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궁주는 궁으로 돌아온 후 폐관 수련에 대한 준비를 서 둘렀다. 보물은 힘이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피를 부른다. 설사 힘이 있는 자의 손에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헛된 욕심을 부리는 자가 나타나면 피를 피할 수 없다. 북해빙궁에서 빙정을 원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빙정 은 전설에서나 나오는 보물이라는 생각에 평소라면 아무도 헛된 꿈을 꾸지 않는다. 하지만 빙정을 흡수해 내공을 크게 높일 욕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빙궁주는 자기가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철저히 비 밀로 했다. 사람들이 자고 있을 시간에 빙궁으로 몰래 복귀했 으며, 비밀호위들을 시켜 남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 비밀호 위들마저 빙정의 정체를 알 수 없도록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어떻게 보면 좀 지나치게 조심한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옆에서 따라다니며 그 모습을 보던 주유성이 투덜댔다. "궁주 할아버지, 이거 좀 과하게 하시는 거 아녜요?" 그의 상식으로 볼 때 이건 지나치다. 빙궁주는 이걸 말해줘야 하는지 마는지 잠시 고민했다. '이 녀석은 이미 보물을 보고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지. 행 여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그때는 이미 내가 모든 것을 이룬 후. 한번 흡수한 빙정은 돌아오지 않아.' 그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 거렸다. 그리고 그걸 말해도 될 만한 사람은 이미 진실을 어 느 정도 아는 주유성뿐이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다. 공연히 피바람에 휘말릴 필요는 없잖느냐." "의외로 속이 좁으시네." "커험! 그게 아니라니까.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는 게 여러 사람에게 좋은 거라네." 주유성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말했다. "그러시겠죠. 그러실 거예요. 그러니까 제 황금부터 먼저 주세요." 주유성은 이제 빙궁주에게 돈 떼먹히는 것 아니냐는 걱정 이 들었다. 빙궁주는 당장이라도 폐관 수련실에 자리를 잡고 빙정을 흡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자리 잡는 건 자기 마음이지만 빙정을 흡수하는 방법이 문제다. 그는 최고의 내공심법으로 빙정을 흡수하고 싶었다. 어정쩡 한 것으로 이 정도 크기의 빙정에 도전했다가는 혈맥이 얼어 붙어 죽을 위험이 있다. 설사 성공해도 심법이 나쁘면 날려먹 는 양이 많아진다. 당연히 빙정의 기운을 날려먹는 만큼 손해 다. 따라서 먼저 최고의 심법을 익히고 있어야 한다. 빙궁주가 궁주 전용 수련실에 앉아 상자를 조심스럽게 만 졌다. 대대로 전해져 오는 열쇠로 자물쇠에 넣고 돌리자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상자 속에는 얇은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있다! 북극심법. 크흑. 드디어 이걸 회수했구나. 할아버 지, 아버지, 제가 드디어 북극심법을 찾아왔습니다." 또르르 흘린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가다가 얼어붙었다. 원 래 추운 북해빙궁이고 폐관 수련실은 그중에 특히 더 추운 곳 에 만들어져 있다. 거기에 더해서 빙정의 영향을 받아 지금은 눈물마저 얼어붙을 정도였다. 북극심법은 북해빙궁 최고의 심법이다. 대대로 궁주에게만 전해지는 것이다. 내공을 쌓는 속도야 특별히 탁월할 것이 없 지만 그 정순함에 있어서 다른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심오 한 심법이다. 그리고 빙궁주만이 익힐 수 있도록 허락된 심법 이다. 북해빙궁 최고의 무공은 북극심법을 이용해서 펼쳐야 제 대로 된 위력이 나온다. 따라서 빙궁주만이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다. 그것이 빙궁주가 북해빙궁 내에서 절대강자의 위 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사용되어 온 방법이다. 그런데 이것을 잃은 후로 중원무림에서도 손꼽던 고수이던 북해빙궁주의 무공은 크게 하락했다. 예전에는 빙궁주에게 사고가 생겨도 심법을 전수받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다음 대의 궁주가 진법을 통과해 들어가서 잘 쓰여진 비급을 보고 익히면 그만이다. 하지만 삼백 년 전부터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때 진법의 생문이 사라지고 당시 궁주는 사망했다. 그 이후로 북극심법 의 전달은 완전히 끊겼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것을 찾았다. "아이들에게 극한빙장 같은 편협한 무공을 익히게 하던 것 도 이제 끝이다. 익힌 무공을 숨기게 할 필요도 없어. 이제 마 음 놓고 실력 발휘를 하라고 해도 되겠군. 누가 뭐라 해도 뒤 에는 사상 최강의 내가 있으니까. 으하하하!" 빙궁주는 웃음을 멈추고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는 어느새 심법의 연구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주유성은 북해빙궁 최고의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 다. 