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것만큼 행복해진다(주님의 세례 축일)
마태오복음 3,13-17
나자렛에서 30년쯤 무명인사로 숨어 계시던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대중 앞으로 나오셨다. 죄와 죽음의 운명을 당하는 사람들 중 하나로 자처하여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아주 짧은 한 걸음도 나아가기 부족한 우리와 동행하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길이 다 끊어진 것 같은 우리의 인생행로를 함께 가며 우리와 동고동락하고 생사를 같이하기로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죄가 없는데도 겸손하게 요한에게 가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고 죄인들과 대화하기 시작하셨다.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순종하셨다. 이는 훗날 예수님이 죄인들이나 받는 세례를 대신 받아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죽음을 당해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실현하시는 것을 예고한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죄인 취급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웃의 짐을 대신 져주고,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하라고 가르치신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는 자매님께서 천주교회를 다니는 언니와 함께 성지순례를 왔었습니다. 기도 생활도 잘하고,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는 전형적인 열심한 개신교회 신자였습니다. 언니는 동생 못지않게 열심한 천주교신자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성물 판매소를 하고 있으며 신앙생활이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영하는데 동생은 영성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하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동굴에서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 그림을 보고 그 동생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라떼라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데 언니가 조용히 이야길 합니다. 동생이 세례 받기를 원하는데 주면 어떨까요? 순간 생각했습니다. 저 열심한 개신교 신자가 지금 마음이 흔들릴 때 세례를 주고 천주교로 확 끌어 들일까! 하지만 다시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서 본당에 가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으라고, 그 동생은 정말 열심히 교리를 배웠고 성탄 무렵에 헬레나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언니에 뒤지지 않는 열심한 신자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 중에 천주교로 개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이름 이외에 서양 이름이 있는데 자기도 그런 서양이름을 갖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긴 가브리엘, 베드로, 젬마, 헬레나, 루가 이런 이름이 있다는 것이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멋있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례가 단순히 새로운 이름 하나 더 얻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세례란 무엇인가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저는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보았던 신문의 기사 내용이 생각납니다. 중국에서는 장군들이 매년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낸다는 기사였습니다. 장군들은 군 생활을 오래하였지만 장군이 되면서 병사들과는 많이 떨어져서 지내게 되고 그래서 병사들의 고충이 무엇인지, 병사들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장군들은 매년 며칠씩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 생활을 하고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병사들과의 일체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체험이 장군들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고 있으며 병사들도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방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장군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의 장군들도 그런 체험을 할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특권층’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런 특권층은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특혜를 받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특권층 중에 특권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몸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과 권한이 있지만 섬기려는 삶을 사시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세례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특혜를 받고 섬김을 받고 그래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않는 삶,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않은 삶 이였으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 이였습니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의 자녀로서 권리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세례”가 곧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례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이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례 받은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첫째, “바른 인생길을 가야합니다.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해야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를 풀어주는 이가 되어야합니다.” 둘째, 그러면서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모든 영광과 기쁨은 하느님께로 돌리는 겸손함이 있어야합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시듯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합니다
올 한 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미원 성당에 있는 연제식 신부님 그림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새해 지난 지 며칠 지났어요? 지난 4일 동안 카톡,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으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福 받으세요~’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복 많이 받으시고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흘러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사제가 여러분들에게 ‘福 받으세요~’ 하는 것은 올 한해 외로울 때, 눈물 날 때가 있다하더라도 임마누엘 하느님, 즉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복이다~ 그 뜻일 겁니다.
신앙인들의 3대 구호.....저도 하루에 네 다섯 번씩 외웁니다. 첫 번째, 하느님은 이 김신부를 사랑하신다~ 두 번째, 하느님은 현재 이 김신부의 어려움을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세 번째, 하느님은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실 것을 믿는다~ 이 세 가지를 구약성서에서는 한마디로 ‘야훼이레’ 라고 합니다.
사제가 福 받으시라는 뜻은 부자가 되라는 뜻만이 아니라 올 한해 어렵고 힘들더라도 첫 번째,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두 번째, 주님은 현재 나의 이 어려움을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세 번째, 하느님은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실 것이다~ 바로 ‘야훼이레’ 임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은총 자체이시고, 복 자체이셨습니다. 모든 복은 주님에게서 나옴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 가난한 목수로 살다가, 힘들고 외로운 전도생활을 하셨으며 고달픈 십자가 죽음으로 삶을 마치셨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여인’ 이라고 부르는 성모님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박복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으니 우리 신자들의 복은 세상 사람들의 복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늘 무슨 축일이지요? 주님공현대축일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드러내신 그런 날입니다.
