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G”(시 37편 4절) 230528 주일설교
“또 L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책소개 - 필립 야콥 스페너 「경건한 소원」 - 지형은 목사(영락성결교회)
젤러(W. Zeller)는 1600년경 유럽의 신앙과 신학을 ‘경건성의 위기’라고 평했다.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신앙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시대였다. 신앙의 정체성이 흔들렸던 까닭 중 하나는 당시의 교회가 종교개혁 후 100년 정도 지나면서 다시금 타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에서 교리는 탁월했다.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1555년이 지나면서 종교개혁 후 나뉜 기독교의 각 종파에서 서로 교리와 신조를 정리해 발표하고 가르치면서 교리가 정교하고 치밀하게 발전되었다. 종교개혁 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치밀하고 정교하게 교리가 발전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이 때를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교리는 발전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다. 교리(Lehre)와 삶(Leben)의 괴리였다. 경건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런 문제의식 가운데 일어난 교회 갱신 운동이며 사회 변혁 운동이었다.
스페너와 경건주의의 출발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당시 독일 땅 알사스 로렌 지방의 라폴츠바일러에서 태어나 루터파 정통주의의 주요 도시 중에 하나인 스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1세였던 1666년에 황제 직할 도시인 독일의 마인 강변 프랑크푸르트의 루터파 교회 수석 목사로 청빙 받아 본격적으로 목회했다. 당시 교통의 요지며 박람회 도시였던 곳에서 20년 목회 이후 5년은 드레스덴에서, 생애 마지막 15년은 베를린에서 목회하다 세상을 떠났다.
스페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 시절에 유명한 경건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 경건주의 운동의 시작 연도로 둘 들 수 있다. 1670년과 1675년. 1670년 스페너 목사가 자신의 목사관에서 소그룹 모임을 처음 시작한 해다. 그해 8월에 그는 요한 야콥 쉬츠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참으로 진지하게 신앙 생활하고자 ‘경건 모임’(Collegium pietatis)을 시작했다. 그는 이 작은 모임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삶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며 기도했다. 그 후에 이 모임은 주변 지역과 독일 전역으로 퍼져갔다. 독일을 넘어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소그룹 경건 모임은 경건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가 1675년에 신학자 카르프초프에게 쓴 라틴어 편지에 ‘Ecclesiola in ecclesia’란 표현이 나온다. 우리말로 ‘교회 안의 작은 교회’란 뜻. 나중에 이 명제는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교회론에서 중심 명제가 되기도 한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가장 위대한 두 명제 하나가 이것이고 다른 하나가 ‘Ecclesia semper reformanda’(항상 개혁되는 교회)다. 교회론에 대한 이 두 표현은 한 가지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교회의 갱신이다. 교회가 늘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개혁돼야 하고 역동적인 소그룹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1675년을 경건주의의 출발에 연관시키는 것은 그 해에 발간된 책 때문. Pia Desideria.책은 교회 갱신(1) 진단과 (2) 전망과 (3) 대안. 책의 라틴어 제목 우리말로 옮긴다면 ‘경건한 요청’ 이 책은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지침. 자신의 ‘열망’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도전하면서 그들이 교회 갱신에 참여하도록 요청하는 책이다.
이 책에는 후에 진행될 경건주의 운동에 대한 주요 관점이 거의 다 담겨 있어서 이 책을 경건주의의 방향 제시서라고 부른다.
경건한 요청(Pia Desideria)
그는 먼저 현실 교회를 진단한다. 결론은 철저하게 타락했다 타락의 원인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 교리와 삶이 어우러지게 하는 믿음,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게 하는 믿음, 인식의 깨달음과 실천의 행동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믿음이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이다.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스페너는 교회의 미래를 전망한다. 결론은 소망이 있다. 그 이유는, 하나 성경에서 교회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 초기 기독교 시대에 교회가 참으로 아름다웠던 시대가 있었으니 또 그런 시대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교회가 갱신될 구체적인 6가지 제안. 방향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을 풍성하게 하는 방향. 기록된 G의 말씀에 성령이 일하심으로써 이런 믿음이 작동한다.
