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칠도(正反七刀)
천진표행(天津票行) 접객소(接客所).
혈도 마운(血刀馬雲)은 오랜만에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장도(長刀)를 들고 그것으로 수염을 깎고 있었다.
금적산 노인이 사라진 지는 벌써 이틀째였다.
금적산은 워낙 흉물스럽고 비밀스러운 사람인지라 그가 사라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없는 상태였다.
사각… 사각…….
혈도가 그어지며 검은 수염이 끊어졌다.
날(刃), 그것은 강철마저 벤다. 하지만 혈도 마운의 수염은 잘 잘라지지 않았다.
"제기랄, 질기기도 하군!"
그는 철포금강공(鐵袍金剛功)으로 몸을 강철보다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그 덕에 모발마저 천잠사(天蠶絲)처럼 질기게 된 것이다.
외공(外功)에 있어서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은 흑강(黑剛)이라 했다.
절대마가의 가신(家臣)이었던 흑강.
그의 피부는 어찌나 외공으로 단련이 되었는지 강철보다 강하고 교룡피보다 질기다고 했다.
만년한철로 만든 도끼로 손을 내리찍어도 손에서 피를 흘리지 않으며 오히려 도끼가 끊어진다던가.
혈도 마운의 외공은 흑강을 제외한 누구보다도 강한 듯했다.
그가 일개 표행의 호법으로 있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턱 아래 수염이 칼날에 의해 끊어져 나갔다.
혈도 마운은 체격이 극히 장대한 사람이었다. 늘 피비린내가 나는 가죽옷을 걸치고, 목에는 칭칭 쇠사슬을 동여맨 채 굴 속에서 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완전히 시체의 눈빛이었다.
사각… 사각…….
"제기랄, 해를 보지 못했더니 모발만 길게 자라는군!"
혈도 마운은 툴툴거리며 칼을 아래턱에서 떼어냈다.
"죽은 마누라만 있었다면 그래도 늘 멋을 부렸을 텐데… 클클, 그년이 육십 나이에 바람을 피다가 내 손에 죽은 후로는… 나는 멋을 부릴 마음을 버리고 말았지!"
그는 중얼거리며 장도를 내려다봤다.
장도의 검신에는 그의 얼굴이 투영(透影)된다. 맑은 호수에 하늘 위, 구름이 담기듯이…….
놀라운 것은 장도의 날(刃)이 거치도(矩齒刀)의 날처럼 울퉁불퉁해졌다는 사실이다.
"좋은데?"
혈도 마운은 칼에 제 얼굴을 비춰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가 웃다니…….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들었다면 믿지 못할 것이다.
백무엽이 들어선 시기는 그가 막 면도를 끝낸 직후였다.
'늘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오늘처럼 저 사람이 기이하게 여겨지기도 처음이다. 마치… 저 사람 자체가 하나의 칼인 양 느껴진다.'
백무엽은 철책 쪽으로 더 다가갔다.
혈도 마운과의 거리는 삼 장(丈), 그리고 금적산 노인이 앉아 있던 나무의자는 텅 빈 채였다.
서탁(書卓) 위에는 말라 죽은 황국화(黃菊花) 한 송이, 퉁기다가 만 수판(數板)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적산 노인, 그에 대해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백무엽은 놀랍게도 지난 일을 잊고 있었다. 그는 인문이 자신을 두 번에 걸쳐 시험했다는 사실도 망각했다.
기실, 그의 이틀 간 기억은 무(無)였다. 지난 이틀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눈이 대지(大地)를 덮듯이, 인문 사람들이 시전한 제혼대법(制魂大法)은 그의 이틀 간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렸다.
백무엽은 텁텁한 공기를 마시며 철책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심심한데……."
혈도 마운이 갑자기 하품을 했다. 그의 입은 주먹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백무엽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띄우며 혈도 마운을 바라봤다.
"마선생(馬先生), 금노인은 어디 갔소?"
"금노인? 큿큿……!"
혈도는 처음으로 눈길을 백무엽에게 돌렸다.
야수(野獸) 같은 눈길이다. 늘 봐도 그의 눈길은 무자비하고 잔혹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무자비한 눈길 가운데는 아주 묘한 정감(情感)이 담겨 있었다.
"떠났다!"
그는 간단히 끊어 말했다.
"떠나다니요?"
"떠났다는 것은… 걸어서 이 곳을 나갔다는 말이다. 봐라! 이 곳은 노새나 말이 들어오기에는 좁은 곳이 아니냐?"
"흠, 떠나다니……!"
백무엽은 조금 당황하게 되었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
백무엽은 텅 빈 의자를 힐끔 보다가 다시 혈도를 바라봤다.
"그럼 탁송물을 찾는 일은 누가 하오, 마선생!"
"클클… 여기 계신 마나으리가 한다!"
"마선생이?"
"그렇다."
"그럼 지난 아침쯤 내게 온 탁송물을 보지 못했소, 마선생?"
