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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 제사. 도가사상. 성리학. 실학
유교(儒敎)
춘추시대 말기 산동반도 제나라 공자의 사상.
중국 고대국가 황실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정착.
한나라 무제 때인 BC 136년에 국교가 된 이래
청나라 패망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중국의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던 사상이다.
유교는 300년 무렵 처음 시작되어
유(儒)·불(佛)·도(道) 3 교로 발전.
유교는 사대부(통치자 계급·지식인)의 학문
중국은 물론 이조시대 윤리관의 바탕이 된다.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 = 군자 = 통치자.
소인(小人)은 스스로 수양능력이 없고,
교화받을 사람을 지칭한 말이.. 소인배.
최고의 덕목을 갖춘 사람 = 성인(聖人) = 제왕(帝王).
유교의 근본사상은 인(仁). 배려심이 넓은 사람을 지칭.
한반도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부터 한사군, 삼국시대 고구려가 처음 수용,
차츰 발전시켰고 그 다음이 백제이고 마지막이 신라.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한반도에서는 이조시대에 꽃핀 유교사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 정착.
그러나, 15세기 말 영남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한 이래 훈구파와 대립.
사대사화(四大士禍)를 빚은 유림 세력.
기묘사화 이후 정계진출 단념 풍조.
서경덕과 이언적은 이조 성리학 선구자.
그후 이황과 이이가 성리학의 대표적 학자.
17세기 후반 성리학에서 비롯된 실학 사상
19세기에는 알맹이 없는 세도 정치로서 발전
그후 외국 사상 문물에 대한 배격 운동이 전개
그러나, 한반도 개혁에 장애가 된 유교사상.
이조 말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사상만 고집
결국 이조는 쇄국정책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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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킬 도리 3강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3강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5륜.
父子有親, 君臣有義, 부부유별,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
부부유별은 남녀차별이 아니라
구별에 의해 각자의 직능 완수.
'삼강오륜은 유교사상의 기본.'
..............한반도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논어...................
논어(論語)는 공자의 언행록(10권 20편)이고. 유교(儒敎)의 통설
공자가 죽은 후,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논찬(論纂)해서 만들었다.
진나라 시황제가 불태운 후 후한(後漢)은 널리 논어를 찾아 나섰다.
후한의 정현(鄭玄)은 노(魯)·제(齊)·고(古)의 3 종을 절충해 편집(20)
논어는 한(漢)나라 때 이미 오경(五經)에 필적할 지위에 있었다.
송(宋)나라 이후 맹자 대학 중용과 함께 사서(四書)라 불리웠다.
통일신라시대 682년(신문왕 2) 인재등용할 때 논어는 필수과목.
이조 시대는 오경보다 사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자학이 등장
사서의 중심인 논어는 농촌의 아이들까지 서당에서 배우게 되었다.
이황(李滉) 논어석의(論語釋義), 이덕홍(李德弘) 사서질의(四書質疑)
정약용(丁若鏞)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등등이 논어를 해석한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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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유교관은 조상을 섬기는 제사(祭祀)를 소중히 여겼다.
망자의 혼을 달래고 조상 은덕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제사의식.
제사는 복잡한 형식보다 그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조상 없는 자손이 있을 수 없다’
옛 사람의 교훈이 아니더라도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
나를 존재하게 해준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손으로서의 도리.
1년에 한 번 기일(忌日)만은 보은(報恩)의 뜻으로 예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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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제사는 원래 천재지변, 질병, 맹수의 공격을 막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
이조의 유교관으론 조상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가정마다 제사를 드렸다.
우리나라는 수백년 간 4대봉사(四代奉祀)로 종손(宗孫)이 제사를 지냈다.
요즘 제사는 기제(忌祭), 묘제(墓祭), 절사(節祀) 정도 지낸다.
조부모 부모의 2대 봉사를 원칙으로 하고 시간도 기일 일몰 후
우리나라에서 전통 제례인 제사를 지내는 방식은 아래와 같다.
..............제수 음식차리기.............
대추와 밤은 자손번성을 위한 것이다.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 하여 쓰지 않는다.
