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99
11월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연중 제3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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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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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dIW6B31ASg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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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는 내 기쁨이요 화관, 너는 내 삶의 의미요 존재 이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부끄럽게도 스승님을 세 번이나 배신한 일로 인해 자주 눈물을 흘렸답니다. 하도 눈물을 흘려서 눈가가 짓무를 지경이었고, 수시로 흐르는 눈물을 위해 과거 ‘초등학교’ 1학년 입학생처럼 가슴팍에 손수건을 하나 달고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게 눈물을 자주 흘렸습니다. 한때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지난 일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눈물을 흘린 또 다른 이유 하나가 있었으니,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처럼 나약하고 흔들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안쓰러운 마음에 그렇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교회 신자들로 인해 눈물을 흘린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네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일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천상의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로지 땅의 것들,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 신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가엾고 안타까웠던 바오로 사도는 눈물로 간곡히 호소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지상의 시민이 아니라 천상의 시민임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살아가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 모두 당신의 영광에 깊숙이 참여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피서 3장 20~21절)
마무리 말씀은 또 어떤가요? 매일 매 순간 수시로 흔들리고 방황하는 오늘 우리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애틋하고 다정다감한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표현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피서 4장 1절)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보십시오. 그는 오늘 우리를 향해 "나의 기쁨이며 화관."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쁨이요 화관으로 여겨진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제자 베드로 사도 못지않은 바오로 사도께서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너는 내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은헤롭습니다.
주님의 종들의 종인 바오로 사도께서도 우리를 향해 이런 표현을 쓰시는데, 자비와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의미 있고, 사랑 가득 담긴 표현을 쓰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너는 내 삶의 의미란다." "너는 존재의 이유란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단다." "너는 내 행복의 원천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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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RculcZvj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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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조우성 변호사의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에서 “아버지고 동생이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세요” 내용입니다. 조 변호사는 좀 특이한 소송을 맡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건물에서 나가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소송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동산 소유주는 누나이며 현재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서울에 있는 자기 건물 2층에서 아버지와 남동생이 살 수 있도록 별도의 보증금이나 월세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10년째 그 건물에서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누나가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합당한 보증금과 월세를 내라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 체결을 요구했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누나는 기존의 무상 임대차 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하고 아버지와 남동생을 나가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소장 내용만 보면 아버지와 남동생은 6개월 이내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사는 곳에서 나가면 마땅히 잠잘 곳도 없는 상황인데 누나가 이렇게 갑자기 매몰차게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데 대해 아버지와 남동생은 누나에게 크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누나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엄동설한에 바깥으로 내몰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오갈 데도 없는 아버지를 추운 겨울에 내쫓는다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법은 천륜만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조 변호사가 더 깊은 내막을 알고서는 누나가 아닌 천륜만 고집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누나와 형욱 씨는 10살 터울입니다. 아버지는 외항선을 타는 뱃사람이라 집에서 자녀들과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사고로 한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더는 배를 타지 못하고 노름과 술에 빠져 어머니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을 참다못한 어머니는 누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출했고 이후 누나는 아버지와 형욱 씨를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동생 형욱 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습니다. 덕분에 형욱 씨는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누나는 악착같이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모았고 형편이 조금 안정이 되자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의정부에 두 채의 건물 소유주가 됩니다. 누나는 사업을 해 보겠다는 형욱 씨를 위해 5억 원에 달하는 돈을 조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형욱 씨는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누나의 결혼을 아버지와 동생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남자의 학력이 고졸이고 분명 누나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려는 속셈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보면 달라질 줄 알아서 남자 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었지만, 아버지는 면전에서 면박까지 주었습니다.
조 변호사는 변호를 의뢰한 형욱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욱 씨, 제가 하자는 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제가 이 사건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욱 씨에게 이러한 글을 재판할 때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소송을 진행하다가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에게 누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 컸습니다. 특히 매형 될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마음으로 축하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따뜻함을 그분에게서 느꼈을 텐데 이를 헤아려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나는 평생 누나에게 짐만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번 사건의 결과에 상관없이 다시는 누나에게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초안을 읽어본 형욱 씨는 난처해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소송은 지게 되어있고 방법은 이것뿐이었습니다. 형욱 씨는 못내 불안해하면서도 이 준비서면을 제출했습니다. 3주 뒤 재판 당일, 누나 측 변호사는 “재판장님, 원고 측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구적인 무상사용 계약서를 하나 쓰려고 한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누나에겐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돈을 너무 당연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이 야속했던 것입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살고 있던 건물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고 이후 가족 간의 관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 비유입니다. 결론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입니다. 나를 맞아들일 친구를 불의한 재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의롭지 않은 재물이란 나의 것이 아닌 재물을 의미합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여긴 데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핑계로 누나의 재산을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책과 같은 것에 자기 이름을 써넣는 것처럼 누나의 재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것입니다. 누가 나의 것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다고 해 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가족도 필요 없습니다.
