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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유 게 시 판 ┃ 스크랩 [지산스님] 티벳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비교 설명 법문
다람쥐 추천 1 조회 76 11.02.16 07:0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지산스님] 티벳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비교 설명 법문

[한국불교 ! 과연 대승불교인가???

 


저는 1988년 송광사로 출가하여 10여년간 제방 선원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였으나, 근기가 하열하여 이를 통해서는 큰 성취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남방 상좌부 불교를 공부하고, 미얀마에서 4년간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궁금증, 의문이 풀리고 출가시 가졌던 근본 문제의식을 해결했습니다.

 

위빠사나를 공부한 시간은 보람 있는 시간이었고 4년간의 이 수행을 통해 내 문제는 해결했다고 보았으나

상좌부 불교의 한계와 약점도 느꼈기에 티벳 불교 수행을 떠나게 되어, 인도 다람살라에 가서 작년 말까지 약 삼 년 간 수행했습니다.

 

우선 티벳말을 공부했는데, 이 과정에서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티벳 불교의 경전, 논서를 섭렵할 수 있는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티벳 수행처에 다니며 기본적 수행 몇 가지를 했는데, 오늘은 티벳 불교에 중점을 두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직은 수행 기간이 짧아 깊은 수행을 성취했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달라이 라마 큰스님의 서적을 통해 관심이 촉발되고 있어 부족하나마 제가 티벳 불교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면서 지금까지 제가 파악한 티벳 불교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티벳 불교라 칭하는 것은 지역에 관련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이며, 티벳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교를 ‘금강승(金剛乘) 불교’라 칭합니다. 부처님께서 시작하여 시공의 변화를 따라 발전한 모든 불교를 세 가지 흐름으로 분류한다면 소승(히나야나), 대승(마하야나), 금강승(바즈라야나) 이렇게 나눌 수 있겠습니다.

 

티벳 사람들은 자기들이 전승 받아 가꾸어온 금강승 불교가 모든 불교 중에서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주장엔 무리가 있지만, 그들은 그런 관점과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티벳 사람들은 소승, 대승, 금강승 모두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엔 근기가 하열해 소승불교만 있었지만 그 이후 근기가 수승해지면서 대승이 되고, 다시 시간이 지나며 금강승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시각 차이가 있습니다. 이 셋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며 왜 소승->대승->금강승으로 간 것일까? 이것이 금강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입니다.


 

먼저 ‘소승불교’라 부르는 불교는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에서 그들은 ‘상좌부 불교’라 부르는 불교입니다.

 

‘소승’이라는 명칭은 나중에 ‘대승불교’가 일어나며 그쪽을 폄하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죠.

어째서 소승이라 했을까요?

 

상좌부 불교권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계는 아라한입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부처라는 경계가 있습니다.

 

아라한과 부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이는 불교 이해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라한과 붓다는 내면의 탐진치를 뿌리뽑아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여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이 없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차이는 부처님만이 가진 능력, 즉 일체지(一切智)입니다.

 

붓다의 경계에 들어간 사람은 시공에 걸리지 않고, 아무리 오래되고 멀리 있는 것이라도 모든 현상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해탈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일체지에서는 붓다와 아라한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럼 붓다가 지닌 일체지는 왜 필요할까요?

