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11-1편]
천지창조는 매 순간 반복되고 있다 | 구세십세호상즉 | 일상에서의 수행방법 |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것이 무엇인가? ) (1:21:15)
(2:37)
10장은 새로운 지구
「새로운 지구」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불국토'죠.
불보살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세계!
역사학자 토인비 만년에 기자가
'역사에서 20세기를 무엇으로 기억을 할까요?'라고 물어봤을 때,
'20세기는 동양 사상이 서양에 들어와서
서양 사상의 흐름을 바꾸는 세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자기는 생각을 한다.'라고.
그런데 실제로 톨레의 책이 그런 걸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동양의 깨달음의 전통이 서양에 흘러들어 가서
서양인들도 깨어나서
톨레가 보기에는 그 영향으로
20세기가 동양 사상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시대라면
21세기 이후에는 서양인들이 많이 깨어나서
새로운 지구, 우리가 말하는 보살행이 실현되는 세계?
너도 깨어나고 나도 깨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는
그 세계가 21세기의 비전이 아닐까?
그걸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지구」의 35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4:35)
< 우주의 팽창과 수축이 자신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 전에,>
우주의 평창과 수축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우주의 팽창은 우리가 알다시피 빅뱅으로부터 탁 터져 가지고
지금 과학적으로는 150억 년이 지났대요.
150억 년이 지나서 계속 지금 팽창 중이라고 해요.
지금 한 중간쯤 왔다는 거예요 과학적으로는.
그래서 이제 팽창 150억 년이 더 지나면
이제 수축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는데
그건 과학적인 이야기고.
이렇게 천지창조를 해가지고
그것이 어떤 뜻에 의해서 진행되어서 시작과 끝이 있는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시간의 직선적인 관념이라면
우리처럼 마음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팽창과 수축이 길게 이어지는
(150억 년 곱하기 2니까) 300억 년에 걸쳐서
우주가 팽창하고 수축한다고 보는 것은
과학적으로 또 직선적인 시간관에서 하는 소리고
우리가 보기에는 예를 들어서
우주의 팽창을 천지창조라고 비유를 한다면
그 천지창조가 150억 년 전에 일어나서 그냥 이렇게 있는 게 아니고
천지창조는 그 이후로 매 순간 반복되고 있다고 보는 게
우리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의 시각이에요.
(6:19)
만약에 창조주가 계신다면 처음에 창조해 놓고
시계 태엽을 감아 놓고 우주를 던져 놓은 게 아니라
매 순간순간 천지창조를 한다.
이게 사실은 에카르트 신부의 이야기예요.
13세기 독일의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깨달음을 가졌던
에카르트 신부가 그런 말을 했어요.
'하느님이 태초에 창조시켜 놓고 태엽을 감아 놓고
그냥 던져 놓은 게 아니다.
매 순간순간 천지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제 말이 이렇게 나오는 게
천지창조 우주의 팽창과 수축,
모든 것이 이 순간 찰나 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탄생과 소멸
이거 자체가 팽창과 수축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사실은 우리 공부가 익어지면
직선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허구라는 걸 우리가 잘 알아채게 돼요.
직선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허구다.
여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이제 항상 시간은 生滅(찰나생 찰나멸)이라고 하는
직선적인 시간이 있는 반면에 (그건 현상에서 이야기고)
본질의 입장에서는 항상 현상이 이 순간에도
본질이 현상으로 나타났다가 돌아가고 있는 요게
지금도 순간순간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실상에 가깝다는 거예요.
(7:59)
< 여기서 우리가 우주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을 >
우리가 지금 우주의 본질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관념이에요.
우리가 절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전부 자기 생각, 자기 관념일 뿐이에요.
<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그 누가 우주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부분이기 때문에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
< 어떤 개념으로도
수학공식으로도 무한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무한은 우리 의식이죠. 딱 깨 놓고 이야기하면.
우리 의식이 무한이잖아요.
그러니까 무한을 수학적으로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의식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도 불가능하죠.
그래서 많은 전통에서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부정하죠.
의식은 남자도 아니다 여자도 아니다,
크지도 않다 작지도 않다, 붉은색도 아니고 초록도 아니고,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 더 가깝지,
'이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다.
< 실체는 통일된 전체이지만 생각은 그것을 조각들로 잘라 놓는다. >
요게 지금 인간 모든 소외의 원인인 거죠.
근데 우리가 언제 생각을 배워요?
거의 태어나자마자 배워 가지고 매일 이걸 배우고 있죠.
새로운 용어 나오면 배워야 되잖아요.
거의 태어나자마자 배웠다고 봐야죠. 언어는!
계속 어머니가 언어를 가르쳐 줬죠.
< 그래서 실제는 통일된 전체이지만
생각, 그리고 생각을 표현한 언어는 그것을 조각들로 잘라 놓는다.
이것이 근본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
그러니까 우리가 미혹된다 그러잖아요.
미혹된다 할 때 그 미혹되는 것은 뭐냐면
우리는 본질인데, 본질은 본질로서 가만히 있지 않아요.
살아 있어서!
본질은 살아있기 때문에 본질 자체로 가만있지 않아요.
그럼 죽은 본질이에요
죽은 본질은 없기 때문에 본질은 항상 현상으로 드러나요.
문제는
드러난 다음에 그 역할이 끝나면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되는데
현상으로 나온 다음에 자기가 본질인 걸 까먹어 버리고
현상에 집착을 해가지고 이 현상계에서 길을 잃는 것이 미혹이잖아요.
미(迷) 길 잃을 '미'자잖아요?
왜 그런가 할 때 근본적인 오해가
조각 자기는 전체인데
자기가 전체인걸 까먹고 현상계로 잠시 나투었다가
부분에 매혹되어 부분에 집착하면서 자기를 까먹어 버린다.
