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약전은 대구 달서구청이 2023년 8월 31일 펴낸 《이야기 따라 걷는 달서구 근대역사문화 탐방》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이 책은 상화 기념관 ‧ 이장가문화관이 기획했습니다. * 내용은 정만진 장편소설 <일장기를 지워라>를 요약한 줄거리입니다.
일장기를 지워라 - 현진건 약전
현진건은 10세에 생모를 여의었는데, 아버지가 재혼하는 바람에 막내형수 윤덕경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그렇게 되기 전에도 가족 중에서 현진건의 애틋한 대화 상대가 되어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현진건이 10세 때 벌써 쉰이나 되어 세대 차이가 너무 심했고, 형제도 넷이나 되었지만 스무 살과 열여섯 살 연상인 첫째와 둘째형은 형이라기보다는 아버지뻘인데다 대구에 오는 일도 거의 없어서 형제의 우애를 느낄 겨를마저 생기지 않았다.
가족 중 대화 상대는 비록 8세이나 위이기는 해도 막내형 정건뿐이었다. 그런데 정건은 아버지의 강요로 혼례를 치르고는 식이 끝나자마자 사흘 뒤 중국으로 망명해 버렸다. 명분은 독립운동과 유학이었지만 첫사랑인 ‘사상 기생’ 계옥과의 자유연애를 반대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그 바람에 현진건은 더욱 외로워졌는데, 불과 석 달 뒤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현진건은 사실상 외톨이가 되었다.
현진건은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세이죠오 중학에 유학하면서 당시 유행 사상 ‘노라이즘’에 감화된다. 막내형과 계옥 탓에 불우하게 살아가고 있는 막내형수 윤덕경에 대한 진건의 애틋함은 더해가고, 스스로 느끼는 외로움도 점점 짙어만 간다.
진건은 방학 중 대구에 머무를 때 이상정, 이상화, 백기만 등과 함께 습작 동인지 <거화>를 발간하기도 하지만, 그런 정도로는 마음 안에 짙게 드리워진 고독한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 현영운이 진건에게 유학을 권해오고, 그는 상해 유학을 떠난다. 형수 문제 해결에 한몫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1년 만에 유학은 중단된다. 자식이 없던 당숙 현보운이 그를 양자로 지명한 탓이다. 결국 형과 계옥 사이를 단절하지도 못하고, 형과 형수 사이를 개선하지도 못한 채 귀국한다. 그 이후 현진건은 문학운동으로 독립에 기여하기로 결심한다.
그 사이 3 ‧ 1운동과 관련해 서울에 파견되었던 현정건은 종전보다 더욱 ‘사상 기생’으로 성장한 계옥을 만나 다시 사랑을 확인하고, 몇 달 뒤 계옥은 자신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려 드는 진건이 없는 상해로 망명한다. 가는 도중에 계옥은 ‘제2의 배정자’로 몰려 곤욕을 겪는다.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으로 소문난 배정자가 정건·진건 형제의 삼촌 현영운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옥은 오해를 극복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맹활약을 펼친다. 그에 비해 현진건은 형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시대가 여성을 불행하게 한다는 주제를 담은 단편 〈희생화〉를 1920년 11월 발표하지만 본래 목적에 비춰서도, 문학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한다.
절치부심한 현진건은 1921년 1월 〈빈처〉를 발표해 문단의 총아로 우뚝 선다. 고향 문우들인 이상화와 백기만 등은 물론이고 기존 문단과 일반문학 애호가들의 찬사가 쏟아진다. 첫 소설 〈희생화〉 발표 불과 두 달 뒤에, 겨우 21세에 지나지 않는 나이로 〈빈처〉를 발표했으니 “기교의 천재(김동인)”라느니 “한국의 모파상(장덕순)” 등의 격찬을 들을 만도 한 일이었다.
세 번째 발표작 〈술 권하는 사회〉도 현진건의 문단 권위를 드높이는 데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행동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소시민성 비판에 주제를 둔 듯하면서도 당대 조선 사람인의 울분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한 〈술 권하는 사회〉는 대단한 화제작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술집에 모여 “사회란 것이 무엇인데 우리에게 술을 권한단 말인가?”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항의를 표시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네 번째 소설 〈타락자〉는 지식인의 타락상을 묘사한 작자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의 항의에 직면했다. 작품을 실은 《개벽》사에는 전화와 서한이 쇄도했다. 주인공과 작자를 동일시한 독자들의 적극적인 항의 움직임이었다.
이미 여러 편 지식인소설을 쓰기도 했을 뿐더러, 〈타락자〉 소동으로 깨달은 바도 있어 현진건은 작품 경향에 환골탈태의 변화를 시도했다. 일제의 혹독한 수탈에 시달리는 조선인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비인간적 속성을 고발하고, 우리 민족의 궐기를 비유적으로 추동하는 작품들을 창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운수 좋은 날〉 등의 단편으로 현진건은 재차 확고한 문단 위치를 정립한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집필한 독립지사 제재 장편 〈해 뜨는 지평선〉의 연재 중단 등을 겪으면서 문학운동에 깊은 좌절을 느끼고 2년 이상 붓을 꺾는다.
그 와중에 동아일보에 ‘계옥 전기’가 연재된다. 연재 기사는 현계옥을 ‘현어풍(현정건을 암시하는 가명)의 아내’로 소개한다. 엄연히 부인 윤덕경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보도가 나간 것이다. 당시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다. 그는 형수 윤덕경에게 얼굴을 들 수 없게 된다.
파란만장한 시간이 흐른 뒤, 윤덕경은 20년 만에 남편 현정건과 재회한다. 장개석이 국공 합작을 파기하자 프랑스는 일제 경찰이 법조계 안으로 들어와 한국 독립지사들을 검거하는 데에 협조했다. 현정건도 이때 피체되었다가 4년 3개월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은 반 년에 지나지 않는다. 고문과 투옥 후유증으로 현정건이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까닭이다. 윤덕경은 남편 사후 41일째 시동생 현진건에게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현정건 사후 삶의 의욕을 잃은 계옥은 행방을 감춘다. 현진건은 〈해 뜨는 지평선〉을 개작한 장편 〈적도〉에 독립운동가의 삶을 담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 변절에 짓눌린 마음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시 장기 절필에 들어간다.
이때 손기정이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한다. 현진건은 다른 기자들과 협의해 ‘일장기 말소 의거’를 일으킨다. 그는 소설이 아니라 몸으로 일제에 직접 맞서면서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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