치자 들어가는 생선은 '치(治)와 음이 같은 탓.
‘다스릴 治(치)가 조상을 다스림을 경계한 의미.
수박·참외는 기어자라기에 젯상에는 쓰지 않는다.
과일은 맨 앞 줄에 진설하는데, 이 때 붉은 색 과일은 동쪽
흰 색 과일은 서쪽에차렸고 이를 홍동백서, 조동률서라 한다.
붉은 색은 동쪽을 상징하고 흰색은 서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편 젯상음식을 12支에서 보면 양에 해당되는 동물만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축, 절, 사, 미, 서, 해(丑, 卯, 巳, 未, 酉, 亥)축,만 가능
그러나,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는 음식에 한해 예외인 경우도 있다.
제례 음식을 한자로 쓸 때는 제수(祭羞)라고 쓴다.
제수(祭需)란 제례에 소용되는 금품을 말하는 것이다.
조리된 음식은 제수(祭羞)라 하고 그릇 수를 김장생(金長生)
그 이유는 음양의 조화이라 가례집람(家禮輯覽)>에 씌여있다.
땅에 뿌리를 박은 곡식이나 채소 과실은 지산(地産),
즉 음산(陰産)이기에 같은 줄에서 음수인 짝수로 한다.
떡과 국수는 같은 줄에 놓기에 떡과 국수를 합해서 짝수.
과실은 생과이든 과자이든 땅에 뿌리를 박았기에 짝수의 접시수.
땅에 뿌리박지 않은 고기나 생선은 같은 줄에서 양수인 홀수로 한다.
탕은 고기·생선이 재료이고 한 줄에 놓기 때문에 홀수인 3 또는·5 그릇.
전과 적은 모두 고기와 생선이 재료이며 한 줄에 놓으므로 합해서 홀수.
전은 2 또는 4 종류이고 적이 3 적이 되었기 때문에 홀수여야 한다.
숭늉은 식후에 마시므로 밥(메)을 숭늉그릇은 따로 떼어 놓는다.
............................전통 제례의 순서..............................
영신 - 분향- 강신- 참신- 초헌- 독축 - 아헌 - 종헌 -첨작
- 계반과 삽시- 계문- 헌다-철시복반 -사시 -철상 -음복.
영신
대문을 열어 놓고 제상 뒤쪽(북쪽)에 병풍을 치고 제수를 놓는다.
지방을 써붙이고 출주(사당에서 신주를 모셔내오는 의식)를 한다..
분향(焚香), 강신(降神)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무릎끓고 앉아 향로에 향 피우는 것.
강신은 神位께서 강림하시어 음식을 드시기를 청한다는 뜻이다.
집사가 제상에서 잔들어 제주에게 건네주고 잔에 술을 조금 따른다.
제주는 잔들고 향불 위에 3번 돌리고 모사에 조금씩 세 번 나눠 붓는다.
모사는 제사 또는차례를 지낼 때 술담는 그릇의 이름.
모사에 술담는 것은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알리기 위함.
빈잔을 집사에게 다시 건네 주고 일어나서 두 번 절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하늘에 계신 신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다.
참신(參神)
고인의 신위에 인사하는 절차 (제사에 참석한 사람은 일제히 두번 절)
신주인 경우에는 참신을 먼저 하고, 지방인 경우에는 강신을 먼저 한다.
미리 제찬을 진설하지 않고, 참신 후 진찬이라 하여 제찬을 올리기도 한다.
진찬 때는 주인이 육, 어, 갱을 올리고 주부가 면, 편, 메 등등 제찬을 올린다.
초헌(初獻)
제주가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제주가 신의 앞으로 나아가 끓어 앉아 분향.
집사가 잔을 제주에게 주고 술을 가득 붓는다.
제주는 오른손으로 잔들어 향불 위에 세 번 돌린다.
그리고 모사에 조금씩 세 번 붓고 두 손으로 집사에게 준다.
집사는 그것을 받아 메 그릇과 갱 그릇 사이의 앞 쪽에 놓는다.
