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존자의 일기 5
91. 큰 정사의 시체 태우는 막대기
이 교단의 막중한 책임을 지는 비구의 생애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고요하게 머물지 못하는 비구들을 부처님께서 시체를 태울 때 사용하는
부지깽이로 비유하셨다.
“비구들이여!
살아가는 것 가운데 사발을 손에 들고 얻어먹는 것이 가장 낮은 일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러니 너는 바가지를 들고 남의 문전에서 얻어먹는 일이나 하라.’고 저주를 한다.
그 정도로 저속하고 낮게 살아가는 것을 선한 남자들이 이익이 되는 결과를 바라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둔다.”
“그들이 발우를 손에 들고 빌어서 살아가는 것은 왕의 위협 때문도 아니요, 강도의 괴롭힘을 받아서도 아니다.
남의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도 아니고 전염병 등의 위험 때문에도 아니다. 또한 살아가기 어려워서도 아니다.
사실은 삼사라(윤회)의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입태하는 것, 늙고 병드는 것, 죽음, 뜨거운 번뇌, 통곡, 몸과 마음의 고통이라는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다.’라고 원해서 이 교단 안의 생애로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 들어올 때 이러한 마음으로 들어왔던 선한 남자들이 교단 안에 도착한 다음에도 세간에 있을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거나 탐심과 화냄을
키운다면, ‘바르게 알아차리는 지혜’와 함께 하지 않다면, 그 남자는 세간 사람의 부귀도 놓쳐 버린 것이요,
비구의 호사도 완전하게 마음껏 가질 수 없다.
비유를 들자면 죽은 시체를 태우는 곳에 사용하는 대나무 장대는 아랫쪽과 위쪽은 불에 타고 가운데 부분은 시체 물이 묻어 있다.
이 막대기는 마을에서 장작으로 사용할 수도 없고 숲 속에서 초막을 짓는 곳에도 쓸모가 없다.
그와 같이 수행자가 되었으면서도 마음이 고요하게 머물지 못하는 이는 세간 사람의 부귀와 출가 수행자의 호사 두 가지 모두를 잃어버린 것이
된다.”
앞에서 사까 종족으로, 사까 아들들과 팔짱을 끼고 친히 지내면서도 양쪽편의 이익을 모두 잃어버린 이들을 보여 주었었다.
그 원인이 충분해졌을 때 그들의 행동들을 보여주리라. 예를 들어서 보여준 이들의 그릇된 행을 삼간다면 나쁜 쪽을 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교단 안에서 가장 나쁜 무리들을 들자면 육군비구들의 이야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6명의 무리 가운데 맫띠야와 부 마사까 들을 앞에 보여 주었었다. 말라의 종족 답바 마하테라께 엉터리로 모함하였던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보여 줄 이들은 빤뚜까와 로히 따까 한 쌍이다.
그들 둘이 유명한 것은 마른 잎에다가 불씨를 뿌리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나는 스님들마다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상가 대중 스님들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항상 부글거리고 끓어대는 이들에게 더 부추기는 일도 곧잘 했다.
“스님들, 그 스님에게 스님들이 꿀리는 것이 뭐가 있소? 양보할 필요가 없지 않소. 힘이 있는 대로 모든 스님들께 따져서 도움을 받으시오.
그 스님들보다 스님들의 지혜나 힘이 모자라는 것이 없소. 보고들은 견문 역시 많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내가 스님들 편에 서겠습니다.”
이처럼 힘을 주고 격려하고 충동하고 자극하여 부추기기를 잘해서 새로운 허물을 끊임없이 생기게 하였다.
대개 조용한 작은 일거리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불어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 두 비구들을 불러서 여러 가지로 나무라고 꾸중함으로 벌을 주도록 명령을 내리셨다.
빤뚜까 한 쌍은 우리들과 함께 제따와나 정사에 같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행동은 오래지 않아서 조용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싸 지와 뿌나바수까들의 행동은 좀처럼 조용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머무는 끼다기리의 큰 마을은 제따와나 정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무 외진 곳이어서 마하 사리불 테라 등의 마하테라 들도 가시는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이러한 상황의 그 마을을 아싸 지들이 일부러 골라서 그 절의 책임을 맡은 것이다.
상가 대중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일평생을 마음대로 지내려는 속셈이었지만 그들이 목적한 대로만은 되지 않았다.
까시 국의 어느 한 마을에서 안거를 지낸 비구들을 통해서 그들의 소식이 제따와나 정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비구들이 사왓띠의 수도로 부처님을 뵈려고 오는 도중에 그 마을에 들어가서 걸식을 했던 것이다.
항상 알아차림을 집중하여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눈길을 내려 뜨고 걸식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왓띠 수도에서 이렇게 단정한 자세로 걸식을 한다면 음식을 얻기는 어렵지 않다.
보기만 해도 신심과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모습을 보고 신도님들이 남보다 먼저 공양을 올릴 것이다.
그러나 아싸지들이 머무는 그곳은 그러한 위엄이 넘치는 자세로 걸식을 나간다면 굶주림만 청하는 것이 되었다.
“이 비구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의 걸음걸이는 걷는지 마는지 마치 힘이 다 빠져서 곧 죽을 환자 같구나.
그리고 그의 얼굴은 찡그린 것도 같네. 이러한 비구에게 누가 공양을 올리겠는가?
우리들의 스승님 아싸 지 테라께서는 저와 같지 않다. 부드럽고 편안하게 지낸다. 부드럽고 화기애애하게 말씀하신다. 만나기라도 한다면 ‘어서 오세요, 들어오세요’라고 웃음으로 반긴다. 저분처럼 딱딱하니 굳은 얼굴도 아니고 가려는 곳에 얼굴을 번듯하게 들고 가신다.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는 그러한 분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끼따기리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스님들과는 너무나도 정반대의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대신 경멸하는 말들만 집집마다 던져주었다.
그러나 그 마을 전체가 그들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구 수행자들의 수행하는 것과 위의 를 바르게 이해하는 이가 한 사람 있었다. 많은 이들을 거슬리지 못해서 그저 조용히 지내기는 했었지만 저렇게 비구 수행자로서의 바른 위의 를 제대로 지니는 스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의 바람이 헛되지 않아서 한 숟갈의 공양도 얻지 못한, 바라던 그 스님을 집으로 모셔 와서 공양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자 말끝에 제따와나 정사에 가시는 길임을 알게 되어서 끼다기리 정사의 복잡한 사정을 모두 황금의 귓전에 여쭈어 주시기를 부탁드린 것이다.
아싸 지들의 행적을 모조리 다 펴놓기는 어렵다. 마을 안의 여자 신도들과 어울리려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잔치를 모두 떠벌렸다. 은근히 떠들어 가면서도 네 가지의 가장 큰 허물(빠라지까)에서 비껴 나기만 하면 적당하지 못한 것은 남김없이 모조리 범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불건실한 비구들을 다스릴 책임이 누구에게 내려질 것인가? 이 일을 위해서 특별히 따로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 객스님이 여쭙는 말을 듣던 대중 스님들이 모두 마하 사리불 테라와 마하 목 갈라나 테라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아싸 지를 포함한 그 육군 비구 모두를 그분들이 주선해서 비구를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리불과 목 갈라 나요!
너희들이 끼다 기리 마을로 가서 그 절에 있는 아싸 지와 뿌나 바수 까에 포함되는 무리들을 모두 그곳에서 쫓아내어라.”
자기가 만든 약을 스스로들 마시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그 쓴 약을 먹기가 어려워서 “거룩하신 부처님이시여!
그들은 매우 거칠고 잔혹하며 매우 낮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쫓아내는 일(빠바 사니야 깜마)을 제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낳아서 길러 놓은 망나니 자식을 다스리고 훈계해야 하는, 하기 어려운 부모처럼 된 것이다.
“사리불이여! 그러면 비구들을 충분하게 모아서 데리고 가라. 그 빠바 사니야 깜마를 진행할 때 이렇게 조직적으로 빈틈없이 행하여라. 아싸 지와
뿌나바수까들을 불러서 먼저 자세하게 조사해서 그런 사실을 인정하도록 말해 주어라.
그 행동에 적당한 허물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말해주어라.
그렇게 차례차례 행한 다음 상가 대중의 이름으로 그 절에서 쫓아내는 빠바 사니야 깜마와 싸(절에서 쫓겨나게 되는 이유와 결정된 내용을 읽는 것)을 행하도록 하라.”
이렇게 자세하고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끼다 기리 정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상가 대중의 힘을 거스르지 못해서 받아들인 것이지 그 일을 만족하게 여겨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다른 종파의 스승 밑으로 옮겨가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마을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 무리들은 그들의 우두머리 두 사람에게 결정된 사실을 알고 있는 상가 대중이 들릴 만한 곳에서 갖은소리들을 내고는 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두 찾아내서 실행하는 것 같았다.
좋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것, 미워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것, 두려워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것, 능숙하지 못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것,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행하도록 여러 가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을 불러 모아서, 사실이 아니고 그릇된 것으로 모함하지 못하도록 상가 디시사 13번째 허물 마지막 계율을 자세하게 설하시어서 정하셨다.
이러한 것들은 육군 비구들의 일만 육천 가지의 행동 가운데 그 작은 일부분에 해당된다. 이 큰 교단 안에는 계율을 깨끗이 구족 하게 지니는 이들도 있지만 그 가운데 쓸모없는 시체 태우던 막대기 같은 이들도 어쩔 수 없이 끼어 있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밖에 다른 이들의 좋은 마음과 신심을 키우게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보여 줄 수는 없다.
세상이란 어차피 가지가지가 서로 섞여 있는 것이다.
그분의 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나쁘게 변한 일이 생겨나도록 자극한 일 한 가지를 보여야 할 차례이다.
말한 대로 사람들의 신심이 무너질 만큼의 행동들을 막기 위해서 금계를 정하셔야 했다.
어떤 계율들은 느슨해서 거듭 다시 조여야 했고 어떤 것은 너무 빡빡해서 비구들이 지내기가 힘들지 않도록 풀어야 했다.
이렇게 계율들로 방패 언덕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좋은 비구 스님들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으나 나쁜 스님들은 지내기가 불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무리들은 이 교단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참회하여서도 치료할 수 없는 빠라지까 큰 허물을 범하고서도 절에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지냈다.
상가 대중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부처님 앞에서조차 얼굴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우리들은 뽁빠란마나 정사에서 비구 포살을 하려고 모두 모여 앉았다.
대중 가운데는 부처님께서도 앉아 계셨다. 절 건물 전체를 계단으로 정해 놓았으므로 계단으로 정하는 일은 다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상가 대중이 모여 있는 법당에서 포살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때 상가 대중의 일, 비 구포 살을 할 때는 부처님께서 직접 참석하셨다.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따로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의 우뽀사타(비구 포살)는 어떠한 껄끄러운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초저녁이 다 지나갈 때까지 우뽀사타를 시작도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조용히 그냥 계시니 상가 대중 스님들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사를 다시 고쳐 감고 부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높이 합장 올리고 나서 “높으신 부처님이시여!
오늘 밤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초저녁이 이미 지나갔습니다.
상가 대중들이 앉아 있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비구들에게 비 구포 살을 보여 주십시오.”
이렇게 여쭈었지만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셨다. 이렇게 한 밤중이 지나갈 때 다시 한번 더 사루 었다.
역시 그전처럼 미동도 없으셨다. 밤이 모두 지나가고 먼동이 떠오를 때 세 번째로 다시 여쭈었다.
그러자 “아난다여! 대중이 깨끗하지 못하구나!”
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깨끗하지 못한 이가 누구인가.” 하고 내가 둘러보았지만 아닌 척하고 지금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그대로 앉아 있는 연극이 훌륭해서 내가 도저히 가려낼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은 나보다는 마하 목 갈라나 테라께서 더욱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오래지 않아서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일어나라. 너를 부처님께서 보셨다. 비구 스님들과 함께 우뽀사타를 할 기회가 너에게는 없다.”
모든 상가 대중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드러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첫 번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는가 하고 두 번째 다시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세 번까지 말하였는데도 그는 얼굴도 뻔뻔하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자 원래 성품이 딱딱하신 그분께서 그 가짜 비구의 팔을 잡아끌어다가 대문 바깥으로 던져버리고 대문 빗장을 잠가 버렸다.
그리고 부처님께 공손하게 합장을 올리고 사루 었다.
“대중이 깨끗해졌습니다. 부처님, 비구들에게 빠띠목카를 보여 주십시오.”
“오! 놀랄 만한 일이로구나!
오! 놀랄 만한 일이구나!
목 갈라 나요! 있을 수 없는 고약한 일이로구나!
이 교단 안에 쓸모없는 그 남자가 팔을 잡혀서 끌려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다니! ”
너무 고약하여서 부처님께서 탄식의 소리를 하실 만큼 특별한 이였었다. 붓다가 되시고 나서 20번째 안거가 채워지는 그 해 그 달의 우뽀사타는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참석하신 우뽀사타였다. 그 이후부터 모든 상가 대중의 일에 부처님께서 참석하시지 않으셨다.
상가 한 사람이 모자랄 때 부처님께서 대신하는 것도 될 수 없었다.
부처님께서 계시므로 상가 대중의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모든 상가 대중의 일은 상가들만이 처리하게 되었다.
빠 탄마 보디라고 부르는 전반부의 20 안거에서 삣시마 보디로 부르는 후반기로 건너갈 때 이렇게 기억할 만한 큰 변화의 사건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두 배나 더 크게 우리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사건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난존자의 일기
92. 여행의 절반을 지나서
이곳저곳의 도시로 마을로 긴 여행을 떠난 것이 수없이 많았다.
부처님의 뒤를 따라서 갈 때도 있었고 가끔은 우리들끼리만 떠날 때도 있었다.
걸어서 걸어서 가는 여행 도중에 그늘이 짙은 산언덕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쉬게 된다.
전망이 아름다운 산언덕이거나 경치가 좋은 숲 속이면 잠깐 앉아 쉬면서 자기가 지나온 여행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지금 역시 전망이 아름다운 산언덕의 한 곳에 도착하였다.
우리들이 사는 이 시절은 정명이 일백 년이라고 지혜 있는 이들이 말하고는 한다. 대개 많은 쪽을 따라서 생각하는 이 수명의 단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들의 인생 여정의 절반을 지나왔다고 할 수 있다. 나이가 50을 넘어선 것이다.
부처님의 안거는 출가하고서부터 세어서 26 안거, 모든 번뇌를 다 소멸한 지혜를 얻어서 붓다가 되고 난 다음부터 세어서 20 안거가 지났다.
이 20년 동안을 빠 탄마 보디라고 우리들은 부른다.
이 빠탄마 보디의 안거가 채워지는 이 산 언덕 위에서 지나왔던 여행길을 돌이켜 볼 때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이 시원하고 아름다운 경치였다.
세간에 살 때부터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교제를 가져왔던 나는 다른 이들처럼 종족에 집착이 지나치지는 않다.
그러나 나의 인생 여정에 많은 그늘을 만들어준 친족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형님 싯달타 태자와 함께 깨끗하게 자라도록 키워준 어른들, 부모님들의 자비에 감사의 마음으로 싸도를 부른다.
시간이 지나 어른으로 성장하여서도 나는 항상 부모님과 여러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왔다.
내가 무역을 하느라 뱃길로 육로로 여러 지역으로 다닐 때도 기가 죽어야 할 일은 없었다.
아미도 다나의 아들이라고 알기만 하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까이 와서 친분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오다나 형제들의 좋은 명성은 우리 사까 종족들의 지역을 넘어서서 널리 드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의 그늘을 업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나의 생애는 큰 고개를 넘게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누구의 노력이나 충동이 아니라 지극하게 사랑하던
형님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였다. 그 높으신 형님의 가르침을 펴시는 일을 도와드리려고 한 것이다.
내가 그 높으신 형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처럼 형님께서도 나에게 아낌을 보여주셨다.
그분께서 여섯 번이나 막으셨던 대문조차 내가 억지로 열어 주도록 물러나 주신 적도 있다.
이 일로 인해서 형님의 나무람을 받아야 했고, 돌로 만든 일산처럼 존경하던 마하테라분들의 거부함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슬퍼하거나 마음 상하지 않았다.
나를 거부하시는 마하테라 님들, 그분들에게 불만족스러운 마음도 없다.
이 교단의 비어 있던 한 자리를 채웠던 일에 대해서 오늘까지 기뻐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보다 더욱 기뻐할 일은 나에게 법을 가르쳐 주시는 스승님을 부처님 앞에서 자주 뵙게 되는 일이었다.
이 교단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법을 얻으신 분이 인냐띠 꼰단냐 마하테라이신 것은 세상이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아버지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굴려서 태어나게 해 준 아들들이 나이가 들어 점점 늙어갔다. 그래서 그 아버님께 아들이 해야 할 책임이나 시중을 계속하여 들어드릴
수 있도록 그의 누이의 아들인 뽕나 테라를 부처님 곁에 데려다 놓고 그분 스스로는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삼촌께서 맡겨준 대로 만다니 브라만의 아들 뽕나 테라는 부처님의 시중을 들어드렸다.
여행을 가시는 곳, 걸식하시는 곳에 항상 뒤를 따르면서 크고 작은 일을 돌보아드렸고, 차고 더운물을 제때에 준비하여 드렸다.
삼촌의 말씀을 존중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부처님께 지극하고도 크나큰 신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지극한 신심은 은혜가 크신 부처님께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 이러한 모습만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의스럽지 못한 것을 예의스럽게, 영리하지 못한 것을 영리하도록, 알지 못하는 것을 알도록 이익을 주는 것도 은혜를 갚는 일이 된다.
그 밖에도 뽕나 마하테라는 특별하게 뛰어난 법사였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법의 북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우리들은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법의 북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울리도록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해야 할 모든 일을 그분이 오시기 전에 내가 모두 미리 완벽하게 해 놓는 것이었다.
부처님 앞에서 나와 만날 때마다 그분은 항상 웃음 띄운 얼굴로 나를 자세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 마음속의 상태를 아시고 자세하고 선명하게 법을 보게 해 주셨던 스승님께서는 지금의 나의 마음도 아신 것이리라. 지혜를 함께하셔서 웃음 지으시는 그분을 향해서 나도 공손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 드렸다.
그다음부터 그분은 부처님 앞에 날마다 오시지 않고 법을 설하시는 시간이 아닐 때에만 오셨다.
이러한 시간을 내어서 시중드는 일을 내가 우선으로 하였다. 이렇게 우선으로 하고 우선으로 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가끔은 나가사마 테라도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들고 따르기도 했다.
그와 같이 나 가띠 테라, 우빠와 나, 수나 카따, 순다, 사가다, 매기야 테라 등도 적당한 대로 시중을 들어 드렸지만 부처님 뒤를 바짝 따르면서 항상
시중드는 이는 없었다.
그중에 특별하게 유명한 이가 우빠와 나 테라였다. 눈에 뜨이게 커다란 몸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그를 코끼리라고 불렀다.
어른이 되어서 별나게 큰 몸에다가 비구계를 받고 조각조각 기워서 보탠 누더기 가사를 걸치니 더욱 크게 보였다.
크고 뚱뚱한 우빠와나 테라도 부처님을 시중 할 때는 가볍고 잽싸게 움직였으며, 높은 노력심을 가졌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배탈이 나셨다. 그때 그분은 잠깐도 쉴 틈이 없이 발우를 메고 바깥으로 나갔다.
정사 안에서는 따끈한 물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방법을 기다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고, 부처님의 병세는 시간을 다툴 만큼 급했다.
그래서 사왓띠 성을 향해서 몸도 마음도 빠르게 재촉하여 떠나갔던 것이다.
떠나갈 때 빨랐던 것처럼 돌아올 때 역시 바람처럼 휙 돌아왔다. 그 뒤에 어깨 짐을 지고 따라오는 남자는 스님에 처질 세라 숨을 헐떡거리고 좇아왔다. 그가 지고 온 항아리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물이 들어 있었다.
부처님을 위해서 뜨거운 물이 가득한 항아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우빠와 나는 뜨거운 물을 조금만 남겨 놓고는 모두 목욕탕으로 가져갔다. 부처님께서도 그곳으로 들어가셨다.
한 분의 마음을 한 분이 알아서 입으로 드러내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여쭙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이다.
더운물을 사용하셔서 온기가 돌아온 부처님께 우빠와나는 다음 한 가지를 더 준비해 드렸다.
발우에 담아 가지고 왔던 설탕 덩어리를 더운물에 녹여서 올린 것이다. 적당한 약을 사용하신 부처님의 배탈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 배탈이 낫은 시간에야 더운물을 보시한 신도, 설탕을 보시한 신도들이 정사에 도착했다.
그는 대위하까라는 브라만이었는데, 이전에 삼보를 믿고 의지하는 이가 아니었다.
우빠와 나께서 그 집에 약을 얻으러 갔을 때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정사에 따라와서 법문을 듣고 삼보를 믿고 의지하는 신도가 되기로 하는 삼귀의를 서원하게 된 것이다. 우빠와 나의 간호하는 일로 하루에 두 가지 이익을 얻게 된 것이다.
법을 전하고 가르침을 펴는 이 여행 전체에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영리하고 지혜로운 제자를 만났듯이 가끔은 영리하지 못한 제자와도 만나게 되었다.
쌀리까라는 도시 근처의 산에서 머무실 때 생긴 일이다.
그때 그분의 시중을 들면서 뒤따르는 매기야는 싼 두라는 마을에서 걸식을 하여서 부처님을 시중하여 드렸다.
어느 날 매기야는 끼미까라라는 강이 있는 곳으로 혼자서 길을 걸으려고 나섰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부처님, 끼미까라 강둑을 걷다가 그늘이 두텁고 아름다운 망고나무 숲을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망고나무 숲에 가서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부처님 곁에 자기 외에는 다른 비구가 아무도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조금도 주저 없이 여쭈어서 청을 드린 것이다.
“매기야! 잠깐만 기다려라. 나 혼자 있구나. 다른 비구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앞에 일어날 일을 아시는 부처님께서 그를 위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대로 있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매기야는 부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떠한 것도 그의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부처님! 부처님께는 다시 더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아직 다 하지 못한 일이 남았습니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망고나무 숲에 가서 수행하기를 원하옵니다.”
자기의 마음속의 원하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막으시는 것을 세 번이나 거듭 억지로 청하여서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매기야, 수행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이를 내가 막아서야 되겠는가? 네가 가야 할 시간을 너 스스로 알 것이다.”
막아서 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허락하신 것이다.
허락하시는 말씀 가운데 자기의 일보다 법의 일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시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억지로 허락을 받은 매기야는 그가 좋아하는 망고나무 숲 속으로 갔다.
가는 동안 그 자리, 그 장소에서 법을 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굳게 결심을 하고 열심히 노력을 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법을 얻지 못하면 이 숲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그러나 그 매기 야가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그의 얼굴이 볼 수 없을 만큼 초췌해졌다. 망고나무 전쟁 마당에서 그가 어떻게 되었었는가?
“부처님! 그 숲으로 가서 수행하려고 하는 저의 마음속에 세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세 가지 깜마 오욕락을 즐기려는 간절한 생각, 다른 이에게 허물 지으려는 생각, 다른 이를 괴롭히려는 생각입니다.
신심으로 출가 수행자가 되어서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에 저 스스로도 놀라고 있습니다. 부처님.”
망고나무 숲 속의 전쟁에서 볼상 사나운 모습으로 뛰쳐나왔던 모습을 그 스스로 와서 여쭈었던 것이다.
스승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전쟁터에 나간 것이 패배하는 길 외에 다시 달리 더 무슨 길이 있겠는가?
세 번이나 거듭해서 말렸으나 듣지 않고 억지를 써서 떠나간 그 어리석은 제자를 부처님께서는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다시 받아들이셨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의지할 곳을 찾아오는 것도 마다하시지 않았다.
떠난다고 했을 때도 담담히 허락하셨던 것처럼 다시 오겠다고 할 때도 조용히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다음 부처님께서는 도와 과의 지혜를 차례차례 성숙하게 하는 법 다섯 가지를 설하셨다.
① 좋은 도반을 가까이할 것
② 지계가 구족 할 것
③ 법문을 들을 것
④ 지극한 노력을 기울일 것
⑤ 예리한 지혜가 있을 것
이 다섯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법이 있는 이에게 나머지 법들도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 법을 다른 곳에 가서 찾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곁에 부처님께서 계셨다. 부처님보다 더 좋은 같이 지낼 분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비교할 이 없는 좋은 도반과 저절로 만나서 함께 지내면서도 매기야는 그 중요한 기회를 스스로 놓쳐 보낸 것이다.
가까이 곁에 계시는 좋은 도반에게는 얼굴을 돌리고 엉뚱한 곳으로 가서 억지로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찾던 법은 만나지 못하고 마음속의 괴로움만 받고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매기 야의 허물이다. 이미 만나게 된 것을 지나치고 찾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찾아다닌 것이다.
법을 보여 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좋은 도반을 만나지 못한 이는 뽁구사띠 테라처럼 자세히 찾아야 한다.
지금의 매기 야은 찾지 않아도 만나게 된 것인 줄도 모르고, 자기에게 당도한 행운을 귀히 여길 줄 모르고 팽개치고 나서 허망한 곳에 가서 금을 캐려고 설쳤던 것이다.
지혜 없는 이는 석탄 캐는 곳에 가서 금이 나오지 않는가 하고 바란다. 좋은 도반과 함께한다면 법을 다른 곳에 가서 찾을 필요가 없다.
좋은 도반에게 여쭈면 닙바나에 이르는 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매기야는 좋은 도반을 버리고 떠나갔던 것이다. 길을 가르쳐 주는 이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닥치는 대로 부딪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고 나서야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돌아온 어리석은 제자를 좋은 도반께서는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크나큰 연민심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이어서 설해 주셨다.
매기야!
닙바나를 체험하려는 비구는 도와 과를 성숙하게 하는 법 5가지에 머물러서 계속하여 4가지 법을 키워야 한다.
탐심을 빼어버리려고 부정관을 닦아야 한다.
화냄을 빼어버리려고 자비를 키워야 한다.
생각이나 망상을 끊으려고 수식관을 닦아야 한다.
‘나’라는 교만님을 갈라내려고 무상의 생각을 키워야 한다.
매기야!
무상의 생각이 드러난 이에게
무아의 생각이 머물게 된다.
무아의 생각이 머물 때
‘나’라는 교만심을 갈라내어서 던져버릴 수 있다.
‘나’라는 교만심을 빼어버리면
현재에 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부처님에게서 떠나갔었지만 수행을 하기 위해서라는 일면 번듯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매기야는 이 정도의 법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 가사 말라 테라는 어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떠나갔었기 때문에 강도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코살라국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닐 때 부처님의 뒤를 나 가사 말라 테라가 따라갔었다.
부처님의 발우와 두 겹 대 가사를 가지고 오던 그가 한 곳에서 두 갈래길이 나타나자 “부처님, 왼쪽 길로 가시지요.”
이렇게 여쭈었지만 부처님께서 그가 여쭌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나 가사 말라요! 오른쪽 길로 갈 것이다.”
닥쳐올 위험을 저절로 아시고 하는 말씀을 나 가사 말라가 반대하였다.
왼쪽 길을 가려는 소원이 지나쳐서 세 번이나 거듭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도 세 번을 거듭해서 거절하셨다.
그러자 그는 부처님의 발우와 대 가사를 땅에 내려놓고 그대로 떠나갔다. 부처님만을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나갔던 나가사말라 테라는 그가 그리도
가고 싶어 안달하던 왼쪽 길을 따라갔다. 부처님의 발우와 대가사를 가져가지 않은 그의 걸음은 가뿐가뿐했다.
그러나 그의 나쁜 업이 매우 고약했다. 한 숲 속으로 들어가자 강도의 무리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부처님 앞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전신은 온통 흙투성이에다가 발우는 깨어지고 그의 가사는 조각조각 찢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스승의 말을 거역한 형벌이었는가 모르겠다.
이러한 사건들을 나의 담마의 은행에 차곡차곡 잘 쌓아서 간직하고 있다.
담마의 은행 창고를 지키는 나는 일생동안 사라지지 않도록 거듭 잘 간수하여야 했다.
다음에 오는 후래인들을 위해서 완벽하도록 대대손손 이어서 잘 전해지는 유산이 되게 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연들을 부처님의 금구로 직접 들을 때 그 자리에서 소름이 돋았다.
“부처님이시여! 이토록이나 부처님께 친근한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까?”라고 놀랄 뿐이었다.
오! 일생의 긴 여정의 절반을 이토록 슬픈 마음으로 장식해야 하는가?
