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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최연소 합격, 외시 차석, 행시 수석, 하버드대에 이어 예일대 법학석사, 컬럼비아대 법
학박사, 미국 4개주 변호사, 세계 최대 로펌 B&M 근무…. 방송활동으로 낯익은 고승덕 변호
사의 화려한 이력이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했기에 이런 빛나는 경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고승덕 변호사를 만나 그만의 ‘공부비법’을 들어봤다.
그는 우선 공부를 잘하는 방법을 묻자 “주어진 환경은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절대로 공부를 잘 할 수 없습니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주어진 환경은 학생 개개
인의 조건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공부를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더 참고 견디냐가 승패를 가릅니다. 이것이 공부의 첫 번째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공부만큼 공평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하루는 24시간인데다, 남이 내 공부를 대신해
줄 수도 없기 때문에 자신이 혼자서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너무 평범한 설명이다.
그는 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 낮과 밤을 바꾸어 살았다. 밤에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다.
“24시간을 공부와 잠, 둘로 나눴습니다. 어두워지면 일어나고 밝으면 잠을 잤죠. 생체 리듬에
역행해 사는 것이 건강에는 치명적이더라고요. 가장 먼저 위장이 나빠졌어요. 그래도 설마
죽기야 하겠나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고변호사는 하루가 24시간 밖에 안되는 게 안타까웠다고 한다. 따라서 공부 이외의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밥 먹을 시간마저 아까워 여러 가지 반찬을 칼로 잘게 썰어 넣어 여러
번 씹지 않아도 소화가 잘 되도록 한 ‘특제 비빔밥’을 개발할 정도였다고. “비빔밥을 책상에
놓고 먹으면서 책을 봤습니다. 소화가 잘되 식곤증이 없더라고요. 식곤증으로 버리는 시간조
차 아까웠어요.”
인터뷰 전 고 변호사에게서 그만의 공부방법을 기대했지만 사실 그에게서 남들보다 뛰어난
공부 테크닉은 발견할 수 없었다. 오직 ‘이사람 정말 독하게 공부했구나’라는 인상만 받았다.
고변호사는 “공부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누가 남들보다 더 많이 노
력하느냐가 공부의 왕도입니다”고 강조했다.
고 변호사는 젊은이들에게 ‘노력이 기적을 만든다’고 강조한다. 성공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
며 포기하는 순간 불가능해진다고 강조한다. 남이 닦은 길을 가기 보다는 새로운 길을 만들
면서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혼자 결단하면서 헤쳐 나가야 하죠. 인생은 상대성 게임이며 위기
는 기회입니다. 공부에도 이런 논리가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어요.”
고 승 덕 (高 承 德)변호사는 서울 법대 재학중에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행정고시 수석합격, 외무고시 차석 합격하고 수원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한 후 미국의 Havard Law School (LL.M.), Yale Law School(LL.M.), Columbia Law School(J.D.)에서 각 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세계 최대의 law firm에서 정규 변호사(associate)로 근무하였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것은 1991. 10.이다. 1992년부터 서울시와 7개구청, 조달청의 법률고문으로 10년간 각종 민사, 행정 및 계약 관련 자문 및 소송 업무를 수행하고 서울시행정심판위원회와 지방세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탐라대학교 부교수, 국민대학 강사, 다수 대학 사회교육과정과 대학원 특별과정 강사, 서울시공무원교육원 강사, 내무부지방행정연수원 강사 등을 역임하고 현재도 강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변리사와 세무사로 등록하였다.
1976년의 겨울이 오기까지
1-1. 대학생이란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을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대학 합격으로 주어지는 4년간의 대학생활은 태풍이 지난 후의 맑은 하늘처럼 갑자기 여유와 낭만이 많아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유와 낭만에 가득찬 4년간의 대학기간을 사회가 대학생이란 신분에 부여하는 휴가와 같은 기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학 4년을 회상하는 이 글에 4년간의 휴가라고 제목을 붙인다.
그러한 4년간의 휴가는 인생에서 두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이다. 그 기간을 고교에서 대학입시 공부를 열심히 한데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고 즐길 수도 있고 앞으로 대학졸업 후 사회에 나갈만한 힘을 축적해야 하는 준비기간으로 생각하고 무엇인가 해보려고 할 수도 있으나 결국 각자의 판단에 달린 문제이다. 나의 경우는 대학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대학 4년의 기간이 나에게는 일종의 폭풍전야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태어난 후 국민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차례로 거치면서 이 사회가 학생이란 신분에 부여하는 보호막이 대학졸업과 함께 벗겨지고 사회라고 하는 무방비 상황에 내던져 진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되면 몸서리쳐지는 일이라고 까지 할 수 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누구나 차이없는 학생이라는 동류의식속에서 옆에서 하는 대로 따라서 흘러가는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대학졸업한 다음에는 광야에 홀로 서야 한다는 상념을 가져보면 참으로 술 취하다가도 술 깨게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특히 고시라는 문턱을 넘어야 하는 나에게는 현실감을 가지고 다가왔다.
