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나 9. 14
조미경
우리 집 거실 중앙에는 가족사진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 사진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우리 집의 기둥인 사랑하는 아빠, 엄마 그리고 큰언니, 작은 언니, 나, 이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을 중심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큰 언니는 서울의 모 약대를 졸업하고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는데, 언니는 늘 작은 상자 같은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가슴이 땅 한 평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의 직업에 대해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럴 때마다 ‘큰 언니는 욕심도 많아 약대 나와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 못하면 어떡해?’ 내가 부러운 듯이 큰 언니에게 대꾸하면 ‘너는 말이야, 지금처럼 그렇게 미래가 없는 회사에서 일하다, 너를 구원해 주는 싹수 있는 놈 만나서 이 집안을 떠나면 되는데, 이제라도 공부해서 성공이라도 하려고 그러냐?’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때마다 큰 언니가 야속했다. 우리 집에서 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해,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일이며, 아빠의 월급 대신 내 월급을 엄마에게 바치고 생활비를 버느라 허리가 휘는데, 언니들은 월급 받으면 명품 가방과 신발에 돈을 쓰면서, 엄마에게 용돈 한 푼도 드리지 않았다. 엄마는 내 월급날이 다가오면, 아침부터 죽상을 하며 나를 힘들게 했다. 언니들은 직장 스트레스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짜증과 신경질을 모두 나에게 퍼부었다. 엄마와 언니들의 눈에 나는 미운 오리 새끼다.
저녁 11시까지 동네 편의점에서 알바하다 퇴근, 언니들이 먹다 남긴 음식쓰레기와 주방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언제나 12시가 넘었다. 엄마의 돈타령에 용돈이 궁해 주말과 휴일까지 반납하고 알바를 두 군데 뛰다 보니, 대상포진이 걸려, 회사에 병가를 내고 쉬고 있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은 대상포진에 걸려 아프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데도 본체만체하면서, 마치 꾀병을 부리는 것처럼 나를 대한다. 침대에 누워 꼼짝을 못하니 집안은 쓰레기장이 되어 가고 있고,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는 음식은 먹지 않고 술과 담배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경은아? 너 진짜 많이 아파? 꾀병 아니지…” 큰언니의 비웃는듯한 싸늘한 말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자신들의 몸이 아프지 않다고 동생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회사 대표가 전화해서 몸이 나아질 때까지 집에서 요양하라는 전화에 하마터면 눈물이 터질뻔했다. 가족도 아닌 사장님의 배려가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했다.
작은 언니는 대기업 관리부에서 일한다. 회사에서 단체 회식이 있는 날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대리 기사 불러서 상사들 집까지 모두 보내고 혼자 남은 언니는, 그때부터 혼자 술을 퍼마시며 자정이 지나 집에 들어온다. 그런데 문제는 술을 마시면 술주정이 심해서, 언니에게 호감을 느끼는 남자들이 모두 도망을 칠 정도로 주사가 심했다. 얼마 전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언니가 술에 취해 걸으며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 혼자 잘난 척하는 언니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아침이면 몰래 내 옷을 입고 출근하는 작은언니 때문에 막상 출근할 때 입을 옷이 없어 쩔쩔맬 때도 많은데, 여태 단 한 번도 나에게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한 달 전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어 그동안 아껴 두었던 원피스를 고이 모셔 두었는데, 잠깐 부엌에서 설거지할 때 작은 언니가 나에게 말도 없이 옷을 입고 출근을 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주부들이 요리할 때 가장 많이 찾는다는, 요리의 맛을 살리는 조미료 회사에의 서울 총판에서 경리를 맡고 있다. 그날 회사에서 눈치도 없고 예의도 없는 직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내가 속한 부서 얼굴에 먹칠했다는 강 팀장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팀장은 며칠 전 넌지시 회식 후 2차 이야기했을 때 농담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날은 평상시와 달리 떠들썩한 치킨집이 아닌 근사한 와인바에서 음악을 음미하며, 카나페를 얌전하게 먹을 줄 몰랐다. 옷차림에 신경 좀 쓰라는 말을 들었지만, 막상 와인바에 도착했을 때는 혼자 집에 가겠다고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월급을 받으면 대체 어디다 쓰는지, 구질구질한 옷만 입고 출근하냐는 우리 부서 강 팀장의 힐난을 듣고 있자니, 너무 속상하고 억울하다. 나도 다른 직원들처럼 멋지게 입고 싶고 꾸미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다. 다음날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식에 주자도 모르는 나에게 주식 투자하다 망했다는 소문에 망연자실,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아빠가 남긴 빚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예전의 평온함은 사라지고 말았다.
