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아동문학의 맥〛③ 동시인 선용 선생님
맑은 동심의 서정을 가꾼다
대담 : 동화작가 김 문 홍
선용 선생이 첫 시집『가을바람』을 상재한 것이 1972년이니 벌써 42년째나 된다. 그러니까 실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훨씬 그 이전부터일 것이다. 지금까지 상재한 시집들은 하나같이 ‘동심시집’이라고 늘 앞에다 ‘동심’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 까닭은 첫 동심시집의 머리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더구나 동심문학 장르는 다른 분야보다 달라야 한다. 그것은 동심문학 작가들의 손에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내일의 주인공에게 우리는 무슨 일이나 본보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밝히고 있다. ‘동심’이란 곧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문학은 곧 그 사람이라고 했는데 선용 선생이 바로 그렇다. 사석에서나 혹은 모임에서나 항상 말소리를 낮춰 자분자분 말을 하고, 얼굴에는 항상 어린아이의 그것 같은 맑은 웃음이 은은하게 번지고, 목소리 또한 조용하게 흐르는 물처럼 은은하고 그윽하다. 언제 어디서나 흐트러짐이 없고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선용 선생은 천생 아동문학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시도 역시 맑은 동심의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현재 부산 아동문학의 산 증인이기도 한 선용 선생을 만나 문학과 삶의 지혜를 여쭙기로 한다.
풀 나무와 함께 맑은 서정을 가꾼다
김문홍 : 선용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늘 문학 단체의 공식적인 모임에서나 뵙고 이렇게 사석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문학을 떠나서라도 자주 자리를 같이 하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눠야 그게 도리인데, 늘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생활권과 관심이 다르다는 빌미로 그 흔한 전화 한 통 넣지 못하고 살아온 제 자신이 좀 부끄러운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먼저 선생님의 근황부터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론 요즈음 ‘숲 해설사’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하던데, 주 단위로 어떻게 소일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니 그 얘기부터 말문을 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 용 : 사람마다 자란 환경이 다르고, 하고 있는 일이 다르고,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듯이 저도 남과는 다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별난 짓과 모험, 관찰,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무척 좋아했죠. 말수 적고 조용하게 보여도 무척 별난 편이죠. 이걸 해봐야지 저걸 해볼까 머릿속에는 늘 그런 생각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나 직장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퇴직을 하면 못했던 것을 해야 하겠다 마음먹고 무척 설렜습니다. 그 동안 책도 140여 권쯤 냈으니 이제 그만 쓰고 산 속으로 들어가 약초 연구나 하고 유유자적하고 아름답게 살려고 했습니다. 사람의 일이 마음대로 됩니까? 여러 가지 일로 발목을 잡혀 있던 중 평소 내가 소재로 즐겨 쓴 대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택했죠. 집에서도 가까운 수목원에 생태해설사로 나가고 있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시간 노인복지관에 나가 재능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선용 선생님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맑은 눈은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김문홍 : 선생님께선 또 요즈음 건강관리를 철저하게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일 년에 한두 차례 단식을 하신다고도 하더군요. 그리고 모임의 식사 자리에서 보면 육식보단 주로 채식 위주로 식사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담배는 아예 하시지 않을뿐더러 과음도 하지 않고 그저 약간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범속인의 시각에서 보면 선생님의 그런 생활 습관이 마치 수도승의 금욕주의 같은 것으로 비칠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건강이야 어느 누구에게도 중요합니다만, 선생님께 그렇게 금욕주의적인 생활 태도를 견지하시는 건 독실한 신앙생활을 떠나서라도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들려주시면 후배들의 생활 습관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선 용 :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있죠. 어릴 때 전쟁과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고 죽을 고비를 몇 번 당했습니다. 가족의 사랑과 약초의 힘으로 살게 되었죠. 뒤에 현암사에서 <약초 이야기>란 책을 내기도 했지만 남달리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한두 번 금식을 하죠. 우리는 평소 별일이 없다고 과식하고 운동하지 않고 무절제한 생활로 몸속에 노폐물과 독소가 많이 쌓입니다. 그 나쁜 독소를 배출시키고 장기를 잠시나마 쉬게 하여 면역력을 높이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금식이죠. 꼭 필요한 건강법이라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건강은 바로 바른 생활습관이 만드는 것이죠.
