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야기-故 鵲泉을 추모하며, 성실젓갈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은 76년 전으로 거슬러 1948년 4월 12일이고, 태어난 곳은 경북 예천이었다.
과자공장을 하는 부잣집 장손이었다.
그 이전에 우리 선조들은 전라남도 화순 곡성 지역에서 살다가 일제 초기에 먹고 살기 힘들어 경상북도 서쪽이 상주 화북 지역으로 이주를 해서 화전민으로 겨우 목숨을 살렸다 했고, 형편이 나아지자 상주읍내로 나와서 살았다 했고, 일제 말기에 우리 석(石)자 용(用)자 할아버지께서 예천으로 이주하여 일본인의 과자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1945년 8월 15일로 광복을 맞으면서 그 공장을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넘겨받았으나 5년 뒤인 1950년 6월 25일에 동족상잔의 6.26전쟁이 터지면서 영천으로 경산으로 하양으로 청도로 피난민으로 전전해야 했었고, 곧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북진하면서 그 북진에 따라 예천으로 되돌아가다나 모진 한파의 1.4후퇴를 맞으면서 또 다시 피난민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했고, 그 이후로는 전쟁을 겁낸 우리 할아버지께서 아예 대구 비산동에 과자공장을 차려 정착하면서 다시는 예천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고 했다.
우리 집안의 질곡 같은 삶은 그때로부터 시작이었다.
과자공장은 곧 망해버렸고, 살기가 힘들어진 울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내 나이 열 살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나와 두 살 터울로 이어지는 남동생 둘에 뱃속에 아이 하나까지 잉태한 몸으로 친정이 있는 문경군 점촌읍으로 이사를 해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울 엄마 아버지께서 맨 처음 한 것이, 점촌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인 읍내의 문경카도에 작은 가게를 세 얻어 낸 빵집이었다.
힘겨웠지만 돈은 잘 번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빵집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좀 번듯한 사업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았다.
그래서 5톤짜리 트럭 한 대를 사들여서 광산에서 탄도 실어 나르고 산판에서 나무도 실어 나르는 운수사업에 뛰어 들었으나 사고가 나면서 망해버렸고, 상주 은척 쪽에 작은 광산 하나를 넘겨받아서 굴을 파들어 가기도 했지만, 그 또한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지던 광맥이 아예 끊기면서 또 망해버렸다.
그 즈음에 모진 삶을 살아온 서른셋 울 엄마가 병이 들었고, 병든 그 한 해를 버티지 못하고 그해 가을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때가 내 나이 열여덟로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나도 힘들게 살았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더 힘들게 사셨다.
울 엄마 잃고 폭삭 망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여력이 없었다.
허구한 날을 방에만 들어앉아 계셨다.
그때 우리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준 분이 한 분 있었다.
평소 ‘형님’이라고 따르던 분이었는데, 읍내 중심에서 ‘순천당’이라는 이름으로 약방을 하던 분이셨는데, 그 분이 바로 내 중학교 동기동창인 鵲泉 김지수 친구의 아버님이셨다.
경제적인 도움에 대해서는 내 아는 바가 없다.
내 기억하기로는 정신적 의지가 되어 주셨다.
어쩌면 그런 의지가 있어 우리 아버지께서 살아 버텼을 수도 있다.
상주에서 태어나셨고 젊은 시절에 예천으로 이주하셨다가, 6.26전쟁 통에 피난민이 되어 잠시 대구에 정착을 하셨으니, 울 엄마의 친정이 있는 점촌에는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 아버지셨다.
“왜 그 어른에게 형님이라고 하세요?”
내 어느 날 그렇게 아버지에게 물어봤다.
하시는 답이 이랬다.
“내가 점촌에서 가깝게 지내는 분이 그 분 한 분이다. 전쟁 전에 예천에서 같이 살아서 인연이 된 분이시다. 나이가 나보다 몇 살 더 많아서 내가 ‘형님’이라고 불러드린다. 너도 그 어른 뵐 때마다 인사를 잘 드려라.”
두 분의 인연됨을 내 그렇게 알았다.
내가 鵲泉과 남달리 가까워지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인연의 끈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속초 중앙시장의 성실젓갈을 찾아갔다.
아내가 속초를 들렀다 하면, 꼭 찾아가는 집이다.
어언 30여 년 세월이다.
명란젓갈이니 가자미식혜니 해서, 그 집의 젓갈이 특별히 맛있고, 인심 또한 후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스스로 엮은 인연이 아니다.
장모님 살아생전부터 이어져온 인연이다.
“6.25 전에 이북에 있을 때, 같은 동네 살던 사람인데, 가자미식혜를 참 잘하는 집이야. 맛도 그렇지만 인연이 남다르니 나는 이 집만 다녀.”
장모님께서 그렇게 아내에게 인연을 연결지어주셨다.
그 집에서, 나는 우리 아버지와 鵲泉 내 친구의 아버님과의 인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