엄마의 우울증은 나날이 심해지는데, 언니들은 자신들 인생 살기도 바빠 집안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구차하게 구질구질한 집안일에 대해 회사에서는 아무에게도 가정 형편을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빚 청산을 위해 살던 아파트를 정리했다. 남은 돈으로는 서울의 월세 집도 구할 수 없었던 엄마는 말수가 더욱 줄고 온종일 집안에 틀어 박혀 지냈다. 그리고 새롭게 이사를 하게 된 곳은 아파트가 아닌 빌라였다. 빌라는 아파트와 다르게, 층간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늦은 시간 퇴근하면, 불 꺼진 거실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엄마를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조미료 회사의 서울 총판에서 1년 계약직이 끝났다. 계약 연장은 되지 않았고 더욱 승진할 수도 없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3개월 전 B사로 이직했다. B사는 아파트 시행사로 사장 포함 전 직원은 7명인 작은 회사였다. 내가 하는 업무는 회계 업무 보조를 맡고 있다. 이 회사 대표의 딸인 차 대리의 경리 보조를 맡아 복사와 팩스를 보내고, 우체국에서 서류를 광주 현장으로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회사는 요즘 광주에 분양 중인 아파트 입주로 무척이나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처음 사업지를 물색하고 첫 삽을 뜰 때는, 아파트 시세가 비록 지방이지만 서울 못지않게 오르는 추세여서, 모델 하우스 오픈을 앞두고, 대박을 터트릴 것으로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기도 전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철강과 시멘트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고물가 행진으로 인해 공사비 인상 문제로 시공사 대표와 살벌한 논쟁이 있었다 들었다. 모델 하우스에는 구경꾼들만 북적거리고, 대신 사은품 증정에 목을 매는 주부들의 발길만 꾸준히 이어지고, 정작 찾아 주어야 할 실수요자의 발길이 뜸했다. 사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심초사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연 회사 분위기는 무겁게 흘러갔고, 사무실에 비치하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커피, 차 종류도 가장 저렴한 것만 사다 놓았다. 그럴 때마다 차 대리인, 사장 딸에게 아부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차 대리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취업이 되지 않자 집에서 놀기 지겨웠는지, 아빠가 사장인 회사에 나와서 시간 때우고 있다. 며칠 전에는 우체국에 등기 우편을 보낼 일이 있었는데, 사장 인맥으로 들어온 새내기가 광주 현장 출장을 가고 없어, 혼자 무거운 전단지를, 낑낑거리고 우체국까지 걸어서 다녀왔다. 지금 회사로 이직한 것은 조금 더 편하게 직장 생활하려고 했는데, 일은 더 많고 눈치 볼 일이 많아 마음이 답답하다.
아빠와 엄마는 은행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사내 커플이었다. 그 당시 아빠는 출납 담당을 맡아 창구에서 고객들에게 예금 통장을 신규 발행하는 업무를 맡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한 사람은 다른 지점이나 타 은행으로 이직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어, 엄마는 집에서 가까운 은행으로 이직했고 아빠는 다니던 은행에서 승진을 거듭해서 퇴직하기 전에는 지점장까지 고속 승진으로 엄마의 커다란 기쁨이었다. 아빠는 학교 졸업 후에도, 동창생들과 관계가 좋았다. 은행에서 새로운 적금 상품이 출시되면, 맨 먼저 가까운 친척들과 형제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먼저 전화해서 상품 가입을 권유했다. 은행에서 예금 실적과 대출 실적이 좋아, 연수원 동기들 보다 빠르게 승급 했다.
아빠는 젊은 시절부터, 명예와 승진 욕심이 있었다. 목표는 본점에서 일하면서, 전국 지점을 관리하는 행장이 꿈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본점에서는 각 지점 간의 통폐합으로 인해 인원이 남아돌자, 명예퇴직자 신청받았다. 아빠는 끝까지 정년을 맞이하려 했지만, 상부 무언의 압력으로 인해 퇴직금을 받고 회사를 나왔다. 아빠는 퇴직금으로 새로운 일을 찾으려 했지만, 은행 업무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아빠는, 새벽에 일어나 집 근처 공원에서 운동하고 엄마가 차려 주는 아침을 먹고 출근하던 아빠는, 더 이상 양복을 입고 출근할 직장이 없자, 종일 벽만 바라보고 시간을 보냈다. 의기소침해 있는 친구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친구의 소개로, 중소기업의 경리과장 자리에 앉았지만, 약 3개월 만에 사표를 쓰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말이 경리과장이지 하는 업무는, 경리 사원이 할 수 있는 단순 업무였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공장을 찾아 납품 기일과 원가를 낮추는 일 하며 허리가 90도 꺾이게 굽신거리던 어느 날 거래처 젊은 직원의 한마디를 듣고 그길로 회사를 나왔다. 그 후 끊었던 담배를 피우고 소주를 마시면서, 의기소침하게 시간을 보냈다. 집안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에 분통이 터진 엄마는 아빠에게 새로운 직장에 취업하기를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일을 꼼꼼하게 살피기로 정평이 난 아빠는 이번에는 주택관리사 공부를 위해 집에서 책과 씨름을 했다. 1년을 공부한 후 당당히 합격해서 일산에 있는 작은 빌딩 관리소장으로 부임했다. 얼굴에 인상 쓰고 죽을상을 하던 엄마는 드디어 살맛이 난 듯 친구를 만나러 동창회에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반짝 다시 아빠는 2달 월급을 받고 몸져누웠다. 빌딩 관리 주체인 관리소와, 건물주들이 주축이 된 운영위원회가 주차장, 바닥 보수 공사로 인한 부실 공사 문제로 관리소장인 아빠를 공격하자, 항변 한마디 하지 못하고 사표를 내고 말았다. 두 분의 부부싸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이 위태로웠다. 어느덧 아빠의 귀엣머리에는 희끗희끗 흰 눈이 쌓여 갈 무렵 아빠 친구 중에 집을 지어서 파는 건축업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실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동창회에 다녀온 아빠는 들떠 있었다. 