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만난 애인
김미자
그녀에게 애인이 생겼다.
시대와 동떨어지게 도덕적이고 윤리관이 철저한 그녀였기에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장안에 화제를 불러 모았던「애인」이란 드라마가 조신한 유부녀들의 화두로 떠오르고, 건전한 가정의
파수꾼인 사모님들의 치마가 들썩였지만 그녀는 색다른 바람을 품었다.
마흔이 되던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지구의 온난화는 폭염과 열대야 현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했고, 자연을 이기지 못한 인간들은 집 밖으
로 뛰쳐나와 한강 둔치에서 지루한 여름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짜증나는 무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애인과 만날 생각에 들떠 있다가 에어컨 바람이 살랑대는
병원에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어린 애인과 처음 상면했을 때는 불확실한 미래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으나,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38세나 연하인 애인과 말년을 행복하게 보낸 사실에 용기
를 내었다. 여자가 수줍음을 잃어버리면 대담해지듯 그녀가 그랬다. 처음엔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더니
갈수록 뻔뻔해졌다. 애인을 앞세우고 다니며 당당하게 소개하는 모습이 민망할 정도였다.
결혼생활 십여 년에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애인에게서 찾았다고 자랑하며, 자나 깨나 애인 생각으
로 들떴으나 누구하나 그녀의 행복한 기분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미국 코넬대 연구팀은 남녀의 가슴 뛰는 사랑을 길어야 30개월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그녀의 애인과
사랑은 달랐다. 30개월이 지나자 오히려 애정의 두께가 늘어만 갔다. 마흔에 만난 애인은 그녀로 하여
금 오래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두 아이가 학교에 가고나면 품안에 고스란히 안겨지는 애인과 눈을 맞추고, 팔딱거리
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은밀한 비밀을 만들어 갔다.
그녀는 둘만의 식단을 준비하기 위해 고기를 구웠다.
그녀의 애인은 이글거리며 노릿노릿 해지는 고기를 바라보며 고기가 춤을 춘다고 좋아했다. 텔레비전이
엉켰다고 해서 가 보면 정규시간이 끝난 화면이 지지직거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만 고집하며, 화면
에 나타난 얼룩진 구름 떼를 보고 구름이 썩었다고 표현하는 애인의 천진스러움에 매력을 느꼈다.
그녀의 남편은 칭찬하는데 인색했지만 마흔에 만난 그녀의 애인은 칭찬할 줄 아는 예술가였다. 그녀가
색다른 옷만 걸쳐도 예쁘다고 만져주고, 거울 앞에 앉아 단장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주었다.
그녀는 남편을 떠올렸다. 몸에 끼이는 옷은 물론 꼭 맞는 옷조차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고, 항상 한
치수 큰 옷을 사야 안심하는 남편의 등살에 옷 한번 맵시 있게 입어보지 못하고 마흔을 넘겼다.
맨 얼굴에 립스틱만 짙게 발라도 정색하는 남편과 대조적인 애인은 그녀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사랑
하며 달콤하게 속삭일 줄 알았다.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보지 않으며 무시로 애정표현 하는 애인 덕
분에 그녀는 십년 젊어진 기분으로 세월 속에 묻혀 지냈다.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봄날, 카메라를 둘러매고 애인 손잡고 나서면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꽃 속을 노니는 꿀벌에게 속삭이고, 나비를 쫓아가며 소리 지르는 애인은 땅을 헤집고 나와 부지런히
먹이를 옮기고 있는 일개미 떼의 유혹에 빠져 그녀가 옆에 있는 것을 망각하는 때도 있지만, 그녀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애인이 그녀를 끔찍하게 위해 주는 것에 비하면 기다리는 일쯤이야…….
그녀의 애인은 그녀의 파수꾼이다.
나이 많은 그녀가 힘들어하면 “조금 쉬세요.” 헛기침이라도 나올라치면 기침약 시럽을 내밀 줄 알며,
조금 이상한 눈치만 보여도 “병원에 가셔야죠, 약을 먹어야죠.” 하며 자상하게 군다.
어느 해인가, 연말연시에 시댁 다녀오는 데 장시간이 걸렸다. 시아버지 기일이라 쉼 없이 일한 탓도
있었지만, 고속도로가 막혀 평소 다섯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곱절이나 걸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사흘을 끙끙 앓아누웠다. 얼마나 몸부림이 심했던지 침대 커버가 다 찢겨 나갔다.
앓아누운 적이 없던 그녀였건만 그녀의 남편은 야속하리만치 냉정했다. “제 몸 돌보지 않고 미련한 곰
같이 일했으니 혼나 봐야 한다.”며 약 한 봉지 사다 주지 않던 밉살스런 남편과 달랐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애인과 함께 여행을 했다.
고속버스를 타고 차창으로 스쳐가는 계절을 감상하면서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하는 대신 애
인과옹골찬 시간을 만끽했다. 여행 목적지에 도착하면 시어머니와 친정 부모님의 환영을 받았다.
나란히 서서큰절을 올리고 나면 그녀의 애인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녀는 애인 뒤치다꺼리에
쉴 새 없어도 행복했다. 그녀의 애인은 그녀뿐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염
시켰다. 낯가림이심한 그녀와 달리 상냥한 인사로 낯선 사람들과 금세 친해지고, 정을 쉽게 주었다.
그녀의 가족들조차 속수무책으로 애인이 전하는 행복 병에 감염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잠자리까지 빼앗기고 침대 아래로 밀려났다. 그녀의 옆엔 항상 남편이 아닌 애인이
있다. 그녀는 애인을 통해 사랑은 구속이란 말을 실감했다. 바늘 가는데 실 가듯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을 침대에서 추방시킨 애인은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가슴을 더듬고, 얼굴을 매만지
며 뒤척이다 잠들곤 한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그녀의 배 위로 올라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는 날도
있지만, 그녀의 남편은 못 본 척했다.
그녀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면 질투심을 감추고 한 마디씩 내뱉았다.
“신경 쓰지 말고 재미 많이 봐!”
애인과 함께 마냥 행복할 줄 알았던 그녀에게 가을 병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들이 그녀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 쓸쓸했다. 언젠가 그녀도 저렇게 사라지고 말겠
지. 애인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언제까지 사랑타령만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녀가 애인을 만난 지 4년이 되어간다.
정 떼는 연습의 필요를 느낀 그녀의 가슴에 깊어가는 가을만큼이나 쓸쓸함이 고여 온다. 카메라를 들
고 애인과 함께 낙엽이 깔린 오솔길을 걷는다. 많은 추억을 저장하기 위해서.
그녀가 연출을 맡았다. 그녀의 애인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프로 모델처럼 여러 모양으로 포즈를 취한다.
먼 훗날, 애인이 함께 했던 날을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그녀는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첫댓글 ㅎㅎㅎ 늦둥이네요..늦둥이는 효자..효녀래요..ㅎㅎ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