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2
#예배
일일확진자 1천명에 달하는 이 엄중한 시기에 정부의 방역지침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신앙의 자유와 의무를 지킨다며 굳이 현장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속임수에 의한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죄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정당한 국가의 정책을 대적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의 생명을 보존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도리어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의 신앙고백에서는 이미 4계명에 대한 예외 사유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으며, 구약의 바벨론 포로 시기나 신약의 예루살렘 핍박에 의한 디아스포라 등으로 이미 현장 예배의 예외적 상황에 대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 이웃의 생명을 위해 우리의 신앙의 권리와 의무를 내려놓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이다.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둘의 끝없는 불평불만과 반역을 보면서 어떻게 저럴수가 있느냐고 어이없어 하지만, 사실 그런 패역한 모습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 한층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볼수 있다. 아무리 정부가 국민을 위해 고군분투를 하더라도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든 트집거리를 잡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국민들의 손을 통해 정당하게 세운 국가 지도자를 향해 악의적인 원망과 비방과 저주를 서슴지 않는다. 광야 백성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직접적으로 당하기라도 했지만 한국 기독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한다. 난 그런 한국 기독교가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떤 형벌을 받게 될지가 걱정되고 두렵다.
#20181212
#창조 #진화
자연계에는 인간이 생각하기에 완전한 조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 예외적이고 뒤틀린 것처럼 보이는 여러 현상들이 있다. 그러나 이 현상들은 여전히 왜 그런지 근본적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고, 인류 역사로부터 너무나 자연적인 것이어서 딱히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왜 지구의 자전축은 수직이나 수평이 아니고 23.5도 기울어 있는지, 태양계의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완벽한 원운동이 아니라, 태양과 행성을 두 축으로 하는 타원운동을 하는지, 왜 1년은 숫자상 아름다운 360일이 아니라 365일인지, 그것도 완전한 365일이 아니라 윤년과 윤달 등이 있어서 딱 떨어지는 날 수가 아닌지 등등에 대해서 여전히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조금씩 비트셔서 창조하셨을까? 그리고 그에 대해 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현상들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발견하라는, 말그대로 하나님의 '신의 한 수' 같은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이 어떠한 수의 법칙이나 기하학적 법칙으로 완벽하게(?) 지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모든 자연법칙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추측과 예측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호기심이나 경이로움은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생각도 더 급속하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은 인간이 보기에 너무나 조화롭기 때문에 그저 자연적으로 우연히 그렇게 셋팅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외적이고 이질적인 현상들이 발견됨에 따라서 그게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인간 이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그야말로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깨닫게 된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조차도 억지로 자연적으로 그렇게 생성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알 수 없는 현상으로 인해 제약을 받게 된다.
여전히 과학은 발전하고 있고 더 많은 자연현상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현상이 밝혀질수록, 그보다 더 큰 미스테리도 같이 생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밝혀낸 것이 전부인 양 우주의 모든 것을 밝혀냈다고 자긍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캐내면 캐낼수록 더욱 커지는 미스테리들을 통해서 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20191212
#감사
당연했던 것들이 더이상 당연해지지 않을 때,
가능했던 것들이 더이상 가능해지지 않을 때,
멀쩡했던 것들이 더이상 멀쩡해지지 않을 때,
감사하기.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9장.