이미 빙궁주가 단단히 내려놓은 명령이 있었다. "우리 빙궁의 기둥뿌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주 공자에게 음식을 아끼지 마라." 그 명령에 의해서 빙궁의 최고 주방장은 비장의 재료를 닥 치는 대로 소모했다. 인근에서 신선한 재료를 수없이 사들였 고 그것으로 끝없이 음식을 만들어 바쳤다. 주유성은 그 요리의 바다에서 뒹굴었다. 항상 배가 뽈록해 서 돌아다녔다. 먹다 지치면 좋은 자리를 찾아 뒹굴었다. 그 옆은 냉소미가 졸졸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주 오빠, 혼자 그렇게 먹어대다가 배 터져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주유성이 배를 흔들었다. "이히히. 귀엽지 않냐?" 냉소미가 피식 웃으며 그 배를 통통 두드렸다. "이게 다 어디로 없어지고 금방 홀쭉해지는지 몰라.' 둘이 배를 두드리며 노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눈꼴이 시 어서 몸을 떨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빙궁주가 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는 이제부터 있을 내 폐관 수련을 기념하기 위함 이다." 빙궁주의 말에 수많은 아들딸들, 그리고 아내들, 손자, 손 녀들이 일제히 외쳤다. "대성을 기원합니다!" 빙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얼굴을 했다. 드디어 북 극심법의 이해를 끝낸 그는 그것을 수련하며 빙정을 흡수하 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거하게 잔치를 벌였다. 빙궁주의 눈에 벌써부터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주유 성이 보였다. "주 공자는 나의 수련이 기쁘지 아니한가?" "쩝쩝. 꼭 살아 나오세요." 주유성은 빙궁주가 어떤 방법을 써서 빙정을 흡수하려고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빙정에서 풍기는 어마어마한 냉기 를 느끼고 그것이 지나치게 강력한 것임은 깨닫고 있었다. 흡 수하다가 한순간의 실수만 해도 동태가 되기 십상이다. 그의 말은 걱정 어린 진심이었다. 빙궁주도 진심임을 안다. 자신도 일말의 두려움이 없는 것 은 아니다. 그래서 그 대답에 만족했다. "고맙네. 내 꼭 살아서 나오지."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다르다.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주유성이 눈꼴시어서 못 봐주겠다고 생각하던 사 람들은 심하게 인상을 썼다. 그중 하나가 먼저 나섰다. '건수를 잡았다. 요놈, 당해봐라.' "이런 무례한 자를 봤나! 감히 할아버님께 그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질세라 다른 몇 명도 일어섰다. "이런 똥물에 얼려 죽일 놈!" "겨울바람에 말려 동태를 만들어 버릴 놈!" "북해의 바닷물에 백번을 담글 놈!" 냉소미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어린것들이 어딜 나서?" 빙궁주의 손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소미 고모는 가만있어. 그딴 놈에게 눈이 멀어버린 고모 가 낄 자리가 아니야." 이런 분위기에 밥이 맛있을 리가 없다. 주유성이 그들을 힐 끗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평소에 나를 노려보던 놈들이네?' 주유성이 뜯어먹고 있던 바다가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한 그의 몸에서 싸늘한 기색이 나왔다. 네 명의 손자들이 반색을 했다. '요놈, 박살을 내버리겠다.' "나와라! 네 돼지 같은 입만큼 실력이 있는지 보자!"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셋도 덩달이 호응했다. 주유성은 입맛이 완전히 떨어졌다. 하도 잘 먹었더니 적어 도 당분간은 먹는 것에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손을 근 처에 놓인 수건에 쓱쓱 닦았다. 빙궁주가 살짝 인상을 썼다. 평소에 성질이 조금 급박하던 손자들이다. 손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녀석들이라 모두 이미 이십대다. 그래도 그는 다른 아이들이 말려줄 줄 알았다. 자기 체면에 직접 나서기는 싫어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 다. 모두 놀고먹는 주유성에게 불만이 많았다. 빙궁주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 주유성은 북해빙궁의 은인이다. 더구나 그는 주유성이 나 이에 비해서 무공이 대단한 고수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모르지만 그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 것만 가지고도 자기 손자들 정도는 박살이 나고도 남 는다. 손자 사랑하는 마음에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빙궁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하는 게냐! 감히 내가 차린 잔치에서 싸움을 걸다니!" 빙궁주의 몸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서슬 시퍼런 빙궁주의 태도에 놀라 사람들은 즉시 몸을 움 츠렸다. 