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12: 17. 이사야의 예언 18.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19.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함
마 12: 17. 이사야의 예언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바 )
사도 마태는 주께서 이렇게 경계하신 것은, 이사야 42: 1-3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고 말했다.
1]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이하에 인용된 사 42: 1-4은 70인 역(LXX)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이사야의 인용구는 예수의 함구령과 연관해서 성령과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두 주제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Cope, Hill).
* 사 42: 1-4 –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19절) 성령 부음을 받은 그가 공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이방인들은 그의 이름을 바라게'(21절)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행위자(agent)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태는 무엇보다 무리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예수의 사역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사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전파하신 천국을 영적이고도 의로운 관점에서 가르치셨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격앙된 분위기로 군중을 선동(煽動)하거나 폭발적인 소문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exposure)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마 12: 18.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1]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사 42: 1. 43: 10. 44: 1의 인용으로 특별히 '나의 택한 종'이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 된다.
* 사 42: 1 -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 사 43: 10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 사 44: 1 -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한 이상적(理想的) 종을 붙잡으셨다. 그런 점에서 '붙잡다'는 말은 선택한 자를 내밀(內密)하게 기억하시면서 지극히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라는 표현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들려왔던 소리(3: 17. 17: 5)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만족과 인정과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서로 밀접(密接)하게 관련되어 있다.
'마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범주(category)안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의 역할까지도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킹스베리(Kingsbury)의 견해는 부적절하다.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막 3: 11)을 생략하였다. 본문에서는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보는 힐(Hill)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보인다.
예수는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 선택된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선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은 자이다.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명사 '파이스'(*)는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종종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종'이라고 불렸다.
* 사 41: 8 -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따라서 '파이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통용되고 있는 '둘로스'(*)와는 달리,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임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다.
2]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터이니
하나님이 당신의 영(spirit)을 주신다는 것은,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활동하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참여 의사(will)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초월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한 것이 된다.
이같이 주어진 능력과 권위의 실현은, 곧 이 땅에 하늘나라가 도래했음을 입증해 주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28절).
3]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심판'의 뜻인 헬라어 '크리시스'(*)가 '율법', '판결', '정의', '결정하는'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미쉬파트'(*)에 해당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심판'이라고 해석된 이 단어에 대해
(1) 델리취(Delitzsch)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생(生)의 규범과 표준으로서 종교의 실제적인 면을 보인 '진실한 신앙'으로 보았다.
(2) 헨드릭슨(Hendriksen)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 예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복음'으로 보았다.
(3) 칼뱅(Calvin)은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공평과 의(義)의 충만함을 정체(正體)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의 한 구석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 메시아의 임무라고 하였다.
(4) 알포드(Alford)는
최후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5) 카슨(D. A. Carson)은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심판 혹은 공의란 하나님이 모든 이방 나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는 것(사 51: 4)인 동시에 사람들이 계시(revelation)된 하나님의 본성, 즉 공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 사 51: 4 -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이방에 심판을 알리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신 종인 메시아의 독특한 직무에 해당된다. 이 직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들에 비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고 하는 것은
(1) 율법을 통해서 계시 되고,
(2)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공의,
(3)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4)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재천명하시고
(5) 그의 제자들이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經綸)의 대강(大綱)으로서 예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본문의 전파 경로가 암시되어 있다. 예수께서 원래 목적하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우선 복음이 전파될 것이지만(10: 6. 15: 24), 그들의 핍박과 배척으로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이었다.
* 마 8: 10 -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마 15: 28 -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러한 사실은 선교의 지상 명령 부분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 마 28: 19-20 –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행 1: 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 12: 19.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함 -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주께서는 오늘날 어떤 전도자들과 같이 세속적인 마켓팅 방법을 사용해 자기를 선전하며 떠들썩하게 활동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조용한, 그러나 내용 있는 사역을 하셨다.
1]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메시야의 직무에 이은 이행 방법 또는 태도 중의 하나이다.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사 42: 2)로 묘사되어 원래의 의미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다투다'는 말은 언쟁이 심화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이사야의 의도처럼 '큰 소리로 외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함께 '들레다'의 뜻인 '크라우가조'(*)는 '부르짖다', '야단스럽게 떠들다'(cry out, KJV)를 의미한다. 종교적 기쁨이나 소리나 전쟁에서의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과 대조(contrast)를 이루는 '우매(愚昧)한 어른의 호칭'을 뜻하는 말이다.
* 전 9: 17 -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크라우가조'는 신약 이외에서는 마술과 악마의 영역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불러내는 소리로 이해되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귀신들이 지르는 것으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말한다.
행 19: 28에서는 왁자지껄하는 폭도들의 소란으로, 계 21: 4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부터 쫓겨난 분노를 나타내는 외침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歎願)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막 5: 5 -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 막 9: 26 -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 행 19: 28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 계 21: 4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2]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고난과 섬김의 종인 메시아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메시아가 논쟁하지 않고 외치지 않고 길거리에서 소리 높여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침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의 모습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메시아가 16절에서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얼마든지 그의 메시아 직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지금하고 계신다.
더불어 참다운 종이란 그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함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