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15차시 합평자료(6월 17일 용)
문학 치료 실기(대상과의 화해)
1. 어릴적의 아련한 추억 김효섭 3
라면은 가장 쉽게 끼니를 해결 할 수 있는 음식이다.어릴 적 방학때면 할머니댁에 오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마음 껏 라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먹을 것이 흔하지 않은 때에 라면은 최고의 간식이었다.끓여 주는 라면외에도 생라면을 과자처럼 먹는 재미도 솔솔했었다.그 버릇이 남아서 지금도 때로는 생으로 먹기도 한다.
라면외에 재미있었던 일은 저녁에 개구리를 잡아서 주낙을 놓아서 가물치를 잡았던 일이었다.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연못으로 달려가면 잡혀있는 가물치의 몸부림침에 기뻐서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크기는 별로였지만 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길은 개선장군이 따로 없다.어떤 때는 큰 고기를 잡는 횡재하는 날도 있었다.
증조부께서는 아침을 드시고는 밥알로 붕어낚시를 가시는 일이 하루의 일과였다.잡은 고기가 반찬이 되었다.붕어추어탕은 미꾸라지추어탕보다 그 맛이 더 시원하다.증조부의 풍채는 장수라고 할 만큼 좋았다.늘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조부께서도 조모의 핀잔에도 아랑곳 않고 낚시를 즐기셨다.하시는 말씀이 첩상이가 낚시하는 곳에 왔어도 아는 체 하지 않는 바람에 떨어졌다고 하셨다.그렇게 낚시를 좋아 하셨다.
요즘에는 게이트볼을 즐기는 노인들이 많다.시대가 좋아져서 취미의 수준도 높아진 것이다.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어느 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라고 한다.첫 번째는 처음 라면을 먹었을때고 두 번째가 지금이라고 한다.
음식의 맛은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좋은 사람들과 편한 자리에서 먹는 것이 최고의 맛이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끼기에 업무처리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그래서 정치권에서는 조찬,오찬모임을 갖는 것이다.
라면을 먹는 방법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컵라면이 자리를 잡았다.뜨거운 물만 부어 몇분이면 먹을 수 있으니 너무나 간편하고 빨리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도 하지만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언젠가 큰 아이가 아빠가 끓여준 라면을 먹어야 하는 것과 학원을 가야하는 상황에서 그때 먹은 라면이 정말 맛있다고 했다.
남자들은 음식을 못한다고 스스로 단정 짓고 시도 하지 않는다.사실,음식을 만드는 것은 사랑에서 출발한다.사랑하는 사람이 이 음식을 먹고 행복해는 모습을 생각하면 요리는 즐겁고 재미가 있으며 더욱 더 맛있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반복해서 하게 되면 늘 수밖에 없다.
요리는 사랑이다. 또한 행복의 산물이다.
2. 공존을 위한 노력 /문성미 3
1. 우리 집은 동네에서 외따로 떨어진 단독 주택이다. 뒷마당에서 조금 걸으면 산으로 접어들 수 있어서 조용하지만, 불편한 점도 있다. 시장은 물론이고 마트나 편의점도 차를 이용해야 하니 매일 반찬거리를 사는 것이 쉽지 않다.
2. 아버님이 계실 때는 밭에서 가꾼 다양한 채소를 반찬거리로 갖다주셨다. 우리 밥상은 국을 비롯해 밭에서 나온 야채로 만든 반찬이 주를 이루었다. 고기반찬이 자주 오르지 않아도 반찬 투정이 없었던 분위기에는 재료인 채소의 싱싱함이 한몫했을 것이다.
3.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남편이 밭을 경작했지만, 고추와 배추로 품목을 정리했다. 마트나 시장에서 야채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유통과정이 빨라도 하루 이상 걸리기에 내가 찾는 싱싱한 야채는 만나가도 쉽지 않았고, 어렵게 고른 것도 기대한 맛이 나지 않았다.
4. 몇 해 전 일을 쉬는 동안 남편은 뒷산 자락에 텃밭을 일구었다. 돈이 안 되는 쓸데없는 일이라면서도 얼굴에 생기가 느껴져서 말리지 않았다. 첫해는 땅도 거칠고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오지도 말라더니, 이듬해 봄에는 먹고 싶은 채소를 물어보고 상추와 열무, 고추와 오이를 심고 관수 호스를 설치했다. 상추와 오이는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서 여름 밥상을 지켜주었다.
