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효자에게서 효자 난다.
요즘 부쩍 효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합니다. 효도에 대한 생각이 머물 때마다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은 나처럼 불효자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이 불효가 내 잘못이 아니라 내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유산을 많이 상속 받았다든지, 부모가 나에게 아무런 부담이나 짐이 없이 잘 살게 만들어 주었다면 불효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교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효성을 다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효자가 된다는 것도 무작정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효자에게서 효자 난다.’는 말처럼 효성은 부모에게서 물려받고 배웁니다. 자식이 불효자이고,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자식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 부모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예로써 또 공손하지 않았고 효성으로 지극정성을 다하지 않았다면 어찌 자식에게 효성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효성을 기대하기도 않고, 자식들의 보답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살 것입니다. 자식들의 덕을 보겠다는 욕심도 조금은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입에 발린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자식을 키우면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위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덕을 보려고 내가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말이 잘못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모는 부모의 도리를 다하고,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경제적이나 물질적으로 노후에 자식들의 도움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상속은 많이 내려주지 못할지언정 부담은 되지 않겠다고 노후대책을 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들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것도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효성의 본질이 경제적인 문제만 가지고 효자와 불효자를 가름하는 것도 정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의 상속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부모의 그러한 태도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아이들을 과외 공부시키느라고 죽을 만큼 고생하는 부모들의 한결 같은 바람이 명문대학을 가고, 취직이 잘되어서 아이들이 돈을 잘 벌어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효성의 근본은 ‘부모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에 효성에 대한 대목이 있습니다.
‘맹의자 문효, 자왈 : 무위 번지어 자고지왈 ; 맹손문효어아, 아대왈, 무위 번지왈; 하위야? 자왈 ; 생사지이례, 사장지이례, 제지이례’
[孟懿子 問孝, 子曰 :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라는 말입니다.
<맹의자가 효도에 관하여 질문하자 공자께서는 ‘어기지 않는 것’이라 대답하셨다. 번지가 수레를 몰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맹손이 나에게 효도에 관하여 묻기에 내가 ‘어기지 않는 것’이라 대답하였네.” 번지가 여쭈었다. “무슨 뜻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가 살아계실 적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그 모든 것을 예(禮)에 두고 있으나 그 근본은 ‘어기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는’ 효자의 모범을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순간도, 한 번도 어기지 않는 효자는 예수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매 순간 부모의 뜻을 어기고, 나아가 하느님의 뜻을 어기며, 내 마음이 가는대로 내 뜻에 의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하니 내가 어찌 효자가 될 수 있으며 내게서 효자가 나오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무너지면 모두 죽어야 옳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하늘이 무너져도 효자 날 구멍 있다.’ 이었습니다. 우리말에 구개음화 현상이 있어서 효자를 소자로 발음하고 그것이 와전되어서 ‘솟아 날 구멍 있다.’로 변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효자만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효자는 부모님께도 효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효성을 다 바칠 나이가 지났지만 하느님께 효성을 바칠 나이는 아직 어리기만 합니다. 나는 주님께 간구합니다. 이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이제부터 효자로 살기로 결심하오니 은총으로 도우소서. 자비의 주님.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축일3월 13일 복자 아넬로 (Agnellus)
신분 : 수도원장
활동 지역 : 피사(Pisa)
활동 연도 : +1236년
같은 이름 : 아그넬로, 아그넬루스, 아넬루스, 아녤로, 아녤루스, 앙넬로
프란치스코회의 영국 관구의 설립자인 아넬루스(또는 아넬로)는 성 프란치스코가 피사에 머물 때 직접 입회시킨 초기의 제자에 속한다. 그는 파리 수도원에 파견되었다가 원장이 되었으나, 1224년 성 프란치스코가 영국 관구 설립을 위하여 그를 대표자로 파견하였다. 그는 부제에 불과하였다. 8명의 수사들이 영국에 들어갔으나 사제라고는 리카르두스(Richardus) 한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의 회칙에 따라 돈을 한 푼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도버 해협을 건널 때 페캄프의 수도자들이 대신하여 통행료를 지불했다.
그들은 먼저 캔터베리에 그 다음에 런던에 거주지를 정하였다. 그들의 집은 낮 동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고, 밤이 되면 그들의 집이 되는 그런 형편이었다. 프란치스코의 극도의 가난 생활을 여기서도 계속하여 수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아넬루스는 도버 해협을 건넌 지 11년 되던 해, 41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의 가난 정신은 사부인 성 프란치스코와 견줄만 하였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칠 때면 늘 눈물을 글썽이며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였다. 그는 수도회의 회칙을 완화하는 움직임을 크게 반대하였다. 그는 3일 동안의 투병 끝에 “오소서, 오 감미로운 예수여” 하며 기도하는 중에 운명하였다. 그의 축일은 오늘날 버밍햄에서 성대히 거행되고 있다.
야고보 아저씨