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위의 그림자 / 심재상 |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 유홍준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길고 귀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다 제 삶이 어떤 건지 한 번 중간 점검해 보는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 가운데 서 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먼지를 한 번 오지게 뒤집어 써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 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 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홀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그림자다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 반시≫로 등단 2005년 제1회 젊은 시인상 수상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 |
모래내 그림자극 / 박준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어느 하루처럼 환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외등을 보면 사람의 몸에서 먼저 달려나오는 것이 있다 오늘도 골목에서 너는 그림자였고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배역을 맡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나와 처음으로 스친 그림자는 담에 널린 담요를 걷어 한쪽 다리가 없는 비둘기를 감싸안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림자는 비둘기를 날려주고 담요를 다시 널어놓았다 그 그림자는 옆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다음 그림자는 비디오테이프의 같은 장면을 서른 두 번 돌려보고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열한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는 울었고 스물 여섯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가 사정을 했다 그림자는 말 더듬는 일을 즐겨 할 것이다 내 그림자가 길게 따라가고 있는 그림자는 언젠가 버스 옆자리에 함께 앉고 싶은 그림자다 다시 말하지만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두운 골목,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노래다, 울지 않으려고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은 하나 같이 고음이다 노래가 다음 노래를 부르고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붙잡는 골목이 모래내에는 많다 1983년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
꿈꾸는 그림자 / 이선애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 박주택
그림자 / 안시아
그림자놀이 / 박선경
|
파내온 나무 그림자 / 강신애 그 나무는 브니엘교회 입구 가지밭 모퉁이에 서 있었다 먼 세상을 내다보는 자세로 산책에서 돌아오는 어느 날 나는 꽃삽으로 나무 그림자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토막 난 그림자를 날라 내 방에 장판처럼 드리웠다 어둔 물관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쪼그려 앉아 나는 습자지 같은 잎새에 혀를 대보거나 갈색 차를 마셨다 그림자는 조금씩 자라났다 가지밭 모퉁이 나무가 그러하듯 제 나무가 그리울 땐 시선을 옆구리 깊숙이 파묻거나 바람도 없는데 나를 떨어뜨릴 듯 가지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길모퉁이 나무는 없어진 제 그림자를 탓하듯 산책길의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 나무 밑에 서본다 그러면 가느다란 가지를 활갯짓하며 내 발치로 고속 촬영하듯 빠르게 나무 그림자가 생겨났다 가로등 환한 밤, 우리는 이렇게 만나곤 했다 1961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 1996년 『문학사상』당선 시집 『서랍이 있는 두겹의 방』 |
그림자 거울 / 김찬옥
해를 등지고 걸어보지 않았으면 보도블록 틈에 피어있는 노란 민들레꽃잎에도 나를 비춰보지 못했을 것이다 풀숲을 기어 나와 아스팔트 바닥을 활보하는 지렁이의 발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광장에서 한가롭게 모이를 쪼고있는 비둘기의 오만한 날개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랫도리로 찬송가를 끌고 다니는 고무장화의 눈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보다 늑장 부리는 발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맹인 지팡이처럼 눈앞에 웅덩이도 더듬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해를 등져보지 않았으면 그림자를 앞세우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전북 부안 출생
1996년 <현대시학> 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2002년 시집 <가끔은 몸살을 앓고 싶다>
2009년 시집 <물의 지붕>
수필집 <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
그림자를 마신다 / 이윤학
장대비 그치고
관악산 삼림욕장 상수리 숲
산책로를 걸었다
약수를 마시고
아욱 쑥갓 텃밭을 따라 걸었다
늙은이들 호박 오이를 따
길가에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남자는 자전거 짐칸에 생수통을 묶고
반백의 머리 숙이고 걸어가고 있었다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앉은 남녀는
번갈아 손금을 보는 중이었다
상수리 이파리들이 떨리고
빗방울이 몇 개 떨어져
빈 개집 합판 지붕을 쳤다
비산농원 울타리
푸른 철사 그물에 빗방울이 맺힌다
물린 밥상머리에 앉아 눈물 콧물
비벼 짜는 네 모습 어른거린다
판자때기에 눌러 쓴 먹글씨.