5. 농약 사용을 하지 않지만, 남편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텃밭에는 여남은 종류의 채소와 과일이 실하게 자란다. 매일 먹을 만큼 거두어도 남을 양이지만 예상치 못한 객식구가 끼어들기도 한다. 지난 해 가을배추는 맛있는 가운데 부분은 고라니가 먹어서 바깥쪽만 시래기로 먹었다. 고라니는 고추의 부드러운 순과 고구마 잎도 좋아해서 무성했던 잎이 줄기만 남았다. 애를 태워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생각을 바꿨다, 원래 녀석들이 놀던 곳에 밭을 만들었으니 어쩌겠냐고.
6. 야채와 달리 과일나무는 약을 치지 않고 돌보기는 더 어렵다. 채소처럼 비닐하우스 재배를 할 수도 없고, 열매를 맺는데, 몇 해가 걸린다. 움직일 수 없는 나무이기에 까치를 비롯한 새들은 과일이 익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쪼아댄다. 자두나무 첫 열매 두 개가 열렸을 때 요즘 과일가게에서 산 것과 다른 새콤달콤한 맛이라 감탄하며 먹었다. 이듬해는 생각보다 많이 달려서 익기를 기다렸는데,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새들이 모든 자두를 먹고 상처투성이 한두 개만 달려 있었다.
7. 지난해 남편은 새들에게 뺏기기 전에 맛이라도 보라며 채 익지 않은 자두 몇 개를 따 왔다. 과일은 익으면서 굵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아직 작고 아직 단단한 데다 속에 벌레 먹은 것도 있었다. 그래도 깨물어 보니 새콤한 맛과 단맛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반가웠다. 작은 자두 한 알을 베물면서 내가 그동안 맛있는 자두를 찾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8. 해마다 여름이면 자두를 사 먹었다. 마트에서 산 알이 굵고 검붉다 할 만큼 숙성된 자두는 단맛은 많아도 싱거워서 뭔가 허전했다. 어린 시절 학교 자두나무에서 친구들과 새콤한 풋자두를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남새밭에서 일하시며 막내인 어린 나에게 채소들 이름을 얘기해 주시고, 햇살에 따뜻해진 오이며 가지를 따서 껍질째 먹어도 단맛이 나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9. 나의 몸은 자주 먹었던 건강한 맛을 추억의 장면과 함께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식성 까다롭다는 얘기 한 번도 듣지 않았는데도 채소나 과일의 맛에 유난한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농사를 지을 때 방제를 위해 약을 많이 치거나, 수경재배와 같은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키우면 미묘한 맛이 없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식물은 병충해에 나름대로 대처하기 위해 신맛, 쓴맛까지 다양한 맛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데, 그로 인해 맛있는 채소나 과일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식물에게 공생이 자생이고, 공존의 의미를 배웠다.
10. 남편이 말하는 쓸데없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나는 쓸데없는 일의 의미를 인정하기에 응원하며 지켜보는 편이다. 때로 심어놓은 콩이나 땅콩을 까치가 먹어서 그 농사를 망친 적도 있었고, 새순을 잘라먹으면서 밤에만 눈에 띄는 달팽이들을 색출하느라 며칠 저녁을 보낸 적도 있었다. 잘 자란 채소는 맛있는 반찬이 되었지만, 제대로 못 자란 경우는 우리에게 고민을 안겼다. 그 고민은 새로운 호기심을 일으키고, 관찰하면서 공존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3. 어떤 개미의 짐/손영욱(1)
1. 수영 강습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무심코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개미 한 마리가 커다란 먹이를 끌고 어디론가 열심히 가고 있었다. 먹이는 죽은 곤충이었다. 그 곤충은 개미보다 열 배는 더 커 보였다. 먹이로 삼으려고 자기 집으로 끌고 가는 듯 보였다. 한 눈에 봐도 힘겨워 보였다.