그래서 가장 먼저 집착하는 게
몸에 집착해서 몸을 나라고 해버리는,
우리는 의식인데
잠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여기서 마음을 뺏겨 가지고
부분 된 것에 마음을 뺏겨 가지고
(11:34)
그러니까 의식이 자기인데, 태초에 인간이
몸을 나라고 하는 것에서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을 상징해서
나르시 소스 신화가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이 책의 어딘가에 나오죠?!
의식이 자기가 의식일 때는
일상에서 자기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의식이라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수면에 비친 의식이 물에 비친 얼굴을 보고 매혹되어서
'아 이게 「나」구나.' 하고 그때부터 동일시라고 하는
이 몸, 얼굴을 중심으로 하는
이 몸을 동일시하는 것이 그때부터 탄생했다고 하는 그 비유가
나르시소스라고 자기도취라고 하는 거죠. 자기애.
그런 근본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부분 된 그것을 집착하면서부터.
부분이 왜 일어나는가?
생각이 전체를 조각들로 잘라 놓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오해가 일어났다.
< 이를테면 개별적으로 분리된 사물들과 사건이 있다거나 >
톨레의 입장에서 하는 이거는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실제인 물건은 없다는 거예요.
개별적으로 이것만이 딱 모든 것에서 떨어져서
요것만이 딱 홀로 관계없이
자기만 딱 존재하는 물건은 없다.
그게 항상 전체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에요.
(13:28)
제가 한 15년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명상할 때
자기 시선을 전체를 다 보고 있어야 되느냐,
아니면 한 부분에 집중해서 한 부분만 봐야 하느냐
그렇게 질문을 하더라구요.
수행의 국면에서는 일룰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 case by case다~
(15:14)
집중할 단계에 있는 사람은 집중을 해야 되고, 또
집중하지 않고 완전히 열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또 그걸 열고 있어야 되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냐면
'어디에도 집중하지 않는데 집중한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분의 상황이 어떤지를 모르니까
거기에 맞춰서 제가 해줄 수는 없었지만
말을 하자면 자기 단계에 맞춰서 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근데 이제 일반적으로 공부가 좀 된 입장이라면
항상 열어두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집중 수행할 때는 집중해야 되죠.
하나에 딱 몰입해서 들어가야 되고
그런 단계를 지난 사람은 항상 열어두고
내 마음이 어디에도 붙지 않게
일상에서 어디에도 집중하지 않게 열어두고 사는 것.
그게 이제 어느 정도 공부가 익은 사람들의 입장이에요.
(16:22)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되면
어떤 사건 하나도 독자적으로 보면 따로 일어나는 것은 없다는 거죠.
다 연결되어 있다. 모든 것이!
이제 공부가 익어질수록 그렇게 넓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 이를테면 개별적으로 분리된 사물들과 사건이 있다거나
이것이 저것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
이거는 개체를 인정할 때 이런 말이 성립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저것의 원인이다.'
이 말은 현상에서 적용되는 이야기예요.
본질에서는
'이것이 저것의 원인'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구분도 해요.
현상에서는 인과가 분명하다.
근데 본질에서는 인과가 동시다.
왜냐하면
본질로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따로 인이 있고 따로 과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과 동시(因果同時)'
이런 문제가 인문학에선 중요한 주제예요.
(17:46)
< 모든 생각은 어떤 시각을 담고 있으며
모든 시각은 그 본질상 한계를 담고 있다.
한계를 담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적어도 절대적인 진리는 아님을 의미한다. >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렇게 딱 이렇게 보는 순간
그것만 떨어져 나오니까,
그렇게 볼 때는 절대적인 진리를 보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거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 오직 전체만이 진리이지만
그 전체는 말해질 수도 생각되어질 수도 없다.
전체는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해한 것이다.
모든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은 지금이다.
지금은 시간 밖에 존재한다.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심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 >
'지금은 시간 밖에 존재한다.' 할 때
이런 말은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가장 명료하게
'지금'하고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을 가장 명료하게 구분하고
우리한테 알려준 분은 의상대사고
의상대사의 화엄일성 법계도를 '시'만 말하면 법성계라 그러죠?
화엄일성 법성계의 한 구절,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기억나세요?
9세와 10세가 서로 간에 '즉(卽)'한다
화엄십찰을 세우신 의상대사가 시간적인 문제를 가지고 말할 때는.
9세는 '과거 현재 미래'가 3세예요. 그리고
과거를 다시 한번 더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눌 수 있어요.
과거 완료, 과거에서 보는 현재, 과거에서 보는 미래
현재도
현재완료, 현재 현재, 현재 미래(가까운 미래 'be going to')
미래도
미래완료, 미래 현재, 미래에서 보는 미래가 가능하잖아요.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이렇게 영문법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시간을 다 펼쳐 놓으면
9세가 된다.
어렵지 않죠.
우리 영문법을 배워 가지고 완료형 이런 거 우리가 다 하잖아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번 더 나눈 9세가 된다.
근데 지금이라고 하는 것은 10세다. 10번째 시간.
왜냐? 모든 시간이 일어나는 그때는 지금이라는 거예요.
9세가 아무리 펼쳐져도
펼쳐지는 그때는 지금에서만 펼쳐진다.
지금 10세라고 하는 지금의 발견이 우리가 현상에서 초월하는~
그러니까 왜 인문학의 주제가 시간이 되었냐 하면
시간이 바로 본질로 들어가는 통로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가 흐른다는
이런 현상의 사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본질을 발견할 때 어떤 느낌이냐면요
시간으로부터 초월한다는 그런 느낌인 거죠.
지금이라는 것은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에,
초월하는 느낌.
초월하는 느낌은 또 어떤 느낌이냐면
현상을 항상 수평으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초월한다는 느낌은 수직으로 점프하는 느낌이거든요.