닭.오리에게 돌을 던지지 마라. 기울어
어린 느티나무 첫 가지에 얹혀 지내고 있다
196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꽃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그림자를 마신다>
구름 그림자 / 신용목 태양이 밤낮 없이 작열한다 해도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 초봄 비린 구름이 우금치 한낮을 훑어간다 가죽을 얻지 못해 몸이 자유로운 저 구름 몸을 얻지 못해 영혼이 자유로운 그림자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등 |
봄 그림자 / 최정례 산천동 간절히 가고 싶었지만 못 갔어요 병이 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는 길인데 연초록의 어린 순을 내민 가로수들이 길바닥에 그림자를 눕혀 놓고 있었어요 나무 어린 그림자 밟고 지나가는데 내 속에 그림자도 막무가내로 누워버리겠다는 거예요 산천동 꽃그늘에 덮인 산동네는 얼마나 처연한 빛을 띠고 있을까요 나도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워 헛소리를 할 수 있다면 그런데 늑대의 털을 걸쳐 입은 내 그림자 벌떡 일어나더니 어리고 생생한 잎을 먹어치우고 그것들 헤치고 달렸어요 달리는 버스 지붕 길가에 조그만 상자까지도 다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었어요 모르는 척 마구 밟고 갔어요 영혼이라는 게 있을라구요 상자곽 같은 게 무심코 흔들리는 나무가지 같은 게 빌딩 꼭대기에 약간만 석양이 남아 그 위를 붉은 구름이 더돌고 아이는 계속 열이 올랐어요 그림자 점점 자라 한 저녁을 덮어갔어요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0년「현대시학」에 시「번개」등으로 등단 김달진 문학상, 이수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으로『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등 다수 |
그림자들 / 이원 바닥은 벽은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그림자들은 등이 얼마나 아플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는 그림자들의 힘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한 사내가 또는 한 아이가 난간에서 몸을 던질 때 미처 뛰어오르지 못한 그림자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몸은 허공 너머로 사라졌는데 아직 지상에 남은 그림자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1992년 계간『세계의 문학』가을호에「시간과 비닐봉지」외 3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데뷔 1996년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2001년『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2007년『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현대시학 작품상(2002), 현대시 작품상(2005) 수상 |
흘러 다니는 그림자들 / 신지혜 사람은 없고 사람 그림자만 돌아다닌다 그림자들이 검은 자루처럼 밑으로 쳐진다 혹은 고무줄처럼 자유자재로 늘어나기도 하고 형체를 바꾸기도 한다 벽이나 문지방에 붙어있기도 한다 가만히 보라 이슥한 저녁, 주체할 수 없어 쓰러지는 벽들을 떠받치는 것들은 모두 그림자들뿐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인들 몰래 서로 몸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은 모른다 혹은 주인이 잠자리 들 때 몰래 탈출하기도 한다 그림자가 출몰하는 곳에선 늘상 그림자들끼리 주인을 팔아치우기 위해 암거래가 이루어진다 보았는가 거리를 떠도는 그림자들은 동작이 민첩하다 그림자들은 모의하여, 자신의 주인을 멀리 추방시키기도 한다 한때의 권력이 되었던 주인은 위기의 벼랑 앞에서 최후의 목격자인 자기 그림자 앞에 두 무릎을 꿇을 때 있다 지금 네 옆을 돌아보라 그림자들이 침묵으로 네게 반란한다 서울 출생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대시학 》제5회 신인작품공모로 등단 제3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 전, <시와 뉴욕> 편집위원 재미시인협회, 한국 문인협회, 미동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뉴욕 중앙일보 컬럼니스트 한.영 대역시집'New York Poetry'(미동부한국문인협회 간) The Famous Poets Society' U.S.A (2001) New Millennium Poet '로 선정 시집 『밑줄 』등 |
그림자
박재연
그늘진 곳이면 어디든 따라나서는
바닥만 고집하는 낮은 사람
수저를 들다 말고 문밖의 당신을 바라보면
충견처럼 내 신발을 품고 엎드린다
그가 있어 세상은 낯설지 않고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에 힘이 실린다
눈물 글썽이는 젖은 상대를 만나면
슬그머니 물러나 몸을 감추지만
뙤약볕으로 이글거리는 상대를 만나면
자신을 더욱 분명히 하는 사람
그도 나처럼 나이가 들어
키가 줄어들고 허리가 뚱뚱하다
오늘은 늙은 그가 나를 데리고
팔이 부러진 목련에게 문병 가자고 한다
그가 말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의 충견이 되어 몸을 일으킬 때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그의 뒤를 따라나선다
—시집『지네』(2015)에서
-------------
박재연 / 강원 인제 출생. 2004년 《강원작가》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쾌락의 뒷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