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물 안기영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20.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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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물 안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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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 17:55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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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땅에도...” 민족음악 기틀 마련한 안기영(1900~80)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 /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 / 이땅에도 또다시 /
봄이온다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강남을 넘어가세“(<그리운 강남>1절)
지난해 10월 14일 서울전통음악단과 남한의 기자들을 실은 개성발 평양행 열차 안에서는 북한 유치원생들의 앙증맞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북녘땅에서 처음 듣는 남한 노래였다. 흥겨운 민요가락이 듬뿍 담긴 노래 <그리운 강남>은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석하러 10박11일 동안 평양에 머물렀을 때 남쪽사람들이 <우리의 소원>과 함께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이다. 공연장·만찬장 등 가는 곳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흘러나왔다.
남쪽에서도 이 노래는 귀설지 않다. 고무줄놀이를 연상할 수 있는 나이라면‘아 그 노래’라고 쉽게 알아맞출 수 있을 만큼 입에서 입으로 전파된 향수어린 노래이다.
남과 북에서 드물게 함께 사랑받는 이 노래의 작곡가는 안기영(安基永·1900~1980). 서양음악이 지고의 가치로 풍미하던 20년대말 30년대초 민요운동을 통해 처음으로 음악계에 민족음악의 숨결을 불어넣었으며, 우리말과 글이 빼앗겨가던 40년대에는‘향토가극’이라는 독특한 음악장르를 개척해 우리말과 가락의 아름다움을 전파한 작곡가이자 성악가인 그의 이름은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현재명·홍난파 등에 비해 낯설다.
50년 북으로 넘어간 이후 88년 복권될 때까지 그가 남한의 음악사에 남긴 커다란 자취가 흔적없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김순남·이건우 등 민족음악 2세대 작곡가와 함께 그의 업적이 몇몇 음악관계자들이 연구결과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안기영이 물려준 유산의 정리작업은 이제 시작단계이다.
안기영은 1900년 1월 9일 충남 청양군 적곡면 적고리에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아버지 안석호씨와 어머니 이경애씨 사이에서 9남매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던 그의 일화를 북한‘윤이상 음악연구소’의 계간지 <음악연구>는 이렇게 전한다.
“그가 8살 때 공주에 새로 설립된 영명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제 학교에 들어가면 창가만 하고‘민요’는 못 부르게 한다는 뜬소문을 듣고 집앞에 있던 대추나무에 올라가 밤 늦게까지 노래를 부르다 지쳐서 잠이드는 바람에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를 상하고 이마가 터져 다음날 학교에도 못갔다는 것이다”(음악평론가 황병철 <안기영을 회상하여>)
15살 때 서울 배재학당에서 악보읽기, 풍금타기,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한 그는 그뒤 배재학당에서 창가를 가르치던 김인식과 정신여학교 음악교사 김형준, 휘문의숙의 음악교사 이상준 등 서양음악 1세대 음악인들로부터 음악적 감수성을 전수받는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성악가로서 음악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세우기 시작한 그에게 3·1만세운동의 경험은 단순히 재능있는 음악가로 머무를 수 없는 전환점이었다.
경성역전에서 연희전문학우들과 만세시위를 하다 일경에 붙잡힌 그는 볼기 30대를 맞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떠난다. 상하이·광저우 등 중국 전역을 떠돌아다닌 이 시기에 그는 몽양 여운형을 만나고, 이때의 인연으로 해방공간에서 몽양과 같은 정치노선을 걷게 됐다고 한다.(조카 안광식 교수·이대 신방과)
한국인 최초 창작가곡 취입
그는 23년 귀국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정의 조교로 있으면서 이듬해 정사인이 작곡한 <내 고향을 이별하고>를 녹음, 한국인이 최초로 창작·녹음한 예술가곡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이 노래는 북한에서 <사향가>라는 이름으로 4대 애국가의 위치에 올라 있다.
26년 미국 오리건주 포클랜드의 엘리슨 화이트 음대에 유학, 28년 귀국한 뒤 32년까지 이화여전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은 그가 성악가로서뿐 아니라 민족음악 작곡가로서 독보적 위치를 개척한 때이다.
이 시기에 그는 <양산도><방아타령><도라지타령> 등 전통민요를 서양음악리는 틀 속에 살아 숨쉬게 하는 일에 몰두한다. 즉 홍난파·현제명 등 당대의 음악가들이 서양음악의 절대우위론을 공공연히 발언하고 있을 때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양악을 수용해내는 이론적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30년 겨울방학 때 이화여전 음악과 학생 14명으로 합창단을 조직, 교내발표회와 전국순회공연을 가졌을 때 그의 민요운동과 민족음악론은 대중의 뜨거운 환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그 대가로 이화여전 학생들이 기생이나 부르는 민요를 부른다며‘이화권번’이라는 비방을 감내해야 했다. 일제가 민족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조장한 민족전통음악 천시풍조가 이른바 신식교육을 받은 개신교쪽 사람들에게서 특히 거세게 나왔다.
안기영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글 <조선민요와 그 악보화>(조광·제28호 31년 5월)에서 “조선민요의 음악적 가치가 고귀함을 알리기 위해 순회음악연주회를 열려 했으나 다수의 선생들이 교수회의에서 그 모험적 음악여행에 반대했다. 그러나 마침내 실현하게 되어 의외의 대성공을 얻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지방에서도 그처럼 우리 노래에 경건한 중에도 열렬한 태도로 대하게 됨을 볼 때 감격한 눈물을 흘리며‘이제는 조선에도 생명이 온다‘고 기뻐 뛰었다“고 술회했다.
