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 이호남
나는 주례사를 들어본 적 없다. 결혼은 했었으나 예식은 하지 않았고 다른 이의 결혼식은 식장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듣지 못했다. (들었다 한들 기억날 리도 없다) 이번 글감을 받고 또 고민이다. 경험하지 못한 걸 쓰는 건 남을 속이는 일이고 상상으로 지어내는 것은 더욱더 힘든 일이라 부모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부모님의 기일은 계절이 반대다. 아버지는 여름, 어머니는 겨울이라 상대적으로 어머니 제상(祭床) 준비가 덜 힘들다. 여태껏 두 분의 제사를 따로 지냈다. 어머니는 2000년에, 아버지는 2012년에 돌아가셨으니 햇수로 10년이 넘었다. 제사를 합치라는 말이 진작부터 있었으나 최소 10년은 따로 지내는 게 도리일 것 같아 그대로 모셨다. 그렇게 마음먹은 10년이 된 올해 아버지 기일에 누나와 동생에게 합제(合祭)에 대한 말을 꺼냈다. “내년부터는 두 분의 제사를 같이 모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누나도 동생도 모두 찬성이다. 이제 남은 건 어느 쪽으로 합칠 것인가이다. 주위에 물어봐도 사람마다 다르고 인터넷에서는 전통 예법에는 없는 법도라 한다. “제사든 차례든 모시는 사람이 편한 게 좋은 거”라는 누나의 말에 계절적으로 좀 더 편한 어머니 쪽으로 합치기로 했다. 하지만 고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두 분 모두 생전에 한 고집했던지라 한쪽으로 모으면 제삿밥 자시러 와서도 싸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두 분의 결혼기념일로 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둘 다 불만이 없을 듯했다. 근데 문제는 부모님이 기념일 챙기는 것을 못 본 적이 없어 우리가 그 날짜를 모른다는 점이다. 요즘이야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게 기본이지만 먹고 살기에 바빴던 부모님 세대에 기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다행히 동생이 앨범에 부모님 결혼식 사진이 있는 것을 기억해 냈고, 집에 가서 사진 뒤편에 찍힌 날짜를 메시지로 보내줬다. 1975.11.22. 이날이 내년부터는 부모님 기일이다. 그렇게 오랜 고민이었던 합제(合祭) 문제를 해결하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며 먹은 술이 부족해선지 잠은 오지 않고 눈만 말똥거린다. ‘누나가 70년생이고 난 72년, 동생은 76년 6월인데, 결혼식이 75년 11월이라…….’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언젠가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심하게 결혼을 반대해서 도망 나와 살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첫 기일에 작은아버지께서 “할머니가 너희 어머니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 한동안 형님이 본가에는 왕래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씀 하셨다. 두 분이 만났을 때는 아버지가 스물, 어머니는 스물다섯 무렵이었다. 젊은 나이에 만나 결혼식도 하지 않고 살 만큼 열렬히 사랑했던 분들이 왜 사는 동안은 하루가 멀다고 때리고 부수면서 그리 유명짜하게 사셨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사고에는 급제동이 걸렸다.
글감을 받고 부모님의 결혼식을 떠올려 보았다. 끝내는 양가의 반대를 이겨내고 어쩌면 동생을 임신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의지의 청춘들이 그날 들었던 주례사는 어땠을까? 주례사를 들으면서 신산했던 과거가 생각나 눈물이 났을까? 아니면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이 뛰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어렵게 사랑했고, 힘들게 결혼했으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지 왜 그리 사셨을까? 난 아직도 기억한다. 어머니가 심정지로 쓰러져 조선대 병원으로 이송되고도 의사 파업으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열흘 넘게 응급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버티다 결국엔 다시 내려왔던 그 날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수술을 받고도 고작 3개월 더 살다 가신 어머니가 했던 말도 기억한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병원에 올 때마다 인사도 없이 쌩하니 나가 버리곤 했던 나를 붙잡고 ‘아버지한테 그러지 마’라고 손바닥에 썼던 유언 같았던 말이 아직도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다. 허구한 날 자신을 때리고 외박을 밥 먹듯 했던, 어쩌면 이렇게 누워 있게 만든 장본인일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밉지 않았을까? 아니면 당신은 미워해도 자식인 내가 미워하는 건 가슴 아팠을까? 그리고 왜 아버지는 어머니 무덤가에 동백을 심었을까?
아버지의 동백은 이제 내 키만큼 자랐다. 꽃이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진다는 동백나무. 이번 설에는 가서 말해야겠다. 가고 난 뒤 눈물 흘릴 거면 살아있을 때 잘 좀 해주지 그러셨소. 아프다 할 때 병원에라도 데려가지……. 용필 씨, 춘자 씨, 내년 기일에는 손잡고 오셔서 맛있게 잡숫고 가세요. 그리고 그곳에서는 싸우지 마시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첫댓글 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러 오신 아버지도 속으로는 많이 후회하지 않으셨을까 싶네요. 우리 어머니 세대 여자들은 대부분 왜 그렇게 삶이 힘들었는지. 그런 환경에서도 자식들 잘 키워 내신 걸 보면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도 어머니 돌아가신 후 3년 정도 있다 뇌출혈 쓰러지셨습니다. 그렇게 7~8년을 간호하면서 아버지께 품었던 원망, 미움도 다 씻겼습니다. 말은 안 하셨지만 반려자를 잃은 고통이 컸나 봅니다. 당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도...... 어릴 적엔 죽을 만큼 힘들다 생각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니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항상 힘든 건 아니었으니까요.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할 정도로 사랑했지만 결혼생활은 현실이라서 생활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나 봅니다. 가슴 한켠이 짠해지네요. 부모님 세대의 삶을 거울삼아 우리는 그리 살지 않도록 늘 명심해서 소중한 배우자에게 잘해야겠어요. 있을 때 잘하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아버지, 어머니께 드리는 주례사라 생각하고 썼습니다. 두 분 다 50대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다 보니 운동하러 갈 때 간혹 보는 노부부의 흰머리가 부모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눈물이 핑그르 돕니다. 손바닥에 새겨진 엄마의 마음, 그 또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저도 그 때는 이해 못했지만 미움도 사랑이라는 말, 나이를 먹고 나니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전 반댑니다.
후세에서라도 다른 사람 만나서 알콩달콩 살아 보셔야죠.
엄마도 사랑 받고 살 자격 충분합니다.
또 아버지를 만나걸랑 천리만리로 도망가라고 말하고 싶네요.
제 부모님과도 비슷한 상황이라 감정이입하여 읽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다음 생을 선택하실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 말씀하셨어요. 저도 그랬음 좋겠습니다.
제가 지켜본 어머니는 아버지를 많이 좋아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 적이 많아서 어떤 게 본마음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젠 물어볼 수도 없고요.
그래도 자식 된 입장에서는 두 분이 거기서라도 행복하게 사셨으면 해서요 읽어 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가 생전 입버릇처럼 "내가 살아온 얘기를 누가 책으로 써 줬음 좋겠다. 기막힌 세월, 다른 사람이 좀 알게"라고 말씀하셨던 것, 이렇게라도 들어 드린 것 같아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