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지식은 어떻게 위험한가?
창3:1-7
성서는 선악과 설화를 통해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악과 금지 명령에 대한 인간의 반역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 금단의 선악과는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정작 이것을 먹었을 때 그 벌로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악과 이야기는 신비하리만큼 단순하고 설화적인 만큼 반직관적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왜 나쁜 것인가? 벌이라는 것이 왜 눈이 밝아지는 것일까? 만일 선악의 지식이 좋은 것이라면 선악과는 금단의 과일이 아니라 추천의 과일이라야 하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이러한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의 중심에 두었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 집니다.
"선악의 지식이 유익하다"면 위의 물음들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은 위험하다"라는 가설을 선택하면 위의 물음들은 조명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선악의 지식은 어떻게 위험한가"라는 물음을 물어 이 가설을 음미하고 선악과 설화의 요점을 추측해 보고자 합니다. 이 가설을 위해 두 가지 논의를 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름은 양면적이다"는 것이고, 둘째, "예수님은 경계를 파괴하셨다"는 것입니다
첫째 논의는 이름의 양면성입니다.
이름은 사용될 때 이분법적이거나 개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의는 하나의 실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품이 들어 있는 보자기를 풀면서) 휴대전화 번호가 홀수인 사람은 눈을 감고 짝수인 사람은 눈을 뜨십시오. 휴대전화가 없는 분은 주민등록 번호에 맞추어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홀수인 분은 눈을 뜨라고 할 때 까지 눈을 감고 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작품을 들어 보이면서) 눈을 뜬 분은 이것을 보는 순간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는 경향성을 갖습니다. 눈을 뜬 분은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쉽게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관점에 일관된 그 이름을 제안할 것입니다. 체계적으로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분은 "플라스틱 상자", 기하학적 마음을 가지신 분은 "연결된 두개의 패널", 미술관에 자주 가시는 분은"예술 작품 박스", 등의 이름을 부칠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이것에 대해 작명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먹만한 돌이 한 패널의 중심에 부착되어 있고 그 돌의 윤곽이 다른 패널의 중심에 그려져 있습니다. 패널의 다른 면들은 순수한 여백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 쪽 아래에는 "materiellimmaterial" 이라는 두 단어가 띄지 않고 붙여져 쓰여 있습니다. 이 작품의 소개문에서는 "물질비물질"이라는 한글 글자들이 띄지 않고 소개된 적도 있습니다. 또 "우순옥"이라는 이름도 보입니다. 이대 서양화과 교수입니다. 이들 말고도 이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무한합니다. 이제 눈을 감고 계신 분은 이것에 대해 들으신 이야기를 가지고 몇 초 동안에 이름을 하나 작명하시기 바랍니다. (몇 초의 쉼). 이름을 지으셨으면 이제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저는 눈 뜬 분의 작명과 눈 감은 분의 작명을 대조하고자 합니다. 눈 뜬 분의 작명은 그 대상에 대한 첫 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 체계 안에 욕망의 구조가 있습니다. 욕망은 많은 요소들 중 가치의 우선 순위도 포함하는 구조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체계로부터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에 사물에 접하는 첫 인상은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체계의 정보처리의 결과입니다. 눈 뜬 자의 작명은 그 첫 인상의 경험을 명사적으로 실체화하는 경향을 갖습니다. 대상 인식에서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의 이분법의 경향성을 갖습니다.