2.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가까이서 자세히 보았다. 개미 주변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개미에게는 작은 잡초 잎사귀도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이미 무거운 짐을 끌고 있는 상태여서 더 힘들어 보였다. 가느다란 다리로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잡초를 더듬어서 그 모양새를 짐작하는 듯 했다. 어떤 경우에는 잘못 파악해서 앞으로 가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했다.
3. 이 광경을 보면서 잠시 후에 일어날 일을 분명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나는 문득 개미의 일에 참견하고 싶어졌다. 한 치 앞의 일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개미를 보면서, 내가 개미에게는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개미가 잡초의 작은 잎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나는 개미를 위해 잡초 잎들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개미의 목적지를 몰라서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짐을 끌고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참견이 개미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5. 잠시 한눈을 팔았다. 그리고 다시 그 개미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살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개미는 이미 저 먼 곳으로 참으로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가고 있었다. 문득 내가 저 개미를 도와주지 않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6. 개미의 짐처럼 나도 이런저런 짐을 짊어지고 옮기며 살았다. 개미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손발로 더듬어서 앞으로 나갔다. 매번 내가 선택한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었다. 뒤돌아보면 내가 선택했던 길 중에는 힘들었던 길도 많았다.
7. 내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막막한 길 앞에서는 요행을 바라기도 했다. 절대자나 신이 있다면 그가 내 삶에 참견해주기를 바랐다.
8. 집으로 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내게 닥치는 어려운 일들이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기로 했다. 요행을 바라거나 신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지 않기로 했다. 개미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걸어간 것처럼, 나도 그렇게 걸어가리라고 다짐했다.
9. 그러나 그 다짐은 금방 바뀌고 말았다. 사소한 일들은 내가 해결하고, 나 홀로 감당하기 힘겨운 일들은 여전히 절대자나 신에게 기대기로 다시 마음먹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절대자나 신이 존재한다면, 존재의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0. 이 생각이 들자 개미에게 미안했다. 개미를 도와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개미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을까?
4. 지우개/ 이태령 1
1.친구와 요양원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실습생으로 가는 첫날이라 정장을 차려입고 일찍 나섰다. 후덥지근한 날씨탓에 얼마 안 걸었는데도 마스크 낀 얼굴은 숨이 차올랐고 등에도 땀이 맺혔다. 약속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했다. 잠시 더위를 식히려고 근처 공원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2.코로나가 약해지긴 했지만 요양원 출입은 제한이 많았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출입구는 검사하는 직원들로 줄을 이었다. 손소독, 열 체크, 키트로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입실이 가능했다. 실습생을 맞이하러 사회복지사님이 현관 입구로 나왔다. 요양원 실습 관련해 간략하게 설명을 마치고 시설 안내를 해주겠다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3.이층으로 올라가더니 직원들에게 사회복지사 실습생이라며 소개를 해 주었다. 그곳에 계시는 직원들도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마스크를 끼진 않았지만 계절에 안맞게 긴 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귀밑으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는 직원들과 달리 어르신들은 물기가 전혀 느껴지지않는 마른 가지를 연상케 했다.
4.무더운 여름 날씨인데도 실내는 선풍기도 켜지 않고 있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잘 켜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어르신들은 활동양이 적다 보니 늘 추위를 많이 느낀다고 했다. 몇몇의 어르신들은 아직 잠이 들 깬 듯 소파에 기대어 눈을 붙이고 있었다.
5.간만에 정장을 차려입은 탓인지 본격적인 실습도 시작하기 전에 민망할 정도로 땀이 흘렀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싶어 잠시 시간을 달라 했다. 혹시 몰라서 준비해 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 사이 좀 전까지 같이 있었던 복지사님도 친구도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낯선 공간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6.방금전 안내를 해주던 복지사에게 전화로 어디에 계시냐고 묻자 “ 3층입니다. 지금부터 그 생활관에서 실습하시면 됩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통화가 끝났다.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함께 온 친구는 다른 층으로 배치 받아 올라갔다고 했다.