생전 가족들에게 무심한 아빠 손에 치킨 상자가 들려 있었고, 다음 날부터 은행에 출근하시는 것처럼,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엄마는 내심 불안했는지,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아빠는 더 이상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았다. 은행 인맥을 활용한 아빠는, 금리가 저렴한 대출 상품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후배 지점장에게 부탁해서 퇴직금 받은 돈과, 가족이 사는 아파트를 담보로, 여주에 땅 5,000평을 계약했다. 건축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는 친구 말을 믿고 땅을 시세보다 평당 2만 원 더 비싼 값에 매입했다. 잔금을 치를 때까지는 땅이 주택을 지을 수 없는 농업 용지라는 것을 몰랐던 아빠는, 시청에 용도 변경하느라 공무원들을 만났지만, 처음부터 농업 용지로 묶인 땅의 용도를 변경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아빠는 퇴직금과 아파트 담보로 대출받은 땅은 팔리지도 않고 다달이 대출이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은, 시세보다 싼값에, 현지인에게 되팔고 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그때 나는 한창 예민한 중학교 2학년이었다. 평상시에도 딸들에게 무뚝뚝한 아빠였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나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말도 섞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격렬해졌고, 모든 화살이 나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60을 훌쩍 넘은 아빠는 새로운 직장에 취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집에서 엄마의 눈총을 받던 아빠는, 엄마와 크게 싸운 후 집을 나갔다. 그리고 몇 달 후 아빠는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으로 하루를 보내시다, 동료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반지하 셋방으로 귀가를 서두르다 심야에 달리는 버스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우리 집은 아빠의 사고사 이후 무겁게 집안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를 미워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으로 인해 아빠가 타지에서 돌아가셨다면서 한동안 슬픔에 잠겨 지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 경기도 외곽 허름하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포장 이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우체국에서 박스를 사서 이삿짐을 쌌다. 이사 한 후 몸살이 찾아와 기침이 심하고 열이 나고 몸이 몹시 아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서 항원 검사를 했더니, 의사는 내게 코로나 확진이라는 말을 하며 집에서 무조건 쉬라고 했다. 회사에서 조퇴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 멀리 않은 곳, 손수레에서 딸기를 팔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먹음직스러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좌판으로 달려갔다. 딸기를 무척 좋아하는 엄마 생각에 덥석 한 팩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빨간 딸기를 드시면, 행복해할 엄마를 떠올리자 갑자기 기분이 좋았다. 마당에 걸린 빨래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는데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놀래 켜 주고 싶어, 엄마를 부르지 않고 살금살금,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열린 거실 틈으로 말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기분 좋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와 통화를 하는 것인지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고,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엄마도 웃을 때가 있구나… 우울증 때문에 웃지도 않고 세상사 삶에 미련이 없어, 먹고 마시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저렇게 건강하게 웃을 때도 있구나’ 생각하며 현관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다 그만 숨이 턱 멎는 줄 알았다. 순간 하마터면 들고 있던 딸기를 놓칠 뻔했다. 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나를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작정 걸었지만, 하소연할 곳도 마음 둘 곳이 없다. 늦은 시간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게 앉아 있다, 맨정신으로는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포장마차에 갔다. 늦은 시간 포장마차에는 다행히 손님이 한 명도 없다. 빈속에 독한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자, 속에서는 불이 난 듯이 활활 타올랐지만, 계속 술을 마셨다. 알코올 기운에 낮에 있었던 일을 잊으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지난날을 생각하니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수중에 돈도 없고, 갈 곳도 마땅치 않다. 더구나 코로나 확진인데 집 외에는 갈 곳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아도 될 것을. 새삼 고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23년을 키워준 양부모님께 감사하며 나를 희생하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다니…나는 단 한 번도 양부모님이라 칭하는 특히 아빠를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양부모에게 천대와 멸시를 당했지만, 친딸이 아니라 친자매가 아니어서 못나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머리가 나빠 공부도 못하고, 운동 신경 또한 굼떠서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어 매질을 당하는 줄 알고 살아왔다.