고아로 자라난 아버지가 아이가 드라이버로 자기 스포츠카에 낙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쳤습니다. 아이의 손이 부러졌고 아버지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무슨 낙서를 했나 보았습니다. “LOVE U DAD”(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어떤 물건에 ‘나의 것’이란 표를 해 놓으면 나는 가족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나의 것’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맞아들일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나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평생 거처를 다시 얻었습니다. 나의 것이란 생각만 없애도 그 사람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스님은 자신이 아끼던 난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니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소유의 자유를 말하며 가진 것을 최소한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난을 선물하였다면 그 난에는 아직도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미련이 남거나 상대에게 보답을 기대합니다. 불교에서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인이 안 계시는 것이니 가지면 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주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무소유는 가진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가지고 있어도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면 많이 갖건 적게 갖건 내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내가 가졌지만, 나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모든 것들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의한 재물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 위에 ‘주님 것’이란 이름을 써 놓아야 합니다.
유학시절 함께 방을 쓰던 아프리카 친구가 저의 것을 자꾸 자기 것처럼 쓸 때 짜증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어떤 분이 “내 것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내 것이라는 말을 안 쓰기로 했습니다. 자꾸 “내 것”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어서 외톨이가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면서도 “어차피 내 거 아냐!”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의롭지 못한 것”, 곧 주님의 것을 내가 유용한다고 여겨야 합니다. 나는 나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소유이지 나의 것을 다 내어주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나의 것이 애초에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다 주님 것을 맡겨 놓은 것으로 여기고 가지고 계십시오. 그래도 무소유입니다.욥의 이 말을 새깁시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욥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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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사와 사도적 실천’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여러 성사가 있었지만 제게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신품성사’였습니다. 사제에게 술을 사드리고, 음식을 사드리는 것이 사제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끔은 사제를 핑계를 대고 늦은 시간까지 유흥을 즐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제가 사제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 사제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도 신앙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사를 집전하고, 사목하는 것이 사제 본연의 사명이기에 사제가 놀 수 있도록 배려하기보다는 사제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신앙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소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관심을 두고, 기도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제게 도전을 주고, 사제 직무를 수행할 기회를 주는 신앙인보다는 제게 즐거움을 주는 신앙인을 더 가까이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견진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성령의 은사를 생각하고 그중에서 특히 용기와 지혜의 영을 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병자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숙지하고 전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백성사에 대한 가르침으로는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고, 나의 잘못도 용서를 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혼인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배우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혼자된 사람이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살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부부는 가정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좋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성체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미사참례를 성실하게 준비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사생활을 충실히 하고, 그 의미를 삶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는 성사와 준성사가 있습니다. 성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입니다. 성사는 그에 따른 은총이 주어집니다. 성사의 은총은 집전자와 참여자의 인품이나 신앙에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햇빛이 골고루 비추듯이, 비가 골고루 내리듯이 하느님의 은총은 성사를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준성사는 교회에서 만들었습니다. 준성사는 그 자체로 은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준성사는 집전자나 참여자의 정성과 갈망이 필요합니다. 안수, 축복, 성호경과 같은 것들이 준성사입니다. 폐차장의 주인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축복을 받은 차들은 사고가 났어도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성호경을 정성껏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전교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안수기도는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밀림이 우거지고 물이 많은 것은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메마르고 삭막한 것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의 의미를 삶으로 실천하고, 교회가 세운 준성사를 가까이하면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영적으로 풍요로운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리한 집사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는 증권, 부동산, 은행 업무와 같은 것을 잘 모릅니다. 저는 음악, 미술, 건축 분야도 잘 모릅니다. 저는 성사와 사목 분야에서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세상의 것들로 경쟁하기보다는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와 준성사의 삶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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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노예이기는 하였지만, 주인의 큰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였다.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런데 집사는 그야말로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그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은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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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만 들으면 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협잡꾼’ 또는 ‘사기꾼’처럼 묘사된 집사의 모습을 주인이 칭찬하는 것으로 비유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신자들에게 ‘협잡꾼’이 되라는 것일까요? 