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 연보(年譜) / 임인년(1902, 광무 6) 선생 70세
3월 다시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제배(除拜)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때에 상이 영조의 고사(故事)에 의해서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려는데 문관 정경(正卿)으로서 나이가 70이상인 자는 모두 참여하도록 허가한 까닭으로 이 명이 있었다. 선생은 연전에 공조 판서로 발탁되었을 때에 이미 의(義)를 지켜서 정경으로 자처하지 않았고, 그후 찬정(贊政)으로 제수되었으나 또한 한결같이 고신(告身 벼슬에 임용할 때 주던 직첩(職帖))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비록 우연히 나이가 칠순(七旬)이란 것으로서 버젓이 영수각(靈壽閣)에 숙배(肅拜)한다면 임금의 은택은 비록 크더라도 나의 의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여 드디어 짧은 상소로써 병을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더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런 드물게 있는 경사로운 기회를 만났으니 경의 도리에 있어서는 바삐 진참(進參)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4월 정헌대부로 승진(陞進)되었다.
노인을 우대하는 은명(恩命)이었다.
○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 여행을 떠났다.
한라산(漢拏山)ㆍ금강산(金剛山)ㆍ두류산(頭流山)을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이라 부르는데, 선생이 한라산과 금강산은 이미 한 차례 유람했으나 두류산은 아직 구경하지 못하였다. 이해 봄에 하동(河東)에 있는 종인(宗人) 최정현(崔廷鉉)이 횡천(橫川)에 문창후의 사당을 다시 설립하고 전에는 금천(琴川)에서 제향하였는데 이번에 옮겨 세웠다. 봉안(奉安)하는 날짜를 통고하면서 선생에게 참석하기를 굳이 청했다. 마침 문인 유기석(柳淇錫)ㆍ신종식(愼宗軾)과 종인 최기호(崔基鎬)가 와서 뵙고, 두류산을 관람하기에는 이번이 알맞은 시기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로 인해서 길을 떠났는데 문인 곽한소(郭漢紹)가 모시고 따랐다.
공주 공암(孔巖)을 방문하여 충현원(忠賢院) 옛터를 찾았고 옥천(沃川)을 방문하여서는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상공을 뵙고, 연재(淵齋) 송공을 방문하여, 8대조 상서공(尙書公)의 묘표(墓表)를 청하였다. 드디어 고개를 넘어 안의(安義) 수승대(搜勝臺)와 광풍루(光風樓)에 오르고
함양(咸陽)을 지나면서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례하였다. 돌아서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는데, 누(樓)는 곧 함양 인사가 문창후의 남긴 인애(仁愛)를 잊지 못해, 사모하는 뜻으로 창건한 것이었다. 앞에 울창한 숲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는 문창후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단성(丹城) 신안 정사(新安精舍)에서 이틀을 유숙하였다. 그때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계남(溪南) 최숙민(崔淑民)이 함께 와서 모였다.
면암집(勉菴集) 年譜
過咸陽。拜灆溪書院。轉至學士樓。樓卽咸之人士。不忘文昌侯遺愛而寓慕刱建者也。前有長林。世傳文昌侯手植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