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이트에 대해서 누구 보다 잘 아시는 이명박 대통령이 무기 수입의 리베이트가 너무 많다고 줄여보라고 지시를 했단다.
통상 무기 구입의 리베이트는 3%라고 한다. 무기 거래의 이면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불어졌던 노드롭 항공사 로비 사건이란 것이 있었다.
다음은 2002 년 6월호 월간 중앙에 게제 되었던 기사이다.
노드롭 사장 탐 조운즈가 F-20 한국 판매 캠페인의 첫 인맥으로 선택한 사람은 지미 신(Jimmy Shin)이라는 하와이의 재미교포였다. 1960년대에 한 때 한국 해병대에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진 지미 신은 베트남 전이 한창일 때 사이공에서 나이트 클럽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운영하던 하와이 호놀룰루의 나이트 클럽이 불법 도박으로 임시 휴업을 하게 되자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던 참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노드롭 태평양 지역 판매 담당 부회장인 짐 돌시와 친분이 있었던 것이 노드롭과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지미 신 외에 F-20의 한국 인맥 로비에 등장하는 인물은 박북숙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하며, 한국의 범죄 조직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지미 신은 1983년 3월 노드롭에 정식으로 채용된다. 연봉 10만2천 달러와 가외 비용을 지급 받는 조건이었다. 지미 신을 통해 그의 코리언 커넥션과 연결이 되려는 의도였고, 결국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와 선이 닿게 되었다. ‘피스톨 박’으로 불렸던 박종규는 당시 서울에서 고급 사교장인 사파리 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 박종규는 박정희 때 2인자 소리를 들었던 인물인데다가, 1979년 박정희가 죽은 후에도 한국 기업과 정부 내에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88 올림픽 위원회 조직 책임을 맡고 있었다. 물론 전두환 대통령이 임명한 자리였다. 노드롭 입장에서는 ‘사람’을 제대로 고른 셈이다.
노드롭은 박종규를 일선에 내세우고,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지사 네트워크를 총동원, 수백만 달러짜리 비밀 로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고위층 인사는 박종규가 주로 상대했고, 중? 하급 정부 관리들은 지미 신이 담당했다.
박종규와 지미 신을 고용한 것은 노드롭으로서도 전에 없는 모험이었다. 1970년대 중반 스캔들에 얽힌 이후 새로 만들어진 ‘비합법적이거나 부당한 인물로 판단되는 해외 에이전트는 고용하지 않는다’는 사내 규정에 위반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내 이사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탐 조운즈는 개의치 않았다.
박종규는 실제 자기 소유이긴 하지만 처남 이민화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동양고속을 노드롭의 판매 대리회사로 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동양고속은 항공산업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으나 한국 내 판매 에이전트로 선정되었다. F-20 판매가 성사될 경우의 커미션은 무려 5천5백만 달러였다. 이 금액은 노드롭이 통상적으로 지불하는 해외 판매 커미션의 무려 10배였고, 1975년 물의를 빚었던 스캔들 때 해외 에이전트에 지불했던 총 금액의 2배나 되는 액수였다. 노드롭이 F-20의 한국 판매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는 이 커미션 액수만 봐도 알 수 있다.
판매 대리인 합의는 피스톨 박의 첫 번째 발걸음일 뿐이었다. 박종규는 노드롭의 서울 사무소장 웰코 가시크에게 판촉 비 5만 달러를 현금으로 요구했다. 판촉 비라는 명목은 물론 노드롭에게 생소한 것이었으나, 1984년 3월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이틀 동안 비밀 회동을 하면서 노드롭은 박종규에게 현금 5만 달러를 판촉비 명목으로 넘겨주었다. 지미 신, 짐 돌시 부회장, 웰코 가시크 서울 지사장 등이 모인 도쿄 회동에서 지미 신은 일본 나퐁기 사교 클럽 유흥비로 든 1인당 1천 달러의 비용까지 노드롭에 셈을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결국 이 비용은 박종규가 처리해주었다.
박종규는 노드롭에게 또 다른 요구를 했다. 아시아문화여행개발 그룹이라는 합자 회사에 노드롭이 6백25만 달러를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이 회사는 물론 박종규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운영하는 또 다른 회사였고 실제로는 호텔이었다. 노드롭에게 이른바 오프셋을 요구한 것이다. 오프셋 조건은 무기를 파는 회사가 무기를 사는 나라에 투자를 하거나 물건을 사주는 합의안으로 무기 거래에서는 하나의 관행으로 통용되던 커미션의 변종으로, 무기를 사는 나라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긴 했다.