이어 제물 위에 고인이 즐기던 음식 위에 젓가락을 올려 놓는다.
제주가 두 번 절을 한다.
잔은 합설인 경우 고위 앞에 먼저 올리고 다음에 비위 앞에 올린다.
집안의 풍습에 따라서는 술을 올린 뒤 메 그릇의 뚜껑을 열어 놓는다
독축(讀祝)
초헌이 끝나고 모두 끓어 앉으면 축관이 옆에 앉아 축문을 읽는다.
축문은 제주가 읽어도 되는데 엄숙한 목소리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축문 읽기가 끝나면 모두 일어나 두 번 절.
독축 후 곡이 끝나면 모두 일어서며 제주는 재배
아헌(亞獻)
두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으로 원래는 주부가 올린다.
(주부가 올리기 어려우면 제주의 다음 가는 근친자나 장손).
절차는 초헌 때와 같지만 모사에 술따르지 않고 주부는 네번 절.
종헌(終獻)
아헌 다음 가는 근친자가 3번 째 올리는 잔
아헌 때와 동일하게 잔은 7부쯤 부어 올린다.
첨작(添酌)
종헌자가 채우지 않은 술잔 앞에 제주가 무릎 꿇는다.
또 다른 잔에 술을 조금 따라 좌우측 사람이 술을 채운다.
종헌 후 조금 기다려 제주가 다시 신위 앞에 나아가 끓어 앉는다.
집사는 종헌 때 7부쯤 따른 술잔 위에 세번 첨착하여 술잔을 채운다
계반(啓飯)과 삽시(揷匙)
첨작 후 주부가 메(밥) 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중앙에 꽂는다.
계반은 메(밥)그릇 및 탕이나 반찬의 뚜겅을 열어 놓는 것을 말한다.
메 그릇에 수저를 꽂는 것을 삽시라 한다.
숟가락 바닥은 우측으로 향해 꽂아야 한다.
수저는 동쪽으로 향하도록 꽂아야 한다.
그후 젓가락을 고른 뒤 어적이나 육적 위에 옮겨 놓는다.
삽시정저가 끝나면 제주는 두번, 주부는 네 번 절한다.
계반(啓飯)과 삽시(揷匙)
모두 잠시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 것을 말한다.
이때 대청이나 마루에서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합문의 시간은 합을 9번 떠먹을 동안의 시간이다.
대청 마루에 제상을 차렸으면 뜰 아래서 읍한 자세로 기다린다.
단칸방 경우에는 제 자리에 엎드려 몇 분 동안 있다가 일어선다.
계문
닫았던 문을 여는 절차.
축관이 헛기침을 세번하고 문 열고 들어가면
제사의 참사자가 모두 그 뒤를 따라 들어간다.
헌다(獻茶)
숭늉을 갱(국)과 바꾸어 올리고 메를 조금씩 3번 떠 말아 놓고 정저한다.
이때 참사자는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잠시 조용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든다.
철시복반(撤匙復飯)
숭늉 그릇에 있는 수저를 거두어 제자리에 놓고
메 그릇을 덮는 것을 말한다.
사신(辭神)
고인의 영혼을 전송하는 절차.
참사자가 신위 앞에 일제히 두번 절.
그런 후에 지방과 축문을 불에 태운다.
지방을 축관이 모셔 온다.
신주일때는 사당으로 모신다.
이로서 제사의식 절차는 끝난다.
철상(撤床)
모든 제상 음식을 물리는 것을 말한다.
철상은 제상 위쪽부터 다른 상으로 옮겨 물린다.
飮福(음복)
조상이 주시는 복된 음식이라고 여긴다.
참사자가 모두 시식하고 이웃에도 나눈다.
인간은 동물의 고기과 식물의 씨앗을 먹고 산다.
원래 묘를 쓰는 취지는 그 죄를 뉘우치는데 있다.
죽은 시신으로나마 빗을 갚으려는 것이 근본 목적.
빼앗은 고기를 돌려주고 식물의 양분이 되려는 마음.