"봤다, 저것이다. 네게 온 것은."
혈도는 턱 끝을 천천히 든다. 그는 턱 끝으로 제 몸 곁에 있는 석탁(石卓) 하나를 가리켰다.
그 위, 보따리가 하나 있고 곁에 화병(花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화병에는 막 피어나는 혈잠화(血簪花)가 꽂혀 있었다.
보따리 위.
<천진부(天津府) 서생(書生) 백무엽전(白武葉前).>
그러한 글이 난필(亂筆)로 적혀 있었다.
'저것이다. 저게 내게 온 것이다.'
백무엽은 숨을 가볍게 참으며 힐끔 혈도를 바라봤다.
"그것을 내게 주시오."
"네게 온 것이니, 네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 한데, 그 물건을 네게 주는 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혈도는 다시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이도 출신도 밝혀지지 않은 괴이한 고수.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살기(殺氣)는 백무엽같이 노련한 자객(刺客)이라도 추측하지 못할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의 문제라니?"
백무엽이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대금이 후불(後拂)이란다. 다시 말해서… 클클, 내게 보내지는 물건은 표행비를 내지 않은 물건이라는 말이다!"
"그럴 리가? 늘 선금(先金)을 내고 부쳤는데……."
"클클, 나는 과거는 모르는 사람이다. 내게는 지금이 중요하다!"
"흠, 그럼 나더러 선금을 내란 말이오? 지금?"
"그렇다. 아니, 네가 낸다기보다 내가 받아 낸다고 해야겠지?"
낸다는 것과 받아 낸다는 것!
하나는 부드러운 말이고, 하나는 강한 말이다.
'받아 낸다고?'
백무엽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은자(銀子)로 이십칠 냥(兩)이다. 본시 삼십오 냥(兩)은 받아야 하는데, 최근 표행끼리의 경쟁이 심해져서 비용이 내린 것이다. 하여간… 스물일곱 냥을 네게서 받아 내야 한다!"
"이십칠 냥이라면 내게도 있소."
백무엽은 손을 옷 속에 넣었다. 그가 품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려 할 때였다.
"쯧쯧, 내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내가 네게서 받아 내는 것이라고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혈도 마운의 눈빛이 갑자기 강해졌다.
핏빛 번개!
그의 두 눈에서는 핏빛이 쏟아져 나왔다.
목에 쇠사슬을 칭칭 매고, 전신에 피비린내 나는 가죽 피풍의(避風衣)를 휘감은 괴인 혈도.
그의 입가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잘 봐라! 내가 은자 받아 내는 솜씨를!"
그는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을 띠며 돌연 우수(右手)를 들었다.
삼 척 도(三尺刃)가 수직으로 쳐들렸다.
츠으으으- 읏-!
느린 동작인데, 그것을 보는 백무엽의 눈빛이 이상했다.
'살기(殺氣)다. 나를 베려 한다.'
백무엽은 반 무의식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혈도의 장도(長刃)는 그가 대처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미간(眉間)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아아, 이미 늦었다. 나는… 베어졌다.'
하나의 점(點), 혈도의 칼은 정확히 하나의 칼을 이루었다.
"점이 흐르면… 선(線)이 되고……!"
혈도는 중얼거리며 장도를 슬쩍 튼다.
츠읏-!
혈류(血流)가 뿌옇게 피어나더니, 백무엽의 양쪽 관자놀이에 붙어 있던 옥관자(玉冠子)가 일순 허공으로 퉁겨 올랐다.
팟- 파팟-!
"한 냥, 두 냥……!"
옥관자가 떨어질 때, 혈도의 칼은 백무엽의 복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혈도의 칼날이 묘한 궤적을 그으며 다가왔다.
느릿해 보이지만, 느끼는 순간 더할 수 없이 빠르게 느껴지는 혈도의 궤적!
"선(線)이 돌면 원(圓)이 된다!"
점과 점이 이어지며 선으로 연결되었고, 무수한 선은 돌연 거대한 원으로 화한다.
'기(氣)의 검(劍)이다. 최고의 도초(刀招)다.'
백무엽은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보라! 그의 피부 위가 도막(刀幕)에 젖지 않는가?
혈도는 손목을 조금씩 움직여 하나의 광오한 도초를 시전해 내고 있었다.
츠으- 읏-!
그가 손목을 퉁길 때마다 혈류(血流)의 길이가 달라졌다.
도는 강한 무기이다. 때문에 그것을 부드럽게 시전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하물며 도에서 뿜어지는 도기를 유수(流水)처럼 능수능란하게 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가장 빠른 것은 사막(死莫)의 쾌도(快刀),
가장 강한 것은 뇌정마도(雷霆魔刀),
가장 변화로운 것은 환광구류도(幻光九流刀),
가장 느린 것은 함지충허(咸池庶虛),
그리고 가장 부드럽고 가장 살기 짙은 것은 일백팔로(一百八路) 혈마신도(血魔神刀) 중의 정반칠도(正反七刀)이다!