동방의 세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났는데 동방의 박사들은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찬양하기 위해 귀한 선물을 안고 1200여km의 먼 길을 달려오지만 헤로데는 아기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합니다.
헤로데에게나 세 박사에게나 똑같은 별빛을 보여주었지만 이들이 별을 보는 마음과, 생각, 생각에 이어지는 행동들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들도 이 강론을 듣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똑같은 강론을 듣고 죄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성서를 읽어도 살아가는 모습은 각자 다를 수가 있습니다. 똑같은 체험을 하였다 하여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우리들은 별을 보고 그리스도를 찾아 나선 박사들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해야 할 겁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에 나병 환자촌에서 여름방학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도 고통을 못 느낍니다. 한평생 나병환자들을 돌본 미국인 의사가 나병환자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바로 ‘고통’이라고 합니다.
고통은 일종의 경고입니다. 고통이 우리 인간에게 없다면 영적으로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촛불에 손을 대고도 아프지 않다면 손이 타들어가도 몰라요.
신부 되기 전에 나병환자 촌에서 큰 영향을 주었던 분이 계십니다. 나환자인 그분은 팔다리가 없어서, 공소까지 걸어서 20분이면 갈 거리를 무려 세 시간이나 배로 기어 올라갑니다. 그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소에 가서 십자가의 길을 합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러 공소에 올라가갔더니 그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엎드려계신 겁니다. “형제님, 왜 안 들어가십니까?” “문을 열어 줄 사람이 공소안에 아무도 없어요.” 날씨가 추워서 그날은 아무도 오지 않은 겁니다. 손가락이 있어야 문고리를 돌리지요~ 머리로 꽝꽝 치다가 머리가 터진 겁니다.
나중에 세상 떠나기 전에 그분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때는 사제였는데 제 품안에서 숨을 헐떡이며 하시는 말씀이 “신부님, 제 몸이 이렇게 된 것, 하느님께 원망한 적이 없지만 손가락으로 묵주 돌리는 사람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묵주 돌릴 수 있는 손가락 두 개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저씨, 천국에 가시면 손가락 열 개 다 만들어 주실 테니까 편안히 가세요.” 그분은 제 품안에서 돌아가셨지요. 일주일 뒤에 생시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스테파노 아저씨는 온몸이 부활해서 손가락마다 묵주를 들고 “신부님 저 손가락이 생겼어요.” 꿈이지만 너무나 기뻤어요.
꽃동네 앞에 가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 표현으로 부족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묵주를 굴릴 수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요~ 내 발로 성당 문턱을 넘을 수만 있어도 그건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머리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은총으로 코팅이 되어 있지만 어두운 면만 보고 삽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하지요?’ 없어진 다리를 보아야 해결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동방의 세 박사들처럼 그 별을 나침반으로 삼아서 따라 가십시오!
그 별빛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이 거기서 기다리실 겁니다. 온갖 어려움을 디디고 일어서면서 용감히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괴롭다고 십자가 버리거나, 남 주거나~ 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대부분의 십자가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일 겁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의기소침하거나 주눅 들지 마십시오. 억지로 지는 십자가라해도 예수님은 좋아 하십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일 끝나고 집에 가다가 예수님 대신 십자가 졌지요. 덩치 큰 것이 죄가 되어 재수 옴 붙은 겁니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 졌지만 예수님은 그동안 쉴 수 있으셨고, 다시 힘을 내어서 골고다까지 올라가실 수 있었던 겁니다.
동방의 세 박사는 귀한 선물을 예수님께 기쁘게 드렸어요. 가장 소중한 것 - 황금, 유향 몰약을 드렸어요. 이 세 가지는 세상에서 왕, 권세를 나타내는 중요한 선물이지요.
우리도 올 한 해 동안, 착한 행위로 하느님께 예물을 드립시다. 우리 기도로 정성껏 기쁘게 예물을 봉헌합시다.
세 박사는 예수님을 만남 후에 헤로데에게 갔습니까? 헤로데에게로 가지 않고 천사들이 안내한 대로 선의 길, 착한 길로 들어섰던 겁니다.
우리는 영세를 하고, 미사 중에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 후에 성당을 벗어나면서 어느 쪽의 길로 가야할 것인가?
새해를 맞는다고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는 게 아닐 겁니다. 늘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천 번의 새해가 돌아온다 해도 그 사람에게 새해는 뜨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별이며 나침반이십니다. 자주 그분을 바라보면서 은혜로써 새해를 걸어가기를 권고합니다.