이로써 일체 중생을 올바르게, 빨리 제도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경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 수행 방법을 가르쳐달라 하시면 부처님은 그 사람의 전생의 흐름, 현재의 마음상태, 미래의 흐름, 이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고 적절한 방법을 제시해주십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제자라 하는 사리불조차도 제자를 잘못 지도해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있습니다. 지혜 제일 사리불이지만 일체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흐름을 모르고 적절한 수행 방법을 모르고, 그저 자기가 아는 지식 안에서 자기가 했던 방법으로 지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도를 받는 사람에게 맞으면 다행이지만, 안 맞으면 허송세월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일체지를 얻게 된 이유는, 부처님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바라밀행을 닦으며 서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되어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빠르고 쉽게 깨달음으로 인도하겠다는 원력을 통해 닦아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그렇지 못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측면보다는 자기의 해탈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도 붓다의 일체지를 얻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남방불교를 소승이라 부르는 것은 그쪽 불교가 대부분 아라한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지내면서 이야기해보면, 간혹 가다 붓다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 대승불교쪽에서는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보며, 인사도 “성불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상좌부 불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같은 일체지를 구족한 ‘삼마 삼붓다’가 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누가 감히 부처님 같은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어렵다. 이미 우리에게는 부처님 가르침이 있으니 이에 의지해 해탈하면 된다, 다음에 오실 부처님은 미륵(마이트레야) 부처님이다.’ 라고 과거에 부처님 입적 후 대부분의 수행자는 생각했습니다. 교학, 계율, 수행법에 의거해 아라한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불교가 승단 위주로 되고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하여 대중을 도외시하게 되었습니다. 교학적인 것이 강하고 번쇄해졌습니다. 이러다보니 아라한 위주로 가는 분위기에 대해 반발하고 거부하며, 대신 우리 모두 부처가 되자고 주장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대승불교 운동입니다.

 

소승은 수행을 통해 아라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라면, 대승은 이 목표를 부처 되는 것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대승 운동이 시작되면서 추구하는 것은 우리 모두 부처님 되자는 것인데, 어떻게? 육바라밀을 통해서입니다.

 

좋습니다. 이왕 수행하는 것, 아라한 되는 것보다 부처님 되는 게 좋겠죠. 그렇지만 육바라밀을 통해 부처가 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3아승지겁이 대승불교에서 제시한 시간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이죠.

 

수만 번에서 수십만 번 윤회를 해야 가능한 어마어마한 시간입니다. 3아승지겁이 걸려서라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면 훌륭한 일이지만 모두가 그런 길을 가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이런 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이 금강승 불교입니다.

 

금강승 불교에는 현교와 밀교 두 측면이 있습니다. 현교(顯敎)는 드러난 가르침, 밀교(密敎)는 은밀한 가르침입니다. 현교 부분은 교학적 부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티벳 불교의 현교는 대승의 현교 부분과 차이가 없습니다.

 

교학적 관점에서 대승불교의 중관, 유식, 여래장 사상 이 셋이 금강승 불교에도 역시 근본 사상입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중관, 유식, 여래장 이 셋을 전혀 부정하거든요. 부처님 직설이 아니라 해서요.

그래서 소승과 대승이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현교 부분에서는 금강승과 대승이 같습니다.

밀교 부분에서 다릅니다. 일반 대승불교에는 밀교적 부분이 없습니다.

 

 

수행방법에 있어서 금강승의 방법은 대승불교와 전혀 다릅니다. 밀교적 수행 방법을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소작 탄트라, 행 탄트라, 요가 탄트라, 무상요가 탄트라, 이 넷입니다. 이는 탁월한 수행법이며, 그래서 성불로 신속하게 갈 수 있습니다. 마치 준마를 타고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 중 가장 낮은 단계인 소작 탄트라 행법으로 수행하면 16생이면 성불한다고 합니다. 가장 높은 단계인 무상요가 탄트라 행법으로 수행하면, 정말 열심히 노력한다면 단 한 생에 성불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허황된 이야기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연등불을 만나 처음 부처 되고자 발심하고 나서도 4아승지겁이 지나고도 10만 겁이 지나서야 싯다르타 부처님으로 태어났다고 봅니다.

 

그런데 금강승에서는 이를 1생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하니, 어때요, 호기심이 생기시나요?

그런데 비밀스런 밀교는 아주 빠른 만큼 위험합니다.

 

밀교 수행법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굉장히 빠르지만 사고가 나면 전멸한다는 거죠.

