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물 배성룡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19.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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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물 배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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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 17:52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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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연합 모색 배성룡(1896~1964)
우리 현대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일생을 통해‘민족협동전선’(통일전선)을 펼쳐온 배성룡(1896~1964)은 드문 예에 속하는 인물이다. 제2차 조선공산당내 화요파의 주요이론가이면서도‘민족 우선’을 견지해 온 사회운동가로 그리고 경제평론가, 언론인으로 살아온 그의 일생은 좌·우의 대립 속에서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비판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끊임없이 유지해온 지식인의 삶이었기 때문에 냉전의 붕괴가 이뤄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땅의 ‘소중한 경험’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는 현실 정치에 직접 뛰어들기보다는 9권의 저서와 2백50편에 이르는 각종 기사·평론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펴고 알린,“일생동안 붓을 놓지 않았던”언론인이었다. 또한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2차 조선공산당서 활약
20년대 중반 화요파의 대표적 이론가로 민족협동전선 결성운동에 직접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좌·우연합단체인 신간회가 내부분열로 해소된 다음인 30년대에도 그는 민족주의자와의협동전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지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점에서 그는 일제 말기 국내 공산주의자들의‘좌편향’이나‘청산주의적’태도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해방공간에서 남북협상을 위한 특사로 김일성을 면담하는 등 좌·우연합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1896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몰락양반의 후손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는데, 1919년 도쿄의 일본대학 유학 이전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23년 귀국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25년 <동아일보>의 경제현상 논문에‘경제파멸의 원인, 현상과 대책’을 응모해 3등으로 당선돼 세상에 알려졌다. 이 논문은 26년 <조선경제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총독부에 의해 치안방해 혐의로 행정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봄에는 도쿄에서 알게 된 박일병(제2차 조선공산당 사상단체 책임자)의 권유로 화요파가 중심이 된 2차 조선공산당에 가입, 대표적 이론가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배성룡에게 사회주의란“민족의 현실을 분석하고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수용된 측면이 더 컸으나 비판적 수용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26년 여름 이우적 등의 중심이 된‘일월회’와의 계급논쟁에서 그는“마르크스주의자가 마르크스를, 예수를 믿는 것과 같이 아무 비판없이 믿는다면 크게 위험한 일이다. .. 나는 전형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를 애쓰지 않는다. 만약 마르크스 주의에 수정을 요할 부분이 있음을 느낀다면 마르크스주의의 파멸자라는 칭호를 듣는다 할지라고 단연히 주저치 않겠다”(<동아일보> 26년 6월)고 쓰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배성룡의 현실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경제평론가로서 배성룡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일본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인식하였으며‘일본인 자본 대 조선민중’의 대립구도로 파악, 계급문제를 민족문제에 포괄하여 인식하였다. 즉, 조선인 부르좌 계급은 대부분이 노농계급과 함께 일본인 자본의 공동 피해자로 상정되었고 따라서 민족해방운동에서 협동전선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실증적으로 그는 조선인 중소자본가와 중소지주가 일본 독점자본과 대립한 대표적 사례로 어업통제에 대한 조선인 수산업자의 반대투쟁과 중소지주의 수리조합 반대운동을 예시하기도 했다. 2차 조선공산당에서 추진한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참가했던 그는 26년 6월 검거돼 28년 9월 만기 출옥한다.
이후 그는 언론활동에 열중하며 31년 한때 공생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는데 민중계몽활동에 치중해 사회주의계열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에서 펴낸 <군관학교사건의 진상>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34년 6월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이자 후에 북한에서 각료를 지낸 윤공흠과 접촉, 조선내의 민족통일전선 구축을 위한 의열단 국내조직의 경성연락책임자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비합법적 지하활동을 했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36년 <조선중앙일보>가 정간되자 붓을 꺾은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은둔생활에 들어갔다가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현실정치에 직접 뛰어들게 된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김구·김규식이 중심이 된‘통일독립촉진회’와 민족자주연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일하며“미국과 소련 모두 제국주의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앞세우고 있다”며 좌·우가 연합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또 47년에는 <세계일보>의 편집인 겸 주필로‘자주통일정부’를 주장하는 글을 계속 발표했다.
특사로 가 김일성 면담
48년 4월 그는 김규식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면담하나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이 때의 기록인‘평양회담의 경과와 의의’에서 그는“북쪽도 통일의지를 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사회주의자였던 그가 남북에 두개의 정부가 들어선 뒤 남쪽에 남는 이유도 이러한 비판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북에서의 단독정부 수립 추진세력을‘미·소의 대변세력’으로, 통일운동세력을‘자주세력’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통일운동은‘계급문제’가 아닌‘민족자주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6·25가 발발하자 서울 성북동에 살던 그는 피난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김규식 등과‘통일독립촉진회’의 일을 함께 했다. 그러나 9·28직전 북쪽 당국에 의해 저명인사들의‘납북’이 진행되자 그는‘북에서 내려온 친구 도움으로“(조카 윤연갑의 진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며 이후에는 현실 정치와는 떨어져 언론인·학자로만 활동했다.