7.대략 상황판단을 마치자, 팀장으로 보이는 분이 생활관 어르신들의 특징을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설명하는 중간에 수시로 벨이 울렸다. 전광판에서 호실 번호가 깜빡이자 복도를 따라 어르신이 계신 방으로 분주하게 왔다갔다했다.요양보호사들은 무슨 얘기인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르신의 말을 이해한 듯 익숙한 몸짓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벨을 누르는 어르신 대부분은 혼자 거동이 어려운 분들이었다.
8.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어르신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치매를 앓고 있었다. 승강기 문이 열릴때도 미리 안내방송이 들렸다. 잠시 한눈팔면 어르신들이 밖으로 나갈 수도 있으니 승강기 문이 열릴 때면 늘 신경 써야 한다고 알려줬다. 어르신들의 식사지원을 할 때도 한쪽 어르신의 생선가시를 발라주며, 동시에 다른 쪽 어르신이 자리를 이동하는지 이리 저리 살펴야 했다. 주의사항을 듣고 한가지씩 더 알아갈수록 아득하기만 했다.
9. 첫날부터 낯선 공간에서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집에 돌아오니 머리부터 허리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이러다간 내가 오히려 요양을 받아야 되지않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점심식사 후에 친구와 잠시 만나 믹스커피 한잔 마시는 게 일과 중 최고의 휴게시간이었다. 각자 어르신을 돌보며 당황한 사례도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가 되었다.
10.그렇게 시작한 요양원 실습이 며칠 지나자 어색하고 경직된 몸도 조금씩 풀렸다. 3교대하는 바쁜 직원들에게 자꾸 묻기보다 스스로 찾아가며 주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관에는 요양보호사, 작업치료사, 간호조무사들도 있지만 그들이 미처 못해주는 사회복지사 실습생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했다.
11.누군가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어르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도 혼자 못 다니는 어르신.점점 퇴화되어가는 기억과 잔존 운동능력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어르신을 위해 치매에 관해 더 알아야 했다. 어르신들을 좀 더 이해해야 도움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12.저녁 무렵이 되면 집에 가야 한다며 불안 증세가 심해지기고 하고, 옷가지나 물건을 자꾸만 숨기려 하는 어르신. 물건을 도둑맞았다며 싸우는 어르신. 인형을 아기처럼 꼭 안고 계시는 어르신. 배우자로부터 받은 폭력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어르신. 동화책을 읽어 드리면 거짓말이라며 화를 내는 어르신. 섬망 증세를 보이는 어르신 등등 치매의 양상은 살아온 삶만큼이나 다양했다.
13.개별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비교적 아주 옛날 일은 선명하게 기억하지만, 오히려 지금 있는 곳이나 현재 시간을 인지 못하는 지남력이 떨어져 있었다. 그분들이 말하는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떤 부분이 상상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도 많았다.
14.외부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오지 않는 날은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도 많았다. 소파에 앉아 멀뚱하니 앉아있다가 졸거나 침상에서 누워주무시는 걸 보고 뭔가 심심하지 않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남아있는 인지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티커를 떼고 붙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색연필을 쥐는 힘도 없고 걸음도 보조 기구의 도움 없이는 힘들었다. 그나마 이야기하며 말벗이 되어줄 때 가장 반응이 좋았다. 동화책을 읽어드리며 중간중간 어르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하면 뜻밖에 재치 있는 대답도 하시고, 엉뚱한 대답도 하셔서 함께 웃기도 했다.
15.한 번은 수건과 앞치마만 보면 자꾸 숨기려 하고 다른 사람 것을 가지려는 분이 계셔서 아예 그분과 함께 앞치마 개키기를 하게 했다. 그 어르신은 빨래를 개며 두런두런 얘기도 잘하시고 차분해지셨다. 그럴때면 이분이 치매어르신 맞나 싶을 정도로 지극히 보통의 이웃 어르신 모습과 다르지않았다. 치매의 세계에서도 그분들 나름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계셨다.
16.그분들 중에서 실습 첫날부터 눈길을 끌었던 어르신이 계셨다. 그 어르신은 생활관으로 입소한지 며칠 안되었다고 했다. 그 어르신은 휠체어로 이동할 때도 애착 인형을 항상 안고 계셨다. 온순하면서도 유달리 정이 많아 보였다.