눈 감은 분의 작명은 이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많은 말을 종합하는 경향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말들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방적으로 남게 됩니다. 눈 뜬 분의 작명이 실체적으로 이분법적이라면 눈 감은 분의 작명은 통합적이면서 개방적인 약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이름을 개방적으로 사용할 때 그 사용자는 material과 immaterial의 경계 해체,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 해체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이분법적으로 사용할 때 이 작품은 단순히 하나의 물건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새길 주일학교에는 여러 어린이 친구들이 있습니다. 제가 대화해 본 어린이 친구 중에 성연제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입니다. "성연제"라는 이름이 200년 전, 조선조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요? 그 때 사람들은 "성연제는 양반인가 상놈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 물음이 대부분의 경우 연제에 대한 최초의 물음이었을 것이고 많은 경우 동시에 마지막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연제가 양반인가 상놈인가라는 이분법적 정보이외의 사안에 대해,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고 많은 경우 필요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양반은 얼마나 근거 없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까? 상인은 얼마나 부당한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성연제"라는 이름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합니까? 성별,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출신 성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연제는 어떤 인간관계를 가지며 그 관계에서의 역할을 어떤 성실성으로 수행하는가가 중요해야 합니다. 성연제가 앞으로 어떤 가능성에 열려있는가가 성연제의 이름에 구조적으로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름은 예를 들어 양반인가 상인인가의 이분법이 아니라 가능성에 열려 있는 개방적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름의 양면성 논의를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음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서로가 서로의 부분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렇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이분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서로를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으로 보게 되면서 선명하게 대상화하게 되었고 사물화라는 '눈이 밝아진 부끄러움'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논의는 예수님이 경계를 파괴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시대에 매우 개혁적이셨습니다. 유태교가 중요하게 전수하여 온 중요한 경계들을 타파하셨습니다. 유태교의 구성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일성을 부인하셨습니다. 안식일로서의 토요일과 다른 요일의 차이를 거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창조 질서의 제도인데도 예수님은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안식일의 인간화를 도입하셨습니다. 음식이나 질병의 청결법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경계 타파의 예는 오랜 시간 분석될 수 있고, 많은 말로 조명되어야 하고, 여러 논문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거룩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계 타파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전통적 질서의 구도에 안주하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관점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 질서의 수호를 위해 절제와 자기 희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름의 양면성 논의와 예수님의 경계 해체론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금단의 실과가 된 까닭을 시사합니다. 작명의 방식으로 잠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명명을 해 왔다고 믿습니다. 자연 관계에 대한 명명과 인간 관계에 대한 명명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대상은 그 대상이 이해되는 방식에 따라 그 대상의 이름은 주어집니다. 그 대상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연구의 과정 도상에 있으므로 모든 정보가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의 이름은 개방적입니다. 자연과학의 모든 명제는 그래서 가설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인간 관계의 윤리적 상황에서 인간들은 이름을 이분법적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윤리적 상황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고 이 이분법에 의해 확신을 갖습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대개의 경우 이분법적으로 규정되면서 선과 악을 실체화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많은 도덕적 고정관념은 그래서 이분법적이고 실체적입니다. "전과자", "낙제자", "병신", "바보"와 같은 이름들 그리고 사람을 평가하는 많은 이름들은 이분법적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이름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압을 받습니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선악의 지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은 인간 통합을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태에 대한 모든 관찰이 얻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과학이 개방적인 것처럼 선악의 지식도 인간 관계의 모든 면이 서술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선악의 지식을 이분법적으로 사용할 때 결과되는 것은 억압이고 고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가치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분법적 선악 지식에 의한 인간 소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계 타파의 메시지를 통해 이해되는 선악과 설화의 교훈은 현대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적 같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유엔이 5가지 가족 다양성(양성 부부, 남자 동성 부부, 여자 동성 부부, 독신 가족, 양자 가족)을 오래 전에 선포하였는데도 많은 윤리학자는 양성부부만을 유일한 가족인 것으로 주장합니다. 많은 법학자들이 사형제도를 거부하는데도 어떤 신학자들은 이를 찬성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북핵에 대해 대화와 무력의 옵션들을 유지하고 있음에 반해 많은 한국 교회들은 그러한 대화에 소극적입니다. 경계해체는 일반 사회에서도 저만큼 앞서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많은 교회는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계 해체는 더 말해질 수 있습니다. 문사철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주제를 말하자고 합니다. 물리, 화학, 생물의 전통적 분야들이 새로운 주제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만화와 미술 간의 경계, 사진과 미술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공 서열의 경계, 직급 위계의 경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호적의 가부장제도, 본적의 혈연주의가 해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 따르미들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19세기의 절대주의가 붕괴되면서 20세기 초의 지성들은 '체계 혼란'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20세기 후반에 경계 해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점점 확장되면서 21세기의 사람들은 '인생 혼란'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따르미는 혼란에 빠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간 연대성의 지상명령은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안식일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리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인간 연대성, 모두의 자유를 향한 단일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질서의 지상명령 앞에서 '인생 혼란'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21세기의 문화의 중심에서 이분법적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 인간 연대성의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면서, 도적 같이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준비된 신부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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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원고는 여러 가지 대화를 통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조혜자 자매는 선악과의 이분법, 정경일 형제는 남녀의 이분법, 뚜 웨이밍(杜維明) 교수는 가족 다양성 논제(한국철학회의 다산기념철학강좌, 1997/10/17; Tu Weiming, "Family, Nation, and the World: The Global Ethic as the Modern Confucian Quest," in Social Semiotics, Vol. 8, No. 2/3 (August/December 1998), pp.283- 296)를 말해 주었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필자는 '양성부부가 인간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오랫동안 존중되고 가장 선호된 제도이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다른 형태의 가족 제도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양성부부만을 주장하는 가족 윤리학은 이 믿음이 그 부정을 함축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어야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다른 형태의 가족을 부정하지 않지만 추천도 않습니다. 다만 인정(recognition)할 뿐입니다. 가족 다원주의의 부정 논리는 종교 다원주의의 부정 논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
정대현 목사(새길교회)
첫댓글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