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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리움은 늘 눈 앞에 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언제라도 어느 곳이든 지
손으로 더듬으며 만질 수 있다.
그럼에도 늘 그립다.
그것이 고향이다.
내 아버지
자라면서 한 번도 무등에 태워 나를 데리고 다닌 적은 없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아프기라도 하면
무엇엔가 홀린 듯 깜짝 놀란 듯
정신없이 나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데려 가 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땐 어머니가 그렇게 해 주셨고
밤이 깊도록 시름을 놓지 못했던 작은 방 안의 한 숨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
고향.
십년 사이 강산도 변하고
육 십년 동안 바다가 육지로 변하고
그 땅에 수 십 층짜리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늘어졌건만
도심 한가운데 있는 내 고향은 여전히 옛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더욱 더 그립고 안쓰럽다.
그 것이 내가 좀 더 자주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
탓이기도 하다.
무릇 고향이라면 정답고 아늑하고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기만
하여야 할 터 인데.
어쩌다가 내가 품어 주어야만 할 존재처럼 쇠락한 채
길가는 나그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발길 한 번 닿지 않는 곳으로 변했는 지.
한 때는 그 곳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가득했던
시장통 이기도 했지 않은가.
어쩜 그 안쓰러움이 더욱 더 내 발길을 고향으로 끌어 당기고
있느지도 모르겠다.
마치 작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남부민 마을과 감내 산마을 같다.
먼 데서 보는 겉모양은 두 마을이 하나도 다르게 보이지 않건마는
조금만 발길을 당겨서 가 보면
한마을은 점점 더 비어 가고 공허해 지지만
다른 한 마을은 감천 문화마을이란 새옷으로 갈아 입고
점점 더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외지인의 발길로 분주 하다.
물론 좀 더 자세히 안을 들여다 보면 감천 문화마을 역시
오래고 긴 세월 동안 힘든 시절을 겪은만큼 여기 저기 상채기가 많고
때문에 꽤 많은 집들이 비어 있다.
그러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 깊은 골목의 그 빈집들이 차츰
새옷으로 갈아 입고 새 색깔로 채워 지고 있다.
이 모양은 마치
얼마전 까지만 해도 폐 어선들로 가득한 포구의 한 구석에 쓸모없이 휑하게 서 있던
낡고 오래된 공구 창고나 선박용 자재 창고들을 보는 듯 하다.
포구 한 쪽의 철공소나 공구 창고는 근근히 옛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 곳은 옛모습을 그대로 고이 간직한 채 멋진 카페나 식당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주위 이웃은 물론이고 먼 데 관광객들까지 끌어 모으고 있다.
마찬 가지 였다.
안타깝게도 예전에는 좀 더 도시적이고 번화했던 내 고향 동네는
쇠락할 데로 쇠락하여 관광객은 말을 할 것도 없고
오가는 나그네 조차 그 발길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반면에 바로 이웃 동네인 바닷가 언덕 마을은
당시에도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힘들게
살아 가던 동네였다.
그래도 당시 유일하게 아파트가 들어선 동네이기도 했다.
영선 아파트.
1960년대 중.후반에 입주를 시작했으니 벌써 오십년도 훌쩍 넘었다.
그 당시에는 요즈음 누드 분양이라고 새로운 트랜드로 부상하고 있는
뼈대만 설치된 그런 아파트 였다.
난방은 말을 할 것도 없고
각 방의 바닥조차 시멘트 대신 연탄재로 입주민이 스스로 채워넣던 시절 이었다.
지금은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 두 어 세대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나머지 세대는 모두 떠나고 없는.
그런데 기이 하게도 언제 무너질 지도 모르던 길 건너 편에 있는 언덕배기 판잣집들은
영화 .'변호사'의 촬영지가 된 이후로 급격히 관광지로 변모 하였다.
관광지가 된 이후로는 원래 살던 주민들은 삶의 터를 떠나고 말았다.
대신 외지인들이 그 집들을 사들여 바다가 잘 보이는 풍경을 이용하여
카페로 우후죽순 개업을 하고 말았다.
지금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은 거의 한 집 건너 카페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처음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각자의 개성을 살려
미술과 공예 작품들을 창작하는 문화마을을 형성하며 흰여울 문화마을이라는이름을 갖게 되었다.
흰여울 .
흰여울이란 원래 봉래산(고갈산) 기슭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마치 눈이 내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근래에 지어진 이름 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사이 그 청년 예술가들도 주변에 카페들이 들어서자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그 또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문화마을이라는 이름만 남겨둔 채.
그런데도 내게는 늘 정겹다.
마치 어릴적 어머니의 품속처럼
여전히.
수몰지의 원주민들이 물에잠긴 고향마을을 늘 그리워 하듯
그립다.
그들이 조상의 혼을 모시고 살던 뽕나무 가득한 마을이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 한들 그들 마음 속엔
늘 고향이 살아 숨쉬고 있듯이
나 또한 손바닥 위의 고향이 늘 그립다.
고향이 그리운만큼 옛동무들도 그립고.
집에 오느 길.
옛날 어마님의 손 맛이 그리워 들린 한식당.
입 맛은 그 어느 하나 어머니 손맛 닮은 게 없지만
모양만은 그럴싸 해 그나마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