고인의 후손이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성리학의 근본.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
이조에서 족보가 보편화된 시기는 1565년(조선 명종20년)
17세기 이후 양반 가문들이 다투어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상을 미화하고, 조상 벼슬을 과장하며 유림 간에 권세 경쟁.
사대사상 탓에 조상뿌리를 중국왕조에 둔 조작된 족보도 성행.
제사 풍습이 성대해지기 시작했고 격식도 점점 더 복잡다단.
조상을 섬기기보다 허례허식 제사가 양반 가문 중심으로 성행
사대부 가문들이 경쟁적으로 종친회 제사까지 성대하게 치룬다.
특히 삼족이 멸하는 사화가 잦아지자 종친회는 가문 단합대회.
이조에서 제사가 성대해질수록 장자 및 남성 중심사회로 변모.
권세가문 중심으로 축첩 제도가 성행했고 남존 여비사상이 득세.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유교문화가 이조에 정착.
이조가 추구하는 유교사상은 민생치안과 동떨어지게 변질되었다.
결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조는 단군 이념과 거리가 먼 정치 제도.
'이조의 유교사상 중심의 정치제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조가 국란에 빠졌을 때 왕실 유림 지배층은 너무나 무력했다.
이조는 문인 중심의 붕당정치와 쇄국정책으로 나라를 잃게 된다.
이조는 사대주의로 강대국에 의지하려 했고 국력을 키우지 못했다.
이조는 민생과 거리가 먼 유교적 이상향만 추구한 것이 잘못 아닐까?
도가 사상.
유교사상과 더불어 2,000년 동안
중국과 그 주변국의 생활과 사상
도가 사상은 중국 고유의 종교철학.
도가사상의 특징은 실용주의 유교와는 달리
현실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
도가사상에 대해서 정의한다면 3가지 측면이 있다.
즉 도가철학은 노자 도덕경, 장자(莊子). 열자(列子)
'도를 숭배하는 종교'로는 도교, 도가 모두 포함된다.
도가사상은 중국문화의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배여있다.
도교는 유교와 비정형적인 민간신앙의 중간 정도에 위치.
도가사상과 도교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한국·일본·베트남 등지로 퍼져갔다.
한대(漢代 : BC 206~AD 220) 전후 도가사상
그 이후의 미신적인 도교로 구분하기도 한다.
도교는 고대사회부터 전래된 주술과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도교를 철학과 종교로 구분짓기는 어렵다.
오늘날 도가사상과 유교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 군주 하늘 우주'에 관해 상호 공유.
유교는 중국의 도덕과 정치 체제에 관점을 두었고
도교는 보다 개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관점.
불교는 개인의 자아를 부정하고
현실 세계의 허망함을 주장한다.
하여, 불교와 도교는 극히 상반적.
그러나 경쟁적인 포교과정 속에서
불교와 도교는 많은 유사성을 공유.
송대(宋代) 이후 민간종교에서
도교와 불교는 구분 없이 공존.
양자강.
중국에서 가장 길고 세계 3번째 강으로 일명 장강.
세계 3째 길이 6,300km, 동서 3,200km, 남북 970km
중국 서부에서 발원해 12개 성과 지역을 가로지른다.
양(揚)나라에서 따와 유럽인들이 즐겨 쓰는 지명.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창장(長江)이라 불리운다.
중국 곡물의 절반 정도가 생산되는 곡창지대 양자강
쌀은 70%, 목화 밀 보리 옥수수 콩 대마 작물이 재배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우한[武漢] 충칭[重慶]
인구 100만 도시가 양자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양자강 상류는 티베트 고원을 가로질러 흐른다.
이곳 주민들은 주로 목축과 자급농업에 종사한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생육기간은 4 ~ 5개월
이곳 주민들은 한족과 후이족(回族) 네팔인 인도인
양자강은 탕구라 산맥의 해발 5,490m 지점이 발원지.
2개의 발원지 중 남쪽에 있는 것이 주요발원지이다.
그 지방에서는 티베트어 '울란무렌'(Ulan Muren)
2개의 원류가 합쳐진 곳부터는 얕고 넓다란 계곡
그 계곡 아래 호수와 작은 웅덩이들이 점점이 있다.
