만 할 뿐입니다.
< "나는 무엇이다."고 했으면 그것은 신이 아닌 거지.
그러니까 이해되세요? 본질은 무엇이 아니에요.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본질을 부처, 조사, 본질, 진리, 본성, 또 뭐
반야, 지혜, 자유, 이런 말들로 끌어내려 가지고 쥐고 있다 이거예요.
이것을 쥐고 있는 한은 본질을 못 깨닫는다. >
[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 8,24)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평생을 죄의식의 무덤에서 형식적 겉치레에만 매달려 살다가
현재를 깨닫지 못한 무덤을 제 손으로 파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존재함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왜 태어났는가만 찾으며 왜의 무덤에서 죽었을
가련하고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신 아빠아버지!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오직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만이 모든 것임을 뜨겁게 느끼며
현재에 존재하는 의식을 창조하신 아버지께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통하여 매 순간의 찬미를 올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감각, 지각이 생각으로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또 감정을 또 만들고
요렇게 해서 우리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그 진행이 된다.>
< 어떤 사건과 사람과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 진정한 원인은
그 사건과 사람과 상황 자체가 아니다.
오직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시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대상 의식에 갇혀 시간을 초월한 의식 그 자체인
내적 공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생각은 끊임없이 자기 종족들을 끌어들여
패거리를 만들었고, 그 패거리와 어울리다 보면 사소한 일도 훨씬 심각하고
견디기 힘든 문제가 되곤 했습니다.
생각 안에서 바늘은 금세 소가 되고 코끼리가 되어버리니, 별일 아닌 것을 가지고도
난리 부루스를 추며 주변에도 물방울을 튀기곤 했지요.
생각 속에서 화살 쏜 자를 단죄하고 책임을 추궁하느라
화살 맞은 자리를 수시로 열어보고, 아물 만하면 또 헤집어 뜯었으니,
작은 흉터 하나 남길 일을, 두고두고 통증을 일으키는 큰 상처로 키운 것은
대상이나 상황이 아니라 제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기도는> 대상이 된 개에게 소의 뿔과 사자의 갈기와 용의 비늘까지 갖다 붙이는,
생각과 관념의 놀이에 빠져있던 저를 제 안의 고요한 공간으로 데려다 줍니다.
생각이 작동하지 않는 그 공간은 감정이라는 사족이 붙지 않은,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합니다.
부족하기에 습관에 끌려가기도 하고, 큰 흔들림을 겪은 다음에야
그 공간에 다다를 때가 많지만, 여유를 가지고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시각의 자리를 경험했기에 후퇴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도 선배들을 따라 무엇에도 흔들리거나 물들지 않는 제 존재의 집에서 상주할 수
있도록 <아버지기도>로 정진하겠습니다.
모든 사제와 <거내영>의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
사랑하는 아버지,
4살된 아들을 동물원에서 잃어버렸을때, 제 오른쪽
고관절 혹이 종양 같다고 종양내과로 옮겨질때,
아들이 친구랑 놀러 가서 다쳐 왔을때,
그때의 경험은 제가 다른 세상에 분리되고 정지되어
있는 듯한 고요함과 내면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도 느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함께 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삶으로 이끌림 받은 후부터는
일어난 일들을 아버지께 내맡겨 드림으로써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나를 보게 되고
마음은 요동치기보다는 차분해지는 저를 봅니다.
<각찰을 제대로 딱 하면 밖에 아무리 뭐가 와도 살짝 요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가도 나의 깊은 곳에서는 흔들리지 않는구나 하는 걸 확인하게 되면
그곳이 이제 나의 존재의 집이 되어서 항상 그곳이 이제 확인되고 그곳에서
내가 거주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게 이제 견성이다. 그게.>
끊임없는 아버지기도로 일어난 현상에
딸려가지 않고 아버지께 집중하면 어떠함에도
물들지 않는
아버지와 저와 하나 된 이 공간에는 그 무엇도
침범되지 않는 견고한 아버지와 나만이 있는 집이 생깁니다.
더 이상 제 뜻의 생각을 만들어 괴로움으로 빠지는
어리석음은 아버지께 내맡긴 영혼이 아님을 알고
지금 여기에 의식을 두고 깨어 있겠습니다.