동심문학에 뜻을 두다
김문홍 선생님의 약력 맨 첫머리에는 항상 ‘1942년 5월 11일 일본 동경에서 태어남’이라고 기술되고 있는데, ‘해방 전’이라는 출생 연도와 ‘동경’이라는 출생지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 둘을 연관시켜 보면 항상 일제강점기와 일본의 식민지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떻게 일제강점기에, 그것도 일본의 동경에서 태어나게 태어났는지 가족사적인 내력이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친께서 혹시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의한 징용을 당하시진 않았는지, 그것이 아니면 어떤 사연과 내력으로 식민 제국주의의 중심 도시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귀국하여 유년기를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선 용 70여 년 전 일이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조부모님께서는 기술자로 아버지 형제분들을 데리고 일본에 가서 동경의 큰 공장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동경에서 공부를 하셨고 고향이 밀양인 어머니와 결혼하셨습니다. 때는 일본이 전 세계를 손아귀에 넣겠다고 전쟁을 일으켰고 그에 맞선 연합군이 일본의 주요도시를 하루에도 수차례 공습을 했습니다. 그 전쟁의 포화 속 난리통에 제가 태어난 것이죠. 우리 가족 특히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가슴이 메곤 합니다. 3년 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우리는 서둘러 모든 것을 정리하고 10월26일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왔죠. 우리는 잠시 부산에 살다가 할아버지의 고향인 김해 한림면 장방리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 놓고 살려고 하는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 안 가 휴전은 되었지만 그 전쟁으로 생활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부자도 한 끼밖에 못 먹을 정도였으니 가난한 사람들이야 어떠했겠습니까? 어머니는 전쟁통에 나를 낳고 구완을 잘못한 데다 고국이라고 돌아왔는데 또 전쟁이 일어났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겠죠. 그 후유증으로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나는 김해 한림에서 초등학교와 진영 중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의 사업지인 부산으로 와서 줄곧 살게 되었습니다.
<서재에는 아동문학 서적으로 빼곡히 들어찬 소박한 사가가 선생님처럼 진솔하게 자리잡고 있다>
김문홍 부산문화방송에서 월간『어린이문예』잡지를 펴내게 된 게 아마 1979년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선용 선생님이 주간 직책으로 제게 전화를 걸어 잡지사에서 편집장으로 근무할 생각이 없느냐 말씀하셨지요. 그래서는 저는 근무 학교에다가는 이틀인가 사흘 정도의 병가를 내고 선용 선생님과 함께 창간 작업을 잠시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정식 직원이 아니라 임시직이라는 불투명한 신분 보장에 마음에 걸려 그 자리를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 잡지가 어떤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선용 선생님께서 주간 직책을 어떤 연유로 맡게 되었는지,『어린이문예』의 창간 비화가 궁금하니 이참에 한 번 들려주시죠.
선 용 부산문화방송의 사시(社是) 중 첫 번째로 ‘어린이에게 꿈을’이란 문구가 나옵니다. 민간상업방송의 효시사인 부산문화방송이 어린이들에게 어떤 꿈을 심어줄까 연구한 결과 당시 사장님의 조카인 아동문학가 조유로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어린이 잡지를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을 부산문화방송부설 가야문화연구소에서 맡기로 하고 사무국장에 시인 이수익 씨가 선임되어 발간 준비를 하려는데 사정이 있어 주간을 맡기로 한 조유로 선생님은 그만 두고 부산에서 얼마 동안 나오다 폐간한 <어린이 동산>의 주간을 했던 제가 주간을 맡아 발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 때 편집을 맡아 줄 사람이 없어 찾던 중 마침 김문홍 선생님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죠. 그 당시는 어느 기업이든 처음부터 어떤 자리를 보장해 주겠으니 오라가 아니고 얼마간 겪어 보고 임명하는 경우가 많아 교사란 탄탄한 직장을 버리고 임시직이란 불투명한 직장에 온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겠죠. 몇 달 간 혼자 뛰어 다니다가 정진채 선생님의 소개로 동화작가 배익천 선생이 오게 되었고 그 해 (1979년) 8월 <어린이 문예>창간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김문홍 선용 선생님께선 월간『어린이문예』주간 직책을 맡기 그 이전엔 한때 중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1970년대에 ‘새싹을 위한 교양 문예지’인『어린이 동산』의 편집 주간을 맡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어린이 문예』창간의 토양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잡지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으며, 또한 얼마 되지 않아 폐간의 비운을 맞기도 했는데, 나오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선 용 밀양에 있는 모 사립중고등학교에서 몇 년 간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지요. 