이 비유는 신앙 공동체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의 고사성어 ‘견지망월’(見指忘月)은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지 못하고 부수적인 것에만 집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듣는 우리도 ‘견지망월’의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비유에서 ‘협잡꾼’의 모습 그 자체를 신앙인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핵심은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세속적 이익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비유 속 집사의 모습 그 자체가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그처럼 부정한 일조차 약삭빠르게 처리하는데, 하물며 빛의 자녀들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 실현에 훨씬 능숙해져야 한다는, 공동체를 향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천사 같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의 공동체,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공동체, 성령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복음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 얼마나 능동적이며 적극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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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많은 사람이 오늘 복음의 비유를 읽으면서 의문을 가질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해 보이는 집사를 칭찬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비유 속의 집사처럼 자신을 내쫓는 주인에게,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람에게 집사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유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불의한 집사는 그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자기 자리를 잃게 된 집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 세상의 셈법대로 자신을 위하여 행동합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은 정의에 따른 것도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주인과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그런 집사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집사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의 행동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아가는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신앙인들 또한 믿음 안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도 영리한 사람들이 있듯이 우리도 신앙 안에서 영리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도 줄 수 없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리함보다 더 영리하게 우리의 구원을 찾고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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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상윤 도미니코사비오 신부님]
상식적으로 오늘 복음을 바라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불의한 집사의 행동에 대해 부자의 행동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부자의 재산을 낭비하여 집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 하는데, 집사는 그 자리에서 더 부자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임의로 부자의 재산을 처분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자는 자신의 집사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풀이하기에 앞서 간략하게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주인의 재산을 농락한 집사를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세속적인 것, 즉 돈밖에 모른다고 지탄받는 세속의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면 자신이 지닌 것을 팔아서라도 사람을 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주제는 자신의 죄와 잘못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Lk 16, 1) 이미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소외당하고, 가난한 이, 죄 많은 이 모두를 사랑하고 계심을, 용서하고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이후에 제자들에게 약은 집사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제자들에게 죄를 바라보기보다는 죄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Lk 16, 1)’ 부자를 주님으로 집사를 우리로 생각해봅시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사랑이라는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나눌 생각을 하지 않고 함부로 탕진하고 훼손시켰습니다.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함부로 탕진하고 훼손시켰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말로 기회를 한 번 더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는 약은 집사의 모습처럼 우리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기보다는 자신의 현재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방법을 찾습니다. 이 집사의 독백은 바로 우리의 독백인데 우리는 평생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죄인의 옷을 뒤집어쓴 채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잘못을 반성하고,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모든 것을 올바르게 행하고 모든 계명을, 특히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빈틈없이 지키기 위하여 치열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주님께 지은 빚을 갚거나 수치심에 빠져 살아가기보다는 이 빚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기회로 삼을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살핌 속에서 주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집사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인 주님께 지은 빚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기회로 삼는 것을 칭찬하십니다. 바로 그것은 주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나 자신의 죄에 묶여 비참하게 살아가기보다는 그 죄를 딛고 더욱 힘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바로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시는 주님께서 친히 사셨던 모습이기에 더욱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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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자,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몰래 깎아 줍니다.
그런데 복음의 맨 마지막 구절에서 주인은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고 칭찬합니다. 복음서의 내용이 아니라면, 이 비유에서 주인의 사고하고 판단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미래의 사람입니다. 날마다 이어지는 긴장과 움직임들 속에서도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오늘을 “아직 오지 않은” 내일과, 곧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을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와 묶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술가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려고 일상적인 사고를 버리고, 작품을 통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합니다.
또한 한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는 남자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준비를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오늘의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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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무엇을 하는가>
루카 16,1-8 (약은 집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대, 무엇을 하는가>
살고자 하는 사람이
어떻게든 살려고
안간힘쓰는데
살리고자 하는 사람아
어떻게든 살리려고
무엇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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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때는 불의했지만, 이젠 사랑하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 간에 서로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합니다. 개신교는 서로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호칭에 대해 비아냥대거나 비판할 때 형제로 대하지 않으면서 형제라고 부른다고 비판하고, 너도나도 다 집사이고 집사 아닌 사람이 없다고 비아냥댑니다.
