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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 1 바리새인이 예수를 들음 - 요 4: 3 유대를 떠나
제 4 장 : 사마리아 여자와 왕의 신하
1. 사마리아를 통행하심 ( 4: 1-5 )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이방인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방인들보다 더 나쁜 부류이다. 그중에서도 여인이다. 즉 정통 유대교의 대표자와 남편이 6명이나 있는 이방 여인이 대조된다.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종교를 이방인들의 우상 종교의 혼합종교로 보았다. 이방인들은 우상을 “주”로 “남편”으로 말한다. 우상을 남편으로 주로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계시한 율법에 따라 정통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서 더럽혀서 이방인들의 신들을 다 섬기는 창녀와 같은 존재들이다.
혼합종교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는 종교를 혼합종교로 보았다. 그런 구조로 종교의 대표자인 사마리아 여자를 들어서 설명한다.
요 4: 1 바리새인이 예수를 들음 -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참 경건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과 일찍부터 충돌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는 때가 되면 그들과 충돌하게 되실 것이며 바로 그들에 의해 정죄를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1) 제자
제자로 부름은 예수의 고난 선포와 관련되어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받고 배척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성경이 성취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세상의 모든 동정과 찬양은 결국 고난으로 향할 수 있다. 고난은 자체 안에 가치와 영광과 위엄을 지닐 수 있다.
배척은 고난으로부터 오는 위엄이나 영광을 빼앗아 간다. 그것은 영광이 없는 고난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배척당하고 추방당한 자로서 고난받고 죽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고 예수의 의해 임명받은 뒤에 곧바로 죄를 범하는 자가 다름 아닌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라는 사실은 교회가 시작으로부터 고난받는 그리스도에게 거역해 왔음을 의미한다. 베드로의 반대는 고난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그의 거역이다. 사탄은 교회를 주의 십자가로부터 멀리 떼어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가 고난과 배척 가운데서만 그리스도이듯이, 제자 또한 고난과 배척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릴 때 그분의 제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는 제자직은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법, 즉 십자가 아래 있게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 24)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부정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이 말씀에 대해 그의 제자들을 준비시키셨다.
십자가는 불행도 아니고 운명의 가혹함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결단에서 오는 고난이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십자가는 자연적 존재에 묶여 있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됨에 묶여 있는 고난이다.
십자가는 단순히 고난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고난과 배척의 문제이다. 다시 말한다면, 임의적인 행동이나 고백을 위한 배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배척이다. 제자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헌신만이 십자가 아래에 진지하게 설 수 있다.
우리에게는 다만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임의적인 십자가를 선택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의 고난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의해 적절히 측량되고 주어지고 준비된 자신의 십자가가 있음을 강조하신다.
그 분량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님은 큰 고난을 당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하시는 이들에게는 순교의 축복을 주신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힘을 넘어서서 유혹받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고난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매임을 끓으라는 부름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옛사람의 죽음이다. 누구든지 제자에 들어가는 사람은 예수의 죽음에 들어가며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둔다. 십자가는, 경건하고 행복한 삶의 무서운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시작점에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부르심은 죽음으로 인도한다.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우리가 그분을 따르기 위해 가정과 직업을 떠나든지, 루터처럼 세속적인 직업에 들어가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든지 간에,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 예수의 부르심 가운데 우리의 옛 인간의 형태가 죽어 없어지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2) 세례
각종 종교마다 신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자는 그 과정에서 치루어야 하는 나름의 의식(儀式)이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려는 자들에게도 치루어야 하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례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 목사가 물을 가지고 베푸는 의식이다. 이 세례 의식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많은 변천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까지 전해져 왔다.