네 명의 손자는 그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 수 없었다. '하는 일 없이 노는 놈에게.' '평소 행동을 보면 무공도 별 볼일 없는데.' '얼음 조각 잘하는 것이 전부인 놈을.' '얼굴이 반반한 남자는 다 죽어야 해.' 하지만 감히 거부하지는 못했다. 북해빙궁에서는 빙궁주 의 말이 법이다. "끄응! 주 공자에게 사과드립니다." 네 명의 말에 주유성이 일어서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빙궁 주가 편들고 사과까지 받자 워낙 속 편한 놈이라 다시 입맛이 돌았다. 그는 먹다 남긴 가재를 잡으며 말했다. "니들 운 좋았다." 정말 운 좋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용의 아가리에서 빠져나 온 것을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억울했다. '두고 보자!' 빙궁주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주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주 공자! 그런데 주 공자의 나이가 몇이지?" "스무 살인데요?" "저런. 스무 살이면 장가가야 할 때잖아. 그래, 짝은 있고?" 주유성은 슬슬 불안해졌다. 빙궁주의 태도가 수상했다. "아뇨." 빙궁주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저런! 세상 여자들이 주 공자를 못 알아보는군. 소미야, 주 공자가 혼자라는구나." 주유성의 옆에서 깔짝대던 냉소미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머, 아빠도." "허허, 너답지 않게 부끄러워하기는." 짝을 지어준다는 데 부끄러워하는 것은 정말로 냉소미답 지 않은 일이다. 사실 그녀가 부끄러워한 것은 그만큼 들이댔 지만 실패한 자신의 처지다. '어쩌면 주 공자는 고자일지도 몰라.' 빙궁주가 냉소미의 태도를 오해하고 말했다. "주 공자, 소미 저 아이가 저래 보여도 남자 한번 사귀어보 지 않은 아이라네. 우리 북해에서 저 나이까지 그런 아이는 흔치 않아. 그만큼 조숙한 아이란 말씀이지. 미모도 우리 궁 에서 최고이고. 집안이라 하면 바로 내 딸이 아닌가. 하하하! 말해놓고 보니 이거 정말 최고의 신붓감이군. 저 아이를 얻는 남자는 정말 복받은 거지." 주유성이 뜯어먹던 바다가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따님 시집보내시게요?" 빙궁주가 반색을 했다. '이놈을 얻는 것은 북해빙궁의 복이다. 소미에게도 최고의 신랑감이고.' "마음이 있나? 자네가 마음만 있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밀 어줌세." 그의 말에 잔칫상의 분위기가 빠르게 냉각됐다. 냉소미는 빙궁주의 말이 반갑지 그지없다. '나 혼자 들이대서 실패했지만 아빠가 도와준다면 또 다르 지. 주 오빠, 오빠는 이제 내 거야.' 신이 나서 얼굴에 웃음꽃이 확 피었다. 그녀의 친오빠인 냉 소천도 내심 반가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입장이 다르다. 그들은 빙궁주의 태 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미친 거 아냐?' '소미, 저년은 왜 또 좋아서 난리야?' '콩깍지다. 틀림없다.' '약점 잡혔나?' 다들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꿍꿍이 를 꾸몄다. 사람들의 노려보는 시선을 받은 주유성이 몸을 부르르 떨 었다. '안 좋다.' 주유성에게는 튼튼한 마차가 한 대 주어져 있다. 그 마차에 는 황금 이십 관이 숨겨져 있었다. 마차를 끄는 것은 네 마리 의 말이다. 마차에 황금이 실려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다. 그 건 빙궁주와 냉소천만 아는 일이다. 보물을 가진 것을 여러 사람이 알아서 좋을 건 없다. 주유성이 돌아갈 때 이 마차를 몰아줄 사람은 북해빙궁에서 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주유성은 멍하니 있다가는 마차 에 타고 가는 것이 마부 한 명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눈치 챘다. 주유성이 마차 외벽을 쓰다듬었다. '쳇! 귀찮게 왜 여자는 붙여주려고. 이 일을 어쩐다." 그는 가볍게 툴툴대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피식 웃 으며 말했다. "나 찾아왔냐?" 어둠 속에서 네 명의 빙궁주 손자가 걸어나왔다. "이 버르장머리없는 새끼. 감히 소미 고모를 노려?" "미약을 쓴 거야. 틀림없어. 제정신이라면 소미 고모가 이 런 놈에게 넘어갈 리가 없어." "게으름뱅이 주제에 노릴 걸 노려야지." "잘생긴 놈은 죽어라." 주유성이 네 명을 보고 있자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해결 법이 생각나서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영락없는 비웃음이다. 네 명은 빙궁에서 최고의 신분이다. 언제나 좋은 대접을 받 았고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이제 자기들보다 더 대접이 좋은 게으름뱅이가 삐딱하게 나오자 콩알만큼 있던 자비심이 사라 졌다. "무엄한 게으름뱅이 놈아! 박살을 내주마!" 넷 중의 하나가 주유성에게 몸을 날리며 주먹을 뻗었다. 주 유성을 만만하게 보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아주 방심하지는 않았다. 주유성이 이 추운 북해에서 편안히 돌아다니는 모습 을 본 때문이다. 내공이 약하면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주먹에 담긴 내공의 힘은 상당히 강했다. 주유성이 그 주먹을 슬쩍 움켜잡았다. 금나수법의 흡자결 을 써서 살짝 당겼다. 상대는 무공이 얕지 않다. 하지만 기겁을 했다. '흐엇. 몸이 빨려 들어간다.' 