사실 오늘 주님께서 집사의 비유를 드실 때 군중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러니까 일반 군중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이 집사라는 말씀이고, 당신 제자들이 집사로서 역할을 충실하고 정의롭게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대입하면 집사란 일반 신자가 아니라 신자들을 잘 돌보아야 할 사제를 말하는 것이고, 개신교에서는 목사와 일반 신자 사이에 직책을 맡은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협의적으로 얘기하면 이런 뜻이지만 넓은 의미로 얘기하면 꼭 그런 것만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신부나 수도자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다 제자지요.
그러므로 나는 집사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주님이 부여하신 직책 곧 제자직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오히려 얘기해야 합니다.
실제로 본당이나 재속프란치스코회 안에서 책임을 맡으라고 하면 거부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교회나 복지시설 봉사자가 점점 줄어드는데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의 시간과 힘을 그런 것에 쓰고 싶지 않고 산과 들로 놀러 다니는 데 쓰고 싶고, 도자기를 만든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취미생활 하는 데 쓰고 싶고, 내 영혼을 건강하고 살찌게 하려고 좋은 강의 듣는 데 쓰고 싶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2번에서 이렇게 비판하십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집사가 불의한 이유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기 때문인데 어떻게 보면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준 것도 낭비이지만 주님은 그것이 영리한 행위이고 그래서 불의한 집사를 영리한 집사라고 하십니다.
일반 세속의 주인에게는 그런 행위가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유용하는 또 다른 불의가 되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에게는 그것이 유용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적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재산) 곧 시간이나 능력이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하는 데 쓰라고 주신 거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고, 곧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산다고 한탄한 다음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라고 필리피 신자들에게 역설합니다.
하늘의 시민인 우리도 과거 하느님 것으로 우리 배 채우는 데만 힘썼다면 이젠 그러지 않는 곧 하느님의 선을 이웃과 나누는 영리한 집사, 곧 한때 불의하였지만 이젠 이웃을 사랑하는 영리한 집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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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리한 선택>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 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한편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의 혜택이 돌아갔으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영리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는 세상의 것에만 영리하면 됩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던 부모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하늘과는 멀어집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 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적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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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울증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지요. 처음 상당하면서 참 많은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으려고 책상 위에 놓인 휴지를 뽑는데, 상담 선생님이 자기보다 더 많이 울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자매는 ‘남의 이야기에 왜 우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몇 차례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자기는 울면서 말하고, 상담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울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온종일 내담자들을 대하실 텐데 그때마다 저렇게 울면 힘들어서 어쩌시지?”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남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을 걱정하는 마음을 통해 이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내담자의 이야기에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담자는 울고 있는 상담 선생님을 걱정하면서 치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하는 마음이 치유의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런 점에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자가 집사를 해고합니다. 이유는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루카 16,3)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재산을 횡령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보다는 그의 능력 부족으로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다가 부자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서 빚문서를 고칩니다. 기름 백 항아리는 쉰 항아리로, 밀 백 섬은 여든으로 고칩니다.
어떻게 보면 간교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른 집사입니다. 이 사실이 들통나면 깜빵에 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집사의 주인인 부자는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합니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주님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당해 보이는 수단까지 동원하는 약삭빠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의도가 어떻든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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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성월(聖人聖月)>
-성인이 되십시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가을이 참 좋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의 가을은 그대로 기도의 계절입니다. 정말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회개하고, 많이 사랑과 겸손과 지혜를 배워야 하는 만추晩秋의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이 깃들 여지가 없는 기도의 계절, 은총의 계절, 빛의 계절인 가톨릭 교회의 가을입니다.