대학시절은 인생의 과정에서 보면 결국 학교와 사회 사이에 놓인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은 아직도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보호받는 면도 크지만 대학교부터는 성년으로서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 또한 엄연한 사실이요 현실이다. 나는 대학 4년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하며 보내야 할 것인가는 대학 초년생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나 사람에 따라서는 대학 4년을 계획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인위적이고 그 발상 자체가 거부감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대학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느냐에 관한 처음의 생각이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바뀔지도 모른다. 대학 초년에는 꿈으로 부푼 풍선을 자아로 착각할 수도 있고 그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가기도 하는 과정을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도 되는 것 같다.
1-2. 대학에 들어가서
내가 1976년 3월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적 정신적 여유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나는 깜깜한 동굴속에서 살다가 눈부신 바깥세상으로 갑자기 나온 사람처럼 대학입학 후 한동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던 것 같다. 입학 직전부터도 여기 저기 휩쓸려 다니고 하루에도 커피를 몇잔씩 마시게 되는 생활이 거의 날마다 반복되었다. 더러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옆에서 하니까 따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회학자들이 이른바 동류집단압력(peer group pressure)이라고 설명하는 이러한 현상은 전세계 젊은이들이 가장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의 어머니는 자식이 크게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으로 믿으시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도록 놓아 주셨다. 돌이켜보면 대학교 초년생으로서 남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것들을 해보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대학생에게는 여유와 낭만 이외에 또 하나의 차원이 있었다.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은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하나의 필요한 속성처럼 되어 있었고 친구들끼리 만나더라도 한국정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걱정하고 토론하는 것이 당위였고 실제였다. 내가 대학 다니던 4년간은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특히 어려웠던 시기였다. 바로 유신(維新)의 마지막 4년이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국민적인 저항을 시도하면서 유신체재에 항거하고 있었고 대학가에서는 반정부나 비판적 세력이 주류였다고 생각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직후에도 학교에는 데모가 많이 일어났다. 데모가 열리면 일반학생들의 호응이 상당했던 것 같다. 학교에 주재하던 기관원들은 데모하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학생들을 분류하고 이른바 문제학생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요사이는 시대가 변하여 반독재(反獨裁)라는 것이 데모의 명분이 되기에는 부적절하게 된 것 같지만 당시에는 반독재가 민주화의 기본요소라는 것에 대하여 널리 공감이 퍼져있었고 모든 학생데모의 공통된 슬로건이 되었다. 선배들은 후배들과 만나서 술 마시면서 토론을 할 때면 여러 가지 소문이나 유언비어적인 이야기를 섞어가면서 정치와 사회현실을 이야기하고는 하였다. 성남 등지의 철거민 이주촌에서 사는 어려운 사람 이야기, 공장에서 착취에 가까운 저임금에 고생하는 근로자이야기, 데모하다가 죽거나 민주주의나 노동조건 개선을 외치며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그러한 이야기들을 듣는 사람은 당시 한국의 정치체제 사회체제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학생들이 모일 때면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있었다.
내가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가게 된 것은 고교 때부터 법대를 지망할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고교 2학년 올라가면서 문과(人文係)와 이과(自然係)로 나눌 때 이미 인생의 굵은 선은 그어진 셈이다. 어른들의 권유는 의대였으나 나는 굳이 법대를 가겠다고 고집하여 문과를 선택하였다. 의대가 안정된 직업을 의미할지 모르나 금전적인 여유가 없더라도 남자로서 사회속에서 부딪치면서 살고 싶은 막연한 생각이 법대를 희망하게 했다. 법대가 결코 권력이나 영화를 보장해주리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무엇을 하게 되더라도 법대를 거치는 것이 무난한 길이라는 생각에서 법대를 선택할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법대가도 고시 붙기도 어려우니 이과 가라 고 힘들게 설득하실 때 나는 고시가 아무리 어려워도 붙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나도 열심히 하면 붙겠지 하는 생각에서 동요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문과로 간 다음 점차 알고 보니 당시 고시합격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같이 몇 명을 선발하겠다고 미리 정해놓고 하는 정원제 선발시험이 아니고 인원수와 관계없이 시험성적이 평균 60점 이상 되어야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해마다 몇십명 정도 밖에 합격자가 안나오고 있었다. 법대 들어가서 4년 내내 공부해도 고시에 합격하기 힘들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일단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가서도 고시에 부딪칠 법학과를 선택하는 것보다도 이를 피하고 싶은 잠재의식이 생겼다. 당시 사회계열속에는 법학과, 경제학과, 정치하과, 경영학과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법학과 이외에 지망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법대에 대한 생각은 대학생활 첫 봄을 보내면서 눈녹듯이 점차 사라지고 나사 풀린 사람처럼 안일한 인생을 즐기게 되었고 고시공부 대신에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를 가서 무난히 살고 싶은 생각도 들게 되었다.