언니들이 나를 놀릴 때마다, ‘너는 우리와 아빠 엄마가 달라 그러니까 너는 친동생이 아니야’하는 말을 들을 때면 부모 없는 외로움을 달래려, 혼자 종이 인형으로 소꿉놀이하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엄마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기구한 나의 운명에 통곡하고 싶었다.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다, 찜질방에서 밤을 새웠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초췌하고 두 눈은, 생기 없이 초점이 흐렸다. 입술은 바싹 말라 건조해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전날 입었던 옷은 구겨지고 여기저기 얼룩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제의 일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한참 동안 심호흡해야 했다. 새벽 6시 옷자락 사이로 바람에 들어와 가슴을 친다. 차가운 날씨 탓인지, 팔에 소름이 돋는다. 조심스럽게 집으로 들어가니, 엄마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고요 속에 묻혀 있다. 방에서 옷 몇 가지를 챙겨서 나왔다.
몸이 피곤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기에 종일 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하는 중간중간 엄마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끝없는 복수심에 불탔다. 그러면 나를 낳은 친엄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원하지도 않은 아이를 낳고 버리는 그런 무정한 엄마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돌아가신 아빠에 대해 미움과 원망이 끓어 올랐다.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고 난 다음부터, 가슴에 돌덩이가 얹혀서 밥을 먹어도 소화도 되지 않고,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생각에 하루하루 말랐다. 지금 엄마라고 부르는 여자가 핏덩이를 지금껏 키웠는데, 자신 스스로 마음씨가 좋아서 입양해서 키우면서, 친자식과 구분해, 사랑 대신에 매를 들고 체벌하면서 키웠다, 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듣고 자랐다. 처음부터 키우기 힘들었으면 차라리 파양을 신청했더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기가 막힌다. 나는 결국은 이런 운명이었는데, 부모와 형제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 구실을 하려고 하니 못살게 굴고 학대해 왔다는 거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받은 서러움이 고통이 서서히 밀려온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손찌검하고 툭 하면 밥을 굶겼다. 늘 습관처럼 하는 말은 ‘키워준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는 것을 강조하며 윽박지르고 체벌을 가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자신이 낳은 딸을 애써 외면하고 엄마 뒤로 숨었다. 그런데 사실은 엄연한 아빠가 낳은 친딸을 마치 입양아처럼 대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중학교 때 수학 여행비를 내지 못했을 때 담임 선생님이 대납했을 때, 자신들을 창피하게 했다 해서, 온몸이 피멍이 들게 맞아서 학교를 결석 해야 했다. 옆집 하은이 피아노 배우는 게 부러워서, 피아노 학원에 보내 달라고 말했다, 다리에 피가 나게 맞았다. 언니들은 대놓고 나를 무시하고 놀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선택해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야 하지만, 이대로 운명에만 맡기고 가만히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버려진 아이로 알고 살았더라면 이런 배신감은 들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희생만 하고 살았는지 분통이 터진다.
그동안 당한 설움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생부인 아빠는 생전에 나에게 무심했다. 단 한 번도 친딸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모질고 독하게 나를 훈계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친아빠.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생부에 대해 미워할 수도 그렇다 해서, 원망을 가슴에 품고 있자니, 가슴에서, 증오심이 끓어 올라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미칠 것만 같아, 회사에서도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다.
며칠을 고민했지만,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효녀 딸처럼 가식적으로 행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쉬는 날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사서 엄마를 드리면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잠깐은 미안해하면서 맛있게 먹곤 했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엄마 등산복과 신발을 사면서 언니들 등산복과 등산화를 샀다.
내가 등산복을 선물하자마자 언니들은 등산 한번 가자고 호들갑을 떨어댄다.
"경은아? 이 옷 정말 이쁘다. 나들이 갈 때 입으면 좋겠다. 입이 귀에 걸렸다 "어쩜 네가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니?" 큰 언니는 등산복 잠바를 입어 보면서 기분이 좋은지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보면서 한바탕 난리를 친다. 언니들의 호들갑에도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엄마는 겨우 한마디를 한다. "그래, 고맙다 경은아." 엄마의 반응을 보기 위해 가만히 있었다.
언니들이 등산복을 선물 받고 좋아하자 엄마도 언니들처럼 들뜨는지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가족 여행을 겸해서, 나들이하자고 한다. 아빠 살아생전 우리는 가족 여행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나는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했다.