그런데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고 촌에서 생활하기가 힘들어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데 마침 어린이 잡지 내겠다고 주간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지인의 부탁이 있어 바로 사직서를 내고 부산으로 왔죠. 신문사 다음 가는 인쇄 시설을 갖춘 문현동에 있는 아주출판사 <어린이 동산>이었습니다. 은종일 사장님은 수완도 좋아 <어린이 동산>은 4X6배판 칼라로 전국 어디에 내어 좋아 뒤지지 않고 필진도 좋아서 매달 5천 부 씩 찍었습니다. 그 때 편집장으로 동화작가 심군식 목사, 편집위원으로 동화작가 정진채 선생님, 시인 김종목 선생님, 총무 과장으로 동시인 최장길 선생이 함께 일을 했는데 몇 년 뒤 서울에서 더 화려한 잡지 <어깨동무>가 육영재단에서 나왔죠. 물론 그 잡지도 서점에서 판매했지만 학교에 무료로 보내어 <어린이 동산>의 판매가 격감하게 되었고 은종일 사장님도 전망이 흐림을 알고 얼마간 휴간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폐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멋진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싶었는데 폐간과 함께 그 꿈도 사라졌습니다.
<1970년대에 선용 선생님이 편집주간을 맡아 발행되었던 월간 '어린이동산' 잡지>
김문홍 선생님께선 제1회 ‘부산아동문학상’ 수상자이며, 현재 우리 ‘부산아동문학인협회’의 전신인 ‘부산아동문학회’의 탄생과 역사, 그리고 그 발자취를 잘 알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1976년에 동화로 등단하여 그 무렵에 부산아동문학회에 가입하여 회원 활동을 하다가 1978년 무렵에 그 단체를 탈퇴하여 ‘부산아동문학가협회’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향파 이주홍 선생님의 주선에 의해 다시 두 단체가 합류해 오늘의 부산아동문학인협회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부산아동문학사의 역사적 정리와 평가라는 측면에서 ‘부산아동문학회’가 어떤 경로로 창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초창기에는 어떤 분들이 참여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니 그 얘길 한 번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 용 60년 대 후반으로 생각되는 어느 날 서울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은사인 김봉진 (화가, 수필가)선생님을 만났죠. 이야기 중에 외국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있다고 했더니 부산에 이주홍, 조유로, 박돈목 선생님이 계시는데 아동문학의 원로라 꼭 만나서 인사를 올려라 하셨습니다. 시간을 내어 당시 영도의 남도 여중 국어 교사로 있는 박돈목 선생님을 찾아갔죠. 그 뒤로 박 선생님과 남포동의 보리수 다방에서 자주 만났는데 하루는 얼마 전에 포항에서 부산으로 온 아동문학가가 있는데 함께 만나보자고 했습니다. 바로 동화작가 정진채 선생님이었습니다. 달변가이고 열정적이고 아동문학에 무척 관심이 많은 분이구나 하는 것이 그의 첫인상이었습니다. 그 이후 세 명이 자주 만났는데 정진채 선생님이 부산에 아동문학에 관심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몇 분 있는데 모임을 갖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습니다. 의견이 일치되어 이주홍, 조유로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시고 박돈목 선생님이 회장, 정진채 선생님이 사무국장, 저는 총무, 이렇게 하여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이미 신춘문예 출신인 김종목 (김향)시인, 노금섭, 김용석, 조청차랑, 얼마 뒤에 KBS 황하주 선생까지 합류했지만 다들 직장일로 모임이 잘 되지 않았는데 2년 뒤쯤 다시 모여 정진해 선생님이 회장이 됨으로써 동인 모임에서 명실공히 부산아동문학가협회가 탄생되었고 얼마 뒤 김상남, 김문홍 선생님 주축으로 부산아동문학회가 설립되어 각각 활동하다가 향파 이주홍 선생님의 주선으로 두 단체가 합하여 오늘의 부산아동문학인협회가 되었는데 몇 분이 쓴 부산아동문학사에 모두 이 부분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김문홍 선생님께선 중국어에 아주 능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학교재로『표준중국어』와『생활중국어』까지 상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 아동문학 전집』외 80여 권을 번역하여 출판한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에 유학하여 본격적인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중국어에 능통한지 참 궁금합니다. 언뜻 듣기론『샤오동 유랑기』의 저자이며 타이완 사범대학교 교수이신 씨에빙잉(謝氷瑩) 선생님과의 기이한 인연으로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 중국에 가서 배우게 되었는지, 아니면 독학으로 깨치게 되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선 용 어릴 때 이야기인데 동경에서 부모님이 저를 잃은 적이 있었답니다. 물론 곧 찾게 되었지만 처음 보는 미국사람과 영어가 신기했던지 그들을 따라 갔더랍니다. 신기한 것에 호기심이 많았나 보죠. 벙어리가 소리 내는 것도 말인 줄 알고 따라하다 혼난 적도 있고 누가 이상한 말만 하면 곧잘 흉내를 내곤 했죠.