고시에 대한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이 나의 외숙인 윤일영 변호사님(대법관 역임)이다. 당시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계시던 외숙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판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사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얼마동안 외숙집에 기거하면서부터 외숙이 언제나 법원에서 사건 기록 보따리를 들고서 퇴근하시고 집에서도 혼자 밤늦게까지 기록과 씨름 하시는 것을 보았다. 내가 대학 들어간 뒤 비로소 나는 그러한 고된 직업에 대한 보수가 생계비 미달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나는 커다란 의문과 현실에 부딪쳤다. 사람들이 판사라는 직업을 왜 선택할까 또한 그 직업을 얻기 위하여 왜 엄청난 시간을 소비할까 라는 의문을 풀지 못하였다. 내가 판사가 된다 하여도 과연 외숙과 같이 묵묵히 그리고 언제나 밤늦게까지 기록을 보고 판결을 쓰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내가 과연 일생동안 그러한 생활을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 하는데에 대한 회의가 들곤 하였다. 그러한 나에게 외숙모는 판사라고 다 외숙같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점차 판사라는 데서 멀어지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초의 나의 생활은 따라서 이러한 문제로부터 일종의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외숙모 말씀대로 외숙은 판사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였던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판사생활도 해보면서 직접 또는 이야기를 통하여 알게 된 판사중에도 외숙과 같이 열심히 한 분은 아직 알지 못한다. 외숙은 주로 민사계통으로 판사생활을 하시면서 이른바 시국사건에는 별로 말려들지 않아 관운이 좋으셨다고 할 수 있다. 외숙은 성실히 열심히 일을 하셨고 민사소송분야에서 남들에게 인정받으셨다. 민사소송법 판례에 관한 책도 내셨고 서울법대의 부탁으로 민사소송법 강의를 한학기 하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열심히 하셔서인지 외숙은 결국 성실성과 실력으로 널리 인정을 받게 되어 전혀 청탁이나 연줄을 통하지 않고서도 대법관으로까지 승진하시고 연임까지 하셔서 10년 정도 대법원에 계시면서 나중에는 당연직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까지 역임하셨다.
나의 대학생활의 첫 학기가 끝나감에 따라 점차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그동안 남들과 같이 추구하던 것들이 결코 나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 무절제한 생활의 무의미함이 주는 우울이 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매일 매일을 계획없이 부딪치고 있었던 탓도 있지만 내 자신이 놀기에 적합한 유형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한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인생 전체를 새로이 들여다 보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것 그 자체가 실체적으로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곧 장래를 보장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푸른 꿈을 꾸면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보통 대학생으로서 누리려고 했던 여유와 낭만이 그 본질면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전과 같이 부모의 부양 아래서 생활 걱정을 하지 않고 4년간의 휴가를 누리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보면 대학생들도 많은 경우 자기생활을 현재는 부모가, 장래는 대학졸업장이 보장해 주리라는 잠재의식 하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현실감각을 느끼게 되자 나는 세상에 홀로 서있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우울과 고독 그리고 정신적 비참함이 밀려왔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남에게 휩쓸리지 않고 내 자신의 주관을 확립하려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1976년 여름이 가까워질 무렵 대학생 병영훈련소인 문무대(文武臺)에 입소하여 겪게 된 10일간의 입영훈련은 이런 면에 더욱 자극을 주었다. 교련교육의 일부로서 당시 입영훈련을 받으면 나중에 현역복무기간에서 6개월을 단축시켜 주는 혜택을 주었다. 반면에 입영훈련을 거부하면 대학생도 병역연기가 취소(이른바 학적변동)되고 바로 신체검사 통지가 나오므로 남자 대학생들은 불만이 있더라도 대부분 문무대로 입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극소수이긴 하였지만 유신체제반대를 이유로 입영훈련을 거부하다가 군대로 끌려간 학생들도 있었다. 머리깍고 훈련복을 입고 흙바닥에서 기는 모습을 서로 바라보면서 대학생들중에는 유신정부가 기대했던 건전한 시국관보다는 오히려 군대에 대한 기피증을 마음속에 키우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내가 문무대에서 주로 느꼈던 것은 그러한 거시적인 것보다는 밑바닥에 놓인 초라한 내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본연의 모습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혼자서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이미 가졌던 생각을 대신하여 갔다. 나와 같은 생각없이 살고있는 듯한 친구들을 대할 때는 또 다시 정신적인 혼란이 생겼다.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쯤엔 정신적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부산 큰고모집에 놀러갔다. 며칠을 머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는 남에게 휩쓸리지 않고 나의 주관대로 인생을 책임지면서 살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그때 부산에서 난생 처음으로 냉면이란 것을 먹어보았다. 맛이 있었다. 아버지는 냉면이 비위생적이라고 우리 식구들에게 먹지 못하게 했었다. 다른 형제들은 몰래 먹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금기를 부산에서 처음 깬 것이다.