퇴근 후 P.C방에 들렀다. 인터넷을 뒤지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서울은 아무래도 나들이 기분이 나지 않으니, 멀지만 지방으로 산행 가기로 했다. 주말과 휴일에 하던 알바를 쉬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속도로는 마지막 단풍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와 승용차로 정체를 빚었다. 배낭에는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꼼꼼하게 챙기면서, 미리 사진을 찍으며, 미리 코스를 걸어 보았다. 산 초입은 자갈이 많아서 등산화가 아니면 걷기에 힘들 것 같았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 서로 사진을 찍어 주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일주일 후 엄마를 모시고 조금 멀지만, 월악산으로 산행을 떠났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김밥을 싸고 간식을 준비했다. 월악산으로 떠나기 하루 전 나는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빌렸다. 다음 날 아침 언니들과 엄마는 두 눈이 등잔불만큼 커진다. 관광버스를 타고 월악산으로 갈 줄 알았던 언니와 엄마는 편안하게 월악산으로 산행하게 되었다며 어린애처럼 들뜬 표정이다. 운전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차 안에는 미리 준비한 음료와 간식을 싣고 달리는데, 고속도로는 나들이를 떠나는 행락객들로 정체가 이어진다. 가슴은 복수심으로 불꽃이 활활 타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짐짓 태연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도 모처럼 서울을 떠난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자동차는 달려 어느새 충청도로 향한다. 도중에 휴게소에 들러서 엄마가 좋아하는 호두과자 한 봉지 사고, 구운 감자도 샀다.
월악산 입구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산행을 시작했다.
등산로를 따라 걷자 11월의 가을이 봄처럼 곱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곱다고 했던가.
등산객들의 옷차림은 멀리서 보니, 마치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것처럼 울긋불긋 단풍과 함께 그림을 그리듯이 고왔다. 산에서는 새들이 노래하고, 사람들은 경치에 취하고 풍광에 취해 한잔 술에 취해 얼굴이 발그레하다. 나는 앞장서서 걸으며, 카메라로 엄마와 언니들의 모습을 수시로 찍었다.
월악산은 산세가 험했다. 나무들은 기분 좋게 싱그러움을 뿜어내는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곳에 파묻히고 싶었다. 경치에 취해 엄마를 괴롭히는 일을 중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받았던 설움이 떠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우리는 도중에 쉬면서 정상으로 향했다. 목이 말라 음료수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다시 걸었다. 산에서 먹는 음식은 달고 맛있었다. 등산로에는 가을의 낙엽이 수북이 쌓여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낙엽을 잘못 밟으면 미끄러웠지만, 그래도 집을 떠나 산행하니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다. 속으로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바위에 올라앉아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었는데, 평평해서 여러 사람이 앉을 만큼 넓었다. 엄마는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다음에 다시 오기 힘들다는 엄마의 말에 가장 멋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드렸다. 얼마쯤 걸었을까 엄마는 아까부터 배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아무래도 정상은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경치가 좋은 곳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우겼다. 엄마는 힘이 드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이슬처럼 맺혔다. 옆에서 큰언니가 엄마 상태를 살피더니, 아무래도 하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이번 생애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로 어르고 달래서, 상대방을 지치게 했다. 나는 맨 뒤에서 언니들의 뒷모습을 찍었다. 언니들과 엄마는 낙엽을 밟으며 나무들을 붙잡고 걸었다. 월악산은 코스마다 다르지만 내가 선택한 곳은 지형이 험해서, 산행 초보자에게는 무모한 코스였다. 산행에 초보인 산객은 스틱을 잡지 않고, 몸을 지탱하면서 걷기에는 힘이 들었다. 엄마의 건강 상태를 알았지만 무리하게 앞장세웠다. 풍경 사진을 찍느라 언니들 한참 뒤에서 걷던 나는 큰 언니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거 같아 속으로는 기뻤지만, 겉으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연기를 했다. 하늘에 죄를 짓는 것 같아, 수없이 기도를 올렸지만, 이젠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아빠의 실직 후 엄마의 이상 행동은 나를 더욱 괴롭혔다. 내가 내는 등록금이 아깝다며 대학에 가지 못하게 막은 것도 엄마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밉고 또 미운 감정이 스멀거렸다. 큰언니와 작은 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은? 어디 있어 빨리 와 봐 …” 큰 언니의 쇄 된 소리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양심이 불쑥 끼어들었지만, 무심한 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나는 정신 없이 뛰다시피 나무들을 피해서 걸음을 옮겼다.
언니들은 나를 보자 망연자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제야 사태를 짐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미끄러진 곳을 따라 내려갔다.
내 발은 낙엽과 함께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언니들도 덩달아 나와 함께 미끄러졌지만, 중간에 멈췄다. 내리막길이 험해서 나무를 붙잡고 걸었다.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가니 그곳에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 얼른 엄마를 일으켜 세웠지만, 엄마는 의식이 없이 누워 있었다. 언니들은 당황한 나머지 혼비백산해서 엄마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엄마… 엄마 내 말이 들려? 엄마는 의식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잠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서 산을 내려 가야 하는데… 어쩌지
엄마를 업고 내려갈 수도 없고…내가 말했다. "어서 119에 신고하자."