오늘 동방박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주님께 봉헌했듯이 올 한 해 동안 기도의 봉헌, 절제의 봉헌, 행위를 나타내는 착한 봉헌, 이웃을 돕는 자선의 봉헌을 합시다.
주님께 귀한 선물을 드린 동방박사들의 이름이 2천년 동안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듯이 우리의 이름도 하늘나라에 기록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 (2014. 1월 4일 배티은총의 밤
배티 성지 - photo by 느티나무 신부님 |
2014년 가해 예수 세례 축일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복음: 마태오 3,13-17
바오로의 개종
미켈란젤로(Michelangelo) 작, (1542-45), 바티칸 폰티피치 궁
< "순수는 강하다." >
"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 아이가 되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
피카소가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순수.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기 힘든 것, 그러나 꼭 찾아야 되는 것, 무엇보다 급한 일. 작가 송정림씨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타인의 불행에 가슴 아파 눈물짓던 동정심, 노래 한 소절에 가슴이 아리던 감정, 시집을 끼고 다니며 시 한 수를 외우던 설렘, 아주 작은 기쁨에도 티 없이 기뻐하던 순수성. 도대체 누가 훔쳐 버린 걸까요?’
그리고 송 작가는 그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기 위해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입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잔인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 천진난만한 아이들 소리. 그곳으로 무엇인가가 떠내려 옵니다. 소녀의 주검입니다. 소녀는 순수성을 상징합니다. ‘시’는 바로 순수. 영화는 처음부터 단언을 내립니다. 이 세상에서 시는 죽었다고, 순수는 사라졌다고.
예순여섯의 미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는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홀로 손자를 키우며 살아갑니다. 그녀는 소녀 같은 마음을 지녔습니다. “난 꽃을 매우 좋아해 꽃을 보기만 해도 배불러서 밥 안 먹어도 돼요.”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얼마 안 되는 순수한 사람입니다.
미자가 듣는 시 문학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모두 순수한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에게 노래를 가르쳐 드렸던 순간, 첫 아이를 낳는 순간, 반 지하 방에 세 들어 살다가 자그마한 임대아파트를 얻어 들어갔던 순간, 이룰 수 없었지만 사랑을 느꼈던 순간, 그리고 어린 시절의 어떤 한때.
그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게 사랑했고, 순수하게 감사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을 발표할 때 발표자들은 하나같이 울먹입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순수를 지니는 일인데,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그 순수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살아왔음을 느끼는 자각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렇게 대부분은 그 순수를 잃고 지금까지 단 한 편의 시를 써 볼 마음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시를 한 번도 쓰지 못하고 이렇게 흘러왔습니다.
물론 미자도 시를 쓰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어요?”
그 질문은 “어떻게 하면 순수를 지킬 수 있어요?”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 누구도 시원하게 대답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이미 순수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미자는 그래서 엉뚱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런 미자에게 현실이 닥칩니다. 사랑하는 손자가 오프닝 장면에서 보였던 소녀의 죽음과 연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손자와 친구들이 그 소녀를 자살에 이르게 한 거지요. 미자는 손자가 괴로워하기를 바랍니다. 나쁜 짓을 하면 괴로워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에는 피멍이 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는 무덤덤합니다. 죄의식이 없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손자와 같이 죄를 지은 아이의 부모들은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고 합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미자는 갈등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손자의 마음에서 벌써 순수가 사라져 버린 것이 미자는 슬픕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변인처럼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는 미자를 ‘시나 쓰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시는 죽었고, 세상은 손자처럼, 혹은 손자의 친구, 그 부모님들처럼 무신경합니다. 미자가 즐겨 쓰던 하얀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갑니다. 그 하얀 모자가 날아가 버린 것처럼 미자도 순수를 버립니다.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러나 미자는 손자를 위하는 게 진정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손자의 죄를 덮는 것이 진정으로 손자를 위한 길인지 갈등합니다. 죄를 지은 자식은 마땅한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순수입니다. 순수는 곧 사랑입니다. 미자는 손자를 위한 선택을 해야 했지요. 손자를 경찰에게 넘깁니다. 그리고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시 한 편을 완성하게 됩니다.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은 순결한 눈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영화 속에서 걸어 나와 미자가 묻습니다. 당신 마음 안에서 순수는 안녕하시냐고.