놀란 것은 놀란 것이고 그동안의 수련은 수련이다. 즉시 힘 의 중심을 뒤로 이동시키며 팔을 잡아 뺐다. 주유성은 그 움직임이 바뀌는 찰나에 척(斥)자결을 써서 당 기던 손을 반대로 쓱 밀었다. 상대는 중심을 뒤로 이동시키던 상태에서 주유성의 힘이 더 해지자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더 고수라면 보법을 이용해서 벗어났겠지만 그는 그 경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힘에 밀려 그대로 뒤로 풀쩍 날아가서 바닥을 굴 렀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다른 세 명의 안색이 급변했다. "고수다!" 주유성이 비웃었다. "그럼 그냥 무엄한 게으름뱅이인 줄 알았어?" 세 명이 급히 자신의 검 손잡이를 잡았다. 주유성의 몸이 유령처럼 다가왔다. 사람들이 검을 뽑으려고 했다. 검이 막 뽑혀 나왔다. 그 손 을 주유성이 연달아 콱콱 눌렀다. 누르는 손이 너무 빨라 제 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빠져나오던 검은 그 즉시 검집으로 밀려들어 갔다. 세 명은 어이가 없었다. 셋이서 한 명의 손놀림에 눌려 검을 뽑지 못 했다. 그중 한 명이 얼굴을 붉히며 검을 다시 뽑았다. 그러나 그 것도 채 반도 뽑히기 전에 주유성에 의해서 다시 밀려들어 갔 다. 세 명은 검을 뽑으려고 몇 번을 더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 마다 주유성에 의해서 다시 밀려들어 갔다. 이제 세 명의 얼 굴은 흙빛이 됐다. 그들은 이 상황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았 다. 자빠졌던 다른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대, 대단한 고수다!" "대단한 게으름뱅이 아니고?" 그들 네 명의 얼굴은 이제 시체처럼 꺼멓게 죽어 있었다. '원한다면 우리쯤은 단숨에 쳐 죽일 수 있는 고수다.' 처음의 소란이 들렸는지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유성이 네 명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 자세로 꼼짝 말고 있어라. 조금만 움직여도 죽는 다." 네 사람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저항하고 싶지 않았 다. 그들이 느낀 충격은 그만큼 컸다. 주유성이 쓰러졌던 사람의 몸에 묻은 지푸라기들을 깨끗 하게 털어주었다. 세 명은 여전히 검 손잡이를 잡은 상태고 한 명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서 있는 사람의 팔을 들어 주먹을 앞으로 뻗도록 했다. 다리 자세도 교정했다. "이대로 있어야 해."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만족한 그는 네 명에게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닥을 잘 살핀 후 드러누웠다. 네 명은 주유성이 무슨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 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때 마구간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냐!"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빙궁주의 아들도 있었다. 그는 거의 중년이었다. 주유성이 그를 발견하고 눈이 반짝였다. 즉시 소리를 질렀 다. "아이고! 나 죽네! 궁주 할아버지가 초대한 나를 저놈들이 마구 패네!" 그는 팔다리를 흔들며 마구 버둥댔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은 자기들이 들은 것이 누군가 요란하 게 쓰러지는 소리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유성이 쓰 러져서 죽겠다고 하고 있다. 네 명의 손자 중 한 명은 서서 주먹을 내밀고 있고 다른 세 명은 검을 당장이라도 뽑을 것처럼 잡고 있다. 상황이 명확하 다. 빙궁주의 아들이 급히 말했다. "뭣들 하느냐? 주 공자를 모시지 않고?" 그의 말에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주유성을 부축했다. 빙궁주의 아들은 네 명에게 다가가더니 따귀를 연달아 때 리며 소리쳤다. "네 이놈들! 평소에도 말썽만 피워대더니 이제 아버지의 손님에게 손찌검을 해?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더냐?" 네 명은 진짜로 억울했다. "사, 삼촌,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모두 근신하고 있어라. 아버지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는 것을 네놈들도 잘 알 터. 아버지가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오시면 그 진노를 감당할 각오나 해라!" 네 명은 사색이 됐다. 변명을 하고 싶다. 하지만 증거가 없 다. 자기들은 서 있고 셋은 마치 칼질이라도 할 자세였다. 쓰 러졌던 한 명은 주유성의 꼼꼼한 손짓에 넘어진 흔적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가 주유성을 때린 것처럼 되었다. 그리고 주유성이 확실히 쓰러져 있다. '당했다!' 물론 그들은 당했다. 제대로 당했다. 깊은 밤에 주유성은 마구간으로 조용히 숨어들어 왔다. 그 는 음식을 잔뜩 챙겨온 커다란 주머니를 자신의 마차게 집어 넣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 네 마리를 마차에 연결했다. 일을 마친 주유성이 조용히 마차를 몰고 마구간을 빠져나 갔다. 다음날 아침 난리가 났다. 주유성의 방에 찾아갔던 냉소미 가 사람 대신 남겨져 있는 편지 한 장을 찾았다. 