도를 아는 사람은 그러한 노래를 안다.
그것은 천하오도식(天下五刀式)을 설파하고 있다.
지금 백무엽 주위에 피어나는 도화(刀花)는 그런 노래의 한 구절을 연상하게 했다.
보라!
"열다섯 냥… 열일곱……!"
한 송이의 혈잠화(血簪花)가 화사하게 피어나듯 혈무(血霧)가 피어 오르고, 혈무 가운데 피비(血雨)가 내리는 듯 도우(刀雨)가 퍼부어지는 광경을!
팟- 팟- 파팟-!
혈도 마운의 도무(刀舞)는 극에 돌입했다.
그리고 옥관자(玉冠子) 두 개, 요대 하나, 호주머니 속에 있던 잡물(雜物) 몇 가지.
투둑- 툭-!
백무엽의 몸에서는 값나가는 물건들이 쉬지 않고 떼어지고 있었다.
백무엽은 석상(石像)이 되어 있었다. 삼엄한 도기가 그의 전신을 유린하고 있는데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무엽의 두 눈은 도의 현란한 원호를 따라 움직였고, 도광이 강렬해짐에 따라 그의 눈에서 뿜어지는 자홍광(紫紅光) 또한 강해질 뿐이었다.
'이것은 정반칠도식(正反七刀式)이다.'
백무엽은 숨도 쉬지 못할 중압감을 느꼈다.
칼빛은 벽(壁)이 되어 그를 포박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의 피부는 장도에 절단되고 말리라.
움직이지 않아야만 장도를 맞지 않는다.
허공에 가득 피어나는 현란한 피꽃(血花), 백무엽의 몸 주위에서는 수천 송이의 피꽃이 피어났다.
"되었다! 클클, 이제 돈을 다 받아 낸 듯하구나."
혈도 마운은 잇따라 열다섯 번 똑같은 도초를 시전해 내고는 천령개(天靈蓋) 위에서 연기를 뿌옇게 피워 올렸다.
"힘드는데? 내공이 딸리는 상태에서 도초를 시전했더니!"
그의 손은 딱 멈춰졌다. 지금 그는 하나의 도결(刀訣)을 보여 주고 있었다.
"클클… 중요한 것은 숙련이지. 사실 별것도 아니야. 사람을 죽이는 데에 중요한 것은 안(眼)과 수(手)와 호흡(呼吸)이지. 크크, 물론 너도 잘 알 것이다!"
혈도는 지금에서야 살기를 거두었다.
그는 천천히 등을 벽에 기대었다.
장도는 비스듬히 늘어뜨려졌고, 화광(火光)으로 인해 혈도 마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백무엽은 아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랬었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제야 그것을 안 것이다.'
백무엽은 지금에서야 혈도 마운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인문제팔좌(忍門第八座) 혈잠령(血簪令).
수년 전만 해도 인문에서 가장 활약이 큰 자객이었다.
그는 수천 명의 마혼첩(魔魂諜)을 죽인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마혼십가의 추살(追殺)을 받다가 협공을 당해 크게 다쳤고, 그 이후에는 활약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백무엽이 나타나기 이전 인문을 강호에 소문 낸 사람.
그가 바로 인문제팔좌 혈잠령이고, 현재의 혈도 마운이었다.
"……!"
"……!"
혈도도 백무엽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생각은 서로 통하고 있었다.
백무엽은 끝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입술을 떼었다.
"이십칠 냥(兩)은 되겠소?"
그는 땅 아래 수북이 쌓인 물건들을 가리켰다.
"글쎄!"
혈도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머리는 땀에 비 맞은 듯 젖었다.
"계산이 잘못되어 이십칠 냥이 아니라, 이십팔 냥(兩) 어치가 떼어진 듯하다. 흠, 그 중 하나를 네가 도로 회수하면 된다!"
"무엇을?"
"허리띠! 클클, 그것을 도로 갖고 가면 계산이 정확해진다!"
"흠……!"
"클클… 잘 기억하라! 너는 이십칠 냥 어치의 도식(刀式)을 얻어야 하는데, 운좋게도 이십팔 냥 어치의 도식을 배웠다. 클클, 곰곰이 생각하면 그 말의 뜻을 알 것이다. 클클……!"
그는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알고 있소!"
"안다고?"
"그렇소. 그대는 내게 정반칠식(正反七式)과 함지충허도(咸池庶虛刀) 이십 식(二十式)을 전했고, 최후로 내게 환광구류도(幻光九流刀)의 정화(精華)를 모은 장광일도(長光一刀)를 전했소!"
정반칠식(正反七式),
함지충허도(咸池庶虛刀),
장광일식(長光一式).
세 가지 이름이 나오자, 혈도의 얼굴이 시꺼매졌다.
'이 녀석은 누구일까? 아아, 저 흐릿한 눈빛은 천하의 모든 비밀을 꿰뚫어본다. 이십팔 식 중 칠 식 정도만 알아봤다고 여겼는데, 이십팔 식을 모두 다 알아봤다.'
