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4월 20일
2010년 : 미국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 발생
2010년 4월 20일, 뉴올리언스에서 남쪽으로 200여 km 떨어진 해상에서 영국의 국제 석유 메이저 업체인 British Petroleum(이하 BP)의 석유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Deepwater Horizon)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시추선에서 근무 중이던 11명이 실종/사망(아직 사체를 찾지 못하고 있음)했으며, 7명이 중상을 입는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딥워터 호라이즌 호는 폭발의 여파로 폭발 발생 36시간만인 4월 22일 침몰했다. 딥워터호라이즌호는 8천 피트(2400 미터) 깊이의 해양에서 작업 가능하며 최대 시추 심도는 3만 피트(9100 미터). 그리고 폭발 당시 수심 5천 피트(1500 미터)에서 18360 피트(5600 미터)까지 시추할 계획이었다. 126명이 탑승중이었으며 그중 79명은 트랜스오션 소속이고, 6인이 BP 소속, 41명이 피고용인이었다. 그중 115명이 탈출했다.
화재의 여파로 딥워터 호라이즌 호가 가라앉고 시추 파이프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부러져 시추 파이프로 원유가 계속 유출되면서 지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환경 재앙이 시작되었다. 미국 해안경비대와 BP사는 3개월 넘게 석유의 유출과 확산을 막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했으나 모두 실패했었다.
파이프에서 하루 3만5000 배럴(1 baller = 158.984 ℓ)의 원유가 솟아나왔고, 약 5개월 후 가까스로 새는 파이프를 막으며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490만 배럴(BP는 250만 주장, 미정부는 410만 추정)의 원유가 멕시코 만을 오염시켰다. 바다를 뒤덮은 기름띠는 한반도 면적보다 더 넓었다. 다만 원유 유출량과 관련하여서는 최대 일 10만 배럴까지 추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유유출 지점이 해저 1500m에 위치하여 1㎠당 635㎏에 달하는 수압과 낮은 수온에 기름과 함께 분출되는 메탄가스가 슬러시(slush 질척한 얼음)을 만드는 등 극단적 환경에서 로봇 잠수정을 통한 원격 작업으로 차단 작업을 진행했다.
사태가 장기화 되자 버락 오바마(Obama) 미 대통령은 2010년 6월 15일 위기 극복을 위한 ‘오벌 오피스(Oval Office)’ 연설을 하였다. 이전 오벌 오피스 연설은 9년 전인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했던 9.11 직후였다.
원유 유출 발생 후 85일 16시간 25분 만인 2010년 7월 15일 해저 시추공에 무게 75t짜리 차단캡을 설치하여 원유 유출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영국 석유회사 BP는 사고 5개월만인 9월 17일 멕시코만 해정 유정이 매장 기름과 유정 사이를 연결하는 시추 파이프에 구멍을 뚫어 밀도 높은 시추용 기름과 시멘트를 주입해 올라오는 기름을 차단하는 ‘바텀 킬(bottom kill)’ 방식으로 완전 밀봉됐다고 발표했다.
이 사고로 바닷새 3600마리가 떼죽음을 당하는 등 주변 해양생태계는 초토화되었다. 한편 멕시코 만과 접한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플로리다 등 4개 주의 어업과 관광산업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기름유출 사고가 나면 해양생물은 어떤 피해를 입을까? 물고기는 아가미에 기름이 달라붙으면 호흡을 못해 질식사한다. 바닷새는 깃털에 기름이 묻으면 방수성과 보온성이 떨어져 저체온으로 죽는다. 기름에 들어있는 독성 때문에 해양생물이 죽기도 한다. 바다 표면에 만들어진 유막은 대기에서 바다로 산소가 녹아들어가는 것을 방해해서 용존산소가 줄어들어 해양생물의 호흡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또한 바닷물을 투과하는 햇빛을 줄여 해조류나 식물플랑크톤의 광합성을 저해한다.