11월 1일, 위령성월의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마침 어제 성녀처럼 사시다가 성녀처럼 미사 중 선종하신 어느 수녀님이 이날 입관식을 했고, 11월 2일 위령의 날에 장례미사를 봉헌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정말 성녀처럼 사신 수녀님이구나!’ 깨달음처럼 스친 생각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감동했습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요즘 자주 권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제 소박한 소원도 성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며, 누구나 믿는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성인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으며,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되었을 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는 참자유, 참 기쁨, 참 평화, 참 행복의 하늘나라 삶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서에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라.”(성규 4,62)
사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1월 위령성월慰靈聖月을 성인성월聖人聖月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만추의 가을, 성인이 되도록 특별히 노력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11월은 위령성월이자 성인성월입니다. 11월1일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은 곡도 가사도 아름답고 흥겨워 11월 한 달 동안 끊임없는 노래 기도로 바치려 합니다. 책상 앞에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 놓았습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또 하나 성인이 되어 살 수 있는, 제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참 자주 인용하지만 늘 읽을 때마다 힘이 나고 새롭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선종의 복된 죽음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만46세로 선종하기까지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던 성인이요, 그의 삼촌은 비오 4세 교황입니다. 비오 4세 교황에 이어 강력한 교황의 후보였지만 성인은 겸손히 사양했고 24년 동안 밀라노 대교구장이 되어 눈부시게 활약했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말년 행적을 소개합니다.
‘1576년,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성인은 병자들을 돕고 시신을 매장하는 데 온갖 도움을 제공하였다. 귀족들이 흑사병을 피해 모두 도망쳤을 때도 성인은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흑사병이 유행하는 중에도 병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하며 병자성사를 주었고,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며, 예방법을 주지시켰다.
성인은 오랜 극기와 과로로 핍진되어 1584년 11월 3일 밀라노에서 46세로 선종하였고, 1610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이 선종 직전 마지막 남긴 말, 임종어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
얼마나 멋진 임종어인지요! 늘 주님 앞에서 깨어 살았던 삶임을 입증하는 성인의 임종어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라 하시며, 먼저 세상맛에 자기를 잃고 난잡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개탄한 후 우리 모두 하늘의 시민으로 성인답게 살 것을 격려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도의 마지막 주님을 대신한 격려 인사는 참 고무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약은 집사의 비유를 통해 성인이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미래를 대비하는 약은 청지기의 민첩하고 신속한 대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인 주인은 이 불의한 집사의 죄를 추궁하기는커녕 칭찬합니다. 사실 주인은 내심으로는 묵인하며 흡족해했을 것입니다.
왜냐,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제가 알아서 스스로 살길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부자에게 이런 손실은 새 발의 피일 것입니다. 새삼 어떤 부자인 주인이 상징하는 바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얼마나 멋진 주님이요, 기민하고 과감하게 위기를 타개한 약은 집사인지, 순진한 바보가 되지 말고, 그의 처신을, 현실적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도 세상의 자녀들 못지않게 영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빛의 자녀, 성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의 설명이 명쾌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여러분, 집사의 비양심적인 면은 일단 덮어둡시다. 다만 그가 얼마나 민첩하게 실직 대책을 세우는지 눈여겨봅시다. 과연 그는 약삭빠르게 실직 위기에 대처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종말의 심판이 곧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집사처럼 민첩하게 대책을 세우시오. 어서 회개의 결단을 내리라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가 성인이 되게 합니다. 회개 은총과 더불어 뛰어난 위기 대처의 지혜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지혜를 겸비한 빛의 자녀로 성인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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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루카16,1-8)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네 복음서 전체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놀랍게도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자기 멋대로 탕감해 주면서 주인 행세를 한 그 불의한 집사를 주인은 칭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영리한 대처'입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대해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것에 대해서도, 나의 구원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도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돈과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과 노력을 두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영리하게 대처하면서도, 하느님과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는 덜 관심을 두고 소극적인 나는 아닌지?
나의 구원과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영리한 대처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필리 3,18-19)
약은 집사의 비유 안에 머물면서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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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Q5gM8RIW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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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 8)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관계 안에서
함께하십니다.
우리 삶 또한
관계로부터
태어나
관계 속에
살다가 관계로
마무리하는
관계의 삶을
살다 갑니다.
현실적 관계처럼
한순간에
아무것이 아닌
관계가 될 수 있는
우리 관계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 관계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존의 욕구처럼
절박한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의 돌파구는
삶의 대처방식처럼
막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주지 않고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약은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관계의
선물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지혜로운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칭찬은
끊임없이 관계를
이어가는
집사의
관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관계 맺는 방식이
외적인 욕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내적의미를 찾는
기쁨의 방식이길
기도드립니다.
건강한
관계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깨닫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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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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