혈도는 넋을 잃고 말았다.
'용 중 용(龍中龍), 천 중 천(天中天)이 될 녀석이다!'
백무엽의 자질은 그의 상상을 세 배 능가했다.
가히 문일지백(聞一知百).
하나를 들으면 백 가지를 깨우치는 기재 중의 기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너는 검사(劍士)였을 것이다!"
혈도는 손을 쳐들었다.
장도(長刀)가 쳐들렸고, 혈잠화(血簪花) 곁에 있던 보따리가 장도 끝에 걸쳐서 철책 뒤쪽으로 옮겨졌다.
백무엽은 태연자약히 그것을 건네 받았다.
"글쎄,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소!"
그는 보따리는 받았고, 혈도는 땀을 흘리며 득의한 웃음을 흘렸다.
"클클… 잘된 일이로군."
"훗훗… 마선생(馬先生)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백무엽은 떠나기 이전,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긴, 네 말도 맞다. 네 말도! 사람에게는 한 가지 정도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겠지."
혈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엽은 느릿느릿 신형을 돌린 후 걸음을 내딛었다.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와락 설풍(雪風)이 실내로 들어섰다.
폭설(暴雪)이 쏟아져 내리는 천진의 하늘은 지극히 어두웠다.
"문 빨리 닫고 가라! 바람이 들어오면 추우니까!"
"훗훗… 또 봅시다!"
"제기랄!"
* * *
백무엽은 송림(松林)에 들어가서 보따리를 풀었다.
늘 가던 운화다루(雲華茶樓)까지 가서 보따리를 풀기에는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보따리는 풀리는 것이 아니라 찢어졌고, 그 안에서 하나의 봉서(封書)와 세 권의 양피지 비급(羊皮紙秘給)이 나타났다.
혈마방비전(血魔幇秘傳) 일백팔로(一百八路) 혈마신도경전(血魔神刀經典).
첫 번째 책은 이십여 년 전 마혼십가에 무너진 마도의 대방파 혈마방의 진산비급이었다.
혈마방(血魔幇).
혈마도성(血魔刀聖) 천마성(天魔星)이 이끌던 방파이다.
그들은 고금에서 가장 강한 일백 개 방파 안에 꼽혔었다.
마혼십가는 그들을 무너뜨림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일반 마도계와는 격이 다른 천년마교(千年魔敎)의 후예라는 것을 온 천하에 밝혔다.
단 한 명의 후예도 남기지 못했다고 알려진 혈마방의 비급이 백무엽에게 전해진 것이다.
함지마도부(咸池魔刀符).
전설적인 방파인 함지마루(咸池魔樓)의 진산절학이다.
함지마루는 등격리(騰格里)에서 나타나 천하를 노렸던 방파였다.
백 년 전, 그들은 변황(邊荒)을 얻은 하나의 조직에 의해 지리멸렬되었다.
사천황궁(邪天皇宮), 현재까지도 변황의 하늘을 지배하는 사천황궁은 닷새 만에 함지마루를 격파하며 이름을 떨쳤던 것이다.
함지마루의 경전인 함지마도부에는 함지충허도식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경전은 신투 야유향(夜遊香)의 사부인 야래향(夜來香)에 의해 변황에서 중원(中原)으로 흘러들었다.
장광절대도경(長光絶代刀經).
동영(東瀛)에서 일어난 장광류(長光流). 그들은 화접(火蝶)이라는 전설적인 인자(忍者)가 이끄는 사막에 의해 무너졌다.
장광류는 완전 절전되었다고 소문났다. 그런데 그들의 경전이 백무엽에게 입수된 것이다.
봉서(封書)가 희고 갸름한 손에 의해 뜯어졌다.
그 안, 늘 그렇듯이 차가운 투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화령(無花令), 특급사(特級事)이다! 그러니 회림(廻林)하지 말고 다음 지시를 일사불란하게 처리하라!
첫째, 표행에서 제팔좌가 시전해 보인 도초를 비급의 기초삼아 완전 터득하라!
둘째, 모든 흔적을 태운 후 천야농원(天野農園)에 가라! 거기 가면 또 하나의 절기를 얻게 될 것이다.
셋째, 곧 제이좌(第二座) 천일홍(千日紅)과 제삼좌(第三座) 위화령(葦花令), 제사좌(第四座) 설매령(雪梅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에게 절대 복종하라. 제일좌인 본좌는 그 후 만나게 될 것이다.
곧 너는 정식 입문(入門)될 것이고, 가장 중요한 일에 동참하게 된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너는 지금보다 두 배는 더 강해져야 한다.
제일좌(第一座) 두견령(杜鵑令)>
제일좌! 그가 봉서를 보낸 장본인이었다.
'인문은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들은… 늘 나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았던 것이다.'
백무엽은 힐끔 허공을 봤다.