기름은 유출되면 해수면에 얇은 막을 만들며 퍼져나간다. 가벼운 기름일수록 유막의 두께가 얇고 빨리 분산된다. 유출된 기름 중에 분자량이 적은 것은 대기 중으로 날아가고, 수용성 성분은 해수에 녹으며, 물에 녹지 않는 성분은 유화되어 작은 방울 형태로 된다. 기름이 유화되면 마치 녹은 초콜릿처럼 보이며, 아주 끈적끈적해 진다. 이것이 해안으로 밀려오면 조간대 생태계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원유 성분 가운데 무거운 것은 타르볼(tar balls)을 만들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보일만큼 아주 작은 유화된 기름방울은 박테리아가 쉽게 분해할 수 있다. 그러나 큰 타르볼은 느리게 분해되어 유류유출 사고가 난 후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사고 초창기 연구 결과를 보면 사고로 기름이 유출되자 소위 ‘기름 먹는 박테리아’인 유류 분해 미생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원유와 같은 탄화수소를 이용해 살아가는데 평상시에는 숫자가 적지만 먹이원이 많아지자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유가 분해되어 해양환경이 정화되었다. 이들은 평균 2일에 1 갤런(1갤런=약 3.8리터)의 원유를 제거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분해된 것은 유출된 490만 배럴(1배럴=158.9리터) 가운데 최소한 40만 배럴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박테리아들이 원유의 독성 성분을 분해하는 능력은 물질의 독성 강도에 따라 다르다.
플로리다주립대학교 연구팀은 멕시코 만에 사는 콜웰리아(Colwellia)라는 박테리아가 딥워터호라이즌(Deepwater Horizon)호 유류유출 사고가 난지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사고 때 흘러나온 원유 속에 포함된 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자일렌과 같은 많은 독성물질을 분해하였지만, 독성이 아주 강한 물질은 분해하지 못하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분해하지 못한 오염물질은 PAHs(polycyclic aromatic hydrocarbons 다환방향족탄화수소)였다. PAHs는 오랫동안 분해가 되지 않고 잔류하는데, 특히 가라앉아 해저 퇴적물에 묻혀 산소가 부족한 환경이 되면 미생물에 의한 분해가 더욱 더딜 수 있다. 해저에 사는 해양생물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됨은 물론이다.
사고로 인한 경제적 손실 또한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지역경제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석유 및 가스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 일대의 어업 및 해운업 역시 곤경에 빠졌다.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화물 운송도 한동안 중단되었다. 멕시코만 어업은 심각한 상태며 루이지애나 동부 해안과 미시시피강 지역에서의 조업활동이 금지됐기 때문에 수천명의 어부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간접적으로 관광산업 또한 위축되었다.
기름유출로 인한 경제적 영향은 정확하게 추정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기름유출 사태가 관광업, 어업 등에 미친 경제 피해규모가 16억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투자회사 컴버랜드 어드바이저스의 데이비드 코토크 회장은 “이번 원유유출 사고로 인해 서서히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던 미국 경제가 더블딥(이중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사고와 관련하여 BP는 최대 60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돈을 배상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지방법원은 2014년 9월 4일 멕시코만 기름유출 사고와 관련, BP가 “작업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등 총체적 태만(grossly negligent)을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를 일으킨 기업에 사상 최대의 징벌적 벌금을 부과하는 판결이 나오자 미국 언론들은 “환경법의 역사에 이정표가 되는 재판”이라며 환영했다.
BP는 이 사고가 순전히 자신들의 책임만은 아니며 시추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했던 미국 회사 핼리버튼과 트랜스오션 등이 공동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BP에 광범위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을 맡은 칼 바비어 판사는 BP가 67%, 트랜스오션이 30%, 핼리버튼이 3%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영국 BBC에 따르면 지금까지 BP가 사고수습과 피해보상 등에 썼거나 지불하기로 합의한 금액은 430억달러에 이른다. 여기에 최대 180억달러의 추가 벌금을 합치면 BP는 총 610억달러(약 62조5000억원)를 쓰는 셈이 된다. 이 사고와 관련해 지금까지 제기된 소송만 해도 36개국에서 94만7000건이 넘는다.
판결과 동시에 BP의 주가는 6%나 떨어졌다. 이 회사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유전이 러시아에 넘어가는 바람에 최근 원유 확보량의 10%를 잃었다. 여기에 멕시코만 사고 벌금까지 겹쳐, BP가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1997년 :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전 북한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씨(1923년 2월 17일 ~ 2010년 10월 10일)가 1997년 4월 20일 서울에 도착했다. 지난 2월 12일 베이징주재 우리 대사관에 귀순한 지 67일 만이며, 경유국인 필리핀으로 옮긴 지 33일 만이었다. 황씨는 도착 직후 공항에서 발표한 ‘서울도착 인사말씀’ 을 통해 “나의 청원을 허락해 주고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준 대한민국정부와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고 말했다.
황씨는 “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 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체제로 변질됐으며 경제는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면서 “수십년간 북조선 당국의 고위 간부로서 고민은 비길 데 없이 심각했으나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다 합쳐도 7천만 우리 민족의 생사운명과 바꿀 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 그리고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 보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돼 대한민국에 오게 됐다” 고 귀순 동기를 밝혔다.