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배운 영어와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는 언제나 1등이고 외국어 웅변대회에 상을 놓친 적이 없었죠. 장래 외교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외국어 공부를 닥치는 대로 했고 1963년 며칠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6개 국어를 하는 고등학생이란 제목으로 신문에 나기도 했으며 라틴어, 불어, 국제어인 에스페란토까지 했습니다. 에스페란토는 부산교대의 한글학자 박지홍 교수와 함께 공부하고 활동도 함께 했으며 부산경남지역 회장으로 각 대학의 동아리 지도 및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어도 처음에는 독학을 했는데 마침 옆집에 중국화교 유치원 원장님이 살았습니다. 당시 일종의 악성 종기인 <발치>가 유행이었는데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발치로 고생하실 때 익혀 둔 비방으로 그 분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분은 은인이라고 나를 무척 아껴 주었고 중국화교학교 이사이기도 한 그 분 덕으로 외국인 최초로 중국화교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독학으로 익힌 중국어가 많은 도움이 되어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죠. 그러니까 한국 고등학교와 중국 고등학교 졸업장을 모두 갖게 된 것입니다. 화교 학교 기숙사 시절 중국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번역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설화 <아이들의 바다>를 번역 출판하여 인도네시아 정부 감사장까지 받고 프랑스 동화 <야생마와 소년>그 밖에 영미 동화도 번역하면서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는데 세계 고등학생 한국 대표로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타이완의 여류작가 씨에빙잉 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중국의 신해혁명 때 기자로 종군하여 전쟁 중에 <여병자전>이란 글을 썼는데 세계적인 석학 임어당 박사가 영어로 뉴욕타임즈에 연재한 뒤로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 분의 책이 여러 권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중국어를 배운 것은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문학 원서를 구하지 어려웠는데 그 분이 저에게 많은 책을 보내주어 새로운 작품 번역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애석한 것은 그 분의 대표작 <애완정>을 번역한 원고와 원본을 함께 잃어버려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용 선생님이 그 동안 쓰신 동심 시집과 동요집, 그리고 번역한 중국 동화집은 숱하다>
<선용 선생님에게 중국어를 배우게 되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대만의 동화작가 씨에빙잉 여사의 동화집>
김문홍 저는 1980년대 초에 시 동인지『맥파』동인과『산호초』활동을 한때 하게 되면서 돌아가신 조유로 선생님을 많이 뵌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때 억울하게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부산 구치소에 계실 때 몇몇 문인들과 면회를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엔 퇴근 후에 광복동에서 거의 매일 조유로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 했었습니다. 그 이후론 선생님을 자주 뵙지 못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론 조유로 선생님께선 당신 특유의 고집과 문학과 문단에 대한 결벽증으로 여타 문인들과의 교류도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선생님의 문학적 위상이 낮게, 혹은 무관심에 가깝게 평가된 것도 그런 것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중에서도 최향숙 선생님과 선용 선생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조유로 선생님의 문학과 생활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참에 조유로 선생님과의 문학적인 위상과 문단적인 교류, 그리고 그 분의 문학적 엄정성을 알 수 있는 일화에 대해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 용 조유로 선생님에 관한 일화는 몇날 며칠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조유로 선생님과 함께 따라다니는 말은 아주 특별하다, 기인이다, 별나다, 보통 아니다, 말이 많고 독설가이다, 옹고집 똥고집, 등등의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닐 정도로 특이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에 대해 기발한 아이디어, 다재다능, 대단한 통찰력, 불타는 정의심, 표리부동하지 않고 명암 그리고 호볼호가 너무나 뚜렷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할 말은 속에 두지 않고 윗사람 아랫사람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바로 쏘아버리는 분이며 어쩌다 좋은 작품을 읽게 되면 전화를 하여 ‘이런 시가 진짜야. 