지금 연(鳶)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연이 줄에서 떨어져 나가던 광경은 아직껏 잊혀지지 않았다.
* * *
<마화삼(魔花衫) 제일친명(第一親命)!
십가(十家)의 장로 이상(以上) 고수는 모두 이 명에 따라 행동을 일통해야 함!
이 명령은 마화일령(魔花一令)이라 칭해질 것이며, 마화일령은 백도장악(白道掌握)의 초석이 될 것임!>
<마화일령(魔花一令) 제일부령(第一副令).
사사관(四死關)을 준비, 죽음의 연회를 화려하게 준비!>
<마화일령, 제이부령.
사사관마다 일백 무정위사(一百無情衛士) 배치할 것.>
<마화일령, 제삼부령.
무정위사 일 인(人)은 각기 백 마(魔)를 이끔.>
<마화일령, 제사부령.
각인(各人)은 최고로 무장할 것. 암기화탄(暗器火彈)을 충분히 마련하라는 뜻임!>
<마화일령의 총책임자는 제이외단주(第二外壇主)임.
이 일을 실패로 돌리는 자는 척살(擲殺)될 것이며, 여타한 모든 일에 앞서 이 일은 우선되어야 할 것임!
이 명령이 완수되기 이전, 이 명령에 대한 것은 완전 비밀이 될 것이며, 만에 하나 장로급 아래 제자로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시에는 이 일은 즉각 취소될 것임.>
글은 암호(暗號)에 따라 적혔다.
글을 적는 손은 아주 아름다웠다.
반짝거리는 두 눈을 가진 여인,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글을 적고 있었다.
'나는 꼭 마화삼(魔花衫)의 첩(妾)이 된다. 호호! 비밀 속의 옥화삼(玉花衫)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나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여인이 될 것이다.'
눈은 회심의 빛을 흘린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나는 능력을 인정받을 것이고, 그분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이다.'
웃는 여인, 그녀는 아름답지 못했다.
웃는 여인은 아름다운 법인데, 그녀의 두 눈에서 흐르는 빛이 너무도 음산한 탓에 아름답기보다는 역겨워 보였다.
글이 거듭되고, 짙은 묵향(墨香)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여인의 입가에 드리워지는 사악한 웃음과 함께.
"호호… 백도인들은 지금이 태평성대라 여기고 자만하고 있다. 필경, 걸리고 말리라. 놈들은 너무 방만하다! 그렇지만 조심해야만 한다. 그들 인(忍)을! 황금을 바라고 하는 청부자객(請負刺客)이 아니라, 대의(大義)를 바라고 하는 광오한 자객들! 정말 미친 놈들!"
첩지는 완성되었다. 첩지는 비밀스런 수단을 통해 모처로 전달될 것이고, 개봉되는 순간 그 안에 적힌 대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 * *
천야농원(天野農園).
그 곳은 대설(大雪) 가운데도 천자만홍(千紫萬紅)을 피워냈다.
주단을 넓게 펼친 듯한 꽃밭, 사람들은 천야농원에 꽃이 사계(四界)에 걸쳐 늘 피어나는 이유를 지하열천(地下熱泉)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꼭 지하열천 때문에 천자만홍이 사계 내내 피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타인이 상상도 하지 못할 오묘한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손(手)의 비밀이었다.
흙이 묻은 손이다.
두엄 내음이 나고, 주름살이 덮인 늙은이의 손.
그 손은 지금 장죽을 쥐고 있었다. 또 한 손에는 자루가 꽤 긴 검은색 호미가 늘상 쥐어져 있었다.
눈(雪), 천야농부(天野農夫)의 머리 위에 눈발이 퍼부어졌다.
천야농원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 대지(大地)의 온기(溫氣) 때문에 눈은 떨어지는 대로 녹고 마는 것이다.
저벅- 저벅-!
백무엽이 죽책에 달린 사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 곳을 지나쳐 가기는 여러 번이나, 정식으로 이 안으로 들어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백무엽은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부동(不動)의 단련을 받았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해지는 훈련이고, 인간의 모든 고통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객의 훈련이 그것이다.
그러나 호기심이라는 일편심(一片心)만은 지옥의 무정(無情)한 훈련과, 천 일에 걸친 자객 노릇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온통 꽃이다. 가히 세외선경(世外仙景),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천야농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옷섶이 화향(花香)에 젖었다.
농원은 늘 봄(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야농부(天野農夫)를 장춘옹(長春翁)이라고 불렀다.
투박한 손을 가진 노인. 언제나 말이 없어 벙어리로 불려지고, 늘 죽립으로 얼굴을 다 가리고 호미질만 하며, 조화로운 손으로 천자만홍을 피워 내는 노인은 백무엽이 오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가 호미질을 하지 않는 것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입에 장죽을 물고 흐릿한 눈길을 흘리며 허름한 베옷(麻衣) 어깨 위, 소담스러운 눈을 맞은 채 장춘옹은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백무엽이 다가서는 것을 바라봤다.