[참조: 내 인생의 화양연화 중, ‘순수는 강하다’]
세례란 무엇일까요? 물로 씻고, 옛 나를 물속에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릴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 이것은 이제 무뎌진 감정을 걷어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내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나의 불편함부터 생각해버리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작은 멸치들을 볶아 놓은 것을 먹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저와 같은 사람들도 만나기도 했지만 창피해서 말 못하던 것인데, 사실 저는 그 멸치들의 눈이 싫었습니다. 자기를 먹는 나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집에 꽃을 꺾어가고 싶었지만 꽃이 아파할까봐 꺾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순수함은 지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의 아픔부터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순수함이 있다면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더 닮아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서른 살까지는 그렇게 당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을 깨고 나와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세상을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순수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곧 세례인 것이고 그 세례는 이 세상에 나가 다른 이의 고통을 대신 져 주라고 나를 밀칩니다.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정말 강한 것은 순수함이라고. 그리고 그 순수함이 바로 사랑이라고. 그 사랑은 온 세상과도 맞서 이길 수 있는 강함이라고.
지금 개봉하며 많은 관객을 끄는 영화 ‘변호인’을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부산에서 가장 잘 나가던 한 변호사는 정치와 관계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의 출세와 돈, 명예보다 한 아이의 아픔이 더 가슴깊이 다가왔습니다. 순수성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을 희생하며 가난한 이를 위해 싸워나가게 됩니다. 정말 힘없고 비겁했던 것은 세상에 타협하며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의 아픔을 품어주기 위해 온 세상과 맞서 일어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음은 깨끗해지고 순수해진다는 뜻입니다. 그 깨끗한 눈으로 보니 온 세상엔 눈물 날 감동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의 눈을 만들어주시고, 또 바오로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게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눈은 나를 소진시키기는 하겠지만 이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위해서 눈물 흘려 줄 수 없다면 아직 우리는 온전히 세례를 받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순수는 강합니다. 매일 매일의 세례로 순수의 힘을 회복합시다.
지난 1월 6일 파키스탄의 한 고등학생이 학교에 들어가려는 자살폭탄 테러범을 제지하다가 폭발로 함께 숨지면서 많은 학생들 목숨을 구했다. 주인공은 아이티자즈 하산이다. 그는 아이티자즈는 오전에 지각한 벌로 교문 앞에서 조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20대 괴한이 다른 지각생 두 명과 함께 교문 밖에서 기다리던 그에게 다가와 학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다른 지각생 한 명이 괴한 조끼에 폭탄이 달려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다. 지각생 둘은 황급히 교내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이티자즈는 괴한이 교내로 들어가는 것 막았다. 결국 실랑이 끝에 괴한이 조끼에 달려 있던 폭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아이티자즈는 그와 함께 죽고 말았다. 교내에는 2천 명쯤 되는 학생이 조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의 형 무지타바는 “동생이 이처럼 위대한 죽음을 맞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동생은 자신을 희생해 수백 명을 구했다.”고 말했다. 아이티자즈의 아버지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아들이 죽었어도 귀국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러나 아들이 극소수 전 세계 순교자 대열에 합류해 자랑스럽다.”고 눈물을 삼켰다. 그의 아들은 다른 학생들이 받을 ‘세례’를 대신 받았다고 비유할 수 있겠다. 이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도 큰 충격에 빠져 있다.
성인은 좋은 습관, 좋은 성격을 연마하여 하느님을 향한 사람과 이웃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데 습관이 된 분들이다. 그분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악습을 과감하게 버리고 좋은 습관과 헌신적 성품을 연마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고통 가운데서 행복을 누리실 수 있었다.
비누가 제 몸을 녹여 때를 말끔히 씻어 주듯, 촛불이 제 몸을 태워 빛을 비추듯, 우리도 자기를 희생해야 하느님과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가진 것 만큼밖에 줄 수 없다. 더욱더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더 많이 베풀 수 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과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한 오래 오래 최선을 다하라. 스페인의 파블로 카잘스는 첼로의 천재로서 은퇴한 뒤에도 90세가 되어서도 하루에 6시간씩 첼로를 연습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요즈음도 자기가 더 나아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방법이 있다면, 계속 노력하자. 한 인간이 최상의 사랑을 성취한다면 수백만 사람들의 미움을 해소시키는 데 충분하다(M.K. 간디). 사랑을 실천하여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는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분이 곧 오늘 죄인들을 사랑하신 나머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닮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나마 살만한 곳으로 바꾸어준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것만큼 행복해진다. “행복이란 남에게 도움을 주면 생기는 부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