너도 한번 읽어 봐라!’하며 선생님이 좋아서 칭찬하고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읽으면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본인 면전에서 ‘이런 걸 글이라고 쓰느냐? 나 같으면 발가락에 볼펜 끼워 하루에도 수백 편을 쓰겠다,’하고 핀잔 주기 일쑤라 다들 선생님 곁에 가기를 꺼려할 정도였습니다.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턴다 88”사건은 88년도 작품을 모두 체에 넣어 털었더니 한 편도 남는 게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 원로의 작품을 두고 ‘이 시가 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란 제목으로 선생님의 시론을 펼쳐 나가자 어느 누구도 반발하지 못하고 책방의 책을 모두 사서 불태워버렸는데 잡지사에서는 책이 잘 팔린다고 재판까지 찍은 사건도 있었죠. 다행히 저는 주로 외국문학작품 번역을 많이 했기에 선생님 영역 밖인지 저의 작품에 대해서는 항상 칭찬만 해주시어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류에 휩쓸리지 않은 대쪽처럼 곧은 분이시죠. 그리고 항상 새로운 문학세계를 지향하며 언제나 실험적인 글을 쓰셨습니다. 특히 아동문학은 순수한 동심을 강조하셨고 순수하지 않은 동심, 동심 같은 가짜 동심, 흉내와 표절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어린이를 얼마나 생각하느냐 하면 6X20의 선생님만의 원고지를 보면 아실 겁니다. 어린이의 짧은 호흡까지 생각하며 시를 쓰시고 후배들에게 ‘이름을 가려도 그 사람의 시임을 알 수 있는 시를 쓰라!’ 하셨는데 과연 이름을 가리고 그 사람의 글이란 것을 알 수 있는 작가가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요? 선생님은 특별히 저를 잘 보셔 집사람과의 인연을 맺어주셨고 무척 아껴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교도소와 법원 증인으로 선 경험까지 주셨지만 대단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선생님의 아들이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취직하여 첫 월급으로 당시 혁신적인 타자기 워드프로세스 르모 NO 1을 사드렸는데 기계의 결점을 발견하고 이야기하여 바로 르모 NO 2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결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야기 끝에 회사 측과 언쟁이 벌어져 법원까지 가게 되어 제가 증인으로 몇 번 갔으며 결국 승소하여 모든 제품을 판매도 하지 못하고 바로 르모 NO 3가 출시되었습니다. 승소기념으로 선생님은 저에게 르모 NO3를 선물하셨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소가 알려지자 모 전자회사에서 컴퓨터를 개발하겠다고 초청 제의가 들어왔고 선생님 덕으로 그 전자 회사에서는 한국 최초로 컴퓨터를 개발하게 되었죠. 그리고 모 한글자판도 선생님이 도와 나오게 된 것을 모두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손재주 또한 뛰어나 전각도 하고 컷도 그리고 시화도 직접 제작하여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저의 사무실에 오셔 한자 옥편은 많이 나와 있지만 한자 사전은 없다면서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셨는데 보름 뒤 갑자기 부고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고고하게 지내시면서 우리 문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참 문인, 참 시인이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선용 선생님의 젊은 날의 앳된 모습 속에는 날카로운 지성이 번득이고 있는 것 같다>
김문홍 선생님께선 그 동안 동요사랑회 고문, 한국창작가곡협회 고문, 한국동요음악연구회 자문위원, 한국동요작사작곡가협회 회장 등을 지내면서 동요 보급에도 많은 애를 쓰시고, 또 많은 업적을 쌓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좀 우스운 얘기지만 노래연습장에 가서 동요를 선곡하면 선용 선생님이 노랫말을 쓴 동요가 아주 많아, 인세 수입이 솔찮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론 동시와 동요는 한 뿌리에서 자란 동심문학으로, 하나는 시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래로 갈라지게 된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이토록 동요 보급에 열성을 쏟아온 것은 무슨 계기나 뜻이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동요 사랑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선 용 일반적으로 동시와 동요를 함께 묶어 <동시>속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저는 동시와 동요는 서로 대응되는 하나의 분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동요는 동시와 달리 어린이들의 감정이나 심리를 노래로 나타낸 것이라 내재율보다 외형률 즉 정형률을 필요로 하며 그 형식이 리듬을 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는데 특히 어린이는 노래를 통해 즐거움을 찾고 듣고 부르고 악기를 연주함으로 기쁨을 느끼고 생활의 풍요를 얻게 되죠. 