(22:51)
지금 여기 바닥에 개미가 저기까지 기어가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서 저기까지 기어가는 게 개미의 인생이라고 치면
걔는 지금 저기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는지 모를 거 아니에요?
이게 웅덩이가 있으면 웅덩이를 돌아가든지 할 텐데,
그 웅덩이가 앞으로 나타날지 모를 거 아니에요?
차원이 평면의 차원이니까.
수직의 차원이라면 그 개미가 지금은 저기 있지만
개미의 일생이 한눈에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수직이라면 한눈에 보일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살면서
9세에서만 살다가 10세를 발견한다는 말은
수직으로 솟아서 자기 일생을 딱 그냥 조망하는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그런 찬스
그런 능력을 가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의 초월이라는 문제가 깨달음의 아주 아주 밀접하거든요.
그러니까
개미가 바닥에 붙어서 평면적인 개미의 생을 산다고 할 때,
개미가 만약에 각성이 일어나서 깨닫게 된다면
갑자기 나비처럼 훨훨 날아 올라가지고 자기 일생을 보는 거야.
근데 보세요,
이 초월이라는 것이 실제로 이렇게 공중으로 솟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의식에서 각성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게 그냥 보이는 거예요.
한순간에 한 순간에 과거도 보이고 미래도 보이는 거예요.
내가 과거를 가는 게 아니고 미래를 가는 게 아니고
지금이 순간 속에서 다 보이는 거죠.
(26:08)
이런 거죠.
제 입장에서는 오늘 수업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면 이게 결과로 이렇게 오기 위해서는 이전에
제가 인과에서 인을 심었다는 거죠.
그러면 지금 내가 받는 걸 보면
제가 과거에 뭐 했다는 것이 이걸 보면 훤히 나오는 거죠.
조금도 에누리 없이, 인과는 분명하니까 현상에서는.
(27:14)
새로운 지구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전사들이 나와서
원력을 가지고 함께 이 일을 손잡고 나가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식으로 나갈 거라는 것이 이렇게 그려지는 거죠
구체적으로 뭐가 얼굴을 보이는 건.
그것처럼 이 한순간에 10세 속에 우리가 각성이 일어나면
이 시간을 꿰뚫어 가지고
과거와 미래가 여기서 싹 다 보여 버리는 그 각성의 문제.
10세를 깨닫는 것이 지금 우리의 핵심인 거죠.
10세는 영원한 현재라고도 하고
제 입장에서는 대장금이라고 (長길 장, 今 지금금),
10세는 영원한 현재라고도 하고 제 입장에서는
(29:18)
이런 거를 지금 제가 하는 것처럼
9세와 10세가 '호상' 상호 간에 '즉'하고 있다. 지금이 순간이!
지금 이 순간에 10세와 9세가 '즉', 곱해져 가지고
지금 눈앞의 시간이 펼쳐진다.
다시 말하면
10세는 시간의 본질이고 9세는 시간의 현상인데
본질과 현상이 눈앞에서 '즉'한다.
'즉한다'는 다른 말로 '중도', '연기', '불이'
서로 딱 만나서 지금 이 시간이 펼쳐지고 있다 이거예요.
그 이치를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29:57)(30:04~32:22)
지통 스님의 '구세십세호상즉' 체험 이야기
(32:13)
과거,현재, 미래가 구세가 그 순간 호상(互相)
상호 간에 딱 하나로 딱 만나 가지고 꿰어져 버리면
그러니까 요런 순간을 맞이하면 어떻게 되냐면
인간은 자기 삶을 다 살고 살아요.
자기 삶이 어떻게 펼쳐질 거라는 걸 다 보고 살아가.
이걸 불교적인 용어로 쓴다면 원력(願力)이라고 표현을 하죠.
미래 완료의 시간이에요.
원력이라고 표현해서 아는 거죠,
나는 이 땅이 왜 태어났는가?
( < 원력2 [原力]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기운 > 다음사전 )
그 각성의 순간,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이거 하려고 왔었구나.
그리고 그동안에 쭉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 이걸 깨닫고
앞으로의 삶은 이것이 이제 그대로 펼쳐지는,
그 원력이 실현되는 그러니까 미래 완료의 느낌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서두를 이유가 없죠.
모든 것이 제대로 착실하게
그렇다면 그 원력이 그 시점에서 되려면
현재의 내가 뭘 해야 되는가가 드러나지 않나요?
(33:33)
열심히 이렇게 강의를 해서 그래서 착실하게 마음이 모이고
이 톨레가 말하는 이 새로운 지구를 건설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고
그 시대정신에 눈을 뜬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부터 눈을 뜨고
그리고 눈뜬 사람들이 옆에서 또 많아지고
해서 눈뜬 사람들끼리 이 험악한 정글 같은 이 세상에서
10세가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그런 시공간을 건설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나요? 결국 우리의 목적은!
왜냐하면 우주의 목적이 뭘까요?
우주의 목적도 우주의 정신이 깨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주의 정신이 깨어나려면
이 우주 안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이것들 중에
무엇을 통해서 깨어날 수 있을까요? 우주가.
인간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우주가 깨어나는 목적에 부합하는 거예요.
(34:50)
우주 생각해 보세요
150억 년을 기다려 가지고 우리가 나왔어. 드디어.
부처님도 2500년도 우주가 기다린 1500억 년의
그 시간에 비하면 지금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이런 분들이 나오고
그리고 다시 또 그것이 대중화되는 이런 시점에
우리가 지금 있다 이거예요.
그럼 우주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이거죠.
이게 지금 우주의 목적이니까.
그 우주의 목적을 누가 실현해 주죠?
인간이 실현해 주잖아요.