신문사 사장 추방운동
그의 정치노선과 함께 배성룡은 이 땅 의 언론초기의 중요인물로 기록된다. <조선중앙일보>에 재직할 당시 그는‘일기 당천의 인물’로 불렸으며 (계훈모편, <한국언론연표>) 자유언론운동사에서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29년 <조선일보>에 경제부장으로 들어간 배성룡은 31년 8월‘현 간부의 무성의와 경영능력의 결여’를 비판하면서 퇴사한다. 이어 32년 <중앙일보>에 입사했지만 사장 노정일이 전 조선총독 사이토 미노루의 양자로 일제와 관련을 맺고 있는 점 등을 문제로 삼아 그해 4월 사원들과 함께 태업과 동맹단식으로 경영진 반대운동을 펼치고 새로운 재단을 물색해 33년에는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그가 32년 10월 <비판>에 기고한‘조선신문의 특수성과 타락상’에는 그의 언론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신문이 경영주의‘영리중심주의’에 의해 완전히‘상품화’되어 있고 일부 기자들도“보도중심주의를 취하여 경영주의 교묘한 자동기계로 전락, 극도로 반동화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언론인이란“조선의 식민지적 특수성을 인식하고 민중에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각성시킴으로써 진로를 제시하는 특수한 사명을 자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성해방론 최초 소개
배성룡은 이 땅에 여성운동을 처음 소개한 인물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25년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해방론을 최초로 <부인해방과 현실생활>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했고 신문 사설 등을 통해 여성운동론을 계속 개진했다. 그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딸 다섯을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키고“남자친구를 많이 사귀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가 여성운동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계몽의식과 철저한‘평등주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회주의도 이런‘도덕적 평등주의’의 일환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한 것이나 그의 경제론에“계급 분석이 소홀했다”는 지적이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50년대 서울대 상대 교수로 친분이 두터웠던 권오익씨는“배성룡은 원칙주의자인데다가 매사가 면밀하고 자기 계획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며“사상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가진 자유주의적 지식인”으로 평했다.
전쟁이후 그는 점차 사민주의적 경향에 접근, 54년 문교부 선정‘반공교재’인 <사상과 도의>에서는“급진적 폭력혁명과 어떤 형태의 독재도 배격하고 점진주의적 변혁과 의회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배성룡은 잠시 출판사를 운영한 것을 제외하고는 오직‘글 쓰는’일로만 평생을 지냈기 때문에 생활은 넉넉지 못했다. 가계는 이화여전 가정과를 나온 인텔리였던 그의 부인인 윤신봉(88년 사망)이 산파자격증을 따 꾸려나갔다.
배성룡의 둘째딸 병옥(52)씨는 아버지를“평생을 책만 읽고 붓을 잡고 사신 분”으로 기억한다.“심지어 목욕하는 시간조차 아까우셨던지 욕조에 들어가지 않고 물수건으로 냉수마찰을 하면서 책을 보았다”며 “어머님이‘산에가서 경이나 읽고 있을 중팔자인데 세상에 잘못 나왔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시곤 했다”고 회상한다.
배성룡은 50년대에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으로 있으면서 <사상계> <산업경제> <재정><지방행정> 등의 신문·잡지에 경제평론을 발표하는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는 한편, 서울대 상대와 단국대, 이화여대 등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특히 그는‘자립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진국 공업화의 유형을“농업경제의 봉건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공업자본주의가 무역수단으로 발전하는 ”대외무역적 발전형과 “농촌개혁·농업혁명에 의하여 국내시장의 구매력의 개발에 힘쓰고 농·공업의 상호 연결관계에 의해 산업발전을 가져오는”국내시장·자원개발형의 두가지로 나눴다. 이런 그의 경제이론은 60년대 수출드라이브형의 경제개발계획에 묻혀 세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20여년이 지난 80년대 초에야 비로소 처음으로“대외의존체제의 극복과 경제자립의 의식을 뚜렷이 보여준 발군의 예”이며“제3세계 경제자립은 내포적 공업화론에 기초해야만 달성될 수 있다는 신념을 분명히 한 것”(정윤형 홍익대 교수,‘경제학에서의 민족주의적 지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침 잘못 맞아 반신불수
그러나‘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죽음을 기구했다. 51년 부산 피난 시절 책이며 원고를 수북이 넣고 다니던 그의 가방을 미군 흑인병사가‘돈가방으로 알았던지’ 어깨를 치고 빼앗아가는 바람에 탈골이 되었다. 이때 얻은 신경통을 고치기 위해 57년 침을 맞은 것이 잘못돼 거의 반신불수의 지경이 되어 7년을 병석에 누워있다가 64년 예순여덟의 나이로 타계했다.
가족에 따르면 그가 평생에 걸쳐 쓰고 모은 두 트럭분의 서적과 미발표 원고 등 유품은 그의 병구완을 위해 60년대 초 단국대학교에 당시 집 두채값이던 2백만원에 넘겨졌으나 그 뒤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출처] 배성룡|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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