안기영의 민족음악론에 관한 중요한 논증을 밝힌 이 논문은 구전의 특성을 가지는 민요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음계와 박자에 주의해서 악보에 올려야 하는 방법밖에 없고, 반주악기로 박자밖에 못내는 장고나 일시에 1음밖에 낼 수 없는 가야금보다 피아노가 훨씬 더 기능적이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이 논문은 또 민요를 옛날의 그대로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시키려면 서양의 발전된 화성을 차용해야 풍부해진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이론을 오늘날 남북의 많은 음악가들에게 정석으로 굳어질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31년께 나온 대표작 <그리운 강남>은 그의 음악관을 잘 반영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이화여전 교수시절은 그에게 <안기영작곡집 제1집>(31년 6월)과 민요운동의 성과인 축음기관 <조선민요집 1>(31년 콜롬비아 레코드)을 낳는 등 창작욕을 자극하는 시기였지만, 가정적으로는 회오리 바람에 휩쓸리는 때이기도 했다.
제자와 염문 교수식 박탈
당시 이화여전 학생으로 노래를 잘 불렀던 제자 김현순(80·현재 북한에 생존)과 염문에 휩싸인 것이다. 이때 안기영은 이미 처자가 딸린 몸이어서 이들의 관계는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가 방인근에 의해 <방랑의 가인>이라는 소설로 발표돼 떠들썩한 화제를 모았다.
결국 이화여전 학교당국에 의해 일자리를 박탈당한 안기영이 33년 무렵 혼자 하얼빈으로 떠나자 김현순은 곧바로 뒤쫓아갈 만큼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를 가정사에 머무르지 못하게 한 당시 사회분위기는 재능있는 음악가에게서 공적 음악활동을 빼앗는 가혹한 일이었다.
36년 4월 음악평론가 김관이 월간 <음악평론>에 쓴 글은 당시 사회여론, 특히 개신교집단의 태도를 잘 나타내 준다.
“최근 상해에서 귀국한 테너 안기영 독창회가 YWCA의 반대운동에 부딪혀 취소되고 말았는데, 이런 집단운동은 고루하고 편협하다”
36년 귀국한 안기영은 경성음악학원에서 개인교수로 생활의 방편을 삼는다. 현 한양대 이사장 김연준, 전 숙대 음대 학장 한규동, 대중가수 백년설 등이 그의 밑을 거쳐간 제자들로 알려져 있다.
일제 말기는 안기영이 새로운 음악을 개척한 시기였다. 그는 전 <동아일보> 주필 설의식, 극 연연출가 서항석과 함께 라미라 가극단을 만들어 40년 <콩쥐팥쥐>, 41년 <견우직녀>, 42년 <은하수><에밀레종> 등 30년대 민요운동의 성과를‘향토가극’이라는 형식에 담아 무대에 올린 것이다.
가극형식으로는 한국에서 최초의 공연이었다. 그 가운데 <견우직녀>는 작품수준으로나 흥행으로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악보는 현재 남한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그 규모나 음악적 완성도를 헤아릴 길이 없다.
<견우직녀>의 속편 격인 <천상편>에서 직녀를 탐내는 북해용황역으로 참여한 원로 음악인 박용구씨는“일제의 언어말살정책으로 조선·동아일보가 폐간된 상황에서 노래만으로 조선의 얼을 지키자는 생각에서 향토가극운동이 시작된 것 같다”면서“견우직녀는 이런 취지에 걸맞게 아리아의 선율은 품격높은 민요적 색채를 띠었고, 극 줄거리도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 내용으로 전체 4막 2시간짜리 대작이었다”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박씨는“한국 최초의 가극이라는 현제명의 <춘향전>보다 시기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수준도 월등했다”고 평가했다.
이대 교가 작곡자로 복권
해방공간에서 그가 남긴 음악적 흔적은 몇몇 음악가 단체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음악가협회 중앙위원이자 고문, 좌파음악가 조직인 조선음악가동맹의 부위원장(45년 10월 22일_을 지낸 것으로 나타났으며, 임화의 시에 곡을 붙인 <해방전사의 노래>라는‘해방가요’를 작곡, 그의 사상적 편력을 엿보인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그러나 그는 조직적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박용구씨나 조카 남식(이대 신방과 교수)씨는 “그가 몽양과 가까워 근로인민당에 관계했다”고 전한다.
50년 9월 20~27일 안기영은“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딸 안영식)는 말을 어머니에게 남기고 작품이 담긴 가방을 들고 남쪽 땅에서 사라진다.
이후 그는 북녘에 나타났고, 두 번째 아내 김현순이 안기영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을 데리고 뒤따라 북한땅을 밟았다.
북한에서 그는 작곡생활을 거의하지 않은 채 1980년 숨을 거두기까지 평양음악무용대학의 교수로 북한 음악계의 내실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북한의 음악사가 박우용은 <조선음악사>제 1권 하편에서 안기영에 대해“일제하에서 민족음악을 기초로 음악사와 민족사에 빛나는 창작활동을 했다”고 평가하고“인민에 기초해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한 채 관념적으로 민족음악을 생각한 것”을 한계로 꼽았다.
남한의 음악학자 노동은 교수는“서양의 음악적 마음으로 체제화된 제도권 음악가 중 선율을 민요의 영감에서 한국화한 그의 업적은 아직까지 한국음악사가 서양음악사와 다름없는 이 땅의 음악현실에서 재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안기영의 딸 영식(67)씨는 오는 30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화여대 개교기념일인 이날 50여 년 동안‘음악 밖의 일’로 아버지의 작품인데도 인정을 못 받았던 이대 교가가 아버지의 작곡으로 공식 복권되기 때문이다.
[출처] 안기영|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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