그러니까 우주는 미친 듯이 우리를 도와줘.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도와줄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를 통해서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우리는 우주의 손발이 되어서
우주정신이 이 세상에 드러나는
'구세십세호상즉'이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을 가지기!
이게 존재의 목적이 되는 거다, 이거죠.
지금 톨레의 책을 마지막 장을 다 읽어보니까
이게 분명해지는 거예요, 이제는.
(36:11)
부차적인 것은 두고, 여기서도 말하잖아요.
외부적인 목적이 있고 내부적인 목적이 있는데
내부적인 목적이 1번이다,
외부적인 목적은 2번이다.
근데 2번인 외부적인 목적은
우리가 맡아 있는 역할의 노릇을 잘하는 거잖아요.
각자 우리가 현상으로서는 역할이 있잖아요, 맡은 역할!
우리나라 말로 하면 노릇. 사람 노릇. 사람 노릇도 중요하죠.
그게 외부적인 목적인 거죠, 우리 존재의!
근데 내부적인 목적도 있는 거죠.
내부적인 목적은
나를 통해서 우주정신이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것.
이게 지금 우리 존재의 내부적인 목적이죠.
이 두 개가 잘 조화를 이뤄야 되겠죠.
근데 나이가 좀 들어보면
젊을 때는 외부적인 목적이 더 우선이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다 보면 이제 내부의 목적에 눈을 뜨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것이구나 하는 걸 우리가 아는 거죠.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하면서
이 하나의 목적이 실현되게끔 좀 더 집중을 하는 그런 시절 인연?
그런 것이 지금 하여튼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37:25)
그리고 지통 선사 이야기 어때요?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꿰어지는 모습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의상대사한테 가서 했더니
의상대사가 '너 깨달았구나.' 하고 인가를 해줬다는 거예요.
기록이 이렇게 있어요. 아름다운 이야기죠.
의상대사가 7세기 사람이거든요. 신라시대.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사니까 1400년 전의 이야기네요.
근데 그것이 시공을 뛰어넘어서
이런 말이 이제 우리한테도 와닿잖아요?
그리고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의상대사와 그 제자인 지통이 공감했던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세월이 좋아서
책이 많아지고 유튜브가 많아지고 모든 정보가 공유되면서
그런 특수한 분들만 하던 그 각성의 세계가
지금 우리한테까지 인연이 와서 이렇게 넓게 퍼지고 있구나~
하여튼 이런 말이
(38:42)
< 지금은 시간 밖에 존재한다.
그래서 현상으로서의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심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 >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심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
이 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시간이라는 것이 바로 업이거든요.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업, 업장, 업의 장애
사람마다 업장을 지고 산다.
'업장을 가슴이 품고 산다.' 이 말이나
'사람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이 말이나
같은 말이에요. 업장이 십자가예요.
사람마다 십자가를 지고 산다,
사람마다 업장을 지고 산다.
인생은 그 무거운 십자가 지고 언덕을 오르는 일인데
'그러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까?'에서
깨달음이라는 거죠. 어떤 깨달음인가?
업이라는 것은,
여러분 업이라는 것은 과거의 발목 잡히는 거잖아요~
과거의 시간에 발목 잡히는 거잖아요.
근데 그 과거라는 것이 없다는
'심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업으로부터 풀려난다는 거예요.
항상 기억하실 것은 여기 선이라는 글자가 저렇게 있는데
선이 시작하는 그 에피소드는
초조 선 선종을 창시한 달마스님이 2조 혜가에게 법을 물려줄 때,
깨닫게 할 때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게 했다는 거예요.
간단한 에피소드니까 상기해 보면
2조 혜가가 업에 발목이 잡히니까 마음이 괴로운 거예요.
달마스님에게 찾아와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 괴로운 마음을 치유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운 마음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까
달마의 처방은 뭐냐면
'흘러간 과거를 한번 가져와 봐.'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달마의 처방은 뭐냐면
'괴로워하는 그 마음을 가져와야지 내가 깨닫게 해 줄 거 아니냐?
없는 걸 깨끗하게 해 줄 수는 없잖냐?
그러면 깨끗하게 해 줄 테니까 치유해 줄 테니까
괴롭다고 하는 그 마음을 가져와 봐라.'
그래서 혜가가 자기 마음을 찾았다는 거 아니에요?
꺼내놓으려고. 분명히 마음이 괴로워서 왔으니까!
그래서 그랬더니 분명히 괴로웠는데
그 마음을 달마스님 앞에 내놓아 보여 보려고 하니까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찾으면 각성이 일어나거든요.
그러니까 과거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잖아요?
찾으면 생각이 사라지는 거예요. 희한한 거예요.
찾으면 생각이 사라져요.
(42:35)
못 찾는 걸 경험해 보라는 제 말은
못 찾는 걸 경험할 때 깨달음이 일어난다.
어떤 깨달음이냐?
지나간 것은 가져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
이걸 톨레는 시간이라는 것은 '심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고
표현을 한 거예요. 서양식으로.
구조물이 뭐예요?
심리상태에서 만들어 놓은 거라는 거야. 시간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뭐만 있는가? 현재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보세요. 지금이 순간에(45:08)
(47:48)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기가 막힌 조화 속에서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나는 한눈 파느라고 생각 속에 잠겨 가지고
이걸 전혀 못 보고 산다.
그러니까 그 한 생각이 털어버리면
시간이라는 것도 그 생각 속에서만 있으니까
생각을 털어버리면 심리적인 시간도 존재하지 않아요.
9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알게 되는 거예요.
(48:14)
그럼 10세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 10세가 그러니까
그 작은 꽃에 나비 한 놈이 요렇게 팔랑팔랑팔랑 하는 것이
신이 나타나는 거 아니에요? 우주가 나타나는 거 아니에요?
