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물 박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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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물 박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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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70] (1991. 6. 14. 한겨레신문 연재. 박근애 글)
천민 출신의 ‘대금 명인’박종기(1879~1939 추정)
조선말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대금 독주로 일세를 풍미했다는 대금 명인. 지금도 진도 벌판에살아 흐르는 <진도아리랑>에 곡을 붙였고, 대금산조를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박종기는 멀지 않은 과거의 삶이 어느새 전설속으로 묻혀 가고 있는 음악인이다. 서양음악이 이 땅에 전래된 뒤 음악사의 맥을 뺏긴 전통음악, 그중에서도 속악의 길을 걸어온 한낱 천민에 지나지 않은 사람들의 자취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라져버렸는지는, 손톱만한 독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박종기의 삶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생몰연대는 1880~1947년 또는 1879~1939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둘러싼 각종 문헌과 후손들, 국악인들의 견해는 제각각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세습무당인 아버지 박기순과 어머니 김사현 사이에서 둘때 아들로 태어난 그가 보낸 짧지 않은 생애는 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이면서 천민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간승리의 일대기이다.
증명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그는 무당이라는 숙명을 지고 이 세상에 왔다. 이 때문에 호구지책으로 소리든 악기든 직업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었다.
목청이 좋지 않던 그가 젓대 또는‘절대’로 불리는 대금을 배우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 젓대 하나로‘신접이라 일컫는 독보적 경지에 닿아 서울에까지 진출, 숱한 제자를 배출해내고 당대를 들썩이게 한 명인이 된 것이다.
“여그서는 유성기판을 박종기판이라고 불렀어. 그 양반이 대금대가 벌어져서 끈으로 충총 감아 놓은 것을 보고, 뭔가 단단히 감아놓고 있으면‘아따. 박종기 절대 감듯 한다’고 말들 했을 정도로 유명했다지.”
박종기의 손자뻘인 진도씻김굿 인간문화재 박병천(60)씨는“젓대는 원래 굿판에서 쓰이던 악기인데, 그때까지 흔하던 시나위의 차원을 뛰어넘어 판소리를 가락에 얹어서 산조를 처음 만든 것은‘단골’이라고 다 흉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라고 말한다.‘단골’은 소가 새끼를 낳아도, 어린 아이가 감기에 걸려도 그 처리를 담당하는 등 서민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있던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박종기의 삶을 1880~1947년으로 보는 민속악연구가 박금애씨는‘산조의 계보와 그 전래’<공간> 108호, 76년)란 글에서“박종기는 그 고을 예인들의 집합처로 예능인들의 예술을 가르치고 그들간의 제반사를 의논하여 처리하는 공공기관인‘신청’에서 기거하며 독공하였다. 대금은 악기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악기이므로 오랜 적공 끝에 득음을 이루면 듣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지만 수련중의 서투른 소리는 시끄럽기만 할 뿐 듣기 싫은 것이다. 여러 선배들의 핀잔에 견디다 못해서 그는 이른 봄에는 따뜻한 양지쪽을 찾아다녔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 밑에서 각고탁마하였다”고 그의 수업과정을 전하고 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불었제”
그의 대금 수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전하는 후손의 소리는 조금씩 다르다. 막내딸 화심(80)씨는“대금은 청춘에 진도읍에서 삼시롱 칠전 박헌일씨가 젓대를 부는 것을 보고 배웠다고 해, 어디서 젓대 소리만 나면 성뚝에 가서 하루종일 앉아서 불었제”라고 회고한다. 한편 진도 근처 전남 장사면의 갑부 아들로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나오고 가야금과 서화에 능한 한량으로 박종기와 친하게 지냈던 장홍일(80·서울 성북구 정릉2동)씨의 증언은 그의 활동과 기량, 남모르는 피나는 노력 등을 짐작하게 한다.
장씨가 16살 때인 1926년 장가를 갈 때 삼현육각을 올렸는데 그때 대금을 분 박종기와 인연을 맺어 그의 사랑방에서 1년에 2~3차례 3~5일씩 묵으면서 그는 가야금을, 박종기는 대금을 불며 합주를 하곤 했다.
그는 박종기가 일자무식으로 독학을 통해 문자를 깨우치고 독공으로 신접의 경지에 이르렀던 점도 그렇지만 그의 피눈물나는 노력에 대한 감탄이 더 크다.“자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부나”하고 물으면“그냥 되는 게 아니라 제가 공력을 들이니까 그렇죠”라면서 저녁밥을 먹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젓대를 불면 젓대 구멍 하나하나에 모인 진같은 미세한 습기가 떨어져 한종지씩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의 활동의 실마리로 남아 있는 것은 일본에서 취입된 50여장의 음반이다.
신나라 레코드사의 사장 신현오씨와 부사장 정문교씨가 20~30년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수집한 유성기 음반에는 박종기판이 적잖이 들어 있다. 그 판들의 일련번호로 보아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후반 사이에 나온 것이라는 게 문화재 전문위원 이보형씨의 고증이다.