아버지께 모든 것 내맡기며 아버지의 이끄심대로
따르니 제가 하는 것은 오직 끊임없이 아버지기도 하며
지금 여기에 아버지 손잡고 아버지만 뜨겁게 사랑하며
함께하는 삶에 집중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는님아버지, 이 모든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 나다. >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 썼던 저는,
감고 있던 눈을 뜨기에는 많이 아팠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하늘을 보며 몇 초 동안만이라도 달콤함을 맛보려 했던 저에게,
' 너는 그러면 안 돼, 그럴 자격이 없어. ' 란 속삭임(생각)에
그 즉시 땅을 보고, 제가 만들었던 어둠의 동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맑은 하늘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가 죽을 만큼 싫었습니다.
" 감각, 지각이 생각으로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또 감정을 또 만들고
요렇게 해서 우리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그 진행이 된다. "
이 죄인은 하늘도 감히 쳐다보면 안 된다 여기며,
현상에서 오는 고통들에 흡수되어 저의 의식은 숨어버렸지요.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제 마음 어딘가 계실 하느님을 찾기 위해
미친 듯 발버둥 치고,
관람객처럼 마리아처럼 카페에서 두리번거리던 저에게,
무색인 공간 안에서 굉장히 강력하고 짧은 말씀인 " 나다! "를 꿈에 보여주시어,
꿈에 깨어난 저는, 단번에 하느님이심을 알고
제가 그토록 보지 못했던 세상을 살게 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 나다! " 는 눈을 뜨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저에게 화살기도를 알려주었고,
" 나다! " 는 눈을 뜨게 하시어 그토록 그리웠던 하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 나다! " 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게 만드시고,
" 나다! " 는 그 안에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이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온통 " 나다! " 이 말씀 하나로 시작되었던 내맡김은,
어둠도 빛도 하느님이시고,
하늘도 땅도 공기도, 우울함도 에고도, 고통도 아픔도 기쁨도 행복도
사람들도 생각도 격정도 온통, 모~~~든 것이 " 나다! " 였습니다.
그토록 말씀하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심은
" 나다! " 에서 모든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죄인 이제, 하늘도 땅도 쳐다보며 " 나다! " 이신 아버지를 보려 합니다.
" 나다! " 로 제가 없고,
오직 아버지만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나의 아버지시여,
진실한 내맡김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도록 이끄시는 요즘,
이제는 제가 감히 상관하려 들지 않고, 제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만
활동하시도록 끊임없이 내어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습관적인 제 뜻을 전부다 드러내시어,
아버지의 뜻대로 정화시키시고,
진실로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아버지시여,
부족한 이 죄인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겠습니다.
땅만 보며 걷는 이들과
눈을 뜨고 싶지 않아하는 많은 이들을 내맡겨 드립니다.
거내영과 모든 사제들,
무형의 성전의 모든 식구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
<그것은 지나가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견성이에요.>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
< 어떤 사건과 사람과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 진정한 원인은
그 사건과 사람과 상황 자체가 아니다.
오직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시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대상 의식에 갇혀 시간을 초월한 의식 그 자체인
내적 공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원인조차 모르는 두려움에 이성조차 갇혀버리면
무분별한 말과 행동으로 가까운 이웃에게 큰 상처를 입히곤 했지요.
제 스스로 제어되지 않는 감정의 폭발로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였구요.
그런 제가 내맡김 봉헌 이후 에고가 사라진 공간에 아버지께서 좌정하고 계시니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사고와 조건 반사적인 행동들이 저절로 멈춰집니다.
일상속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과 해결되야 할 어려운 과제들을 마주하지만
예전의 호들갑스럽기 짝이 없던 저의 모습과는 달리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한 채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저를 봅니다.
저를 살고 이끌고 계신 아버지께서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게
에포케로 이끌어 주시고 곰담묵하며 바라보게 하십니다.
또한 꽉 막혀 있던 사고의 틀을 열어주시고 지혜를 주시어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짐을 매번 체험합니다.
거내영을 통해 내적 공간을 열어 주시고
그 안에 아버지께서 흔들림 없이 저를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더더욱 아버지만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여
그 공간을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드리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통하여 당신 마음껏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