요새 들어 단꿈에 부풀어 있던 냉소미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정신없 이 움직였다. 빙궁주의 큰아들은 이미 사십대 중반이다. 빙궁주가 폐관 수련 중이니 그가 대신해서 사태를 지휘했다. 그가 주유성이 남긴 편지를 읽어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빙궁에서 박대를 받아 떠나는 거라고?" "예, 큰형님. 그리고 주 공자를 박대한 네 명 중 하나는 중 환이죠. 큰형님 아들인." "크흠! 이거 아버님이 수련을 끝내시면 아주 난리가 나겠 군. 큰 인물이니 귀하게 대접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그 런데 정문은 어떻게 통과했대? 마차까지 몰고 갔으면 정문 무 사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무사들이야 들어오는 사람은 막아도 나가는 사람까지 그 러지는 않잖습니까? 더구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버님이 직접 잘해주라고 한 주 공자입니다. 잠깐 나간다기에 그러나 보다 했다더군요." "바보 같은 놈들. 잠깐 나가는데 마차를 몰고 가? 그걸 보 고도 바보같이 보내주다니. 그럼 식량은? 이 추운 북해에서 식량 없이 움직이면 틀림없이 굶어 죽을 텐데?" "말들에게 먹일 눌린 건초는 마차에 가득 싣고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문제?" "주방에서 음식도 잔뜩 챙겨간 모양입니다. 야식을 잔뜩 만들어달라고 했다더군요. 주방에서는 아주 상다리가 부러 지게 챙겨줬답니다. 그걸 다 싸들고 갔습니다." "그럼 오래 버티겠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부분이 신선한 해산물을 이용 한 음식이라..." "응? 신선한 해산물? 그거 잘 상하잖아?" "예. 아무리 우리 북해의 날씨가 춥다고는 하지만 얼려두 지 않는 한 며칠이면 모조리 상할 음식을 들고 간 모양입니 다. 더구나 그걸 따뜻하게 보관하면 몇 시진도 못 버팁니다." 주유성은 처음에는 말을 신나게 몰아서 북해빙궁에서 멀 어지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소미 그 들이대를 나한테 맡기려고 하다니. 궁주 할아버 지, 너무했네. 그래도 내가 여러 가지로 도움깨나 줬는데 말 이야. 대가는 받았지만." 그는 마차에 실린 황금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이히히. 이제 평생을 놀고먹어도 된다. 맛있는 거란 맛있 는 건 모조리 사 먹고 펑펑 놀아도 남을 거야. 이히히히." 그는 정말로 기뻤다. 북해의 비밀을 뚫고 들어가느라 고생 을 좀 했지만 대신에 정말 잘 먹었다. 무림맹에 대한 지원도 약속받았다. 그리고 황금 이십 관을 챙겼다. 이십 관이면 자 기 몸무게랑 맞먹는 무게였다. 게으름뱅이가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해가 뜰 때까지 열심 히 도망갔다. 최고급의 말들은 아침까지 달리고도 잘 버텼다. 해가 뜨기 시작하자 눈이 내렸다. 폭설이었다. 눈보라가 치는 와중에 도망가는 것은 사람이나 말 모두에게 못할 짓 이다. 그는 적당히 쉴 곳을 찾았다.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고 바 위도 하나 있는 장소를 잡았다. 그 공간에 마차와 말들을 숨 겼다. "어디 보자. 눈이 내리니 내가 달린 흔적은 없어지겠지. 그 럼 추격은 불가능. 잠깐 쉬어도 되겠다." 게으름병은 쉽게 낫지 않는다. 일단 자리를 잡았지만 그냥 지내기는 춥다. 그가 더위와 추 위에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그건 깨어 있을 때 이야기다. 잠 을 잘 때는 운기를 하지 못한다. 그럼 아무리 내공이 강해도 추위가 느껴진다. 북해의 날씨는 주유성의 내공으로도 충분 히 떨릴 만큼 춥다. 주유성은 그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그는 마차 주변에 큼직하게 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동굴에 설치되어 있던 그 진을 이용하면 되겠지. 제대로 하기는 힘들어도 이 정도 눈보라쯤야 뭐 대충 설치해도 될 테니까." 오래전에 북해빙궁에서는 극한지처의 냉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 동굴 입구에 진법을 설치했다. 북해 의 비밀을 통째로 감싸는 거대한 진에 비하면 구조도 간단하 고 위력도 보잘것없지만 그 효과는 매우 좋았다. 그리고 그건 물리적인 저항력도 가지고 있어서 눈보라도 막았다. 그 진법이 유지되는 모든 힘은 극한지처의 냉기에서 나왔다. 그래서 극한지처가 존재하는 동안 그 진도 정상적으 로 동작했다. 그런데 여기는 극한지처의 냉기가 없다. 동력원이 없으면 설사 똑같은 진을 설치한다고 해도 그 힘이 유지되는 시간은 아주 짧다. "눈 그칠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그는 주변에서 나뭇가지들과 돌을 구해서 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원본처럼 치밀한 것은 아니도 대충 중요한 부분만 얼기설기 얽었다. 그래도 극한지처의 냉기를 막던 절진이다. 이 정도만 해도 당장 사방에서 밀려드는 추위를 상당히 막아냈다. 그는 그 바로 안쪽에 다시 만화소염진을 설치했다. 예전에 산적들의 산채를 불태울 때 썼던 바로 그 진이다. 이것은 안 쪽의 열기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해준다. 진을 두 개나 설치하는 것은 게으름뱅이가 좋아서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장의 추위를 피하려면 할 수 없다. 그는 투 덜대면서도 만화소염진을 꼼곰하게 설치했다. 이제 마차와 말들을 다 포함하는 영역이 진법에 의해서 보 호되었다. 주유성은 그 가운데 작은 모닥불까지 지폈다. 