그가 제안하는 6가지 제안을 간단하게 요약 「경건한 요청」의 서문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것을 기꺼이 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목회자들)는 헌신합시다. 목회자 각자가 개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이런 사람을 먼저 양육하고, 이들의 구원의 분량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 이들의 본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도록 일합시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G의 은혜로써 점점 가까이 이끌 수 있게 되고 결국에 그들도 구원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경건주의는 ‘제2의 종교개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건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이 교리로는 완성되었지만 그 교리를 X인의 삶과 세계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에서는 미완성 상태에 있다. G의 말씀이 X인의 삶과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경건주의자들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론
신앙생활 하면서 어느 한부분의 일방적 면만을 생각할 때가 있다. 가령 J을 믿을 때에 우리 자신은 전적으로 부인된다는 사실만 강조하여, 우리가 G을 사랑할 때 동시에 우리의 소원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제가 신앙을 갖기 두려웠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J을 믿으면 내가 살고 싶은 생애를 깡그리 포기하고 G께서 내 인생을 순종만 하는 로봇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G께서 우리 인생을 인도할 때 마치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키보드만 누르면 작동함과 같이 기계적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G은 G의 뜻을 우리 가운데 드러내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G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우리는 모두 J C안에서 G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존재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존재만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습관도 새로워지고 새로 태어난 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J을 믿는 것은 틀림없지만, G의 자녀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고 방식만은 새로 태어나지 않고 옛사람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G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우리 안에서’는 ‘우리를 통해서’라는 뜻이다. G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활용하신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G께서 인간을 ‘G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G의 형상’은 G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자격을 뜻하기 때문이다. J C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역시 G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위해서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G께서 구체적으로 사용하시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마음이 내키게 하시는 G
첫째로, G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소원을 두고 행하다’로 헬 ‘텔로’는 ‘마음이 내키게 하다’는 뜻. G은 우리들에게 억지로 일하게 하지 않으신다. 일하게 하시기 전에 먼저 그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신다. 때로는 분명하게 지시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일하도록 이끌어 가신다.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G의 지시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영성생활에서 가장 우선순위이다. 그렇게 하려면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날마다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할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곧 영성지수를 높이는 성령 충만한 삶이다.
즐거움과 행복으로
둘째로, G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게 하신다. ‘기쁘신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도키아’는 ‘찬동’, ‘호의’, ‘의도’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라촌’인데, ‘즐거움’ 혹은 ‘만족’을 의미한다.
G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은 G께 흡족함과 즐거움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G의 만족하심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G께서 우리들에게 그 즐거움과 행복을 되돌려 주시는 근거가 된다. 우리가 G께 영광을 돌리면 그것은 곧 우리의 행복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G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인생의 최고 우선적 목적은 G을 위한 것이 먼저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G께 영광 돌리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G께 영광 돌리면, G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선물로 주신다. 순서가 바르면 바른 신앙이 되지만, 순서가 뒤바뀌면 신앙의 역행 될 수 있다.
G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과 G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게 하시는 것은 별개가 아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 같다. 일을 시키시는 G은 그에 대한 보상도 마련해 주신다. 우리들이 은사를 따라 일을 해야 할 필요도 그 때문이다. 은사란 G께서 즐거움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내재시켜 놓으신 원천적 능력이다.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G – 모세, 고넬료, 윌리엄 캐리
모세는 IS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어떤 분은 “아직 모세가 가시덤불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G께서 그를 억지로 데려다가 IS의 구속자로 삼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면만 본 것이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사랑했다. 그래서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의 부요와 애굽의 지위와 영광을 초개처럼 버리고 그 백성들과 함께 고난 당하기를 기뻐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G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X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고넬료 또 “어느날 갑자기 고넬료에게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해 시몬에게서 북음을 듣게 하시지 않았는가?” 질문하는 분도 있을 것. 고넬료는 아무 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앞의 성경을 보면 그는 “G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으로 구제하였던 자”(행 10:2) 그의 마음에 늘 바른 인생, G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한 깊은 소원이 있었다.
윌리엄 캐리 L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자기를 찾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역대하 16:9). 성경 인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납땜장이였던 월리암 캐리, 그의 마음속에는 세계를 향해 불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세계 각 나라와 도시에 대한 면밀한 조사서를 만들었다. 각국의 인구와 기후와 특색과 종교 성향, 면적 등을 조사해서 기록했다. 그 내용을 붙잡고 날마다 G께 기도했다. “G,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물로 매달렸다. 그가 여러 목사님들 앞에서 선교에 대해 역설할 때 당시 유능한 목사님들은 “G은 사람의 도움 없이도 그 분이 원하시는 백성들을 마음대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해외의 여러나라로 나갈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캐리는 그 정도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의 신학추세에 맞서서 그는 자비량 인도선교사로 떠났다. 이것이 근대 선교의 사실상 시작이다. G께서는 우리의 생애를 로봇처럼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G이시다. 우리는 G께서 주신 소원 따라 G의 뜻을 성취한다.