어릴 때 외국에서 자라다 귀국하여 우리말도 서툴고 거기다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다 처음 들은 우리의 동요는 저에게 큰 감동이고 충격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그 멀고 쓸쓸한 등하교 길에 동요는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뒤에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자주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글을 썼죠. 하루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저의 시에 곡이 붙어 아이들이 부르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이었습니다. 열심히 시를 썼고 많은 작곡가 선생님들이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곡을 붙여 주시고 계속 시를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만 해도 1천 곡이 넘을 겁니다. 그리고 동요집만 21권과 3권의 가곡집을 냈고 아직 엮지 않은 것이 몇 권 분량이나 되죠. 저는 동요를 하고부터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나의 노래를 아이들이 불러주고 또 동요를 통하여 대한민국동요대상, 부산동요대상, 예술대상, 밝고 고운 말상 등 영광스런 상도 받았지요. 그런데 요즘 더 반갑고 기쁜 것은 부산에도 동요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동요 공부를 하는 김춘남, 김현수, 김현정, 소민호, 안덕자, 양경화, 엄성미, 이상미, 이서영, 이자경, 정재분, 조윤주, 조혜경, 최복자, 하빈, 황미숙 같은 아동문학가들이 동요모임 <해파랑 동요문학회>를 결성하고 3년째 노랫말을 쓰고 부산 울산에서 1년에 한 번 씩 발표를 해오고 있는데 이 분들이 앞으로 우리 한국의 동요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들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큽니다.
동심, 그 오묘한 세계의 비밀
김문홍 선생님께서 2001년에 엮어서 발간한『서정과 동심세계를 위하여』라는 책은 어떻게 보면 선생님의 시세계의 비경(秘境)을 엿보기에 아주 적절한 저서라 생각됩니다. 그 책은 선생님께 상재한 15권의 동심시집의 머리말, 시평, 그리고 직접 가려 뽑은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돌아가신 이재철 선생님은 선생님의 시를 ‘순수한 동심으로 바라본 자연’이라 부르고, 이준관 시인은 ‘자연 속의 동심을 노래한 시’라고, 이정석 시인은 ‘서정성과 애상성, 그리고 참신성’이라고, 정선혜 선생은 ‘범아시아적 동심 절대주의와 모성성’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몇몇 시평의 공통분모를 추출하면 선생님의 시는 ‘자연’, ‘동심’, ‘서정’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기엔 자신의 시적 소재와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왜 그런 세계를 천착하고 있는지요?
선 용 <서정과 동심 세계를 위하여>는 저의 회갑기념으로 2001년까지 낸 15권의 시집을 보고 평론가들의 평과 발문 관련의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잘 짚어 주셨는데 자연과 동심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대자연에 귀의하는 천인합일의 관점으로 순진무구한 동심을 언제까지나 지켜야겠다는 생각과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오염되지 않고 맑고 밝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19권의 동심시집을 내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소재와 주제도 자연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만 후회 없이 앞으로도 이 길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회갑 기념으로 출간되었던 '서정과 동심 세계를 위하여'는 선용 시세계의 이해를 위한 지침서이다>
김문홍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15권 시집에서 가려 뽑은 시편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시편들이 풀과 나무, 산과 강과 하늘, 그리고 자연의 순환에 대한 질서와 풍경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들의 ‘지금 이곳’의 일상적 풍경은 거의 없는 것 같았습니다. 혹자는 선생님의 이런 자연예찬에 대해 생활과 사회가 실종된 현실인식이 거의 없다고 폄하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자연예찬 위주의 시편들을 쏟아내는 무슨 의도가 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이 혹시 ‘동심’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요?
선 용 아마 자연만큼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도 없을 것이며 또 그처럼 하나같이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관심을 갖고 다가가면 갈수록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항상 새로운 메시지를 주는 것이 자연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시로 옮기려고 나름대로 노력해 보았지만 써놓고 보면 역시 표현력이 모자람을 느끼곤 합니다. 저는 자연 속에 우리의 삶이 있으며 삶 속에 자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제 시도 자연을 벗어나지 못하나 봅니다. 그리고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음 그것이 바로 동심이 아닐까요?