 

한 생에 성불하길 원한다면 뛰어난 스승을 만나 은밀한 가르침을 전해 듣고 수행하여 성취한다,

그래서 밀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는 티벳 불교가 가진 강점의 구체적 측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 불교, 남방 불교, 티벳 불교, 그리고 서양까지 다 다녀봤는데 수행하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확산되고 세계화된 것은 티벳 불교라는 사실입니다. 불교가 서양에 처음 소개될 때는 일본 스즈끼 선사가 전파한 선불교가 인기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상좌부 불교도 나름대로 서양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고엔까, 파욱, 찬몌, 우 빤디따 등의 큰스님들이 수행 지도를 하면서 상좌부 불교도 차츰 널리 퍼져 가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교세를 보면 티벳 불교가 단연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전세계 불교권에 티벳 불교의 교세가 이렇게 확장되는 것일까요?

티벳 불교가 서양인들에게 어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티벳불교도 기본적으로는 대승 입장이기에, 보살 정신을 대단히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보살은 아라한이 되지 않고 부처 되는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구체적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 그리고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것, 이것이 이들의 강점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 불교는 대승을 표방하지만 실제적, 구체적인 면에서는 매우 약합니다.

오히려 상좌부 불교보다 더 소극적이지 않습니까?

 

 

둘째, 티벳불교는 교학 체계가 아주 정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스님이 되면 비구계를 받기까지 선방이나 강원 등에서 공부를 하는데 교학을 배우는 강원이 4년 과정입니다. 그런데 티벳불교의 겔룩파(派)에서는 이런 현교의 교학 과정을 최소한 20년간 공부합니다. 엄청난 시간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 교학이 정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교학을 중시할까요? 정견(正見)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금강승에서는 밀교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면 사도(邪道)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티벳 불교가 인기가 많습니다. 프랑스 내에만 신도가 50만이라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독일에서 티벳 불교가 강세입니다. 프랑스, 독일은 철학이 발달한 나라 아닙니까. 철학적 성향이 강한 국민들이기에 이런 성향이 티벳 불교의 교학에 매료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셋째, 티벳불교는 수행 방법이 탁월합니다. 가장 빠르게 부처 되는 길이라고 자부할 정도니까요.

 

 

이 세 가지 때문에 티벳 불교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부연 설명하자면, 보살 정신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정신입니다. 중생은 무명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며 생 자체가 고통입니다. 생이 있으면 노, 병, 사가 있습니다.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해탈의 길입니다.

 

 

해탈의 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아라한이 되는 것(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해탈한 사람 즉 성문(聲聞)). 둘째 연각(緣覺) 혹은 독각(獨覺),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우주의 이치와 인연을 관해 해탈한 사람입니다. 셋째가 보살인데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이는 마음을 굴리면 언제든 아라한이나 독각이 될 수 있습니다. 보살의 궁극은 결국 부처이지요.

 

부처님께서 전생에 연등불을 만나서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그 모습을 보고 발심하셨지만, 이미 그때 만약 부처님이 아라한이 되고자 하셨다면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지 않고 보살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이미 아라한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부처님 되기로 마음을 정한 것에는 희생정신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에 보면 자기 살도 베어주고, 자기 희생을 많이 하셨지요. 전래된 이야기라고 하지만, 단지 전설만은 아닙니다. 부처님 같은 분이라면 그런 길을 분명히 밟았을 것입니다. 왜? 불교는 모든 게 인과이니까요.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지혜 자비 능력과 부처님 제자들의 지혜 자비 능력은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부처님은 6년의 고행을 통해 성불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22년 수행했지만, 아무것도 못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위대한 자비 능력을 가졌을 때는 분명 심어놓은 씨앗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 전생담의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갔을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희생정신, 큰 원력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보살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것입니다.

먼저 남의 행복,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자세 말입니다.

 


티벳 불교에서 대표적인 특징이 린포체 제도입니다. ‘린포체’는 환생자라는 뜻인데, ‘보살’이라는 뜻도 됩니다. 현재의 14대 달라이 라마도 린포체입니다. 린포체는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때, 그건 세 가지 보물처럼 소중한 대상에 귀의한다는 것이죠.

