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봐야 맛을 알지 / 남명모
깜빡 졸다 창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갈아타야 할 곳이다. 승객 몇이 우르르 내려가고 마지막 사람이 출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화들짝 정신이 들어 부랴부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리나케 내리고 보니 한쪽 손이 허전했다. 아뿔싸! 내 가방!
손에는 고구마 봉지만 들려있고 가방 실은 버스는 이미 저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감촉이 느껴지는 이눔의 고구마 때문에.
지난가을부터 고구마 굽는 일에 자신이 생겼다. 비결은 전용 냄비다. 모양은 보통 냄비와 다름없어 보이나 물 없이 고구마만 넣고 가열해도 솥 안에서 맛있게 구워지도록 좀 특별나게 만들어진 냄비다. 아주 약한 불로 오랫동안 뜸을 들이면 고구마 자체 수분만으로도 타지 않고 말랑말랑하게 구워진다.
기술이랄 것도 없는 일이건만 아내는 내 손에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양 이것만큼은 늘 나에게 맡겼다. 이렇게 구우면 찐 고구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맛이 나고, 옛날 모닥불에서 구워 먹던 추억의 맛까지 느끼게 된다.
이런 자랑을 모임에 가서 했다.
“맛을 봐야 맛을 알지!”
한 회원이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오기가 났다. 그래 맛을 보여주마!
염창동에서 다음 모임이 있는 날 아침, 고구마 두 냄비를 노릇노릇 구워 비닐봉지에 빼곡히 넣고 집을 나섰다. 늘 끼고 다니던 손가방도 습관처럼 들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환승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목적지까지 가는 번호만 맥 놓고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은 아무 버스나 타고 가다 적당한 곳에서 갈아타면 된다.
내가 탄 버스는 중년의 여자 기사가 근무복을 단정하게 입고 선글라스까지 낀 채 운전하고 있었다.
“어서 오셰용.”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나긋나긋했다. 아침나절이라 붐비지 않았지만, 늘 하던 대로 맨 뒷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가방은 옆에 놓고, 따끈따끈한 고구마 봉지를 양손으로 감싸 안고 늦가을 정취를 즐기며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나이 탓일까. 깜빡 조는 순간 버스는 갈아탈 정거장에 도착했고 난 허둥지둥 고구마 봉지만 들고 내린 것이다.
가방 속엔 아내의 주민등록증과 도장, 인감증명, 그리고 내 신용카드 하나가 들어있다는 사실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전날 아내의 예금을 대신 해약한 서류를 그대로 넣어 둔 채 들고나온 것이다.
“안 돼! 안 돼!”
무조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저 버스를 얼른 따라가 주세요.”
사태를 짐작한 기사도 한껏 속력을 냈지만, 일이 꼬이려고 그런지, 바로 앞 사거리 신호에서 버스는 통과했는데, 택시는 걸려 버렸다.
양방향 동시 보행신호는 정말 길었다. 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필 일이 어긋나려는지 버스의 노선 번호가 가물가물 생각나질 않았다. 다만 차량번호 뒷자리 ‘xx12’가 얼핏 망막에 떠올랐다.
더는 꾸물거릴 수 없어 택시에서 내렸다. 일단 신용카드 분실신고부터 하고, 그곳을 지나가는 버스를 눈여겨보았다. 몇 개의 운수회사 차량이 다니고 있었다. 114에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회사마다 전화해서 끝자리가 12인 차량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첫 번째 운수회사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끝자리가 12요? 여자분이지요? 우리 차 같은데…”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다는 말에 틀림없다 싶었다. 기사의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운행 중 통화는 금지라고 했다. 그렇다고 그만둘 상황도 아니다. 가방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더 복잡해질 것만 같아 나는 물러서지 않고 애원했다. 그는 마지 못한 듯 기사의 번호를 알려 주었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애가 탔다. 그 반듯하게 차려입은 여자분이 고지식하게 끝내 전화를 안 받는다면 어쩌나. 시간이 지체될수록 가방이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버튼을 눌렀는지 모른다. 마지막 한 번만 더 걸어 보자고 했는데 연결이 되었다. 버스 탈 때 듣던 귀에 익은 여자 기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 중이라고 했다. 맨 뒷좌석에 까만 가방을 두고 내렸다고 했더니 신호대기 할 때 뒤편으로 가보겠다고 하며 5분 후에 전화하겠다고 했다.
5분이 어찌나 긴지. 온몸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드디어 통화 벨이 울렸다.
“손님! 가방 찾았어요!”
-아, 내 가방!
회사에 맡겨 둘 테니 아무 때나 찾아가라고 했다. 비로소 입안에 침이 돌았다. 곤두섰던 신경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나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안도의 맛 행복의 맛이었다.
“맛을 봐야 맛을 알지!”
그게 어디 고구마 맛 뿐이겠는가.
첫댓글 남명모 작가님. 맛을 봐야 맛을 알지.
무슨 사건이 있어야 글감이...
나도 얘깃거리가 하나 있는데 구슬을 꿰어 볼까요?
어머나!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요.
아무 사고없이 가방을 찾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네요.
좋은 글 감사히 읽어 봅니다.
색동저고리님도 얘깃거리 쓰셔서
여기에 올려주세요~~~
색동저고리님, 동행지기님, 신변잡기를 끝까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색동저고리님 얘깃거리 재미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