아난존자의 일기
93. 나의 가장 높은 상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오! 선한 이들이여, 잘 오신 거룩하신 부처님과 함께 모든 제자분들의 잘 오심, 좋은 소문 가지가지를 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금의 이 나쁜 소식 역시 피할 수 없이 들어 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이 세상은 좋은 것만 있을 수 없다. 또한 나쁜 쪽으로만 볼 수도 없다.
이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는 좋고 나쁜 두 가지 세상 법칙을 만나야 한다.
높으신 부처님께서 세상을 벗어나는 가장 높은 수행의 힘으로 닦아 놓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은 좋고 나쁜 두 가지 세상 법칙으로 인해 조금도
동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결과 업으로 받은 몸은 이 세상 안에 속했기 때문에 몸에 관계된 세상 법칙을 받아야 하셨다.
나쁜 쪽의 세상 법칙을 받아야 하는 것이 연세와 법랍이 적을 때만의 일은 아니다. 이 이야기들을 지금 금구로 드러내셨다.
다스릴 수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몸이, 드러내지 않고 지낼 수 없을 만큼 나빠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지금 나 여래는 나이가 많아서 늙었구나. 어떤 비구들은 길에서 나를 두고 갈라져 가기도 하고, 어떤 비구들은 나의 발우와 가사를 맨땅 위에 그대로 내려놓고 가기도 한다. 나에게 항상 따라다니면서 시중 들어줄 비구 한 사람을 선출하라.”
모든 비구들이 고개를 들지 못할 말씀이었다. 장소는 제따와나 정사의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응향각 근처, 때는 낮이 지나가고 저녁 그늘이 내려오기 전, 남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우기의 어느 날이었다.
이 자리에는 풀 하나, 쓰레기 하나 없었다. 하얀 모래를 펴놓은 편편한 마당에 비구 스님들은 각자 가져온 작은 자리를 하나씩 깔고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햇볕에 달구어졌던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던 말씀을 듣자마자 그 뒤를 따라올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게 되었다.
의지할 수 있는 법을 단단하게 손에 잡은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차이이리라. 적당하게 생각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차이일 것이다.
듣지 않을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그 소식에 기쁨이 생기지 않는 것은 모두가 같을 것이다.
비구 스님들의 얼굴들이 그것을 증명이나 해주듯이 한결같이 당연한 사실이지만 반길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높으신 부처님!
오늘부터 시작하여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시겠습니다.”
조용한 대중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일어나서 여쭌 이는 마하 사리불 테라였다.
모든 제자 가운데서 가장 높은 제자의 청을 부처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사리불이여, 시중들지 말라. 하지 말라.
네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법문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너의 가르침은 나 여래의 가르침과 같다. 그래서 나 여래에게 시중드는 일은 너에게 책임이 없다.”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여서 거절하셨다. 마하 목 갈라나, 마하 까싸 빠 등의 큰 제자분들께서도 차례대로 모두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모든 비구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모두 나에게로 향해졌다.
마하테라들께서 한 분 한 분 일어나셔서 여쭌 다음 아직 여쭙지 않은 이는 나 혼자 남았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보다 안거가 많은 마하테라들께서 여쭙는 동안 나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습니다. 안거가 많은 그분들이 여쭈어서 다
끝났어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태도를 지켜보던 나이 어린 테라들도 각각 일어나서 여쭈었습니다.
모두 여쭈고 모두 거절당할 때까지 나는 그대로 앉아만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생각 속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라지 않던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되자 그 충격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떨었다.
‘나의 형님께 이리도 불친절하단 말인가?’라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며, 참을 수 없는 슬프고 아픈 마음이 되었다.
이러한 심정으로 바라보자 죽을 때까지 나의 책임임을 분명하게 절감했다.
나이로서는 별반 차이가 나지 않지만 형님과 나의 마음의 성품은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성숙한 마음가짐과 고요한 태도 때문에 나는 형님을 존경심과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언제나 조심스럽고 지극한 마음으로 대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과 아우처럼 내 마음에 느껴졌다.
세상의 생애를 아낌없이 훌훌 던져 버리고 떠나 왔던 것도 형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그 기초가 되었다.
사랑을 기초로 하여 그분 앞에 왔지만 나는 형님과 언제나 함께 지내지는 못했다.
다른 비구들에게도 기회를 주려는 마음으로,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교제하던 나의 습성으로, 가끔씩은 형님과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지도 않던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사실이다.
삼마 삼 붓다라는 이름으로 법의 북소리를 울리시지만 뒤따라 시중드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처지가 된 것이 정말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이 슬픈 소식, 가슴을 훑어 내리는 소식조차 한편으로 보면 기뻐해야 할 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서 앞의 여행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난다 테라! 모든 비구들이 시중들기를 청하였다. 아난다 혼자만 남았다. 다른 이들처럼 시중들기를 청하여 보라.”
한참 동안 내 생각 속에만 헤매고 있는데 같이 지내는 대중 한 사람의 소리가 그 생각을 끊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와서 생각을 끊었던 그런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따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큰스님들이시여!
청해서 얻은 부처님의 시자가 무슨 값이 있겠습니까? 제자가 어찌 부처님을 뵙지 않고서 살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부처님께서 좋아하신다면 ‘아난다여, 나를 시중들어라.’라고 금구로써 표현하실 것입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한 다음 이렇게 여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내 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고, 이 책임은 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상(賞)이었다.
이 행운과 관계된 것에 이렇게 순간적으로 바른 판단을 내린 나 자신에게 만족했다.
“비구들이여!
아난다에게 다른 이가 권할 필요는 없다. 그의 책임을 그 스스로가 알아서 나 여래를 시중해 줄 것이다.”
나의 바른 결정을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셨다.
“아난다! 일어나요! 아난다 테라, 일어나십시오! 부처님을 시봉 하겠다는 책임을 주시라고 여쭈세요.”
부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같이 지내는 대중스님들이 기쁨에 넘치는 소리로 권유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부처님의 시자가 되겠다는 청을 드리지 않았다. 이 책임은 형님의 말씀대로 내가 이미 얻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청하려는 소원의 가장 높고 귀한 상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이 몸의 일평생 가운데 가장 기쁜 마음, 가장 밝은 얼굴로 나는 상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났다.
파두마 연꽃 같은 그분의 두 발 곁으로 조심스럽게 가까이 가서 비구들이 올릴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공양인 두 손을 모아서 부처님의 두 발에 예배 올렸다. 그다음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①“부처님! 만약에 부처님께서 얻으신 값이 높은 가사를 주시지 않고 지내신다면
②부처님! 부처님께서 얻으신 좋은 음식을 주시지 않고 지내신다면
③부처님! 부처님께서 거처하시는 간 다꾸 띠(응향각)에 함께 지내는 기회를 주시지 않고 지내신다면
④부처님! 부처님을 초청하여서 좋은 공양을 올리는 곳에 저를 부르지 않고 가신다면, 부처님을 제자가 모시고 시중들겠습니다.”
빼어버려야 할 상 네 가지를 먼저 청하였다.
아난다여! 이 네 군데에서 어떠한 허물을 보았느냐?”
부처님, 만약에 이 네 가지의 기회를 제가 얻는다면 말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받은 값이 비싼 가사를 두르고, 언제나 좋은 공양을 먹고 마실 수도 있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좋은 건물에서 잘 수 있으며, 부처님을 초청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따라간다.
그러한 특별한 기회를 얻으려고 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한 시자가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질투하는 이들이 말들을 할 것입니다. 부처님.”
“아난다여, 좋구나! 그 상 네 가지를 완전하게 모두 가져라.”
“부처님께서 주신 네 가지 상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쭙겠습니다.
⑤부처님께서 제자가 초대하여 모시는 곳으로 와 주신다면
⑥만약 멀리서 온 대중들이 도착한 시간에 부처님께 데리고 가는 기회를 얻는다면
⑦만약 제자에게 담마에 관해서 어느 한 가지 의심이 생기면 생기는 그 순간에 부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⑧만약 제자가 없는 곳에서 설하셨던 법을 정사에 다시 돌아오셨을 때 다시 설해 주시면, 제자가 부처님을 모시는 시중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빼어버려야 할 상 네 가지처럼 청하는 상 역시 네 가지가 되었다.
아난다여, 이 네 가지에 어떠한 이익이 있는 것을 보았느냐?”
거룩하신 부처님, 신심이 높은 선한 남자들이 부처님을 뵙는 기회가 없어서 다음날에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초청할 수 있습니다.
그 초청에 만약 부처님께서 참석하시지 않으시면, 또 필요한 순간에 대중들이 부처님을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면, 의심을 풀기 위해서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면, 여러 가지로 말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아난다는 부처님을 어떻게 모시는가? 부처님께서 이 정도로도 그를 생각에 두시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많은 이들이 허물을 말할 것입니다.
부처님.”
“다음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설하셨던 가르침의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물어 오기라도 한다면, 그때 만약 제가 대답하지
못한다면 저를 탓할 것입니다.
‘너는 부처님 뒤를 오랜 세월 동안 마치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시중 했다. 그러면서도 너는 이 정도도 모르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허물을 없애고 기꺼운 마음으로 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이익을 제자가 보았습니다.”
아난다여, 참으로 좋구나! 이 상 네 가지도 완전하게 모두 가져라.”
슬프게 들리던 소식으로 시작했던 그 모임은 모두 같이 싸도를 부르는 소리로 그 막을 장식했다.
아난존자의 일기
94. 키와 그림자
빼어버리는 것 네 가지, 원하는 것 네 가지, 모두 여덟 가지 상을 받아서 나의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
그전처럼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따르면서 모셔야 하는 책임이며 또한 행운이었다.
부처님과 나는 몸은 둘이라고 해야 하지만 마음만은 한 사람처럼 같다고 해야 하리라. 나의 몸과 입은 나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함이 없다.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한다.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기 때문에 나도 매우 만족스럽다.
이러한 것을 일부러 드러내는 것은 내 자신을 칭찬하려고 가 아니다.
모든 제자들 가운데 나만큼 부처님과 가깝게 친밀한 이가 없다고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말을 듣는 이들과 다음에 다시 전해 듣는 미래 후세 사람들의 가슴에 유산을 주는 것이 된다.
가장 편안한 행복, 닙바나의 축복을 주신 크나큰 은혜의 주인께 우리들이 은혜를 갚는 모습을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베풀어준 은혜를 잘 알아서 그 아는 만큼 은혜를 갚는 행복을 키울 수 있는 것이 된다.
언제나 받들어 모시고 시중들 수 있는 책임을 받고부터 시작하여 나는 부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었다.
차고 더운물을 필요하신 때에 따라서 적당하게 준비해 드렸고, 좋아하여서 사용하시는 세 가지 종류의 치목도 내가 직접 만들어서 모두 갖추어
드렸다.
피곤하실 때는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등이 아픈 증세가 자주자주 일어날 때마다 내가 눌러 드렸다.
이 병은 그전 6년 동안 고행을 하고 얻은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간 다꾸 띠(응향각)가 지저분하지 않도록 쓸고 닦는 일도 하고 주변에 풀이 우거지지 않도록 사미들을 시켜서 뽑아내도록 했다. 비구계에 비구가 직접 자기 손으로 풀이나 나뭇잎을 자르는 것을 금한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일을 하면서 마시는 물과 씻는 물도 항아리가 비지 않도록 항상 챙겨서 가득 채워 놓았다.
공양 시간이 되면 좋은 음식, 영양이 많은 것으로 준비해 올리고 공양이 끝나면 부드러운 후식으로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가 올렸다.
저녁 무렵이면 위니에 허락한 여덟 가지 가운데 그 계절에 적당한 과일로 건더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즙을 짜서 올렸다.
허기를 없애는 작용을 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낮에 가지가지해야 할 일을 빈틈없이 했더라도 나의 책임은 그것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낮의 책임이 끝나면 밤에 해야 할 책임도 계속해야 하는데, 매일 저녁마다 횃불을 들고 부처님께서 계시는 응향각을 9차례 돌아보았다.
이렇게 돌아보는 것은 부처님께 무슨 위험이 있나를 걱정해서 살피는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찾으시면 금방 대답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침상에 들기 전에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내가 은혜를 아는 공덕이다. 가장 수승한 행복을 얻게 해 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으로 얼마만큼 은혜를 갚고 다했다고 만족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할 수 없는 무량한 은혜를 나의 힘이 있는 한은, 지혜가 미치는 한은 갚아야 한다.
이렇게 갚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만도 행운이요 고마울 뿐이다.
은혜를 주신 분께 은혜를 갚으려고 정성껏 시중을 드는 것에는 보호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태어났던 곳, 까삘라 성안의 니조다란마나 정사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의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에 적당한 약을 모자람 없이 간병할 수 있어서 오래지 않아 차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몸의 힘이 많이 줄어들게 되어서 한동안 편안히 쉬시고 나서야 다시 전처럼 좋아지게 되었다.
법을 설하시는 일을 한동안 멈추신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그러할 때 나의 형님 마하나마 대왕이 매우 심오한 문제 한 가지를 가지고 와서 여쭈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 이전에 법을 설하여 주시기를 ‘사 미디가 있는 이에게 지혜가 생긴다.
사마디가 없는 이에게 지혜가 생길 수 없다.’라는 가르침을 지금 다시 생각할 때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사마디와 지혜, 이 두 가지 법이 어느 것이 앞이고 어느 것이 뒤에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제자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으니 부처님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여쭈는 쪽이야 쉽지마는 대답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렇게 어렵고도 심오한 문제들을 구분해서 말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짤막하게 한 마디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다.
힘차게 솟구치는 물줄기를 잡아오는 것처럼 위력이 넘치는 가르침 가운데에서도 이 두 가지 법과 관계되는 법, 차례로 거꾸로 생각할 증거를 삼을
본보기들도 있는 대로 따라올 것이다.
몸의 힘이 줄어들었다고 부처님 가르침의 힘이 줄어드는 적은 없었다.
제도할 모든 중생들에게 대 연민심을 함께해서 알게 하려는 바람 역시 어느 한순간에도 물러남이 없다.
그렇다. 매우 강한 의지, 높은 바람으로 한 구절의 가르침을 내리치면 형님 마하나마의 견해가 깨끗하게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쪽만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금 듣지 않더라도 다음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듣지 않는다고 그에게 어떤 손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를 연민이 여겨서 한참 동안이나 법을 설하시고 나면 부처님께서는 힘이 들어서 다시 피곤하시게 될 것이다.
마하나마 왕이 여쭈는 동안 나에게 불쑥 떠오르는 생각으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을 내린 순간에 마하나마 왕을 부처님 앞에서 바깥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나의 거처로 돌아와서 실라(계), 사마디(정), 빤냐(혜) 세 가지 법을 닦고 있는 사람과 이미 닦아 마친 이들을 나누어서 자세히 설해 주었다.
이러한 것은 나의 의지, 나의 자비심을 실행하는 일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도 이러한 나의 의지와 나의 자비를 틀림없이 생각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와 나의 자비를 행하는 것마다 모두 허락하시지는 않으셨다.
계(위나야)와 담마, 이 두 가지로 적당한 일만 허락하시고 적당하지 못한 일은 그 자리에서 곧장 거절하셨다.
그러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라자가 하 수도에서의 일을 먼저 말해야 하리라.
마가다국을 이곳저곳 다니다가 라자가 하에 이르자 부처님께 배가 불편한 병이 생겼다.
이 병은 부처님께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 아니어서 내가 가끔씩 병구완을 해본 적이 있었다.
부처님의 그 병을 일순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그 죽을 오래 보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죽을 보시한 이에게서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자세하게 배워 놓았다. 죽을 끓이는 데 필요한 세 가지 물건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깨와 쌀, 콩들은 부엌마다 있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내가 친밀하게 지내던 어느 집에 들어가서 그 세 가지를 모두 구해왔다.
얻은 것을 부엌에 잠깐 보관해 두었다가 절 안에서 죽을 끓였다. 오로지 부처님의 병을 빨리 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계율에 적당한지 아닌지에
주의를 두지 않았다. 나 스스로가 미처 주의하지 못한 것을 부처님께서 지나쳐 보시지 않으셨다.
“부처님, 세 가지를 넣어서 만든 죽입니다. 드십시오.”
이렇게 하여 올리자 그 죽이 생긴 사연을 물으셨다. 나에게는 사실대로 바르게 말씀드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내가 한 일을 심하게 나무라셨다.
“아난다여, 사용하지 않는 집에 먹을 것을 쌓아 놓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시자가 사용하는 방에서 요리한 음식은 적당하지 않다. 비구가 직접 만든 것은 적당하지 않다.”
이렇게 계율에 적당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신 다음 비구들이여!
이 세 가지에 해당되는 음식은 적당하지 않다. 이러한 것을 사용한 비구에게 작은 허물을 지운다.”
비구 대중 모두를 위해서 금계 한 가지를 정하신 것이다.
사용 하비 않는 집이란 음식 만들 물건들을 쌓아 놓은 것이고, 요리할 때 위니에 맞도록 짓지 아니한 곳이다.
스스로의 병을 낫게 하는 것보다는 계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평생을 기억해야 할 좋은 본보기가 된다.
계율과 관계되어서 이쪽, 저쪽 다른 이들이 허물을 말하는 것을 받지 않도록 하셨다.
한쪽 끝으로 가까워지려는 말이 터져 나오면 조금도 기다릴 것 없이 막으셨다.
그때 우리들은 꾸루라는 나라에 있는 깜마사담마(부처님께서 싸띠빠타나 경전을 설하신 곳) 마을 근처의 숲에 이르렀다.
그곳은 절은 없었지만 나무 그늘, 대나무 그늘이 두텁고 마실 물이나 씻을 물도 충분했다. 숲이나 산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부처님과 우리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걸식하면서 그 숲 속을 정사로 생각하고 지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드시고
나서 혼자서 잠깐 누워 계셨다. 그때 나는 나의 거처로 돌아와서 모인 대중 제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그렇게 경전을 가르치고 난 다음의 짧은 순간은 나 혼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그나마 그 짧은 시간마저 내가 거처하는 곳을 비질하고 깨끗해진 땅 위에 작은 자리 하나를 깔아 놓고, 물 항아리에 서 물을 조금 퍼서 시원해지도록 팔다리에 끼얹고 나서는 자리에 앉아서 과의 선정에 들어서 지낸다.
그분께서 주신 수행자의 호사를 맛있게 즐긴 다음 나는 원인 결과 법을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어렵고 깊다고 말들 하지만 나는 이 법이 쉽고도 쉽다. 너무나 쉬운 것이다.
나는 자기가 만났던 것을 숨겨 놓고는 지낼 수 없는 부류에 속한다. 그밖에 부처님, 그분께서 직접 여쭙고 질문할 것이 있을 때마다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해 놓으셨다. 이제쯤은 부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을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을 그만 생각하고 그분 앞으로 곧장 가서
“부처님, 놀라운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원인 결과 법이 그 규모가 깊고 깊습니다. 깊은 그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이 제자에게는 매우 매우 쉽고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님.”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내가 여쭌 말씀을 부처님께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빼어버리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에게 기쁨이 솟아올랐다.
기쁜 마음을 이어서 다시 놀라움이 생겼다.
나는 만나기도 어려운 이 가르침을 만난 것뿐만 아니라 이 교단 전체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자리의 책임을 짊어지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렵고 심원하다고 하는 원인 결과 법을 쉽게 알았다. 이것은 원인 없이 그저 생긴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보다 매우 특별한 이익을 얻은 것은 크나큰 선업 공덕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현생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선업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선업은 이러한 선업들을 배워서 취한 것이다.
마하 사리불 등 스승님 가운데 스승님이신 분들에게 교학을 듣고 배웠으며, 여러모로 넓게 의논하고 토론했고 입으로 외웠다.
두 번째 선업은 소 따빠 띠 팔라, 첫 번째 과(果)에 올라서 성인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우리들처럼 성스러운 지혜가 깨끗한 이들에게 원인 결과 법은 분명하고 선명해서 어렵지 않다.
세 번째 선업은 가지가지 견문 지식을 익힌 것이다.
이러한 선업을 골고루 갖춘 제자에게 빠때이싸 사목 버터(원인 결과 법)가 어려울 리가 있겠는가?
부처님의 말씀에 이러한 소리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소리는 포함되지 않았다지만 뜻으로는 칭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칭찬으로 인해서 기쁨이 솟는 것은 담마를 설하는 법사들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성품은 오래 머물게 하지 못한다.
내용으로 칭찬하는 소리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야단치고 나무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어떠한 뜨거움도 받지 않고 그저 시원하고 고요한 행복만이 있는 닙바나의 높은 법을 오직 나의 능력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뽕나 마하테라 게 자세히 새겨듣고 소 따빠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소 따빠나 에 올라섰기 때문에 빠때이싸 사목 버터 법(인연 결과 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큰 은혜를 주신 그분의 앞에 가서 자랑을 한 것이다.
이러한 이를 야단치지 않고 어떤 이를 야단치시겠는가?
야단맞을 일이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른 여러 가지 일에는 주변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이 일만은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6개월 동안 좋은 음식을 잘 먹고 마신 유명한 격투선수들은 큰 바위를 들어서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힘이 충분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 큰 바위는 놀이는커녕 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지혜의 힘이 좋은 나 같은 이에게는 빠때이싸 사목 버터(인연 결과 법) 같은 깊은 법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법의
성품을 확실하게 알도록, 뒤바뀌어지지 않도록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내가 그런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지 않고 나 혼자만이 기쁨에 들떠서 여쭈었던 것이다.
“아난다여, 빠때이싸 사목빠다 법(인연 결과 법)이 깊고도 깊은 그늘이 있다. 이 법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이 베 짜는 이들의 뒤엉킨 실타래처럼, 새집처럼, 푸석대기 풀 무더기처럼 복잡하게 얽혀서 4 악처의 윤회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돌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계속하여서 말씀해 주셨다.
이미 알아버린 이에게는 쉬운 법이지만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 크나큰 윤회의 울타리만큼이나 어렵고 힘들 것이다.
아난존자의 일기
95. 청원했던 상 한 가지
날마다 한결같이 고마움을 느끼는 그분에게 나 역시 은혜를 갚고 있다.
빼어버리는 상 네 가지, 청하는 상 네 가지, 여덟 가지 모두를 완전하게 허락해 주셨다.
빼어버리는 상 네 가지로 인해서 간혹 어떤 이들의 허물을 말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청하는 상 네 가지를 얻었기 때문에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시간에 관계없이 여쭐 수 있도록 말씀드린 대로 그 기회를 얻었다.
설하셨던 담마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욱 좋은 것은 존경과 신심으로 가까이 오는 수행자들과 일반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이익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적당한 기회가 되면 내가 이익을 주었던 일 한 가지를 보여 드릴 것이다.
어느 날 오전에 사왓띠 성안으로 걸식을 하러 갔을 때 나는 부처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공양 제자가 알고 싶은 것을 여쭈었기 때문에 내가 제법 멀리 처지게 되었다. 그때 걸식을 나왔던 많은 비구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아난다 마하테라 님! 저희들이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하고 지낸 지가 한참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청하옵니다.
아난다 테라님, 부처님 앞에서 법을 들을 수 있는 이익을 주십시오.”
이렇게 의지하여 오면서 부탁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기회를 얻으려고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먼 곳에서부터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지치고 힘들게 걸어왔던 것이다. 어제저녁 늦게서야 제따와나 정사에 도착해서 부처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이다.
“비구들이여! 건강은 괜찮으냐? 공양하는 일은 고르며, 앉고 서는 일은 적당한가?”
이러한 안부 염려의 말씀도 들을 수 있었다. 먼 곳으로부터 부처님을 친견하려고 오는 이들이 들을 수 있는 인사의 말씀이었다.
대 연민심으로 내려주시는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먼 곳에서 왔던 피곤함을 모두 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껏 만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게 뵙고 싶었던 그분 앞에 이르기는 했지만 아직도 듣고 싶은 법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들 마을, 자기들 절에서 떠나올 때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는 것이 목적이었다.
부처님 앞에 가면 한바탕의 법을 들려주십사고 여쭈어야겠다고 의논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부처님 앞에 와서는 그들이 준비했던 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골에서 온 스님들의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내 일처럼 생각되고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은 고사하고 부처님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내는 나조차도, 이유 없이 그냥 아무 때나 그분 앞에 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어느 한 가지 할 일이 있어 여쭐 때에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좋습니다. 스님들, 람마까라는 브라만의 작은 암자에 가서 계십시오.
그곳에서 부처님의 금구로써 설하여져 나오는 담마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의지해서 부탁해 오는 비구 스님들에게 법을 들을 수 있는 장소를 정해 주었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소리까지도 확실하게 장담하는 것처럼 시골 스님들은 만족해하였다.
그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말은 쉽게 하지만 마음속에 정확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람마까 브라만의 작은 암자는 제따와나 정사보다 뽁빠란마나 정사가 더 가깝다. 오늘 아침 부처님께서는 제따와나 정사에서 걸식을 나가셨다.
뽁빠란마나 정사에 아직 도착하기 전, 그러나 나는 뽁빠란마나에 틀림없이 도착하실 것을 미리 알았기때문에 그 장소에 약속을 해 놓았던 것이다.
미리 알았던 것은 마음속의 어떤 신통이 아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지혜를 나는 아직도 얻지 못했다.
신통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부처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주의 깊게 익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아침 걸식하러 나가시기 전에 부처님께서 자리를 걷으시려는 몸짓을 보이셨다. 이렇게 보여 주시는 것은 뽁빠란마나 정사로 옮겨가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탁발을 나가기 전에 빗자루로 깨끗이 쓸고 쓰레기를 치우고 그 밖의 것들을 모두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다른 것들도 이런 식으로 짐작하여서 부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 모두 미리미리 준비를 마쳐 놓는 것이 나의 습성이 되었다.
가끔은 부처님께서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시어서 몸을 깨끗이 하시고 나서 간 다꾸 띠(응향각)의 문을 닫아거시고 팔라 사마 빠띠(과의 선정)에 들어가 계신다.
그러할 때 부처님께서는 제도할 만한 이를 살펴보시고 나서 걸식하러 나가셨다. 그러할 때 나는 “비구 스님들! 오늘은 부처님 한 분이서만 걸식하러 나가실 터이니 여러분들은 각자 걸식할 준비를 하십시오.”
부처님과 함께 탁발을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스님들께 알려드린다. 가끔은 부처님께서 간 다꾸 띠의 문을 반쯤 열어놓고 선정에 들어가 계신다.
그날은 비구들을 모두 거느리고 걸식을 나가시는 날이다.
그러면 나는 비구 스님들에게 발우와 가사를 미리 잘 준비하라고 말씀드린다.
가끔은 부처님께서 평소에 드시는 것보다 한 주걱이나 두 주걱쯤 더 드신다. 그것뿐만 아니라 경행대 위에서 왔다 갔다.
거니 시기도 한다. 그날은 여행을 떠나실 것이라고 대중 스님들께 미리 알려드린다.
그분 곁에서 지낸 날이 오래되자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 나름대로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여서 시골에서 올라온 비구들에게 미리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약속한 것처럼 제대로 되어갔다. 공양하는 일이 끝나자 부처님과 우리들은 제따와나 정사에서 뽁빠란마나 정사로 갔다.
그곳에 도착해서 각자 자기의 방에 들어가서 쉬게 되었다.
해가 설핏해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내가 기다리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아난다여, 나 여래가 물을 사용하고 싶다. 뽁바꼬타까 목욕터로 가자.”
이러한 말씀을 듣기 전에 미리 목욕의를 준비해 놓았다. ‘아시라와디’ 강의 이 목욕터는 강의 경사가 아주 완만하다.
어른들의 말로는 까싸 빠 부처님 당시에 아주 넓고 큰 정사의 동쪽 문이었다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아들 손자 대대로 이어서 말할 만큼 이곳은 아름답고 편안한 곳이었다. 강바닥의 모래는 고운 진주알을 펴놓은 것처럼 희고 부드러웠다.
강물은 빠르게 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곳에서는 느린 속도로 조금씩만 움직인다.
강둑에서부터 부드러운 경사는 어떠한 위험도 주지 않는다. 이 목욕터를 부처님께서 사용하시는 줄 아는 성안의 사람들이 여기에는 오지 않는다.
강바닥의 은빛 모래 위에 이르자 나는 가져왔던 목욕의를 부처님께 올렸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가사를 건네받았다. 그다음은 나에게 크나큰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님은 서쪽 하늘 전체를 붉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붉은빛은 하늘을 물들이고도 남은 여력으로 은빛 모래를 지나 속으로 들어가서 강물마저 물들이고는 살랑살랑 물결을 만들어서 다시 하늘로 반사해서 쏘아 보내고는 했다.
