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감사 도약하는 우리
2024년 4월 4일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창립 백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태화복지재단 창립 103주년 기념식도 겸했다. 이런 뜻깊은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2005년부터 공주복지관 운영위원으로 위촉받은 이후 2023년까지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던 당사자로서 먼 거리를 마다않고 기쁘게 달려갔다. 공주복지관 백년의 역사는 단순히 그 지역의 한 단체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감리교회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한 순간이었다. 또한 조국의 근대화를 앞당기고 일류 복지국가로 거듭나 세계를 놀라게 한 대한민국 복지 역사에서 뺄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공주복지관은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공주로 파송한 덴마크 출신의 마렌 보딩(Maren Peterson Bording, 保雅鎭) 선교사가 1924년 공주읍에 세운 공주중앙영아원을 설립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마렌 보딩 선교사는 1878년 4월 20일에 덴마크 윌란(Jylland) 반도에 위치한 라스비(Lasby)에서 태어났다. 1902년 간호사 훈련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 이 학교와 병원에서 근무했다. 그 후 1915년 9월까지 보딩은 미국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1916년부터 필리핀 간호선교사, 1922년에 쿠크카운티 병원에서 간호훈련을 받은 후 동년 그해 10월에 조선에 들어와 공주선교회에 소속하여 노만 파운드 박사를 도와서 의료 선교 사업에 헌신했다. 이때 보딩은 간호사 업무만이 아니라 파운드 박사와 지역 순회 진료도 다니면서 유아의 영양실조 개선과 위생환경 개량이 얼마나 절실한 지를 깨달았다. 그것이 1924년 1월 초부터 유아복지사업을 시작할 동기를 부여했다. 이때 영아원에 등록한 80명 중 20명의 유아가 아사(餓死)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영아 살리기에 온몸을 다 바쳤다. 1926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서울지역에는 5세 미만의 아동 사망률이 50%에 육박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심각했다. 이에 보딩 선교사는 우유급식소를 운영하고, 우량아선발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영아사망률이 5%로 줄었다.
당시 백성들은 우유가 소젖이라는 부정적인 선입관이 편만해 있어서 우유보급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죽어나가는 아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백성들은 점점 인식의 전환,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진료소에 몰려들자 어린이를 치료하고 수용할 별도의 건물이 필요했다. 1926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이 영아관 신축공사 낙성식 기사가 실렸는데 미국인 데이튼 부인의 3천 원을 자선사업에 쓰라는 유언으로 세워졌다. 이렇게 후원으로 건물을 신축할 정도로 당시에 중요한 사업이었다. 공주중앙영아관과 우유급식소가 세워진 후 1927년 보딩은 공중위생간호학원을 설립하였다. 한국에서 의사면허를 취득한 보딩 선교사는 혼자 왕진을 다니며 환자를 치료했다. 가정을 방문하여 산모를 포함한 여성들에게 출산과 육아를 가르쳤다. 이렇게 유아 복지의 혜택을 받은 어머니들이 자모회를 결성하여 가난한 집안의 아기들과 어머니가 없는 아기들을 돌보았다.
또한 보딩 선교사는 영아관에서 산전(産前) 클리닉과 조산(助産) 프로그램인 ‘산전 및 조산술 관리(Prenatal and Midwifery Care)’를 운영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출산 방법보다 안전한 출산 방식을 교육했다. 이때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많았다. 1929년 안식년을 마치고 1930년 한국으로 돌아온 보딩 선교사는 1943년 4월 1일에 은퇴하기까지 공주와 대전을 중심으로 영아 살리기, 건강 복지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 후에도 의료 활동을 계속하다가 그는 1957년 9월 24일에 향년 7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전후 빈곤했던 시절 보딩 선교사의 우유급식 사업 정신을 이어 1957년 모자지도관이 재개된 이후 1968년 공주기독교사회관으로 발전하였다. 기독교 정신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열심히 지역을 섬기다가 1984년 공주기독교종합사회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마침내 2024년 설립 백주년을 맞이하여 '백년의 감사, 도약하는 우리'라는 표어를 세우고 또 다른 백년을 향해 새롭게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날 기념식에는 태화복지재단 이사인 성기명 목사가 마 5:7의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말씀을 선포했다. 이 기념식에 특별히 참석한 분이 있어 소개한 후 좌중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1950년대 모자지도관에서 현재의 사회복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을 수행했던 강재호 할머니(97세)가 참석했다. 그가 좋아했던 찬송가 64장 ‘기뻐하며 경배하세’를 함께 부르며 그를 축복하고 격려했다.
공주복지관은 이제 또 하나의 백년을 향하여 도약을 꿈꾼다. 미개했던 나라, 세상에 감춰져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세상에 첫 얼굴을 들어냈던 조선은 철저한 계급사회로 가난하거나 천한 계층은 사람 취급받지 못했던 봉건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도 생명은 평등하고 귀하다는 사상을 불어 넣어 주었던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의 백년의 역사는 어느 새 대한민국을 민주 복지국가로 세워 놓았다. 오늘 대한민국이 경제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찍이 가난한 자를 섬겼던 나라와 민족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을까? 더욱 좋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할 사명을 가슴에 안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태복음 19:21).
공주기독교사회종합복지관
1924년 출장진료소(경천) 치료하는 파운드 의사와 마렌보딩 선교사
1924년 우유급식소 앞 마렌 보딩 선교사와 아이들
1926년 마렌 보딩 선교사와 공주 중앙영아원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