그 모습이?
그러니까 존재가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다.
본질이 현현하는 것이라서
불교신자 같으면 '아미타불이 이렇게 다투시네.'라고
그런 느낌이 온다는 거죠. (48:45)
(49:40)
하나하나가 이 순간에 주어지는 존재의 선물들인데
한 생각 팔려 버리면 까맣게 그런 거는 다 사라진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리들의 어떤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이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힘,
그러니까 이 흘러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도
생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으면 과거 미래는 없어요, 그죠?
분명하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내가 벗어나는 힘,
생각으로부터의 해탈, 그 자유
그것이 찰나찰나 내가 할 수 있다는 거죠.
어려운 게 아니라 찰나찰나 돌이킬 수가 있다.
* * *
(50:20)
자 그래서 여러분 수행법
아침에 눈 뜰 때
이 나로 인해서 (이 육체로 인해서) 구성되고 있는이 시공간.
그러니까 수행은 눈 뜰 때 제일 중요해요. 관찰하세요.
눈 뜰 때 아무것도 없다가 의식이 제일 먼저 돌아와요.
관찰할 수 있어요.
한참 깊은 잠잤을 때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다가 이제 제일 먼저 의식이 삭~ 돌아와요.
아직 눈 뜨기 전에 침대 속에서.
관찰하면 제일 먼저 의식이 삭~ 돌아오고
텅 빈자리에 의식 밖에 없어.
그러다가 새소리가 나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의식에
아무것도 없다가 새소리 때문에 공간감이 생겨요.
그리고 또 이게 지나가 버려. 시간감이 생겨.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다가 공간과 시간이 생기고
(요거는 같이 생겨요.)
그리고 그 위에서 다른 새소리가 포착되거나
아니면 삭~ 눈을 뜨게 되면
사물들이 요 시공간의 좌표 속에,
여기에 삭~ 이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텅 빈 의식에 형성되는 시공간이 있고
고 위에 지금도 그걸 해보시면
지금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텅 빈 곳에 의식이 꽉 차있고
그 의식 속에 시공간이 이렇게 펼쳐지고
그 위에 좌표 위에 삼라만상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럼 이걸 수행으로 삼아서 눈 뜰 때마다 해본다면
그러면 재미있는 게요~
그렇게 삼라만상이 삭~ 보이다가
동시에 내면에서도 생각이 또 삭~ 나타나.
한 생각이 또 삭~ 나타나.
(53:56)
그러니까 밖에는 시공간을 통해서 심리만상이 나타나고
나타나는 거나 떠오르는 거나 비슷한 말이에요.
내면에는 생각과 감정 같은 게 또 살며시 삭~나타나고.
만약에 여러분
그 관찰을 힘이 강해지면 이어질까요? 안 이어질까요?
이어지잖아요?!
밖에는 사람과 사물들이 인연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고
안에서는 생각과 감정이 또 인연 따라 삭~
그러니까 이게 안팎으로
이런 것들이 생겼다가 또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관찰이 된다 안 된다? 하면 돼요.
그게 수행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지혜가 생기는데 어떤 지혜냐?
그런 것들은 전부 다 현상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있고
그리고 본질은 텅 빈 채로 그대로 그 공간 자체를 만들고 있고
그러니까 이 텅 빈 의식의 공간 속에 인연 따라
밖에서는 물질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안에서는 생각 감정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그것이 지금 눈앞에 실상으로
그러니까 현상은 보여지니까 현(顯 나타날 현이고),
그리고 이 본질은 그것이 나타나는 바탕이니까 은(隱 숨을 은)
그러니까 은과 현이 동시로 항상 눈앞에서 이렇게 있고
그 안에 지금 모든 것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관찰이 눈 뜰 때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56:03)
그래서 말하자면
텅 빈자리에서 모든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고 자체가
저한테는 화두예요.
그 텅 빈자리에서
그 화두에서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니까
눈 뜨면서부터 화두가 자각이 돼요.
그러면 그것이 세수할 때도 그렇고 이어지고 이어지니까
버스 기다릴 때는 더 분명하고
이 텅 빈 화두 속에 모든 것이 그냥 생겼다 사라지는데
좀 뜬금없어.
생각도 그렇고, 근데 그날따라 무슨 생각이 많이 난다?
그날따라 같은 생각이 계속 나고 있다.
그러면 내가 그 순간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 거지
내가 어딘가에 마음을 뺏기니까
생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죠?!
재고가 쌓였구나.
마음은 물과 같아서 어딘가에 머물면 안 되는데
아 지금 내 마음이 어디 가서 머물러서 얼음처럼 딱딱해졌구나.
그러면 이거 가서 정리를 해야지.
얼음을 삭~ 녹여 버리면 다시 삭~ 통해서 흐르니까
이제 생각은 안 나 처리했어. 그렇게 사는 거예요. 재밌어요.
(57:38)
이렇게 그러니까 내가 어디가 매여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알면 해결책이 나와요. 몰라서 못 하는 거지
그러니까 모든 수행이라는 것은
눈 뜰 때부터 시작해서 깨어서 관찰해 보면 안팎으로 다 보인다.
이것이 안 막히고 툭 트이면 내외가 내외가 명철
밝게 뚫려 가지고 다 보여서 안 막히고 있으면
마음은 그냥 정말 자유롭고 잘 통하지.
잘 통하는데
만약에 뭔가가 좀 찝찝하면서 생각이 계속 나면
그게 지금 막혀 있는 거니까, 얼음이 얼어버리니까.
마음은 물과 같은데 얼어 있는 것을 다시 싹 녹여야지.
그게 싹 풀리면 다시 마음은 항상 통해 흘러야 돼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집착하고 머무르고 마음을 빼앗기는 바가 없이
이생기심( 而生其心) 통해 흘러라.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가 아니고 통해 흘러야 된다 이거죠.
