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족오 -
태양에 까마귀가 산다는 신앙은 《초사(楚辭)》 《산해경(山海經)》에서 볼 수 있는데, 세 발 달린 까마귀 설화는 전한(前漢) 시대부터 시작된 것 같다. 고유(高誘)가 쓴 《사기(史記)》나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태양이 하늘을 건너가기 때문에 조류와 관련시킨 얘기는 이집트나 한국의 고구려 벽화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한(漢)나라 때의 책인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는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이 세 개라고 풀이하고 있다.
세발까마귀, 삼족오는 달이 아닌 태양을 상징하는 신수입니다. 달을 상징하는 신수는 금두꺼비입니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이 밖에도 사방위를 상징하는 주작, 현무, 백호, 청룡이 있습니다.
세발까마귀는 태양의 신수로 봉황, 주작, 가루라, 가릉빈가, 불새, 피닉스로 나열되는 범세계적인 태양의 새와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중국이 고향이 중국 특유의 신수라고 단정짓기도 어려우며, 고구려 고유의 신수라고도 보기 어렵지만, 고구려가 삼족오를 신성이 여기고 널리 보급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까마귀는 불길한 동물로 알려진 이유가 있습니다. 흔히 까치를 길조라고 부르는 것을 아실 겁니다.
까치가 길조인 이유는 과거 마을간의 왕래가 적었던 시대에 마을에 못보던 인물이 들어오면 까치가 울어 손님이 왔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고 하죠..
까마귀는 까치보다 영리해서 마을 사람을 모두 외우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이 외부로 나가 사고로 다치거나 죽으면 그것을 보고 마을로 돌아와 울었다고 합니다.
해서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다고 알고 있죠.. 까마귀는 사고를 보고와 마을사람에게 알린 것일 뿐인데 말입니다.
중국고대신화에 천제의 10명의 아들이 태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세상이 가물어 못살게 되자 활의 명수인 "예"라는 사람이 산에 올라가 활로 태양9개를 쏘아 맞히고 떨어뜨렸는데 그 안에 있던 새가 세발달린 까마귀였다고 합니다.
다리 셋 달린 까마귀, 삼족오는 고대 동북아시아의 태양숭배사상과 토테미즘(태양에 대한), 그리고 샤머니즘의 산물입니다. 다리가 세개 달린 까마귀의 모습으로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태양신의 사자이자 신수인 거죠.
중국의 고서인 《초사(楚辭)》와《산해경(山海經)》에는 태양속에 까마귀가 살며 천계와 인계를 건너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삼족오에 대한 기록이 있어요.
『갑인 7년(BC 1987), 세 발 달린 까마귀가 궁전의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의 넓이가 석 자나 되었다. -甲寅七年 三足烏飛入苑中 其翼廣三尺
--《단군세기》,《단기고사》』
그리고 고구려의 벽화에 종종 등장하죠.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기원전 4000년경 앙샤오(仰韶)문화 유적지 토기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중요한 상징물이었음을 알 수 있어요.
또한,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잘 남아있지 않지만 무당(무속인)들의 집 앞에 솟아있는 솟대에도 종종 삼족오 조각이 쓰여요. 신계와 인계를 연결하는 새이기 때문에 샤먼들에게 중요한 상징물로 쓰였죠. 고대로 갈수록 솟대 위의 조각에는 삼족오를 조각하는 일이 많았는데 현대로 올수록 간결화되어 그저 새를 닮은 형상물이나 새의 조각을 조각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나마도 없는 솟대가 많아졌죠. (요즘에는 솟대 자체도 잘 없지만요.)
일본에는 아직 삼족오를 모시는 사당이 몇군데 남아있고 고서에 까마귀를 신성한 동물로 숭배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죠.(물론 현대에는 시체 주위에 꼬이는 새라는 이유로 흉조가 되었지만요. 얼마전에 잘못된 오해로 논란이 되었던 일본 축구팀 엠블렘 사건도 있었구요.)
중국의 도시 심양은 삼족오 도안의 현대적 디자인과 조형물로 가득하구요.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우리 나라 고구려의 벽화나 신라의 몇가지 조형물에는 삼족오나 삼족오의 변형된 형태가 종종 나와요. 특히 고구려 인들이 삼족오를 즐겨 그렸죠.
이처럼 동북아 문화권 무속(샤머니즘)에선 중요한 상징물인 셈이에요.
참고로 말하자면, 한편에선 주작의 전신이 삼족오라는 설이 있어요. 실제로 우리 나라 민화나 민요 등에 나오는 머리 세개달린 매, <<조선왕조실록>>과 <<악학궤범>>에 나오는 삼두삼족주작이 그 증거라고 하죠.