이 시기에 박종기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성악 연구회, 명인 총집결
1933년 서울에서 창립한 조선 성악연구회가 2년 뒤 전주 우석대의 창립자인 김종익의 지원으로 규모를 갖추면서 국악계의 명인 명창들이 총집결하게 되는데, 박종기도 이때 기악부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당시의 진용은 창악부에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을 위시하여 한성준 오태석 임방울 이화중선 김소희 김여란 박녹주 김연수 등 남녀 명창과 기악부에 박상근 강태홍 한주환 신쾌동 김종기 등 1백30여명에 이르렀다. 판소리연구가인 박황(76)씨는 <판소리소사>(신구문화사 74년)에서 이 단체에 대해“그들은 창극운동의 전개와 후배양성이라는 2대목표를 세우고 직속극단으로 창극좌를 조직, 전원이 총동원되어 <춘향전> 등으로 화려한 창립공연을 시작했다”고 썼다.
민족예술이 붐을 이루자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라디오방송은 물론 콜롬비아·빅타·포리들·오케이 등 일본의 레코드회사에서는 앞을 다투어 창악, 기악 할 것 없이 명이 명창의 가락과 더늠을 음반에 취입, 제작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림으로써 민족예술은 원각사 이래 최대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에도 그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여느 예인들의 생활과 다름 없이 대갓집의 잔치 등에 불려 다니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나라레코드사가 보관중인 이 때의 레퍼터리는 오케이사의 <농부가><곽시부인 북망산행><사설시조><평시조><성주풀이><개고리타령><수궁풍류> 등과 콜롬비아사의 <자진 농부가>, 빅타사의 <진도아리랑><등가타령>, 다이에이사의 <일절통곡> 등이다. 이 음반에는 오태석 오비취 김소희 임방울 이화중선 이소향 신숙 등의 창에 맞춰 박종기가 대금이나 북, 장구 반주를 넣은 것으로 돼 있어 그가 대금뿐 아니라 다른 타악기에도 능하여 판소리에서 각종 무가·잡가에 일가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대금산조를 독주한 판은 빠져있다.
대금산조의 시조라는 설과 진도아리랑의 작곡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원로 판소리학자 장사훈씨는“이를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나 섣부르게 구전민요를 특정인이 작곡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한편 진도 무형문화제<다시래기>의 원형을 처음으로 복원했고 추모비 건립 추진위원이었던 국악인 곽문환(71)씨는“원래‘아롱타령’으로 일정때 민족의 벙어리·귀머거리 신세를 빗댄 전통민요가 내려왔는데 요즘말로 편곡이라고 할 수 있게 박종기씨가 정식곡조를 붙여버렸제”라고 진도아리랑과 박종기의 관계를 정리한다.
이보형씨는“<진도아리랑>을 직접 취입한 김소희 선생의 증언으로 보아도 그가 진도아리랑의 곡조를 지은 것은 확실하고, 그보다 레코드판에 그가 남긴 대금 가락에서 지금의 대금산조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통해 그가 대금산조의 시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당시 젓대를 부는 사람 치고 그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어깨 너머로 배워 제자로 알려진 이가 작고한 대금 무형문화재 강백천씨를 비롯, 한주환·김두재·한번수 씨 등이고 한주환씨의 제자인 이생강씨는 자신이 그 계보를 이어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네 아들들도 모두‘단골’로 생활했는데 피내림인 듯 대금과 피리, 새납 등에 뛰어났다고는 하나 한결같이 요절하거나 참담할 정도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해, 딸을 비롯한 숱한 후손이 남아 있지만 당대에는 지천이었을 자료들을 전혀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변변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은 한 두가지가 아닌 듯하다. 우선 그가 천대를 받던 국악인 중에서도 더욱 빛을 못받은 악공이었다는 점에서 촬영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푸르뎅뎅한 얼굴빛에 우스울 정도로 못생긴 데다 심한‘진발이’(절름발이)였다는 점은 스스로 사진찍기를 꺼렸다는 설을 뒤받침해준다.
그러나 경성방송국과 레코드취입 등 숱한 자취를 남겼음직한 그의 삶은 관청에서 세운 공적비와 진도군청이 낸 <옥추의 얼> 등 각종 자료에도 연대마저 제각각 다르게 적혀 있는 것만 봐도 성의있는 자료수집이나 기록의 노력 부재를 탓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도지역 국악인과 관리들은 84년 10월 진도군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 추모비를 세워놓았다. 74년 첫 시도 이후 10년만의‘성과’였다.
유별난 효행 널리 알려져
박종기의 삶에서 가장 전설적인 일화는 출천지효(出天之孝)라 불리는 그의 유별난 효행이다. 어머니가 죽을 병에 걸리자 자신의 넙적다릿살을 잘라 바쳤다는 얘기다. 다시 어머니가 운명할 처지에 놓이자 왼쪽 넙적다릿살을 잘라 이때의 심한 상처 탓에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무 10년인 1906년 그의 효행에 감동한 유림의 천거로 국가에서 내린 효행상장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박종기는 이렇듯 일화와 구전의 숲 속에 희미하게 전해오는 전설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역시 극적으로 마감한다. 완도에서 있었던 어느 대갓집의 회갑잔치 공연중 대금 끝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중간하기를 요청하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곡을 완주한 다음에 토혈을 하며 쓰러지자마자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의 남다른 장인 정신을 엿보게 해주는 죽음 뒤에 살아남아서 <진도아리랑>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 가사를 얻어가고 있다.
“아리 아리랑, 쓸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낫네...”
[출처] 박종기|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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