17.식사를 도와드릴때면 항상‘언니는 밥은 먹었나. 같이 먹자. 같이 한술 뜨자’하며 자신의 숟가락을 나눠주셨다. 나의 대답은 항상 “저는 벌써 많이 먹고 와서 배불러요. 어서 드세요.”였다. 점심전이라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그렇게 얘기해드려야 안심한 듯 어르신은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도중에도 옆에 어르신에게 이것 먹어봐라. 더 먹어라고 계속 말을 걸어셨다.
18. 어르신은 시력이 약해서 옆에서 돌봐드리지 않으면 엉뚱한 것을 밥그릇에 담으려 해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지켜봐야 했다. 정이 많아서인지 걱정도 끊임없었다. 불쑥불쑥 비 오니 장독 뚜껑을 덮고 옥상에 빨래 거둬야 한다며 동동거렸다. 물론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눈앞에 누군가 왔다갔다하는 그림자만 비쳐도 걱정을 하고 계셨다.
19. 애착 인형을 요양원으로 올 때 집에서 가져오셨다고 들었다.애착 인형이 잠시 손에서 떠나면 심하게 불안해했다. 어르신의 가족원 중 한명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치매인 상태에서도 애착인형은 어르신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늘 사랑하고 아꼈던 누군가이면서 동시에 놓지 못하는 걱정의 대상처럼 보였다.
20. 그 어르신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앞세대를 살아오신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가족을 위해 뭐든 다 내주었던 건장했던 버팀목같은 어머니의 얼굴. 삼시 세끼를 보약처럼 가족을 챙기는데 소홀함이 없었던 어머니의 삶. 건강하게 늙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몹쓸 병에 걸려서마저도 끝까지 놓지 못하는 가족을 향한 걱정, 근심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21.노인이 될 머지않은 미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된다. 잘 사는 것은 곧 건강하게 늙어가는 것이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건강하려면 근심을 쌓지 말고 자주 털어내야한다. 사람마음이 생각처럼 쉽게 되지않겠지만, 의도적으로라도 속상한 일, 걱정거리는 맘에 담아두지않는 연습을 해야할 것 같다.
22.치매를 가진 어르신들에게 아픈 기억들은 모두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다면 좋겠다. 치매라는 세계에서 앞으로도 몇 년을 더 살아가야한다면 이왕이면 좋은 기억만 되새기며 살게 말이다.희미해져가는 기억의 조각 끝에는 어떤 아픔도 남아있지 않고, 오직 빛나고 건강했던 순간만 간직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5. 벌초와 제사/박희곤5
1 ”아제 올해 벌초는 생략합시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도 못하고 저도 나이가 드니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큰집 장조카의 전화소리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들 핑계 거리가 없어 누구도 벌초 그만 하지는 말을 못 꺼냈던 것이다. 벌초를 할 때 마다 누구는 안 왔느니 벌금을 메기 자는 등 친척들끼리 서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온 벌초가 코로나 덕택에 재작년에는 생략 하게 되었다.
2 벌초하기로 한 날이 일요일이라 벌초대신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오기로 했다. 고향집에는 감나무에 홍시가 익어 있었고 온 들판은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옛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고향산천이라 부모님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 부모님 산소는 형님이 미리 벌초를 해 놓은 상태였다.
3 성묘를 한 후 내려오는 길목에는 벌초가 된 산소와 벌초가 되지 않은 산소가 확연히 구분 되어 보였다. 마음한구석에는 벌초하지 못한 조상님 산소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애서 코로나 핑계를 대고 내년부터는 다시 할 것이야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4 작년에는 벌초 날짜가 다가와도 아무도 벌초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장조카에게 전화를 했다. “조카야 벌초는 어쩔래”하니 장조카는 입장이 곤란하다는 듯이 “아제 벌초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각 부모님 산소만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고 윗대 조상님 산소는 코로나가 안 끝났으니 한번만 더 생략 합시다”하는 것이었다. “그래 알았다”하고 전화를 끓고 나니 한편으로 좋은 듯한테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다.