근데 보통 사람들은 어딘가에 매여 있다.
매여 있으니까 생각이 자꾸 나는 거예요.
(58:57)
딴 게 아니라 모든 것은 무명에서 벌어지잖아요?
부처님이 발견하신 모든 고통의 원인은 무명이었잖아요?
이 명(明) 자가 톨레식으로 말하면 이게 의식이에요.
무명이란 말은 무의식!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내가 의식을 놓치는 거예요.
그게 무명이예요.
무명이면 우리 습관대로 넉넉하다 보면
습관대로 좋다 나쁘다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취사선택이 벌어져서 고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근데 깨어서 의식 상태에 산다면 무명이 명으로 바뀐다면
의식으로 깨어 산다면 그런 내 마음이 가서 머물지 않으니까.
(1:00:27)
눈길이 가지 않는다가 아니고 눈길은 가는데
그 뒤에 일어나는 좋다 나쁘다의
일련의 그 고통의 연쇄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눈길은 가죠, 현상은 펼쳐져요.
펼쳐지지만 거기서 멈출 수가 있는 힘이 생기지
이거 무의식 상태에는 무명에서는 멈추지를 못해.
무의식적으로 그냥 휩쓸려 가버려. 알겠죠?
그러니까 아침에 눈 뜰 때
자기가 명이냐 무명이냐를 챙기는 게 수행이다.
명이 화두니까, 눈 뜰 때 화두를 챙기면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거든요.
눈 뜰 때 한번 화두 챙기면
중간에 하다가 아차 좀 약해졌다 싶을 때는 한 번 더 챙기고
잘 때 한번 챙기고 하루에 세 번 챙긴다는 거예요.
화두를 하루에 세 번 챙긴다.
내가 지금 깨어 있는가 깨어 있는가?
깨어 있는 것 자체가 화두니까,
여러분 맞지요?
그래서 고수가 되면 하루에 화두 세 번 생기면 끝이라는 거예요.
눈 뜰 때 내가 지금 명이냐 무명이냐?
낮에 하다 보면 놓칠 수 있잖아요? 또 한 번 챙겨줘.
이 힘이 없는 사람은 자주 챙겨야지.
(그 시간에 무슨 할 일이 있어도)
깨어서 하는 거 하고 넋 놓고 하는 거 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그거 하나잖아요.
화두를 놓치는 것이 무명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1:02:00)
그런데 보세요. 여러분,
만약에 이런 화두라고 하는 장치가 없으면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나는 톨레처럼 현재에 깨어서 살래.' 해도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화두를 놓치지 않는다.', '틈날 때마다 화두를 챙긴다.' 이 말은
틈날 때마다 현재 지금 내가 깨어 있는 걸 확인한다는 소리잖아요?
확인할수록 힘이 강해질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초보자는 여러 번 챙겨야 되고 갈수록 줄어들고
고수가 되면 눈뜰 때 한번, 낮 동안에 한 번 정도, 밤에 잘 때 한번
그렇게 된다 이거예요.
그렇게 되면 항상 깨어있는 상태에서 살 수 있다.
그러면 첫 번째 화살은 맞지만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막 뒤집어지지는 않는다는 거죠.
항상 요 깨어있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으니까.
남은 몰라도 나는 화두드는 사람이다.
이 말은 나는 깨어서 있는 사람이다.
화두는 본질인 의식이 깨어있는 게 화두예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깨어 있느냐 안 깨어 있느냐 이 말은
내가 지금 화두가 들려 있느냐 안 들려 있느냐.
저 관세음보살님, 용두관음이잖아요, 용이 화두다.
이 순간에 내가 정확하게 화두를 타고 있느냐?
화두가 현재예요. 본질이니까!
화두는 본질이고 본질은 의식이고
의식은 항상 현재에만 의식이 있어요.
항상 의식은 현재에만 있어요.
'현재를 타고 있다.' 이 말이나,
'화두 들고 있다.', '의식이 깨어있다.' 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톨레는
'현재에 깨어있습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화두 놓치지 맙시다.'
아침에 일어나자 제일 먼저 화두부터 챙깁시다.
요런 말이 나한테 루틴(routine)하게 습관화시키기 위해서
뭔가가 필요하잖아요?
지금 뭐 쥐뿔도 없는 사람이
나는 그냥 알았으니까 오케이 알았으면 됐어.
안 된다 이거예요.
자기 무의식적인 습관을 못 이긴다.
현실에서는 무의식적인 습관을 이기기 위해서는
계속 화두를 챙겨야 한다.
그러려면 한 번은 집중해서 화두에 대한 만남을
화두와의 뜨거운 키스,
이 본질과의 뜨거운 키스를 한번 해야 되고
그러니까 그 키스는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훨씬 더 감각이 생겨 가지고
화두 챙기는 감각이 강해진다.
집중 수행에서 그런 걸 한 번하고,
그런 걸 통해서 일상에서 매번 매번 매번 매번,
언제나 돌아보면 지금 아닌가요?
돌아보는 게 화두다 이거예요.
(1:05:05)
언제나 이걸 챙긴다.
남하고 뭐 하다못해 옛날 사람은 그랬어요.
전쟁터에서도 화두는 챙긴다는 거예요, 싸우면서도.
깨어 있는 것이 이어지면 스스로 자각이 된다 이거예요.
내가 지금 깨어있는 상태라는 것이 자각이 된다. 그게 화두지,
따로 뭐 어험 앉아 가지고 뭐 그거 아니다 이거예요.
물론 힘이 없는 사람은 자주 앉아야 돼요.
그렇지 않나요?
안 그러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딸려가 버리는,
여러분 잘 딸려 가지요?