방학이 끝날 무렵(76.8.31) 다음과 같은 나의 생활 규범을 작성하였다. 1. 일에 신념과 자신으로 임한다. 2. 결정하기 전에 사고의 과정을 거친다. 3. 동류집단압력 (peeu group pressure)을 이겨낸다. 4. 필요한 경우를 가려 말한다. 5. 집안 일에 협력 헌신하며 친척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 6. 건강에 유의하여 음식을 조심한다. 7. 술 여자 담배 (이른바 ㅅ.ㄱ.ㄷ.)를 피한다. 8. 헛되이 보내는 시간을 줄인다. 9. 신문과 TV를 보는데 과다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10. 피곤과 나태를 구분한다.
이상은 그 뒤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생활을 정돈해야 한다는 그 당시의 결심이 나타난 것이다.
1-3. 왜 살아야 하나
대학교 1학기 말 나의 관심을 무절제한 생활로부터 탈출로 집약할 수 있다면 2학기 초의 관심은 생의 목적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려는데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점차 현실속의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니 참으로 나의 인생이 초라하고 비참하여 노는 것도 일시적일 뿐 나에게 깊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느껴지게 되었다. 나는 점차 생(生)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왜 사느냐, 왜 살아야 하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부모님이 나를 생산하셨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사실로서 인정할 수 있었으나 인간에게 동물적인 존재 이유말고도 생의 이유나 목적이 있느냐 하는 것이 근본문제였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러한 문제를 푸는 것이 가장 절실하였다. 그러한 문제에 비하면 당시 어지러웠던 정치상황은 나에게 부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었다. 인생이 만약 물거품 같이 헛된 것이라면 그러한 인생이 여럿 모였다고 하여도 무슨 의미를 더 할수 있을까. 생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생이란 원래 목적이 없으며 왜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대답도 부정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을 학기가 개강이 되어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나의 주요 일과였으나 목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생활은 자꾸만 궤도를 벗어나려 했다. 인생은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일 뿐이고 따라서 결코 생의 목적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은 단지 공간에서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한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인생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 인생이 그 본질상 죽음을 향하여 시간 시간 다가가는 과정일뿐 인간이 추구하는 여러가지 쾌락과 가치도 일시적인 것일 뿐 결코 영속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얼마나 하찮은 것일까. 그런 사고에서 생각하면 더군다나 개인이 재산 지위 권력 등을 추구같은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사색을 하다 보면 모든 의문에 대해 해답을 얻지 못하고 생각은 점점 염세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인간이 하는 일이 모두 무의미하게 보였고, 생이란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주어진 것이지 어떤 목적이나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생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단지 소모적인 것일 뿐이고 고통스럽게 여겨지기까지 시작했다. 죽고 싶으리만큼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사는 것이 고통이라면 나와 같은 존재를 세상에 생산하여서는 안되겠다고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때 하마터면 자살까지 갔을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그렇지 못한 데에는 태어난 뒤부터 부모에게 연결되어 있는 세속적인 끈이 끈끈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우선 생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집중할 만한 도피처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였다.
1-4. 불교입문(佛敎入門)
대학 1학년 가을 이전까지 나는 종교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아마도 관심가질 계기가 없어서 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의 정신없는 입시위주 교육속에서의 생각할 시간마저 없었던 것 같다.