하늘과 땅, 강물마저 온통 황금으로 빛나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 황금빛은 해님이 없으면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햇빛 자체는 아니다.
모래밭에서 퍼져 나오는 황금빛만으로 이처럼 반짝거릴 수는 없다.
그래서 살랑살랑 금빛으로 일렁이며 살금살금 내려가는 것같이 되었다. 무슨 이유인가?
물과 해가 아름답게 조화를 맞추어서 표현할 길 없는 아름다운 황금색으로 환한 빛깔의 살색을 지니신 그분을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더욱 존경과 함께 마음 편안함을 가질 수 있는 행운을 나는 얼마나 많이 가졌던가?
나의 일생 동안 수도 없이 여러 번을 뵙고 또 뵈었지만 언제나 아쉬움을 가지는 ‘눈의 대상’인 것이다.
보고 또다시 보아도 다함이 없는 그 모습이 강물에서 모래밭으로 올라오셨다. 나는 안고 있던 아랫 가사를 그분께 올리고 욕의(목욕 옷)를 받아서 물에다가 깨끗이 헹구어 짜서, 짠 그대로 어깨에 걸치고 다시 허리띠를 올렸다.
번갯불처럼 반짝이는 허리띠를 단정하게 매시고 금방 윗 가사를 입지 않으시고 몸의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때 뵐 수 있는 모습은 물에서처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는 모자라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나는 낮에 약속했던 일을 진행하여야 한다.
“높으신 부처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건너다 보이는 저 절은 람마까 브라만의 초암입니다.
그의 초암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편안한 곳입니다.
그곳에 모여 있는 비구들을 연민이 여기시어 부처님께서 그곳으로 가시면 모두들에게 큰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내가 여쭌 것을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은 금구를 여시오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허락하시는 일은 이처럼 그저 묵묵히 계셨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 암자의 문은 닫혀 있었고 절 안에서는 법을 토론하는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비구들의 소리가 멈추어지도록 기다려서 부처님께서 기침소리를 내어서 문을 두드리자 비구들이 황급히 문을 열고 부처님을 안으로 모셨다.
기다리기는 했지만 앞에 닥친 행운으로 기쁨에 넘쳐서 예배를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펴놓은 자리에 앉으셔서 인사 말씀을 주고 받으셨다.
“비구들이여! 높고 높은 것을 찾음, 낮고 저속한 것을 찾음, 이러한 두 가지가 있다.
비구들이여, 저속한 것을 찾음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식으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을 질문하는 방법으로 시작하셔서 법을 여셨다.
“비구들이여!
이 세상의 어떤 이들은 자기 스스로 태어남의 성품이 있어서, 자기 스스로 늙고 병들고 죽는 성품, 자기 스스로 뜨거운 걱정, 통곡하는 성품이 있어서 그것을 찾고 있다.”
“비구들이여! 태어나는 성품이 있는 것, 늙고 병들고 죽는 성품이 있는 것, 뜨거운 걱정, 통곡하는 성품이 있는 벗이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아내와 자식들, 생명이 있는 재산과 생명이 없는 재산들이 생기는 성품, 늙고 병들고 죽는 성품이 있으며, 뜨거운 걱정, 통곡하는 성품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법들에 탐닉하고 빠져서 어리석게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으로 담마, 법을 찾는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바라고 바라던 비구들이 그 보람이 있는 법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법의 성품으로 우리들이 얻은 이 몸과 마음과 우리들이 날마다 찾아서 모아 놓는 것들이 모두 우리를 생로병사에 빠지게 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러한 법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저속한 찾음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한 법들에 기꺼이 탐닉하고 탐착 하는 것, 정신없이 취하여서 집착하는 것만을 저속한 찾음이라고 하셨다.
달리 말하면 찾아서 얻은 물건들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낮은 부류에 들지 않는다.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집착하는 것이 바로 낮은 부류에 속한다. 이러한 저속한 찾음을 보여주신 다음 계속하여 설해 주셨다.
“비구들이여! 높고 높은 찾음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어떤 이들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서 죽는 성품, 뜨거운 걱정, 통곡하는 성품이 있는 몸과 마음의 허물을 순간순간 자세하게 알아서 그
성품에서 벗어나는 고요한 닙바나의 법을 찾는다.
닙바나를 체험할 수 있는 바른 길을 수행한다. 이러한 찾음을 ‘높고 높은 찾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찾음 두 가지 종류를 더욱 분명하게 보이시려고 부처님께서 당신의 생애가 생기는 차례에 관해서 설하셨다.
까삘라왓따의 궁전에서 깜마의 대상 락을 즐긴 것과 아노마 강 언덕으로 떠나갔었던 것의 찾음 두 가지가 산 본보기가 된다.
그다음 깜마 오욕락을 따르지 않도록 법을 설하셨다.
가지가 무성한 가르침을 듣고서 시골에서 온 비구들이 만족하여서 싸~두라는 소리를 합창하였다.
그와 동시에 나의 법의 은행에 다시 새로운 재산 한 가지가 늘어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거두어서 저장하였다.
아난존자의 일기
96. 형님의 높은 본보기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오! 선한 이들이여!
내가 일생 동안 기록한 긴 이야기들을 지루해하지 않고 여기까지 이어 오는 중에 이제 그 중간 부분에 이르렀다.
부처님의 뒤를 마치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시중드는 모습을 들어왔다.
이렇게 아주 가까이 머물면서 시중을 드는 가운데 가장 높고 높은 형님 부처님의 가장 귀중한 본보기를 하나씩 하나씩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 모두를 또한 여러분들에게 지금 전해 드리려 한다.
이 산 본보기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흐뭇해지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높고 높은 본보기 가운데 먼저 드러내려는 것은 담마를 지극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그날 저녁, 대중 스님들이 모여서 공양을 하는 큰방에서 난다가 테라의 법문이 있었다.
사까와 꼴리야 두 군데서 왔던 비구니 5백 명에게 법을 얻도록 설하여 주었던 난다까 테라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 오늘 저녁의 법회 역시 그 유명하신 난다까 테라께서 법문을 설하는 차례였다.
싸늘한 겨울철이라서 공양방은 문들을 모두 꼭꼭 닫아 놓았다. 벽과 문들은 겨울철의 한기를 막아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난다까 테라가 법을 설하는 목소리조차 막을 수는 없었다.
문은 닫았지만 난다까 테라의 청아한 목소리는 부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 간다꾸띠까지 들려왔다. 멀리까지 퍼져 오는
소리지만 희미하게 대강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맑고 분명하며 정확하였다.
“아난다여! 법을 설하는 소리가 매우 아름답고 청아하구나. 우리들도 가서 법을 들어보자.”
법회가 시작되고 오래지 않아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회가 진행되는 공양방에 가까이 갈수록 목소리는 더욱 분명해지고 깨끗하게 들렸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한참 진행되는 법회가 중단이 될까 저어하시는 눈치였다.
문을 두들겨서 열게 하시지 않고 문 밖에 서 계셨다. 아무래도 법회가 끝나면 들어가실 기미였다.
겨울철이었으므로 북쪽에서 찬바람이 씽씽 불어왔다. 추녀 끝에서는 이슬방울이 뚝뚝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추위의 형벌을 크게 받지는 않았다. 때로는 천둥이 치듯이, 때로는 소나기가 내려 퍼붓듯이, 때로는 산들바람이 살랑거리듯이 넓고도 골고루 시원하게 설하여져 나오는 난다까 마하테라의 법문은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싸안아 주는 듯이 법열의 기쁨 속에 흠씬 젖어들게 하였다.
법문에 취하여서 나의 몸과 마음은 추위를 잊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의 큰 형님께도 이대로 추위를 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적 왕자 시절부터 호사롭게 자라왔으므로 이 정도의 추위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살그머니 여쭈었다.
“부처님! 초저녁이 지났습니다. 조금만이라도 쉬셨으면 합니다.…”
안에서 진행되는 법회를 방해하지 않도록, 소리를 내어서 여쭌 것은 아니었다. 몸짓으로 아시게 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미동도 없이 서 계셨다. 그대로 이어서 법문을 설하는 소리를 듣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한밤중도 지나갔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어도 난다가 테라의 법문은 지루할 사이가 없었다. 바람 부는 바깥에서 듣는 이가 이러할진대 안에서 듣는 이들이야 달리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밤 시간의 법회가 아니었다면 그의 법문을 좋아하는 비구니 대중들도 기쁜 마음으로 들었을 것이다.
한밤중이 지났지만 내가 다시 여쭌 것을 조금도 염두에 두시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찬바람이나 이슬의 추위보다는 법을 설하는 소리에 집중하고
계셨다. 설하는 이가 설할 수 있는 만큼, 듣는 이 또한 들을 수 있는 만큼 듣는다고 해야 하리라.
내가 세 번째 다시 여쭈었을 때는 멀리 동쪽 하늘이 훤히 터오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법문을 끝맺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다까여! 너의 법문이 길구나. 너의 법문 끝내는 소리를 기다리느라 나 여래의 허리가 저리구나.”
안으로 들어가셔서 펴놓은 자리에 앉으신 다음 하시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법문 하는 시간이 길다고 허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길게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잘 설하는 것에 대한 칭찬을 하시는 것이다.
흡족해서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서 모여 있는 모든 대중들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칭찬을 받은 난다가 테라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문 밖에 부처님께서 계시는 줄 알았다면 이렇게 길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시작해서 설하였던 담마를 지극하게 들으셨던 부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서 길러 놓은 비구 대중들에게도 정성껏 대하셨다.
그날은 안거가 끝나는 해제하는 날이었다.
상가 대중들이 지난 석 달 안거 중 적당하지 못한 허물 지은 것을 스스로 보았거나, 전해 들었거나 의심 나는 것이 있으면 지적해서 고쳐 주기를 대중 스님들이 서로서로 청하는 행사(빠와라나 깜마)를 하는 날이었다.
그날 빠와라나를 행하는 곳은 뽁빠란마나 정사 안의 큰 법당이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수행하던 대중 스님들이 지금 초저녁에 상가의 일, 포살을 하기 위해서 모였다.
상가 대중 스님들이 모여 있는 큰 법당에 조금 남은 햇볕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불을 켤 필요는 없었다. 햇빛이 비치던 곳에 달빛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밝고 시원하며 깨끗하게 떠오르는 달빛이 그윽하니 앉아 계시는 그분의 얼굴에 빛을 뿌리며 공양을 올리는 듯했다.
“비구들이여……”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달님이 법당 안의 달님을 비추어서 서로 겨루고 있을 때 달빛보다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을 지금 나 여래가 초청 하노라.
나 여래의 몸으로 행한 업, 입으로 행한 업 가운데 적당하지 못하고 경멸스러운 것을 너희들은 보았느냐?
만약 보았거든 말하기 어려워들 하지 말라. 각기 비구 대중들끼리 말하듯이 나 여래에게도 너희들이 말할 기회가 있느니라.”
상가 대중들의 빠와라나를 끝냈으므로 부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교단 전체를 시작하여 세우신 분이시지만 ‘나만이 말할 권한이 있고, 너희들은 모두 나의 아래에 있는 이들이니 나에게 감히 말을 할 것인가?’라고 생각지 않으신다.
이 교단을 짊어지고 가는 이들 모두에게 당신과 똑같이 말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초청하심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 가지의 업 가운데 몸과 입의 업만을 말하도록 초청하였다. 마음의 업은 남겨 두었다.
‘마음의 업은 구분할 수가 없어서 남겨 두었는가?’라고 존경심이 없는 이가 질문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물어 온다면 물론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몸의 업(身業)과 입의 업(口業)이 생겨나지 않으면 마음의 업(意業) 한 가지만으로는 어느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것은 남겨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자기와 같은 위치에 두어서 기회를 주었지만 그 기회를 어느 누구도 감히 일어나서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대중들의 입이 조용하기만 하다. 법당 바깥 어느 곳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만이 그 고요함을 더 보태주고 있었다.
대중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부처님께 지극히 존경하는 마음 한 가지뿐만은 아니었다.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것마다 말씀하시는 것마다에는 어느 한 가지의 경멸할 만한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모든 상가 대중의 대표로서 마하 사리불 테라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말씀드렸다.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의 신업과 구업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적당하지 못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설하지 못하는 닙바나에 이르는 담마를, 누구도 같을 수 없을 만큼 능숙하게 설하신 분입니다.
저희들 상가 모두는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에 도와 과를 차례차례 갖추게 되었습니다.”
코살라 국왕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부처님께 삼마 삼붓다 부처님이라고 인정하시느냐고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 긍정하신다고 대답하셨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스승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로 스스로 깨달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긍정하신 것이다.
그러자 꼬살라 국왕이 금방 이해하지 못하여서 당황해하였다.
뿌라나 까싸 빠, 매 칼리 코살라 등 나이도, 수행한 햇수도 훨씬 더 많은 유명한 종파의 스승들도 삼마 삼 붓다라고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나이도, 수행한 햇수도 훨씬 더 적은 이가 붓다라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어려도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네 가지 종류를 설하셨다.
그때 사실인 공덕을 사실대로 긍정하시고, 사실이 아닌 공덕을 완벽하게 빼어 없애 버리셨다.
“고따마 수행 자시여! 고따마 수행자께서는 모든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을 봅니다.
가고 있거나 서 있거나 잠들거나 깨어 있거나 언제나 지혜의 눈이 항상 열려 있어서 남김없이 보는 지혜를 얻었음을 긍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대로가 사실입니까?”
왓사족에서 태어난 외도 수행자가 여쭌 것이다.
왜 살리 수도의 마하와 나 숲, 꾸따 가라 절에 머무시면서 왓사가 머무는 곳으로 가셨을 때 부처님께 여쭌 것이다.
전해 들은 대로 여쭈었던 것처럼 그가 들은 말은 뿌리가 없었다. 우리 제자들 가운데 이러한 말을 하는 이는 볼 수 없다.
무엇이든지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다 안다. 언제나 그대로 알고 있다.’라고 하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는 니간타들의스승 나따뽁따이다.
그 나따뽁따의 말을 부처님의 말과 섞어서 하는 소리 같았다.
“왓사여! 네가 들은 대로가 아니다.”라고 사실대로 확실하게 부정하였다.
“부처님, 들은 대로가 아니라면 제가 고따마 수행자의 공덕을 사실대로 바르게 말하려면 어떻게 말하여야 하겠습니까?”
“왓사여! 그러면 이렇게 말하여라. 수행자 고따마는 웨이사 세 가지를 구족 하게 갖추었다고 말하여라.”
사실이 아닌 공덕을 빼어버리고 사실인 공덕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특별한 지혜(웨이사 냐나)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전에 있었던 몸의 차례를 기억할 수 있는 지혜(뽁배니와사 냐나; 숙명 통)
② 업에 맞게 중생들이 태어나고 가고 오는 모습을 아는 지혜(대바쌔꾸 냐나; 천안 통)
③ 모든 번뇌를 깨끗이 없애는 아라한 과의 지혜(아라하따 팔라 냐나, 누진 통)
부처님께서는 선한 이들, 함께해도 좋을 좋은 도반을 찾도록 수도 없이 여러 번 설하셨다.
좋은 도반과 함께한다는 뜻을 내가 잘못 생각하였을 때 부처님께서 고쳐 주셨다.
이렇게 설하신 것은 선한 이들이 가려는 곳으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서 따라가라는 것이 아니다.
선한 이들이 얻은 진리의 지혜를 자기의 지혜로 옮겨서 특별한 지혜, 특별한 견해를 얻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같이 뭉쳐 다니면서 웃고 떠들기를 함부로 하고 지낸다면 부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허락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은 사까족 태생인 가따리 비구의 건물이었다.
그곳에 많은 비구들이 가사를 기우려고 모였을 때 나도 마침 그곳에서 도움을 주게 되었다. 자그마한 작은 암자에서 가까이 지내는 친한 스님들과
모였으니 자유롭게 떠들기를 말이 끊어질 사이가 없이 웃고 손뼉 치고 하는 중이었다.
마침 알맞은 시간에 부처님께서 들어오셨다.
“아난다여! 비구 수행자들이란 대중들과 같이 즐기고 떠드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
친한 이들과 웃고 떠들고 지냄으로써 선정의 행복과 도의 행복을 얻는 원인은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등으로 친한 이들과 웃고 떠드는 것의 허물을 보여주시고, 혼자 지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을 가르쳐 주셨다.
허허거리고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의 소리가 시끄러운 것도 부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이러한 것들은 가끔씩 만나게 되는 것으로, 그전에 나기 따 테라가 그런 일을 만났었다.
그때 부처님의 시봉을 책임 맡은 이는 나기따 테라였다.
어느 날 ‘잇싸닌가라’ 마을에서 그 지방의 유지 거부 장자들이 좋은 음식을 장만해서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왔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정사의 대문 쪽에서 왁자지껄 시끄럽게 들려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나기 따여, 어부들이 고기 잡을 때처럼 저렇게 시끌시끌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이들이 누구인가?”
나기따 테라가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나기 따여! 나 여래는 사람들이 시끌시끌 하는 곳에서는 지내고 싶지 않다. 저렇게 시끄러운 사람들은 나에게 오지 말게 하라.”
“나기따여! 선정의 행복, 도의 행복, 과의 행복을 얻지 못하고 먹은 이들은 배설물 거리를 먹은 다음 실컷 졸 수 있는 음식의 행복을 즐기며 시끌시끌 시끄러운 무리들과 지내는 것을 즐거워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 여래는 선정의 행복, 도의 행복, 과의 행복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행복을 좋아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공양을 올리러 왔던 이들을 만나지 않으셨다.
담마를 설하거나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없으면 부처님께서 언제나 조용히 지내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얻어 놓은 출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잇싸닌가라 마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애까 사와까, 가장 큰 제자 두 분조차도 용서하시지 않으셨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의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싸뚜마 마을 근처에 있는 샤샤나무 숲속의 정자에 머무셨다.
싸뚜마 마을은 사까 종족들이 다스리는 구역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조용하게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지내는데 마하 사리불 테라와 마하 목 갈라나 테라 두 분이서 오셨다. 그분들의 뒤에는 5백 명의 비구 제자들이 따라왔다. 그들 모두가 이제 갓 비구가 된 이들이라서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아직 몰랐다.
먼저 있던 스님들과 인사를 하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발우와 가사를 제자리에 두는 일들을 조심스럽고 조용조용하게 하지 못하고 생긴 대로 떠들고 말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절 안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오래지 않아서 그들 모두는 부처님 앞으로 모여야 했다.
가장 큰 제자 두 사람을 향해서 꾸지람을 내리기 시작하셨다. 사실을 모두 들으셨지만 분명하게 거듭해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가라. 너희들을 나 여래가 쫓아낸다. 나 여래가 있는 곳에 너희들은 머무르지 말라.”
기다리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명령을 내리셨다. 부처님께서 사랑하시는 가장 큰 제자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별일이야 있겠는가라고 쉽게 생각하던 어린 비구들은 너무 당황하고 슬퍼서 주저앉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그 딱한 이들은 모두 부처님을 친견하려고, 법을 들으려고, 멀고 먼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에 왔다고 생각하여 들뜬 마음으로 주의를 소홀히 한 결과치 고는 너무나 엄청나게 바뀌어버린 현재의 사정이었다.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방해를 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행하였던 허물을 분명하게 알도록 가르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도와줄 수는 없었다. 금구로써 하신 말씀을 거역할 수 있는 이를 나는 아직 어디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다.
망연자실하고 있는 그 젊은 비구들의 일이 내 일처럼 느껴졌다.
부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좋은 비유 한 가지를 만날 수 있다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으련만 그러나 그때 나에게는 어떤 좋은 방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두 분들도 그 스스로들 벌을 받는 형편이니 뭐라고 변명을 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예, 부처님.”
내려진 벌을 공손하게 받아들여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두 분과 뒤따르는 젊은 비구 5백 명은 도착할 때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짐을 챙겨서 살그머니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가고 난 다음 오래지 않아서 싸뚜마 마을의 사까 종족 사람들이 왔다.
그 두 분들에게 생긴 일을 듣고서 왔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지만 그들은 부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조용조용 들어와 조용조용 부처님 곁으로 가까이 갔다.
부처님 앞에 이르자 모두 똑같이 예배를 올리고 나서 그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이가 공손하게 두 손을 합장 올리고 부처님! 부처님께서 그 비구 스님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 대중들이 돌아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전에도 격려해 주셨듯이 지금도 다시 격려해 주십시오.”
“부처님, 어린 새싹이 물을 제때에 얻지 못하면 시들고 마는 것처럼, 어린 송아지가 어미 소의 젖을 빨지 못하면 여위고 시들어져서 죽고 말듯이,
이제 갓 비구가 된 젊은이들이 부처님을 뵙지 못하면 생겼던 신심들이 시들어져 갈 것입니다. 부처님.”
그들이 사루는 말들이 사실 바른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비유들을 적절하게 인용하여서 부처님께서 만족하게 여기 시계 되었다.
이렇게 만족하게 여기시더라도 어느 누가 감히 그 두 분들이 계시는 곳으로 가서 말하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도 가서 불러오라고 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그 두 분들이 돌아왔다. 마하 목 갈라나 테라의 예리한 마음의 신통력이 반응했음이 틀림없었다.
가서 부르는 이, 연락해 주는 이가 없어도 그분들이 돌아왔을 때,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사리불이여! 내가 비구들을 쫓아낼 때 너의 마음속이 어떠했느냐?”
“부처님,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쫓아내셨다. 지금 오직 한 분이서 걱정 없이 과(果)의 선정에 들어가시려는 것이리라.
우리들도 아무 걱정 없이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 지내리라.’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
“사리불아! 걱정 없이 선정에 들어가는 것, 기다려라. 기다려라.”
그분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이 이 크나큰 교단을 보호하고 거두어 나가는 많은 책임이 있는 마하 사리불 테라를 이렇게 제지하신 다음 계속하여서
“목 갈라나여! 비구들을 나 여래가 쫓아냈을 때 너의 마음속이 어떠하였느냐?”
“부처님, 지금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내쫓으셨다. 지금 한 분이서 걱정 없이 과(果)의 선정에 들어가서 지내실 것이다.
지금 이 교단 안에 있는 모든 비구들을 제자와 사리불 테라가 그들을 보호하리라.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왼쪽 팔이신 큰 제자의 대답에 부처님께서 만족하시는 대답으로 싸~두를 부르셨다. 여러 가지 모든 어려움을 통해서 세웠던 이 큰 교단이 길게 머물 수 있는 것은 목갈라나 마하테라처럼 생각하고 보호해 나가는 큰 인물들의 공덕에 의지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난존자의 일기
97. 이 교단의 새싹들
형님의 높고 높은 본보기들을 우리 대중들이 만족하게 들었을 것이다. 나의 일생을 통해 이렇게 본보기가 되는 이야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같이 지내는 대중 스님들에게도 기회를 만나는 대로 말씀드렸다. 여러 지역마다 신자들에게도 설하여 주었다.
설하였던 지역이 얼마만큼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거기에 특별한 까닭이 있다면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의 입가에 한없이 편안한 미소가 생기는 것이다.
나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우는 것처럼 듣는 여러분의 마음도 역시 기름에 담근 솜처럼 부드럽고 여유로워질 것이다.
설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가 만족하도록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부대중 가운데 사자왕처럼 용감하고 의젓하게 계시는 부처님께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조용한 곳에서 홀로 앉아 계시거나 조용히 거니 시기도
하신다.
이렇게 지내시는 것은 이익 두 가지를 한꺼번에 행하시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고요하게 혼자서 지내시는 것으로 현재의 행복을 즐기시는 것이요, 그다음 한 가지는 미래의 제자들에게도 그분의 행동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부처님의 제자 비구들이 그분의 행을 따라서 행하고는 했다.
숲에서만 지내는 비구들도 있었고 도시나 마을 근처 한적한 곳에 혼자 앉아서 수행하기를 즐기는 제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럿이서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지내는 것만으로 부처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몸은 혼자서 지내지만 그의 마음속은 함께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
어떤 이들은 지난 과거에 만났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고 좋아하고는 한다. 어떤 이들은 미래를 상상하면서 먹지 않고도 배불러한다.
어떤 이들은 지금 현재 생기고 있는 대상만 지나치게 집착한다. 떼어낼 수 없이 꽉 붙들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혼자서 그렇게 지내는 테라를 앞으로 불러서 가르침을 내리셨다.
“테라여! 혼자서 걸식 가고, 혼자서 돌아오고, 혼자서 앉고, 혼자서 경행 하는 것을 이익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만큼은 있다. 그러나 완전하고 구족 하게 이익을 키우게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지나간 과거를 다시 회상하며 즐거워하지 않는 것, 앞으로 바라는 일을 가지고 먹지 않고도 씹고 있지 않는 것, 현재 당하고 있는 대상에도 지나치게 붙들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고 좋아하는 자기 마음을 충동하지 말고 집착함이 없는 강한 의지로 혼자서 앉는 것, 이렇게 지내는 것이 완전하고 구족하게 이익을 키우며 지내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쳐 보인 대로 테라 존 자는 몸뿐만 아니라 혼자서 이익을 키우며 잘 지낼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혼자서 지내는 이가 부처님의 아들인 비구들만은 아니었다. 부처님의 손자들에 유명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때문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는 속담이 있는 것인가 보다.
고요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지내기 때문에 ‘사마나’라고 인도의 말로 그렇게 부른다. 탄생이라고 하는 것도 이 몸, 피와 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비로운 자부(慈父)이신 부처님에게서 얻은 힘으로 비구를 만들어주는 것도 탄생이라고 한다.
비구로서 태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만들어낸 사마나들이 나이가 찼을 때 우리들과 같이 비구의 생애로 이르러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사라지고 난 다음 그들이 이 교단을 짊어지고 나갈 것이다. 그래서 비구들의 아들, 부처님의 손자들을 사마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 이 교단의 공덕을 밝게 빛낸 유명한 이가 ‘아씨와 라따’라고 이름하는 사미였다.
부처님의 행을 따라서 아씨 와라 따는 왤루와나 죽림정사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숲에 들어가서 오로지 혼자서 지냈다.
이렇게 지낸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것으로써, 우리 모두는 그가 원하는 대로 가까이 가는 것을 적당하게 삼가해 주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객 스님들이 오면 아씨와 라따가 수행하는 근처로 가지 말 것을 미리 주의를 주고는 했다.
그러나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같은 비구들뿐이었다. 우리와 같지 않은 아씨와 라따의 형제들이나 왕자들은 막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야 새나 왕자가 하는 거동을 우리들은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들어왔으므로 아씨 와라 따는 어쩔 수 없이 손님을 맞아야 했다.
고요하고 편안하게 지내던 시간을 왕자를 위해서 비켜 주어야 했다. 만약 법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는 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설사 법을 설하여 주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아니라면 피곤함과 시간만 허비하고 마는 것이다.
피곤하더라도 법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원인이 된다면 시간을 보낸 이익을 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 교단의 짐을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왕자에 대해서는 이익을 건져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부처님께 정사를 지어서 올린 빔비사라 대왕의 아들이지만 사야 새나 왕자는 우리 교단의 법과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작은 왕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왕위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왕자로서의 위세는 가지고 있었기에 주변에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밖에 젊고 준수하게 생긴 외모로 인해서 깜마 오욕락의 흐름에 빠질 수 있을 만큼 빠져 있는 이였다.
우리들이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아씨와 라따 역시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래서 사야 새나 왕자가 법을 설해 주기를 청하였지만 금방 설하지 않고 “왕자여!
내가 들은 대로, 내가 수행한 대로 법을 설하여 주어서 왕자 당신이 이해한다면 좋을 것이요.
그러나 만약 설하는 만큼, 말해 주는 만큼 이해하지 못한다면 피곤함만 가져올 것이요. 그래서 왕자 당신에게 법을 설하고 싶지 않소.”
왕자의 소문을 충분하게 들은 터라 이렇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사야새나 왕자는 거듭 여쭈어서 부탁을 드렸다.
“오! 앗기 왜 사나 수행 자시여!
수행자께서 직접 들었던, 수행자께서 직접 배웠던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설하시는 법을 제자가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면 왕자 당신에게 법을 설하여 주리라. 내가 설해 주는 법을 왕자 당신이 이해한다면 좋을 것이요.
만약 이해하지 못한다면 조용히 있으시오. 이어서 묻지 마시오.”
거절하지 못하고 설하여 주는 대신 이러한 못을 박아서 후환을 없앤 다음 아씨와 라따가 법을 설하여 주었다.