그래서 사실은 공력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꾸준하게 해야 됩니다. 꾸준하게 꾸준하게 해야지 힘이 붙는다.
(1:05:50)
< 또 다른 상대적인 진리에 대해 말해보자.
우주가 형상이 되어 탄생하고
이윽고 형상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제한된 시간의 관점을 의미한다. >
제한된 시간은 현상에서의 시간이에요.
< 이것이 당신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현상에서의 시간 할 때
나 자신의 삶이라는 것도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제한된 관점이다.
또 하나의 상대적인 진리다. >
톨레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의 삶' 이런 말 하지 않나요? '내 인생이' 이런 말 하죠?
'내 인생' 요런 말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분별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걸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나' 따로 '인생' 따로잖아요?
근데 실제로는 '나' 따로 '인생' 따로냐 이거예요.
'나'하고 '삶'이라는 것은 분리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언어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언어를 쓰고 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이런 관념이 굳어져 있어서
요런 말을 통해서
< 궁극적으로 당신의 삶이란 것은 없다.
당신과 삶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요런 말이 또 중요해요
왜 중요하냐면 보세요.
(1:07:32)
지금 본질이 무엇인가 그러잖아요?
본질이 무엇인가 그러잖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본질'이 있고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내가 있으면
나를 벗어난 '나'를 두고 따로 있는 '본질'이 있을까요?
아니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니 없다 하려면 그 말에 책임을 져야 돼.
근데 왜 찾느냐고? 찾으면 본질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찾는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본질은 본질이 아니라는
영원히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러면 왜 찾아보라고 하는가?
찾아봐야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이거예요.
근데
찾아보지도 않고 앉아가지고 '아 찾을 수 없네.' 해가지고는
자기 것이 안 된다 이거지.
뼈가 빠지게 고생해서 찾아봐야지, 거듭 실패를 해봐야지.
'아 찾을 수 없네.' 할 때 어떤 자각이 일어나느냐?
요 자각이 일어나요.
< 당신과 삶은 둘이 아니라 하나 >라는 거예요.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찾고 있는 있는 나'가 답이지,
이거를 두고 뭔가를 찾을 수는 없다는 걸 지금 듣잖아요.
근데 못 깨닫는 이유는
지금 생각하고 있어 또 이거를,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안 된다.
그래서 실제로 해봐라고 할 때는 하셔야 돼요.
해보면 여러분,
그러면서 송장 꿰고 다니는 놈이 먹고 하면서
그러면서 송장 꿰고 다니는 놈을 찾았다 하면
그 찾은 놈이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가짜예요!
왜냐하면 찾는 놈이 있고 나타난 답이 있다면
그게 어떻게 찾는 놈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답은 자기인데
자기가 자기를 찾는단 말이 얼마나 이게 말이 안 되는가 하는가를
우리가 뼈저리게 한번 느낄 때가 와야 된다.
이거를 뼈저리게 못 느끼는 이유는
이걸 못하는 이유는 찾는 습관이 그렇게 강하다는 거예요.
찾는 습관이 왜 강해요?
욕망이 강한 거예요. 한 마디로.
밖에서 돈과 여자와 명예를 추구하던 욕망을
마음공부에 가져와 가지고는
또 마음을 깨달으려고 또 욕망하는 욕망을
그걸 깨달아야 되는데요.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의 허무를 깨닫는 거지,
밖에서 뭐가 있어가지고 자기가 답이에요
근데 자기가 답인데 자기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이게 이상한 소리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돌이켜 보는
언제 철들래? 이렇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언제 철들래?
찾는 걸 멈춰야 되는데 근데 언제 멈추느냐?
찾고 있는 내가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하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자기 스스로 한번 돌아볼 봐야 된다.
그러면 해봐야 되지,
그러니까 이렇게 말로만 들어가지고는
가서 머리까지는 와도 가슴으로 안 내려오고
실제로는 배까지 와야 돼요.
항상 머리, 가슴, 배가 있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에서 그냥 그쳐.
그러니까 힘이 없어요.
가슴으로 와야 되고 그리고 배가지, 단전까지 내려와야 됩니다.
그러려면 실제로 해봐야 돼요.
그러니까 수행은 수행해 봤자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거는 모르는 소리예요.
수행은 안 되는 게 수행이에요.
수행을 해야지 안 되는 줄 알지.
그리고 수행은 안 된다고 아예 안 해버리면
그 무명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아예 없는 거예요.
깨달을 기회가 없어.
그러니까 해보고 헛짓이라는 걸 해봐야 알지! 아닌가요?
안 해보고 헛짓이까 아예 안 해. 그럼 아예 시작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요런 말에
지금 톨레가 지금 '나의 본질이라는 건 없다.' 이 말이잖아요?
음미해 보세요. '나의 본질이란 것은 없다.'
왜냐하면 '나' 따로 '본질' 따로일 수가 없기 때문에!
(1:12:22)
그러면 여러분 보세요.
나의 본질에서 자 여기서 선택! 여러분,
1번) 나와 본질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나를 버릴 수 있나요? 본질을 버릴 수 있나요?
둘 중에 하나뿐이라면 나와 본질에서
'아이 나 없어도 돼.' 하는 거하고
'본질이 없어도 돼.' 하고 하는 거하고
어떤 게 가능해요?
보세요. 실제로 나 버릴 수 있어요?
근데 본질 버릴 수 있어요, 없어요?
그따위 본질 뭐 없으면 어때?
본질은 관념이잖아요? 근데 나를 버릴 수 있느냐고?
희한하지 않나요?
아니 나 버릴 수 있어요? 지금?
근데 본질은 말이잖아요, 말?
말은 버릴 수 있잖아요? 남는 건 뭐예요?