모 닥불의 온기는 만화소염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보온이 최 대한 보장된 상태에서 모닥불의 열기는 진 내부를 춥지 않게 만들었다. 데려온 말들이 아무리 북해 특산으로 추위에 강한 놈들이 라지만 그 한계는 있다. 말들은 눈보라를 피하고 조금씩 따뜻 한 기운이 퍼지자 기분이 좋아져서 히힝거렸다. "나도 밥 먹고 니들도 밥 먹자." 주유성이 마차에 싣고 온 북해 특유의 말 사료를 말들 앞에 쏟아 부어주었다. 건초를 압축해서 많은 양을 옮길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챙겨온 음식들을 먹었다. 주유성은 내륙 지방에서만 살았다. 신선한 해산물은 먹어 본 적이 없다. 그가 고향에서 먹은 모든 음식은 조리한 것이 다. 더구나 직접 음식 재료를 사다가 보관한 적은 아예 없다. "쩝쩝. 정말 맛있다. 이제 이 맛이 그리워서 어떻게 하지?" 어느새 배부르게 먹은 주유성이 근처 바닥에 음식 찌꺼기 를 대충 던져 놓고는 마차에 들어갔다. "눈도 오고 배도 부르고. 그럼 이제 한숨 자자." 잠을 편히 자겠다고 절진을 두 개나 설치했다. 더구나 밤새 도록 달려왔다. 주유성 인생에 일하면서 지샌 밤은 이번이 처 음이다. 그는 두툼한 털가죽들을 이불 삼아 덮고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말들도 배를 채우고 나자 꾸벅꾸벅 졸았다. 눈보라는 진법 의 안으로 침입하지 못했고 추위도 마찬가지였다. 진법 안에 피워놓은 모닥불은 오래가지 못하고 꺼졌지만 거기서 나온 열기는 보온 효과에 의해서 한동안 추위를 가시게 만들었다. 거기다 말 네 마리의 신진대사 과정에서 나오는 열기가 작 지 않다. 평소라면 상관없는데 여기처럼 열이 차단되는 곳에 서는 그것마저도 어느 정도 온도 상승에 도움이 된다. 더구나 주유성은 털가죽을 덮고 따뜻하게 해서 자고 있다. 마차 내의 온도도 조금씩 올라갔다. 마차 안에는 신선한 해산물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만든 요 리들이 잔뜩 있었다. 주유성이 잠을 깬 것은 주변이 꽤 추워져서다. 추위를 참으 며 버티던 그도 틈새를 파고드는 냉기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 고 항복했다. "으, 추워. 얼마나 잔 거야?" 하늘을 내다보니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네... 가 아니네." 그의 눈에 다 타버린 모닥불이 보였다. 그가 설치한 진법은 이미 그 힘을 잃고 평범한 나뭇가지로 변해 있었다. "에고, 하루를 잤나 보다." 낮고 밤 하루를 꼬박 자고 지금은 이미 다음날 아침이다. 눈은 벌써 그쳐 있었다. "눈이 그쳤으면 가야지. 일단 배 좀 채우고. 배고파라." 주유성은 자신이 챙겨온 음식 주머니를 열었다. "윽!"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어라? 이게 왜 상했지? 날씨도 추웠는데." 음식들 사이에서 안 좋은 냄새가 풍겼다. 진법이 작동하는 동안은 마차 내의 온도가 그렇게 낮지 않 았다. 더구나 주유성과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음식 주머니는 그 온도가 조금 더 높았다. 그 결과 날생선 자른 것이나 가재, 게 등이 모조리 상했다. 상한 음식과 어울려 있던 다른 익힌 음식들도 다 상했다. 주유성이 아무리 척박한 음식을 잘 먹는 재주를 익혔다고해 도 그건 멀쩡한 것일 때 이야기다. 상한 음식에는 관심없다. 그는 미련없이 그 음식들을 모조리 버렸다. 말들에게 사료 를 먹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마을이 금방 나오겠지." 그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북해빙궁이 마차로 하 룻밤 거리에 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인가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거의 아무런 준비 없이 당당하게 빙궁을 도망 쳐 나온 배짱의 배경이기도 했다. 그는 마차에 황금을 이십 관이나 싣고 있다. 아무 마을이나 찾아가기만 하면 그 부스러 기만 내밀어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또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길을 모르지 만 마을만 찾으면 얼마든지 물어서 갈 수 있다. 그는 북해를 너무 몰랐다. 마차를 몰고 하루를 헤매고 나서야 그의 안색이 굳었다. 밤 의 추위는 어떻게 해결했지만 배고픔은 극복되지 않았다. 둘째 날,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말고삐를 잡았다. "배고파." 하지만 황량한 북해 땅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 었다. 토끼나 꿩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은 말 네 마리다. 그의 눈에 말 궁둥이 가 보였다. '말은 먹을 수 있지.'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놈들을 잡아먹어.' 차마 자기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을 먹을 수는 없다. 둘째 날도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셋째 날이 왔다. 하루 만에 마음이 변했다. 주유성은 말들이 사료를 배불리 먹는 것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한 놈만 먹을까? 아니지, 뱃살만 조금 잘라낼까?' 그러다 다시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야지. 얘들이 없으면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 이 녀석들은 내 생명줄인데.' 