그를 종족의 이름으로 ‘앗기 왜 사나’로 불렀다. 설하여 주는 기회를 가져서 그가 능숙하게 익혔던 선정에 관한 법을 설하였다.
수행대상(까시나) 한 가지를 기초로 하여서 마음이 차례차례 고요해지는 모습을 설하여서 선정을 얻는 것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사야 새나 왕자가 그 사이를 잘라서
“수행 자시여! 한 비구가 잊지 않고 수행하더라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여쭈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을 말한 다음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가 떠나가고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아씨와 라따가 부처님 앞으로 갔다.
그날은 사야 새나 왕자가 아씨와 라따의 법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씨와라따의 그 법문 한 게송으로 인해서 기억할 만한 가르침들을 우리들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앗기 왜 사나! 비유를 들어서 말하겠다. 젊은이 둘이서 손을 잡고 산 아래에 이르렀다.
한 사람은 그 산 아래 그대로 서 있고 한 사람은 그 산의 정상에 올라갔다.
그러자 산 아래에 있는 이가 ‘친구여, 산 위에서 보이는 것을 말해보라.’라고 했기 때문에 그 위에 있는 친구가 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숲이 얼마만큼 우거졌으며, 들판 전체가 푸른 벼들로 덮여 있는 모습들을 차례차례 말해 주었다.
산 위에 있는 이가 직접 눈으로 본 대로 말해 주는 것을 산 아래에 있는 이가 보지 못했으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산 위에 있는 이가 산 아래에 있는 이를 산 위로 오도록 해서 피곤을 풀게 한 다음 그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다시 말해 보도록 했다.
그가 다시 말한 것이 먼저 말했던 이의 말 그대로였다.
그러자 먼저 왔던 이가‘친구여!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지금은 이러한 것이 분명하게 있다고 다르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도대체 어느 말을 믿어야 하겠는가?’
‘그렇다. 친구여! 선 자리에서 두 가지 말을 하게 되었다. 먼저는 이 산이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었다.’라고 이렇게
두 번째의 사람이 긍정하였던 것처럼 사야새나의 지혜의 눈을 무지의 산이 가려서 막고 있다.
무지의 산은 그 두 친구들의 산보다 훨씬 더 크고 높았다.
깜마(業)의 세상을 벗어나는 법은 깜마 오욕락의 대상에서 벗어난 마음으로만 알 수 있고 도착할 수 있다.
그 법을 깜마 욕망의 늪 속에서 살고 있는 사야새나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깜마의 병, 자기 안의 병으로 뜨겁게 끓어서 들쑤시고 있는 사야새나가 어떻게 도착할 수 있겠는가? 깜마의 대상을 즐기려고 찾아다니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렇게 찾아내기를 노력하는 이가 어떻게 체험할 수 있겠는가?
앗기 왜 사나요! 이러한 비유를 들어서 네가 설하였다면 사야새나가 너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믿어 왔을 것이다.
믿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부처님, 이 비유를 지금에야 들었으니 설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가르침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한 아씨와 라따가 다음에 사야새나를 만나면 아마도 부분부분 자세하게 설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숲 속의 절에서 지내기를 즐거워하는 사미 아씨와라따가 법을 설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하게 잘 알려진 것처럼, 아디 목 다 까 사미 역시 진실한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상깨이 싸 테라의 제자이기도 하고 조카가 되기도 한다. 그 두 사람은 혈육 일뿐만 아니라 업도 역시 비슷했다.
상깨이싸 테라는 그의 전계사 스승님 마하 사리불 테라의 말씀으로 숲에서 지내는 동안 함께 수행하는 32명의 비구들과 함께 강도의 습격을 받았다.
세상의 법칙 8가지 바람을 동요함이 없이 참을 수 있는 마음의 능력으로 위험을 막아낼 수 있었다.
또한 자기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이조차 붉은 흙으로 물들인 가사를 입혀서 그의 스승님 앞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와 같이 조카가 되는 아디 목 다 까 사미 역시 강도의 습격을 받아서 꽁꽁 묶이는 처지가 되었다.
삼촌 되는 이가 흔들림 없는 마음의 수행력으로 많은 강도들을 제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조카 되는 이는 흔들리지 않는 진실한 약속으로 인해서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의 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던 중에 어느 한 숲 속에서 아디목다까는 강도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죽이자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살려서 돌려보내자고 했다.
그렇게 두 편으로 나누어져서 싸우고 있는 중에 아디목다까는 강도의 우두머리에게 가까이 갔다.
“거사님, 옛날이야기 한 가지를 들려주고 싶소. 옛날에 사냥꾼 한 사람이 창으로 어린 토끼 한 마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때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어린 토끼를 보던 사슴, 노루, 염소, 들소들과 함께 많은 새들도 같이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무서워하였습니다. 도저히 그곳에서 지낼 수가 없어서 그날 밤으로 모두들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와 같이 이 지역 전체에서도 내가 이 숲 속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고 모두들 알게 될 것이오.
나를 인정 없이 잔인하게 죽인다면 이 숲으로는 여행자가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생명은 끝이 날 것이니 잘 생각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오.”
아디 목 다까 의 말대로 된다면 양쪽이 모두 이익이 없게 될 것이므로 강도의 우두머리가 놓아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테라님,
이 약속을 지키고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오.”
“좋습니다. 거사님, 약속한 대로 지킬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하고서 강도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이 숲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많은 동반자들과 함께였다. 그들 모두 강도들의 손에 잡혀서 갖은 고초를 겪어서 꼴들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여자가 아디 목 다까 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부르면서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었다.
그것을 본 강도의 두목이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여자에게 물었다.
“오! 할머니, 당신은 아디목다까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부르면서 우는데 그 아디 목 다까와 무슨 관계라도 있소?”
그렇게 묻자 노파는 이마의 피를 닦으면서 대답하기를 “저는 아디 목 다까 의 어머니가 되고, 저 사람은 그의 아버지, 그의 삼촌, 형, 누이들입니다.”
“오! 놀랍구나! 성인의 높은 행을 수행하는 이들의 행은 너무나 바르는구나! 한번 약속했던 맹세를 생각하고 친부모 형제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견디는구나. 오!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이렇게 유명한 이들로 인하여 우리 교단의 수행자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비유를 잘 들어서 산적의 손에서 벗어났던 아디목다까는 마하 사리불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또한 달리기를 잘하여 벗어난 사미도 그 종족에서 태어났다.
이 교단 안에서 뿐만 아니라 혈통이 같은 형제였다.
어머니가 되는 루빠 싸리 브라만에게서 싸라, 우빠싸라, 시쑤빠싸라라고 하는 삼 형제의 누이들과 우빠 때 이사(사리불), 우빠 새나, 순다, 예 와따 등의
사형제가 태어났다. 위로 육 남매가 모두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유산을 물려받을 막내 하나만이 남았다.
그 위로 6남매는 나이가 들어서 교단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들의 마음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놓아 보내야 했다.
자식들을 많이 보내기는 하였지만 수행하는 스님들께 밥 한 숟갈, 반찬 한 토막 보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의 형제들이 데리고 가지 않도록 막둥이 예와 따를 억지로라도 잡아 놓아야 했다.
자식들을 7남매나 키웠는데 결혼식 한 번도 시켜보지 못한 어머니는 위로 자식들이 결혼을 하지 않아서 아무 걸릴 것 없이 훌훌 쉽게 떠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금 막내는 그들 뒤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세속의 아들로서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묶어 둘 수 있는 결혼을 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 예와 따는 아직 결혼을 시킬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양쪽 부모들의 의견이 일치하면 혼례를 올리게 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어 왔던 일 아닌가?
예와 따를 완전히 묶어 놓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직 어린 일곱 살의 예와 따는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식장에 신랑으로 들어가야 했다.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 흥미도 없으면서 새신랑이 된 것이다.
저쪽의 새색시도 나이가 같은 어린아이였다. 예와 따와 신분이 같은 가문에서 골라 온 것이다.
덕망이 있는 양가 부모의 준비로 하나씩 하나씩 결혼식 행사가 차질 없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 차례로 신랑의 할머니에게 새신랑 각시가 절을 올리는 의식이 남았었다. 이 행사가 이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예와 따는 이 할머니와 사이가 매우 좋았다. 날마다 이 할머니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는 했다.
오늘 행사에서도 전에 날마다 하던 것처럼 쉽게 절을 올렸다.
그러나 이 할머니와 관계하여 어른들이 하는 한마디 말을 듣자 그의 마음에 갑자기 두려움이 생겼다.
“오! 어린 색시야, 이렇게 절하는 공덕으로 이 할머니보다 오래 살아라.”
어른들의 말은 이것뿐이었다. 자신들의 자식에게 ‘병 없이 오래 살아라.’라고 축복의 말을 내려주는 것이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이 예와따의 귀에 행복을 생기게 하지 못했다.
“할머니보다 오래 살아라.”라고 하는 말에 그 어린 색시가 세월을 넘어서 갑자기 할머니로 보이는 것이었다.
예와따의 할머니는 연세가 일백 세가 넘었다. 그래서 살결은 늘어나서 주름이 줄줄이 늘어졌고, 머리카락은 희어서 빗질을 하여도 제멋대로 위로
솟구치고, 치아는 빠져서 입은 오물오물하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다.
“맙소사, 저렇게 되라고 하다니 ”
지금 이 자리에도 자식들이 들어서 안아다가 모셔 놓은 것이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어린 색시를 번갈아 바라보는 예와따의 마음은 심하게 울렁거렸고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 아무리 잘 단장하여 치장해 놓더라도 어느 날은 저렇게 되어버리는구나! 이 몸에는 진정 참으로 좋아할 만한 것이라고는 없구나!
이러한 것을 보고서 나의 형님들이 떠나갔구나. 그래서였구나. 나도 나의 형님들이 가신 길을 오늘따라갈 것이다.
어른들이 세간의 행복한 행사에 참석하여 즐거워하고 있는 동안 어린 신랑 예와 따는 출세간의 높은 행복을 보장하는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즐거워서 축복의 인사를 주고받는 가운데 예와따는 그의 생각대로 행동을 시작해야 했다. 소꿉놀이 친구들이 있는 마을 골목길을 달려갔다. 그들은 마침 차례차례 달리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새신랑 옷을 입은 예와 따도 전처럼 놀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예와따의 달리기 차례가 되었다. 두 번이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나게 뛰었다.
어른들은 두 번의 달리기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세 번째에는 ‘저렇게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고 자기들의 일에만 마음을 쏟았다.
세 번째 달리기를 하고 난 다음 화장실 가고 싶은 표정을 취해서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놀이패들을 따돌리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달리기를 잘하는 예와 따는 그의 업에 따라서 때마침 누더기 가사를 입은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갖은 장식을 한 차림에 누구의 아들인지 몰라서 스님들이 사미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하 사리불 테라의 막내 동생인 것을 말하자 기쁘게 환영하였다.
“나의 부모님들은 이 교단의 바깥에 있는 분들입니다. 허락을 받고 스님이 되려면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 동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면 될 수 있는 대로 재빨리 스님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 비구 스님들에게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전에 미리 당부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숲 속에서 지내는 스님들이 얻을 수 있는 소지품을 준비해서 일사천리로 후딱 예와 따를 사미로 만들어 주었다.
달리기를 잘하던 예 와따는 수행자가 되어서 숲 속에서만 지내는 수행자가 되었다. 다른 이들이 지내는 숲은 열매가 많은 곳이었다.
시원하고 마실 수 있는 맑은 샘물이 있는 곳을 선택하였다. 걸식하는 마을이 멀고 가까운 것도 비교해보았다.
그러나 예와따 사미가 지내는 곳은 그러한 조건이 전혀 없이 돌무더기 산에 골짜기만이 있었다.
우거진 것이라고는 조금씩 조금씩 무더기로 있는 가시나무뿐이었다. 그곳에서 예와 따가 수행자의 일을 마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하 사리불 테라의 막내 동생이 숲 속에서 지내는 수행을 하는 것에 가장 높은 칭호, ‘애 따다까’라는 특별한 칭송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부처님의 손자들, 이 교단의 어린 새싹들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계속 이어서 우거지는 숲을 만들 수 있도록 행복을 키우는 큰 나무로
자라고 있었다.
아난존자의 일기
98. 가사를 입지 않은 비구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도덕적인 계를 잘 지켜서 신심이 구 족 한 가정을 가진 이들을 부처님께서 희마완따 큰 산에다 비유를 들어서 설하여 주셨다.
“비구들이여! 희마완따 큰 산을 의지하여서 거목들이 다섯 가지 번성함으로 무성하게 우거진다.
그 다섯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가지와 나뭇잎, 나무껍질, 나무둥치, 알맹이, 이렇게 다섯 가지 무성함으로 우거진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신심이 구족한 가정을 가진 가장을 의지하여 그 집안의 가족들과 모든 친척들이 다섯 가지 번성함으로 번영해진다.
그 다섯 가지가 무엇인가?
신심, 지계, 견문, 보시, 지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번영해진다.”
일반 세간 사람들에게 설하였던 이 가르침을 우리 출가자들과 연관하여서 취하여도 또한 가능한 일이다.
희마완 따 큰 산을 의지하여서 거목들이 다섯 가지의 번성함으로 무성하게 우거지듯이 법의 왕이신 붓다를 의지하여서 우리 출가자들도 다섯 가지
번성함으로 크게 번영할 수 있다.
희마완따 큰 산의 거목들은 가지가지 모양의 잎새들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그 높으신 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에도 가지가지 종류의 비구들이 있다. 여러 가지 종류들에서 이 교단으로 모여들었다.
나이로 치면 아디 목 다까 나 예와따처럼 어린 나이에 이 교단에 들어오는 이들도 있다. 라다 테라처럼 쭈그러진 토마토, 이빨 빠지고 무디어진 칼날 같은 나이가 되어서 들어오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종파에서 벗어나서 이 교단에 적당하게 지낼 수 있는지 익혀서 익숙해진 다음에 비구의 생애로 들어오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가지 길로 비구가 된 이들 모두 우리들과 같이 지내는 대중이 되었다.
어떠한 길로 어떠한 인연으로 들어왔든지 들어와서는 이 교단의 규범과 목적에 합당하게 지낼 수 있는 이는 누구나 우리들이 받아들여서 함께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교단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들이라도 이 교단의 견해로 볼 때 깨끗한 이들은 우리들이 같이 지내는 대중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
계율에 정한 대로의 가사를 입지 않았더라도 비구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이, 그 사람의 일을 보여 주리라.
인연이 되면 이 자리에서 우리들의 견해 한 가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위엄과 고상함, 모든 존경을 드릴 수 있는 삼마 삼 붓다,
가장 바르게 모든 것을 깨달으신 분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다른 원인들도 포함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또한 기본으로 삼을 수 있는 법들을 골라서 이 세상 전체에 법의 북소리가 울리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생겨난 지 제법 세월이 흘렀다. 뽁꾸사띠 라는 특별한 이와 부처님께서 만나고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항상 시중을 들 수 있는 행운의 상을 얻기 전이었다. 다른 이들이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서 시중을 들 때였다.
그러나 그날 밤 부처님께서 가시는 곳에 비구 한 사람도 뒤따르지 않았었다.
밧가와 라는 옹기를 굽는 이의 옹기 가마가 있는 곳으로 부처님 혼자서 가신 것이다. 마가다,
그 큰 나라를 여행하시다가 라자가 하 가까운 어느 곳, 아직 왤루와나의 죽림정사까지는 이르기 전의 장소에서 그렇게 혼자서 떠나가셨던 것이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이렇게 혼자서 떠나시던 일이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별달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마하 사리불 테라 등의 높으신 마하테라 님들의 뒤를 우리들은 그저 묵묵히 따라갔을 뿐이다.
밤에는 그저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던 우리들이 다음날 날이 밝아왔을 때는 이런 말 저런 말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어제저녁의 일을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나 스스로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았을 때 뽁꾸사띠는 이미 살아있는 이가 아니었다. 성문 밖에 있는 쓰레기 더미 옆에 엎어져서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는 멀고 먼 간다라 국(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에서 이 중인 도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을 한 번도 뵙지 않았으면서도 부처님의 공덕을 깊이 믿고 존경하는 이였다.
수많은 재산과 주변 권속들을 단번에 버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그러한 재산보다 부처님의 공덕을 더욱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의 공덕을 듣는 그 순간에 그 스스로의 깊은 신심으로 그 스스로가 비구가 된 이들 못지않게 일순간에 신심이 돈독해진 것이다.
그의 가사는 우리들처럼 위니에 맞게 기운 것도 아니고 보기에 존중스러운 색깔도 아니었다.
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외도 수행자들의 차림새처럼 그저 꾀죄죄한 모양이었다.
이미 살아 있지 아니한 뽁꾸사띠는 박사와의 옹기 굽는 움막에 먼저 도착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룻저녁 쉬기 위해 그곳에 갔을 때 “부처님, 움막 안에 수행자 한 사람이 벌써 와 있습니다.
그 수행자가 좋다고 하면 제자가 허락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밧가와가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움막 안으로 들어가셨다. 삼계에 같음이 없는 높고 높은 분이시지만 주인으로서 들어가시지 않고 같은 수행자의 위치로서 편안하도록 먼저 온 수행자에게 예의를 차려서 허락을 구했다.
뽁꾸사띠는 자기와 같은 수행자로 생각해서 쉽게 허락하였다.
“수행 자시여! 이 옹기 굽는 움막 안은 넓습니다. 수행자께서는 편안하게 지내십시오.”
그날 밤 부처님께서는 가부좌로 앉아서 지내셨다. 그분의 자리는 높고 화려한 어떤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옹기 굽는 움막 안에 널려 있는 짚을 그분 스스로 모아서 펴놓고 그 위에 앉으신 것이다.
그 자리 위에서 알아차림을 단단하게 잡고서 앉아 계시는 모습을 그와 같이 앉아 있던 뽁꾸사띠가 매우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오! 수행 자시여, 당신은 누구를 목적으로 수행자가 되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어떤 법을 좋아하십니까?”
이렇게 인사를 하면서 질문하였다.
여기서 뽁꾸사띠는 부처님을 자기와 같은 보통 수행자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말하였다.
“수행 자시여! 사까 종족에서 탄생한 수행자 고따마라고 있습니다.
그분 고따마 수행자님의 아라한 등의 모든 공덕이 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저는 그분 고따마 수행자를 목표로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나의 스승입니다.
그분이 가르치는 법을 내가 좋아합니다.”
“그러면 수행자여, 그분 붓다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사왓띠라는 큰 수도가 있습니다. 그분은 그곳에 계십니다.”
“수행자시여! 나는 아직 한 번도 그분을 뵙지 못했습니다. 뵙는다고 해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 인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주고받은 대화이다. 그렇다. 말하는 소리만 듣고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그 스승님의 두 발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멀고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걷고 걸어서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그렇게 뵙고 싶었던 스승님을 뵈었지만 그는 여느 수행자로만 생각하여서 스승님의 붓다라는 호칭을 아껴두고 그저 수행자로만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르는 이가 그렇게 불러서 사용하더라도 아시는 분, 그의 스승님도 그를 일부러 말리지는 않으셨다.
“수행자여! 높고 높으신 부처님을 존경스럽게 대해야 한다.”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부처님인 줄 모르는 이 일지라도 당신이 제도해야 할 중생에게 법으로서는 알고 보도록 중요하게 여겨서 설해 주셨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부처님께서는 짐작도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상하심으로 담마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려움도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사자왕의 외침처럼 도도하게 법의 사자후를 펴시는 부처님께서 어떠한 이유가 있으면 혼자서 가셨는데 이것은 보통 한 사람의 수행자만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래서 빠릴래이야까 숲으로 가셨을 때 숲을 지키는 이가 보통 여느 수행자의 한 사람인 줄 여겨서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던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가까이서 뵙게 되었는데도 자기가 그렇게 존경하는 부처님인 줄도 모르는 뽁꾸사띠가 부처님이 설하시는 담마에 귀를 기울이다가 스스로 이해하게 되자 말하지 않아도 부처님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아차린 그 순간에 그는 예배드릴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낙비처럼 줄기차게 이어지는 가르침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자여!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 몸이 참으로는 여섯 가지 성품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섯 가지 닿음들의 무더기만으로 이루어진다. 열여덟 가지 마음의 느낌만이 있다.
사마디(선정), 위파사나 지혜를 잊어버림 없음, 바른 지혜의 진리를 보호함,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수행, 언제나 항상 마음이 고요하기를 원하여 편안하게 수행함, 이러한 네 가지 서원에 머무는 비구에게 갈망, 교만, 사견이라는 나쁜 법이 생기지 않는다.
원래 고요한 아라한을 ‘고요한 이 ’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날 밤 설하신 담마의 대강이다.
여섯 가지 성품이라는 것은 지수화풍 네 가지와 ‘공간’이라는 물질의 기본 성품과 인식 작용의 성품으로 여섯 가지를 말한다.
남자·여자로 부르는 이 몸을 뿌리로 삼아서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이 여섯 가지 성품만을 볼 수 있다.
남자, 여자, 살결이 흰 사람, 검은 사람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로는 없다. 사실 있는 이가 아니다. 사실 없는 것을 버리고 사실 있는 여섯 가지 성품을, 닿음 여섯 가지와 마음의 느낌 열여덟 가지로 넓게 구분하여 놓은 것이다.
닿음 여섯 가지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성품이라는 여섯 가지 문으로 대상이 부딪혀 올 때 닿아서 아는 마음의 성품이다.
여섯 가지 문으로 대상이 들어와서 만날 때 좋고, 나쁨, 중간이라는 세 가지 느낌의 종류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마음의 대상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마음의 느낌들을 설하여서 마지막에 선정과 닙바나가 있는 곳으로 가르침이 이어졌다.
부처님께서는 뽁꾸사띠가 세간 선정을 아껴서 집착하는 이인 줄 아셨기 때문에 “수행자여! 색계 5 선정에서 거듭 올라가서 무색계 4 선정을 키우려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색계 선정 역시 만들고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영원하지 않다.
생겼다가는 사라지는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윤회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비구는 윤회의 바퀴를 돌리게 하는 것에 어떠한 마음도 기울이지 않는다.
세상 전부에 보이는 것마다 무엇 하나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뜨거워질 걱정 또한 없다.
뜨거운 걱정 없이 원래 고요한 마음의 성품을 지금 현생에 얻어서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 체험 지혜의 최고 정상인 아라하따 팔라에 이르렀을 때 ‘나에게 생애의 연결이 끊어져 다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높고 높은 수행을
해 마쳤다. 이 교단의 가르침으로 해야 할 일들이 저절로 모두 끝났다. 이 닙바나의 법을 체험하기 위해서, 이 닙바나에 자주자주 들어가 쉬는
일, 그 일 외에 달리 해야 할 일은 없다.’ 이렇게 사실대로 바르게 알아지게 된다.”
이 가르침이 끝나기도 전에 뽁꾸사띠는 아나함 도과에 이르는 지혜가 활짝 열렸다. 이렇게 지혜의 꽃이 피어날 때 법을 설해 주시는 분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존경하고 뵙고 싶던 스승님이라고 스스로 알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감로 법의 소나기가 내리고 있는 중이어서 그분의 두 발에 미처 예배드릴 시간이 없었다.
몸으로 입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자면 가르침이 끝나도록 기다려야 했다. 이 가르침이 끝날 때 동쪽에서 먼동이 훤히 터오고 있었다.
“수행자여!”라고 부르던 허물을 공손하게 참회한 다음 뽁꾸사띠는 이 가르침 안의 비구로 만들어 주실 것을 여쭈었다.
그러나 그에게 위니에 알맞은 발우와 가사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비구를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알지 못하던 법을 알도록 설해 주실 수 있는 부처님께서 없는 물건을 있도록 해 주시지는 않았다.
기본이 되는 바탕이 갖추어져 있는 것에는 도움을 주시돼 기본이 없는 곳에는 부처님조차 도와줄 수 없다.
이렇게 누더기 가사를 만들 수 있는 헝겊을 찾으려고 그 쓰레기 더미 있는 곳에 갔다가 어린 송아지를 걱정하는 어미 암소의 뿔에 받혀서 그 자리에서 명을 마친 것이다.
그간의 사정을 사실대로 알게 되었을 때 청신사 청신녀들이 그의 남은 몸을 정성스럽게 화장하여서 기억할 만한 탑을 세웠다. 계단에서 수계 하지
않았더라도, 위니에 적당한 가사를 수하지 않았더라도 “뽁꾸사띠 테라”라고 우리들 모두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가사를 입지 아니하고도 비구의 대열에 들어간 이가 또 한 사람 있다. 뽁꾸사띠를 만난 것은 라자가 하였다.
이 사람과 만난 것은 사왓띠였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였더라도 만난 시간은 같은 아침 걸식 나가는 시간에 만났다.
그날 아침에 부처님 뒤를 내가 따라가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가서 집집이 차례로 걸식하고 있을 때 부처님 발밑에 한 사람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사람을 나는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옷차림 역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만큼 그의 차림새는 특이했다. 나무 판때기들을 넝쿨로 엮어서 입은 것이다. 그의 몸은 매우 피곤에 지치고 여위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길고 긴 여행을 온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을 볼 때 바닷가에서 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처님, 저에게 법을 설해 주시옵소서. 제자에게 긴 세월 동안 이익을 줄 수 있는 담마를 설하여 주옵소서.”
나무 판때기를 엮어 입은 이가 부처님의 길을 막고 그분의 두 발에 이마를 대고 법을 설하여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긴 여행에 지친 몸을 쉬는 것보다 법을 들어 알고 수행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히야여! 지금은 법을 설하는 시간이 아니다. 집집마다 차례로 걸식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막을 수 없는 바람 하나만 가지고 법을 청하는 이에게 부처님께서 이름을 부르면서 거절하셨다.
바히야라고 부른 이름은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닐 것이다. 바다 근처 바히야라는 나라의 사람이어서 알기 쉽게 그렇게 부른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금구에서 먼저 나온 그 이름을 우리들이 계속 부르게 되었다.
뽁꾸사띠의 일 때에는 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옹기 가마의 움막으로 가셨다.
지금은 법을 설하시러 한 걸음도 더 가실 필요가 없이 법을 들으려고 지극하게 원하는 이가 발밑에 엎드려서 기다리고 있다.
법을 듣는 이가 준비되어 있는데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 시간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거절하신 것은 설하시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인가? 하고 망상을 키울 필요는 없다.
형님과 가까이 지내 왔던 나는 형님의 높으신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법에 관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대중들은 이미 알 것이다.
그렇게 알게 하고 보게 하려는 연민심을 가지셨으되 지금 거절하는 것은 법을 설하시지 않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바히야의 상황을 생각해서 그를
아껴서일 것이다.
그의 몸의 피곤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로지 담마를 알기 위한 소원이 지나치면 그의 알려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피곤함도 풀어지게 하고 마음 역시 선정이 고르게 하려는 뜻으로 시간을 끌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에도 바히야는 법을 설해 주기만을 거듭 자꾸자꾸 사뢰었다.
첫 번째 거절을 당하자 두 번째 청하였다. 두 번째 거절을 당하자 다시 세 번째 청을 드렸다.
그 세 번째 여쭈었을 때 나의 담마 은행에 저장할 값비싼 보배 덩어리가 늘어나게 되었다.
“바히야, 그러면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하라.
보이면 오직 봄, 들으면 오직 들음, 냄새 맡으면 오직 맡음, 먹으면 오직 먹음, 닿으면 오직 닿음, 알면 오직 앎, 바히야여,
이렇게 수행하라.”
간략하게 듣기를 원하는 바히야를 위해서 필요한 것만 설해 주신 것이다.
보면 오직 봄이라고 관찰하라.”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 모양을 볼 때 보는 마음이 원래 성품으로 깨끗한 마음임을 말한다.
보이는 대상에 탐심으로 집착하지 말고 화냄으로 허물 짓지도 말고 어리석음으로 허둥거리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마음에 번뇌가 없다.
원래 깨끗한 그대로의 마음에 번뇌와 함께하지 않은 위파사나의 마음만이 생겨나게 하라는 뜻이다.
가장 짧게 줄여서 필요한 것만 설하신 이 가르침에 불결하고 아름답지 못함, 고통, 무상, 무아라는 관찰해야 할 네 가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한 가지를 볼 때, 이르는 곳마다 계속 이어서 집착하지 않고 보는 그대로 관찰하므로 그 집착이나 탐심·무지가 멈추어질 때 아름답다고 원하는 생각의 집착이 생겨나지 않는다.
사마타(선정) 수행을 하는 것에 부정관을 넣는 것은 이러한 아름답다는 생각의 집착을 빼어버리기 위해서이다.