큰 언니에게 소리치자 언니도 "알았어…그런데 어떻게 전화하지" 큰 언니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엄마를 손발을 주무르면서 엄마를 외쳐 불렀다.
"엄마?…죽으면 안 돼… 엄마? 엄마…" 어서 일어나."
옆에서 작은 언니가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는 그동안 심장약을 복용했다고 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충격으로 우울증이 심해지고 심장 발작까지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충격이 생기면 심장이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말했다.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멍했다.
엄마의 옷을 열어서 가슴이 답답하지 않게 하고 손발을 주물렀다.
그러나 엄마는 곧바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지만, 응급치료를 배우지 않은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약 20분 후 헬기가 도착했다.
헬기에서 내린 응급 구조요원들이 엄마를 들것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큰언니와 작은 언니와 함께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는 서울이 아닌 월악산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에 내려 주었다. 엄마는 중환자실로 실려 가고 언니들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우리 자매는 엄마 걱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특히 큰 언니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크나큰 재앙 앞에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걸친 의사가 나와서
우리를 부른다. 순간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쉽게 세상을 떠나리라 생각 못했던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의사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 수술동의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었다. 엄마가 고혈압 약을 복용했는지 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환자에게 그리고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의문 사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큰언니는 엄마와 함께했고, 직업 특성상 엄마가 어떤 약을 복용 하는지 아는 사람이 왜, 무모한 나의 행동에 대해 제지하지 않았을까. 증거는 없었지만, 엄마가 평소 복용하던 약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엄마의 건강 상태를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미움과 원망이 교차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남겼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결국은 아빠 곁으로 떠난 흰 천에 쌓인 엄마를 보는 순간,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슬퍼서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되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그동안 나를 못살게 굴었던 분풀이를 하려고, 엄마의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권했던 나. 죽도록 미워했던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 앉아 속죄의 눈물을 흘리며 비통에 젖어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앉아 있으니, 비로소 나를 고단하게 한 원인이 사라진 것 같아 홀가분하다. 엄마를 알고 지내던 엄마의 친구들이 삼삼오오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위로를 건넸다. 언니들은 손님이 없는 시간에 잡담을 즐기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하며 문상객들을 맞았다.
손님들이 뜸한 늦은 저녁 희철 오빠가 친척들의 눈을 피해 빈소를 찾아 엄마의 영정에 인사했다. 그런 희철 오빠를 측은 하게 바라보던 큰 언니는 이제 서운한 일은 모두 잊으라고 한다. 희철 오빠는 구박받는 나를 옆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참고서를 빌려주고 공부를 가르쳐 준 고마운 오빠다. 그런데 엄마와 언니들은 그런 나를 질투해서 더욱 나를 못살게 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철 오빠는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경은아? 너…왜 그러는 거야? 말까지 더듬으면서 나를 말리려 한다. "내가 뭘 어쨌는데…사실 언니들도 엄마가 싫었잖아, 도박 중독에 알코올 중독인 엄마가 싫었으면, 어떻게든 말리려 하고 치료에 힘써야 했는데, 반대로 외면 했잖아.” 나와 달리 친엄마인데 왜 그렇게 미워하냐고…〃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속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옆에서 큰 언니가 희철 오빠 눈치를 보면서 “네가 뭔데 아는 척이야? 그리고 너! 우리 엄마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언니들이 나를 에워싸고 험악한 표정을 짓는다. 순간 너무 화가 났다. “ 그리고 아빠 사망 보험금 말인데... 사실 지금 여기서 언니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내 몫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아는데, 그것을 언니들이 모두 빼돌렸잖아 엄마와 짜고…” 지금 생각하니 엄마의 행태가 너무나 괘씸하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산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엄마의 이중성을 다시 한번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른 엄마들은 재테크에 능했지만, 엄마는 반대로 일확천금을 노리다, 재산을 탕진했다. 첫 단추는 친정 가족 빚보증을 서게 되면서, 아빠와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엄마를 보내 드리고, 가슴에 남아 있던 원망을 하나씩 풀어 헤치고 나니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껍데기만 붙잡고 살아가는 날이 계속되었다.