호텔업에 투자한다는 것은 노드롭에게는 명분이 서질 않는 것이었으나, 박종규에게 지불될 커미션의 돈 세탁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 ‘투자’는 노드롭 이사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노드롭 이사진은 조운즈의 판매 전략에 불만이 많았고, 이사 회의에서 조목조목 한국 건을 물고늘어지면서 조운즈를 다구쳤으나, 조운즈는 폭풍을 피했다.
6백25만 달러의 오프셋 투자가 이사진 회의에서 부결되긴 했으나, 조운즈는 이미 6주 전 박종규에게 이 돈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이사진 회의에서 말하지 않았다. 이 돈은 한국이 아닌 홍콩 한 은행의 개인 구좌로 입금되었다. 예금주는 박종규의 친구인 밀리 킴이라는 여자였다.
조운즈는 이젠 ‘진짜 고객’을 만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박종규에게 ‘고객 면담’을 요구했다. 이 고객이야말로 F-20의 구입 여부를 최종 결정할 사람이었으며, 지금까지의 모든 투자는 이 고객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면담이 성사되기 직전인 1984년 10월,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졌다. 수원 공군 기지에서 있었던 F-20의 시험 비행에서 F-20이 추락하고 만 것이다. 한국은 당시 F-20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피스톨 박이 시험 비행을 주선했다. 한국 정부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황금의 기회였다. 그러나 F-20이 시범 비행 도중 땅바닥에 처박히고 만 것이다. 노드롭과 피스톨 박은 기체 결함이 아닌 조종사 과실로 밀어붙였으나 이미 생긴 흠집은 어쩔 수가 없었다.
노드롭도 노드롭이지만 더 애가 탄 사람은 피스톨 박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고, 관련 고위급 인사들을 상대로 한 은밀하고 강압적인 로비가 본격화되었다. 1984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박종규와 지미 신이 한국 고위층 인사들을 ‘녹이는 데’ 들인 유흥비는 한 달에 9만 달러, 한화로 1억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탐 조운즈와 전두환의 비밀 회동은 F-20 추락 사건이 일어난 지 7개월 후인 1985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의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두 사람이 투숙한 호텔은 서로 다른 호텔이었고, 회동은 30여분 간이었다. 지미 신의 주장에 따르면 조운즈는 F-20 도입을 승인하는 대가로 전두환에게 8백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했다. (전두환 개입설은 노태우 및 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전모가 밝혀진 바 없다.)
조운즈는 하와이 회동이 성공적이라고 확신했다. 피스톨 박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음은 물론이고, 하와이 비밀 회동을 전후해 노드롭은 방카보로라는 박종규의 홍콩 소재 무역 회사에 90만 달러를 투자하는 등 마무리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노드롭 이사진도 F-20의 한국 판매를 낙관적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노드롭의 F-20 한국 판매는 조운즈와 전두환의 하와이 회동 2개월 후인 1985년 7월 결정적인 악재를 연거푸 만난다. 파리 에어쇼의 시범 비행을 위해 날아가던 F-20기가 카나다 라브라도에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추락 사고가 있은 지 5개월만인 그 해 12월 박종규가 간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노드롭 지사를 통해 구축되었던 정교한 한국 로비의 ‘작품’이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전설적인 무기 판매상 조운즈가 기사 회생을 꾀했으나 피스톨 박의 죽음은 조운즈에게는 결정타였다.
경쟁사인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F-16 36대를 팔기로 계약이 성사됨으로써, 노드롭은 1986년 중반에 F-20 타이거샥의 한국 판매 계획을 취소하고 만다. 노드롭의 악재는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인을 통한 불법 로비의 후유증이 노드롭을 기다리고 있었다. F-20 로비에 관련됐던 이민화, 지미 신 등 한국인 인맥들이 이른바 거액의 ‘입막음 돈’을 요구하고 나섰고, 노드롭은 결국 동양고속에 150만 달러를 지불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노드롭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노드롭은 이민화 등을 상대로 호텔 투자에 대한 보상비 6백25만 달러를 변제해달라는 법정 소송을 제기했으나, 이는 노드롭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한 제스추어였을 뿐이다.
