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우리는 이러한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데살로니가 전서 3:3. 우리는 목표를 세울 때 융통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신의 상황을 모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새로운 회중을 세우는 일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사도 17:1-5, 10) 바울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면 형제들이 위험에 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변화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후에 그는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 새로운 형제 자매들을 영적으로 돕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3:1, 2) 데살로니가의 형제 자매들은 정말 고마웠을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겪은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봉사의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 봉사를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전도 9:11) 그렇다면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목표를 세우십시오. 「파22.04」 25-26면 14-15항 |
우리는 이러한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That no man should be moved by these afflictions: for yourselves know that we are appointed thereunto. —데살로니가 전서 3:3. Barnes' Notes on the Bible That no man should be moved - The word rendered "moved" (σαίνω sainō) occurs nowhere else in the New Testament. It properly means to wag, to move to and fro, as of dogs which wag their tails in fondness (Hom. Od. K. 216. AEl. A. N. 10:7. Ovid. 14:258); then to caress, to fawn upon, to flatter; then to move or waver in mind - as from fear; to dread, to tremble. See Passow and Wetstein. Here the sense is, to be so moved or agitated by fear, or by the terror of persecution, as to forsake their religion. The object of sending Timothy was, that they might not be thus moved, but that amidst all opposition they might adhere steadfastly to their religion. These afflictions - See the notes at 1 Thessalonians 2:14. For yourselves know that we are appointed thereunto - It is not quite certain whether by the word "we" here the apostle refers to himself; or to himself and the Thessalonians; or to Christians in general. On either supposition what he says is true, and either would meet the case. It would be most to the purpose, however, to suppose that he means to state the general idea that all Christians are exposed to persecution and could not hope to avoid it. It would then appear that the Thessalonians had partaken only of the common lot. Still there may have been a special reference to the fact that Paul and his fellow-laborers there were subjected to trials; and if this be the reference, then the idea is, that the Thessalonians should not be "moved" by their trials, for even their teachers were not exempt. Even their enemies could not say that the apostle and his co-workers were impostors, for they had persevered in preaching the gospel when they knew that these trials were coming upon them. The phrase, "we are appointed thereunto," means that such was the divine arrangement. No one who professed Christianity could hope to be exempted from trial, for it was the common lot of all believers; compare 1 Corinthians 4:9 note; 2 Timothy 3:12 note. 반스의 성경 주석 아무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 - “움직이다”(σαίνω 사이노)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개가 좋아서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흔들고, 이리저리 움직이고(Hom. Od. K. 216. AEl. A. N. 10:7. 오비드 14:258), 애무하고, 아첨하고, 마음을 움직이거나 흔들다 - 두려움에서, 두려워하고, 떨다 - 라는 뜻으로 적절합니다. 파소우와 웨트슈타인을 참조하세요. 여기서는 두려움이나 박해의 공포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거나 동요되어 종교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디모데를 보낸 목적은 그들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모든 반대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난 - 데살로니가전서 2:14의 주석을 참조하세요. 우리가 거기에 임명된 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가 사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느 가정에서든 그가 말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어느 쪽이든 해당 사례에 부합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박해에 노출되어 있으며 박해를 피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목적에 가장 부합할 것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공동의 제비뽑기에만 참여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그의 동료 사역자들이 시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언급된 것이라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들의 교사들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련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적들조차도 사도와 그의 동료들이 사기꾼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시련이 그들에게 닥칠 것을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임명되었다”는 구절은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마련임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 참고, 디모데후서 3장 12절 참고를 참조하세요. 기독교를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도 시련에서 예외가 되기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박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단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하기 때문에 박해를 당한다는 점이다. 즉 의로운 삶을 살려다 보니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의로운 삶을 살려는데 왜 박해를 당하는가? 가령 정직한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매우 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 있어서 그를 칭찬하고 그의 정직성 때문에 그를 좋게 평가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다. 반대로 약간 이상의 부정직한 거래를 해서 돈을 벌고 부를 누리는 사람들은 그의 정직성 때문에 그의 일에 참여를 시킬 수가 없다. 만일 그를 참여시켰다가는 그의 사업의 부정이 들통나 사업을 망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돈되는 일에 배제시켜야하며 많은 보수를 줄 수가 없고 혹 해고는 안하더라도 최소 노동비에 버금가는 보수를 줄 수밖에 없다. 다시말하면 정직성이 인간 관계에서 득이 될 때는 칭찬을 받고 손해가 날 때는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정직한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부정직한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인가를 분석해보면 의로운 자가 박해를 받을 것인지 칭찬을 받을 것인지가 자명해진다. 성서에서는 두 가지면을 지적하고 있다. 그 한 가지는 분명하게 공시되는 성질의 공적 측면이다. 이 경우는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관리자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투명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국가를 계시록에서는 짐승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짐승이 이성이 없고 본능대로 행동하는데서 유추된 것이다. 즉 자신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불투명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사회의 대다수 관리나 기득권층을 "광명의 천사"의 얼굴을 가진 '벨리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투명하게는 좋은 일을 하는 천사이지만 돌아 서서는 자기의 잇속을 가장 우선적으로 챙기기 위해서 갖은 불법이나 탈법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사회는 이중적인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 만일 어느 한쪽을 무시했다가는 사회의 질서가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진행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의 의로운 자들은 이러한 이중구조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 깨달음에서 종말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종말론이 대두 되는 이유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적당하게 죄짓고 서로 벌 주고 또 용서하며 살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악은 철저히 응징되어야 하며 악의 모양도 흉내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배치되기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것이다. 박해의 이유는 그외에도 다양할 수 있지만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이유이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를 가하기도 하지만 그 박해나 압력을 통해 같이 손을 잡자고 회유를 하기도 한다. 오늘날 어떤 종교인(예로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스스로 박해를 당한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이유는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반즈의 주석에서 말하는 것처럼 "특이성" 때문이다. 사회의 일반적인 시민이 지켜야 할 규범이나 예의를 벗어나 자체의 고유한 교리를 지키려고 하는데서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 의로움과 연결될 경우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사회에서 보편타당한 원리의 의로움을 지키는 것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를 의로운 새질서로 만들기 위해서는 특수한 교리들을 실천해서가 아니라 보편타당한 원리로 세상이 충만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
질문:
1.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종교 자체 때문인가?
2. 박해를 받는 이유 중에는 어떤 부정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