원래 우리 집안은 종교와는 오래된 인연이 있었다. 이조(李朝)말기에 천주교가 제주도에 까지 전래되면서 그 섬에는 천주교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어느 기록을 보면 당시 제주에는 천주교도가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읍에 살고 있던 증조할아버지 집안은 이러한 외래종교를 받아들이고 박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믿음을 지켰다. 지금도 어른들이 모이면, 그 당시 관군(官軍)들이 천주교도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위하여 제주 읍내를 수색하고 다녔던 이야기, 그리고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가 집 천장 속에 올라가 숨어 관군들이 천장까지 창으로 쑤셔 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서 살아나신 이야기 등을 나누곤 한다. 아직까지도 제주도에 사는 작은 할아버지쪽 친척들은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할아버지는 일제 후반기에 자식들을 이끌고 육지로 나가게 되었고 그 뒤 할머니가 기독교를 거쳐 불교로 개종하면서 할아버지 계열에 불교가 들어 오게 된 것이다. 불교에 완전히 빠지게 된 할머니는 아버지가 결혼한 후에는 아예 출가하셔서 어느 산 중턱에 자그마한 절을 창건하시고 그곳에서 주지로서 사시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승려복을 입고 사시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어렸을 때 주말이면 할머니 절에 온 가족이 방문하였는데 할머니는 남들에게서 이른바 신들렸다는 말을 들으실 정도로 그런 세계와 통하셨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가 산신령이야기 하시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할머니는 도인(道人)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자라면서 나는 어릴때부터 불교를 믿어왔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불교를 믿었다기 보다는 불교가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였던 상태라고 해야 옳았다. 대학교 1학년 중반에 염세적 사고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무엇인가 무조건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내 가까이 있는 불교를 새삼스럽게 들여다 보기 시작하였다. 불교라고 믿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내 정신적 상황으로 보아 선택이라기 보다는 필연이었다. 생의 의미를 발견하여야 할 절박한 상황에서 내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불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기본으로 삼았던 경(經)은 대승경전(大承經典)인 법화경(法華經)이었다. 그속에는 글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상식에 반하는 황당한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일단 모든 것이 사실이요 진리라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시 나에게 부처는 최고의 스승이었으며 불교성전은 나의 생활과 사고의 규준이었다. 내가 생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회의를 가지고 혼자서 괴로워하다가 그와 같은 일들을 석가모니가 이미 2,000년 이상 전에 겪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새삼스럽지만 새로운 발견이었다. 내가 품었던 의문과 석가모니가 처음에 가졌던 의문이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면 석가의 깨달음에서 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불교를 재발견한 것은 내 마음의 궁핍한 빈 구석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발견한 나는 열심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불교를 마음의 지주로 삼아 우선 생을 긍정하게 되었고 점차 생을 힘차게 살아보고 싶은 의욕도 생겼다.
불교에 빠져들면서 나의 나태하고 안일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의 수행방법으로서 힘든 고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석가모니도 깨달음의 과정에서 고행을 하지 않았던가. 불교와 고시. 참 잘맞는 결합이라고 생각되었다. 고시가 힘들다는 것이 오히려 나의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고시에 대한 투지가 불타올랐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지만 죽을 때까지 생이 무의미하다고만 하고 할 것이 아니라 믿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생의 의미도 탐구하면서 무언가 열심하며 살아보자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힘차게 세상에 쏟아놓고 싶었고 그것이 내가 개인 사회 국가를 동시에 위하는 길이라 믿었다.
-5. t1 t2 사고방법
당시 어두운 한국정치 상황속에서 대학가에는 공무원이 된다는 것이 곧 독재정권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고가 만연하였다. 고시본다는 것은 그러한 하수인이 되는 길로 선택한다는 의미로 되어 비난의 대상으로까지 되었다. 교련수업 자체도 군사정권을 돕는 것이라고 하여 거부운동이 일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고시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면서도 어려웠던 당시 정치상황과 대학생으로서의 의식속에서 조금은 흔들림도 있었다. 그것도 일종의 동류집단압력 (peer group pressure)때문에 생긴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내 나름대로 고시보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이때 내가 확립한 가치판단 방법은 가치판단에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 방법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인생의 주요 경로를 결정하여 왔다. 시간을 도입한 가치판단 방법이 나오게 된 것은 내가 고시 시작하면서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끊임없이 부딪혔기 때문이다. 즉 내 앞에 두가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하나를 A, 다른 하나를 B라고 하자. A와 B를 비교할 때 A가 B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하자. 이 때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하여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아래서 A를 선택하여야 한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해답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내가 고시를 시작하면서 부딪쳤던 구체적인 경우를 들어보자. 내가 고시를 시작하려고 마음먹던 초기에 A에 해당하였던 것은 민주화에 대한 의식과 노력이었다. 대학생으로서 국민으로서는 당연히 당시 우리나라의 어려운 시국을 걱정하고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옳을 일이었다. B에 해당하는 일이 고시공부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분명히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보다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덜 중요한 고시를 하여야 하는가. 단순히 나 개인에게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일까. 이러한 질문에 내 나름대로 명확한 대답을 줄 수 없다면 고시공부를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된다. 고시를 수행벙법으로 하는 불교탐구가 나에게는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구도(求道)의 길이었고 그것은 주관적으로 나에게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평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찾아 낸 것이 가치판단에 있어서 절대적 중요성만으로 비교하지 말고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즉 A가 B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더라도 만약 A를 먼저 하면 나중에 B를 할 수 없으나 B를 먼저 하면 나중에 A도 할 수 있다면 B를 먼저 선택하여야 옳다는 가치판단 방법이다. 나는 이러한 판단방법을 t1 t2 사고방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수식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A B. But A(t1)+O(t2) B(t1)+A(t2)
t1 t2사고방법은 불확실한 상황속에서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가치판단의 잘못으로 인한 위험부담을 줄이는 가장 안전한 판단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판단의 잘못이란 우리가 흔하게 겪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어느 시점에서 A가 더 중요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볼 때 사실은 B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깨닫는 경우가 그것이다. 만약 처음에 A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B를 희생하였다면 나중에 후회하여도 B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B를 하면 나중에 A를 할 수 있으므로 B를 먼저 하게 되면 처음의 가치판단이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전혀 후회할 일이 없다. 그만큼 위험이 감소하는 셈이다. t1 t2 판단법은 나에게 많은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하였다.