황씨의 이날 서울행에는 필리핀 보안당국의 호송책임자인 리바르네스 준장이 동행, 공항에서 황장엽과 김덕홍 두 사람의 신병을 우리 측에 인계했다.
황장엽은 1923년 2월 17일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본의 중앙대학교 법과를 나와 소련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는 평양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교의 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84년 4월부터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역임했고, 1993년 12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으며 학자로서의 그의 위상과 정치적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1984년 2월에 그는 당의 국제부 요원들도 외교일꾼이므로 사교춤정도는 알아야한다고 간부들과 젊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매일 밤 난잡한 춤판을 벌였다가 당 조직부의 비판을 받고 해임되었다. 1년 6개월간 평남 덕천탄광에서 <혁명화교양>이란 명목으로 중노동을 하다가 김일성의 딸 김경희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1985년 8월에 당 국제부에 복직하고 1988년 12월에는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1990년 5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고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되었다. 1990년 9월에는 북일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에서 조선노동당과 일본자민당과 사회당의 3당공동선언을 이끌어낸 북한 측 주역을 했으며, 1992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아놀드 캔터 국무부차관과 미북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1992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되었고 1992년 12월에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면서, 1991년 5월에 허담이 사망해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대남담당비서가 되었다. 1993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4년 6월에는 김영삼 김일성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으로 남한의 통일부총리 이홍구와 만났다.
학자풍의 황장엽은 유독 김용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황장엽과 김용순은 11세의 나이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며, 당의 국제담당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직을 역임한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용순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술 잘 마시는 사교적 인물이었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친절하여 대인관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생활에서는 김정일과 손발이 척척 맞는 패거리였고, 기쁨조 파티에는 거의 빠지는 일이 없는 단골손님이었다. 공무에서도 김정일의 비위를 아주 잘 맞추는 김용순을 간부들 사이에서는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그를 <아첨꾼>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김용순은 체질적으로 바람기가 있었으며 숱한 염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 사이에 오랫동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이혼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 김용순은 김경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장엽은 김일성에게 고하여 김용순을 질책하고 근신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이 황장엽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김용순과 김경희는 황장엽에게 애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워낙 깔끔하고 빈틈이 없는 황장엽에게는 걸고넘어질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황장엽은 자기를 신임하던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공허했고 김정일의 통치스타일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외감을 느낀 황장엽은 주체사상 창달과 전파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던 중, 모스크바 주체사상 강연회에 가서 심혈을 기울인 강연과 토론에서 많은 교수와 학자와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위대한 주체사상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사실을 파악한 김용순은 김경희와 합세하여 김정일에게 황장엽을 거세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가 제창한 철학이며 통치이론이지 어째서 황장엽의 학설이 될 수 있는가? 황장엽은 일개 학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위대한 수령을 모독했으며 그분의 명예를 가로챈 반역자이다”라고 하면서 황장엽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를 숙청하기위해 더 결정적인 약점을 노리고 있을 때, 황장엽은 위기감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97년 2월 12일에 그 결심을 결행하였다.
황장엽 사후인 2013년에 밣혀진 사실에 따르면, 황장엽은 아들 황경모와 함께 1996년도경에 김정일 제거 계획을 세웠다. 당시 황 전비서는 봉건적 세습 체제에 환멸을 느껴 계획을 세운 것이며 장성택(김정일의 매형이자 황장엽과는 사돈지간, 황장엽의 아들인 황경모가 장성택의 형인 장성우의 딸과 결혼)과 서관희 농업상(1997년 식량난이 극심할 때 농업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미국 간첩 혐의로 총살) 등도 이 계획에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황경모는 김정일의 신변을 경호해 온 호위총국 내부의 인맥을 동원해 김정일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을 본격 실행하기도 전에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망이 좁혀오는 것을 직감한 황 전 비서는 아들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중국 베이징에서 서둘러 망명을 단행했다.
황장엽는 1997년1월30일 마지막으로 평양을 떠날 때 그 곳에 부인 박승옥 씨 및 아들 경모 씨 내외와 손자들, 그리고 딸을 남겨 두었다.
고인은 일본 방문을 위해 이날 가족을 남겨두고 평양을 떠날 때 부인에게도 탈북할 생각을 알리지 않고 떠나는 심경을 2006년 서울에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그의 회고록(回顧錄) 15쪽에서 31쪽에 걸쳐서 애절하게 적어 놓았었다. 그러나, 그가 북한 땅에 남겨두었던 가족들에게 닥쳐 온 운명은 비참한 것이었다.