지금 보면서 보는 것으로만 멈출 때, 그러한 생각이나 집착이 생겨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관 수행으로 따로 수행하지 않더라도 위파사나와 같이 저절로 수행하는 것이 된다.
결과가 생기는 곳에 원인을 관찰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행복, 무상, 나라는 생각의 집착도 와서 붙을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 등을 관찰하는 수행을 키우는 것도 된다.
이러한 위빠싸나 수행을 세 가지 구분하는 지혜로 나누어서 보면, 보고 들은 지식과 위빠싸나 수행으로 보는 지혜, 이 두 가지를 볼 수 있게 된다.
보는 마음 한 가지가 생겨날 때마다 궁리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오직 보이는 대상, 오직 볼 수 있는 마음으로 관찰할 때 ‘행하는 이도 없고 시키는
이도 없이 그 스스로의 성품에 알맞게 생겨나는 성품이로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냐띠 빠린냐’라고 한다.
6문에 6종류 대상들을 만나는 것마다 무상의 성품 등으로 관찰하는 이해가 되기 때문에 ‘띠라나 빠린냐(무상, 고, 무아를 바로 아는 위파사나 지혜)’ 역시 갖추어지게 된다.
이 가르침을 설하신 다음 부처님과 우리들은 그대로 걸식을 진행하였다.
걸식이 끝나고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바히야의 숨이 끊어진 몸을 보게 되었다. 뽁꾸사띠처럼 암소의 뿔에 받혀서 죽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바히야의 몸을 침상에 얹어서 옮겨오라. 도시 바깥으로 가져가 정중하게 다 비하라.
그를 기억할 만한 탑을 세우라. 그는 너희 비구들과 같은 한 사람의 대중이 된다.”
가사를 입지 아니한 한 비구를 위해서 내리신 말씀이다. 그렇다. 판때기 조각을 엮어서 입었을망정 바히야의 수행자의 일이 그 자리에서 마치게
된 것이다. 번뇌(낄레사)의 먹이가 되지 않고 네 가지 도의 여정을 단숨에 올라서 아라한의 높은 위치에 이른 것이다.
그가 죽은 다음에 ‘지혜를 빠르게 얻는 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부처님께서 직접 칭찬해 주셨다.
법을 설하는 짧은 순간에만 만났었던 그 바히야의 뒷부분을 제따와나 정사에 돌아와서 듣게 되었다.
그의 생애의 대강을 이야기하면, 그는 바다여행을 가다가 풍랑에 배가 부서지게 되었다.
입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 조각을 엮어서 아래만 겨우 가리게 된 것이다.
간신히 사발 하나를 주워서 그 사발을 들고 항구의 집집을 돌며 얻어먹고 지냈다. 거기서 그의 이상한 행색을 보고 사람들이 아라한이라고 부르자
그도 모르게 유명한 이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판자를 입은 가짜 아라한이 진짜 아라한을 만나서 파리 닙바나에 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수빠라까 항구에서 온 그의 제자들에게서 나온 말이다.
아난존자의 일기
99. 향기 넘치는 살수 숲에
희마완 따 큰 산을 의지해서 자라고 있는 크고 작은 갖가지 나무들을 말했었다. 지금은 그 많은 나무 가운데 가장 희유한 나무들을 모아 모아서 보여드리려 한다. 그 가장 희유한 나무들 중에서도 가장 만나기 어려운 으뜸가는 것이 바로 사라나무 숲이다.
그 으뜸가는 사라나무의 거목에 두 개의 큰 가지가 있다. 멀리서 보면 큰 소의 뿔 두 개를 세워 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라나무 숲을 우리 중 인도의 말로 고신가 사라 숲이라고 부른다. 그 숲 속에서 제법 오랜 날을 머물렀었다.
우리들은 주변의 적당한 마을에서 걸식하여서 먹었다. 그곳에서 지금 말하려는 일들이 생겨난 것이다.
고신가 사라나무 숲 속에 절이나 움막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오랜 날을 지내게 된 것은 이 사라나무 숲이 두 종류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사라나무가 가장 많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사라숲이라고 하였지만 이 숲 속에 사라나무 한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열리는 나무, 아름다운 꽃이 피는 다른 나무들도 물론 군데군데 자라고 있었다.
있는 대로의 모든 나무들이 가지끼리 서로 잎사귀들이 엉키어 그늘이 두터워서 지내기에 아주 좋았다.
퐁퐁 솟아나는 샘물과 맑은 연못들도 있었다.
그보다 우리들이 더 좋아한 것은 주변의 마을을 벗어난 조용하고 한가로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숲 속의 자연적인 상태가 좋은 만큼 그 숲에서 지내기를 즐기는 티 없이 맑은 수행자들 역시 그곳에 어울릴 만큼 맑디맑았다.
들판이나 숲이나 모두 아름다운 봄철이어서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먼저 이 숲으로 가셨다.
함께 뒤따르는 마하테라들 역시 각각의 공덕으로 널리 이름을 드날리는 분들뿐이었다.
마하 사리불 테라, 마하 목 갈라나 테라, 마하 까싸 빠 테라들께서도 계셨다.
여기에 따라간 예 와따 테라는 마하 사리불 테라의 막내 동생이 아닌 다른 이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같이 지내는 대중 스님들이 끼나 예와 따라고 이름 앞에 낀카를 붙여서 불렀다.
위니에 허락한 먹고 마시는 것에 해당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가려내시기 때문에 이렇게 애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위니를 지극하게 존중하기 때문에 같이 지내는 대중 스님들의 존중을 받는 이 마하테라께서 ‘선정에 드는 것’의 부분에 가장 높은 칭호를 받으셨다. 다른 마하테라들 역시 특별한 공덕이 커서 모두 유명하신 분들이었다.
이렇게 숲 속도 즐거움이 넘치고 따라간 이들 역시 매우 존경스러운 분들뿐이었다.
그보다 그날 저녁 무렵의 일이 오래오래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날은 상가 대중이 포살을 하는 3월 보름날로서 서쪽 숲 위로 붉게 빛나는 해님이 턱을 걸치고 있었다.
하루 종일의 책임을 끝내는 시간이었으므로 이 지상에 마지막 노을빛으로 저녁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동쪽 숲 위로는 희고 밝은 달님이 떠오르며 밤으로 건너가는 고즈넉한 시간을 사라 꽃 향기로 싱그럽게 채우고 있었고, 나무 둥치에서부터 나뭇가지 끝까지 모두 꽃으로 만발한 사라나무들이 붉은 가사를 입고 있는 수행자들처럼 모두 환히 빛나고 있었다.
나무 아래는 온통 꽃잎이 뿌려져 있는 것이 마치 양탄자를 늘여 놓고 큰 잔치를 준비하는 마당 같았으며, 벌과 나비들이 꿀을 모으느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은 마치 기분이 좋아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일생 동안 잊지 못할 그날, 그 시간에 특별히 존경하는 두 분을 함께 뵐 수 있었다. 두딴가(번뇌를 털어내는 행)를 행하는 것에 [마하 까싸빠 테라],
신통을 행하는 것에[마하 목 갈라나 테라] 첫째가는 특별한 칭호를 얻으신 두 분이시다.
그 두 분은 하루 종일 고요하게 선정에 드셨다가 나오신 것이리라. 그 두 분이 향하는 곳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 아니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시지도 않았다.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계시는 곳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정황으로 봐서 달리 생각할 것은 없다. 담마의 총사령관이신 그분에게서 한바탕의 법문을 듣는 것이리라.
그 두 분 모두는 제자들이 알아야 할 법들을 모두 깨달아 아셨다.
세상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나 담마에 관해서는 그분들이 모르는 특별한 담마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담마의 잔치가 있으면 그분들이 가시고는 하였다. 수없이 많이 들었던 법이라도 지루함 없이 다시 듣기를 좋아하셨다.
언제나처럼 시간이 있는 대로 천안 통으로 지내던 아누로다 테라도 그분들의 뒤를 따라갔다.
나 역시 예 와따 테라 등과 함께 법회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우리들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오셨다.
“어서 오시오, 아난다 테라님, 부처님 곁에서 시중들고 있는 아난다 테라를 환영합니다.”
자기보다 법랍이 어린 사람이지만 그분께서는 나의 이름 앞에 테라라는 칭호를 붙여서 반기시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은 마하 까싸 빠 테라와는 많이 차이가 난다.
마하 까싸빠 테라께서도 나를 부를 때 테라를 붙여서 부르신다.
가끔 야단치거나 나무라실 때는 ‘이 어린아이가 길고 짧은 것도 모르는구나!’라고도 하신다.
비구가 되고서부터 시작하여 이러한 가장 낮은 꾸지람을 받은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꾸지람을 하셨어도 그분에게 한 번도 서운했던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부르지 못했던 단어를 써서 ‘이 어린아이’라고 그렇게 야단하고 꾸지람을 받는 것도 그분과 너무나도 가까운 처지이면서도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그분의 행을 같이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마하 사리불께서도 ‘테라’라고 붙여서 부르는 것 역시 나에게 가깝고 친밀하므로 그렇게 높여 주는 것이다.
나에게 친근하게 해 주듯이 나 역시 그와 같이 그분들에게 모자람 없이 정성을 다한다.
그분께서 나에게 지극한 사랑을 주시는 것에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부처님을 시중들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 직접 믿고 의지하실 만큼 지혜가 큰 제자로서 나 역시 의지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제자가 되려고 오는
어린 사미나 젊은 비구들을 그분께 보내서 계를 받게도 한다. 그와 같이 그분께 제자가 되려고 오는 어린 사미나
어린 비구들도 나에게 보낸다. 계속해서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친밀한 모습을 증거를 들어서 보여주리라.
어느 때 왜 살리 수도에 브라만 한 사람에게 가사 한 벌이 있었다. 그 가사는 보통 가사가 아니었다.
금화 일천 냥에 해당되는 값어치를 가진 가사였다. 비싸고 값나가는 가사를 그 브라만은 다른 이와 다르게 보시하고 싶었다.
네 가지 물건을 올리는 신도들은 부처님의 손에도 올리고 상가에게도 보시한다.
그러나 삼보가 있었으므로 부처님과 상가에는 여태까지 해 보았으니 이번에는 법의 보배에게만 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법보(담 마야 다나)라는 것이 부처님과 상가 대중들처럼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 딱한 이가 보시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브라만은 부처님께 가서 여쭈어야 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브라만이여! 법의 보배(담 마야 다나)에게 보시하고 싶거든 법에 관해서 보고들은 것이 많은 비구 한 사람을 골라서 보시하라.”
“보고들은 견문이 많은 비구를 가르쳐 주십시오.”
“브라만이여! 나 여래가 가르쳐 주기를 원치 않노라. 비구 상가 대중에 가서 물어보라.”
보시받을 이를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지 않고 비구 상가 대중이 선택하도록 넘겨주신 것이다. 그래서 담마의 보배를 공양하려던 가사 등의
공양물이 나의 손에 이르게 되었다. 법의 가르침을 모두 수도 없이 외워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금 일천 냥의 값어치에 해당되는 매우 부드러운 가사를 나의 몸에 걸칠 수가 없었다.
나의 몸에 걸치는 것보다 부처님의 오른팔이신 그분이 사용하시는 것이 더욱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운 것은 니 싸기 빠쌔이띠야 금계(허물도 되고 받은 물건도 버려야 하는 계)였다.
비구들에게 위니에 허락해 놓은 가사가 아랫 가사(5조), 윗 가사(7조), 두 겹 대가사, 비옷 가사, 더러움이 묻지 않도록 입는 속옷, 침대 깔개, 얼굴 닦는
수건, 필요한 곳을 꿰맬 수 있는 곳에 사용하는 천조각, 이렇게 9종류가 있다.
그 9가지 가운데 서원을 세울 만큼의 가사는 서원을 세워 놓아야 한다.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자기의 물건이라고 자기 스스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받은 가사는 서원을 세워야 할 것이어서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서원을 세우고 입던 가사들이 있었다. 서원을 세우지 않고 적당한 곳에 두었다가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가사를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에게 좋은 것이 생겨서 그분에게 올린다는 것은 얼마나 흐뭇해지는 일인가!
그런데 그분이 왜 살 리의 꾸따 가라 정사에는 안 계신다.
지금 사께다 도시에 계시는 것이다. 이 어려움을 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은 부처님뿐이었기 때문에 부처님 앞에 가서 여쭈었다.
“아난다여, 사리불이 얼마나 있으면 돌아오느냐?”
“부처님, 오늘부터 9일이나 10일이 되면 도착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확실하게 대답 올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분께서 여행을 떠나실 때마다 나에게 소식을 주시고는 가셨다.
직접 말씀하실 기회가 없으면 다른 비구를 보내서 알려 주셨다.
서로 다른 곳에서 안거를 지내더라도 돌아오는 날짜를 먼저 출발하는 비구에게 언제나 전해 왔었다.
그분은 약속 날짜를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약속된 날을 내가 분명하게 말씀드린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비구는 가사 일이 마친 까티나(음력 9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자발적으로 올리는 공양 행사) 행사를 제외하고 열흘 동안 남는 가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보다 더 오래 가지고 있는 비구에게는 그 물건을 버려야 하는 허물(빠쌔이띠야)을 지운다.”
마하 사리불 테라로 인해서 처음에 정했던 계율을 고쳐서 약간 느슨하게 해 주셨다.
서원을 세우지 않거나 그렇게 하지 않은 옷은 모두 계율로서 남는 가사라고 부른다.
지금 고신가 사라나무 숲에 법을 들으려고 오는 분들은 이러한 계율을 목숨과 같이 존중한다.
그래서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나와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가깝기 때문에 안거 햇수가 많은 마하테라들보다 먼저 나의 견해를 물으시는 것이었다.
“아난다 테라여!
고신가 사라 숲은 매우 고요하다.
밤은 허물없이 깨끗하게 맑고
사라나무 역시 가지마다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었으며
향기는 부드럽게 날리는구나!
이러한 시간, 이러한 때
이 고신가 사라나무 숲을 어떠한 비구가
그 고상함을 더할 수 있겠는가?”
오늘 밤 담마의 잔치는 이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항상 깊고 깊은 법의 성품을 그분께서 직접 자세하고도 넓게 구분해서 설하여 주셨다. 아무리 자그마한 부분이라도 그냥 넘기시지 않고 고르게 구분하셨다. 오늘은 한분 이서 설하시는 법회 대신에 법회의 원탁 둥근 자리 하나가 생겨났다.
오는 대로 높으신 마하테라들 모두가 이 법의 잔치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향기를 아름답게 보태주도록 모두가 참여해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 진행의 책임이 먼저 나의 머리 위에 이른 것이다.
그 친밀함 때문에 나에게 우선으로 주었던 책임을 나 역시 공손하고 정성스럽게 진행해야 하리라.
그래서 그분께 두 손을 높이 들어서 합장 올리고
“마하테라 님,
고신가 살수 숲의 고즈넉함을 능가할 수 있는 수행자는 법에 관하여 보고 들은 견문이 많은 비구입니다.
아홉 가지 조건을 갖춘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잘 간수할 수 있는 비구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이 처음, 중간, 끝의 세 가지가 구족 합니다. 문법으로나 뜻이 완전합니다.
무엇 하나 넘쳐서 빼어버릴 것이 없으며 무엇 하나 모자라서 더 채워야 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들이 닙바나를 체험하는 것과 세 가지 닦아야 할 것(계·정·혜)을 보여 놓았습니다.
그 가르침을 입으로 외워서 기억할 수 있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해서 숨은 뜻이나 드러난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 원인과 결과를 지혜로 깨끗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사부대중이 자세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해 줄 수 있는 것, 말의 진행이 끊어짐 없이 정확하고 고르게 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을 듣는 대중들의 마음에 뜨겁게 일어나는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능력이 있는 비구가 고신가 살수 숲의 위엄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존경하는 만큼 자세하게 여쭌 것이다. 나의 견해를 물으셨기 때문에 나의 수준과 어울리는 법을 말씀드린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신 높으신 마하테라 님들께서도 나의 목적을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입과 마음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같이 지내는 대중들도 저와 같이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르침들을 입과 마음으로 간직하기 때문에 계율에 적당한 행동, 적당하지 아니한 행동을 자세히 구분하여 나눌 줄 압니다.
크고 작은 허물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가르침을 구분할 수 있어서 지계, 선정, 위파사나 지혜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족 하게 따라서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갖추어 말씀드린 것을 그분들도 지극하게 귀를 기울여서 들으셨다. 질문하신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도 자세히 기억하시는 모습으로 비쳤다. 그러나 어떠한 판단은 내리시지 않았다. 맞다·그르다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이다.
이 법회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다음 다른 분에게 바꾸어서 다시 질문하셨다.
“예 와따 테라! 아난다 테라는 그의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와따 테라의 차례로 질문하겠습니다.
이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그 고상함을 어떠한 비구가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지혜에 첫째가는 이’라는 칭호를 받으신 분이 대답하셨다.
“마하테라 님,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고상함을 능가할 수 있는 이는 선정에 드는 습관이 있는 비구입니다.
선정을 기초로 하여서 위파사나를 관찰하는 비구입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숲에 고요하게 앉아서 수행하는 비구입니다. 마하테라 님.”
같이 지내는 대중 스님들도 각자 그의 방법으로 마음 편하게 지내기를 원해서 말씀드리는 것이리라.
이때도 역시 그분은 예 와따 테라의 대답에 대해서 어떠한 판단을 내리시지 않으신 채 아누로다 테라에게 계속하여 질문을 옮기셨다.
“마하테라 님!
눈 밝은 남자가 누각 위에서 큰길을 내려다볼 때 일만 대의 수레라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천안 통의 지혜로 일만 세계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천안통의 지혜를 얻은 비구가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고상함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다.”
아누로다 테라의 목적 역시 같이 지내는 대중들이 따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천안통으로 중생들의 생기고 무너지는 모습, 이야기 전체를 보아서 그러한 윤회의 놀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여서 그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난 고요한 행복을 현재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누루다 테라의 다음에는 마하 까싸 빠 테라의 차례였다.
“마하테라 여러분!
우리 이 교단에는 번뇌를 털어내는 두딴가 수행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수행 가운데 숲에서 지내는 수행, 날마다
걸식하여서 먹는 수행, 누더기 가사만을 입는 빤뚜꾸리까, 세 가지 가사만 사용하는 서원을 세우고 그대로 행하는 때시와리까 두딴가들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두딴가 수행을 자기 스스로 행하고 자기와 같이 행하는 이들을 칭찬할 수 있는 비구가 이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위엄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마하테라 님.”
부처님을 대신하는 이 분의 목적 역시 이 교단을 위함일 것이다.
이러한 두딴가 수행으로 네 가지 사사 시주 물에 좋아하고 탐닉하는 것을 멀리해서 남은 번뇌들도 모두 털어 내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세 번째 가는 큰 제자분의 대답 다음에 차례가 된 두 번째 큰 제자도 대답하셨다.
“마하테라 여러분, 비구 두 사람이 서로 아비담마 법들을 토론하십니다. 한 분이 묻고 한 분이 답하고, 주고받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주고받음으로 인해서 튕겨져 나가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 두 비구의 담마를 토론하는 소리가 쉬임 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그치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러한 아비담마 법을 설할 수 있는 비구가 이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고상한 위엄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하테라 님.”
그 사마디의 도움으로 아비담마 지혜가 예리하여서 몸, 마음이 머무는 곳, 성품 등의 아비담마 법들을 자세하게 구분해서 설하실 수 있다.
한 가지 담마와 다른 한 가지 담마를 섞이지 않게, 듣는 이들에게 지혜의 단계가 높아지도록 설할 수 있으시다.
이렇게 대답한 목적은 그와 같이 예리한 아비담마 지혜로 깊고도 미묘한 법의 성품에 깊이 들어가서 노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통 부분에 있어서 첫째가는 칭호를 받은 그분이 당신의 견해를 말씀드린 다음 이어서 질문하셨다.
“마하 사리불 테라님, 저희 모두들의 생각을 각각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마하테라 님께 여쭙니다.
어떠한 비구가 이 사라나무 숲의 위엄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담마의 총사령관이신 그분의 차례가 되었으므로 단숨에 여쭌 것이다. 그러자 담마의 총사령관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오! 여러 테라님들,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고상함을 능가할 수 있는 비구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도록 할 수 있는 이입니다.
그 비구는 욕망의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나라의 주인인 임금이나 큰 대신들은 가지가지 색깔이 아름다운 옷들이 상자마다 가득 있습니다.
그 왕이나 대신이 아침에 한 번, 낮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옷을 갈아입을 때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갈아입듯이, 법이 가득한 비구도 아침이거나 낮이거나 저녁이거나 자기가 원하는 사마디로 지냅니다. 세간, 출세간 사마 빠띠들도 바꾸어서 들어갑니다.
그러한 비구가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고상함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바라밀 정상에 이르신 분이므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출세간 지혜를 가지신 분들만이 자기 마음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둘 수 있다.
이 높으신 분의 목적도 역시 이전의 마하테라 님들과 같을 것이다.
같이 지내는 상가 대중 스님들도 그와 같이 지혜가 예리해지기를 목적으로 하시는 것이리라.
예리한 지혜로 자기의 마음을 안과 바깥의 대상 있는 곳으로 조금도 따라가지 않도록 하고 사마디 한 가지로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 법을 토론하는 곳에 있는 모든 분들이 각자의 견해를 표현하여 마쳤다.
한 분 한 분의 보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가르쳐 표현하는 것도 전혀 다르다. 자기들이 많이 익힌 것, 자기들 마음과 어울리는 것을 대답하셨다.
이 대답들의 맞고 그름을 누가 구분하겠는가? 누가 가려내겠는가?
이 자리에서는 공덕이 가장 높으신 분이 마하 사리불 테라이시다. 그분의 법을 들으려고 우리들 모두 모였다.
그래서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골라서 선택해 주시면 우리들 모두가 만족해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모두에게 옳고 그름을 구분해서 보여 주시지 않았다.
이 법석에 그분 자신의 견해도 드러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법석에 둘러앉은 모두를 데리고 부처님 앞으로 갔다.
“부처님,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라고 여쭈어야 했다.
“사리불이여! 너희들이 드러낸 모든 것들이 자기 원인에 각각 맞는 것들이다.”
맞지 않는 것, 그른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스승님의 가르침도 들어야 하리.
“사리불이여! 비구는 공양을 마친 다음 고요한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몸을 반듯하게 세운다. 알아차림을 단단히 거머잡고 이렇게 서원을 세운다.
‘나의 마음이 어떠한 대상을 취하지도 집착하지도 말고 번뇌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 이르기 전에는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계속하여 앉는다. 이러한 비구가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위엄을 능가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이 자기의 원인을 스스로 미루어 보아서 맞는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이 교단 전체 비구들에게 직접 해당되는 가르침이 된다.
이러한 가르침이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직접 앉으셨을 때 서원 세우셨던 것이므로, 모든 제자 비구들도 그 스스로의 서원을 세우도록 부처님께서 이끄시는 것이다.
아라하따 팔라에 이르기까지 물러나지 않고 노력하도록 원하신 것이리라.
그러한 목적을 짐작했기 때문에 이 가르침이 고신가 사라나무 숲을 넘어서 널리 퍼지고 있구나!
아난존자의 일기
100. 가장 높은 행복
고신가 사라나무 숲에 있을 때 한 번에 앉아서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곳까지 행할 수 있는 비구를 부처님께서 칭찬하셨다.
그러한 비구만이 고신가 사라나무 숲의 위엄을 더할 수 있도록 감당할 수 있다고 설하셨다.
직접 설하신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는 대로의 뜻을 가져서 그러한 높은 영웅들이 이 교단 전체의 위엄을 능히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직접 본보기를 보여 주셨던 그 길대로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이 지내는 대중들은 노력한다.
노력한 만큼 여행이 목적지에 도착한 이가 나왔다.
그중에 어린 스님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얼굴은 앳되다. 앳된 그들의 얼굴을 보면 교만의 표정은 어디에도 볼 수 없이 원래 그대로 깨끗하고 해맑았다. 맑디 맑은 그들의 마음이 그대로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것이다.
세속 편에서 보면 깨끗한 그들의 일생에 크나큰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건강하고 젊은 몸,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마음으로 장군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능숙해져서 왕이나 대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의 무역업을 물려받아서 명성을 날리는 거부 장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많은 이들과 같이 자기 권속을 거느리고 다복하게 지내려고 한다면 그렇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간 쪽에서의 큰 희망을 버리고 이 교단 안에서 사는 생으로 들어왔다.
그분의 황금 같은 얼굴을 바라보고 그분의 행동을 따라서 물러나지 않는 힘을 모아서 정상에 올랐다.
그들이 올라간 곳에서 갈애가 없는 법을 얻어서 마음속 깊이 행복해진 것이다.
이렇게 갈애를 벗어난 법과 언제나 함께하여 지내는 우리들은 교단의 목표인 꽃이며 기둥이 된다. 갈망을 벗어난 법을 체험하여 갈망을 벗어나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교단에서 온전하게 주고자 하는 특별히 높은 상인 것이다.
이 특별한 상은 특별하게 높은 지혜를 지닌 이들만이 얻을 수 있다. 그 특별한 상을 얻은 일생 동안 마음 편안하고 가장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그 위치에까지 손이 미치지 않는 이들은 이 상과 관계된 일을 거부하는 일만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찾아다니는 이가 바깥 단체나 다른 종파의 무리 가운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단 안에도 있었다.
우리들과 같이 지내고, 같이 먹고, 같이 가고 있는 이 가운데서도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우다이 테라이다.
우리 교단에 우다이라고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가 세 사람 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고향 까삘라로 다녀가시도록 아름다운 게송을 지어서 읊었던 우다이는 살색이 약간 검었으므로 깔루 다이라고 불렀다.
그 깔루다이 테라와 같이 부처님의 좌보처 40분 가운데 들어가는 큰 제자인 우다이 마하테라는 크나큰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마하 우다이라고
구분하여서 불렀다.
지금 말하여 보이려는 이는 여기저기 되지도 않게 빠짐없이 끼어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랄루다이라고 불렀다.
이 랄루다이의 경망스러운 모습이 위타야 계율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큰 계율(빠라지까)에 이르기까지는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여자들과 어울려서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였다.
몸과 손으로 닿지 못하도록 계율을 정하자 말로써 닿고 건드리고는 하였다.
자기 스스로 적당하지 못한 행을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비구들에게도 그 나쁜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있도록 상가 디시 사라는 금계들을 정하셨다. 그 금계를 정할 때 그것을 범한 당사자 우다이를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비유를 들어서 나무라고 야단하셨다. 부처님께서 나무라실 때 그는 얼굴을 숙이고 얌전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어느 누구와도 얼굴을 대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의 나쁜 습관이 그 자리에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를 믿지는 않는다. 부딪혀서 당할 때 그 순간만은 기가 죽어서 숙이고 있다가도 신경초처럼 오래가지않아서 머리를 쳐들고 다니는 위인이었다. 이전에 금계를 정할 때도 저렇게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들이 생각했던 대로 그 신경초 나무는 오래지 않아서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그때는 여자들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담마의 성품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것도 이 교단 내에서 가장 최고의 목표로 삼는 닙바나와 관계된 것이었다.
우리들 모두가 라자가 하에서 지낼 때였다. 부처님과 함께 왤루와나 죽림정사에 머물 때 비구 대중 가운데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도 함께했기 때문에 왤루와나 정사에서 날마다 법회를 열었다. 그날 밤 법회에서 마하테라께서는 닙바나의 담마라는 제목을 가지고 설하셨다.
닙바나의 평온하고 고요한 행복에 관한 공덕을 칭송하고자 오! 여러분들, 이 닙바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들! 이 닙바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여러 번 거듭하여서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잔치마다 끼어드는 우다이가 상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서 질문을 하였다.
사실 말하자면 이러한 법의 성품은 그가 논할 자리가 아니었다. 그의 능력이 미치는 담마의 종류가 아닌 것이다.
닙바나에 관해서 수행이나 수행 체험의 장은 그만두고라도 교학의 성품으로 말하는 것조차도 그가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가 대중 가운데서 그는 용감하게 일어났다.
지혜의 공덕으로 첫 번째 가는 제자이신 그분과 가장 깊은 담마를 주고받으려고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의젓하게 걸어가는 그의 걸음걸이와 싱긋이 웃음 짓는 그의 얼굴은 참으로 이 교단의 영웅 같았다.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는 어린 스님들의 존경할 바가 될 만큼, 부러워할 만큼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적당하지 못한 여러 가지 행동으로, 적당하게 잘 지내도록 부처님의 걱정을 수도 없이 들었던 그였다. 상가 대중 가운데서 심한 나무람을 받아야 했었다.