 

린포체는 삼보와 같은 소중한 분들이라고 하여 이렇게 부릅니다. 해탈 쪽을 유보하고 중생 제도를 위해 윤회의 세계에 머물며 의도적으로 윤회를 하는 분들입니다. 일반 중생은 업력(業力) 소생이라면 린포체는 원력(願力) 소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죠.

 

티벳에서 가장 최초의 환생자는 까르마빠로서, 17번 환생해 인도 다람살라에 살고 있습니다. 1대 까르마빠는 11세기 사람이었고, 밀라레빠의 법을 이어받은 감뽀빠 밑의 한 사람이 까르마빠 1세입니다. 이름은 뒷숨 켄빠,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일체지를 얻은 분이라는 뜻이죠. 그 뒤를 이어 수행자들이 14대 달라이 라마에 이르기까지 나왔고, 보살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티벳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윤회를 안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집안에 그런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니까요.

 

한국 불자들은 어떻습니까? 윤회를 믿는가요?

실제 불자라고 해도 윤회를 안 믿는 분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한 게 아니라고까지 합니다. 스님들 중에도 윤회라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티벳 사람들은 린포체를 통해 이를 믿습니다. 이것이 티벳 불교의 구체적 현실적인 측면입니다.

 

 

저와 십여년 전부터 인연 있는 인도의 티벳 사원이 있습니다. 다람살라에서 택시로 두 시간쯤 가면 따시종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캄바 사원이 있습니다. 제가 칸툴 린포체와 인연이 있어 거기에 있었는데, 티벳 공산화 이후 인도에 망명 와서 세운 절입니다. 그 당시 8대 환생자가 거기서 포교하다 49세에 입적하셨는데 입적시 이 절과 그 분 밑의 수행승들, 불자 마을이 있었습니다.

 

입적한 지 3년 뒤 그분이 제자들의 꿈에 동시에 현몽을 하여 ‘내가 지금 어디어디에 살고 있다’라고 하여 다음 날 아침 찾아보니 그곳에 세 살짜리 어린이가 있고, 제자들이 찾아가니 그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특징을 다 말하더랍니다. 그 어린이를 시봉하고 필요한 교육도 하고 하여 올해 그분이 31세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20세가 넘자 법문도 하고 수행 지도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까지 다 총괄하는 어른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티벳의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불교와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제가 15년 전 인도의 따시종이라는 곳에 갔을 때 거기 계신 한국 비구니 스님들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비구니 처소에 들어가니 응접실 벽에 큰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약 5세 되는 티벳 동자승의 사진이었는데,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티벳 불교를 처음 접한 상황에서 저게 누구냐고 비구니 스님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몸과 얼굴은 분명 5세인데, 얼굴에서 풍기는 기운은 40대로 느껴질 만큼 성숙하고 기품이 있었습니다.

 

거기 계셨던 비구니 스님은 대만에서 12년간 교학을 공부하다 티벳의 린포체 얘기를 듣고 그리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사진의 그 분은 까루 린포체로, 전생에 유럽과 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 인도 다질링에 터를 잡고 실리구리 사원을 세웠고 대만에도 티벳 불교 수행센터를 세우고 입적하신 후 삼 년 뒤 환생하여 어린 시절에 라마로 옹립되었습니다.

 