김문홍 저는 동화나 아동소설을 쓸 때 소재와 주제가 설정되면 머릿속에서 ‘긍글리는’ 시간이 꽤 깁니다. 즉, 머릿속에서 그러한 소재와 주제들이 푹 삭히는 발효 과정이 아주 길어야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그런 발효과정을 거친 후에 이젠 써야겠다 생각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단숨에 작품을 써 내려갑니다. 물론 시인들의 시 창작과정은 이와는 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한 편의 시를 써 내기까지는 대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합니다. 즉, 선생님의 시 창작과정에 대해 좋은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선 용 음식도 그러하지만 글도 충분한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깊은 맛이 나지 않는 법입니다. 요즘 우송되어 오는 책들을 보면 생짜배기가 많습니다. 익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도 않고 성의 없이 엮어 보내는 것을 보면 참 용기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책도 다른 사람이 보고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때가 있습니다. 동화나 수필 소설처럼 긴 문장도 그러하겠지만 시는 짧고 몇 자 안 되는 글 속에 바로 표가 나기에 더 긴 시간을 두고 숙성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통계를 본 적이 있는데 글 쓰는 사람들 중에 시인의 수명이 가장 짧답니다. 왜 그럴까요? 시 쓰는 일이 그만큼 힘들어 진이 빠지고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이죠. 저도 나름대로 숙성과정을 거쳐 쓰기는 하지만 아직 농익어 제 맛이 나는 그런 작품은 한편도 쓰지 못하여 무척 쑥스럽습니다.
<수안 스님이 선용 선생님에게 아무 탈 없이 지내라는 뜻으로 '무사'라는 글과 그림을 주셨다고 한다>
김문홍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 동시란 무엇이며, 또한 ‘동심’이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론 아동문학은 주 독자층이 어린아이들이지만, 그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동심’을 가진 어른들도 독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작할 때 미리 독자를 설정하고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선 시를 창작할 때 독자를 미리 설정하고 쓰시는지, 아니면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독자를 설정하거나, 설정하지 않든지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선 용 지금까지 동시란 말을 쓴 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아동문학이라든지 동시 동화는 한중일 3국에서나 사용하지 다른 나라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국문학을 먼저 접한 나로서는 동시(童詩)란 말이 어린이들이 쓰는 아동시(兒童詩)같이 느껴져 어린이를 위해 쓴 시도 시인데 왜 아이동(童)자를 시 앞에 붙였을까 의심을 했습니다. 동시는 물론 주 독자가 어린이기는 하지만 꼭 어린이만 읽으란 것은 아니잖습니까? 누가 읽어도 좋은, 그리고 동심을 잃은 사람이나 동심이 그리운 사람, 또 동심을 느끼고 싶은 사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동심(童心)이 깃들어 있는 시라 생각하기에 저만은 동심시가 옳을 것이라 그렇게 고집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시를 쓸 때 저 같은 경우에 독자를 미리 설정하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 차를 타고 가다가, 아니면 처음 본다든지 느낌이 다른 것을 만나면 그것을 여러 각도로 접근합니다. 물론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이지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하고 궁금한 것을 묻습니다. 그러는 사이 ‘바로 이거다!’하는 것이 떠오를 때 메모해 두었다 쓰고 고치고를 수차 반복하죠. 어떤 사람은 청탁 없는 글은 쓰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시상이 떠오르면 언제나 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작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하는데 많이 쓰다보면 그 중에 간혹 괜찮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지 않을까요? 적게 쓴다고 꼭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김문홍 아동문학에 종사하는 시인과 작가들은 성인문학(일반문학)을 하는 시인과 작가들이 아동문학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는 것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경향이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일반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편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 용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성인문학 하는 사람들이 아동문학을 폄하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편견이고 짧은 생각이라 봅니다, 한 마디로 오만방자하고 자신이 상식 이하의 자격 없는 작가란 것을 스스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동문학을 문학의 기초과정으로 생각한다든지 아이 취급하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죠. 자기 장르가 귀하면 남의 장르도 귀한 걸 알아야 지식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 아동문학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누가 읽어도 아닌 것을, 누가 봐도 안 되는 것을 한 치 부끄럼 없이 써낸다는 것 정말 무책임과 뻔뻔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가슴 울림은커녕 고개라도 끄덕여져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럼 너의 것은? 하고 묻는다면 저도 그렇게 할 말은 없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하고 긴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용 선생님의 신앙과 됨됨이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가훈은 시의 동심과도 맥이 닿아 있다>
선용 시인, 앞으로의 지평이 궁금하다