그래서 이 교단의 울타리 안에서 그의 이름이 초라하게 빛을 잃어야 했고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져야 했다.
그러한 그가 그의 명예를 그의 위엄을 다시 건져 올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노력을 기울이려고 할 때 오늘의 이 법회가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주어지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릴 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었는지 “사리불 마하테라 님, 닙바나에 느낌의 성품으로 느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느낌으로 느낄 것이 전혀 없는 닙바나에 행복함이라고 있겠습니까?”
그분의 앞에 두 손을 높이 올리고 공손한 자세로 조목조목 구분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높이 올린 합장은 지극한 존경심을 분명하게 보이려는 의도뿐이었다. 그의 속셈은 그의 이 질문으로 그분의 명성을 땅에 던져버리고픈 것이었다.
느낌이라는 것은 행복, 고통, 평등심,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닙바나에 이 세 가지 느낌으로 어느 한 가지 느낄 것이 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설법 도중 대중 가운데서 ‘이 닙바나가 행복하구나!’라고 읊으신 것이다.
지혜제일의 공덕 칭호를 지니신 그분이 그때에 그릇되었는가?
상가의 수많은 대중 가운데서 지혜제일 사리불 마하테라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리라고 기대하는 그의 얼굴은 고소하다는 듯 미소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이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경쟁하려 들지 않던 그분에게 지금 그 용감한 경쟁자가 승리를 거두기 직전이 아닌가?
이렇게 승리한다면 그의 땅에 떨어진 명예를 다시 거두어서 추스를 수 있을 것이다.
무너지는 무상의 성품으로 떨어졌던 그의 이름이 이다음부터 밝게 빛나는 이 교단의 영웅으로서 명성을 드날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조금도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중요한 지점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던 그의 질문이 그분의 어디에도 가서 머물 곳을 얻지 못한 것이다.
딱딱한 대추나무에 가서 쪼아보았으나 대추나무 껍질조차 긁어주지 못한 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당치 못한 곳을 쪼아서 주둥이만 부러질 지경이었다.
“우다이 테라! 닙바나에 느낌으로 느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행복함이 된다.”
신중하지 못한 딱따구리에게 대추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래의 굳건한 성품을 보여준 것이다.
우다이 테라가 이해한 행복한 느낌의 성품은 세간의 행복이다. 법수로 말한다면 행복한 느낌을 얻는 것을 말한 것이다. 느끼는 상황으로 행복, 고통, 양극단에 치우쳐 기울지 않는 평등 심이라고 세 가지 종류를 구분해 놓았지만 모든 느낌의 그 뿌리를 조사해보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것은 고통뿐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느낌을 느끼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라고 설하셨다. 그렇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는 순간에 고통의 모습이 드러난다.
많은 이들이 원하는 행복한 느낌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오로지 그 행복함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업에 따라서 즐기고 있는 그 순간에도 고통스러운 느낌이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다.
우빼카 왜 다나라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것으로 보통사람들이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알 수 있는 이들은 그것조차 역시 고통의 성품이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닙바나를 현재 체험하고 있는 도의 지혜, 과의 지혜안에 이 느낌의 마음이 함께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성품이 아니다.
고통이 소멸한 진리에 해당되는 닙바나에 느낄 것, 취할 것, 얻을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그 어떠한 것도 없는 성품을 보이려는 것이다.
이러한 순냐따 성품을 마음속으로 깊이 체험하는 것만이 닙바나의 행복을 이해할 것이다.
느낌이 없는 완전한 행복은 각기 각자 체험하기 전에는 이런가? 저런가? 의심하여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따까 왕자에게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질문을 하여 설하셨던 것이다.
그날 하따까 왕자는 많은 무리들과 함께 우리들이 머물던 나무 아래로 왔다.
그는 태어나는 시간에 부처님 팔에 이르는 기회를 가졌었다.
알라위 국의 그의 부왕과 모후들도 이 교단을 보호하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하따까도 어릴 적부터 부처님을 가까이 모셔왔다. 우리 대중들에게도 자주자주 오곤 했다.
이렇게 부처님과 상가, 두 가지 보배는 늘 가까이서 모셔왔던 그에게 법의 보배는 매우 낯이 설었다.
그래서 그가 바라지 않던 장소에서 부처님을 뵈었을 때 매우 놀라게 된 것이다.
“부처님, 밤사이에 편안하게 지내셨습니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절하면서 입으로 인사를 여쭌 것이다.
그의 인사말에는 놀라운 마음이 잔뜩 들어서 여쭌 것으로 보였다.
“왕자여! 지난밤에 편히 지냈다. 이 세상에 편안히 지내는 사람 가운데 나 여래가 포함된다.”
여쭙는 의도를 알고서 부처님께서 적당한 대답을 하신 것이다.
“부처님, 겨울철의 밤은 지나치게 차갑습니다.
음력 1월이 지나고 2월로 건너가는 지금 같은 계절에 안개나 밤이슬도 두텁게 내립니다.
우기에 생긴 소발자국은 지금까지도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딱딱하고 거칩니다.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는 이 나무의 잎사귀들도 거칩니다.
입으신 가사 역시 너무 얇아서 지나치게 시원하실 것입니다. 지나치게 찬 겨울바람 역시 사방에서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지난밤 편안히 지내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누리시는 행복, 재산의 부귀가 함께하지 않는 편안함에서 생기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쭌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왕자여! 알기 어렵거든 내가 다시 너에게 질문하리라. 나의 이 질문을 너의 뜻대로 대답하라.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거부 장자들이 사는
큰 집들이 있다. 지금 같은 겨울철에는 바깥의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있는 대로 창문을 모두 닫는다.
그 집안에는 튼튼하고 푹신한 침상과 의자들도 있다.
왕자여, 손가락 네 개 겹친 길이의 털이 있는 양탄자들, 순전히 흰색의 양탄자들, 갖가지 보석을 치장해 놓은 양탄자들, 행복의 징조가 있는 오소리
털 양탄자들을 줄줄이 펴놓았다.
침대 위에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천정을 장식하고 바깥으로는 밝음을 가져다주는 갖은 향료 기름으로 불을 켜고 그 집주인의 네 명의 부인들이 그가 원하는 대로 시중을 들어준다.
이 자리에서 왕자에게 질문하리라. 그 부귀의 주인이 편안하게 잘 수 있느냐 없느냐?”
“부처님, 그 부귀의 주인이 편안하게 잘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됩니다. 부처님.”
그에게는 익숙한 일들이어서 하따까 왕자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뜸 대답 올린 것이다.
“왕자여! 너에게 다음 한 가지를 묻겠다. 그 부귀의 주인이 탐심으로나 화냄으로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에 뜨거운 불길이 타고 있다면
그 부귀의 주인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느냐?”
“편안하게 잠들 수 없습니다. 부처님.”
“왕자여, 탐심·화냄·어리석음 등의 모든 번뇌들을 나 여래의 마음에서 완전히 빼어버렸다.
뿌리째 완전히 뽑아버렸다. 처음 시작하는 실뿌리조차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나 여래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세간의 부귀보다 백 배 천 배 더 넘치는 출세간 부귀를 가르쳐 보이신 것이다. 이 가르침을 듣고 나서부터 하따까 왕자의 마음이 바뀌어져 갔다. 젊은 왕자로서 세간의 호사에 탐닉했었다. 자기보다 많은 부귀를 가진 이들을 부러워했다.
이 가르침을 듣고 나서부터 그의 목적이 바뀌어진 것이다.
뜨거움이 있는 세간 부귀 위에 탐닉하던 집착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출세간의 부귀인 세 가지 도(道)와 과(果) 에로 가까이 간 것이다.
일반 왕자로서도 주변 권속이 많던 하따까가 성인 제자(아리야 사와까)가 되었을 때 더욱 많아졌다.
삼보에 관계된 일을 할 때마다 그의 뒤에 500여 명의 제자들이 항상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 역시 능숙하게 이행하였다. 재산이 없는 이에게 아낌없이 보시하고, 마음이 거친 이들에게 부드럽고 소탈하게 말하여서 거두어 갔다.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몸과 마음을 다해서 도와주었다.
자기 자신은 왕이 낳은 왕족이지만 일반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서 교제하였다.
이렇게 교제에 있어 네 가지 일로 힘썼기 때문에 하따까 역시 우리 교단의 첫째가는 칭호를 감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알라위 국에서 첫째가는 칭호를 감당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듯이 발 자라는 나라에서 신도 한 사람이 특별히 높고 큰 상을 받고서 높은 절벽처럼 매우 두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말은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내 귀로 직접 분명하게 들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넘치는 이를 만난 것이 발 자라는 나라 안의 우루왤라 깟빠라는 큰 마을에서였다.
그 마을에는 정확하게 결제 안거 하는 비구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튼튼하게 세워놓은 절이라고는 없었다.
스님들이 이를 때마다 임시로 천막 같은 막사 정도나 세웠던 것이다.
그곳은 희마완따산의 마하와 나 숲의 끝이었기 때문에 나무 그늘이나 대나무 그늘이 매우 두터웠다.
날씨 역시 고르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내기에 넓고도 시원하였다. 그러나 숲 속의 생활이다 보니 부처님께서 따로 지낼 만한 거처가 없었다.
제따와나 정사처럼 간 다꾸 띠(응향각) 같은 건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우리들과 같이 숲 속에서 지내셔야 했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부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정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혼자서 자유롭게 지내시려고 마하와 나 숲으로 가시고는 하였다.
우리들에게는 돌아오실 때까지 이곳에 있도록 말씀하셨다.
항상 시중드는 책임을 맡고서부터 나는 언제나 부처님의 뒤를 바짝 따라다니고는 했다.
더운물 찬물을 필요하실 때에 즉각 대령하고 팔다리를 만져드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옆에서 시중드는 이도 없이 혼자서만 떠나가신 것이다.
혹시나 내가 한 일에 허물이나 없었나 하고 돌아보았지만 그분이 좋아하시지 않을 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혼자서만 떠나가셨을까?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이유 없이 하신 적이 없다. 내 지혜의 힘으로 미리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동안 따뿌싸라는 신도 한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우루왤라 까사 마을에서 이름난 거부 장자였다. 재산이 풍부한 만큼 삼보에 대한 존경심도 또한 대단했다.
보시하는 손이 쉴 틈이 없을 만큼 보시하기를 즐겼다. 그의 신심은 비구 스님들의 고요한 태도를 뵙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자기 몸 안의 모습, 바른 법을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난다 마하테라 님, 제자들이 욕계의 중생들인 만큼 오욕락에 즐거이 빠지고 있습니다. 기뻐하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저희 제자들에게 그 깜마 욕망의 늪에서 벗어난 닙바나라는 큰 법이 거대한 절벽처럼 몹시도 두렵게 느껴집니다.
이 교단의 젊은 스님들은 깜마 오욕락과 함께하지 않는 고요한 법에 깊이 들어가서 지냅니다.
같은 욕계의 중생들로서 일반 사람들과 스님들 사이에 이 닙바나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차이가 심합니다. 테라님.”
그의 마음속의 생각을 공손하게 여쭈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대신 고통에서 벗어난 높은 행복의 법조차 두려워하는 것이다.
깜마의 즐거움만 알고 깜마의 욕망을 함께하지 않는 고요하게 즐기는 맛을 보기 전에는 이렇게 두려워할 것이리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따뿌싸를 내가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볼 때 그에게 불쌍한 일이 되는 그 말이 나에게는 기쁜 일이 되었다.
“이 자리에만 있어라.”라는 명령 때문에 나는 형님과 떨어져서 지내야 했다.
그 명령이 나오지 않았다면 마하와 나 큰 숲에서 형님과 같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가르침 한 가지 정도는 들었을 터이다. 지금은 따뿌싸가 여쭌 말들이 이러한 기회를 줄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선물로 가지고 따뿌싸와 같이 마하와 나 숲으로 따라갔다.
이렇게 찾아가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될까 봐 가는 걸음이 주춤거려졌다.
그 문제를 나 스스로 풀어서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 청하였던 나의 소원인 상 가운데 하나가 어느 한 가지 의심이 생겨서 여쭙고 싶으면 시간에 구애 없이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 아니던가?
얻어 놓은 상품을 그날 내가 제대로 잘 사용하였다. 이렇게 사용한 결과 이 교단에 은혜가 많은 가르침 하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뿌싸가 여쭌 말씀의 선물을 부처님께 올렸을 때
“아난다여! 그 말이 맞다. 나 여래도 삼마 삼 붓다 나나를 얻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였었다. ‘깜마 오욕락에서 벗어난 닙바나가 고요하고 행복하구나!’라고 자꾸자꾸 생각해 보더라도 나의 마음이 번뇌에서 벗어난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없었다.
든든하게 머물지 못하였다.
그 원인을 찾아보았을 때, 내가 깜마 오욕락을 즐기는 것의 허물을 보지 못했다. 깜 마락을 즐기는 것의 허물을 아는 지혜를 거듭거듭 키우지 않았다. 번뇌를 벗어난 수행의 이익과 은혜를 맛보지 못했다. 그 이익을 거듭거듭 의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번뇌로부터 벗어난 곳으로 훨훨 자유롭게 가지 못했다. 단단하게 머물지 못했던 것이다.”
“아난다, 그러한 원인을 찾아서 만났거든 번뇌에서 벗어난 곳으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단하게 머무르도록 해야 한다.
나 여래는 깜마락을 즐기는 허물을 보도록 관찰한다.
깜마락을 즐기는 허물을 보도록 관찰하는 수행을 거듭거듭 키워야 한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조건이 되는 수행의 이익 결과를 취하여야 한다. 그 이익을 자주자주 의지해야 한다.”
그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도 따뿌싸의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렇다. 깜 마락에서 벗어난 닙바나의 큰 법이 크나큰 절벽처럼 두렵게 생각되지 않도록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깜 마락을 즐기는 것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날카로운 칼날 끝에 묻은 꿀 방울을 혀로 핥다가 혀가 잘라지는 고통의 진리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4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부처님께서 고통의 진리를 먼저 설하여 놓았듯이, 고통을 고통이라고 자세하게 구분해서 알아야만 둑카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것이 아니겠는가?
아난존자의 일기
101. 세상 사람들의 법
우리들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만나기 어려운 법 5가지 가운데에 든다. 숫자는 그만두고라도 종류로 만도 헤아릴 수도 없는 벌레, 짐승들과 비교하기도 어려운 행운이 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귀중한 값어치를 지닌 인생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고통 덩어리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생을 시작과 동시에 울음 잔치부터 만나야 한다. 시간이 되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볼 때에도 울음 잔치를 비키고는 볼 수 없다.
강보에서부터 무덤까지도 울음의 구비를 셀 수도 없이 만나야 한다. 이렇게 울고 통곡하는 것마다 차마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둑카(고통)라고 부른다. 그 둑카라는 것은 어느 누구의 얼굴이라도 봐주지 않는다.
고의 원인이 있는 동안은 삶의 종류도 가리지 않고, 지위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적음도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둑카와 만나야 한다.
이렇게 얼굴을 봐주지 않고 누구에게나 해당되기 때문에 진리라고 부른다.
진리가 되는 고통의 법은 다시 거듭 나누어 보아서 알면 벗어나는 고통과 알고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알면 벗어날 수 있는 고통이 마음의 고통이다. 우리들 마음에 자주자주 생겨나는 뜨거운 마음, 저속한 마음, 헝클어진 마음들이 생긴다.
마음의 고통들은 그 스스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창조주, 어느 신통을 부리는 이가 약 한 알로, 주문 하나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탐착 하는 것 한 가지와 부딪히면 고의 원인의 진리가 생기는 이유가 된다.
고의 원인의 진리라는 지극하게 원하는 갈망 한 가지로 원하는 것마다 고통을 비켜나서는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번뇌 업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나는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벗어나는 곳을 알아서 그대로 수행한다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고요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긴 것이 아니라 지나간 전생부터의 갈망으로 얻은 몸과 마음의 결과여서 알기만 하는 것으로는 번뇌에서 벗어난 행복을 얻지 못한다.
뜨거운 열기가 식기 전에는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있는 동안은 차가운 것이다.
아프고 저리고 갈증 나고 허기지고 하는 것이 날마다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 고통들을 받는 곳이 마음과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그 뿌리는 몸과 관계된 고통들이다.
그래서 붓다와 아라한조차도 몸에 관계된 고통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허기를 없애려고 걸식하러 가야 한다.
병이 생겼을 때 적당한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배탈이 났을 때 우빠와 나 테라가 더운물과 설탕 덩이를 올리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결과 업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벗어날 수 있는 만큼은 벗어날 기회가 있다.
그래서 위니 경전에 건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지가지 약을 부처님께서 가르쳐 놓으셨다.
이 교단을 짊어지고 나가는 스님들을 위해서 가르쳐 놓았더라도 신도들 역시 이 약을 사용할 수가 있다.
그와 같이 다른 세상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도 가르쳐 놓으셨다.
중생 세계 전체에서 사람이 지혜로서는 가장 높은 위치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자기 한 사람만으로는 설 수가 없다.
얻어놓은 인생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서로서로 도움을 주면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 간에 관계된 것이 가족이다. 그리고 친지, 친척, 친구 관계가 성립된다. 가족이나 친지, 친척, 친구들과 고르게 화합하여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랑과 자비이다.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보호하고 돌보아 주고 서로 먹을 것을 나누고, 이렇게 하여 자비를 주고받는 관계를 부처님께서 칭찬하시고 격려하셨다.
라자가 하 성안에 살고 있는 장자의 아들 신가라에게 여러 방면으로 사람의 책임과 의무를 설하여 주셨다.
그 가운데 부모와 자식 간에 부모가 해야 될 책임은 불선 업을 막고, 선업을 짓도록 격려하고 칭찬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가르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시키고, 적당한 시간에 유산을 분배해 주는 일이다.
그와 같이 자식들도 부모님을 잘 받들어 모셔야 한다.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아서 진행하고, 가문의 규칙을 지키며, 유산을 받아 잘 늘려서 보호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선업을 지어서 회향한다. 부모와 자식들의 책임과 의무 다섯 가지씩을 고르게 서로 나누어서 이것들을 양편에서 만족하도록 이끌어 나가면 편안하고 행복한 가정에 속할 수 있다.
양쪽 책임 중에 부모님의 책임 다섯 가지는 부처님께서 달리 특별히 당부할 필요가 없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나머지 만족한 것보다 더 보태어 사랑한다. 이렇게 부모가 넘치는 사랑을 자식에게 보내지만 자식들은 그렇게 만족하게 자식의 도리를 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부모 편에서 격려를 해주셨다.
“비구들이여, 브라흐만(천인)이라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이다. 첫 스승도 부모들이다.
부모들이야말로 제일 먼저 공경하고 받들어야 할 높은 천신이며, 가장 먼저 받들어 모셔야 할 공양받을 분들이다.
왜냐하면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의 은혜는 한량없이 크고 크기 때문이다.
어린 자식들을 사람이 되도록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가르치기를 힘들어하지 않는다.
특별하게 아름다운 이 세상을 보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설하여 주신 것이다. 부모 편에서 내려주신 가르침이다.
많은 이들이 브라흐만 천인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밝게 번쩍거리는 몸을 가졌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이 가르침에서 볼 것 같으면 자기 집에서 이렇게 밝게 빛나는 천인들을 볼 수 있다.
위의 하늘에 사는 브라흐만 천인들이 자비, 연민, 다른 이의 행운을 따라 기뻐함, 평등 심이라는 네 가지 법으로 지낸다고 지혜 있는 이들이 말한다.
지금 각자의 집에 있는 브라흐만 천인들도 자식들에게 이 네 가지 법으로 대하고 있다.
학문과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정확한 말로 사람의 지혜를 가르쳐준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겨우 옹알거릴 때부터 한 마디 한 마디 가르치며 기뻐한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부터 동작들을 가르쳐준다. 엎드려서 앉을 때까지, 앉고 서고 걸을 때까지 길고 긴 인욕심으로 지켜준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의 첫 번째 스승이 된다.
우리들이 가는 곳마다 도시나 마을 할 것 없이 동산이나 연못 근처에 천인들의 사당이 있다.
절의 건물이나 암자가 없을 때 우리들은 그 사당에서 하룻밤씩 머무르기도 한다.
그렇게 모시고 받드는 천신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집에 있는 그 두 분의 천인들은 현재 그 다섯 가지 은혜를 직접 주기 때문에 높고 높은 공양을 받을 수 있는 분들이다.
이렇게 부모의 은혜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한편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는 이들을 두렵게 하도록 주의를 일깨우는 게송을 주셨다.
“그들 4형제를 낳고서부터 나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들이 점점 자라는 것을 보고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러나 그들의 아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집에서 쫓아냈다.
마치 돼지를 보고 짖어대는 개처럼 되었다.
고약하게 나쁜 귀신들이 아들인 척 나에게 왔다.
마마라고 쫑알거렸다.
그렇게 더듬더듬 거리던 네가
죽기 직전의 아비를 잔인하게 내다 버렸구나!
일을 시킬 수 없는 늙은 말을 말구유에서 끌어내듯이,
고약하게 나쁜 아들이 늙은 아비를 집에서 쫓아내어
거리마다, 집집의 대문마다 빌어서 먹네.”
“나의 손에 이 지팡이가
아비 말 듣지 않는 네 명의 아들보다 낫는구나!
이 지팡이는 나쁜 소나 개도 막아준다.
어두운 밤에 그것을 앞세워서 갈 수도 있고
웅덩이와 구덩이가 있을 때는 의지가 된다.
별안간 넘어졌을 때도
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다시 일어선다.”
이러한 뜻의 게송을 지어서 늙은 브라만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이가 많아서 늙은 데다가 먹고 마시는 것이 없게 되자 그 늙은 브라만은 지혜 또한 멍청해졌다. 이 짧은 게송도 오랜 날을 걸려서 외워야 했다.
그가 다 외울 때까지 부처님께서도 다시 계속해서 가르쳐 주셔야 했다. 사실 그 늙은 브라만은 재산이 많은 부자였었다.
있던 재산을 그 네 명의 아들에게 모두 주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처지가 된 것이다.
결혼을 시키자 자기 아내의 말만 듣고 아비를 쫓아내 큰 아들부터 차례로 네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래서 남의 집 문 앞에서 빌어먹는 처지까지 된 것이다. 이러한 처지를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 노인은 다행히도 부처님을 뵙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준 게송을 겨우겨우 외운 그는 그것을 잘 사용했다.
그의 아들 네 명이 모두 모이는 모임에 가서 이 게송을 외워 보이자 그의 아들 네 명 모두 두려움에 떨면서 아버지를 다시 모시고 받들게 된 것이다.
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지내는 것에 부모와 자식들 간의 책임과 의무가 있듯이 부부의 책임 또한 부처님께서 설해 주셨다.
남편이 해야 할 책임은,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함부로 경멸하지 않아야 한다. 작은 여자를 두지 말고, 재산을 맡기고, 옷과 장식품도 격에 맞게 사주어야 한다. 그와 같이 아내 역시, 집안일들을 충실하게 해내고, 의지하여 오는 이들에게 음식과 필요한 것을 준비해주고, 다른 남자를 보지 말고, 있는 재산을 조직적으로 잘 간수하고, 모든 일에 능숙해야 한다.
이 책임들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여자를 낮추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전혀 없음을 볼 수 있으리라.
그와 같이 남자에게 특별히 우선권을 주는 것도 없다.
우리 시절의 사정으로는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가서 일거리를 찾는다.
여자들은 흐르는 물을 막는 저수지처럼 벌어오는 재산들이 낭비되지 않도록 잘 간수해야 한다.
이렇게 집안의 일과 집 바깥의 일로 구분되는 것은 있지만 책임과 권리로서는 똑같이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각자의 책임을 다하여 충실하게 지내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더 나아가 사회 전체로 넓혀서 볼 때 스승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이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직접 가르쳐 줄 수 있는 처지가 안 된다. 설사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다른 일을 하거나 돈과 재산을 모으는 일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여기서 자기의 부모와 같은 위치로서 존경하는 스승이 생겨나게 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도 각자의 책임이 있다.
잘 지내도록 가르치고, 학문을 익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며, 자기가 아는 것을 남기지 않고 모두 가르치고, 좋은 기술 있는 친구나 전문가에게 맡긴다.
위험을 만났을 때 보호해 준다.
그와 같이 제자도 책임을 다하며 지극한 노력을 다한다. 여행을 가고 올 때 마중해야 하고, 가르치는 교훈을 잘 받들고, 시중을 들어드리며, 가르치는 것들을 정성 들여서 배운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만의 우선권은 없다.
양쪽을 위해서 설하여 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양쪽 모두에게 고르게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
지혜를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모두 자비와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학문과 지식이 커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들 교단에 들어와서 지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도 계율에 정해 놓은 것이 있다.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의 하인 되는 이를 비구를 만들어 주지 말라.’라는 규정이 있다.
그 집에 대대로 태어난 하인이거나 돈을 주고 산 하인이거나 전쟁에서 잡혀온 하인, 자기 스스로 돈 받고 하인이 된 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 기회가 없는 이들은 비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정해 놓은 것은 우리 교단이 그들에게 연민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쁜 사람들의 나쁜 소원이나 나쁜 바람을 돕지 않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 교단의 위력이 더 커져서 번성해질 때 우리 교단의 번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두 종류 사람들의 책임을 기억하는 것에 주인과 고용인만큼으로 만 설하셨다.
주인의 책임은, 그의 능력에 맞추어서 일을 시키고, 월급을 늦지 않게 주고, 다치거나 병이 들면 치료해 주고, 좋은 음식이 있으면 나누어주고, 적당한 시간에 휴가를 준다.
고용인의 의무는 잠자리에서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고, 주인보다 늦게 자고, 주인의 재산을 훔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고, 주인의 공덕을 널리 알린다.
이 가르침을 설하신 곳이 라자가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을 막론하고 이 책임을 각자 능숙하게 이끌어 나가면 주인과 고용인 모두에게 이익이 많다.
지금 시대뿐만 아니라 다음 후세에도 이 가르침이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번영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그와 같이 친구 간의 서로 교제하는 책임에도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본보기를 들 수 있다. 친구끼리 서로 가져야 하는 책임 다섯 가지는
서로 도와주고, 부드럽게 말하고, 이익 있는 일을 행하여 주고, 자기와 똑같은 위치로 대하며, 말에 대한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끼리 서로 자비와 우정을 가지고 교제하더라도 만나는 이들 마다 좋은 친구와 도반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가짜 친구를 삼가고 진짜 친구를 가까이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가지기만 하고 주지 않는 이, 입으로만 칭찬하여서 먹고 지내는 사람, 원하는 것만 말해 주는 이와 나쁜 일을 하도록 유인하는 이, 이 네 가지 가짜
친구를 멀리 피하여야 한다.
그와 반대로 가까이해야 할 진짜 참다운 친구는, 이익을 주는 이, 좋고 나쁜 일에 함께해 주는 이, 이익이 있는 것만 가르쳐 주는 이, 서로에게 만족하고 사랑을 주는 이다.
세상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우리 출세간을 향하는 교단 안의 생활에서도 이러한 친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막아주는 친구, 자기가 잊어버렸을 때 재산을 보호해주는 사람, 두려워할 때 용기와 기운을 북돋우는 것, 위험을 만났을 때 버리고 달아나지 않는 것, 아들 손자 대대로 까지 자비를 보내는 것, 이 다섯 가지를 주고받아야 한다. 자비를 자비로 갚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친구의 도움과 보호로 재산이 늘어났을 때 자기 스스로도 재산이 없어지지 않도록 삼가야만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재산이 망하는 여섯 가지 종류는 술과 약물을 사용하는 것, 때 아닌 때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것,
축제나 구경 같은 것이 지나치게 많은 것,
노름에 취미를 두는 것,
나쁜 이들과 어울리는 것, 특별히 게으른 것이다.
이처럼 삼가야 할 것을 멀리하고 가까이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을 자세히 설하여 주셨다.
이렇게 설하여 주신 대로 실천하여서 얻어진 재산들이 주인에게 네 가지 상태로서 행복을 줄 수 있다.
① ‘나에게 법답게 노력해서 얻은 재산들이 많이 있다.’라고 생각하여 흐뭇해지는 행복,
② ‘법답게 얻은 재산을 나 자신도 사용하고 보시도 한다.’라고 생각하여서 생기는 행복,
③ ‘나는 다른 이에게 빚을 한 냥도 꾸지 않았다.’라고 생각하여서 생기는 빚 없는 기쁨,
④ ‘법답게 노력해서 생긴 재산들이 있어서 허물이 있는 행동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서 생기는 허물없는 기쁨 등이다.