#노아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하시며 복을 주신 것은 태초에 아담에게 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지으신 흠없는 세계에 대해서 받은 것인 반면에 노아는 죄악 된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홍수로 쓸어버리신 후에 받았다는 것이다. 같은 명령과 복이라도 상황이 다른만큼 그 분위기나 무게감도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지 못한 중에 동산을 다스렸고 하나님과 교제했다. 그가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한 것은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먹은 죄로 인해 동산에서 쫓겨난 때였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도 아담은 바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아는 자기가 믿고 선포했던 하나님의 전 지구적인 심판을 직접 목도하였다. 자기의 믿음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서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무한하시고 공의로우시며 가공할만한 절대자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땅 위의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을 죽이신 후에 숨을 가다듬으시고 자기에게 새로운 복과 명령을 내리신다. 그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다 하여도 두려워 떨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을 데리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 하나님께서는 산 주위에 경계를 두르시고 그 안으로 아무도 침범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컴컴한 흑암과 빽빽한 구름과 돌풍과 번개를 동반하셔서 크고 두려운 현상으로 시내 산에 임하셨고 백성들은 행여나 저 죽음의 두려움이 자기를 덮칠까봐 벌벌 떨면서 제발 하나님께 간구해 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면하실 정도로 특별히 높이 세우신 모세조차도 그 광경을 보고서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었다고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다. 또한 창세 전 영원 전에도 성자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셔서 그를 산의 바위 틈에 숨게 하시고 당신의 모든 찬란한 영광으로 지나가실 때에 친히 손으로 모세를 가려주셔서 모세가 그리스도의 등만 볼 수 있게 하셨다. 이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모세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조차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늘 집회에 들려 올라 영광 중에 좌정하신 그리스도를 뵙자마자 자기의 추악한 죄가 드러나 화를 당해 망하게 되었다고 두려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왕궁의 모사였던 다니엘은 일행을 거닐고 강가를 거닐다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찬란한 인자이신 그리스도를 목격하자 자기의 모든 인간적인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지고 자기 육신은 곧바로 힘을 잃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혼미해졌던 것이다. 노아와 세 아들들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친근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셨어도 차마 감히 그 앞에서 온전히 서있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런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은 온데간데 없다. 어느 미치광이는 스스로 목사라 참칭하면서 감히 하나님께 까불면 자기한테 죽는다는 참람되고 망령된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이런 망령된 자를 순수하게 하나님께 어리광 피우는 것이라고 옹호하고 쉴드치는 정신나간 것들도 있다. 이것이 정녕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라는 것을 분별하지도 못할 정도로 미혹 된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다투다가 홧김에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한 잡족인은 바로 돌맞아 죽었다. 성령을 속이려 헸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즉시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로부터 한없이 받으신 당신의 신령한 능력을 두고 바알세불의 능력이라 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영원히 사함 받을 수 없는 성령을 모독한 자들이라 책망하셨다. 하물며 한낱 피조물 따위가 불사의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히 까불면 죽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손으로 성령 하나님을 죽일 수 있다는, 두 번 다시 용서 받을 수 없는 성령모독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나 성령모독죄에 동참한 자들도 용서없이 멸하시는 분이시므로, 저 미치광이를 온갖 궤변으로 두둔하고 옹호하는 자들이 당할 심판은 무엇이겠는가. 그 이유가 어찌 됐건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배반하는 자들이므로 영원한 불못에 가는 심판을 받을 뿐이다.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는 자를 옹호한다는 것은 그가 받을 형벌을 같이 받겠다는 서약을 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도 당장에 죽지 않는 것은 우리 죄가 가벼워서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불의하셔서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계속해서 참고 또 참으시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로 죄에 대한 심판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인해서 죄에 더욱 담대해진다. 지금 내 모습이 과거에 비해서 죄에 예민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정도쯤이야 하면서 담대해져간다면 그의 구원의 확신은 아무런 근거도 효력도 없는 헛된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사람의 모든 계획과 마음이 날 때부터 악할 것을 아시면서도 노아와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저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 거기서 인류의 역사를 끊으셔도 되셨을텐데 왜 굳이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것일까.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하와와 뱀을 심판하실 때 당신 스스로께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장구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언젠가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인자의 위치에서 한없이 낮아지셔서 죄로 인해 타락하고 부패한 인성을 입으셔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완악해질 것을 아시면서도 인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대략 3천여년 후에야 1차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다시 하늘로 가신지 대략 2천여 년이 흘렀는데, 단순 비교만 해본다면 앞으로 1-2천년 더 인류가 존속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에겐 장구한 시간이라도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기 때문에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심판주로 오시리라는 언약 또한 확실한 것이다. 그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악한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씻어주셔서 눈감아 주시고 악인들의 패역함 조차도 한없이 참아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