티베트 고원 동쪽 끝에서 강의 형세가 급격히 돌변
티베트에서 벗어나는 이곳에서 고도가 크게 떨어진다.
바옌카라 산맥 남쪽으로 굽어지며, 깊이 2~3km의 계곡
계곡 주변 각각 산봉우리들은 빙하와 만년설.
양자강은 300~400km 남동쪽으로 흐른 뒤 방향을 바꾸어
빠른 속도로 가파른 협곡을 상당한 길이에 걸쳐 흐른다.
마을은 드물기는 하지만 양자강 위쪽의 높은 곳에 있다.
이곳에서 양자강은 메콩강 살윈강과 인접해 달린다.
이 세 강은 모두 서로 24km에서 48km 사이에 있으며,
400km가 넘게 서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흐른다.
북위 26°에서 동쪽으로 흐르며 3강과 멀어진다.
이곳에서 산지를 가로질러 구불구불 계곡을 통과.
넓이는 300~400m로 넓어지며, 그 깊이는 종종 9m
상류 구간의 끝지점 양자강 고도는 해발 300m.
약 2,570km 상류에서 고도는 5,180m 낮아지며,
1km당 평균 2m가 낮아지고, 산지는 2~3배 낙차.
즉, 산지에서는 1km당 평균 4~6m 씩 낮아지는 셈.
중류
양자강은 여름이 덥고 겨울이 비교적 온화한 특징.
연강수량은 1,016~1,524㎜, 생육기간은 6개월 이상.
주민은 주로 한족이며, 그밖에 소수민족도 많이 산다.
약 1,000km 중류는 사천성([四川省)을 가로지른다.
이곳은 중국 남서부 고지대와 히말라야 동쪽 산악.
남쪽 친링 산맥지역에서 강 폭은 약 300~500m 정도
사천성 토양은 기름지며 농사에 알맞는 기후조건.
양잠업. 석탄·구리·인·금·석유 및 천연 가스
여러 가지 광물 자원이 사천성에 집중적으로 매장.
거대한 규모의 산업 중심지 하항(河港) 충칭도 이 지역.
사천성을 지난 양자강은 3 협곡을 지나 평원으로 나간다
하류
중국 동부 저지대의 광대한 평원 모퉁이에 있는 하류
따뜻한 봄, 더운 여름, 시원한 가을, 추운 겨울이 특징
생육기간은 8~11개월이라 2모작 또는 3모작도 가능하다.
이 지역은 중국에서 농업과 공업이 가장 발달한 곳.
대부분이 한족 강유역 주민들 대부분이 이곳에 집중
이곳에서는 많은 지류와 호수들로 이루어진 복합 수계
넓은 계단식 모양의 경사면에 호수가 수없이 많다.
창후호(長湖), 훙후호(洪湖), 둥팅호(洞庭湖) 등등.
이 호수군 지역의 전체면적은 1만 7,100㎢가 넘는다.
강 양안에는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제방이 축조
평원 남쪽 둥팅호 넓이는 3,600~4,700㎢나 된다.
대표적인 곡창지대 한수이 강 어귀에 3개의 도시
수문학(水文學)
양자강은 비교적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대부분의 비는 계절풍이 몰고 오며 주로 여름철
산지에서는 강우량의 대부분이 눈의 형태를 띤다.
홍수는 보통 3월이나 4월에 시작되어 8개월 계속된다.
5월에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지만 8월까지는 높아진다.
그뒤 수위는 점차 낮아져서 계절풍 이전의 수준이 된다.
2월에는 1년 중 가장 낮은 수준이 된다.
양자강 고지대 수량은 약 하류의 10%
나머지 강물은 모두 중류 및 하류 유역
그 중 둥팅호와 포양호가 유수량의 약 40%
우기에 양자강은 낮은 지역을 크게 범람시킨다.
양자강 유수량은 황하강 유수량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나, 양자강 토사 퇴적은 황하강보다 훨씬 적다.