이렇게 법답게 재산을 얻은 이에게 법답게 얻은 상품 네 가지가 있다.
출세간 행복처럼 영원하게 튼튼한 성품은 없더라도 거칠고 힘든 인생 여정의 피곤함을 걸어온 이에게 잠시 동안 쉴 수 있는 곳이 된다.
서늘한 그늘에서 잠시 쉬어서 휴식을 취한 다음 기운을 차려서 영원하고 튼튼한 출세간의 행복이 있는 곳을 향하여 가야 한다.
이러한 성품이 38가지 행복의 조건을 설한 경전 『밍글라 숟따』에 있는 것들도 이미 잘 알 것이다. 그 앞부분에 ‘나쁜 이들과 어울리지 말고 지혜 있는 이를 가까이 모셔야 한다.’라는 등으로 좋은 이, 선한 이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범을 보여 놓았다.
일반 세상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규범과 그것을 넘어서 법을 듣고 수행하는 곳으로 방향을 돌려서 올라간다.
마지막에 닙바나를 현재 체험하는 일, 좋고 나쁜 세간 법칙을 감당할 수 있는 아라하따 팔라에 이르기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이 교단을 이끌어서 감당해 나가시는 높으신 마하테라 님들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들이 종류로는 다르지만, 닙바나를 체험하는
곳으로 향해서 가는 일 한 가지가 마지막 목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난존자의 일기
102. 새어머니 새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들을 보인 것에 부부가 일생을 함께하는 서로의 예의를 보인 것이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부왕과 모후에게 설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모아 한꺼번에 보이리라.
부처님의 부왕 숟도다나 대왕은 왕좌에서 아라하따 팔라를 얻어서 파리 닙바나에 들어가셨다.
마하 마야 대위 왕비는 룸비니 사라나무 숲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길러주신 어머니 마하 빠자빠 띠 고 따미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 나이가 많아진
그분은 지금은 어머니의 위치보다는 딸의 위치로서 살아가는 것을 더욱 기꺼워하고 있다.
늙어서 쭈그러드는 몸의 고통도 만나야 하지만 그에게 윤회의 고통을 넘어서게 해 준 분에게 은혜를 갚느라고 바쁘다. 부처님에게서 받은 재산인
죽음을 넘어서는 법으로, 비록 늙고 힘이 없어졌지만 가슴속 시원한 행복으로 어떠한 갈애도 없는 편안함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은혜를 주신 아들 부처님께 직접 시중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마음만은 그보다 더한 것을 아무리 해 드려도 모자랄 만큼 고맙고 대견하다.
담마의 성품으로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음을 똑같이 얻었더라도 세상의 형편으로는 엄연히 구별이 지어져서 각각 다른 곳에 거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 빠자빠 띠 고 따미께서는 부처님을 받들어서 모셔야 하는 책임을 그의 딸들인 비구니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으로 대신하고는 하였다.
이렇게 부왕 숟도다나와 마하 마야 대위 왕비가 아들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셨고, 아직 생존하여 있는 마하 빠자빠 띠 고 따미 역시 어머니라기보다는 닙바나의 깊은 법을 알게 해 주신 분의 제자로서의 위치를 더욱 감사하고 있었다.
이런 우리 형님에게 새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나꿀라삐따, 어머니는 나꿀라마따로 그들의 본명은 아니다.
그들이 결혼 초,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나꿀라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의 뜻은 날다람쥐라는 뜻이었다.
그 짐승은 재빠르고 영리하고 용감했기 때문에 그들의 아들도 그처럼 되라는 뜻으로 나꿀라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이름을 지어 주는 명명식 잔치가 아들의 이름을 붙여주는 행사였지만 그날부터 그들도 원래 이름보다는 ‘나쿨라의 아버지, 나꿀라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을 넣어서 부자를 한꺼번에 부르게 된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 역시 아이의 어머니를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넣어서 나쿨라의 어머니라고 부르자 그 주변 사람들도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밧가국의 수수 마라기 도시였다.
그 도시를 처음 세울 때 악어 울음소리를 들은 것을 원인으로 해서 수수 마라기라고 이름했다는 그 도시의 역사가 있다.
바라나시 도시의 이 시 빠 타나 미가 라와나처럼 이 도시 근처 배사 깔라 숲도 짐승들에게 위험을 주지 않는 지역으로 정해 놓았다.
그늘이 좋은 그 숲은 우리들을 위해서 지어 놓은 정사도 있었다.
이 시 빠 타나의 미가 라와나는 사슴 동산으로, 사슴들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먹이를 주는 곳이었다.
그렇듯이 배사 깔라 숲에서도 그곳에 있는 모든 짐승들을 잡지 못하게 하였으며 먹이를 주면서 보호해주는 자연 동물원이었다.
그 도시에 우리들이 도착했을 때 그 두 신남 신녀는 나이가 많아서 늙음에 접어든 지가 한참이나 지났다.
두 사람 모두 나이 칠십이 넘어서 그들의 피부는 거칠게 주름이 늘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 자비는 마르지 않아서 따뜻하고 맑고 부드럽게 넘쳐흘렀다.
젊은 나이처럼 왕성하지는 않아도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서로에게 향하는 그들의 사랑과 자비가 항상 넉넉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수행으로 키우는 높고 고상한 수행(브라흐마 싸리야)의 자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욕정이 넘치는 깜 마락의 종류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 사이의 가족사랑 같은 것이었는데, 경전에 사용하는 단어로 개하시따빼마(한 울타리 안에 의지하고 사는 사랑)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가끔씩 우리들은 웃음을 짓고는 하였다.
그들 부부는 사랑이 넘치는 앵무새가 부러워할 지경이었다.
사실 우리들이 지내는 숲은 그들이 사는 도시와 제법 거리가 멀었다. 우리들처럼 항상 여행하고 다니는 스님들에게는 공양이 끝나고 와서 경행 할
수 있는 거리라지만 그들 부부의 나이로는 제법 힘을 들여서 걸어야 하는 만큼의 거리였다.
그렇지만 그 노인은 날마다 우리들이 지내는 숲으로 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노부인도 함께 따라왔다.
나꿀라와 다른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여서 살림을 차려 나갔으므로 그 둘만이 더욱 같이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절에 도착하면 우선 그들의 아들인 부처님께 먼저 들어갔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부처님께 아들 같은 사랑과 자비로 대했다.
좋은 음식을 얻으면 부처님께 먼저 올리고 남는 것을 둘이서 나누어 들었다.
그 두 노인네의 부드러운 자비심을 생각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아들이라는 호칭을 허락하신 것이다.
새로 생겨난 어머니 아버지가 그들의 아들 부처님에게서 법문을 듣고 난 다음에는 절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나뭇잎을 쓸어낼 일이 있으면 한 사람이 빗자루로 쓸어 모으고 남은 한 사람이 나뭇잎을 소쿠리에 쓸어 담는다.
풀이 우거져 있으면 호미와 괭이로 뽑아내서 깨끗하게 치웠다.
상가 대중 스님들이 마실 물이 없으면 두 사람이 항아리를 마주 들고 가서 물을 길어다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아들 부처님이 그들의 마음을 키워주듯이 아들 부처님의 제자들 역시 그들의 심장에 힘을 더해 준다고 했다.
절실한 신심을 가진 안타 장자와 절 어머니 위사카등이 신심으로 첫째가는 칭호를 받았지만 아나타 장자의 부인이나 위사카의 그 남편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새어머니 아버지는 그들보다 선업이 두텁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절에 가서나 부처님을 뵈러 가는 것에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지 않은 그들 부부는 만약 특별한 칭호를 받는다면 두 사람이 똑같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따와나 정사를 지어서 보시한 아나타 장자와 뽁빠란마나 정사를 지어서 보시한 위사 카 절 어머니가 신심으로 첫째가는 칭호를 받은 것은 공양, 가사, 절, 약 이 네 가지 물건을 다른 이들보다 많은 신심으로 아낌없이 보시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새어머니 새아버지가 첫째가는 특별한 칭호를 받는 것은 공양이나 가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부드럽고 선량한 사랑과 자비만 관계된 것이었다.
“부처님! 제자들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함께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을 다하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대되는 것은 몸으로는 그만두고라도 마음으로 조차 허물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애도 저희 두 사람 인생을 죽을 때까지 기쁘게 화합하기를 원합니다.
다음다음 생의 윤회 가운데서도 언제나 지금처럼 함께하기를 발원합니다. 부처님.” 조용조용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그윽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먼저 여쭈자 어머니 역시 그의 발자국마다 따라갔다. 얼마나 자비롭고 진실한 분들인가!
그 자비와 진실이 샘물처럼 넘쳐흐르는 소리를 듣고서 갑자기 부처님의 가르침 한 구절이 떠올랐다.
“비구들이여,
가장 적게는 손가락 퉁기는 짧은 순간만의 생애라도
나 여래가 칭찬하지 않는다.
비유를 들자면 아주 조금인 적은 양의 배설물도
그 냄새가 고약하듯이
손가락 한번 퉁기는 짧은 순간의 생애라도
모두 고통뿐이다.”
그들이 지나치게 사랑하는 아들 부처님께서는 생애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짧더라도 설사 손가락 한번 튕기는 극히 짧은 순간의 생애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생이라고 얻으면 아무리 짧더라도 모두 고통뿐이라고 정확하게 확정 지어서 말씀하신 것이다.
잠깐만 생기더라도 생이라는 것은 고통이 되는 것임을 배설물에 비유하셨다.
지금 그분의 어머니 아버지가 이러한 생을 원하고 있다. 금생뿐만 아니라 다음다음 내생에도 언제나 함께 손잡고 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소원이 그들의 아들 부처님의 말씀과 반대가 되지 않는가?
“오! 신남 신녀들이여,
아내와 남편 두 사람이 금생에도 일생 동안 웃으면서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다음다음 윤회에서도 언제나 함께 손잡고 가기를 원한다면, 두 사람 모두 신심이 같아야 한다.
지계를 잘 가지는 것도 같아야 하고, 보시하는 것에도 같아야 한다. 지혜 역시 같아야 한다.
그러한 부부들은 원하는 소원이 구족 할 수 있다.……”
그 자리, 그 순간에 생겨난 문제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풀어지게 된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설하신 이 가르침이 실제 진리와 명칭으로 진리를 갈라서 구분해 준 것이다.
실제 진리로서 우리들이 얻은 생애는 고통의 진리(둑카 삿짜)이다. 아무리 짧더라도 좋은 것 없이 나쁜 것뿐이다.
부처님의 은혜 공덕으로 우리들이 고통의 진리를 고통의 진리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진리를 우리들이 빼어버릴 수는 없다.
빼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지혜로 구분해서 그렇게 알아야 할 법인 것이다.
고의 진리를 고의 진리대로 안 다음에는 우리들이 이 진리의 영역에서 명칭으로의 진리가 무너지지 않게 그대로 계속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의 으뜸이신 붓다라는 것은 사실 ‘명칭의 진리’이다.
우리들의 이 교단에 들어온 비구들도 사목 띠 상가(명칭 상가)들이다. 부처님의 명령으로 정해 놓은 비구들이다.
부처님의 명령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을 정성스럽게 따라야 한다.
위니 계율에 있는 대로의 책임 역시 능숙하게 행하여야 한다.
그와 같이 신남 신녀 쪽에서도 명칭 진리(사목 띠 삿짜)로서 정해 놓은 규범이 있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지내야 하기 때문에 행하여야 할 책임이 각자에게 있는 것이다.
이 책임이 무너지지 않도록 잘 실행하여서 부부로서 평생 동안 좋은 길을 함께 실행하여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이 가르침은 가정을 가진 이들 모두를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들어오지 않더라도 이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일생 동안 웃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부부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 가르침이 명칭 진리(사목띠 삿짜) 영역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음만을 가르쳐 놓았다.
이 가르침으로 실제 진리 영역으로까지는 말라버려서 갈 수가 없다.
진리 두 가지의 영역을 자세하게 구분해서 이해한다면 두 가지 진리 모두를 반대편이 아닌 친구 편으로써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 나타난 부모들이 그들의 아들 부처님께 첫째가는 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받았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 부부가 세세생생 함께하려는 친밀함을 여쭈었기 때문이다.
이 본보기를 미루어서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서 명칭의 진리를 실제 진리와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신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다.
부처님께 친밀함을 여쭈었기 때문에 첫째가는 칭호를 얻었던 아버지가 친밀함으로 “그의 몸을 ‘나(아따)’에 섞지 말아라.”라는 담마를 듣는 기회를
얻었다.
우리들이 배사 까라 숲 속의 절에 머무는 동안 언제나 오곤 하시던 아버지가 며칠 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우리들도 수수 마라기 도시로 걸식하지 않고 주변의 마을에서 얻는 대로 만족하게 지냈다. 우리들이야 얻는 대로 만족하게 지냈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흔들흔들 몸을 지팡이 하나로
받쳐가면서 우리들이 있는 절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 아버지가 불만족해하는 것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더구나 깜마 오욕락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날마다 뵈러 왔던 아들 부처님의 얼굴을 뵐 수 없어서였다.
먼저 얼마 동안은 그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몸이 함께 해주었다. 아들 부처님을 날마다 뵙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의 몸이 따라주었던 것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은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이 팔십이 가까워지고 날씨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그는 침상 위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아직 죽어야 하는 업이 이르지 않았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일어났다고는 하나 그전처럼 건강할 수는 없었다.
목욕도 할 수 없었지만 아들 부처님이라도 보려는 일념으로 주춤주춤 걸어서 온 것이다.
“부처님! 제자가 나이가 많고 늙어서 건강하지 못합니다. 자꾸자꾸 자리에 눕게 되어서 날마다 부처님을 뵈러 올 수 없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상가 높은 분들도 날마다 모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이익을 키우게 할 수 있는 좋은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 힘이 없는 그의 몸처럼 그의 말소리도 띄엄띄엄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정성만을 가득 담아서 사뢰었다. 이익을 많게 한다는 그의 목표는 그의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건강해서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들이 머무는 숲 속의 절로 찾아와서 부처님과 상가 대중 스님들을 모실 수 있는 것이리라.
친아들처럼 사랑하여 의지하고 여쭈어 오는 그에게 아들 부처님이 “그렇습니다.”라고 원하는 대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도님, 이 몸은 언제나 끊임없이 아프고 있습니다.
스치기만 하여도 깨져버리는 새의 알처럼 바깥의 부딪침을 견디지 못할 만큼 살결이 얇습니다.
이러한 몸을 가지고서 ‘내가 건강하다. 내가 튼튼하다. 병이 없다.’라고 어떤 이가 말한다면 그 순간이 지나 그다음 어느 순간에는 그렇게 말한 것은 정신이 나간 미친 이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 가운데 기운이 날만한 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 부처님의 신통이라도 바라는 판이었는데
그리고 사실 그는 바랄만했다.
가장 높이 올라간 마음의 힘을 가진 아들이 그 아버지의 병쯤이야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리라.
아버지에게 전처럼 건강하도록 그래서 편히 지내고 자주자주 찾아뵐 수 있을 정도는 해줄 수 있기를, 넘치는 능력의 일부라도 써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으리라.
그런데 그 무한한 능력을 가진 부처님께서는 그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은 고사하고 이 몸의 허물만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과 자비를 지나쳐 보시는가?
그렇지 않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한꺼번에 말씀하신 그 가르침에서조차 아버지에게 향하는 높고 높은 자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도님,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몸이란 것은 아프지만 나의 마음은 아프지 말아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 부처님의 무량한 자비심으로 뭉쳐진 말씀이다. 만약에 아버지의 병을 신통으로 치료한다면 순간 동안은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피와 살이
말라가는 늙은이의 몸이 이 병을 일생 동안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치자. 그것은 그 아버지 한 사람만 받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될 리는 없다.
지금 설한 가르침은 모든 제자들에게 이익이 많다.
일순간의 병이 사라지는 것 대신에 일평생 편안함이 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의 신통으로 사라지게 하는 병들을 넓게 보면 1,500가지가 있다.
뜨겁게 하고 괴롭히는 번뇌의 모든 병을 잘 치료할 수 있는 가르침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 부처님 앞에서 떠나갔다.
전처럼 존경하는 상가 대중 스님들을 위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찾아가는 것이다. 올 때의 그의 얼굴은 햇볕에 닿은 꽃잎같이 시들어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절름 절름거렸다. 그러나 돌아갈 때의 그는 햇볕을 받던 꽃잎에 비를 뿌린 것 같이 되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도 중심이 잡혀서 자신이 있었다. 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임을 짐작하신 분이 마하 사리불 테라였다.
“신도님, 신도님의 얼굴이 깨끗합니다. 얼굴색이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빛 같습니다.
오늘 부처님 앞에서 높은 법을 들으셨습니까?”
“마하테라 님, 저처럼 친밀한 제자가 무슨 법인들 듣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마하 사리불 테라의 질문을 이렇게 되받아서 질문한 그는 그의 아들 부처님이 내린 죽지 않는 약의 가르침을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렸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얼굴은 생기가 넘쳤다.
웃음 짓는 그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졌지만 즐거워하는 모습은 보기에 아름다웠다.
그의 말속에는 법문을 들은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친밀함을 자랑하려는 기쁨이 배어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거사님, 그러면 부처님께 몸과 마음이 아픈 모습과 몸만 아프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모습을 계속해서 여쭈었습니까?”
“마하테라 님, 그러한 뜻을 알려고 마하테라 님께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이 뜻을 마하테라 님께서 설명하여 주십시오.”
질문이나 대답이 모두 정겹고 경쾌하였다. 이렇게 친밀하게 주고받는 말로써 거사님이 법을 청한 것이다.
그분께 이러한 말까지 나왔으니 법회가 진행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기본으로 삼아서 자세하게 구분해서 설하여 주실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아는 거사가 그 윤곽을 드러내서 청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친밀하게 가까이서 아껴주는 이들의 자비심을 바탕으로 서로 아끼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인해서 나의 마음속은 아주 많이 흐뭇해졌다.
나꿀라삐따 신도가 여쭌 것을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넓게 구분하여 이 몸의 오온을 기본으로 두고 설해 주셨다.
“거사님! 그러면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으십시오.
이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넓게 밝혀주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어둠 속에서 그대로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과 함께 성스러운 아리야 선한 이들을 눈앞에 분명하게 뵙고 있지만 그러나 그 아리야 성인들께서 얻으신 담마를 보지는 못합니다.
성스러운 이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이들의 가르침을 받지도 않고 수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온의 덩어리인 이 몸을 ‘나’라고 하거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해서 붙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집착하여서 붙들고 있기
때문에 이 오온으로 묶어 놓은 몸이 변하여서 무너져 갈 때 걱정 근심으로 통곡하고 탄식합니다.
슬픔이 넘쳐서 마음이 뜨겁게 괴로워합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이 아픈 모습입니다.”
“거사님, 이 세상에 부처님의 밝은 가르침이 널리 밝히고 있어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과 함께 성스러운 선한 이들을 몸의 눈과 지혜의 눈
두 가지로 뵐 수 있습니다.
성인들의 담마를 부분 부분 능숙하게 구분해서 압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실천합니다.
그래서 오온으로 뭉쳐 놓은 이 몸을 ‘나’ 라거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해서 취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집착해서 취하지 않기 때문에 오온으로 뭉쳐 놓은 이 몸이 변하고 무너져 가더라도 걱정하거나 통곡하여 슬퍼할 일이 없습니다.
슬픔으로 인해서 마음이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몸만 아프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모습입니다.”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설하신 이 가르침을 나의 지혜로 다시 설명한다면, 우리 몸에 생겨나는 병들은 적당한 약으로 치료할 수도 있다.
치료하기 때문에 편안함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고통을 잠깐 쉬는 것에 불과하다.
얼마만큼 고치고 얼마만큼 치료하더라도 그중에 하나가 잘못되면 병을 얻게 된다.
전생의 복덕이 매우 뛰어난 바꿀라 테라 같은 분은 이름 붙일만한 병이라고는 앓아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늙는 병, 늙는 병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 일생에 어느 시간에, 어떤 음식 때문에 무슨 병이 생겼다고 자주자주 말들한다.
그러나 그 뿌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시간이 되기 전 그 음식을 만나기 전부터 병의 기초가 시작되고 있다.
32가지 무더기로 만들어 놓은 이 몸이란 모든 병들이 생겨날 수 있는 온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몸에 병이 생겨나는 것이, 생겨나는 것마다 사라지는 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법칙의 길 그대로인 것이다.
그 길대로, 그 법칙대로 따라가는 길에 누구를 슬프게 해야 할 것은 없다. 어느 누구를 갈라지게 하려는 의도는 없다.
어느 누구도 더 보아주거나 우선권을 가지는 이가 있을 수도 없다. ‘나’라는 집착으로 ‘내가 아프지 말라. 나의 남편이, 나의 자식들이 아프지 말라.’라고 원하여도 무아의 법은 무아라는 그의 성품만을 묵묵히 진행할 뿐이다.
이렇게 무아의 성품 위에 지혜가 깨끗해지면 무더기를 두 장으로 나눌 수 있다.
병을 벗어날 수 있는 무더기와 병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더기로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나꿀라 아버지에게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대로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이 몸을 얻은 이후부터 어느 누구도 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몸이, 이 무더기가 병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의 무더기이다.
담마를 깨달았다고 해서 병을 벗어날 수 없다.
법을 알지 못해도 벗어날 수 없다.
결과 업의 고통을 똑같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병을 벗어나는 무더기가 이 물질,
몸과 한 쌍으로 생겨난 마음의 무더기이다.
일찍이 보여준 대로 ‘나’라는 집착으로 ‘내가 아프지 말라.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아들딸들이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등으로 원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따를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될 수 없다.
그때 내 몸뚱이,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아들딸에게 생겨난 병들이 마음에서 다시 생겨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의 무더기 4가지, 즉 느낌, 생각, 의도, 인식 작용 이 모두를 한 가지로 묶어서 쉽게 마음이라고 부른다.
‘나’라는 견해의 집착으로 인해서 생겨난 마음의 아픔들은 원인이 소멸되어 사라진다. 이렇게 마음의 아픔들이 사라졌다고 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생겨나게 한 원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라졌기 때문에 생겨나지 않고 그 스스로 사라진 병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병이 마음을 의지하여 생겨났듯이 사라진 것도 마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병이 없어 원래 그대로 깨끗한 마음 차례가 병을 벗어난 무더기이다.
병을 벗어나지 못한 몸과 병을 벗어날 수 있는 몸들을 나누어서 구분하는 것이 지혜의 영역이다.
우리들이 담마를 지혜의 눈으로 두 가지 무더기로 나누어서 알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결과 업의 고통을 완전한 지혜로 참아야 할 것이다.
“내가 아파야 하는가? 나의 아들, 나의 딸이 왜 아파야 하는가?”등으로 마음의 병들을 키우지 않도록 알아차림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마음의 아픔이 없이 원래 깨끗하고 맑은 마음 그대로 번뇌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도록 익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익히고 닦은 것이 성숙됨으로써 마음의 병이 사라질 것이다.
이 몸의 무더기가 병의 온상이므로 아프더라도 마음의 무더기는 병 없이 그대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수행이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낸다면 마음의 아픔들이 수도 없이 생겨날 것이다. 마음의 병이 많이 생겨난다고 몸의 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픔으로 마음까지 아프기 때문에 그 고통은 두 배, 세 배 더해서 괴롭힐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생애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몸의 고통 위에 마음의 고통이 내려오지 않고 편히 지내도록 이 가르침에서 보여주고 있다.
아난존자의 일기
103. 병이 사라질 때의 약
아들이라는 사상으로 가까이 오는 아버지에게 그 아들 부처님이 높고 고상한 수행(브라흐마 싸리야) 법으로 돌려주는 모습들을 앞에서 말하였다.
그 자비심의 주인공들 이야기를 여기서 거듭 드러내리라.
그들이 지내는 도시에 이르렀을 초기 그들의 진실과 그들의 사랑을 부처님 앞에서 말씀드렸다.
그들의 사랑이 깜마 오욕락을 지나서 더욱 친밀한 한 집에 사는 가족으로서의 사랑임을 우리들이 짐작했었다.
그다음 날마다 부처님께 법을 듣고서 그 두 사람 모두 성스러운 도의 지혜, 바른 안목을 얻게 되었다.
바른 견해를 함께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말라가 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줄어들지도 않았다.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좋아함만 집착하고 아끼는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이다.
깜 마락이 없는 사랑과 자비심으로 서로를 보살펴왔기 때문에 56년 동안이나 서로에게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함께 나눌 수가 있었다.
그 성실하고 지극한 자비심을 갖춘 사랑하는 두 사람 가운데 아내 되는 이의 사랑을 드러내는 기회를 가진 것은 남편이 병이 나고서였다.
이전에 병이 났을 때는 그 스스로 일어나서 억지로 부처님께 갔다가 몸만 아프고 마음은 아프지 말라는 법을 들었었다.
그러나 이번의 병은 그전처럼 며칠 지났다고 회복되지는 않았다. 날이 오래되고 달이 지났다.
아내가 좋은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서 치료해 보았지만 남편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병이 깊어 약의 힘이 발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약 저 약을 썼기 때문에 그의 몸은 더욱 지쳐서 하루하루 힘이 줄어들어갔다.
이번에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의사들이 손을 놓고 돌아갔다.
이 말을 들은 딸과 아들들이 눈물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아들딸들이 헉헉 서럽게 울더라도 정작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슬픈 기색조차 없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입니까?”라고 내가 친근하게 묻자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마하테라 님.”
그녀가 대답하는 말은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좋은 약을 구해서 제때에 먹이고 환자가 먹어야 하는 음식도 직접 만들었다. 통증이 줄어들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해서 시중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잘 간호하더라도 그 ‘무너지는 성품’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만두고라도 어떠한 의사도 손을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갖은 약이나 좋은 것은 다 구해와도 별 차도가 없었던 것이다. 일평생 손잡고 왔던 인생의 동반자가 오래지 않아서 잡았던 손을 뿌리치고 갈 것인가?
이러한 처지가 되자 그 아내는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하여 가슴 가득 울음이 복받쳐서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약 가방을 들고 떠나가는 의사 선생님들에게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서 고개를 돌린 아내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 눈물은 브라흐마 싸리야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자비심 뒤에 숨어 있는 사랑의 갈망, 고의 원인이었다.
이러한 성품을 눈치채고 떨어지기 직전의 눈물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가슴속의 통증을 힘을 주어 막아냈다.
죽어야 하는 성품을 죽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애착의 번뇌 때문에 가슴속에 생겨나는 통증을 참기 어려웠다.
생겨나서는 다시 사라지는 것이 정한 이치이더라도 그들의 아픔은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어떠한 담마로 거둘 수 있더라도 능력을 넘어서는 통증이야 받아야 하는 것, 그 통증 뒤에 새로 생겨나지 않도록, 고통을 받들어 세우지 않는 것만이 그 아픔을 사라지게 하는 길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가슴속에 아픔은 없다. 두 눈에 가득하던 슬픔의 눈물도 스며들지 않는다.
담마의 공덕으로 그녀 스스로 고요하고 평온해진 것이다. 마지막 임종 침대 위에 있는 일생의 동반자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유명한 의사들의 귀한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남은 것은 진실한 자비의 약만이 있었다.
그래서 “오! 나쿨라 아버지, 임종 시가 되어서 죽어야 한다면 집착을 붙들고 죽지 마세요. 집착을 붙들고 죽는 것은 아들 부처님께서 경멸하십니다.
집착 없이 마음 편안하도록 이렇게 생각하세요.
‘나꿀라 어미는 내가 죽고 나면 아들딸들이 봉양할 것도 아니고 집 전체를 빈틈없이 다스릴 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만약 걱정이 되거든 그런 걱정일랑 금방 버리세요.
나는 실 잣는 일에 능숙합니다. 아들딸 자식들을 내가 충분히 먹일 수 있습니다. 집안일을 빈틈없이 다스릴 수 있습니다.
‘나꿀라 어미는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집으로 가서 살 것이다.’라고 만약 생각되거든 그 걱정도 금방 버리세요.
당신이 죽더라도 내가 다른 집으로 가서 남자를 얻어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하여 56년 동안이나 남매처럼 살아왔습니다.
‘나꿀라 어미는 내가 죽고 나면 부처님과 상가 대중 스님들을 모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만약 걱정된다면 그 걱정도 금방 버리세요. 당신이 죽더라도 나는 부처님과 상가 대중 스님들께 더욱 정성을 다하여 모시겠습니다.