김문홍 선생님께선 지금까지 동심시집만 19권이나 상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들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 시적 감수성이 퇴화할 우려가 있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이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지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앞으로 선생님의 시적 세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시적 세계를 그대로 견지해서 나아갈지, 아니면 새롭고 또 다른 시적 세계가 화려하게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앞으로의 시 창작 활동에 대한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선 용 요즘 젊은 시인들 중에는 정말 뛰어난 시를 쓰는 분들이 많아 무척 자랑스럽고 부럽기도 하며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시각과 느낌 그리고 표현들을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시적 감수성이 둔해지고 퇴화된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좋은 시를 써온 선배님들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륜이 쌓일수록 깊이 있고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시를 여전히 쓰고 있거든요. 아마도 그 사람이 얼마나 계속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와서 느낀 것이지만 나이가 드니 젊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전에 무심코 지나친 ‘작고 소외받는 것들과 사라진 것들에 대해 시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며 특히 노인문학 노인들에게 동심을 심어주는 시와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김문홍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맑은 서정의 동심을 노래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혼탁하고 풍진 세상에 그처럼 맑은 서정의 품성을 유지해 오기는 참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아마 선생님의 가슴에 그런 혼탁한 세파를 헤쳐 나오게 하는 어떤 듬직한 무게중심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지금까지 옳고 바른길로 걸어오게 한 어떤 좌우명이 그 버팀목이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보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좌우명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어야만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선 용 선생님께서 저를 잘 보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들 위선과 거짓 속에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모습이며 비록 고고하게 살려고 해도 바람에 흔들리고 먼지를 쓰게 되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보통사람이라 그럴 때가 많지만 작은 신앙의 힘으로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남을 짓밟고 높이 올라가거나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며 진정한 축복이 따르지 않겠죠. 그래서 가능한 언짢은 일이 있어도 이해하고 양보하며 배려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만은 되돌려 주소 가야 뒤통수가 가렵지 않을 것 같아 요즘 시간 나면 무료봉사, 재능기부 등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즐겁고 행복 또한 오래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후배인 동화작가 양경화, 한아 두 선생님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문홍 선생님께서 동화나 동시를 쓰는 후배 작가와 시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특히, 함께 동심 시를 쓰고 있는 후배 시인들에게 선배 시인으로써 제발 이런 시는 쓰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은 건 없는지요. 또한 후배들의 이런 점은 칭찬하고 싶다, 아니면 이런 점은 앞으로 지양해야겠다고 하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들려주십시오.
선 용 ‘눈물과 아픔 없이 쓴 글은 남도 감동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남 뒤에 줄서지 말며 감투나 상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자신의 목소리로 울어도 귀를 기울일까말까 하는데 남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비록 맑지는 못하지만 제 목소리로 외칠 때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샘물은 계속 퍼내어야 맑은 물이 솟아오르고 그냥 두면 썩듯이 계속 쓰십시오. 쓰지 않으면 녹슬어 좋은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김문홍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좋은 얘기를 들려주시어 고맙습니다. 그리고 후배인 동화작가 양경화, 한아 선생, 그리고 저에게도 ‘오륙도’를 위시해서 ‘이기대’ 주위의 풀과 나무들에 대해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조근조근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며 하루해를 함께 보내주어 저희들에겐 좋은 추억거리가 생겨 신이 났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더욱 더 아름다운 동심의 서정이 함뿍 묻어나는 시 세계를 펼쳐 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014. 7. 16.)
<본 인터뷰를 위해 동화작가 이자경, 양경화, 한아 등 세 분 선생님이 사진 촬영, 원고 정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9월에는 동시인 최향숙 선생님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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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참 뜻 깊은 작업을 하고 계시는 김문홍 선생님께 드거운 박수 올립니다! 덕분에 원로 선생님들이 가지고 계셨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경청할 수 있으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선 용 선생님 늘 건강하신 모습으로 뵙게 되어 행복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배울 점이 많은 선용 선생님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