투덜거림과 망설임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한다. ‘원망’에 해당하는 헬 ‘공귀스모스’는 불만을 속으로 억누르는 ‘투덜거림’ 일 자체에 대해 의미나 보람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G의 흡족함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나 행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시비’로 번역된 헬라어 ‘디알로기스모스’는 기본적으로 ‘논쟁’을 의미하지만, ‘의심’이나 ‘망설임’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다. 다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음으로 인하여 생긴다는 것이다.
G의 일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없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감사와 확신으로 하라’는 것. ‘감사’와 ‘확신’은 곧 G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다는 내적 증거인 셈. 그렇다면 ‘원망’과 ‘시비’는 G의 뜻이 아닌 우리의 욕심으로 일하는 증거?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
G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 마음의 소원을 주셔서 그 소원 따라 우리 인생을 인도하기를 기뻐하신다. 시 107편 30절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L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평온케 하시고 소원의 항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G께서 우리의 삶을 우격다짐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먼저 마음에 소원을 주신다.
그러므로 G께서 내 마음에 어떤 소원을 주셨는가를 우리가 말씀으로 늘 점검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옛 자아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찼던 옛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이 G으로부터 온 소원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 욕심인지 늘 살피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물어야 한다.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G, 인생을 G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G,의 뜻을 성취하는데 방해거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G에게서부터 밀어지게 하고자 하는 무수한 시도다.
시 37편 1절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볼 때.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 같다. 그 때 우리 마음속에 불평한다. 못된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마음에 원망이 가득찬다. 그러나 G께서는 너희 마음을 그런 것에 뻬앗기지 말라고 하셨다. 너희 마음을 투기와 불평과 원망으로 채우지 말라고 하셨다. 너희들이 살아야 되는 삶은 그들을 상대하는 삶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2절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나 저들은 반드시 시들고 쇠잔케 된다.
풀같이 베어진다. IS에는 우기가 두번 있다. 우기에 비가 오면 말랐던 대지가 촉촉히 젖고, 온 사방에 흩날렸던 싸앗들이 발아하면 온 IS의 대지가 파랗게 변한다. 그러다가 우기가 끝나고 무서운 건기가 시작되면 그 푸른 초목들이 일시에 노랗게 타 죽는다. 그 기간을 잘 아는 목동들은 풀들이 마르기 전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열심히 낫으로 벤다. 그와 같이 세상의 악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세계를 장악할 것 같으나 저들은 마땅히 베어진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저들을 보고 분과 노를 그치라고 하신다. 8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을 위해 살기도 짧은 인생이다.
소원을 이루는 삶
첫째, “L를 의뢰하며 선을 행하라”(3절) G만을 신뢰하라. G을 향한 사람들은 G을 신뢰하는 출발선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멕시코의 대통령에게 미 어느 신문기자가 “북미와 남미가 그처럼 다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때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시작이 다르기 때문다. 북미의 청교도들은 G을 찾으러 왔고 남미 사람들은 금(Gold)을 찾으러 왔다. G을 찾아갔던 청교도들은 G을 만났고 금도 가졌는데, 금을 찾아 갔던 사람들은 금도 놓쳤고 G도 놓쳤다.”
G을 찾아갔던 청교도들은 돈의 뒷면에 “In God We Trust.” 우리는 G을 신뢰한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 악한 사람들이 잘됨에 현혹되지 말자. G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은 G을 신뢰할 때 실망 않을 수 있다. 흔들림 없다.
G을 신뢰할 때 반드시 맺는 열매. 그것은 선이다. 절대 기준이 없는 세상에서 선도 시간에 따라 선하지 않을 수 있다. G께 뿌리를 두지 않는 선은 그 근거가 희박해서 예수 믿지 않던 임마누엘 칸트도 도덕이 서기 위해서 G이 계셔야만 한다고 설파했다. G이 안계신 문화는 모두 악해질 수밖에 없다.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잘되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G만 바라보고 G을 신뢰할 때, G께서 내 인생에 맺고자 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둘째,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3절) 성실을 생각할 때 비교급으로 생각한다. 내가 옆에 있는 친구와 비교될 때 조금 더 성실하려고 하는데 G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비교급으로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G께서 원하시는 것은 G의 성실로 식물을 삼는 것.