티베트 고원 양자강 상류는 투명하게 맑다.
그러나, 하류로 내려갈수록 흐려지며 갈색
양자강이 운반하는 토사는 연간 4 ~ 5억 톤.
양자강 어귀 삼각주가 64년 만에 1.6km 증가.
계절풍 우기에 양자강 지류들은 광범위하게 범람.
역사상 양자강의 범람은 강바닥 토사로 인해 발생.
상당한 토사가 침전되어 강바닥이 높아지는 탓이다.
따라서 양자강의 범람은 인근 주민에게 커다란 위협
BC 206~AD 1960년 중국에는 1,030 차례가 넘는 대범람
특히 광범위한 범람이 양자강에서만도 50차례에 이른다.
주요지류인 한수이 강에서는 30 차례가 넘게 범람
양자강 유역은 평균적으로 50~55년에 1번씩 대범람.
1870년 이후 1896, 1931, 1949, 1954년에도 대홍수
1931년과 1954년의 범람은 전국적인 천재지변이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홍수조절방책 덕분에
범람의 잠재적인 위험을 막을 수 있다.
[경제]
양자강은 중국에서 수송을 위해 사용되는 주요한 강.
2,700km에 걸쳐 화물과 승객을 실어나르는 교통이 발달
이 강은 내지와 해항 모두를 연결시켜 원양 노선의 연장선
그 가운데 난징·우한·충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화물수송에 정크가 이용되며 배수량이 50~100톤 선박
배수량 1만톤 선박은 해안에서 1,100km 떨어진 우한까지
2,000t까지의 선박은 이창까지 가고,
소형선박은 핑촨[平川]까지도 갈 수 있다.
양자강 유역에서의 물길은 전체 약 5,600km.
양자강 대운하를 통해 황하강 및 웨이허강.
대운하는 멀리 항저우(杭州), 톈진 해항과 연결된다.
양자강의 철교는 난징과 우한 두 군데에 세워져 있다.
그밖에 충칭에도 양자강을 건너는 다리가 세워져 있다.
자원
양자강과 둥팅·포양·타이후 호수엔 풍부한 어류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어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중국 강에서 500종 물고기 대부분이 양자강에서 서식.
특히 가장 중요한 곡물 쌀의 경작지는 인공관개시설
강수량이 높은 지역에서조차도 가뭄에는 커다란 피해
년중 강우량이 극히 불규칙하게 분포해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는 기간은 6~8주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따라서 양자강 유역에서 일찌기 관개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양자강에서 많은 관개개발계획이 시행되고 있다.
덧말.
한반도 한강 이남은 양자강 한수이 이남
한반도 한강 이북은 양자강 한수이 이북
도교사상을 비롯해 공통적인 문화가 형성.
선사시대에는 같은 문화권인듯 추정된다.
지금도 문화 관습 전통 음식 문화가 비슷.
일본 한반도 중국은 양자강, 황하강 문명권.
성리학.
중국 당나라 대부터 종래 '훈고학'과 다른 유교 학풍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 체계가 갖춰진다.
그후 남송 주희(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이 집대성
이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대 왕수인(1472~1528) 양명학도 성리학.
우리나라는 주자학 만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
송대 성리학은 불교에 영향을 미쳤으나, 성격은 달랐다.
불교 세계관은 현실속 자연과 사회는 가상에 불과한 것
성리학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를 도덕적인 본성으로 인식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개별성을 긍정적으로 여긴다.
성리학은 세상 이치를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본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운동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러한 관점에서 기(氣)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여긴다.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
우주 만물은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 이의 개념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가 근본.
기란 육체적인 감각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
성리학은 본능을 억제하려는 내면적 수양을 강조한다.
이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관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 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한 질서이다.
하여, 성리학은 유교적인 윤리 도덕과 명분적인 질서
성리학는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도입.
원나라를 통해 도입된 성리학은 국가 교학으로 정착.
당시 유학자들은 유교와 불교는 일치한다는 사상 경향
고려에서 이조로 교체되는 시기에 불교 비판이 본격화.