하지만 그 생각도 점심때가 지나자 조금씩 약해졌다. 식욕 이 이성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말들은 등 뒤에 뭔가 위험한 것이 노려본다고 생각했다. 그 것이 말들의 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 그리고 주유성은 입가에 침을 흘리며 달리는 말들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주유성의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흘리던 침도 쓰윽 닦았다. "마을이다." 그의 눈에 아주 먼 곳에 있는 집의 윤곽이 보였다. "으하하! 달려라, 말들아!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달려! 서두르지 않으면 잡아먹어 버릴 테다!" 말들이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주유성이 도착한 곳은 작은 어촌이었다. 앞에는 거친 북해 의 바다가 펼쳐져 있지만 주유성에게 그런 것은 관심없다. 그 는 마차를 달려 마을로 들어갔다. 어촌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런 곳에 이런 고급 마차가 올 일이 없다. 다들 무슨 귀한 손님인가 싶어 긴장했다. 좋은 사 람이라고 해도 이런 어촌에 도움을 줄 일은 없다. 만약 나쁜 사람이면 칼부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주유성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긴장한 사람들 중 하나 에게 달라붙었다. 그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에 사람들이 화들 짝 놀랐다. "무, 무림인이다!"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쳤다. 북해의 무림 단체가 빙궁 하나 밖에 없는 건 아니다. 어떤 곳에서 왔는지에 따라서 최악의 경우는 마을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 더구나 주유성은 지 금 뭔가를 잔뜩 가룩하는 표정이다.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몸 을 떨었다. 주유성이 자기가 달라붙은 사람에게 침을 질질 흘리며 말 했다. "밥, 밥 좀 주세요!" 주유성은 어촌의 촌장 집에 앉아서 정신없이 먹어댔다. 쌀 로 만든 밥은 아니다. 곡식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배고 픈 주유성에게는 해초를 끓인 국과 익힌 생선들의 맛이 기가 막혔다. 어느새 밥상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생선을 통째로 씹으며 주 유성이 말했다. "아직 부족해요. 더 주세요, 더요." '밥값은 황금으로 드릴게요. 우히히히.' 촌장이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무사님, 가진 것이 더 없구만요. 곧 배가 들어오니 그걸 받아다가 좀 더 드리겠으니 용서하소서." 신나게 생선을 씹던 주유성의 턱이 멈췄다. "더 없다뇨?" 그이 상식에 집에 하루 먹을 음식 재료밖에 가지지 못한 경 우는 하나뿐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마을 촌장의 집이? 빙궁은 그렇게 부잔 데?' 그는 어촌에 대해서 모른다. 서현에서 가까운 호수에는 민 물고기를 잡던 사람이 몇 살았지만 그들은 바다의 어부와는 입장이 다르다. 그나마 거기까지 가보지 않아서 그들의 삶조 차도 모른다. 촌장은 주유성의 말을 오해했다. "아이고! 무사님, 정말로 가진 식량이 없습니다! 마을 다 뒤 져도 그게 전부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도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권위있는 촌장이다. 하지만 무 림인 앞에서는 다르다. 사파의 무림인에게 잘못 걸리면 이런 시골 촌장은 목이 달아나도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다. 그 반응에 오히려 주유성이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바다에 고기가 없어요?" 촌장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사님, 그럴 리가요. 바다는 언제나 고기가 많지요. 다만 요새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철이라서요." 주유성은 아는 것이 없으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북해가 생각보다 척박하네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그는 남의 마을 식량을 모조리 먹어치운 것이 미안했다. 그 래서 품에서 은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전에 무림맹에서 받았 던 황금 이십 냥 중 일부를 은자로 바꿔두었다. 이건 그중 하 나다. "이거요. 제 밥값이에요." 이곳이 가난하다고 해도 은이 뭔지 모르지는 않는다. 고기 를 많이 팔면 겨우 조그마한 것 한 조각 받는 것이 은이다. "어이쿠! 이런 귀한 것을!" 촌장이 냉큼 은을 받으며 말했다. '공짜 손님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손이 클 줄이야.' "배가 들어오기만 하면 크게 한 상 차려 드리겠습니다." 이만큼의 은을 주면 이 마을 같은 곳에서는 한 상이 아니라 한 배를 채운 고기 전부를 넘긴다. 소매 시장에서의 값이 그 럴 리는 없지만 이곳은 평소에 값을 제대로 받고 고기를 팔지 못했다. 어촌 전체를 뒤져 봐도 제값 받는 곳까지 고기를 가 져갈 운송 수단이 아예 없다. 주유성이 여전히 고픈 배를 쓰다듬었다. '뭔가 먹을거리를 챙겨가려면 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야겠지? 