그분이 5세 때 그 비구니 스님이 그 수행센터를 방문했는데, 수행 센터에 가보니 다섯 살짜리 린포체가 차에서 내리더랍니다. 그리고 비구니 스님 옆의 한 거사에게 와서 손을 잡길래 왜 잡으시나 했더니, 그 거사는 전생에 그 수행센터를 지으라고 보시한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구니 스님이 볼 때에도 그 분은 절대 겉모습과 같은 다섯 살짜리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비구니 스님이 거기 1주일 머무는 동안 내내 린포체를 따라다니며 유심히 관찰했고 개인적으로도 만났는데, 상호가 정말 훌륭했습니다. 대만의 어느 보살이 1만불을 보시할 테니 한번만 안아보자고 하였을 때 그 분은 ‘비구의 몸이라 안 된다’고 딱 거절했답니다. 그 비구니 스님에게 스승이 되어주겠다고 승낙을 했고, 그 이후 밀교 수행을 하고 다시 따시종에 정착해 수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따시종에 있으면서 수행을 하고 다질링으로 8세의 린포체를 찾아갔는데, 그분은 전생의 제자들로부터 공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전생에 그 밑에서 수행했다는 서양인들이 대기하고 있었고요. 제가 “어떻게 하면 수행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직 성취를 못 했습니다.”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모두는 이미 다 부처입니다. 성취했다 못 했다 얘기 말고 수행을 계속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는 답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답을 듣고, 이분들이야말로 영원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계획은 이 생에 그칩니다. 그분을 보면서 ‘아, 삶이 한 생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구나, 나도 이 길을 가고 싶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 그런 모습을 볼 때 신심이 납니다. 그분을 만난 것이 저에게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년 다람살라로 떠나기 전에 다시 만났습니다. 19세가 되셨더군요. 단아하고 깨끗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친견 후 한결같이 ‘꽃미남’이라고 했는데, 잘 생긴 탤런트류와는 질이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지혜 있고, 부드러움, 강함을 동시에 지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한 분의 린포체가 바로 달라이 라마입니다. 현재 티벳불교가 세계에 확산되는 가장 큰 이유가 달라이 라마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 인상으로 그분은 정말 보살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한국 스님은 그분과 법거량을 하여 견성을 못 했다며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수행자를 평가할 때 견성만 갖고 되나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세에 연등불을 만난 날 아라한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윤회하면서 중생을 제도하였고 그 오랜 시간 윤회하며 수다원과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여기 들면 일곱 생을 넘기지 않고 아라한이 되는데 말입니다.

 

한 수행자를 깨달음의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삶의 모습을 볼 때 보살의 길을 가고 있고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고 그분에게 귀의하고 하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보살정신 즉 보리심(보디?따) 수행을 강조해 말씀하면서 본인이 눈물을 보이며 우시더군요.


달라이 라마에 관한 책이 많으니 그 삶을 다들 아시겠지만, 2세 때 환생자로 선택되고 4세 때 티벳 수도 라싸에 와서 달라이 라마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15세 때 중국이 티벳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역대 달라이 라마는 18세 때 실질적인 책임을 지기 시작했지만, 이 분은 16세 때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티벳 스님들과 민중들은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이라 믿습니다. 생불로 믿고 있어요. 히말라야를 넘어 온 티벳 난민들은 1번은 다 이분을 친견합니다. 와서 울며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줍니다. 그분은 보살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분이 털어놓기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수행이다. 다음 생에는 평범한 승려로 수행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상황을 다 포용하고 세계 평화를 이야기하십니다.

 

제가 티벳에 있을 때 베이징 올림픽이 있었고 그 전부터 다람살라에서 계속 중국에 반대하고 올림픽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 와중에 달라이 라마가 하신 말씀은 “나는 이번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지길 바란다. 중국이 온 인류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보살 정신의 구현 아닐까요? 티벳 사람들은 이걸 바로 보고 있습니다. 깊은 존경심을 갖고 그분이 보살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론 티벳 젊은이들 중에는 달라이 라마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티벳청년자치회라는 단체가 있고, 그들의 시각은 달라이 라마가 평화와 용서를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얻은 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선 안 되고 노선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년 올림픽 직전에 이런 움직임이 피크를 이뤄 4~5월에 티벳 본토에서도 큰 시위가 일어났고 사상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때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현수막으로 만들어 달라이 라마가 계신 법당 앞에 걸어 놓았습니다.

 

달라이 라마 말씀이 “만약 지금이라도 티벳인들이 원치 않는다면 나는 언제든 떠나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욕심이나 성취욕이나 사심이 전혀 없이 진정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세계인에게 감동을 주고, 그분의 모습을 통해 티벳 불교에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티벳 불교의 강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이나 이론이 아닌 실제로 보여주는 것.