그밖에 저는 부처님의 다른 제자들처럼 높고 깨끗한 지계와 사마디가 구족 합니다. 이 교단 안에 도(道)의 지혜, 과(果)의 지혜로써 의지할 곳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나쿨라 아버지여, 죽을 때가 이르러서 죽게 된다면 집착을 붙들고 죽지 마세요.
집착을 붙들고 죽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집착을 붙들고 죽는 것은 존경하는 아들 부처님께서 경멸하십니다.”
환자의 옆에 앉아서 차근차근 말해 주는 사랑이었다. 자비심을 깔고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나꿀라 아버지에게 기운이 생길 말은 전혀 아니었다.
그가 죽고 나더라도 아내 쪽에서 무너지지 않는 모습만 들어있다.
살기 위한 어떤 희망도 주지 않고 마음 편히, 몸 편히 죽는 것만 중시하고 있었다. 특별하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는 것만 중점으로 두고 한 이 말들이 나쿨라의 아버지를 염라 왕의 입에서 건져 주게 되었다.
그전에 그는 “몸만 아프고 마음은 아프지 않게 하라.”는 법문을 들었다. 그 법문 덕분에 요란하던 병의 기세를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아닌 그 몸속에 내가 들어가서 복잡하게 엉키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걱정 없이 지내던 그에게 자기 아내를 위해서 뒷걱정이 생긴 것이다.
한 사람만이 남아서 살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된 것이다.
누가 걱정하든지, 누구를 위해서 걱정하든지, 걱정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고통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아픈 중에 마음이 아픈 것을 보태면 약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아내가 주의를 주는 말을 듣고 마음의 병이 사라진 것이다. 누구를 위하는 걱정 없이 고요한 담마로서만 지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짐이 누르지 않자 몸이 다시 건강해졌다. 먹을 것과 물이 들어가서 다시 건강해진 그가 지팡이 하나만 의지하고 숲 속의 절로 걸어왔다.
그의 아내가 말한 대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친절하고 이익을 주는 법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아내를 얻은 것이 그에게 얼마나 좋은 선업 공덕이었나를 말씀해 주셨다.
나꿀라의 아버지처럼 몸의 아픔 위에 마음이 아팠던 이가 우리들 같이 지내는 대중 가운데도 있었다.
그는 5비구 가운데 아싸 지 테라와 법명이 같은 비구였다. 아싸지 테라의 마음병과 나꿀라 아버지의 마음병은 같지 않았다.
나꿀라 아버지처럼 그 아내의 앞날을 생각해서 번뇌할 것은 없었다.
전에는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세간 선정 사마디를 그 통증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가 하의 왤루와나
정사에 머물고 계셨다. 아싸 지 테라는 까싸빠 장자가 세워서 보시한 까싸빠란마나 정사에서 지냈다.
아싸지 테라가 자신에게 시중드는 비구 한 사람을 보내서 초청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 그 정사로 가셨다.
그 뒤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은 달리 밝힐 필요가 없으리라.
그 절에 부처님께서 들어가셨을 때 아싸지 테라는 침상 위에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누운 채로 존경을 표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아싸 지여, 침상 위에 편안히 있거라. 이쪽에 있는 자리에 나 여래가 앉겠다.”
이렇게 자비와 연민심으로 말씀하시고 펴놓은 자리에 앉으셨다.
“어떤가? 아싸지여, 병의 통증은 차도가 있느냐?”
“차도가 없습니다. 부처님, 통증이 심해지기만 하고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의 물으심에 아싸 지가 사실대로 여쭈자
“어떠한가? 아싸 지여, 너에게 후회의 걱정이나 가슴 편치 않은 것이 있느냐?”
“있습니다. 부처님, 후회의 걱정과 마음 편치 않는 일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지계를 스스로 마음 놓을 수 있느냐?”
“예, 부처님, 마음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후회의 걱정과 마음 불편함이 생기느냐?”
“부처님 이전에 제가 아팠을 때는 제자가 4 선정에 들어서 4선정 사마디로 들숨과 날숨을 고요하게 하여 앉아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병이 났을 때는 그 선정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교단 내에 쓸모없는 이가 되었는가?라는 걱정입니다.
그러한 걱정과 후회의 뜨거움으로 마음이 편치 아니합니다. 부처님.”
“아싸 지여, 이렇게 걱정해서 번뇌 로운 것은 세간 선정을 귀하게 여겨서 수행의 가장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구나 브라만들에게나 생기는 것이다.
나 여래의 가르침에 이 세간 선정은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선정이 비구들의 수행 중 가장 높은 것은 아니다.
위파사나와 도의 지혜, 과의 지혜만이 핵심이 된다. 출세간 수행의 최고 정점이 된다.
그런데 너는 세간 선정을 잃는 것만으로 어째서 후회의 걱정으로 괴로워하느냐? 어째서 마음 불편해하느냐?”
이렇게 부처님께서 아싸 지 테라에게 격려로 거두어준 다음 이 오온 무더기의 세 가지 특성을 얹어서 분명하게 설하여 주시자 그 자리에서 아라한
한 분이 늘어나게 되었다. 마음의 병이 나았으므로 오래지 않아서 일어나 앉을 일만 남았다.
이렇게 다시 소생하는 약을 직접 체험하였으므로 기리마 난다 테라가 병이 난 곳으로 가셔서 구해주시도록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때는 부처님께서 직접 가시지 않고 나에게 대신 가도록 보내셨다.
“아난다여! 네가 가서 기리마 난다에게 열 가지 생각들을 설해 주면 금방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열 가지 생각의 뜻을 직접 열어서 보여 주셨다.
이 가르침에서 산냐라는 것은 지혜로서 자세히 아는 것을 말한다.
① 무상하다는 생각(아닛짜 산냐) : 오온이 영원하지 않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② 무아라는 생각(아나따 산냐) : 오온이 나가 아닌 모습을 분명하게 기억하여 사는 것이다.
③ 불결하다는 생각(아수바 산냐) : 이 몸을 32가지 무더기로 나누어 좋아하고 탐닉할 것이 없는 모습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④ 허물이 있는 것으로 보는 생각(아디 나와 산냐) : 이 몸에 병이 생겨나서 두려운 모습을 분명하게 기억하여 사는 것이다.
⑤ 빠 하나 산냐 : 깜 마락을 즐기려는 생각을 빼어버리려는 생각과, 남을 괴롭히려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 생각이 더 커지지 않고 멈추도록 함으로써 분명하게 기억하며 아는 것이다.
⑥ 위라가 산냐 : 탐심이 없는 닙바나를 현재 체험함으로써 분명하게 기억하여 아는 것이다.
⑦ 니로다 산냐 : 위라가 산냐와 같다.
⑧ 삽 바로 깨 아 나비라 따 산냐 : 세상 전체에 집착이나 탐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지내려는 것으로 분명하게 기억하여 아는 것이다.
⑨ 삽 바상 카레뚜 아니짜 산냐 : 모든 생기고 사라지는 법이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써 분명하게 기억하여 아는 것이다.
⑩ 아나 빠나 사띠 : 들숨 날숨에 알아차림을 밀착시켜서 생기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열 가지 생각들을 부처님께 완전하게 배워서 나는 기리마 난다 테라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자리에 드러누워 있던 기리마난다 테라에게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설해 주었다.
먼저는 시들었던 얼굴이 비 맞은 꽃잎처럼 생기를 찾아갔다. 몸의 아픔 위에 거듭 내려왔던 마음의 아픔이 치유된 것이리라. 마음의 병이 사라지는 것으로 몸의 수명이 길어지고 병이 없어지는 모습을, 다시 활기를 되찾은 기리마난다 테라가 증명해 준 것이다.
아난존자의 일기
104. 정사를 보시한 안타 장자
부처님의 담마의 가르침의 약을 먹고 다시 소생한 이 가운데 아나타 장자도 포함된다.
부처님과 함께 우리들이 있는 때에는 아나타 장자가 날마다 절에 왔다.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듣고 상가 대중 스님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보시하는 것이 그가 날마다 하는 일과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 책임들을 날마다 계속할 수가 없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거르는 날이 많았다.
한 번은 병이 나서 꽤나 심한 지경이 된 것 같았다.
우리들이 여행을 다니다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그의 심부름하는 이가 와서 마하 사리불 테라께 여쭈었다.
절에 직접 올 수 없는 그에게 마하테라 님께서 오셔서 법을 설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불렀기 때문에 나는 뒤따르는 비구로서 정사를 지어 보시한 창건주의 집에 따라갔다.
재산이 엄청나게 많은 그였으므로 약이나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모자라는 것은 없었다.
사왓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들도 그의 옆에 있었다.
그 약과 그 의사들이 그의 몸은 치료할 수 있었다.
4대가 고르지 못한 것을 고르게 되도록 고쳐줄 수 있었지만 마음속에 느끼는 괴로움의 병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받기 때문에 마음의 병이라 말하더라도 그 장자의 마음속에 나쁜 소원이라고는 없었다.
제따와나 정사를 세우면서부터 시작하여 삼보를 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으로 노력했던 장자는 지금 같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앉고 서기가 불편할 때 더욱 부처님 뵙기를 원하고 상가 스님들을 의지하고 싶고, 기쁨이 솟는 담마의 가르침을 날마다 날마다 듣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고 그가 의지하고 싶은 분들이 이 절에서만 자리를 펴고 계시지는 않는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나 마을로 다니셔야 한다.
그래서 원하는 재산은 모두 갖춘 그 장자도 이 소원만은 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원함이라는 것에 거칠고 저속한 것만으로 괴로운 것은 아니다. 아주 미세하고 부드럽고 고상한 바람이라도 그에 어울리게 괴로운 법이다.
원함을 충족시킬 수 없는 마음의 병 때문에 유명한 의사들의 뛰어난 재주와 귀한 약재도 그 효력을 다 펼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장자의 마음의 병을 사리불 마하테라께서 부처님이 주신 담마의 약으로 치료해 주었다.
담마의 약은 장자의 몸에 있는 입으로 넣어줄 수는 없지만 그의 마음이 열리도록 귀에 넣어주어야 한다.
“장자여!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가지십시오. 죽은 다음 4 악처에 떨어질 수 있는 걱정이나 근심을 가지는 이는 삼보를 존경하지 않는 이, 자기의
계행이 무너진 이, 사견이 있는 이가 됩니다. 장자는 삼보에 대한 신심이 커서 동요 없이 믿고 있습니다.
부러지지도 않았고 틈도 얼룩도 없이 깨끗한 자기 계행도 있습니다. 바른 견해도 있고, 바른 생각도 있으며, 바른말도 합니다.
바른 일도 했고 바르게 살아왔습니다. 바른 노력도 있고, 바른 알아차림도 있으며, 바른 선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죽은 다음 4 악처에 떨어질까 걱정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약을 사리불 마하테라께서 먹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은 그분이 주의를 준 것에 불과하다.
부처님과 상가 많은 대중이 머물 수 있는 대 정사를 지어서 보시했던 장자의 마음속에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공덕을 드러내서 칭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약들을 귀로써 마신 다음 장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들이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 병의 절반은 좋아진 것 같았다. 지금 담마의 가르침이라는 약을 의지 하자 그의 병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소따빠나의 공덕이 구 족 한 이에게는 언제 어느 시간이나 삼보와 떨어질 수 없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에 일어난 장자가 그가 사용하던 황금 접시로써 우리 두 사람에게 공양을 올렸다.
공양이 끝나자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공양 축원을 해 주셨다.
장자의 집에서 돌아온 다음 나는 부처님 앞으로 들어가서 마하 사리불 테라가 설하신 것을 전해 드렸다.
“아난다여, 사리불이 지혜가 있구나! 소 따빠 띠 도와 과의 조건을 10가지 종류, 10가지 무더기로 구분하여서 설할 수 있는 것은 칭찬할만하구나.”
이렇게 칭찬하는 소리를 나 역시 기쁘게 들을 수 있었다.
제대로의 약을 만나서 건강해진 장자는 날마다 다시 우리들이 머무는 정사로 올 수 있었다.
정사로 오는 중에 가끔은 다른 종파들이 머무는 곳에도 들리고는 했다. 이 교단 바깥사람들과 만났을 때 법의 성품을 토론한다고 했다.
장자가 그곳에 들러서 주고받는 인사를 하면 그들이 장자여 대답해 보시오. 수행자 고따마는 어떠한 견해가 있습니까?”
“오! 수행자들이시여, 부처님께서 아시는 법을 제가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질문에 장자가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견해가 같지 않고 생각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상의 부귀를 버릴 수 있었던 그들을 존경해서일 것이다.
“장자여, 그러면 수행자 고따마의 모든 법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만두고 비구들의 견해를 말해보시오.”
“비구 스님들이 깨달아서 다다른 법도 저는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묻는 것마다 장자가 거절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포기하지 않고 “그만두시오.“그만두시오.
그러면 장자여, 비구들의 견해를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러면 당신의 견해만이라도 말해보시오.”
“수행자들이시여,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답을 드리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의 법을 듣기를 원합니다. 듣고 난 다음 이어서 저도 대답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다음에 그들의 법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모두가 우리 교단을 치고 들어왔으나 그러나 정작 그들끼리도 서로 화합되지는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이 영원하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과 완전히 정반대로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했다.
이 문제와 같이 그들 무리가 중요하게 여겨서 언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끝이 있고 없는 것, 영혼(지와)과 이 몸이 같은가?
다른 것인가? 중생들이 죽은 다음 생이 이어지는가? 끝이 나는가? 등등이었다.
이러한 문제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붙들고 늘어지는 이가 자기가 붙잡고 있는 것만 사실이라고 억지를 써서 우겨댔다.
다른 것은 모두 그른 것뿐이라고 떠들어대고는 했다.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지금까지 그들 쪽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생각들을 각각 드러내 보였다.
장자가 역시 약속대로 자기 견해를 드러내 보였다.
“수행자들이시여, 여러분들 가운데 한 분은 세상이 영원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제가 맞다 그르다 구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세상을 제가 ‘영원하다. 아니다’로 머리 복잡하게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은 이렇게 억지로 잡고 있는 것 자체가 그릇된 견해가 되는 것입니다.
법수로 말한다면 삿된 견해라고 합니다.
그 사견을 자기 스스로 맞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이가 말한 것을 지혜롭게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면 집착이 생겨납니다.
그 삿된 견해는 언제나 머무는 법이 아닙니다.
그 스스로 생겨나는 법이 없이 위의 두 가지 조건으로 충동 자극해 줌으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원인을 의지해서 생겨나는 결과 법입니다. 원인이 있어야만 생겨나는 것이어서 그 삿된 견해가 언제나 있지는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성품은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견해를 가진 이들은 그 스스로 고통 속으로 들어갑니다.”
세상이 영원하다고 고집하는 이들에게 말한 다음 계속해서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고집하는 이들에게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말해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생각할 것이 있다. 이 세상이 영원하다고 고집하는 것도 완전히 그른 견해가 되어서 사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쉽게 받아들이더라도 다음 한 가지 어려운 것을 만나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생기고 사라지는 법 모두가 영원하지 않다고 설하셨다. 그리고 지금 또 한 사람도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견해마저 무엇 때문에 모두 사견의 범주에 넣어버렸는가? 그렇게 생각되거든 지금 장자의 말에서 그 대답을 찾기 바란다.
이 세상을 영원하다고 하고 싶으면 하고 영원하지 않다고 하고 싶으면 하라. 그 말을 장자가 맞다 그르다 구분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있는 세상을 영원하다 아니다. 하는 일로써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견해 한 가지만을 고집하여
붙들고 있는 것은 마치 날카로운 비수의 칼날을 잡고 있는 것과 같이 위험한 사견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자기의 견해만 맞고 다른 이의 견해들은 절대로 맞지 않다고 하는 말들도 이렇게 꼬집어서 가르친 것이다. 이렇게 영원하지
않는 세상을 영원하지 않다고 집착해서 취하는 나의 견해, 나의 생각, 나의 법 등으로 ‘나’라는 것 한 가지를 무엇에나 앞에다
놓고 견주는 순간에 사견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영원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 위에 지혜를 함께하지 않는 이상은 그 사실인 법이 구해주지 못한다.
사실을 붙들고 싸우고 있는 동안 사견의 손아귀에 떨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절 창건주이자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갖춘 부처님 제자인 장자가 사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않고 가리키는 사견만을 직접 보았던 것이다.
수행의 목적을 잊지 않는 지혜로 사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말해 주고 자신이 직접 체험한 고통이 소멸한 곳으로 올라갔던 모습을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서로 견해가 다른 이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법의 성품을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창건주 장자를 일백 년 안거를 마친 마하테라에 비유해서
부처님께서 칭찬해 주셨다.
법의 성품에 관해서 견해가 청정한 장자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깨끗하게 교제하는 것을 말하리라. 안타 장자의 집은 아름다운 항구에
왕래하는 배들처럼 들고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무역으로 오는 이들도 있었고 친척으로서 오는 이들도 있었다.
주인으로서의 책임 또한 능숙하였기 때문에 그의 집에 오는 모든 친구나 친척들이 주인에게 만족해하였다.
그러나 그중에 이 집안에 일하는 이 한 사람을 그들이 만족하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해 하는 것에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들이 너무 귀여워서 놀리는 뜻으로 생각 없이 부르던 이름 때문이었다.
그 이름이 깔라까니였다. 그 뜻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깔라까니에게 마음으로 저속한 점은 없었다.
마음이 나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자와 어릴 적 친구 사이로 지금까지 그대로 허물없는 사이였다.
마음으로는 나쁘지 않은 깔라까 네가 나쁜 업 때문에 안타깝게도 재산이 모두 무너지는 형편이 되었다.
자기 스스로 다시 회복할 수가 없어서 친구에게 의지하러 와야 했다.
아나타 장자도 어릴 적 소꿉친구를 하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가족처럼 같이 먹고 같이 지내는 위치로 살았다.
오래지 않아서 깔라까니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집안사람이 되었다.
잠깐 와서 머무르는 이들은 깔라까니의 사정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듣기에 곱지 않은 나쁜 이름뿐이었다.
그래서 행운이 없는 이 사람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자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름이란 쉽게 부를 수 있게 붙여진 것뿐이며, 그 이름을 지혜 있는 이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만 이야기했다.
그러던 어느 때 장자가 자기의 논이 있는 마을로 여행을 가게 되자 집안일을 깔라까 네가 모두 맡아서 하게 되었다.
집주인 장자가 없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 날 밤 강도들이 쳐들어 왔다.
깔라까니는 집주인이 없을 때 그의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하느라 밤새 깨어 있었기 때문에 강도들이 휩쓸어 가기 전에 잘 대처할 수 있었다.
집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지휘해서 강도들을 집에서 몰아내고 잘 방어하였다.
집주인 장자가 없었으므로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왔던 강도들이 가졌던 무기들조차 챙길 틈도 없이 모두 버리고 겨우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 그의 능력만이 기본이 되는 것을 장자가 증명해 보인 것이다.
깔라까니에게 좋은 친구로서 잘 대하였던 장자는 그의 자식들에게도 역시 책임을 잘 이행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하나, 딸 둘이 있었다. 딸 둘은 부모님의 일을 잘 이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신심과 지혜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은 그렇지 못하여서 누이들과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었으며 부모의 일을 따르지도 거들지도 않았다.
날마다 그들의 집에는 가사 색깔이 환하게 빛났다. 날마다 법을 설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장자의 아들 깔라는 어느 스님과도 친밀하지 않았다. 이쪽 문으로 스님이 들어오시면 저쪽 문으로 급히 나가고는 하였다.
법문을 설하는 소리조차 그의 귀에는 시끄러울 뿐이었다.
그의 귀에 항상 듣고 싶어 하는 소리는 마작 패 던지는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에 따라서 친구들이 지르는 함성소리뿐이었다.
창건주 성스러운 제자인 장자가 하나뿐인 아들이 즐겁게 노름패를 따라다니도록 허락했는가?
그러나 일부러 허락한 것이 아니라 막을 수도 제지할 수도 없어서 그저 손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나 무역하는 일 등에 자세하고 정확하며 빈틈없이 경영하는 그에게 이 일만은 도저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는 것에 전혀 까닭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들이라는 사랑으로 그것을 덮어두고 있는 것이리라.
막내아들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로 원하는 대로 해 주다 보니 나쁜 일에도 도와주게 된 격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진작 미리 보았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지금은 그 막내아들이 뼈가 굵어졌다.
뼈가 커진 만큼 그가 익혀 온 습관은 오래되어서 빼어버리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제야 그 아들을 억지로 가르쳐서 되겠는가?
고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도리어 그 아버지에게 반항할 것이다. 원래 너무 부드럽게 대한 것은 아이의 어머니 얼굴을 보아서였다.
아들에 대해서 누가 한 마디라도 할라치면 그녀가 한술 더 뜨는 상황이 결국은 이렇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보태 주게 된 것이다.
아들의 기색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그녀는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아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장자처럼 손에 쥔 법이 없다 보니 조금이라도 걱정거리가 있으면 참지 못하고 안달하였다.
그녀의 지나친 보호가 아들을 이 모양으로 제멋대로 만들게 됐다고 친척들이 돌아서서 말하고는 하였다.
설사 친척들이 보기도 듣기도 나쁘다고 한결같이 말하더라도 장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또한 불량한 아들의 허물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부인에게도 또한 연민심이 어린 것이다.
그래서 어미도 눈물 흘리지 않고 아들 또한 마음 불편하지 않을 길을 찾아야 했다.
장자의 지혜로운 생각이 어느 결제 중의 재일 날, 그 윤곽이 드러냈다.
우리들이 머무는 정사에 좀처럼 오지 않던 장자의 아들이 그날은 기본 좋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어른들 아이들 틈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부처님 앞에서 계 지킬 것을 서원했다.
그러나 새로운 지계자 깔라는 오후 법문 시간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구석에 가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일 날 계를 지킨다는 것은 아라한 높은 분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다.
① 다른 이의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
② 다른 이의 재산을 훔치지 않는 것.
③ 저속한 음행을 하지 않는 것.
④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⑤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
⑥ 정오가 지난 이후 음식을 먹지 않는 것.
⑦ 춤이나 악기 등의 구경거리를 보고 듣지 않으며 꽃이나 향수로 치장하지 않는 것.
⑧ 지나치게 높고 화려하며 값비싼 자리에 앉지 않는 것.
이러한 수행을 일평생 행하는 아라한 높은 분들의 행동을 따라서 할 수 있는 시간만큼 정해서 일반 세속 사람들이 지키는 것을 ‘우포 사따’라고 한다.
걱정 근심 없이 원래대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아라한 높은 분들의 행복을 따라 할 수 있는 만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아들은 이러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서 돈 백 냥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가 준 돈을 그의 무리들과 몽땅 써버리고는 다음 재일 날 다시 왔다.
그러나 오늘은 단지 계를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법을 듣는 대중 가운데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재일 날 계를 지키러 온 그는 그날 밤도 절에서 지냈다. 아침 먼동이 텄을 때 우리들과 같이 성안으로 따라왔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올 때와는 전혀 달랐다. 부처님과 대중스님들께 정성껏 존경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들과 같이 따라오는 동안 어느 한 가지 일 때문에 매우 부끄럽고 쑥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가 부끄러워하던 일을 그의 집에 이르렀을 때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부처님과 우리 모두가 공양이 끝났을 때 장자가 돈 천 냥이 들어 있는 자루를 들고 와서 그의 아들 앞에 내려놓았다.
“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절에 가서 계를 지키고 법문을 들으면 돈 천 냥을 주겠다고 아비가 말했었다.
지금 나의 아들이 장하게도 그의 책임을 잘 이행하였으므로 자, 천 냥의 상을 준다. 내 아들아 네가 필요한 곳에 사용해라.”
참으로 좋은 시간에 장자가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이 그에게 얼마만큼 효력을 냈는지 이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전에는 재일 날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의 손에 돈 백 냥을 쥐어주고 나서야 먹을 것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먹는 일이 끝난 것이다.
집으로 오는 동안 자기 아버지가 부처님 앞에서 나에게 돈 천 냥을 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돈을 받고 계 지키러
다닌다고 창피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그에게 그가 존경하는 부처님 앞에서 이 돈 자루를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장자여! 모든 재산과 부귀보다도 백 배 천 배 더 높은 소 따빠 띠 도와 과의 지혜를 장자의 아들은 이미 얻었소.”
장자의 아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움을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뜨거움이 없이 편안한 법이 거리의 불량자인 안타 장자의 아들 깔라의 마음을 충분히 덮어 주었구나!
불법승 삼보에 더할 수 없는 신심과 친밀함으로 지내왔던 이 교단의 아버지인 그의 공덕은 말로 해서 다 드러낼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나타 장자의 전기로써 단원의 막을 내려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거슬러 가자면, 이 장에서 처음에 마하 사리불 테라의 법문을 듣고 병석에서 일어난 모습을 보였었다.
여기에서 우리 대중들에게 날카로운 칼날을 억지로 끌어 잡아서 집착하지 말도록 설명해 주어야 될 것이다.
담마의 공덕으로 장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전에 병이 났을 때는 장자에게 생명의 힘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을 치료하자 몸까지 완쾌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병석의 생명은 겨우 말이나 할 정도였다. 심지도 기름도 모두 다해가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그때에 장자의 집을 방문한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마지막 인사로 성품으로 설하지 않았던 법을 처음으로 설해 주셨다. 당당하게 흐르는
물처럼 줄기차게 설하신 법문을 간략히 추린다면 안으로 마음이 머무는 곳 6군데, 바깥으로 마음이 머무는 곳 6군데, 인식 작용 6가지, 닿음 6가지,
느낌 6가지, 성품 6가지, 오온, 무색계 선정 4가지들과 함께 현재 세계와 미래 세계까지 포함되었다.
간략하게 말한다면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닿는 것마다에 집착을 두지 말고 자유롭게 지내도록 마하 사리불 테라께서 법을 보여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전의 법문 끝에는 웃으며 즐겁게 끝이 났지만 이번에는 끓어 넘치는 슬픔으로 끝맺음을 했다.
법문이 끝나자 장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장자여! 재산을 두고 떠나가기가 어렵습니까?”
장자에게 만족해하는 말 한마디 얻으려고 내가 이렇게 묻자 “재산을 두고 떠나가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부처님과 마하 테라님들을 모시고 깊은 법문을 들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여러 가지 법을 부분 부분 구분해서 설하여 주시는 법문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장자가 사실대로 여쭈자 사리불 마하테라께서
“장자여! 이러한 여러 가지 법을 널리 구분해서 설하면 신남 신녀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교단 안의 스님들만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지금에야 설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하테라 님, 앞으로 일반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법을 설해 주십시오.
세속 사람 가운데도 지혜가 높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듣는다면 이해할 것입니다.”
장자의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정사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우리들은 안타 장자가 명이 다했음을 들어야 했다.
장자가 명이 다했음은 나의 이 기록 역시 끝이 날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뜻한다. 앞부분은 기쁜 일, 힘이 솟는 일을 마음껏 들었으므로 이제 후반부에는 힘이 떨어지는 것도 피할 수 없이 들어야 하리라. 이 앞에서도 슬픈 일을 자주자주 들었어야 했다.
장자가 유명을 달리했더라도 남은 가족들은 우리 교단을 그전처럼 잘 받들었다. 그러나 그 집을 들어설 때마다 반기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내 마음 한쪽 역시 텅 비어버린 것 같이 되었다. 어떤 스님들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했다.
자기들 모두에게 아버지처럼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채워주던 그의 공덕이 지금 그가 없을 때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자를 위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이들 가운데 나 역시 포함되었음을 실토하리라. 주고받던 사랑과 자비가 컸던 만큼 내 마음에 닿는 아픔 역시
컸다. 그러나 그 때문에 생겨나는 슬픈 마음을 그를 위해서 설했던 가르침으로 나의 아픔까지 치료해야 했다.
“장자여! 빈틈없이 잘 엮어서 덮은 지붕은 비를 막아줍니다. 서까래나 벽도 보호해 줍니다.
그렇게 비를 잘 막아주기 때문에 썩지도 낡지도 않고 잘 견딥니다.
그와 같이 마음 하나를 잘 다스리면 몸의 업도 막을 수 있습니다.
입의 업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모든 불선 업을 막아서 삼업이 바르게 머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삼업이 모두 청정한 이의 죽음은 깨끗한 죽음입니다.”
내가 본 것 중에 안타 장자의 삼업 모두가 허물이 될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틀림없이 깨끗하고 선한 죽음이었다.
이 가르침이 나에게는 슬픔을 풀어 주는 한 사발의 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