세례 의식에 대한 의미는 물론, 그 양식(樣式)까지도 다양하게 변질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정되기도 하면서 많은 수난을 겪으며 오늘에 전해졌다. 그 결과 세례 의식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교회 안에 성례(聖禮)로서의 필수적인 의식으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그러나 세례 의식에 대한 견해가 교파마다 차이가 있기에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어 일반 신자들에게 신앙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로마교회는 세례가 중생(重生)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세례가 신자의 원죄를 비롯하여 세례받을 때까지 범한 죄책(罪責)으로부터 구출하고, 영원한 형벌과 현세에 있어서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자가 구원을 얻는 데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신자로 하여금 거룩하게 되는 은혜와 신망애(信望愛)의 초자연적인 덕성(德性)들을 가지게 해서 영적인 갱신(更新)을 이루게 하며 유형 교회와 연합을 이루게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세례에 관해 로마교회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례 주는 물을 보통 물로 보지 않고 내재적(內在的)인 신적 능력을 가진 말씀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씻음을 위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은 물에 의한 세례가 중생의 결과를 가져 온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의식에 사용되는 물이 대단한 요술적 효능(妖術的效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세례가 신자들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 신자에게 중생하여 새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중생된 생명을 강화(强化)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접합됨과 은혜 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여함과 주님의 사람이 되기로 언약 맺음을 표시하며 인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세례는 신자의 외적인 표징(標徵)이라는 뜻이다.
침례파는 세례가 물을 뿌리는 의식이 아니라, 침례(浸禮)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세례가 신자에게 물을 뿌려 그의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자에게 물을 뿌리거나 부어서 주는 세례를 주지 않고 물에 잠그는 침례만을 준다.
이와 같은 다양한 주장 외에도 세례 의식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는 자들까지도 있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혼선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그리고 세례 의식 자체가 어떤 요술적 효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를 미신적으로 수행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죽은 시체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교사들은 소위 성지순례(聖地巡禮)를 다녀오면서 세례 의식에 사용하려고 물병에 요단강 물을 넣어 가지고 오는 자들이 있다.
이와 같은 세례의식으로 인한 여러 가지 신앙적인 부작용은 교회가 내용보다 의식을 앞세우는 과오에서 뿐만 아니라, 세례에 대한 성경적인 정확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기독교 신앙생활을 위해 세례 의식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정립이 필요하다.
(3) 세례의 목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세례는 그 목적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승천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여러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적을 간추려 정리하면, 첫째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둘째는 믿는 자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다.
복음 전파와 구원의 확신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래서 이들 목적은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이유는 전도자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① 복음의 전파
기독교 세례의 목적은 복음의 전파이다. 이는 세례의 객관적인 목적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것은 구속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례는 복음 전파의 한 방편이다.
복음은 전도자들이 언어로 전하는 방식을 통하여 전해지기도 하지만, 세례라는 방식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그것은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속하시는 정결의 표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와 한 몸이 되는 연합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과 연합의 표상에는 온 세상에 전파할 복음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다시 말하면, 속죄를 통해 한 몸을 이루시는 구원에 대한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셨다(마 28: 19-20).
다시 말하면, 모든 족속에게 세례도 주고 가르치기도 하며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복음 전파의 한 방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세례는 의식적인 성례로서의 의미보다는 복음 전파의 한 방편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알고 보면, 예수께서는 의식적인 성례로서 세례보다는 복음 전파의 한 방편으로서 세례를 주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구원의 확신
기독교 세례의 목적은 구원의 확신이다. 이는 세례의 주관적인 목적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것은 수세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신앙 성숙의 한 방편이다.
신자의 신앙 성숙이 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통하지만, 세례라는 복음 전파의 방편을 통해서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속하시는 정결의 표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와 한 몸이 되는 연합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정결과 연합의 표상에는 신자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복음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다시 말하면, 속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하셨다(막 16: 15-16).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도 주어서 구원을 얻게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신앙 성숙의 한 방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세례는 의식적인 성례로서의 의미보다는 신앙 성숙의 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알고 보면, 예수께서 의식적인 성례로서 보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신앙 성숙의 한 수단으로서 세례를 주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2]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 자들의 입소문에 의하여 많은 바리새인들이 그의 말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3] 주께서 아신지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남들과 무의미한 충돌을 피하신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종종 바리새 교인들과 변론하신 일도 있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그들과 충돌하기를 피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때에 시기심을 발하였다.
요 4: 2 친히 -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
1]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서 실상 세례를 베푸신 일은 없었으나 소문이 잘못 퍼져서 그가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처럼 선전되었다.
세상 사람은 언제나 진리와 사실대로 믿는 것보다 뜬 소문을 얼른 청취하여 쉬이 전한다.
2]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제자의 삶은 스승의 가르치심 데로 그들의 삶에 적용하는 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 구령사역을 완수하였을 것이다.