이게 본질이라고(자신을 가리키며)
진짜 이게 참 이게 언제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반복해서 저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항상 그래요,
어느 분이 아미타불 염불을 그렇게 열심히 평생을 하시는데
아미타불을 버릴 수 있어요? 나를 버릴 수 있어요?
뭐가 더 중요해요?
아 그분은 100% 아미타불은 절대로 버릴 수가 없습니다.
관념이라고, 그분이 버릴 수 없다고 하는 아미타불은 관념,
실제 아미타불은 뭐예요?
나무아미타불하는 이게(자신을 가리키며) 지금 아미타불이잖아요?
근데 이거를 모르고 관념으로 아미타불을 만들어 놓고
그 아미타불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으니까 몇십 년을.
잘못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요런 말에서 알아차려야 되는 거죠
지금 본질이니 의식이니 아미타불이니 뭐
의식 본질 나아가면 신까지도
내가 대상으로 놓고 하는 신은 진짜 신이 아닐 거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와 대상이 따로 있으면 진짜 신이 아니고
그 신은 내가 만든 관념의 신,
관념의 신이 정확하게 우상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으면서 자기가 만든 우상을 믿어요.
이거 아는 기독교인들 많지 않잖아요?
똑같이 아미타불을 수많은 불자들이 믿고 있지만
아미타불 하는 자기가 아미타불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을 못할 거예요.
(1:15:41)
그래서
톨레하고 윈프리 하는 그걸 '악'이라고 '데빌(devil)'이라고 한다
그러잖아요? 바른 소리 하면.
나와 신이 둘이 있을 때 뭘 버릴 수 있는가?
같은 말이잖아요?
기독교 신자들은 다 나를 버리지 신을 버린다고는
꿈에도 말을 안 할 거 아니에요? 신앙이 좋은 분들이 일수록.
근데 생각해 보세요. 신은 버릴 수 있어요.
나를 버릴 수 있나요? 불가능하지 않나요?
나를 버릴 수 있느냐고 진짜로? 그 '나'가 '신'이라고요.
그러니까 신은 버릴 수 없다고!
요렇게 똑 떨어지는 말을 하는 게 이 톨레가
'나의 인생에서', '나의'는 틀린 말이다.
나하고 인생은 분리할 수가 없다.
요런 말에서 우리가
깨달음의 단초가 깨달음의 불꽃이라는 각성이 일어난다.
준비된 사람이라면 요런 말에서 결론으로
쉬는 시간 가지기 전에 여러분 길을 걸었잖아요?
그러면서 몸을 움직이는 놈을 찾잖아요?
기가 막히게 여러분,
몸을 움직일 때는 몸을 움직이는 놈이에요. 오케이"
몸을 움직이는 놈이에요
찾는 순간 움직이는 놈이 찾는 놈으로 변해버려요.
이게 뭐냐면 항상 관세음보살은 용을 타고 있어요.
용이 현재예요.
움직일 때는 그게 현재였는데 몸을 움직이는 걸 찾는 순간
찾는 놈이 현재가 돼버려. 이해되세요?
조금 전에 몸을 움직이는 것을 찾는 순간
그거는 과거가 돼버리잖아요, 찰나 간에.
그러니까 그놈은 없어지고 찾는 놈 밖에 없어.
지금 같은 말이 전부 다
나와 본질이 해서 아무리 해도 찾는 나가 본질이지, 이 말이나
몸을 움직일 때는 움직이는 놈이 찾으면 바로 그 순간
그 찰나 간에 찾는 놈으로 가있어.
왜냐? 본질은 현재에서만 존재하니까!
그러니까 보세요.
그럴 때는 그놈인데
그놈을 잡으려고 하면 잡는 놈으로 변하기 때문에
안 잡히는 거예요. 영원히 안 잡혀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깨달아야 돼.
몸을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찾는 순간 찾는 놈이구나.
아 그래서 제가 한 거를 보니까 2시간을 그랬거든,
제가 그 지랄을 했거든 2시간을.
다른 사람이 보면 제가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미친놈이라고 했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 봤으면
그 제 속마음을 읽었으면 미친놈이라고 해을 거예요.
근데 2시간 동안 못 찾았어.
그리고 너무 허탈해 가지고 아차 그때 아차가 왔고
매 순간순간 찾았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찾았기 때문에
매 1초라도 안 찾을 때가 없었어.
아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은 찾는 놈이었구나~
근데 그 찾는 놈이 1초도 없을 때가 없어.
지금은 아차 하는 놈이야. 허탈해하는 그놈이야.
그것이 한번 확인되고 난 다음에는 항상 이놈이에요.
이 말도 이해되세요?
내가 무슨 지랄을 해도 지랄하는 그놈이야.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그놈이야.
정확하게 현재의 의식이에요.
의식은 항상 현재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현재만이 실제예요.
의식만이 실제이기 때문에 현재만이 실제예요.
근데 요 미묘한 차이를 사람들이 이 스피드를 따라잡기가
그게 어렵다는 거예요.
'찾아라' 할 때는 '수행하라, 찾아라' 이 말은
그래가지고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걸 해가지고 알아봐라 이거예요.
그러나 그때 깨달음이 온다.
그렇게 깨닫고 나면 영원히 안 놓쳐요.
항상 이놈인데요 뭐, 항상 현재는 있지 안 나요?
현재에 무언가를 하고 있잖아요?
현재 뭔가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게 실상이라고.
거기에 초점이 가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면
그러면 되게 한갓져요.
내가 뭐 신경 안 써도 저절로 다 되고 있어, 사실은.
지금 하여튼 오늘도 지금 진도를 못 나가도
지금 10장의 마지막 제목이
빨리 의식을 깨닫고 그 의식이
이 순간에도 나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그런 삶을 살아라.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새로운 지구다.
그 메시지예요.
자 10분간 휴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