5 수백 년을 이어온 관습이고 전통인데 내 세대에 와서 그 맥이 끓어진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내 평생 군 복무시절 외에는 한 번도 벌초를 거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퇴직을 하고 암수술을 받고서 3개월도 안되어 그 많은 산소를 혼자서도 벌초를 했다. 찹찹한 심정을 금 할길 없었다. 몇 년을 혼자서 벌초를 해본결과 과연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장남도 아니고 아들도 없는 내가 꼭 해야 하나’하며 마음속으로 변명을 했다. 그래, ‘더위 먹고 벌에 쏘이고 입원하는 것 보다야 낮지’ 하며 나도 과감히 포기하기로 마음을 굿 쳤다.
6 벌초를 안 한지 2년이나 된 올해에도 코로나가 어느 정도 무덤덤해 졌는데도 아무도 벌초하자는 애기는 없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자동적으로 벌초 행사는 우리문중에선 없어지고 말았다. 벌초 때가 되면 온 문중사람들이 모여 같이 벌초를 하고 같이 밥을 먹고 문중의 대소사를 의논하던 풍경은 사라지고 말았다.
7 벌초가 사라지면 조상의 산소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봉분도 무너지겠지.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 살아있던 조상의 영혼도 이젠 사라져 나의 뿌리도 모르고 살겠지. 이 서늘한 가슴을 자위 하기란 쉽지 않았다.
8 벌초시즌이 지나고 12월 달에는 할아버지 제사가 있는 달이다. 연말이라 평소 많은 약속이 있는지라 미리 장조카에게 전화가 왔다. 올해부터는 제사를 합사해서 한 번에 지낸다고 제사 모시러 오지 말라고 했다. 아 순간 머리가 띵하고 내가 살아온 세상에 종말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제사도 처음엔 합사로 지내다 조금 있으면 벌초와 같이 없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제사는 가정에서 가장 큰 행사였고 가정을 지탱하는 울타리였다. 제사가 없어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평생 지내온 제사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에 내 마음은 텅 빈 공허감 그 자체였다.
9 평생 한 번도 거른 적 없이 그 추운 겨울날씨에도 부산에서 밀양까지 제사 참석을 위해 매번 갔다 왔다. 새벽 2시까지 운전하여 갔다 온 후 잠깐 눈을 부치고 새벽 6시에는 무조건 일어나 병원에 출근하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10 이제 벌초도 제사도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애기도 낳지 않는 시대에 몇몇 조카들은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친척들 조차 벌초하러 오지는 않는 시대이다. 설과 추석에는 모두들 해외 여행가는 시대가 되어 미풍양속은 없어지게 되었다. 수십 년간 해오던 벌초도 없어지고 묘사도 없어진지 수년, 이제 마지막 제사마저 지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11 이제 벌초도 하지 않으면 인골이 묻힌 묘지도 돌봐주는 이가 없어 봉분이 무너지면서 상석도 없어지겠지. 이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상의 영혼을 불러 기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이 세상에 태어나 한세상 살다간 내 부모를 자식이 기억해 주지 않으면 누가 기억해 주겠는가? 이제 자식들마저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조상님께 어떤 변명을 해야 하나.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딸만 둘이니 내 족보도 끓어지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바다에 뿌려질까? 아니면 한그루 나무 밑에 거름이 될까? 엉감생심 제사는 누구가?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나는 이제 어떠해야 하나. 이글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6. 특별한 경험 /권은희3
1 읍사무소 근처에는 늘 현수막이 붙어있다. 그것만 읽어봐도 동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수가 있다. 좋은 정보가 많아 읽어보길 매우 좋아한다. 그때 '나는 연극 배우다 단원모집'이 보였다.
2 휴대폰으로 찍어 연락처를 저장했다. '전화를 해봐? 아냐 소심한 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나이도 많은데' 자신이 없어 망설여졌다. '혹시 나이 많은 역할도 있을 수 있지않을까? 연락이라도 해보자' 전화를 해서 조심스럽게 생각을 얘기했다. 아무 상관없고 읍민들이 함께 배우며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니 접수를 하라는 말에 덜컥 접수를 해 버렸다. 첫 미팅에 갔더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3 다음 시간에 출석을 하니 대본을 줬다. 남자 배역은 적당한데 여자배우들이 많았다. 여자단원은 15명인데 배역은 6명뿐이었다. 감독은 스탭으로 할 분 없느냐고 물어 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감독이 우려하고 있을 때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어쩌면 역할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 했다.