저벅-!
백무엽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였다.
돌연, 들려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보행(步行)이 잘못되었다. 봐라, 너의 걸음에는 살기(殺氣)가 숨어 있어 저 무심화(無心花)가 마르지 않느냐?"
아아, 이럴 수가……?
천야농부 장춘옹이 말을 하다니?
그는 벙어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의 목소리는 아주 온화하고 자상했다.
"제 걸음걸이요? 무심화(無心花)요?"
백무엽은 멈칫하고 말았다.
그와 장춘옹 사이, 눈발에 흔들리고 있는 일엽화(一葉花)가 하나 있었다.
핏빛의 꽃!
거미줄같이 가는 자색 줄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한 송이 혈화(血花)는 지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심화(無心花).
대지(大地)의 기운(氣運)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신화(神花)이다.
월광(月光)에도 떨고, 살기(殺氣)에는 낙화(落花)하고 만다. 마기(魔氣)에는 녹아 버리고, 요기(妖氣)에는 부서져 버리고 마는 선화(善花).
무심화를 피워 내는 손은 불수(佛手)라 한다.
모든 기운을 회생시킬 수 있는 신비한 손,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두 명이라 했다.
소림 십구대 방장(少林十九代方丈) 철목성승(鐵木聖僧),
화타의문(華陀醫門) 삼대조(三代祖) 마의화타(麻衣華陀) 석중옥(石中玉).
두 사람은 모두 전대의 인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마혼십가(魔魂十家)에 의해 비참히 꺾였다.
과거, 그들을 비롯한 정법오우(正法五友)가 있었다.
상기 이 인(上記二人)과, 아래의 다섯 사람을 일컬어 정법오우라고 했었다.
아미복호사(峨嵋伏虎寺) 강룡사태(降龍師太),
남북개방(南北蓋幇) 풍진취개(風塵醉蓋),
무당상청관주(武當上淸觀主) 벽진자(碧眞子).
당세의 정법회는 그들 다섯 사람의 복수를 위한 단체이지 않은가.
백 년 전, 마혼십가(魔魂十家)는 그리 이름을 날리지 못했었다.
마혼십가가 천하를 장악하기에는 대항하는 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무림계는 오분(五分)되어 있었다.
중원정도(中原正道) 정법오우(正法五友) 휘하,
중원마도(中原魔道) 혈마성도(血魔聖刀) 천마성 휘하,
중원흑도(中原黑道) 야유(夜遊) 휘하,
천지무적(天地無敵) 십화궁(十花宮),
변황제일파(邊荒第一派) 사천황궁(邪天皇宮).
위의 다섯 방파, 합한다면 백만 문도(百萬門徒)가 되는 천하오도(天下五道)의 제자들은 암흑 속에서 제거되었다.
혈화삼(血花衫)!
초대 혈화삼에서부터 삼십일대(三十一代)가 되는 악마의 대총사(大總師).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모든 방파를 무찔렀다.
제일 먼저 십화궁(十花宮)이 쓰러졌다.
칠천(七千)이 허리 잘려 죽고, 사천(四千)이 독탄(毒彈)에 당해 썩은 물이 되어 죽었다.
천지무적을 자랑하던 십화궁의 설가(雪家)는 완전히 무너졌다.
물론, 마혼십가 쪽도 희생이 컸다.
혈화삼의 정예휘하들이 오천이나 희생되었고, 그 일로 인해 마혼십가 내부에 알력이 생기기까지 했었다.
-한 번 잡은 기회인데, 놓칠 수 없다. 이 기회를 이용해 악마의 천년대업(千年大業)을 이룩해야 한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천하를 얻어야 한다!
-세가(世家)의 모든 힘을 모아 천하를 상대로 싸우자.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피의 살륙극을 벌이자. 천하가 마혼십가 아래 굴복하게 하자!
혈겁(血劫)의 연장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때가 아니오. 우리는 힘을 더 길러야 하오!
-우리들만의 힘뿐 아니라, 타파의 힘도 빌려야 하오. 우리 대에 천하일통하지 못한다면 힘을 저장해 후대(後代)에서 천하를 일통하게 해야 하오!
싸움을 회피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혈화삼이 내리게 되었다. 그 결정은 정말 중대하고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싸우느냐 싸우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제일 막중한 것은 내부를 일통하는 것이다!
고생은 같이 해도, 환락(歡樂)은 같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철칙!
싸워 이긴다 해도 우리 내부에서 알력이 생길 수가 있으니, 그것을 제일 먼저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따르는 자는 살고, 장차라도 나를 배반할 자는 죽는다는 것이다!>
삼십일대 혈화삼은 그런 결정을 내린 다음, 그 자리에서 마도구장로(魔道九長老)라고 불렸던 아홉 명의 거마(巨魔)들을 모조리 척살(擲殺)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강(强)하다는 것뿐이었다.