우선 고시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관하여도 나름대로 해답이 나왔다. 나는 대학시절 고시를 거부하고 나라걱정만 하면 나중에는 고시하는 시기를 놓쳐 고시합격 못한 채 군대에 가게 되고 그러면 공부가 원점으로 돌아와서 고시를 제대로 합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시절 우선 고시를 해놓고 나중에 나라걱정을 해도 늦지는 않다고 느꼈다. 나라가 아무리 어지럽거나 엉망이 되더라도 내가 고시하는 몇년 동안에 망하거나 무너지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지금 할 일은 고시공부라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지금은 사법시험 합격자를 300명씩이나 뽑고 있지만 내가 대학 들어가던 당시에는 불과 몇십명 밖에 뽑지 않을 때였다. 대학 4년동안 고시공부를 열심히 하더라도 졸업전까지 고시를 제대로 붙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위와 같은 판단법을 통하여 고시공부를 정당화한 다음에는 더 이상 정치상황에의 참여라는 문제가 고시하려는 나를 괴롭히지 못하였다.
t1 t2 사고방법은 그뒤에도 내가 부딪친 중요한 문제들 즉 성경을 믿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유학을 가야 되느냐 말아야 하느냐, 사랑을 하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판사를 하여야 하느냐 유학을 계속하여야 하느냐 등등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쉽게 풀 수 있게 하였다.
내가 고등학교때부터 t1 t2식으로 생각하였더라면 수학공부때문에 속을 썩였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앞으로 인문사회계통으로 나가게 되면 수학이 필요없을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때는 영어공부만 열심히 하고 수학은 게을리 하였다. 사실 문과쪽에서 사회로 나가면 어려운 수학이 필요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 당시 나에게 중요성에 있어서 영어는 A였고 수학은 B였다. 그래서 수학공부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없었다. 그때 내가 한가지 몰랐던 중요한 사실은 우선 수학을 공부하지 않고는 대학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효용이나 가치면에서 문과학생(文科學生)에게 수학이 덜 중요할지 모르지만 수학공부를 한 다음에라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을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2학년 담임이던 김시양 선생님으로부터 수학성적때문에 질책을 받고 난후 수학을 하기 시작하여 6개월후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이 되었다.
그 6개월 동안이 나의 고교생활중 가장 괴로운 기간이었던 것 같다. 우선은 하기 싫거나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먼저 한 다음에라야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사고 그것이 바로 t1 t2 사고방법의 전형적인 경우가 아닌가.
고시여담
6-1. 고시와 시간
고시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인간적인 생활을 각오하여야 한다. 고시합격기 중에는 힘들었던 과정을 빼 버리고 그 필자가 여유와 낭만속에서도 합격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잘못된 느낌을 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고시준비를 하면서 방황하는 기간이 나중에 낭만적인 추억으로 기억될 지는 몰라도 방황하는 당시에는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솔직하다고 본다. 고시합격에 기한은 없지만 고시를 일단 시작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빨리 끝내도록 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대학졸업 후 군대를 가야 하기 때문에 군대 입대전 고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서 고시를 하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냐를 결정하기까지 2년 가까운 기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 고시를 하겠다고 마음먹을 때부터 대학졸업 때까지 남는 기간은 불과 2년이다. 대학졸업 때까지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경우 대학원에 진학하여 군입대를 2년간 더 연장시킬 수 있다고 하여도 대학원에서의 고시공부가 얼마나 초조한 것이겠는가. 고시를 끝내지 못하고 군에 입대하면 그동안 공부했던 것이 군대 3년 보내는 동안 지워져 버릴 것이다. 제대한 후 고시공부는 원점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대학졸업 전까지 고시공부를 하는데 보통 3년이란 기간을 쓴다고 하여도 그 기간은 긴 것이 아니다. 나는 사법시험 1차시험을 불과 몇 날의 공부만으로도 운이 좋게 합격한 경우이지만 적지 않은 수험생들이 1년 가까이 1차시험을 준비하고도 1차에서 떨어져 허탈감에 빠지고 있다. 3학년 초에 고시공부 시작한 사람이 그 다음해 1차를 합격하지 못하면 1차시험도 합격하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결과가 된다. 3학년 초에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 4학년 때 1차시험을 붙는다고 하여도 같은 해 2차까지 합격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볼 때 3학년 초에 고시공부를 시작하여서는 대학졸업 전에 고시합격 하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대학 재학중에 고시를 합격하려고 하는 사람은 최소한 2학년 여름까지는 공부를 시작하여야 한다고 본다. 나중에 대학졸업과 군대문제 등으로 겪을 고통에 비하면 고시공부를 다소 일찍 시작하는데서 오는 문제들은 오히려 사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 고시를 시작하더라도 고시를 빨리 끝낸다고 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고시는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아서 아무리 장기계획을 세워 꼼꼼하게 하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하기에는 불가능하다.