제가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더 많은데 시간이 모자라 다 하지는 못하겠고, 오늘 제 이야기의 핵심은 보살 정신입니다. 보살도를 닦기 위한 구체적 수행이 어떤 것인지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자문해봅니다. 과연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인가?

 

한국 불교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화두 타파를 위해 노력하는 선방 수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수행자들의 마음 속에 그런 보살 정신이 있느냐 이겁니다.

 

한국 불교가 정말 대승불교인가에 대해 저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그런 정신의 실천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을 단순히 한 생만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영원 속에, 나는 이 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법문 후 불자들의 질문과 스님의 답

 

 

질문 1)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많은 역대 고승 대덕 스님들은 왜 환생하지 않으셨나요?

질문 2) 저는 금생에 마음 닦아 편히 사는 것 정도만 추구하는데 보살 정신 같은 큰 이야기를 하시니 부끄럽지만, 금생에 어찌 하면 잘 닦을 수 있나요?

 

답 ) 윤회를 저는 사실적으로 인정합니다. 그 증거 중에 결정적인 부분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로 인해 행불행이 많이 결정됩니다. 심한 경우는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하잖습니까. 이 큰 차이를 윤회가 아니라면 어찌 설명하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모든 것이 물질이라는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유전자로 모든 걸 해석하는 겁니다.

그럼 1란성 쌍둥이가 사는 모습이 각각 다른 것은 왜 그럴까요?

 

둘째, 모든 창조는 신이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런 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왜 그리 편파적일 수 있을까요?

 

셋째, 전생이 있다는 겁니다.

전생에 지은 바에 따라 선업과 악업에 상응하는 대가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고승들도 그런 원력을 가졌지만 환생자의 마인드가 별로 없습니다. 환생을 위해선 자기 원력에 맞는 어머니의 태가 중요합니다. 시대와 지역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어머니의 태를 선택합니다. 환생 마인드를 가져도 합당한 조건을 못 찾으면 시간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중음 상태’에서의 수행이 있습니다.


사실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면 금생에 마음 편히 사는 것은 충분합니다.

 

마음관찰수행 즉 사념처 수행은 현재 남방 불교 상좌부 전통을 대표하는 미얀마의 셰우민 센터 등에서 하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서 배우면서 느낀 것은, 위빠사나 마음관찰 수행이 선종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남긴 말도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의 법으로 마음을 관하여 모든 행을 통틀어 포괄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 4조 도신 스님이 가르친 마음관찰법도 셰우민 센터의 방법과 비슷합니다.

 

 

선종의 기초는 마음관찰입니다. 마음관찰이 죽 이어지다 5조 스님과 대혜 종고 스님 때에 와서 간화선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선종에는 간화선 말고도 묵조선(默照禪)이 있습니다. 일본 조동종에서 계승하고 있는 이 묵조선과 셰우민의 행법이 대단히 유사합니다.

 

 

티벳불교에서도 위빠사나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위빠사나 없이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또 티벳불교의 족첸 수행과 셰우민의 수행법이 유사합니다.

 

상좌부, 선불교, 티벳불교가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접점을 저는 찾아 왔습니다. 마음관찰, 알아차림, 여기서 기본적인 것은 오온 중 식(識)입니다. 순간순간 6근이 6경을 만나는 순간마다 6식이 생멸하는데 이걸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관찰의 핵심은 “매순간 우리 마음이 어떤 대상을 알고 있는지를 알아차려라” 이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순간, 찰나찰나 일어나는 그 느낌[受, 웨다나]을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고 셰우민 스님은 말했습니다.

 

 

알아차리면 사라집니다. 마음은 평정심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불교 수행은 평정심을 지향합니다. 어째서?

평정심을 통해 지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커져버린 마음은 안 사라집니다.

 

어떤 욕망도 어떤 분노도, 이 마음의 힘이 쌓이고 그게 숙달되면 그 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팔풍(八風)에서 벗어나 해탈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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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2.16 23:15

    첫댓글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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