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따뜻한 친구들, prologue
지난해인 2023년 초가을쯤의 일이다.
불현듯이 ‘종심’(從心)의 내 나이를 떠올렸다.
마음 가는대로 따라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인데, 내 그 나이에 이르도록 인생을 제대로 살아왔나 되짚어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지나온 인생의 길목들을 쭉 돌이켜봤다.
20대 중반의 나이부터 반세기를 서울에서 살았다.
그 세월에 검찰서기보에서 검찰부이사관에 이르는 계급의 검찰수사관을 했고, 서울남부지방법원 집행관을 했고, 서울 서초동에서 ‘작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법무사를 했다.
그러다가 5년 전으로 거슬러 코로나19 팬데믹이 오면서 내 인생 마지막 직업이었던 법무사를 접었다.
한편으로는 훗날 귀향을 생각해서 십 수 년 전에 고향땅 문경에 650여 평 텃밭을 마련했었다.
그리고 그 텃밭에 ‘햇비농원’이라는 이름까지 새겨 붙였다.
나름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때부터 아내와 같이 주민등록을 그곳 텃밭으로 옮겨놓고 고향땅을 빈번하게 출입했었고, 3년 전에는 아예 영구귀향을 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니 중학교 동기동창이니 해서 고향 친구들과도 교분이 잦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학벌이라든가 신분이라든가 재물이라든가 해서 지나온 날의 내 존재의 의미들은 별 가치가 없고, 고향땅 친구들과 마음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우정이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나만 편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아내 또한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친구가 꼭 필요했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아내가 들먹인 이름들이 있었다.
만식이고 희구고 방연이고 휘덕이고 원현이고 해서 모두 다섯 친구들이었다.
이유인즉슨, 그동안 숱한 만남에서 느낀 것이 그 친구들은 모두 가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 친구들로 따로 모임 하나를 만들고, 부부 함께 편한 소통을 위해 카카오톡 단체방까지 열었다.
그 지은 이름, 곧 이랬다.
‘가슴 따뜻한 친구들’
그동안 여러 번 모임도 가졌었다.
2024년 올 해의 딱 절반을 넘어서는 7월 1일 월요일인 어제도 부부동반의 나들이를 했었다.
이웃 예천의 명승인 말무덤(言塚)과 선몽대(仙夢臺)를 다녀왔다.
특히 지보면 대죽리 156-1의 말무덤 주위로 새겨놓은 ‘말’(言)과 관련된 글들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깨우침으로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이 글에 유의했다.
‘한 점 불티는 능히 숲을 태우고, 한마디 말은 평생의 덕을 허물어뜨린다.’
꼭 요즈음 들어 특히 취중의 말이 많아진 나를 향한 글인 듯했다.
우리들 만남은 어느 때이고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함께 할 날이 그리 많지 않음을 우리 모두 다 알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함께 한 그 순간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다.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두고 싶어서다.
이제 그 글들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