또한 주관식시험에 대비하여서는 책의 내용을 머리속에 담아 두었다가 시험장에서 마음대로 꺼내 쓸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볼 때 고시를 힘들게 하는 근본문제는 인간이 쉽게 잊어버리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몇 달전에 한번 읽었던 책의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자꾸 잊더라도 반복학습을 통하여 기억을 남게 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고시공부가 그래서 콩나물 기르기와 같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아래로 빠져 버리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콩나물이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시험에 가까운 때에 책을 읽는 것이다. 나는 고시합격에 있어서 단순히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보다도 시험날짜에 근접하여 여러 번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은 것이 시험 한달 전인 경우, 2주전인 경우, 1주전인 경우는 시험 당일 기억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전 과목 책을 한번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야 시험날짜에 가까운 시간에 모든 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시험에 접근하여서는 하루에 최소한 교과서 한권을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속도가 되어야 합격을 바라볼 수 있다.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지려면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책 내용을 이해하면 그만큼 빨리 진도를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책을 읽음에 있어서 온 정신을 집중하여 최대한 빨리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것이다. 책 한줄을 읽는데 1-2초를 허비하는 것이 책 읽는 사람에게는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사소한 것이지만 책 한권 전체, 그리고 고시공부 전체를 통해서는 엄청난 시간적 차이를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한 줄 한 줄 읽음에 있어서 1초의 허비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공부하면서 조금이라도 잡념이나 쓸데없는 사고를 해서는 안된다. 책 한줄을 읽고서 별 생각없이 잠시 멈추고 하는 나쁜 버릇이 있으면 의식적으로 없애도록 하여야 한다. 책을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피로를 가져온다.
나는 고시에 있어서는 속독학원에서 가르친다고 하는 것처럼 책을 대각선으로 읽거나 대충 읽는 방식이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되 책 읽는 동안 무심코 버리는 시간을 없애고 각자 가능한 최대의 독서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6-2. 내 자신과의 싸움
고시란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과외를 많이 한 사람은 고시공부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시험이 어렵게 출제되고 일류 고등학교에서도 과외가 성행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나는 대학 입학 할 때까지도 과외다운 과외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과외없이 공부하여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철저히 혼자 공부하는 훈련을 쌓은 셈이다. 좋은 책만 선택하면 그 다음에는 나 혼자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고 않고 지금까지 혼자 공부해 왔다는 점에서는 나도 일종의 자수성가(自手成家) 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체질을 가졌다는 것이 내가 고시공부를 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대학 4년을 보내면서 내가 고시에는 성공하였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는 졌다고 할 수 있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의지가 약하고 감정에 흔들리는 나로 하여금 생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하여 내가 대학시절 고시공부하는 바쁜 와중에도 불교와 기독교에 대하여 공부하고 상당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절망속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는 기분으로 시작한 구도(求道)의 과정이 나의 고시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사법시험때는 불교 덕분으로 정신적 어려움을 넘겼으나 사법시험이 끝난 후 불교가 신앙이라기 보다는 철학으로 이해되었다. 불교에 깊이 접근할수록 추상적 관념의 심연의 속으로 빠져 외무고시 기간중 일종의 무신론(無神論)으로 복귀하면서 새로운 모색으로 기독교에 접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외무고시 공부할 때는 불교와 기독교가 뒤섞여 있는 과도기였다. 행정고시 기간동안 기독교공부를 하면서도 고시공부하는데 급급하여 하나님이 아직 새로운 마음의 지주로 자리 잡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정신적으로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행정고시 시험일까지 밀고 나가자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행정고시 시험직전에 이르러 내가 봉은사에 가서 합격기원을 위해 예불을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 결정하던 일이였다. 사법시험 외무고시때는 봉은사에 갔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으므로 만약 이번에도 가지 않았다가 시험에 실패하면 공연히 낭패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다. 외무고시 2차를 치룰 무렵에는 내가 기독교에 입문(入門)한 상태였으나 확신은 없던 상태였었다.
