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으로부터 1788년 1월 26일 죄수 736명과 하급관리들을 태운 배 13척이 건너온 날이 호주의 건국기념일이다.
의외로 중범죄자들은 없고 (이런 이들은 당시엔 사형) 상당수가 생계형 범죄자들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빈부의 격차와 범죄자들이 많아 급격한 사회문제를 일으켰으며 교도소가 모자라서 템즈강에 폐선을 띠워서 교도소로 사용할 정도였다.
주로 이 당시 급격하게 늘어난 문제 일으키는 빈민층들이 보내졌으며, 식민지 건설을 해야하는데도 도움 안되는 인력, 노인 여성 미성년자들이 상당수였고
전문적인 지식 가진 사람들은 드물었다.
진짜 범죄자의 이주가 아니고 산업화로 인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 이었다.
이들도 아메리카에 발을 딛은 청교도처럼 서쪽으로 개척해 나갔다.
당시에는 애버리지니(aborigine)라고 불리는 원주민들과 트러블이 많았으며 특히 태즈메이니아 지역에는 원주민과의 전쟁 및 전염병으로 원주민이 전멸했다.
호주 원주민의 인구는 백만 명을 넘는 수준에서 1920년대 초반에 수만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원주민 보호법이 만들어졌다.
원주민 보호법의 목적은 원주민을 호주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주민들은 집단으로 구금 당하여 먹는 것 입는 것, 그들의 노래 언어 춤 등 모든 것을 감시 당했다.
아이들은 부모와 따로 살았으며 억지 서양교육을 받아야 했다.
호주의 초기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1861년도의 골드 러시 때문이었다.
호주라는 대륙 자체에서 풍화와 침식이 활발하게 일어나다보니 금광이 지하 깊숙히 묻혀 있지 않고 지표에 노출된 경우가 많았는데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노천광산 하나만 발견하면 그냥 길가다 돈 줍기만큼이나 쉽게 돈을 벌었던 것이다.
또한 호주 남부에서의 따뜻한 기후는 와인 생산이나 농장 운영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민자가 우르르 몰려왔다.
초창기 호주를 개척했던 집단으로는 영국계 호주인과 함께 다수 그룹으로는 독일계 호주인들이 있다.
이들 독일계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지리학자 겸 탐험가였던 루트비히 라이히하르트였다.
당시 현 호주 정부와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의 전신이었던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총독부는 아웃백으로 불리던 호주 내륙의 탐사에 막대한 상금을 내걸고 지원자를 받았는데, 라이히하르트는 1842년에 이 탐사에 지원하여 브리즈번에서 포트에딩턴 까지 이르는 긴 여정을 마치고 1843년에 시드니로 귀환한 바 있었다.
이 경험을 살려서 1848년에 재차 아웃백 탐사에 나섰으나 실종되었고, 동년 4월 3일에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