나는 문제가 있으면 피하지 않고 부딪히는 위험한 성격을 가졌다.
그런 까닭에 살면서 때로는 알고 때로는 모르고도 위험한 일에 관여 되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너무나 위험했던 일들이었다.
이 엄청난 사건 속에서 내 역할은 이 사건에서 핵심 인물인 지미 신과의 관계에서 벌어졌다. 86년 말 당시 나는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아 김대중 씨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미국으로 도피를 가서 하와이에 머물러 있었다. (관련 글 ' 길거리 목사의 삶' 59 번 참조)
동생이 하와이에서 ‘장터’ 라는 레스토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드나드는 한국의 건달들은 장터를 중간 연락처로 삼았다. 당시 해병대 출신의 매제는 지미 신의 참모 노릇을 하고 있었고 지미 신은 매일 장터에 들러 매제와 사건을 모의 했다.
물론 신이 자기 보다 급수가 한 참 아래인 매제에게 고급 정보를 주었을 리가 없고 행동대원 정도로 부려먹고 있는 정도였을 것이다. 처음에 매제가 이 사건에 개입된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이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을 많이 했다. 나를 어렵게 초청해 준 동생 내외를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뇌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나 자신을 바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전기를 마련할 가능성이 있는 정보를 접하고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는 청년들과 오하우 섬을 한바퀴 돌다가 끝없이 펼쳐진 사탕 수수 밭을 지나게 되었다.안내를 하는 사람이 '옛날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로 일하던 우리 조상들이 하루 1불 씩 받는 임금에서 1 센트. 2 센트씩 모아서 임시 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가슴이 메어지면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나는 장터에서 일을 하면서 지미 신과 인사도 하고 지내면서 촉각을 곤두세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도로 그들의 모의의 내용을 수집했다. 그리고 내가 수집한 정보를 인편을 통해 비밀리에 동교동에는 남궁진 비서실 차장에게 상도동에는 최기선 비서실 차장에게 전해주었다. 나로서는 동교동 쪽에 더 가까웠지만 상도동에도 정보를 준 것은 동교동에서 혹시 무시하고 넘어갈지도 몰라서였다. 가슴을 졸이면서 매일 한국에서 오는 신문을 기다렸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양 김씨 중 하나가 한국에서 폭로를 시작하면 나는 곧 바로 미 본토 어딘가로 도망을 갈 계획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대의를 위해서 동생 부부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각오를 했었다.
그런 큰 정보를 비서진이 양 김씨에게 보고를 안 할 수가 없었겠지만 설령 보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상황은 야당의 힘으로 그런 사실을 폭로하고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5공의 탄압아래 그들 자신 생존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렇게 무서운 때였다.
결국 그 사건은 1988년 5월 19일, 미국 유력 경제신문 <월 스트리트 저널>이 '노드롭 스캔들(Northrop Scandal)'을 폭로 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노드롭 사건'은 한국판 록히드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5공 비리 특별수사본부는 이민하가 노드롭사로부터 350만 달러를 받아 유용했다는 사실까지는 밝혀냈지만, 더 이상 수사에는 진전이 없었다.
또 이미 박종규가 1985년 12월에 사망했었기 때문에 나머지 돈의 행방이나 사건의 진상은 오늘날까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만일 그 때 그 사건이 폭로 되었다면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추적이 되었을 것이고 자연히 내 존재가 드러났을 터이고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영삼, 대중 두 분이 형편이 여의치 않아 폭로를 하지 못한 것이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휴~
그나마 지금이라도 이런 글을 공개 할 수 있는 것은 양아치 세계의 공식대로 지미 신이 그 후 이민화로부터 돈을 뜯어낸 후 몇 년 동안 온갖 굳은 심부름을 한 매제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아서 지미 신과 찢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공개해도 더 이상 매제와 의리를 상할 일이 없어졌기 까닭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말로는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여기서 글로는 밝힐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많다. 왜냐하면 박종규도, 지미 신도 죽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인간들이 있음으로.
각설하고 의롭게 산다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기는 어렵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것도 끝임 없는 훈련으로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로부터 이런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라고는 전도 훈련 밖에 모르는 한국교회에서는 전혀 시키지 않는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