잠이 들면 엄마가 나를 찾아와 눈을 부라리며 손찌검했다. 그때마다 적막함이 무섭고 두려웠다. 잠들지 않으려 날마다 진한 커피를 타서 밤을 새우다 새벽에 깜빡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다. 엄마가 없는 집은 무섭기만 했다. 갈 곳이 없는 나는 보증금 500에 월 40만의 원룸을 얻어 독립했다. 엄마의 영혼이 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밤거리를 헤매고 독한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자, 속에서는 불이 난 듯이 활활 타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잠을 자려 자리에 누우면 방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 달라는 환청에 시달리다 보니,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기를 여러 번. 잠을 못 자는 날이 계속되자 입안은 타들어 가는 목마름에 음식을 넘기기도 어렵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 누구에게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결국 엄마를 죽게 한 장본인은 나라고 원인 제공자가 나 자신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말았다. 조금만 일찍 엄마의 아픔을 알았더라면 이리 쉽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수 없이 생각했지만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엄마의 지병을 알게 된 후 엄마를 괴롭히려 꾸민 일이 결국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줄은 몰랐다.
엄마의 49재가 다가오자 큰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함께 제사를 지내자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예전 집으로 들어가니 대문 앞마당에는 낯익은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언니들이 그동안 안방에 있던 유품들을 정리하기 위해, 종량제 봉투를 가지고 와서 정리하고 있었다. 언니들은 행여 엄마의 유품 중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빠가 객지를 떠돌다, 비명횡사하기 전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아, 이 집도 월세로 살고 있다는 것을. 그것 때문에 엄마는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것을 알고 나 자신,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것을 언니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큰 언니는 이미 엄마의 사망 보험금을 작은 언니와 나누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통보하면서, 적반하장으로 양육비를 운운하는 것이다. 엄마의 유품 중에서 생전에 착용하시던 반지와 살림살이는 언니들이 챙기고 손때묻은 가계부와 엄마가 남긴 사소한 물건을 손에 넣고 나의 남루한 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잠이 깨면 아침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불면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부터 엄마가 남긴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 읽어 내려가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다. 그동안 늘 궁금했던 것은 엄마는 평상시 늘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모임에는 자주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쓰는 장롱에서는 명품 가방이 여러 개 나왔고 명품 가방은 하나 같이 오늘 막 산 것처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언니들은 엄마의 장롱에서 나온 명품 가방을 발견하자마자 서로 좋은 것을 갖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혹시 모를 엄마의 숨겨둔 비자금을 찾기 위해 통장을 찾았지만, 통장은 잔액이 거의 없는 빈 통장이었다. 그리고 49재에 마지막 물건을 정리하면서 나를 불러 자신들이 찾지 못한 물건 중에 새로운 것이 없는지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의 성격이 이렇게 꼼꼼한 사람인 줄은 그동안 몰랐는데, 일기장에 자신의 행적을 기록해 놓을 줄은 몰랐다. 엄마의 가계부에 쓰인 내용은 남들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었지만, 아빠가 객지를 떠돌다, 버스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던 날의 일이 궁금했다. 왜 아빠는 무일푼으로 집을 나가 사고를 당했는지 지갑에 돈 한 푼 없이 집을 나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충격적인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대응이었다. 친척들, 아버지의 형제들 즉 나에게는 큰아버지 삼촌들, 그리고 고모들 앞에서는 아빠를 따라 곧 세상을 하직할 것처럼 슬피 울던 엄마는 장례식이 끝나자 버스 회사에 찾아가, 사망 보험금을 더 받아 내기 위해 악을 쓰고 다녔고, 생명 보험금을 받은 후에는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에 다니면서 얼굴을 뜯어고쳤다. 마치 새 인생을 살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동안 만나지 않던 친구들을 만나면서, 짙은 화장으로 나이를 감추고,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장롱에 숨겨두었던 명품 가방도 아빠의 사망 보험금으로 사치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무섭고 싫었다. 또 하나 나의 부도덕한 행동에도,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악몽도 차츰 꾸지 않았다.