장차 배반할 소지가 있기에 그들을 미리 제거한다는 것이 삼십일대 혈화삼의 지독하고 치밀한 계산이었다.
하여간 그 일로 인해 마혼십가는 대단결하게 되었다.
혈화삼의 권위는 태양(太陽)처럼 강해졌고, 그의 명령은 천명(天命)이 되어 전 마가(全魔家)고수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후계자가 변변하지 못하다는 것! 아아, 악의 후계자라도 능력에 있어서는 천(天)이 되어야만 하는데… 천(天)은 바로 설(雪)의 빛이니… 설(雪)아, 설(雪)아! 너는 어이해 마(魔)의 대지(大地)를 희롱하느냐?
전 마의 대통합을 이룩했던 삼십일대 혈화삼은 그러한 신탁을 남기고 죽었다.
그 말의 뜻은 아직도 분석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의 비밀이 풀리는 날, 천하고금제일존(天下古今第一尊)이 탄생된다고 이야기되고 있었다.
농원(農園)의 하늘은 잿빛이었다.
백무엽은 여기 오기 이전, 하룻동안 숨어 삼대도경(三大刀經)을 완전히 익힌 후였다.
그의 머리 위에도 눈이 내렸다.
대지는 뜨겁고, 하늘을 차갑다. 그 덕에 농원 지상에는 기이한 아지랑이가 아주 짙게 깔렸다.
사아아… 사아아…….
묘하게 회오리치며 흐르는 아지랑이 가운데에서 무심화(無心花)는 떨고 있었다. 곧 떨어질 듯이.
"살기가 완전히 숨지 못했다! 그래서 낙화(落花)하려 한다!"
장춘옹은 힐끔 고개를 들었다.
죽립(竹笠)에 감춰졌던 얼굴이 나타났다. 박박 얽은 곰보의 얼굴이다.
오랜 세월의 잔재를 주름으로 지녔으며, 일그러지고 추악한 얼굴인데, 흐르는 기(氣)는 몹시도 부드러웠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다고나 할까?
"무화(無花), 대지(大地)의 비밀을 아는가?"
장춘옹은 백무엽을 무화라고 했다.
아아, 무화! 그 이름은 인문 사람들만이 아는 이름이었다.
장춘옹, 그도 인문 사람이었던 것이다.
-천야농원(天野農園)에 가면 천일홍(千日紅)을 만날 것이다!
천일홍(千日紅), 그가 바로 천야농부였다.
인문제이좌(忍門第二座), 그리고 그의 무공은 인문에서 가장 강했다.
인문은 수직조직이 아니라 수평조직이었다.
그리고 문주가 가장 강한 조직이 아니라, 제이좌인 천일홍이 가장 강한 조직이었다.
제이좌는 특히 내공(內功)에서 강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살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인문의 후견인(後見人)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복수(復讐)보다는 대지(大地)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복수라는 것은 그에게 허망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객을 키운다는 것도, 인문제이좌로 머물러 있다는 것도, 대지(大地)를 피로 물들여야 한다는 것도.
"대지(大地)는 어머니다.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모두 흙에서 나왔다. 그 기운은 본시 유(柔)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그 기운을 대유(大柔)라고 한다. 대유력(大柔力)은 바로 소림칠십이종절기(少林七十二種絶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그것을 익히는 자만이 소림 최고의 절기인 금강모니인(金剛牟尼印)을 얻는다!"
오오, 소림사(少林寺).
중원무학(中原武學)의 대성지(大聖地)인 소림사.
하지만 그 곳은 봉산(封山)된 지 오래였다.
소림사 고수들은 세속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문하제자를 엄선해 고르고, 절기 전수를 지극히 꺼린다.
숭산(崇山)과 백도의 하늘이라는 소림사! 그 곳에는 허다한 절기가 있다.
달마역근경(達魔易筋經),
소림칠십이종절기(少林七十二種絶技),
벌근세수경(伐筋洗修經),
나한금강경(羅漢金剛經)…….
소림장경각(少林藏經閣) 안에는 수만 가지의 절예가 있다.
천 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구결로나마 그것을 다 외운 사람은 단 둘이라 했다.
한 사람은 천 년(年) 전의 거승(巨僧) 달마(達磨),
또 한 사람은 백 년(年) 전의 기승(奇僧) 철목(鐵木).
그 두 사람이야 말로 소림사를 완전히 아는 사람이라 했다.
"금강모니인(金剛牟尼印)은 극강(極强)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을 일으키는 진짜 진기는 바로 대유력(大柔力)이며, 그 힘은 하늘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지(大地)에서 스며 오른다!"
장춘옹은 오묘한 구결을 말하기 시작했다.
"태극(太極)에서 양의(兩儀)가 분리되고 양의(兩儀)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로 나누어지며, 사상(四象)과 오행(五行)과 육합(六合)으로 갈라진다. 결국 만분(萬分)이 돼 만상(萬象)을 이루나, 모든 힘은 결국 만류귀종(萬流歸宗) 하나로 뭉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혼돈(混沌)의 경지이고, 강함을 허(虛)와 유(柔)에 숨기고 있는 대유지경(大柔之境)이라 한다."