황장엽의 탈북이 이루어진 뒤 그의 가족들에게는 즉각 자택 연금(軟禁)의 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1997년 중반부터 2회에 걸쳐서 '국제인권기구'(구체적으로 어떤 국제인권기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음) 조사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고 황 씨 가족을 면담했고 그로 인한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북한 당국은 1998년 후반까지 고 황 씨 가족을 그들의 자택에서 연금한 상태에서 엄중한 감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간 중 부인 박승옥 씨는 이른 아침 집 근처에 있는 김일성(金日成) 동상의 대석(臺石) 청소를 하는 생활을 매일 반복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아들 황경모 씨가 탈북을 시도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끝장이 났다. 황경모는 황장엽 탈불 이후 장성택의 형의 딸인 부인과 강제로 이혼을 당한 상태였다. 황경모는 1998년 여름 그의 친구 한 명과 탈북을 목적으로 평양을 떠났다. 공안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도보(徒步)로 평양을 떠난 그들은 2주일 후 평북 용천 근처에서 공안 당국에 체포되었다. 체포되었을 때 그는 9만8천 달러의 미화 현금을 지참하고 있었고 동행했던 그의 친구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평양으로 압송된 황경모는 그의 어머니 박승옥와 함께 1999년 총살되었고 황장엽의 딸과 황경모의 두 아들은 14호 수용소로 끌려 간 것이 북에 남겨졌던 황장엽 가족의 마지막 소식이다.
1938년 :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 개봉
나치스 독일이 위신을 걸고 개최한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가 히틀러 49번째 생일인 1938년 4월 20일 베를린극장에서 처음 개봉됐다. 올림픽 후 2년만에 영화가 개봉된 것은 제작에 엄청난 물량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160여명의 스태프가 총 40만m에 달하는 필름을 소모했고, 이를 4시간짜리 영화로 편집하는데만 18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여성 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총지휘했다.
최초로 올림픽 전 과정을 필름에 담은 올림픽 기록영화의 효시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1부 '민족의 제전'과 2부 '미의 제전' 2부작으로 구성되었으며, 1부는 육상경기를 2부는 수영 등 그 밖의 종목을 다루었다.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은 1부에 나온다. 육체의 아름다움과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영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행선을 이용한 공중촬영, 레일을 타고 하는 이동 촬영 등 새로운 기법들도 동원되었다.
히틀러에 의해 지명된 여류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은 1936년 8월 1일부터 14일간에 걸쳐 개최됐던 베를린올림픽을 40만m에 달하는 필름에 담아낸 후 능숙한 솜씨로 편집해 400km의 필름으로 만들어냈다. 미국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엔스의 멋진 육체의 움직임과 우리나라 손기정 선수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모습 등을 다각적으로 잡아냈다.
그녀는 주제에 따라 때로는 시간적 흐름을 무시하고 약동하고 정지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대담하게 추구했다. 올림피아는 슬로모션과 줌 인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상으로 그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20세기 최고의 기록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이 영화는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권력기반을 굳건히 하고 독일 민족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선전할 생각이었던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제작돼 `나치스의 선전영화`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다큐멘테터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찬사를 받으며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녀 스스로 언급한 “다섯번의 삶”처럼 무용수, 영화배우, 감독, 사진작가 그리고 스킨스쿠버였던 레니 리펜슈탈은 1902년 8월22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처음엔 무용수로서 성공적인 삶을 시작했지만 사고로 다리를 다치게 됨으로써 영화배우의 길을 가게 되었다. 1926년 독일영화의 독특한 장르인 “산악영화”의 선구자인 아놀드 팡크(Arnold Fanck)의 영화 <신성한 산>(Der heilige Berg)으로 데뷔하여 수많은 모험영화와 산악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리펜슈탈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스타배우로 성장하였다. 배우로서 활동하며 영화감독으로의 길을 준비하던 그녀는 드디어 1932년 신비롭고 로맨틱한 산악영화 <푸른 빛>(Das blaue Licht)에서 주연 및 감독으로 감독데뷔를 하고 이 영화는 그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큰 성공을 거뒀고 이는 나치당수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와의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을 토대로 친한 친구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그녀가 히틀러의 여인이었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사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히틀러의 관심과 믿음으로 리펜슈탈은 1933년 나치정당을 위한 첫 번째 기록영화 ‘신념의 승리(Sieg des Glaubens)’를 만들게 되고 나치당의 모습을 미화시켜 선전영화의 표본을 제시하여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기록영화 감독이 되었다. 다음해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제작한 ‘의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