삼족오(三足烏), 태양조(太陽鳥)의 도시 심양
최근 [동아일보](2001.2.20) 문화면에는 <고구려의 대표상징물 삼족오 일본축구협회 엠블렘 둔갑>이라는 기사가 2장의 사진(고구려 삼족오, 일본축구협회 엠블렘)과 함께 실렸다. 기사의 내용은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가 일본축구협회에 의해 도용됐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필자는 이미 출판한 책({전통문화의 구성원리})을 통해서 삼족오의 기원과 변형과정을 밝힌 바 있으며, 이런 기사는 삼족오가 마치 고구려만의 상징인 것처럼 호도 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동아일보] 홈페이지 해당기사의 '의견 올리기' 난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다행히 고구려 연구가 서길수 교수와 필자가 삼족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올려서 더 이상의 오해의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고대 동북아시아 샤마니즘에서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태양신의 사자인 삼족오는 이미 기원전 4000년경의 앙샤오(仰韶)문화 유적지 토기에서부터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삼족오는 옛 고구려 지역을 비롯한 산동 지방과 요녕 지방 일대 고분벽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러므로 "삼족오만은 고구려 고유의 상징물"이라는 기사는 잘못된 것이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태양숭배사상과 샤마니즘의 산물인 삼족오는 크게 세 가지 경로의 변형이 일어난다. 첫째, 실제의 새 모양을 간직한 채로 변형되는 것으로 각종 고분의 삼족오와 우리 나라 민속에서 보이는 삼두매(一足三頭鷹), {조선왕조실록}과 {악학궤범}에 보이는 삼두삼족주작(三頭三足朱雀) 등이 그것이다.
둘째, 삼족오가 지닌 '3수 분화의 세계관'과 '삼신사상'이 구체적인 새 모양을 넘어서서 삼태극(三太極)으로 추상화되는 변형이 일어난다. 삼족오에서 삼태극으로 추상화되는 중간단계의 모습이 보물 635호인 '신라 미추왕릉 지구 계림로 14호분 출포 장식보검'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런 추상화는 이미 주(周)나라 시대에 확립되었다.
셋째, 전국시대이후 특히 한나라 시기에는 음양오행론이 확립되면서 삼족오는 남방(南方) 화(火)를 상징하는 주작(朱雀)으로 변형된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주작들은 모두 다리가 2개로 변화하여 '3수분화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음양오행론 안에 수용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조선왕조실록}이나 {악학궤범}에 보이는 주작은 분명하게 '머리가 셋이고 다리도 셋'인 삼두삼족(三頭三足)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주작이 고대 삼족오의 변형임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족오만은 고구려 고유의 상징물"이라는 표현이나, "선조들의 것을 일본에게 빼앗긴 꼴"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우리의 문화전통에 대해서 무지해서 오랜 역사와 사상적 배경을 지닌 삼족오를 활용하지 못한데 있다.
일본도 나름대로 북방문화의 전통을 전해 받았고 그들은 나름대로 삼족오를 활용할 자격이 있다. 일본축구협회가 1930년대부터 삼족오를 엠블렘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전통을 나름대로 현대화한 본받을 만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공식 거론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해 나가겠다"는 기사 내용은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삼족오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유산이고, 일본은 그것을 현대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우리는 그렇지 못할 뿐이다.
삼족오= 태양조(太陽鳥)= 양조(陽鳥)= 현조(玄鳥)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있는 요녕성 심양시는 동북 3성의 중심지이자, 고대로부터 북방문화의 중심지였다. 요녕대학 안에는 5m나 되는 태양조(太陽鳥) 조각이 상징물로 세워져있고, 심양시의 상징물도 태양조다. 시청광장에는 30m는 족히 되는 태양조가 한 가운데 세워져있다. 심양 북역(北驛) 광장에도 50m도 넘어 보이는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태양조가 비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에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삼족오 벽화가 그려져 있다.
우리는 어떤가? 삼족오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알고 있다고 해도 과거의 유물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진정한 '공식 거론'은 있는 유산도 활용하지 못하는 뼈아픈 현실을 알리는 것이고, 진정한 '대응방안'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전통 문화 유산을 현대화시키고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을 시켜 다시는 이런 슬픈 기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삼족오는 원래 우리민족이 숭상하던 하늘의 새로, 환(배달국의 왕의 명칭)님이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동물로 단군의 지팡이 머리에 까마귀를 조각함으로써 단군이 신의 사자임을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상고시대 동이족은 중화족을 압도하여 동아시아의 맹주의 역할을 하였으나 후에 한족과의 경쟁에 밀리게 되고, 중국의 사상의 영향으로 '한족을 핍박하던 동이의 상징'인 까마귀에 대한 한족의 시각이 우리 문화로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삼족오, 그리고 까마귀의 모습을 한 솟대와 정월 대보름의 까마귀제 등에서 신조로서의 까마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추가로 삼족오는 봉황과 주작의 원류이고, 우리민족의 상징은 호랑이나 곰이 아닌 봉황이 우리민족의 상징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봉황보다는 용이 더 위에 있는 상징이라 여기는데, 그것은 잘못된 상식입니다! 봉황 즉, 삼족오는 중국에서 헌원황제가 나다나 용을 상징(이때 헌원 황제가 용이라는 상징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음.)으로 쓰기 훨씬 전부터 숭배하던 상징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사상을 살펴봐도 가루다의 먹이는 용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가루다는 봉황의 인도식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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