요 4: 3 유대를 떠나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
1] 유대를 떠나사
유대(Judea): 찬송
이 땅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 12지파에게 토지를 분배할 때 유다라 이름하였다. 당시의 경계는 동으로 사해, 서는 지중해, 남은 시므온, 북은 베냐민과 단이 있었다. (수 15장)
* 민 26: 22 – 이는 유다 종족들이니 계수된 자가 칠만 육천오백 명이었더라.
솔로몬 왕이 죽은 후 그 아들 르호보암에 이르러는 국가가 분열되어 북방의 10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 왕상 12: 20 –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남방은 유대 베다민의 양 지파가 유다 국이라 하여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예수 당시는 로마에 속한 영토로서 로마는 유대 전토를 3도르 나누어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라 하였다.
유대 광야라 한 곳은 예루살렘 동남에 있어 세례 요한이 전도하고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곳인 듯하다.
* 마 3: 1 -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다시 갈릴로 가실새
갈릴리(Galilee): 둥글다
구약 시대에는 요단 강 서쪽 팔레스타인의 북부를 보통 갈릴리라 하였다.
* 수 20: 7 -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 왕상 9: 11 –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제공하였음이라.
* 왕하 15: 29 –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스불론, 아셀 자손들이 제비를 뽑아 차지하였으며 여러 번 혈투하였지만,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다.
* 수 19: 10-16, 32-39 – 10 셋째로 스불론 자손을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의 경계는 사릿까지이며 11 서쪽으로 올라가서 마랄라에 이르러 답베셋을 만나 욕느암 앞 시내를 만나고 12 사릿에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해 뜨는 쪽을 향하여 기슬롯 다볼의 경계에 이르고 다브랏으로 나가서 야비아로 올라가고 13 또 거기서부터 동쪽으로 가드 헤벨을 지나 엣 가신에 이르고 네아까지 연결된 림몬으로 나아가서 14 북쪽으로 돌아 한나돈에 이르고 입다엘 골짜기에 이르러 끝이 되며 15 또 갓닷과 나할랄과 시므론과 이달라와 베들레헴이니 모두 열두 성읍과 그 마을들이라. 16 스불론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마을들이었더라. 32 여섯째로 납달리 자손을 위하여 납달리 자손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33 그들의 지역은 헬렙과 사아난님의 상수리나무에서부터 아다미 네겝과 얍느엘을 지나 락굼까지요 그 끝은 요단이며 34 서쪽으로 돌아 아스놋 다볼에 이르고 그 곳에서부터 훅곡으로 나아가 남쪽은 스불론에 이르고 서쪽은 아셀에 이르며 해 뜨는 쪽은 요단에서 유다에 이르고 35 그 견고한 성읍들은 싯딤과 세르와 함맛과 락갓과 긴네렛과 36 아다마와 라마와 하솔과 37 게데스와 에드레이와 엔 하솔과 38 이론과 믹다렐과 호렘과 벧 아낫과 벧 세메스니 모두 열아홉 성읍과 그 마을들이라. 39 납달리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받은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마을들이었더라.
* 삿 1: 30-33 –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 로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예수님이 12제자중 11제자를 이곳에서 택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호수 연안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기름진 옥토를 갖고 있어서 주변 인구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으며 갈릴리 호수의 물은 전 이스라엘 땅의 음료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는 생명선이 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갈릴리 호수, 바다의 수면보다 700피트 아래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북부 납달리지파의 땅에 속한 이 담수 호수는, 하프의 모양같이 생겼기에 히브리어로 키노르라 불리었고 이는 게네사렛의 어원이 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던 곳으로서 가버나움 항과 막달라 항 사이에 위치한 타브가 항구는 초대교회의 사적지로 유명하다. 이 타브가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소명을 주셨고(막 1: 17), 부활 후 이른 새벽에 이 항구에 나타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유명하다.
타브가란 헬라어로 '일곱개의 샘물'이란 뜻으로 이곳에 따뜻한 미네랄 온천이 솟아올랐기에 전통적으로 가버나움 출신의 어부들은 겨울철에 꼭 이곳에 와서 어업을 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타브가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고, 부활 후에도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서 제자들과 조반을 먹었던 장소로 확증된다.
* 눅 5: 1-7 –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요 21: 1-8 –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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