그냥 갔다가는 굶어 죽으라.'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그가 기 다려 마지않던 배가 들어왔다. "배 들어온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주유성이 몸을 날렸다. 아직 배고픈 그는 어서 고기를 받아 구워 먹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선착장이라고 하기도 미안한 모래턱에 작은 배가 올라왔다. 주유성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에? 이 배예요?" 배의 크기는 주유성이 북해의 비밀을 해결할 때 몰았던 쪽 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클 뿐이었다. "이런 배로 고기를 잡아봐야 얼마나 잡아요?" 촌장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사님, 그래도 우리 어촌의 유일한 배입니다." "에? 아니, 제가 어촌은 처음 보지만요. 그래도 이 배 한 척 으로 마을 사람들이 다 먹고살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가 대충 둘러보기에도 백 명은 사는 마을이다. 조각배 하 나로 처리될 곳이 아니다. "원래는 배가 여러 척 있었습죠. 하지만 하나하나 깨져서 이제 이거 하나 남았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뭐 해서 고기를 잡아요?" "바다가 차니 들어가지는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조개라도 찾거나 밀려온 해초를 줍기도 합니다. 해안가를 잘 뒤져 보면 게 같은 놈들이 기어올라 올 때도 있으니 그걸 잡기도 하고 가끔 물개가 나타나면 그것도 잡습니다." 주유성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먹은 음식의 값어치가 생 각 외로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촌장은 주유성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자를 하나 통째로 받아먹고 그냥 입을 닦을 수는 없다. 그는 배를 몰고 온 사람들에게 다가서 말을 걸었다. "어이, 하일이. 그래, 고기는 많이 잡았는가?" 하일이 찡그린 얼굴로 그물 주머니를 하나 들었다. 십여 마 리의 작은 고기가 고작이었다. "이것밖에 없어요. 해안가에는 요새 고기가 영 잡히지가 않네요. 아무래도 먼바다로 나가야 고기가 많은데." 촌장이 낭패라는 듯이 말했다. "이거 큰일이군. 여하튼 그거라도 나에게 넘기게. 내 긴히 쓸 곳이 있네." 하일이 머리를 저었다. "촌장님요, 이걸 다 촌장님한테 넘기면 다른 사람들은 해 초나 씹고 있어야 하는데요? 안 되지요." "어허, 이 사람. 쓸 곳이 있다니까. 이미 돈까지 받았단 말 일세." 돈을 받았다는 말에 하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한쪽에서 구경하고 있는 주유성을 발견했다. "아이고! 손님이 오셨구랴. 그럼 드려야지요. 그런데 촌장 님, 돈은 충분히 받았남요?" "은을 한 조각 받았네. 은이 아주 커." "헉! 은을? 그럼 어서 드리셔야지. 여기 있으니 그냥 가져 가시면 되는구만요. 아주 푹 고아드리셔요." 그들의 대화를 다 들은 주유성이 그걸 날름 받아먹을 놈은 아니다. 그는 하일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저기요, 고기가 해안가에서만 잡혀요?" "아이고, 손님요. 그럴 리가 있남요. 넓은 바다로 나가면 아주 많이 잡히구만요." 주유성이 자기네 동네 근처의 잔잔한 호수 생각을 하고 말 했다. "그런데 왜 해안가에 고기가 없다면서 계속 여기서 일해 요? 먼바다로 나가서 잡으면 되잖아요." "이 작은 배로요?" 하일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손님이 바다를 모르는구만요. 이 동네 바다를 이거로 나 갔다가는 그냥 칵 죽은 목숨이거덩요." "그럼 큰 배를 사면..." 하일이 처량한 얼굴로 말했다. "큰 배를 사요? 하이고요. 돈이 어디 있어서 사남요? 작은 배 하나 더 살 돈이 없어서 이놈으로 온 마을이 버티는구만 요." 주유성은 이제 사태를 제대로 이해했다. '배가 하나씩 부서질 때마다 수입이 적어지고, 적은 수입 에서는 다시 배를 살 돈을 모으기 힘들고, 그것이 반복. 이제 는 한 끼 때우기도 어려운 동네가 됐구나.' 주유성은 북해빙궁에서 혼자 배가 터져라 먹어대던 일이 생각났다. 멀지 않은 곳의 사정이 이런 것을 보자 미안함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저기, 큰 배는 얼마나 하는데요?" "큰 배요? 가격이야 천차만별이구만요. 하지만 먼바다 나갈 정도면 은이 아니라 금으로 치러야 할 정도로 비싸거던요." "그, 금요? 금이 있으면 돼요?" 주유성은 마차에 쌓여 있는 금에 생각이 미쳤다. 하일이 꿈을 꾸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요. 비싼 배는, 그러니까 먼바다도 나가고, 또 다른 큰 어시장이 있는 곳에 고개를 싣고 갈 수 있는 그런 큰 배는 황금 한 근은 줘야 하거던요. 우리 마을에도 그런 배 하나 있 으면 다들 배 두드리면서 살 수 있을 텐데." 촌장이 한숨을 쉬며 하일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아직도 그런 헛된 생각을 하나? 그런 배는 우 리 마을 처지에 꿈도 꿀 수 없는 것 아닌가? 어쩔 수 없다면 현실에 만족해야지." 주유성이 반색을 했다. '내가 가진 황금이 이십 관이니까 근으로 따지면 백오십 근. 그중에서 겨우 한 근쯤이야.' 언제나 그렇듯이 시작은 조금이다.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즐독입니다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