4 그 다음 시간부터는 읽기 연습 훈련을 했다. 출신이 경기도라 표준어로 또박 또박 읽었다. 전라도 말투의 배역이 맘에 들었지만 사투리에 자신이 없었다. 표준어를 쓰는 역에 선정이되면 편하겠다는 생각에 그 역을 신청 했다.
5 갑자기 공연이 생겼다며 인형극 한다는 팀5명과 동화구연팀 2명이 빠졌다. 다음 시간에 배역을 확정한다고 했는데 남는 인원은 두명이었다. 경험이 전혀 없는 생 초차인 나는 불안 했다. '내가 그만 두면 다른 사람들이 편하지 않을까? 그럴순 없어 중간 포기라니 못 받아도 할수 없지' 다짐을 하며 출석을 했다. 마음이 통했을까 다른 두명도 개인 사정으로 못한다고 했다. 끝까지 남는게 이기는거야 중도에 그만두지 않길 얼마나 잘 했나 편안한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6 그날부터 대본을 외우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어디서든 읽었다. 남편한테 상대 대역을 해달라고 했더니 한번 해주고는 손사레를 쳤다. 할수없이 휴대폰에 녹음을 해 들으면서 암기를 했다. 길을 가다가도 중얼 거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으면 허공에 삿대질을 해가며 큰 소리로 연습했다.
7 처음으로 대본대로 연습을 했다. 억양에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있고 목소리가 작다며 지적을 당했다. 다시 했지만 더 큰소리로 야단을 맞았다. 대사도 잊어버리고 주눅이 들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겁이 났지만 아랫배에 힘을 딱 주고 목소리를 크게 했다. 옆에 있던 단원이 '언니 좋아요' 했고 감독도 처음으로 잘한다고 했다. 다음에 더 좋아졌다는 칭찬을 듣고보니 잘 하고싶은 욕구가 생기고 열정과 자신감도 생겼다.
8 맡은 역할이 남편한테 무시당하고 버림받는 아내역인데 감정이 이입돼 남편역 배우가 연습실에 들어오는데 "아 꼴보기싫어 이혼해요"라고 소리치자 단원 모두가 "저 커플은 이혼 해야해"하고 맞장구치며 웃었다.
9 드디어 공연날이 왔다. 저녁 7시 공연인데 아침부터 모여 서로 대본 맞추며 연습에 몰입했다. 의상이 도착하고 분장팀과 헤어팀도 도착했다. 분장사는 마술 손이였다. 배역에 맞게 척척 꾸며 주었다.
10 리허설을 하려고 무대로 갔다. 빈 객석에서 연습하는데 잔뜩 긴장해서 덜덜 떨리고 발음이 꼬이며 머리속이 뒤죽박죽이 됐다. 평소 하던대로 실수 없이, 대사 잊어버리고 우물거리면 다음 사람이 바로 치고 나오라고 감독이 소리 소리 질렀다.
11 공연 시간이 됐고 무대로 나갔다. 오히려 리허설 때 보다 담담했다. 유독 대사를 못 외워 쩔쩔매던 배우도 정말 매끄럽게 잘 했고 연습때 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극이 끝나자 조명이 꺼지고 막이 내려졌다. 잠시 후 인사를 하러 무대에 나갔는데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해냈다는 성취감, 그 감동과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그때 객석에 세 사람이 눈에 띄었다. 부끄럽다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남편과 사위, 딸이 보였다. 무대 뒤에서 서로 잘했다고 자화자찬을 하고 있을 때 감독이 와서 최고라며 어디에 내 놓아도 좋은 연기 였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12 로비로 나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축하의 꽃다발을 건네고 시끌벅적했다. 딸이 웃으며 "엄마 잘 했어요 멋져요"하며 꽃다발을 전해 줬다. 또 다른 감동이었다.
13 새로 시작해서 얻은 경험은 모두 특별하겠지만 처음으로 해본 연극이 호평을 받았다. 다음 작품도 함께 해보자는 제의에 어떤 것들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면서 공감하고 아파하고 희망하면서 보낸 지난 6개월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