유교적 심성 수양은 윤리도덕의 실천을 포함하는 것이며,
불교적 심성 수양은 현세를 초월한 정신적 해방이 그 골격.
정도전(鄭道傳 : 1337~98)·권근(權近 : 1352~1409)
성리학을 바탕에 두고 불교의 철학사상을 비판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도 유교적인 도덕규범의 실천을 주장.
15세기 후반 성리학 이념에 따라 사상 재편성을 주장
조광조(1482~1519)를 대표로 하는 사림계 학자관료들
개혁이념은 유교를 전통적인 왕도사상으로서 해석한다.
삼강오륜 윤리관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
도학 정치사상은 지배층 도덕적 책임의식을 더욱 강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명분적 질서에 따르게 하려는 것.
15세기 말 사림 학자들은 이러한 이념을 실현하려 노력.
당시 집권세력의 탄압에 의해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16세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학문의 중심
이언적(1491~1553)과 서경덕(1489~1546) 등이 이론 탐구.
이황(1501~70)에 이르러 인간 심성에 관한 연구
이이(1536~84)에 의해 성리학은 학문적으로 체계화
조식(1501~72)은 성리학 이론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같은 시대 이황과 이이는 차이를 보이지만,
도덕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적극적.
16세기 말 이황 조식 이이 제자들이 학파를 형성.
이들 학파에 의해 각 서원에서 연구와 교육이 활발
성리학은 17세기 학문 사상의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
17세기 후반 퇴계학파 영남 남인은 이황을 계승
이이의 이기겸발설을 비판하는 사상체계를 확립.
18세기 초 주기파 내에서 호락논쟁이 벌어졌으며,
18세기 후반 임성주(1711~88) 기일원론 사상이 정립
19세기 성리학은 실학 학문의 사상적인 밑바탕이 된다.
실학.
실학은 성리학 발전과정에서 배태된 새로운 사상.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논농사 파종법이 발전.
이모작이 가능해져 벼농사 수확량이 늘게 되었다.
밭농사 견종법(種法)이 개발되어 수확량이 증가.
경작지 규모가 늘고 농민들은 빈부 격차가 심화
16세기 말 임진왜란, 17세기 중엽 병자호란 국란.
농경지가 황폐화되자 조정 직영으로 논밭을 개간
왕실·왕족·왕비족 지배계층이 대토지를 집적했다.
그결과 대다수 농민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17세기말에서 18세기 화폐 상품 교역이 크게 확대
지주 지배층의 수탈 욕심은 끝없이 확장 심화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농민은 수탈, 고리대에 의해 더욱 몰락
대동법(大同法) 시행과 1678년(숙종 4) 실시된 화폐 유통
17, 18세기 특권층 상업 독점 전매로 소상인들이 몰락한다.
이조 후기 관영 수공업 체제로 장인(匠人)을 속박
그로인해 생산비가 늘며 관영 수공업 체제는 붕괴
민영 수공업 체제로 전환되며 민간 상인자본 증가.
재정난에 시달린 조정과 경제난으로 붕괴되는 양반
봉건적 신분제를 이용해 민간 상인자본을 수탈한다.
봉건적 지배층은 경제적 수탈로 양인과 노비를 구속.
피지배층은 세금납부를 거부, 민란 등으로 저항했다.
또한 일부 양인 농민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군다.
농민들은 도적이 되거나 화적이 되어 지주계층을 공격.
이무렵 관직매매, 인신매매, 사회 비리현상이 팽배.
이러한 현상을 사상적으로 바로잡으려 한 것이 실학
안정복(安鼎福)·한치윤(韓致奫)·이긍익(李肯翊)·
유득공(柳得恭)·정약용(丁若鏞) 등이 실학 사상가.
정약용은 통치 원천은 백성에게 있다고 주장
정치는 아래부터 위로 실시되는 것이 순리이며
백성들은 통치권자를 바꿀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실학사상은 제도적으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백성이 시민계급으로 성립되지 못한 때문
그러나 실학사상은 당시 사회발전에 바탕이 되는 사상
동학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곧.. 실학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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