그래서 혹시나 걱정하여 안전한 방도로 예불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행정고시 2차를 볼 즈음에는 기독교 속으로 상당히 들어간데다가 내가 깨달은 불교에 의하면 예불하고 안하는 것이 시험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으리라고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딱 감고 봉은사에 가지를 않았다. 그만큼 내속에 기독교 신앙이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약간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즉 과연 내가 불교에서 벗어났을 때 행정고시에서 사법시험 최연소, 외무고시 차석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행정고시 2차에 수석(首席)의 결과가 나오고 보니 마음속에 남은 불안이 순식간에 씻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부처님은 예불을 안한다고 하여 화를 내거나 해악(害惡)을 가하는 분은 아닌 것이다. 부처는 감정을 초월한 존재가 아닌가.
반면에 기독교의 신(神)은 나에게 화도 내시고 기뻐하시기도 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의 것과 유사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때문은 아니다.
하나의 산을 넘고 나면 거기서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새로운 산을 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새로운 산이 더 낮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대학시절 고시공부하면서 해를 넘길 때마다 공부하기가 더 싫어지고 힘들어졌던 것 같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시한을 정해 쫓기듯이 공부하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내가 고시공부를 하는 동안 입버릇처럼 했던 말은 이 하기 싫은 공부를 빨리 끝내야 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외무고시, 행정고시를 할 때는 시험 합격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공부는 더 하기 싫은 현상이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공부하기 싫다 고 하는 철부지같은 아들을 달래며 어머니는 참고 해보라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곤 하셨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었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고시합격 한다고 어머니에게 도움될 것도 없을 터인데 어머니는 지금까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너무나 큰 사랑 앞에는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말씀도 어색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로부터 나는 수행자의 자세를 배웠다. 의사로 개업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하루 하루의 일과를 일종의 수행이라고 생각하셨다. 예불로 하루를 시작하시던 아버지는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는 깨끗한 생활을 직접 실천하고 계셨다.
내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 불교에 심취하여 고시를 수행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집안의 분위기가 그러하니 공부하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아버지에 대한 단 한가지 불만은 오히려 너무 세밀할 정도로 나에게 신경을 써 주셨던 점이다. 그래도 내가 싫어할까 염려로 내가 공부하는 방에는 들어오지 않으셨다. 부모님이 나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억지로 시키셨다면 아마 나는 공부는 커녕 반대방향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누가 나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공부만은 나의 성역이었고 누구에게도 간섭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6-3. 맺는 말
고시준비하는 동안 올려다 보는 고시라는 산(山)을 한 없이 높아 보이지만 일단 올라 그 위에서 내려다 보면 별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고시라는 인내(忍耐)의 과정이 지나고 죽여버리고 인위적인 틀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것이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성공한 연기자라고 할 수 있다. 고시합격과 함께 본연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고시합격 후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내 존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고시합격 하였다고 하여 내가 갑자기 수재(秀才)가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달라진 것은 다만 다른 사람들의 평가일 것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신경쓰고 그것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나는 합격 후에도 연극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나는 고시합격의 큰 의의를 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것에서 찾고 싶다. 그렇다면 고시합격 후에는 더 이상 인위적인 왜곡없이 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지켜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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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고승덕 변호사님의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글인데 가져옵니다.)
자신의 소중한 젊은 날을 걸고, 인생의 중요한 시험을 앞둔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고 흥청망청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고 방만한 행동일까요.
우리들 중에는 시험에 최선을 다 하지 않고 합격의 영예를 얻는 자도 있을 터.
하지만 그것을 갖고 자기 스스로 자만에 빠져 경솔한 언행을 하는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수 만의 젊은 청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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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 잘 읽었어요~!!
배울점이 있긴 하지만.. 이사람 사람 자체로는 참 싫다.
저도 별로 안 좋아함. 알게 될수록 ㅎ
저도. 사람 됨됨이가 별로인 듯.
저도요 ㅎ
자~여기까지.
배를 산으로 가져가시지 마시길.. 배울 점은 배웁시다.(저는 이 글외에 이 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다 떠나서 손주현인가 메가스터디 만든 사람이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아요
ㅡ.ㅡ 공부의 90%는 유전자라고 ;;;;
그 분의 글도 보고 싶군요..^^
처음 볼땐 감동이었는데 이젠 좀 사골국같은.. 암튼 심하게 열공한 케이스.
ㄷㅅㅂㄱ
ㄷㅅㅂ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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