농원(農園)은 어두움에 휘감겼다.
백무엽은 선 채 앉지도 걷지도 못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기(氣)의 벽(壁)에 갇힌 상태였다.
천잠사의 끈처럼 그의 몸을 조이는 강한 힘, 그 힘이 바로 대유력(大柔力)이었다.
'땅에서부터 스며 나와 나의 경혈(經穴)을 마비시킨다. 너무도 부드러운 힘인지라, 베어 버릴 수가 없다.'
백무엽은 비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장춘옹은 장죽을 뻑뻑 피며 구결을 거듭 말했다.
"대지(大地)의 힘은 살기(殺氣)가 아니라 비살(非殺)에서 나온다. 살기를 품은 자, 대지의 힘을 얻을 수 없다. 지인(地引)이란 대지의 힘을 용천혈(湧泉穴)을 통해 일으켜 올려 단해(丹海)에 거두는 것을 말하며… 버리면, 얻을 것이다!"
뻐끔… 뻐끔…….
연기가 피어 오르며 꽃송이가 허공에 피어난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이란 타물의 힘을 빌려 만상을 부수어 냄을 말한다. 꽃을 꺾어 나무에 붙이듯이!"
장춘옹의 입가에 묘한 그늘이 드리운다.
한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웃는 것일까? 그는 백무엽을 보고 있었다.
'아아, 믿지 못할 일이다. 노납이 설명한 그 오묘한 구결을 저 아이는 듣는 찰나, 이해해 버렸다.'
장춘옹은 넋을 잃고 말았다.
백무엽이 지금 흰 기류를 팔만사천 모공(八萬四千毛孔)에서 피어 내고 있지 않는가?
스으으… 스으으…….
그의 몸은 백무 속으로 감춰졌다. 그 기운은 일반 강기( 氣)와는 격이 다른 강기였다.
보통 강기는 극강(極强)한 법이다. 그런데 백무엽이 일으키는 강기는 극유(極柔)했다.
바로 대유진기(大柔眞氣).
백무엽은 채 한 시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소림 최고의 절기라는 대유진기를 터득해 버린 것이다.
천야농부 장춘옹의 볼이 오목해졌다.
"대유진기를 얻었으니, 금강모니인(金剛牟尼印)이 재현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노납조차 얻지 못한 금강모니인이… 자객 중의 자객 무화령에 의해 재현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는 조용히 합장(合掌)을 한다. 눈길을 허공에 던지며.
"달마조사(達魔祖士)여! 미천한 소승 철목(鐵木)을 용서하십시오. 살인절기를 자객에게 전수하는 것이 장차 천하를 혈우(血雨)에 젖게 하는 일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노납은 그렇게 해 왔고, 지금도 그런 일을 했소. 아미타불… 죽어 지옥(地獄)에 가는 것을 당연히 여길 것이오. 소림사에서 파계당한 노납 철목은 선혈(鮮血)로 마겁(魔劫)을 씻고자 하는 불가죄인이고,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지 못할 죄인일 것이오."
소림사 철목이라니?
장경고 안의 비급을 깡그리 외우고 있다는 신승 철목성승이란 말인가?
* * *
백무엽은 서서 하루를 보냈다.
그가 대유진기(大柔眞氣)를 자유롭게 뿜어 내고 거둘 수 있게 되자, 무심화(無心花)라 불리는 선초(善草)는 화사하게 피어났다.
'살기(殺氣)를 감출 수 있게 되었다. 아아……!'
백무엽은 기뻐하며 눈길을 돌렸다.
장춘옹, 그는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백무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그는 땅을 일구며 꽃을 가꾸는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노… 노옹(老翁)!"
백무엽이 더듬거리며 그가 있는 쪽으로 가려 하는데, 장춘옹은 호미질을 해 대며 땅에 글을 파기 시작했다.
"오지 마라. 이제… 일 없다."
<다시는 오지 마라, 무화령(無花令)! 너는 화원(花園)과는 어울리지 않는 천살성(天煞星)이니까!
암자(庵子)로 가라. 천맹(天盲)이 너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화(無花), 너는 이제 무심(無心)마저 얻었으니 가장 차가운 꽃이 된 것이다.
네게는 운(運)도 많고 겁(劫)도 많다.
천기(天機)를 아는 한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보면 볼수록 너는 두려운 놈이라는 말뿐이다!>
글은 써지는 직후, 지워졌다.
천자만홍(千紫萬紅)을 가꾸는 벙어리 농부, 그는 백무엽이 포권지례를 취해 보이고 뒤돌아서 가는 것도 모르는 듯 계속 땅만 일굴 뿐이었다.
"하늘이 결정하겠지. 대지의 혈사(血事)는… 아암, 운명(運命)일 것이야!"
첫댓글 항상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