평상시 무뚝뚝했지만, 남들에게는 싫은 소리 한번 못하시던 아빠가 비명횡사 이유를 자세히 알기 위해 가계부에 기록된 내용을 알게 되자 나를 키워준 엄마의 이중성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엄마는 은행에 재직할 때 엄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 사업자금 보증을 서게 되었고, 빚을 갚기 위해 엄마는 친구들에게 높은 이자를 주면서 고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친정 부모의 빚을 떠안은 엄마는 결국은 도박에 손을 대게 되었고, 사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빚 때문에 은행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자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던 엄마는 집에서 가까운 공장에 경리 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작은 중소기업 경리 직원의 월급으로는 이자 갚기도 벅차게 되자 공장 직원들과 계를 만들었다. 계주가 된 엄마는 성실하게 일했지만, 돈의 양면성으로, 엄마의 인생은 순탄하게 살 수 없는 인생이었는지, 돈만 생기면 도박장에 가게 되었고 엄마의 도박 중독에 지친 아빠는 더 이상 엄마와 결혼 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 이혼할 결심을 했다. 서울가정법원에 이혼 서류를 제출한 그 날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직장 후배이자, 동료 직원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점차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아빠보다 10년 연하였고, 당시 직장에서 업무 스트레스와 동료 간의 승진 다툼에 그녀가 개입되어 하소연을 주로 하고, 아빠는 이혼의 위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터놓게 되면서 자주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두 분의 이혼은 엄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몇 년 동안 별거하게 되었다. 이혼 대신, 별거를 무늬만 부부인 윈도우 부부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여기까지 단숨에 읽어가던 나는 눈이 피곤하고 어깨가 아파 더 이상 읽어 내려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생각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동사무소로 향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아빠가 더 이상 엄마의 도박 중독을 끊지 못하고 은행에서 퇴직하게 되자, 엄마는 아빠에게 돈을 벌 것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큰돈을 벌려다, 반대로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빠와 엄마는 자주 부부싸움을 했고 견디기 힘든 아빠는 집을 나갔다. 여기까지 읽게 되었을 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회사 일이 바빠서 엄마의 유산인 가계부를 읽을 시간이 없었다. 회사 일도 바빴지만,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고아 된 기념으로 술 한잔 마시자는 전화에 만나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 놓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외로움이 뼛속같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친구들은 집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슴에 한기가 들지 않으니,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늦게까지 수다 떨자던 친구들이 밤 10시가 되자, 부모님 걱정한다는 말로 자리를 파하고 나자, 혼자된 외로움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컴컴한 어둠에 묻혀 있던 집안에서 누군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가 넘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음에도 혼자 깜짝 놀라 현관문을 확인했다. 혼자 지내는 일이 익숙할 법도 한데 아직도 혼자 집안에 앉아 있으면 무섭다. 누군가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오늘따라 조용함이 무섭다. 어둠이 무서워 밤새 불을 켜 둔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술기운 탓인지 늦잠을 잤다. 정신없이 양치만 하고 지하철로 뛰었다.
또 평범한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원룸 계약 기간이 끝나 시설이 좋은 근처 오피스텔로 이사하기로 하고, 부동산에서 계약했다. 이삿짐을 싸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작은 원룸 이사라 1톤 트럭이면 될 것 같아 미리 용달차를 부르기로 하고 우체국에서 박스를 샀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쓸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동안 내 눈에 띄지 않아 몰랐던 것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수첩이 아니었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은 다이어리가 책꽂이에서 툭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쓰레기통으로 버리려 미뤄 두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은 메모지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익숙한 글씨였다. 엄마가 생전에 자주 쓰던 글씨로 쓰인 메모가 날짜와 함께 쓰여 있었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이제야 풀리는 것을 다이어리를 보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건이었다. 맨 첫 장을 넘기자, 나의 생일과 일치하는 날짜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소상하게 기록한 엄마의 기분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묘하게 답답했다.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날씨에 내 심사가 뒤틀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나니 집안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누군가 찾아올 것 같은 예감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나서도 기분이 상쾌해야 하는데도 몹시 우울했다. 나의 기질은 원래 부모님이 물려 주신 탓에 신경이 예민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알았기에, 또 나를 괴롭히려 찾아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마당이 있는 작은 집에 살았는데, 젊고 예쁜 여자가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결국 결심이 섰는지, 내가 앉아 있는 마루를 향해 초인종을 누르는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나에게 다짜고짜 아이를 맡아 길러 달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처음에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고 물었지만, 여자는 금방 알 것이라는 말과 함께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기는 6개월 정도 되었고 이름은 경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포대기 안에는 통장과 비밀번호가 적인 쪽지가 있었다. 그리고 부디 잘 키워 달라는 말을 남겼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비로소 나의 출생에 비밀에 관한 것을 이제야 풀리나 싶어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은 원룸과 달리 방범이 잘 되어 있어 밤마다 불을 켜 놓고 잠을 자는 일은 없었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흉몽에 시달리지 않고 아침까지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덕분에 회사에서 업무 효율도 높아, 승진하게 되었다. 말단 사원에서 주임으로 호봉이 올라가면서, 괜히 혼자 으쓱한 기분으로 일하니 친구들이 좋은 일 있느냐 물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이제야 자립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일상을 이어 갔다. 엄마의 다이어리를 읽으며 왜 나를 그토록 구박과 학대했는지 궁금증은 깊어만 갔고, 비밀의 열쇠를 찾기 위해 나는 밤마다 학창 시절 하지 못했던 공부를 늦게 하는 기분으로, 하나씩 수수께끼를 풀 듯이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몇 달 뒤 의문이 풀렸다. 결국 엄마는 아빠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고, 자신이 뿌린 씨앗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나를 키워준 엄마를 용서했다. 밖에서 낳은 시앗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왜 아빠는 나를 마치, 보육원에서 데려온 아이를 대하듯이 무심하게 대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려는 아빠와 엄마의 빚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혼을 결심하고 두 사람이 별거하는 과정에서 생긴 아이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 깊은 허탈감이 밀려왔지만, 지금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가족들에게,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해도 의례 그러려니 하고 살았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