김용기 장로 일화(홍정길 목사) 김 장로님과 같이 지내면서 제가 그 어른에게 물었다. “장로님, 당신은 늘 언제나 그렇게 당당하십니까? 인생에 좌절과 실패는 없으셨습니까? 있으셨다면 그때는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했더니 “왜 나도 사람인데 늘 흔들리고 어려움이 많지. 내 생애에 가장 절망의 아픔이 있었을 때는 내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세번째 집을 나간 때”였다. 그분은 황폐한 땅을 개간 그 땅이 옥토가 되면 또 다른 곳을 개간. 국토를 한치라도 더 기름진 땅으로 만들기 위해 이 분이 몇차례 본거치를 옮기셨다. 좀 살만하면 또 옮기고 또 이동하곤 하였다. 큰아들은 장남인지라 아버지의 명에 거역 못하고 순종하였지만, 둘째는 아버지를 피해서 집을 떠났다. 아들이 보고 싶은 어머니는 남편에게 하소연 “왜 당신은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합니까?” 그날 저녁에도 둘째 아들 일로 아내와 마음 상한데 또 객지에 나간 아들 어떤 고생 할지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다 몇시인지 모르나 새벽예배 드리러 교회 안에 들어가서 G께 울부짖으며 “G,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G께서 나를 농사꾼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G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으나 너무 괴롭습니다. 내 아내도 이해해주지 않고 내 아들은 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내가 참 견딜 수 없지만 G이 나에게 맡기신 임무인지라 피할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가 달라며 날이 새도록 기도. 아침이 훤히 밝왔다. 그처럼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자신의 목소리 외에 또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환청인가 하여 눈 떠보니 도망갔던 둘째아들이 자기 기도하던 머리맡에서 울면서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부자가 서로 목을 껴안고 G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해야 되지 않겠느냐 울었다. 이것이 G을 향한 성실입니다.
G이 원하시는 성실은 누구와 비교하지 않는다. G이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가, G이 지금 내게 뭘 원하시는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실이다. G께서 나를 향해서 부르신 그 부름에 올바른가? G 향해 사는 사람은 G만 의뢰한 결과 선의 열매 맺는다. G 성실로 식물 삼는다.
셋째, “L를 기뻐하라”(4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G께서 주시는 선물은 즐거워하지만 G은 안 즐거워한다. G의 능력도, G의 축복도 좋아하는데 G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거듭난 성도, 진실로 G의 거룩하신 구속으로 G의 자녀된 성도는 G이 제일 큰 기쁨이다. 기쁨은 세상의 어떤 힘에도 무너지거나 빼앗기지 않는다. 주께서 내게 주신 기쁨은 새 포도주와 곡식으로 곡간에 가득 채울 때보다 더 승하다.
L를 기뻐했던 하박국 선지는 갈대아 사람들의 악행들을 보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선포, G만 그 일생에 기뻐하기로 작정.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L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 구원의 G을 찬양하리로다.”
G을 기뻐하는 기쁨만이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이다.
화니 크로스비의 고백 “나는 의사의 잘못된 시술로 앞 못보는 장님이 되었으나 장님된 나의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G께서 내 마음의 눈을 여셔서 오늘도 G만 바라보고 G의 영광을 즐거워하며 산다.” G께서 그녀에게 기쁨의 근원지요 눈 안보이는 것도 그녀에게 기쁨이다.
“L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L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3-4)
그분이 우리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 G을 신뢰하여 그 길을 L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G께서 이루신다. 네 의를 나타내시되 빛같이 나타내신다고 하셨다.
밤을 낮으로 바꾸기 위해 온갖 노력해도 할 수 없다. 칠흙같은 어둠이 천지에 충만해도 동녘 하늘에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은 물러가고 찬란한 빛이 감싼다. 얼마나 거대한 힘인가?
그러나 그 빛이 우리에게 올 때 요란하거나 소리없다. 조용히 오신다. L를 의지하고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고 그분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우리 G께서 빛같이 이루어주신다. 빛처럼 이루신다는 말은 아무도 모르게 또는 희미하게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환한 대낮을 누가 부인할까? 명명백백한 낮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듯, G께서 행하실 때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이 땅에 G의 뜻을 이루신다.
G께서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에, 내가 “노”(No)하고 하면 G의 거룩하고도 크신 뜻도 “노”가 된다. 엄청난 권한을 우리에게 주셨으나 나의 작은 뜻이지만 내 소원이 G 앞에 바로 드려질 때 G께서는 이 소원을 통해서 세계의 역사를 바꾸신다.
시 37편은 다윗이 젊었을 때 지은시가 아니다. 노년에 지었다. 25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었도다.” 산전수전 겪고, 인생 살며 얻은 지혜로 확신한다. “L께서 우리의 마음속 소원을 이루시는 G”이다.
G은 소원을 이루어주심 믿고 소원이 G의 뜻에 합치 살펴보고, G의 뜻에 맞는 삶 살라.
첫댓글 긴장문에 메세지 감사드림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